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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9)~36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397
한국실학연구
36권0호(2018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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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호개방 이전 동아시아의 경세제민학(經世濟民學)

저자 : 이헌창 ( Lee Hun-chang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3-117 (9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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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세제민학은 춘추전국시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가제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성립하였다. 유학은 그 중심 학풍이었고, 법가사상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경세제민학은 주변 동아시아국가로 전파되었다. 16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대두한 경세치용학은 시장의 성장과 유럽 과학·기술의 자극을 받아, 功利의 경제합리주의에 입각한 정책과 제도개혁안을 제시하고 유럽 과학·기술의 물리를 수용하여, 경세제민학의 수준을 높였다. 실학의 중심 내용은 경세제민학이고, 경세치용학은 근세 실학으로 평가할 수 있다. 18세기까지 조선, 중국 및 일본이 도달한 경세제민학의 수준은 대등하였다. 18세기 일본의 근세적 수준의 경세제민학은 조선과 중국보다 풍성하게 전개되었고, 19세기 그런 현상은 심화되었다. 기록을 중시하는 중국문화의 압도적 영향력, 중국적 세계질서로부터 벗어난 자주성, 幕藩체제의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제공한 평화와 문화적 통일성·다양성 및 경쟁의 풍토, 시장의 다이나믹한 발전, 그리고 지식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집단의 출현이 일본 경세제민학의 발달을 낳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명나라 멸망이 경세치용학을 낳은 중요한 계기이나, 청나라 안정은 그 쇠퇴를 낳았다. 조선의 사대부가 유학, 그중에도 주자학으로 순화된 정치와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에 성공하여, 사상의 폭이 가장 좁았던 것은 경세제민학의 발달을 저해하였다. 베트남은 다른 3국만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는데, 국가 독립과 더불어 기록문화의 전개가 늦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경제학'이란 용어가 일찍 성립하였지만, 법칙을 다루는 이론체계를 갖춘 근대 학문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여서 science로 번역될 수 없고 담론(discourse)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경세제민학은 근대 학문을 창출하지는 못하였으나, 서양의 근대 학문을 수용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Discourses on statecraft appeared and developed, as state institutions developed in Ancient China. Confucianism was their central component, and School of Law played an important role. Chinese discourses on statecraft were disseminated to surrounding East Asian countries. After the 16th century, discourses on statecraft of East Asian countries developed so as to suggest market-friendly policy and institutional reform and accept European science and technology. Growth of market and stimulation of European civilization raised the level of discourses on statecraft. The level of discourses on statecraft reached by Korea, China, and Japan until the 18th century was comparable. Tokugawa Japan's discourses on statecraft achieved remarkable development, owing to peace and cultural unity provided by the centralized feudal state system, independence from the Chinese world order, open-mindedness to European science and technology, dynamic development of market, and many specialty scholars. Vietnam did not reach the level of the other three countries due to the delay of development of record culture with national independence. The discourses on statecraft in Asia did not create modern science which has theories to explain laws, but provided the basis for accepting Western moder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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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세기 베트남의 경세제민(經世濟民) 사상(思想)

저자 : 완재동 ( Nguyen Tai-dong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19-14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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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18세기는 변화와 무질서가 교차했다. 남북의 왕조로 나뉜 당시 베트남의 사회 모순은 화해할 수 없는 시기로 진행하고 있었다. 규정의 완화로 과거제는 퇴화되었으며, 유학자와 관리 가운데 일부는 과거 시험의 교재 판매자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은 다음 단계의 발전을 견인할 표준적인 규정을 만들지 못하고 사회악은 증가하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의 총제적인 위기에서 위대한 의지와 진정한 재능을 가진 많은 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경세책을 제시했다. Cu Trinh (楨居楨, 1716-1767), Le Huu Trac (1720-1791), Ngo Thi Si (1726-1780), Le Quy Don (黎貴惇, 1726-1784), Ngo Thi Nham (吳時任, 1746-1803), Nguyen Du (1766-1820), Pham Dinh Ho (1768-1839) 등은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18세기 베트남 사회에 나타나는 세 가지 가르침 또는 '세 가지 가르침의 동반'의 결합에 대한 경향은 왕실과 몇몇 유학자들이 유일한 이데올로기, 즉 유교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학자들은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와 세속주의에 대한 면밀한 관심 외에도 그 실천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독창적인 생각, 순수한 대화, 고통과 공허의 가르침을 고수했다. 지식과 행동의 관계는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또한 그들은 사회의 개혁은 인치와 법치의 결합에 의존해야 하지만, 그 전제 조건은 법 제도의 구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재능있는 학자의 선발, 훌륭한 관료의 선임, 조세 제도의 개혁, 호적 제도 개혁 등 민의를 반영한 많은 생각과 정책을 제시했다. 군사와 도덕에 대한 효율적인 정책 제안도 이어졌다. 그들은 정권을 최적화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국가시스템의 개혁과 인재들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정책의 구현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있었다.


