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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9)~38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418
한국실학연구
38권0호(2019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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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학적 지식과 저술의 형태―『우서(迂書)』·『잡동산이(雜同散異)』·『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저자 : 임형택 ( Lim Hyung-tea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4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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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19년 9월 21일에 '실학의 문헌학적 저변 검토'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모임에서 기조 발제했던 논문을 수정, 보충한 것이다. 실학관계의 문헌 3종을 분석대상으로 잡았다.
1)유수원의 『우서』를 실학의 각성과 개혁 논리로 인식
2)안정복의 『잡동산이』를 지식의 탐구와 박학으로 인식
3)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士의 현실과 삶의 총체적 설계도로 인식
위와 같이 각각 관점을 세워 분석하여 내용을 파악하고 각기 실학적 성과를 평가하였다. 특히 『임원경제지』에 비중을 두었던바 한국실학사의 큰 두 경향으로서 '경세실학'에 대비되는 '생활실학'이라는 개념으로 규명, 새롭게 부각을 시킨 것이다.


This paper is the revision of my key-note speech in the conference, the Review of Shilhak's Bibliographical Base at 21st of September 2019. I classify the main characteristic of three representative works of Shilhak. First, Ryu Su-Won's Wuseo 迂書is the logic for renovation and awakening of Shilhak ; Second, An Jeong-Bok's Japdongsani 雜同散異is the seeking for wide knowledge ; Third, Seo Yu-Gu's Imwon kyungjeji 林園經濟志is the overall blueprint for inner life and outer world. Among three works, I put emphasis on the third in that it is the significant outcome of livelihood Shilhak which is the counterpart of the mainstream, so-called statecraft Shil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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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서』에 나타난 화폐유통론의 성격-화폐와 상점의 운영을 중심으로-

저자 : 유현재 ( Yoo Hyun-j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3-6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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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류수원의 상업과 화폐에 대한 인식을 조선후기 경제에 대한 큰 틀 속에서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그동안 경제사 연구에서 상업과 화폐는 조선 후기 사회를 변동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주목받아왔다. 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결과로 혹은 발전의 동력으로 상업과 화폐의 확대에 대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전근대 상업과 화폐는 오늘날의 이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발전하고 있다. 특히 전근대 상업과 화폐는 국가의 의도와 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하며 시장의 법칙과는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의 경제법칙으로 과거의 경제적 흐름을 이해한다면 정확한 현상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류수원의 시각을 통해 나타난 상업과 화폐의 흐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후기의 경제적 흐름을 확인해 보았다. 특히 류수원은 상업발전과 화폐의 등장을 생산력 발달과 그에 따른 결과물로 이해하지 않고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균등하게 부를 분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상업, 상점 그리고 화폐의 역할은 발달에 따른 결과물이 아닌 정부의 정책적 수단이며 이를 정확하게 간파한 류수원은 국가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해 이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우서』에 의견을 표출하고 있다.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도구로 상업과 화폐에 주목함으로써 당대 경제적 구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류수원의 저작에서 제공하고 있다.


In this paper I scrutinize how Yu Suwon treats the economic argument and why we have to focus on his ideas from the premodern perspective. If we attempt to understand his ideas from a modern eye, we cannot grasp the gist of his point. Yu Suwon had positive attitudes toward commerce and Ever-Normal Circulating Treasure(常平通寶) contrary to other Confucian scholars during the Joseon dynasty. According to Confucianism, commerce was regarded as the evil that destroys the foundation of the nation's economic basis. If commerce prevailed throughout the whole nation, no one would stay in cultivation because merchants could make money without working hard. Based on these Confucian ideas, commerce and its tool, currency, was regarded as unnecessary to run a whole nation. However, Yu Suwon advocated commerce and currency as tools to enhance the nation's wealth during the Joseon Dynasty. Under this view merchants could play a role along with currency to even out the wealth inequality. In particular he thought that currency is not a result but rather an important way to adjust the economic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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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후기 정치사회상과 농암 류수원의 인재등용론

