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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3)~65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432
한국사론
65권0호(2019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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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新羅) 흥덕왕대(興德王代) 금은기(金銀器) 금령(禁令)의 성격

저자 : 고태진 ( Ko Tae-jin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5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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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율령이 반포된 6세기 초 이래로 사치 금령에 대한 기사는 <애장왕 교서(806)>와 <흥덕왕 교서(834)>가 전부다. 그런데 두 교서는 모두 金銀器에 대한 규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사에 있어 사치 금령의 문제는 금은기의 문제로부터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금은기에 대한 기록은 中代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사료상으로 금은기에 대한 일화가 확인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금은기에 대한 의미 부여가 보다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동아시아의 금은기 유행을 선도하던 唐人들의 금은기 인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당에서 금은기는 기본적으로 祈福의 매개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인식은 중대 초 신라에 유입되었다.
중·하대 금은기 사용례는 총 10건으로, 그 중 9건에는 신라 '王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특히 이들 사례의 상당수는 중대에 밀집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중대까지는 금은기가 기본적으로 '왕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때때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下賜의 과정을 거쳐 '왕실' 이외의 인물이 금은기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금은기의 수량이 제한적인 이상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후 신라 최초의 금은기 금령은 下代인 806년 <애장왕 교서>의 반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는 8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금은기 유통 확대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이었다. 당에서는 '安史의 亂' 이후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금은기 생산이 확대되고 있었는데, 하대 초 이들 금은기가 신라로 유입됨에 따라 더 이상 신라 '왕실'만이 금은기를 독점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흥덕왕대에 이르러 금은기 금령은 唐令의 영향 속에서 보다 정교해진다. 새로 이 사회 전반을 대상으로 반포된 <흥덕왕 교서>에서는 진골 일반도 鍍銀을 제외한 일체의 금은기를 사용할 수 없게 하였다. 이는 '왕실'만이 금은기를 사용하던 중대로의 회귀를 꾀한 일종의 율령적 강제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왕위계승권자의 위치에서 '金憲昌의 亂'이라는 진골 일반의 도전을 몸소 경험하였던 흥덕왕으로서는 진골 일반까지를 포함하는 사치 금령을 반포함으로써 '왕실'과 진골 일반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계선을 가시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의 금은기 유행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던 만큼, 당초 흥덕왕이 의도한 '왕실'과 진골 일반의 구분이 성공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흥덕왕대 금은기 금령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율령적 해이와 별개로 <흥덕왕 교서> 자체가 폐기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려 초에도 '왕실' 이외의 인물이 금은기를 사용하는 것을 참람된 행위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존재했다. 사료상으로 고려시대 금은기 금령이 毅宗代 처음 등장하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인식을 신라 하대로부터 존재하였던 재래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Among the sumptuary laws of Silla, the sole historical records concerning the prohibition of luxury goods are King Aejang's Royal Edict(哀莊王 敎書, 806) and King Heungdeok's Royal Edict(興德王 敎書, 834). These two royal edicts both include a clause prohibiting the use of gold and silverware. Accordingly, research on the prohibition of luxury goods in Silla centers around issues concerning gold and silverware.
These prohibitions on gold and silverware in the late-Silla period(下代) were influenced by their expanded distribution in East Asia during the late eighth century. As these luxury items were imported during the late Silla period, the “royal family”(王室) was no longer able to monopolize their use.
King Heungdeok's Royal Edict prohibited the use of gold and silverware even for members of the True Bone(jingol 眞骨) caste, an act that was likely intended to demonstrate that there was an insurmountable wall between the “royal family” and the general True Bone caste.
Nevertheless, since the surging popularity of gold and silverware could not effectively be countered, King Heungdeok seems to have failed in creating a distinction between the “royal family” and the True Bone member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prohibition of gold and silverware during the rule of King Heungdeok, however, cannot be denied. Even in the early Goryeo(高麗) dynasty, it was considered presumptuous for people outside the “royal family” to use gold and silverware. Such a perception may be understood in tandem with perceptions that had existed even in the late-Silla period.

