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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논총 update

THE TOEGYE HAK NONCHONG

  •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738-3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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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33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392
퇴계학논총
33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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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退溪(퇴계) 李滉(이황)의 삶과 긍정적 성품

저자 : 송정숙 ( Song Jung-sook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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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연보에 나타난 퇴계의 삶을 욕망추구이론과 긍정심리학의 이론으로 살펴보았다. 욕망추구이론으로 퇴계 이황의 출사와 사직을 보면, 퇴계가 관직에 나아간 것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외재적 동기에서 비롯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한 것은 을사사화 이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행복한 삶을 위한 유능감, 관계, 자율성을 실현할 수 없다는 내재적 동기가 작동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퇴계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인 긍정적 성품의 6개 덕목과 24개 강점으로 퇴계의 생애를 살펴볼 때, 퇴계에게서 24개 강점을 모두 발견할 수 있었다. 퇴계는 가정적으로 가까운 지인의 연이은 죽음으로 많이 힘들었고, 혼란한 정국에서 종1품직에 오르기까지 귀양도 가지 않고, 70세의 천수를 누린 것은 그가 지닌 여러 긍정적 성품으로 인한 것이라 판단된다. 이를 통해 퇴계는 지혜와 지식, 자애, 용기, 절제, 정의, 초월의 덕목을 모두 지닌 위대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위대한 학자이자 교육자, 시인, 서예가, 관료로 만세의 사표가 될 수 있었다고 파악된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life and positive strengths of Toegye Lee Hwang in the annals of Toegye with the theory of positive psychology. Looking at the advance and resignation of Toegye Yi Huang through the desire-pursuing theory, Toegye's entry into government office resulted from external motives to pursue happiness. The desire to step down from office stems from an inherent motive. This is because they cannot satisfy the sense of competence, relationships and autonomy to realize a happy life. So, if He had the chance, he returned to his hometown to educate his students.
When looking at the life of Toegye with the six virtues and 24 strengths to overcome hardships and adversity, and the 24 strengths of Toegye, one could find 24 of its 24 strengths. In the case of Toegye, he suffered a lot from the successive deaths of his close acquaintances, and enjoyed a 70-year-old without returning to the country in confusion due to his positive strengths. He is a great man of wisdom, knowledge, humanity, courage, temperance, justice, transcendence. Therefore, it is understood that he was a great scholar, educator, poet, calligrapher, and bureaucrat who could have become the resignation of all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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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退溪(퇴계) 李滉(이황)의 漢文文章(한문문장)의 文脈(문맥)파악 기법

저자 : 박종용 ( Park Jong-yong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6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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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 논자는 退溪李滉(1501~1570)이 字義, 語義, 文義, 大義, 語勢와 文勢로 漢文文章의 文脈을 파악했던 방법을 연구하였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의사소통 방식을 반영한다. 언어가 글로 표현될 때 의미의 앞뒤 연결이나 언어가 표현해내는 것과 관련된 환경을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文脈을 통해서이다. 언어의 맥락은 소통방식에 따라 저맥락(Low-Context) 문화와 고맥락(High-Context) 문화로 나뉜다.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高脈絡문화에서는 교육을 많이 받고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다양한 층위의 내포된 메시지를 잘 이해하며 말하고 듣는 능력도 더 뛰어난 반면에,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低脈絡문화에서는 교육을 많이 받고 지적 수준이 높은 비즈니스맨들이 보다 명료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退溪는 학자가 字義를 조용히 탐색하고 체득한 후에야 비로소 문장이 나타내고자 하는 眞意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장에서 語義를 특정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을 때는 글자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또한 학자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文義를 따라 찾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 주석풀이를 세밀히 살피되 그렇다고 文義에만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퇴계는 말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大義를 음미할 때,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로 옛사람의 글을 설명해 내되 먼저 자신에게 분명하고 정연하게 한 후에 마치 옛사람과 마주 보고 말하듯이 하라고 하였다.
퇴계는 학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구절씩 음미하여 앞 글자를 볼 때는 마치 뒤 글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이 하고, 앞 구절을 볼 때는 마치 뒤 구절이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해야 語勢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글이 처음에는 광채를 발하다가 나중에 졸렬하게 이어진다면 이는 文勢가 막히게 되는 원인이므로 글자마다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앞뒤 文脈을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사물의 명칭이나 이치를 연구하고 이를 밝힐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의미의 실마리가 서로 비슷한 것과 脈絡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미루어 따져 봐야 한다고도 하였다.