저자 : 김세호 ( Kim Se-h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1-10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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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壽垣의 『迂書』는 조선 후기 시대상을 통찰하여 당대 문제점의 개혁안을 제시한 저술이다. 그 시작은 교육개혁과 인재등용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된다. 이로 인해 류수원의 교육개혁론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면서 성과도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 다만 그동안의 연구는 주로 교육학적 시각에 입각하여 『우서』라는 틀 안에서 분석된 연구결과가 주를 이룬다. 이 글에서는 류수원의 논의가 당대 정치사회상에서 촉발되었음에 주목하여 동시대 인물들의 주장과 비교해 『우서』에 나타난 교육과 인재등용에 대한 논의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했다.
류수원의 『우서』에 근거하여 요약한 조선 후기 교육 및 인재등용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 후기 각 교육기관에는 정원보다 많은 유생이 넘쳐났는데 이는 국가적으로 군역의 손실을 불러오고 적절한 교육마저 시행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유생의 권리로 여겨지던 儒疏는 당쟁의 수단과 결부되며 유생들은 학문보다 정치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과거시험을 통한 인재의 선발기능은 몇몇 문벌에 의한 전유물로 독점되었고 그나마 유지되던 시험도 부정행위 등이 만연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수원은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개진했다. 먼저 附學生 제도를 두어 정원초과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는 무조건 정원을 한정하고 額外 유생들을 군역에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비해 적용 가능한 현실적 방안이라 생각된다. 또한 류수원은 유생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며 유소의 행위 자체를 부정했다. 이는 당시 관료사회에서 유소를 인정하던 세태와 차별화된 지점이다. 한편 류수원은 문벌의 폐해를 엄격하게 비판했고, 공정한 시험으로 인재가 선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는 사대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며 문벌가 자제들의 각성을 촉구한 유연성이 나타나고, 과거시험의 부정을 사전에 차단하도록 시행규칙을 세세하게 규정한 의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Ryu Su-Won(柳壽垣)'s 『Wuseo(迂書)』 is a book that suggests the reformation on the problems of the time by insight into the late Joseon Dynasty. The beginning comes from the discussion of educational reformation and selecting talent. As a result, the researches on Ryu Su-Won's educational reformation theory was steadily progressed and some achievements were accumulated. However, the researches so far are mainly based on the results analyzed in the framework of 『Wuseo』 grounded on the educational perspective. This paper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discussion of Ryu Su-Won was triggered in the political society of the time, and tried to find out the meaning of the discussion about education and selecting talent in the 『Wuseo』 compared with the arguments of his contemporaries.
Based on Ryu Su-Won's 『Wuseo』, the summary of problems in education and selecting tal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is as follows. First, each educational institu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had more confucian students than the capacity. This had resulted in national losses of military services and even lack of proper education. In addition, Confucian student's Memorial to the King(儒疏), which was regarded as the right of the confucian students, was connected as a means of party strife, and the students tended to concentrate more on politics than on academics. On the other hand, the selection function of talent through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s was monopolized exclusively by several noble lineage. It seems the cheating was prevalent i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s.
Ryu Su-Won has made the following arguments regarding those problems. First of all, he tried to solve the problem of over capacity in educational institution by setting up a system of Bu-student(附學生). This seems to be a more realistic approach than the claim to limit the number of confucian students and to mobilize the students who exceeded the capacity, to military services. Ryu Su-Won also opposed political participation of the confucian students and denied the act of Confucian student's Memorial to the King itself. This is a different point from the social conditions of accepting Confucian student's Memorial to the King in the bureaucracy of the time. Meanwhile, Ryu Su-Won has severely criticized the harmful effect of the noble lineage and insisted that talent to be selected by fair examinations. Here,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flexibility that pressed awakening of noble lineage's children under the agreement in the value of existence of Sadaebu, and the significance of detailed defining the enforcement rules to block out the cheating i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s beforehand, and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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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세기 소론탕평 정국과 류수원의 정치적 역할