The 18thcentury Vietnam was full of changes and disorder. The contradiction between Dang Trong (the South Vietnam) and Dang Ngoai(the North Vietnam) had entered an irreconcilable period.With the relaxation of regulations, the then system of state examinations has been degenerated, sometimes examinations became a market, some Confucian scholars and some officials became buyers and sellers of writing. Besides, the social trust was faced with serious crisis when several religious parts became superstitions, there was regression of some social standards and increasein social evils, until the Tay Son uprising and then the Nguyen Dynasty that took Vietnam to another stage of development.
Facing that critical situation of the nation, a large number of Confucian scholars who had great will, real education and true talent had suggested their own ideas to resolve those problems. Some typical figures included Nguyen Cu Trinh (阮居楨, 1716-1767), Le Huu Trac (黎有晫, 1720-1791), Ngo Thi Si (吳時 仕, 1726-1780), Le Quy Don (黎貴惇, 1726-1784), Ngo Thi Nham (吳時任, 1746-1803), Nguyen Du (阮攸, 1766-1820), Pham Dinh Ho (范廷琥, 1768-1839), etc.
The tendency towards the combination of the three teachings or 'the accompaniment of three teachings' showed the fact that the royal court and some Confucian scholars did not entirely rely on one and only ideology namely Confucianism. Although Vietnamese Confucians in the 18th century still considered Confucianism the orthodox one, almost none of the m had negativ eattitude towards other religions and ideologies.
Beside the comprehensive study on history and the close attention to the Confucian classics, the then Confucian scholars attached special importance to the practice, opposing dogmatic thinking, the pure conversation (淸談) and the teaching of suffering and emptiness (苦空). The relationship between knowledge (知) and action (行) became one of the most important issues arising for the benefit of the people and the nation.
One of the issues strongly emphasized by Confucian scholars of the reformation faction was the very importance of the law. The reformation of the society must rely on the combination between rule of humanity (仁治) and rule of law (法治), but the prerequisite was the execution of the legal system. Only the rule of law could end the disorder, maintain the morality and become tools for the protection of the personality.
The more chaotic the society was, the more urgent the attention to the people became. The conservative institutions had bared serious mistakes. Facing that situation, the Confucian scholars had suggested a lot of ideas and policies that reflected the people's heart to pacify the people, such as selecting talented Confucian scholars, appointing good officials, reforming the tax system, changing the family register system, etc. As regards military, they suggested the policy of 'sending soldiers to the peasantry' (寓兵於農), and tried to operate the policy of 'using morality to relax the people' (以德寬民). The most important key to optimize the regime was the very reformation of the state examination system,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policy of selecting the ta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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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황종희 경세사상과 그 영향

저자 : 손보산 ( Sun Bao-sha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49-1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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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경세사상은 명말 경세학풍이 청대초기로 이어지고 발전한 것으로, 전체 경세학풍의 최고성과를 대표한다. 청 왕조가 '중국'의 주인이 되는 급변하는 정세의 자극을 받아, 그의 『明夷待訪錄』은 중국의 정치 전통에 대해 종래에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반성하고 비판했으며, '自私自利'의 정치사회 기원론, 君主職能說, 君國相分說, 治法優先說등의 변혁이념뿐만 아니라 제도로써 권력을 제약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로써 청말의 변혁에 원동력을 부여하고 이후에 유입된 서양사상과 만나서 장대한 중국 근대사조를 형성하였다.