This Article explored the method how Toegye Yi Whang(1501~1570) grasped the contexts of sentences through the meaning of a character(字義), the meaning of a word(語義), the meaning of a sentence(文義), the general idea of a passage (大義), an emphasis placed on a word(語勢), and an emphasis placed on sentences(文勢).
Languages reflect the communication styles of the cultures that use those languages. Context refers to the linguistic environment associated with the connection of the meanings in the text. The context of language is divided into low-context culture and high-context culture according to the method of communication. In high-context culture such as Korea and China, the more educated and sophisticated you are, the greater your ability to both speak and listen with an understanding of implicit, layered messages. By contrast, in low-context cultures such as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the most educated and sophisticated people are those who communicate in a clear, explicit way
Toegye said that scholar reading the text can catch the implicated meaning of the sentence only after quietly searching and acquiring the meaning of a character(字義). He also said that if there is no reliable basis for identifying the meaning of a word(語義) in sentence, it is better to leave it as it is without trying to change it. When scholar reads the text, he must follow the meaning of the sentences, and then look at the commentary but he should not be confined to sentence only. Also, when scholar grasp the general idea of a passage(大義), he explains the former scholars' words in the present ones and first makes himself clear, as if he were talking to them.
Toegye said, “scholar gets to the heart of each passage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and he reads the above letter as if he does not know that there is a letter below, and he reads the above phrase as if he does't know that there is a letter below, he can understand the emphasis placed on words(語勢).” And if the writing of the text starts to shine in the first place and then becomes lulled afterwards, the emphasis placed on sentences(文勢) will be clogged and then the meaning of the context should be checked so that the letters do not interfere with each other. To do this, he also said, "In reaching a point of precision enough to study the name and reason of things, scholar should consider the similarities among the clues and the origins of the contex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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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최치원 말년의 역사적 발자취 : -가야산 은둔 이후를 중심으로-