저자 : 이선아 ( Lee Sun-ah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7-14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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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원은 숙종 20년(1694)에 충청도 충주목의 소론 가문에서 태어나 숙종 44년(1718)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올랐다. 류수원의 본격적인 정치적 행보는 경종이 즉위한 이후에 확인된다. 류수원은 신임옥사가 전개되는 정국에서 소론을 이끌고 있던 조태구와 소론 핵심인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소론은 완론과 준론의 노선의 차이가 드러났지만, 노론이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는 국면에서 공조하여 소론정권을 수립하였다. 때문에 조태구를 탄핵하는 류수원의 상소는 소론의 갈등을 드러내고 균열을 야기할 사안이었다.
조태구를 탄핵한 상소를 올린 이후 류수원은 外職을 전전하다가 영조 4년(1728)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류수원은 출사하지 않고 무신난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는 발언을 통해 조태구 탄핵상소로 인한 정치적 혐의를 벗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태구를 탄핵하였다는 류수원의 행적은 그의 관직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 소론 탕평파가 그에 대해 '박학한 지식[淹博之識]과 주밀하고 통달한 재주[周達之才]'를 지녔다고 적극 추천하였으나 그의 관직 임명은 계속 논란이 되었다.
이런 논란은 류수원의 『우서』가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수그러들었다. 소론 탕평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영조는 『우서』를 친람하였다. 영조는 류수원의 『우서』와 『문헌통고』를 비교하면서 류수원에 대해 '나보다 낫다'고 평가하였으나 『우서』의 개혁안에 대해서는 오활하여 시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소론 탕평파는 류수원의 『우서』를 탕평을 위한 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는 경세서로 평가하고 실행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특히 영조 16년(1740)에 임인옥사를 誣獄으로 판정하고 노론의 정치력이 회복되는 상황에서 조현명을 비롯한 소론 탕평파는 탕평을 이루기 위해 정치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류수원의 『우서』에서 제안한 관제 개편안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소론 탕평파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류수원의 정치개혁안은 전격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 17년(1741)에 辛酉大訓이 반포된 이후 신임옥사와 관련된 혐의를 벗은 영조는 점차 노론의 신임의리 위에 정국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노론탕평의 명분 아래 류수원과 그의 『우서』에 대해서도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고, 류수원은 10여 년의 廢錮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류수원은 영조 31년(1755)에 일어난 乙亥獄事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처형되었다.