Huang Zongxi's practical thought is the highest achievement of the practical trend of thought in Late Ming and Early Qing Dynasty. He makes an unprecedented and profound reflection and criticism on China's political tradition, puts forward a series of creative ideas of change and restricting power by system.
His practical thought provides the motive force for the change in the late Qing Dynasty, and merges with the western thoughts later, forms a magnificent trend of thought in moder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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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유수원(柳壽垣)의 관제개혁론(官制改革論)에 대한 검토 -권력구조 문제를 중심으로-

저자 : 송웅섭 ( Song Woong-sup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85-22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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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유수원의 관제개혁론을 권력구조의 관점에서 검토한 연구이다. 유수원의 관제개혁론의 핵심은 청요직 당하관들이 공론의 위상을 업고 삼사 언론을 매개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반 기제들을 혁파함으로써, 16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청요직 당하관 중심의 관제 운영과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점들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유수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連啓, 避嫌과 處置, 署經, 그리고 이들상호간의 연동 등 언론을 구조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 동시에 통청권까지 장악할 수 있는 관행들의 폐지를 촉구했다. 그리고 주론자 - 전랑 - 홍문관 - 대간 등으로 서열화 된 청요직 내부의 계서질서를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아울러 삼사 언론이 공론을 온전히 형성할 수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이유에서 삼사 언론의 공론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했다.
한마디로 유수원의 관제 개혁 구상은 청요직들에게 항시적인 언론의 활성화와 통청권을 보장해 주었던 장치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a study which examines the Reformation of the bureaucracy of Yoo Soo-won in terms of power structure. At the heart of Yoo Soo-won's bureaucratic reform theory was the reform of the bureaucratic operation centered on the Cheong'yo-jig(淸要職) dangha-gwan(堂下官) and the problems caused by it. Yoo Soo-won presented three ways to make this possible. First, he called for the abolition of various practices that would enable not only the press to be activated, but also the tong'cheong-gwon(通淸權) to be grasped. Second, he argued for the abolition of hierarchy formed inside the Cheong'yo-jig. Third, he denied the position of the press of sam-sa as a public opinion because the press of sam-sa was exposed to an circumstances in which public opinion could not be fully formed.
In short, Yoo Soo-won's plan for the reform of the bureaucratic system was to weaken the powers they have by eliminating the devices that have ensured the constant activation of the press and the right to grasp the tong'cheong-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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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농암 유수원의 관제(官制)개혁안과 대신론(大臣論) -삼공(三公)·육경(六卿)의 직제(職制) 개편과 역할론을 중심으로-

저자 : 김경래 ( Kim Kyung-r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27-2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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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농암 유수원의 관제 개혁안, 특히 최고위 관료인 大臣에 대한 개혁안에 초점을 맞추어, 그 특징을 조선 관제 개혁안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관제 운영에서 일원적 위계질서의 확립을 중시한 그는, 16∼17세기 조선에 새롭게 등장한 비변사와 주론자가 그것을 해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비변사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폐지 주장은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대부들사이에서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변사와 문벌의 문제를 연결한 점, 그리고 비변사 폐지 이후에 대한 그의 구상은 매우 개성적인 것이었다. 주론자에 대한 상세한 비판 역시 다른 이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내용이었다. 유수원은 삼공의 권위와 권한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의정부서사제의 복구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무는 육경이 총괄하도록 하되, 그들의 지위는 철저하게 삼공의 위계 아래로 한정하였다. 이를 통해, 삼공의 권위와 권한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권력 남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또, 실무를 다루는 육경이 국왕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왕권 강화로 이어지는 상황도 방지하고자 하였다.


This study focuses on Nongam Yu Suwon's reformation plan for the high-ranking ministers, in order to specify the traits of his vision of government reformation as an extension of the conventional tradition of government reformation plans. Stressing on establishment of hierarchic unity in management of the government system, Yu harshly criticized the 16th-to 17th-century emergence of Border Defence Council (Bibyeonsa 備邊司) and the “opinion makers” (juronja 主論者) among the young officials, for undermining the conventional structure of authority. The criticism leveled at the Border Defence Council for causing disorders to manage the government offices as well as the calls for its abolition was commonly shared since the 17th century by Joseon scholar-officials. However, Yu Suwon's idea was unique in terms of associating Border Defence Council with problems of the powerful bureaucratic lineages and his post-abolition plans. Despite the necessity of restoring authority of the three state councilors, he clarified his opposition to restoration of the bureaucratic system centered by the state councilors. To support his argument, he drew upon the traditional discourse that a prime minister should devote himself to supporting the king without intervention in detail, so that the restoration of the councilors' authority will not lead to precautions for the councilors' abuse of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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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농암 유수원의 진상제(進上制) 인식과 개혁 구상

저자 : 전상욱 ( Jeon Sang-wu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61-29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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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물은 臣民의 국왕에 대한 존엄이 반영된 의례화된 선물이다. 이로 인해 대동법 시행 이후에도 진상물의 현물상납방식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진상물의 현물상납방식 유지로 인해 각종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수원은 『우서』에서 이에 대한 개혁구상을 제안하였다. 그는 진상제를 대동법과 관련하여 인식하였고, 임토작공 측면에서 진상제를 인정하였다. 다만 과도한 진상물을 비판하면서, 진상물의 경감을 통한 節儉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상설점포를 설치하여 지방군현에서 진상물을 전담 조달하는 공인을 둘 것을 제안하였다.