저자 : 최영성 ( Choi Young-sung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5-9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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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고운 최치원의 말년 행적은 『삼국사기』에 실린 「최치원 열전」의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여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고, 사실과 다르게 인식되어 온 것도 있다.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었다'는 것은 한갓 전설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이 政界를 은퇴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간 이후의 삶과 발자취에 대해 고찰하였다. 주요 자료로는 해인사에서 저술한 역대 화엄 고승들의 전기, 특히 『法藏和尙傳』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최치원은 가야산에 들어간 뒤 세속과의 소통의 길을 어느 정도 열어 놓은 상태에서 불교 관계 저술에 힘썼다. 賢俊·希朗등 고승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해인사 시절 그는 華嚴思想에 심취하면서도 세상을 걱정하는 憂患意識을 끝까지 지켰다. 겉모습은 유학자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불교, 특히 화엄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그는 불교의 화엄사상과 유교의 忠君愛國사상으로 쓰러져 가는 신라를 붙들어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救國과 護國을 위해 저술에 매진하였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저술은 義湘의 전기인 『浮石尊者傳』, 賢首의 전기인 『법장화상전』이었다. 최치원의 말년 행적은 학술, 종교 활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수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약한 지식인', '가야산 신선'으로 표현되는 최치원의 말년 이제 이미지는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Traces of Goun Choi Chiwon's latter years have not been thoroughly examined due to lack of research materials. Choi Chiwon's biography on Samguk Sagi is widely known. Cho Chiwon's latter years have been recognized different from the truth so far, which is 'he left the mundane world and became a hermit.' However, it is only a legend. This research examines Choi Chiwon's life and traces left after he retired from politics and went into Gayasan Haeinsa. Main research data referenced are biographies of great monks in Huayan School written at Haeinsa, particularly Beopjanghwasangjeon (法藏和尙傳). According to these data, Choi Chiwon was somewhat open to communication with the mundane world after his going into Gayasan and pursued writings on Buddhism. He actively interacted with great monks such as Hyeonjun (賢俊) and Huirang (希朗). While he was at Haeinsa, he was absorbed in Huayan thoughts but he also kept his worries about the world. He was a Confucian scholar outwardly but internally immersed in Buddhism, especially the world of Huayan. Judging that he could restore Silla where Buddhist Huayan thoughts and Confucian idea of loyalty and patriotism collapsed, he strived for writings. His most laborious writings were Buseokjonjajeon (浮石尊者傳), the biography of Uisang (義湘) and Beopjanghwasangjeon, that of Hyeonsu (賢首). Choi Chiwon spent his latter years entirely with scholarly and religious activities. Though he suffered from sickness for years, he did not give up on his life as a scholar. Images of his latter years wrongly symbolized with 'weak intellect' and 'Gayasan hermit' should be corr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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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사상사에서 '한국양명학 성립의 시원'으로서 소재 노수신(이하 소재) 평가의 기초적 논의를 목적으로 한다. 이 논문은 근현대기 한국사상사 내지 한국양명학사에서 소재가 어떻게 '記述'되어 왔고, 그 '目次'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논문에서 다루어야 할 주요자료는 해방 전후로 나누어서 10건 정도이다. '주요자료'란 전문가들이 한국 사상사-양명학사를 논의할 경우, 필수적으로 거론하는 서적이나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다룰 내용을 다음과 같다.
첫째,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형성된 '한국 양명학' 記述의 방법론에서 최초의 양명학자는 '남언경, 이요' 아니면 '장유, 최명길'이었다. 소재를 최초의 양명학자로 규정한 경우는 없었다. 둘째, 양명학의 기술 관점은, 먼저'성리학=주자학=퇴계학' 도통론의 사회 조선에서 양명학 배척은 당연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어서, 앞의 결과로,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실천적이며 우수한 학문인 양명학이 배제되어 일본의 메이지 유신 성공신화처럼 근대로 전환해 갈 동력(그 중심인물은 양명학과 양명학자)은 부재했기에 조선은 자체적으로는 근대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언의 복선이 깔려 있다. 성리학망국론이 조선사상사 또는 조선양명학사 기술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평가의 가이드라인은 '근대일본의 메이지 양명학'의 근대화 성공신화라고 생각된다.
셋째, 조선사상사 기술에서 소재는 세 방면에서 소외되었다. 소재의 사상사적 거처는 애매했다. 먼저, 주자학=퇴계학 도통론자들 이른바 주자학 긍정=중심론자들에게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거나 택당 이식의 경우에서처럼 육상산혹은 양명학 계열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성리학 망국론자의 논리에서는 양명학에 대한 탄압과 배척을 부각하면서도 그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울러 소재는 양명학자나 연구자 측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소재에게서 나흠순 사상의 수용, 육왕학의 수용 부분을 어떻게 무모순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전습록』에서보듯이, 왕양명과 나흠순 사이의 의견 차이는 소재의 사상적 강조점을 왕양명-나흠순의 어느 한쪽(양명학, 주자학)에 둘 것인지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점은 소재 이후 그의 학술이 어디로 향했는가를 묻는 이른바 '소재학의 향방'과 연관된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하여, 이 논문은 '한국양명학의 시원'으로서 소재 노수신 평가에 대한 기초적 논의를 진행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basic discussion on the evaluation of Roh susin, as a source of Korean Yangmingxue, Focusing on the Status of Rohsusin's position in the narrative of Korean Yangmingxue. There are ten major books and papers that are discussed in this paper, in Korean Yangmingxue history.
The conte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 the first Yangmyong scholars were Nam Eun Kyung and Iyo, or Jang Yoo an Choe Myung Kil in the Korean Yangming Studies, which was formed during the latter era of the Choson Dynasty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other words, Roh susin is not mentioned.
Second, There are three points of view describing Yangming. First, it was natural, in Joseon society from the viewpoint of ruling by Zhuzixue as an orthodox, rejected Yangmingxue. At that time, Toegyehak was a place of orthodox thought such as Zhuzixue. From this point of view, it is estimated that there was no Yangmingxue in Joseon society. So, it is concluded that the miracle of the Japanese Meijiyusin by the Yangmingxue did not happened. As a result of this logic, comes out, so called. the Seonglihakmangguklonja, who claim that the country is ruined because of xinglixue. 
Third, Roh Susin was alienated from three sides, that is, from the Zhuzixue, Toegye scholars, korean Yangming scholars and Seonglihakmangguklonja. 
Finally, it is a problem of whether Roh susin is a Yangmingxue or not. Because of Roh susin accepts the idea of Luo qinshun, Zhuzixue scholar. Luo opposed ideologically with Wang Yang-ming. Therefore, there are many points to discuss in order to define him as a Yangming scholar. Any consequences should be discussed with specific grounds, so the results of these discussions will affect future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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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서사의절(書社儀節) 고찰(考察)