Ryu Su-Won was born in 1694 into a Soron family in Chungju-mok, Chungcheong-do.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he held government positions in 1718.
He might begin in earnest waking political moves after enthronement of Gyeong-jong. He aroused a controversy in political situation during Sinim Oksa(a case that many Seonbi died in prison in 1721∼1722) by raising an appeal that he impeached Jo Tae-gu, the leader of Soron, and key figures of Soron.
In that time, Noron carried through their assertion about crowning of king's brother and substituting politics for King. So Soron established a Soron government by cooperating Noron, but conflict between Wanron and Junron remained. His appeal made Soron government splitting.
This appeal was a roadblock on his public career. But Song In-Myeong, Jo Hyeon-Myeong, Lee Jong-Seong, etc., who belonged to Tangpyeong faction of Soron, recommended him for his erudite knowledge and well-versed in talent. His book, Useo, involved experience and knowledge in political reform plan to maintain political initiative of Tangpyeong faction of Soron.
Especially in 1740, Noron got political power back by degrees, Tangpyeong faction estimated his plan about reforming government organization very positively for making fair politics. But it was not accepted finally.
In 1741, King's instruction was proclaimed(Sinyu Daehun), political situation was changed to Tangpyeong faction of Noron. After 1755, Eulhae Oksa occurred following the event of a poster in a Naju inn, and his tracks was not able to be found. He was executed as rebel, and his reform plan in his book disappeared. His public career showed historical scenes about a limit and failure of Tangpyeong plan of King Yeongjo and So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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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의 '봉건(封建)' 독법(讀法)에 대한 시론(試論)-기내(畿內)의 통치방식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3-18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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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전에서는 제후의 독립적 권력을 용인하여 천하를 분권적으로 통치한 방식을 '封建'이라 칭했다. 그러나 봉건 단위로서의 '國'이 설치된 범위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한대의 유자인 鄭玄은 三禮書를 통섭한 가운데, 畿內에서도 畿外의 제후국에 비견되는 봉건이 시행되었다고 간주했다. 이로써 관료제에 의한 통치의 범위는 천자국 내부의 일부로 협소하게 한정되었고, 분권과 세습으로서의 봉건은 삼대 천하의 대부분에서 시행된 대표적인 통치방식이 되었다. 이후 이같은 독법은 三代의 봉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견해로 전승되었다.
조선후기의 유자는 봉건을 분권으로 등치한 독법을 계승했다. 그러나 기내의 통치방식에 대해서는 상이한 이해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 특징은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周禮』에 대한 천착과 함께, 그 전장의 관료제적 함의를 조명한 연구가 증대 및 계승되었다. 둘째는 기내의 채읍이 채읍주의 권력이 배재된 채 王臣에 의한 관료제 하에서 통치되었다고 보았다. '봉건'의 시대임에도, 기내에서는 관료제적 통치체제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셋째는 기내에서의 봉건을 부정함으로 인해, 봉건과 정전 사이에 체결되어 있던 필연성에도 균열이 생겨났다. 넷째는 이상의 견해들은 주로 남인과 소론에 속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피력되었다.
이같은 변화는 봉건과 정전을 현실의 군현제 하에서 접목시킬 여지를 넓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유자들이 삼대의 전장을 토대로 경세방안을 제시했음을 상기한다면, 조선후기 경세학에 있어 봉건의 재해석에 기인한 특징적인 양상이 나타났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차후의 과제로 삼겠다.


In confucian classics, Fengjian(封建) means a governing system by dividing Chunha(天下) into vassal states with permitting its own sovereignty. However, the scope where the vassal states was located is not unclear.
Jung-Hyun(鄭玄), who was an eminent Confucian scholar, regarded that the vassal states was established not only outside of Wangki(王畿), but also inside. His understanding on Fengjian(封建) was generally passed down to the later generations of Confucian including Ju Hee(朱熹).
In late Chosun Dynasty, almost Confucian also agreed the generalized understanding on Fengjian(封建). However, there was also an different understanding especially on the governing system inside Wangki. The features can be arrang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bureaucratic system and implication described in 『Zhou-li(周禮)』 were highlighted. Second, Wangki was regared as the Chunja(天子)'s governing area with bureaucratic system. Third, through this, 'it was found' that in the age of Fengjian(封建) the bureaucratic system was also coexisted. Fourth, the above views were mainly raised by the Confucian politically and academically belonged to Namin(南人) or Soron(小論), such as Ryo Hyeong-Won(柳馨遠), Ryo Su-Won(柳壽垣), Jeong Yak-Yong(丁若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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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해동농서』 이본과 『임원경제지』로의 수용 양상