The Donation System(進上制) is a ritualized gift given to the king by the people. As a result, it was paid in kind after the enforcement of the Daedong system(大同法). So The Donation System(進上制) has various problems. In this regard, Nongam Ryu Soowon presented the reform idea in the 『Woo seo』. He recognized The Donation System(進上制) in relation to the Daedong system(大同法). And he recognized he Donation System(進上制) in terms of imtojakgong(任土作貢: tribute collection based on the local products). However, he criticized luxury and emphasized the reduction of The Donation System(進上制). And also set up stores in the provinces and fostered Gongin (貢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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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우서(迂書)』 토지제도의 현실성 연구 -반계수록·전제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저자 : 함영대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91-31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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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농암 류수원의 『우서』 가운데 특히 토지 제도와 관련한 내용에 주목하여 그 현실성을 검토한 것이다. 경세론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시행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정책이다. 그러므로 그 의견의 고원함과 비근함, 완급을 차치하고서라도 당대 현실에 대한 문제점의 진단과 해결방안의 제시가 가지는 의미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토지문제에 대한 기본 방향인식과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농암의 토지 제도는 상당히 개량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토지 정책의 문제는 토지소유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농암은 농업에 대한 중시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국가의 조세수익을 배가할 수 있는 상업의 발달을 우선 고려하고, 그 부수적인 것으로 농정을 기획했으므로 그 사고의 방향에 대한 검토는 좀 더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부안의 우반동에 우거하며 거의 20여년을 民의 생활을 관찰하면서 작성된 『반계수록』의 설계와 대비되는 정책적 기획으로서 『우서』의 성격은 그 자체로 좀 더 달리 볼 여지가 있다. 문명의 전환기에 농정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꿈꾸었던 반계와 실현 가능한 방법으로 선진기술을 벤처마킹하여 당대의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해 보려했던 농암의 입장은 그 기본적인 처지와 상황에서부터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중국에 대한 인식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점은 후고에서 다시 검토한다.


This article examines “Woo Seo(迂書)” written by Nongam(聾巖) Yu Su-won (柳壽垣) with focus on the realities of land policies covered in the book. Since Theory of politeness, the theory of governance, is a policy proposed in consideration of enforcing it in reality, one cannot help digging into the diagnosis of the practical issues back then and the implications of their solutions although the nobleness, commonness and the urgency of such policy opinions are set aside.
The Nongam's assumption on the basic directional awareness and concrete methodologies with regards to land issues shows the significantly improved aspect, which cannot be fundamentally resolved without addressing the land ownership issues. However, it is not that Nongam didn't think much of agriculture but he placed higher priorities on development of commerce that may double the national tax revenue with the agricultural administration planned and coordinated as its subsidiaries, which necessitates more flexible approach in setting the direction of thought.
In addition, one needs to take different paths in evaluating 'Woo Seo” written as a policy planning in contrast to the design of “Bangyesurok(磻溪隨 錄)” written while Bangye stayed in Buui Woobandong and observed the life of common people for nearly two decades.
Bangye who envisaged a fundamental transformation of agricultural administration in the turning point of civilization is deemed different, in terms of basic direction and circumstance, from Nongam who sought to promote the quality of contemporary life by learning and adopting the advanced technologies at the time. This is also clearly evident in their different perceptions of China, which is to be covered in follow-up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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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남(湖南) 소론(少論)의 근거지(根據地) 모산촌(茅山村) 연구(硏究) -문화유씨(文化柳氏) 유수원(柳壽垣) 가계(家系)를 中心으로-