저자 : 정길연 ( Jeong Gil-yeon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15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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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省齋柳重敎의 書社儀節에 관한 연구이다. 성재는 외세의 문화가 급격히 밀려오는 19세기를 맞이하여 전통학문을 수호하기 위해 書社를 건립하여 평생토록 강학에 전념했던 학자이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서사를 건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중암이 저술한 '漢浦書社' 記文에는 서사의 유래와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성재는 서사에서의 교육을 講經과 習禮의 두 과정으로 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수업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경전을 탐구하는 講經과정은 旬講과 四孟朔講會를 통해 경전의 뜻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특히 그는 『중용』의 '明辨' 두 글자와 '廉恥' 두 글자는 지금 시대에 학자들이 가장 급선무로 여겨야할 공부라고 강조하였다. 즉 시비를 분별하는 것과 자신의 염치를 돌아보는 공부만이 혼란에 처한 19세기 말엽의 조선 사회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또 서사에서의 習禮를 통해 儒者가 행해야할 각종 의절을 몸에 충분히 익힐 것을 강조했다. 우선 의절을 익히려면 예법에 맞는 공간과 기물 그리고 행사하는 집사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기물들은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성재는 간단하게 익힐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착안해 냈다. 예컨대 古屋制度를 그대로 나무판에 새겨서 패를 만들어 수시로 의절의 순서를 익히게 한다거나, 종이에다 향음주례를 행할 수 있는 도면을 그리고 역시 패를 만들어 익히게 하는 방법 등의 몇 가지를 고안했다. 이는 기존에 보기 드문 매우 독창적인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예법에 따라 식사하는 예절인 '書社禮食儀' 같은 것은 매우 소소한 의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절을 정식규범으로 정립하여 제생들에게 익힐 것을 당부하였다. 위와 같은 일련의 의절들을 익숙히 體行함으로 인해 외세 문화로부터 우리의 문화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Seongjae(省齋) Ryu Jung-gyo(柳重 敎)'s Seosa(書社) Euijeol(儀節). Ryu Jung-gyo(柳重敎) was a scholar who tried to keep our traditional scholarship by founding a private school or Seosa(書社) in the 19h century when this country faced a mountainous wave of foreign cultures.
Education at that school had two ways, Kanggyeong(講經) and Seuprye(習禮) that Ryu Jung-gyo(柳重敎) stressed students to thoroughly follow. Kanggyeong (講經), which means learning and discussing Chinese classics, consisted of two events, Sungang(旬講) and Samaengsak(四孟朔) in both of which meanings of such classical writings were identified and analyzed in even more detail and, thereon, problems with the times were found out. In Kanggyeong(講經), especially, there were two classical paragraphs that scholars were requested to learn about most urgently. They were 'clear discrimination[明辨] and purity with a sense of shame[廉恥].
In Seupyre(習禮), the emphasis was that scholars should master a variety of ritual manners or euijeol(儀節) enough in advance. To make the mastering easy and simple, Seosa(書社) created and used some means, for instance, a wooden block on which a traditional house is drawn and a paper on which a place where euijeol(儀節) is performed is outlined.
Through education at Seosa(書社), Ryu Jung-gyo(柳重敎) sought to keep our traditional scholarship and culture and thoroughly exclude Western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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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계 이승희의 사상적 특징에 대한 분석