저자 : 조창록 ( Jo Chang-roc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7-21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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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19세기, 조선학술사에 있어서 상당히 독특한 실학적 학풍을 견지하였던 徐浩修와 徐有榘 2대가 이룩한 지식의 전승과 변모 양상을 살펴보고자 작성된 것이다. 그 대상이 되는 저술은 徐浩修의 『海東農書』와 徐有榘의 『林園經濟志』이며, 논의의 초점은 『해동농서』의 이본과 차이점, 『해동농서』의 농학적 전통이 『임원경제지』로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1장에서는 『해동농서』 이본 3종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얻은 결론을 정리해 보면, 성대본 『해동농서』는 그 내용의 8분의 5정도를 改稿한 정체불명의 서책으로, 비록 '해동농서'라는 제목을 달고는 있지만 서호수가 본래 의도했던 농서로 보기 힘들다. 따라서 성대본을 초고본으로 보는 견해는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 2장에서는 『임원경제지』에서 『해동농서』를 인용한 항목들을 정리하고, 『임원경제지』가 『해동농서』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고찰에 따르면 서유구가 『임원경제지』 편찬에 참조한 것은 오사카본이며, 모두 32항목에 걸쳐 『해동농서』를 인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특히 농기도보, 관개도보, 곡명고, 잠상도보, 방직도보 등에서 그 내용을 대폭 추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iscuss transfer and transformation of knowledge achieved over two generations, by Seo, Ho-Su(徐浩修, 1736∼1799) and Seo, Yu-gu(徐有榘, 1764∼1845), through Haedongnongseo(海東農書) and Imwongyeongjeji(林園經濟志).
The paper has two main focuses ; first to compare different versions of Haedongnongseo, and second to analyze how Haedongnongseo was adopted from Imwongyeongjeji.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First, Sungdaebon(成大本, Owned by Sungkyunkwan University) is quite beside from the original purpose of Haedongnongseo. Second, it is Osakabon(大阪本, Owned by Osaka Prefectural Nakanoshima Library) that Seo Yu-gu referred to, when publishing Imwongyeongjeji. Third, Seo Yu-gu had cited Haedongnongseo for 32 times. Fourth, Imwongyeongjeji had further expanded its scope in discussing agricultural tools, irrigation facilities, types of crops (including seafood), storage methods, and sericultural tools, which were not found in Haedongnong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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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잡동산이』 내 비지전장(碑誌傳狀) 수습 양상

저자 : 김대중 ( Kim Dae-joong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3-24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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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산이』는 安鼎福(1712∼1791) 집안에 전하는 것으로, 다양한 성격의 방대한 문헌이 抄集되어 있다. 본 논문은 그 다양한 문헌 중에서 碑誌傳狀에 집중하여 그 수습 양상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비지전장'은 기록성과 문학성을 겸한 문체로, 안정복의 역사가적 면모와 잘 부합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주목하는 것은 총 45책 중 제21책에 수록된 高麗墓文 7편이다. 1편을 제외하면 모두 문집에 실려 있지 않은 글이므로 자료적 가치가 높다. 수습 양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묘지명이 새겨진 실물 誌石 상태에 충실하게 묘지명을 필사해둔 것이다. 본문 끝에는 지석 크기까지 명기되어 있는데, 현재로서는 그렇게 한 유일한 사례로 생각된다.
두 번째로 주목하는 것은 제17책에 실린 明末 인물전이다. 「葉向高傳」, 「高忠憲攀龍傳」, 「鄒忠介元標傳」, 「馮泰定從吾傳」 등이 그것으로, 그 출처는 모두 『啓禎野乘』이다. 이 글들이 『잡동산이』에 수록된 것은 명말 역사 및 東林黨 인사의 행적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밖에도 제22책에 수록된 「安弘國傳」도 현재로서는 유일본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Japdongsani(雜同散異) is the collection of various kinds of documents that has been passed on to An Chongpok(安鼎福, 1712∼1791)'s family. This paper focuses on pi-chi-chon-chang(碑誌傳狀) among its various documents and comprehensively examines how pi-chi-chon-chang are collected and transcribed. This is because pi-chi-chon-chang is a style that combines both documentary and literary character and is considered to be in line with the core identity of An Chongpok the historian.
The first one to investigate is Koryo(高麗) myo-mun(墓文) included in 21st book. Six of the seven works are not included in mun-jib(文集). The most important feature is the fact that the Koryo myo-mun are written exactly as they were carved on stone. The size of the stone is stated at the end of the text, which is now considered the only case.
The second one to investigate is a biography of literati of late Ming in the 17th book. The source is Kye-chong-ya-sŭng(啓禎野乘). It is assumed that the writings reflect An's interest in the history of late Ming period and the activities of Tong-lim-tang(東林黨) figures.
In addition, 'an-hong-kuk-chon'(安弘國傳), which is included in the 22nd book, is considered to be the only one and of high literary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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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세황의 묵죽화와 회화 수응(酬應)