저자 : 김승대 ( Kim Seung-d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21-383 (6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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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호남 소론의 근거지이자 호남실학의 또다른 산실로서의 영암 모산촌에 대한 기초 연구작업의 일환으로 쓰게 되었다. 조선후기 중상주의 실학의 선구인 농암 유수원을 배출한 토대가 된 모산촌은 문화유씨 중시조인 하정 유관과 아들 유맹문으로부터 비롯되어 유맹문의 현손인 유용공과 유용강이 입향하면서 집성촌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기축옥사로 가문이 큰 타격을 입었으나, 명문가 반남박씨와 연혼 등을 통해 중앙에 진출하며 성장하였다. 유수원의 고조인 유준은 분비재 강학활동을 통해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영팔정을 중수한 유상운과 그의 아들 유봉휘대에는 호남 소론의 중심 근거지이자,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유봉휘가 역적으로 죽고, 1755년 나주괘서사건과 깊히 연루되면서 모산촌은 쇠락하였다. 이 사건과 연관하여 가문의 후예인 농암 유수원은 처형되었고, 사위인 원교 이광사는 유배되었다.


The thesis is the study on the Mosanchon as the base in Honam-Soron. Also, the Mosanchon is regarded as the cradle of Honam Silhak. Now the Mosanchon is located in Yeongam, Jeollanam-do.
The Mosanchon produced a representative Silhak scholar, Yu Su Won in the late of Joseon Dinasty, His ancestor is a family of Munhwa Yu and the Yu Gwan, a provincial governor in Jeolla-do. Yu Yong gong and Yu Yong gang returned to their native place and made the Mosanchon the gathering of Munhwa Yu. It was Yu Jun that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the Mosanchon. He founded an educational institution, Bunbijae.
Afterward, the Mosanchon turned out two ministers called Jeongseung, who were Yu Sang un and Yu Bong hwi, respectively in Sukjong and Gyeongjong of Joseon. They were a father and son. However, in 1755 Eulhaeoksa(乙亥獄事) stroke the Mosanchon. It was counterattack of Soron against the ruling power, Noron and occurred in King Yeongjo of the Joseon Dynasty, in Naju, Jeolla-do. Nevertheless, Soron was considered to commit treason against the Joseon Dynasty and completely annihilated.
The Mosanchon is also wife's family of Lee Gwang sa who was exiled to Sinjido and mother's parents' home of Lee Geung ik and Lee Young ik== From now on, it is expected to be researched in various aspects on the Mosanchon as the base in Honam-Soron and the cradle of Honam Sil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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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남실학의 전개양상과 성격

저자 : 하우봉 ( Ha Woo-bong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85-445 (6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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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실학은 경기지역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자는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며 처음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의 비조인 반계 유형원은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생애 후반기 20년간을 전라도 부안에서 보내면서 『반계수록』을 완성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실학은 그 발생에서부터 호남과의 연관성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조선후기 실학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다산의 사상이 18년에 걸쳐 결실을 맺은 곳은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이었다. 근기실학과 호남실학은 반계에 의해 일차 연결되었고, 다산에 의해 다시 집대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호남은 조선실학의 산실이자 결실을 이룬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기실학과 호남실학은 초기 형성과정에서부터 깊은 연관성이 있고 다산에 이르기까지 교류가 이어졌지만, 동시에 다른 점이 있으며, 각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양자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호남실학을 기호실학이라는 큰 범주에 넣어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독자성을 밝히는 것이 실학의 내포와 외연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자의 특징을 비교해 보자면,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근기실학은 청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사조인 고증학과 서양과학을 통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들은 북학과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육경고학, 양명학, 고증학 등을 발전시켰고, 보다 근본적인 체제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또 서울을 근거지로 하는 북학파는 이용후생을 중시하며 도시의 자영수공업자와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중상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에 비해 호남실학은 전라도라는 지역적 배경과 풍토를 바탕으로 토착성과 자생성이 강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호남실학은 농촌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에 독립자영농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중농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호남실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박학을 지향하는 백과전서적 면모이다, 반계를 비롯해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 등은 모두 성리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당대의 박물학자 내지 백과전서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가 보여준 백과전서적인 박학성은 중요한 실천적 사상운동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의 학문은 실용성과 이용후생을 지향하고 있으며, 또 국학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경준과 황윤석, 위백규의 지리학, 언어학, 역사학, 자연과학 등의 연구는 탁월한 성과로서 國學분야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the practical studies was developed around Gyeonggi and Honam area. Both of them are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and have influenced and developed from the beginning. Although Yu Hyongwon(柳馨遠) was born in Seoul, he spent 20 years of his life in Jeolla-do Buan where he completed the “Bangyesurok(磻溪隨錄)”, Therefo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silhak can not distinguish the connection with Honam area from its occurrence.
On the other hand, the late Chosun dynasty silhak was fruitful by being confined by Chung Yakyong(丁若鏞). Jeolla-do Gangjin is the place where his ideas have been fruitful. In this respect, it can be said that Honam was the living and fruitful area of Chosun dynasty silhak.
Geungi Silhak(近畿實學) and Honam Silhak(湖南實學)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since the early formation process, and there have been exchanges from the beginning. But at the same time, they are different and have different characteristics.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equate them. Particularly, it is problematic to recognize Honam Silhak as a large category of Giho Silhak(畿湖實學). Identification of its identity will help expand the implications and outlook of the Silhak.
To comp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Geungi Silhak centered on Seoul and Gyeonggi-do are open to nature through the western science introduced from the Ching China(淸). They positively embraced new ideas and introduced the theory of systemic reform. In addition, the Bukhakpa(北學派) based on Seoul had a mercantile character to protect the city's self-employed craftsmen and merchants. On the other hand, Honam Silhak has a tendency to be indigenous based on Jeolla-do's regional background. Honam Silhak scholars tried to reform the contradictions of rural society, so they were strong in order to protect the interests of independent self-farmers.
Another characteristic of Honam Silhak is the encyclopedic aspect that aims for erudition. Yu Hyongwon, Shin Gyungjun(申景濬), Hwang Yunseok(黃胤錫), Wi Baekgyu(魏伯珪) left a vast amount of writings. As an encyclopedist, they can be evaluated as a practical ideological movement. In particular, their studies are aimed at practicality and welfare, and also have an important meaning in that they lead to Korean studies.