저자 : 임종진 ( Lim Jong-jin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7-18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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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이승희는 항일독립운동 등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다. 그런 한편으로 그러한 실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그의 사상적 측면이 적절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된 주요한 이유는 한계의 전 생애를 통하여 사상적 근간을 이루는 성리학이 그의 부친이자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답습으로 간주해서 한계사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소홀히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계는 주체적인 자세로 부친의 성리학을 수용하였으며, 또한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일정한 사상적 특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의 사상은 특히 실천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의 사상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한계의 사상적 측면을 분석하여 그 특징을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계승, 도학적 보수성의 견지, 사회적 실천의 강조라는 세 갈래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Lee, Seung-Hee(Hangye) is a person having a significant historical meaning in relation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the Japanese Empire. However, it makes us frustrated that his thought has not been illuminated in regard to such practical activities. It's been due to the fact that his Neo-Confucian thought as the basis of his thought throughout his whole life had been under the absolute influence of Lee, Jin-Sang(Hanju), his father and teacher at the same time. However, we do not have to neglect the whole aspects of Hangye's thought by way of regarding his thought as a simple following of his father Hanju's. Hangye had accepted his father's Neo-Confucian thought with subjective attitude, and shown special features of his own thought dealing actively with the situational changes of his times. Thus, because Hangye's thought had close relationship with his practical activities, in order to rightly understand his activities it is necessary to make a through investigation into his thought. For this, in this study analyzing Hangye's thought, we examined three distinctive features of his: his succession of Lee, Jin-Sang(Hanju)'s Joori theory, his adherence to Neo-confucian conservativeness, and his emphasis on social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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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류구(琉球)의 공자묘 창건과 명륜당 건립의 의미

저자 : 이성혜 ( Lee Seong-hea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3-20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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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사실상 유가사상의 상징물이다. 명륜당 역시 동양사상과 문화의 眞髓를 전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한문학, 나아가 유가사상의 수용 여부와 관련하여 공자묘와 명륜당의 존재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유구에 공자묘가 창건된 것은 1674년이다. 1671년 겨울, 당시 쿠메무라 총역이자 紫金大夫인 金正春이 섭정인 向象賢을 경유하여 尙貞王에게 啓奏하고 허락을 받았다. 건립에 드는 경비는 왕자 이하 일반 선비들이 기부금 4천貫을 모았고, 부족분은 公費로 처리했다. 1672년에 廟地를 쿠메무라 泉崎橋頭로 정하고 곧바로 공사를 시작하여 1674년 11월에 준공했다.
유구의 명륜당은 1718년 쿠메무라의 공자묘 옆에 건립되었으며, 유구 최초의 공적 교육시설이었다. 유구 명륜당 창건의 계기는 1683년 尙貞王의 책봉사로 유구에 온 王楫의 학교설립에 대한 요청에 의해서이다. 이에 1717년 정순칙 등이 連名으로 건립을 요청했고, 다음해 건립되었다. 유구의 공자묘 창건과 명륜당 건립의 의미는 ①중국적 시스템 도입과 ②유가사상의 수용이다.
그러나 공자묘와 명륜당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44년 10월 10일 나하대공습으로 모두 불탔다. 이후 社團法人久米崇聖會가 1975년 1월 25일 현재의 위치(나하시 若狹)로 옮겨 공자묘와 명륜당 낙성식 및 부흥 후 제1회 釋奠을 시행했다. 유구 명륜당에서는 현재에도 『논어』와 한시 강좌 및 쿠메무라역사 관련 공개강좌가 시행되고 있다.


The mausoleum of Confucius(孔子廟) is a shrine where the tablet for the Chinese great saint is kept. It is in fact a fitting symbol of Confucianism. Myeongryundang(明倫堂) is a place where the essence of Eastern thoughts and culture is taught. Thus, the mausoleum of Confucius and Myeongryundang are both very important things proving the acceptance of Chinese classics and, further, Confucianism.
It was 1674 when the mausoleum of Confucius was built up in Yugu. In the winter of 1671, Kim Jeong-chun(金正春) as general manager of Kumemura asked in writing King Sangjeong(尙貞王) via regent Hyang Sang-hyeon(向象賢) to approve the construction of that mausoleum, and got the approval. Expenses for the construction were partly donated by princes and scholars of the noble class and the balance was made up from public funds. In 1672, the construction was began immediately after its site was determined. And the mausoleum of Confucius was completely built up in November 1674.
In 1718, Myeongryundang was built up by the mausoleum of Confucius at Kumemura. It was Yugu's first institution of public educ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educational establishment was primarily due to request by Wang jeup(王 楫) ho went to Yugu in 1683 as messenger who would install King Sangjeong and, indeed, realized a year after Jeong Sun-chik(程順則) made a joint petition in 1717. The construction of the mausoleum of Confucius and Myeongryundang in Yugu is meaningful in two ways, or ①introduction of the Chinese systems and ②acceptance of Confucianism. 
By the way, the two Confucian facilities were burnt to ashes by Naha air raids in Oct. 10, 1944 during the 2nd World War. Later, the mausoleum of Confucius and Myeongryundang was completely reconstructed at a present place in Jan. 25, 1975 when ceremonies celebrating their inauguration and revival and the 1st Seokjeon(釋奠) were h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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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유구의 도덕서 『육유연의(六諭衍義)』의 판본고찰