저자 : 이경화 ( Lee Kyung-hwa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7-28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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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정신성을 상징하는 묵죽화는 18세기의 문인화가 姜世晃(1713∼1791)이 일생동안 주력한 장르로서 손꼽힌다. 강세황의 묵죽화 대부분은 소형 화면에 대나무의 일부만을 포착하여 표현하는 지극히 사의적인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이 지닌 회화적 특징은 중국 강남지역의 문인들이 선호한 折枝畵 형식과 상통하는 것으로 “남종화풍의 묵죽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세황은 10여개 안팎의 잎으로만 구성된 극단적으로 생략적인 그림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묵죽화를 향하여 丁若鏞(1762∼1836)은 대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소형 묵죽의 제작 조건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체로 타인의 요청에 의하여 제작된 그림이었음이 나타난다. 반면에 주로 만년에 등장하는 대규모의 역작에서는 그 이면에서 화가의 자발적인 예술적 동기가 드러난다. 높은 명성을 얻었던 여느 조선의 화가들처럼 강세황은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회화 요청을 받는 인기화가였다.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조정에서 활약하던 만년에는 그를 향한 회화 요청이 더욱 쇄도하였다. 늘어가는 회화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응답하기 위하여 화가로서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한세대 앞서 특유의 진경산수화로 세상을 풍미하였던 謙齋 鄭敾(1676∼1759)도 밀려드는 회화 수요를 감당했던 화가였다. 정선이 피곤하고 권태로운 태도로 그리는 倦筆, 한 번에 쓸어내듯이 그리는 揮灑筆法, 혹은 應猝之法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형식적으로 응대한 이유는 바로 수없이 밀려드는 그림 수요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대필 화가를 동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안목 있는 평자들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반면에 강세황이 선택한 방법은 짧은 시간에 즉각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묵죽화였다. 비록 간략한 묵죽이라도 육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강세황은 묵죽과 시문의 판각을 마련하고 서화를 인쇄하여 수응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강세황을 대표하는 묵죽화는 수응으로 전문화된 장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세황이 수응화로서 묵죽화를 선호한 이유는 제작의 수월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회화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상적인 문인의 회화로 성립된 묵죽화는 문인화가로서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자아를 구현해주는 장르이기도 하였다. 결국 강세황이 그린 수많은 묵죽화는 화가로서 그의 명성을 대변하며 동시에 그의 정체성까지 담보하여 주었다.


Ink bamboo, a symbol of noble spirit of scholars,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themes of the eighteenth-century scholar painter Kang Sehwang (姜世晃, 1713∼1791). He painted a large number of ink bamboo paintings throughout his entire life. His ink bamboo had schematized compositions, describing certain portions of bamboo with a few touches of brushwork in a small picture plane. Kang also produced large-scale ink bamboo paintings featuring his intense painterly efforts. While smaller ink bamboo paintings were mostly made for requests, larger versions were painted on his own artistic initiative.
Kang Sehwang was a much sought-after artist from his younger days when he lived in seclusion in Ansan. He received floods of painting commissions in later years when he served the government in favor with the king. Under such pressing demand for his paintings, Kang must have needed special measures to cope with the rising demand for his paintings. Jeong Seon (鄭敾, 1676∼1759), a renowned painter of true-view landscape painting active in the early eighteenth-century, also strove to meet the ever-increasing demand for his paintings. He produced routine landscapes quite mechanically using loose and speedy brushwork and even sometimes employing ghost painters. For these expedients, he was often criticized by discerning critics. Meanwhile, Kang Sehwang chose to paint ink bamboos to manage the demand as they required little time and efforts for production. He printed numerous ink bamboo paintings using woodblocks engraved with his painting and calligraphy when there were too many commissions to handle by his own handwritten paintings.
Kang Sehwang's ink bamboo was designed to effectively respond to rising painting commissions. However, he may not have preferred this genre of painting only for its easy-to-make nature. Ink bamboo, embodying an ideal of literati painting, played a pivotal role in expressing his inner self and building a socially ideal image of himself. Kang Sehwang's ink bamboo paintings represent his status as a renowned literati painter and also symbolize his identity as a noble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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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태평산인(太平散人) 강후진(康侯晉)의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 연구(硏究)