KCI등재

10반계 유형원의 국가재정 개혁구상과 녹봉제 실시론

저자 : 송양섭 ( Song Yang-seop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47-495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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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公田으로부터 확보한 經費를 量入爲出의 원칙하에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나누어 편성한 후, 당시 도별로 확대 시행되고 있던 대동법의 제도적 원리를 국가재정 전반에 확대 적용하여 운영하고자 했다. 중앙재정에는 왕실재정의 축소와 각급기관의 수요품 조달을 위한 적정 예산을 책정한 것 외에 녹봉으로 표현되는 각종 인건비성 경비가 대략 7할에 육박했으며 대대적인 확충이 가해진 지방재정의 경우에도 인건비성 경비는 반 이상을 차지했다. 관료에 대한 보수체계 개혁과 함께 실무와 잡역을 담당한 吏隷에 대해서도 각급기관별로 적정의 정원과 녹봉이 책정되었다. 주요 행정기관은 물론 鄕所廳·將官廳·學校·鎭·驛·漕倉등의 기관에도 녹봉과 운영비 등 공식적인 예산이 배정되었다. 유형원의 국가재정개혁구상은 공전제를 통한 대대적인 세수확충을 통해 국가재정의 건실함을 꾀하고 官僚·吏隷등의 인력에 대한 적정의 녹봉을 정규예산에 편성하여 획기적인 처우 개선을 이룸으로써 이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직무에 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적인 내용을 구성했다.


Yu Hyongwon sought to apply the systemic fundamentals of Taedongbop, which was conducted in increasing numbers of Provinces at his time, to the whole state finance. To manage the state finance, Yu drew up the expenditure secured from Kongjon (公田; public lands) into the central finance and the local finance, under the principle of Yangibwich'ul (量入爲出; Measuring the Income to Make the Expense). In the central finance, other than reducing budget for the Royal Family and setting proper budget to procure the supplies for offices in various levels, a variety of personnel expenditure articulated as 'Salaries' approached almost 70 percent, and in the local finance, which was expanded in a large scale, the personnel expenditure accounted for more than half. With the massive reformation of remuneration system for the bureaucrats, the quota and salaries for I'ye (吏隷; clerks), who were in charge of practical and miscellaneous services, were arranged in moderate numbers. Official budget, which includes salaries, operating costs, and more, were allotted to main administrative organizations, as well as agencies such as Hyangsoch'ong (鄕所廳; Local Yangban Association for Supervision of Local Clerks), Changgwanch'ong (將官廳; Office for Local Military Officers), Schools (學校), Military Garrisons (鎭), Stations (驛), and Granaries (漕倉). Yu Hyongwon's planning on reformation of state finance was composed of two key points ; first, Yu designed the soundness of the state finance by expanding tax revenues on a broad scale through the Kongjon system, and second, he pursued the stability of the personnel like bureaucrats and clerks by achieving innovative improvements in their treatments through compiling their optimal salaries in the regular budget, to assure the performance of their du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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