저자 : 성해준 ( Sung Hae-jun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1-24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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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諭衍義』는 중국 청대의 范鋐(자 聲皇)이 '六諭'의 내용을 해설한 권선서 이지만,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판본과 주석서가 간행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琉球와 江戶에까지 정치적 도덕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육유연의』가 유구의 도덕서로 정착된 이후 여러 시대에 걸쳐 그 의미가 확대되었고, 영향력 또한 넓어지면서 초시대적 산물이 되었다.
유구의 도덕서가 된 『육유연의』 판본은 程順則이 중국에 유학했을 때 그의 스승 竺天植으로부터 물려받은 원본을 底本으로 하여 1708년 福州에서 자비로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이 이후 유구와 일본에서 간행되는 다양한 판본의 기본이 된다. 즉 1719년 유구에서 薩摩藩을 거쳐 江戶의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주목되어 室鳩巢의 和解와 荻生徂徠의 和訓이 추가되어 1721년에 출판된 『官刻六諭衍義』와 1722년의 『官刻六諭衍義大意』가 후대에 유행한 주요 판본이다. 이들 판본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종류의 판본이 에도와 쿄토를 중심으로 각 번의 大名 및 전국 각지의 유력 독지가에 의해 거듭 간행되었다. 또 위의 판본은 明治時代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육유연의』 판본을 중심으로 그 종류와 주요 판본에 대한 해제 및 간행상황을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Though it was created by Fàn-hóng in order to promote the good with the descriptions of Rikiyu, 『Rikiyuengi』 was reproduced into a lot of different published versions and commentaries, having great political and moral effects on Ryukyu and Edo as well as China. Especially, the reproduction in that way had prospered in the different times since 『Rikiyuengi』 was firmly settled as a representative morals scripture of Ryukyu. Thus, the original book of morals became even more significant and influential, establishing itself as a masterpiece of all time.
A different published version of 『Rikiyuengi』 began as a publication that Teijyunsoku made out in Fuchou at his cost in 1708 based on the original of the morals scripture of Ryukyu, which he received his master Chiku-tensyoku while studying abroad in China. The first different version became, since then, the very basis of many other versions that were put out in Ryukyu and Japan. Especially, it was delivered from Satsuma Domain in Ryukyu to Edo's Shogun Yoshimune Tokukawa in 1719 and, after that, with new parts added, which were Muro-kyusou's Japanese and Ogyu-sorai's Japanese reading, became a governmental release in 1721, or 『Kwankak Rikiyuengi』 that became even more popular. Anyway, a number of different published versions including the popular one continued to be put out with supports from Daimyou, especially at Edo and Tokyo, and from leading benefactors around Japan. Those versions were later introduced to Joseon during the Meiji period when it was Japanese colony. From a lot of different published versions of 『Rikiyuengi』, thus, this study selected some major ones and then examined in an organized way how they were bibliographed and how they were put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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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군자(君子)와 군자왈(君子曰) : -고대 중국에서 이상적 인격 전형의 기원에 관한 연구-

저자 : 임형석 ( Lim Heng-seok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3-26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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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덕 윤리학의 이상적 인격 전형인 君子의 기원에 대한 본고의 탐구는 고대 중국의 초기 문헌에 나타나는 유의미한 내용을 문헌학적으로 일별하여 유형화, 개념화시킨 결과를 얻었다. 여기서 君子개념의 등장은 孔子인 것이 확실하며 荀子 및 荀子학파가 정립한 것이라는 결론도 아울러 얻을 수 있었다. 君子개념의 등장과 정립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고대 巫史에서 유래한 史官전통=역사 문학의 전통을 꼽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春秋左傳』 및 관련 歷史書등을 일별하면서 계통화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周易』 經傳에 등장한 사례를 들어 君子曰형=史評이 君子형으로 일반화되는 양상을 제시하여 역사 문학에서 윤리학으로 변화 과정이 인류의 지적발전에서 동일한 유형으로 나타난다는 점까지 밝혔다.