저자 : 김승대 ( Kim Seung-d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5-333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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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후진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전라도 茂長縣출신의 지식인이다. 그는 반계 유형원, 이재 황윤석 등과 더불어 호남실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직접 발로 뛰는 상고사를 집필한 당대의 지식인으로 투철한 체험정신과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지리·사상·언어·민속 등 다양한 분야에 저술활동을 남긴 학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의 상고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관하여 특이한 관점과 식견을 지녔으며, 문헌을 널리 읽고 유적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기록한 저술가이자 고고학자이며, 실학자이다.
강후진의 「遊金馬城記」는 만경강 춘포 일대의 횡탄를 건너 왕궁리 유적 일대를 답사한다. 이후 미륵사지와 미륵산성, 당산과 쌍릉 등에 대한 일정을 세밀하게 적고 있다. 또한 강후진 자신의 역사적 소신을 바탕으로 답사기를 쓰고 있다. 이 책은 1738년(영조 14) 익산 금마지역을 답사한 康侯晉이 기록한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등 백제유적에 대한 생생한 답사기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The study on 'Honam Silhak' has been actively developed in recent years, focusing on Buan, Jeollabuk-do, which is an ideological space of Bangye, centering on Bangye Hyeongwon.
In this paper, I focused on Honam Silhak scholar who wrote geography, history, and customs through an empirical explor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history and archaeology.
Kang Hu-jin's “Kim Kim” begins with the exploration of Kim Chang-ik, Kim Soo-bong and Iksan Choi Woong-geo. The site will be crossed by a tyranny in the Chunpo area of Mangyeong River and will be visited in the garden sites of Wanggumseong (Wanggungri) and the Ogeumsanseong area. He also writes a book of exploration based on his historical conviction.
This book is a vivid exploration of Baekje ruins such as Mireuksaji and Wanggungri ruins recorded by the Expedition of Iksan Geumma area in 1738 (Yeongjo 14).