This essay aims to search for the origin of Chinese concept on the ideal character which appertains to the virtue ethics. It is inevitable for finding a concrete result to check into the significant contents bibliographically. Through the analyzing of two different meanings in the same word(君子) of many ancient texts, it can be now presenting two questions: Who is Great Man(君子)? Who is the Historian(君子) in the Historian says(君子曰)? It considers that these are definitely true: Confucius was the first thinker who invented Great Man concept as the ideal character, and his successor Xun-zi was the co-founder with his school. It may also considers that Confucian invention and Xun-zi's establishment were affected by the shamans' culture in the ancient Chinese courts who took charge of the divining and historiography at once. It regards the shamans' culture as the historiographer's tradition or the epic tradition. It continues to analyze the Book of Annals and the Book of Change, so determines that the Historian of the ancient history criticism as the form of the Historian says turns to Great Man. It might follows the general rule which the history literature switches to the ethics in the ancient world.

KCI등재

10조선후기 고증학(考證學)과 염약거(閻若璩)

저자 : 신재식 ( Shin Jae-sik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간행물 : 퇴계학논총 3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1-29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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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閻若璩(1636-1704)의 考證學이 조선후기 경학에 미친 영향력을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조선후기 지식인은 당시 淸나라의 고증학보다는 주자학과 관련이 있는 明末淸初의 고증학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염약거의 고증학 수용이다. 염약거의 학술서는 『尙書』ㆍ『四書』 등 경전에 대한 기존의 의혹과 오해를 고증학적 연구방법으로 해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조선 지식인은 『四庫全書簡明書目』ㆍ毛奇齡ㆍ徐乾學ㆍ魏禧 등의 저술을 통해 염약거와 그 저술의 존재를 파악하고는 청나라를 왕래하는 사신을 통해 관련 서적을 입수한다. 『尙書古文疏證』 8책ㆍ『四書釋地』 4권ㆍ『潛邱札記』 6권 등이 그것이다.
조선후기 지식인이 주목한 염약거의 고증학설은 逸書復元, 言語慣習, 文物制度, 古文僞作, 朱說批判이다. 염약거는 금본 『尙書』가 고본 『尙書』와는 그체제, 구성, 문자 등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輯逸과 校勘을 통해 고본 『尙書』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염약거는 경전과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언어관습과 문물제도 등이 경전의 문구를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는 점을 간파한다. 또한 염약거는 주자가 의혹한 이래로 학계의 논란이 된 『古文尙書』의 위작을 확정한 바 있는데, 조선 지식인은 주자의 정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이를 수용한다. 끝으로 염약거는 여느 명말청초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가의 실천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 근거를 제공하는 경학 연구에 전념하는데, 특히 주자설의 실증적 오류를 비판하고 보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다.
조선 지식인은 대체로 염약거의 고증학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단지 비평하거나 참고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발전시켜 새로운 논의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염약거 고증학 수용 양상은 조선 지식인이 주자의 실증적 학문태도를 이해하고 일부 실증적 결함을 보완하여 주자학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참고하기에 적절한 학설로 인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aims to research the influence of yánruòqú(閻若璩)'s bibliographical study in late Chosun Dynasty(朝鮮後期). Orthodox-neo-confucianists of the Joseon Dynasty had a great interest in a bibliographical study of late Ming and the early Qing dynasties because it related to Orthodox-neo-confucianism(朱子學).
Embracing yánruòqú(閻若璩)'s bibliographical study can be an example. The purpose of him study is to explain academic questions of chineses classics. Joseon's neo-confucianists often saw scholarly tomes of late Ming and the early Qing dynasties on yánruòqú(閻若璩)'s bibliographical study, and purchased his scholarly tomes from envoys of Qing dynasties such as chángshuguwenshuzhèng (尙書古文疏證), Sìshushìdì(四書釋地), qiánqiuzhájì(潛邱札記).
After researching yánruòqú's influence of late Chosun Dynasty. we can see the following facts. Excavating and restoring complete books of chineses classics based on thorough historical research. Sheding light on important clues of curation of Confucian texts such as cultural practices, languages, customs. Making up for the weak points in theoris of Orthodox-neo-confucianism through his theoris of chineses classics. Joseon's neo-confucianists responded positively to theoris of yánruòqú(閻若璩)'s bibliographical study, and developed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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