KCI등재

10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1710∼1776)의 학문관과 천문역산학 담론

저자 : 구만옥 ( Koo Mhan-oc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3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5-389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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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休는 星湖學派의 宗匠인 李瀷의 진보적 학문관을 온전히 계승한 인물로, 이익의 사후에 그의 학문이 驪州李氏가문의 후손들과 성호학파의 후학들에게 이어지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이병휴는 당대 조선 학계의 문제점으로 “道學의 이름에 가탁하여 사사로운 利慾을 이루고자 하는 폐단”과 朱子學 일변도의 학문 풍토를 지적했다. 그는 “義理란 천하의 公物”이라고 단언하면서 기존의 經典 주석에 異論을 제기하였다. 朱熹의 주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이병휴의 학문 자세는 동시기 嶺南南人의 대표적 인물인 李象靖이나 성호학파 내부의 尹東奎·安鼎福계열의 그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익은 算學에 밝았으며 전통 산학의 토대 위에서 서양 수학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익은 전통 算學書인 『算學啓蒙』과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幾何原本』을 탐구하였고, 산학을 천시하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는 산학을 儒者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교양으로 간주하였고, 심성 수양을 위해서도 산학 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병휴는 집안의 여러 子弟들과 함께 이익의 문하에서 산학을 연마했다. 그의 산학에 대한 태도는 李嚞煥이 편찬한 산학서인 『隸首遺術』에 붙인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병휴는 먼저 당대인들의 산학에 대한 두 가지 편향을 비판했다. 하나는 산학은 士君子가 익힐 바가 아니라고 폄하하는 경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학을 맹목적으로 선망하는 경향이었다. 전자에 대해 이병휴는 이익의 논지에 따라 산학이 심성 수양에 도움이 되며, 현실적 실용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였고, 후자에 대해서는 그 술수적 측면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병휴는 算術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數가 정해져 있는 것'뿐이라고 보았고, 그 이외의 術數的 논의는 일체 배격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산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開方術과 正負算術에 대해 자기 나름의 계산 방식을 예제와 함께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병휴는 전통 천문역산학의 기본 개념과 원리에 대한 몇 편의 논설을 작성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朞三百의 계산법을 정리하였고, 28宿를 四獸에 배당한 원리를 탐구하기도 하였으며, 12辰의 명칭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논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時憲曆을 채택하면서 曆法의 여러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병휴는 이러한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역대의 역법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정밀해진다는 발전론적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정점에 시헌력이 위치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병휴는 이익이 저술한 수많은 글을 꼼꼼히 검토하였다. 이는 이익 사후에 그의 文集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수행한 작업이었다. 이익의 논설 가운데는 산학과 천문역산학을 비롯한 자연학 분야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이병휴는 자신의 논지를 가다듬는 한편 이익과의 토론을 통해 熟議 과정을 거쳤다. 이병휴의 자연학 관련 담론에서 이익의 흔적이 자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Yi Byeong-hyu was one of the legitimate disciples of Yi Ik(李瀷), the founding father of the Seongho School(星湖學派), and played crucial roles in inheriting Yi Ik's progressive study and passing it onto the descendants of Yeoju Yi Clan and Seongho School. Yi Byeong-hyu discussed the problems of scholarly world of contemporary Joseon : “the wrongful pursuit of personal interests through the nominal use of Daoxue(道學, True Way of Learning)”, and singleminded loyalty to the Learning of Master Zhu(朱子學). He argued that “meanings and principles(義理) were public property under the sun” and raised an objection to the established annotation to the canon, including Zhu Xi's. His thinking differentiated him from his contemporaries such as Yi Sang-jeong(李象靖), one of the notable Yeongnam-Namin(Yeongnam Southerners), and Yun Dong-gyu(尹東奎, 1695∼1773) and An Jeong-bok(安鼎福), the Seongho School colleagues.
Yi Ik was thorough at mathematics and known for embracing western mathematics on the basis of traditional mathematics. Yi Ik studied Suan-xue qi-meng(算學啓蒙) and Matteo Ricci's Ji-he yuan-ben(幾何原本) and condemned people's neglect on mathematics. He believed that mathematics was one of the requirements for confucius scholars since it helped cultivation of the mind.
Yi Byeong-hyu studied mathematics with other clan members under the guide of Yi Ik. In the preface of Yesuyusul(隸首遺術), he criticized two tendencies of the contemporary scholars's take on mathematics. First, on the denouncing of it, he followed Yi Ik's theory of its helpfulness in cultivation of the mind, and argued that it also had practical uses. Secondly on the attitude of blind faith on mathematics, he pointed out the problem of trickery. Yi Byeong-hyu believed that the only knowledge acquired by mathematics was “that the numbers were decided”, and denied all other trickery discussions. From this perspective, he explained kai fang shu(method to find roots of quadratic equations) and the method of positive and negative and provided his own calculations with examples.
Yi Byeong-hyu wrote a few thesis on the basic theories and principles of traditional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He reorganized calculating methods of jisanbai(朞三百), researched the ershibaxiu(28宿, twenty-eight solar stages along the zodiac) of traditional astronomy in regard of four gods(the animal symbols of the four directions), and discussed the meaning of the names of twelve chen(12辰). He also paid attention to the changes in various fields of calendrical system which followed by the adoption of it in the Late Joseon Dynasty. He perceived the calendrical system evolving and becoming more precise, and thought Shixian-li(時憲曆) was in its highest level.
Yi Byeong-hyu seemed to examine immense works of Yi Ik, possibly intending to arrange and compile the teacher's collected works posthumously. Yi Ik's papers consisted of many articles on natural science, including mathematics and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As he examined these works, he sharpened his own views while discussing the themes with Yi Ik. This explains why the Yi Ik's legacy frequently appeared in Yi Byeong-hyu's thesis on natural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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