2발해(渤海)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전탑(塼塔) 출현의 의미

저자 : 박유정 ( Park Yu Jeong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7-9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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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8세기 말 발해와 당나라의 사회적 배경과 문화적 흐름을 살펴보는 속에서 渤海 貞孝公主墓 塼塔의 출현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발해 文王 넷째 딸의 무덤인 정효공주묘는 墓上建塔 현상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고분으로, 계단식 墓道, 羨道, 玄室로 이루어진 塼室墓의 상부에 전탑의 基壇部가 남아 있는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馬滴達塔 고분, 靈光塔 고분, 龍海區域 M10호묘 등 동일한 구조를 가진 고분이 몇 기 더 존재하나 피장자와 축조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어 고분의 축조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경우는 정효공주묘가 유일하다. 아울러 다른 발해 왕실 고분과 달리 葬制와 墓制에서 당의 영향을 크게 받은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축조 연대의 차이가 크지 않은 발해 貞惠公主墓와 비교했을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탑이 함께 나타나는 정효공주묘의 구조가 당나라의 甲字形 地宮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사리안치실은 황실 분묘 구조를 차용한 橫穴式 구조로, 唐代에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한편, 정효공주묘는 唐 長安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보이는 묘상건탑 현상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까지 중국 내에서 발견된 묘상건탑 관련 실물 자료는 소수에 불과하며, 정효공주묘와 동일한 구조를 보이는 고분도 발견된 적이 없다.
한편, 문헌에서 정효공주묘의 축조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당나라 德宗이 요절한 자녀들인 肅王 祥과 唐安公主의 장례과정에서 불교의 예에 따라 탑을 세워 고분의 분구 혹은 고분 그 자체를 대신하려 했던 모습이 확인된다. 建塔의 목적에 망자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담겨 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에 더해 묘상건탑 문화가 8세기 말 당나라 황실에도 알려져 있었음은 물론 그를 시행하려 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이는 8세기 말 발해 내에서의 묘상건탑 문화가 등장하는 배경을 추측할만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正史에서 당나라 황실의 喪葬과 관련된 건탑 기사는 앞서 언급한 德宗代의 두 사례만이 보일 뿐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례는 당나라가 藩鎭勢力의 반란으로 상당히 어려운 정국을 맞이하고 있었던 때에 등장한다. 당대에 불교가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건탑의 배경에는 당시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발해의 정효공주 또한 아버지인 文王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왕 또한 당나라 덕종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요절한 자식의 무덤을 축조하게 된 것이다. 정효공주묘가 축조된 8세기 말 발해의 정치적 상황 역시 불안정했다. 문왕 사후 왕위 계승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정국의 혼란은 문왕 말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정효공주묘가 축조된 792년은 문왕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당나라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정효공주묘와 그 전탑의 축조에도 추도는 물론 정국 안정의 의미 역시 함께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탑을 지어 무덤으로 삼거나 그 분구를 대신하는 것은 塔葬의 일종으로, 중국과 발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의 티베트와 위구르 및 統一新羅를 비롯해, 후대의 사례이긴 하나 西夏에서도 탑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교롭게도 8-10세기 唐 혹은 11-13세기 宋 등 중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국가들에서 등장하며 그 지역 고유의 문화와 섞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효공주묘를 비롯한 발해 묘상건탑의 사례처럼 중국에서 불사리를 장엄하는 가장 존엄한 방식을 따라 고분을 축조한 경우를 현재까지는 어느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발해 정효공주묘와 그 전탑은 동아시아의 탑장 사례 중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추후 塔이나 塔址의 조사 시 염두에 두어야 할 존재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significance of the emergence of the Balhae (渤海) stupa on the Tomb of Princess Jeonghyo(貞孝公主墓, c.792). Myosang-geonchuk(墓上建築) refers generally to any construction, building or structure installed on a tomb mound. Myosang-geontap(墓上建塔) specifically designates a tomb construction style whereby a stupa surmounts a tomb mound. The Tomb of Princess Jeonghyo(757-792), fourth daughter of King Mun(r. 737-793), is a prime example of Myosang-geontap and is the only known instance for which both the construction date of the tomb and the identify of the person buried have been established. It contains remnants of the stylobates of a brick stupa erected on top of a brick burial chamber(塼室). Unlike other Balhae royal tombs, including that of Princess Jeonghye(貞惠公主), which was built in similar period, it displays striking indications of influence from Tang(唐) China.
The Tomb of Princess Jeonghyo is almost identical to that of a Tang Buddhist tomb structure with a tunnel entrance(甲字形 地宮). On one hand, it may be argued from extant tombs with stupa superstructure of Balhae that such tombs derive from Changan(長安) aristocratic culture of the Tang period. However the number of actual instances of related tombs found in China are scant in number, and to date there have been no prior cases discovered that similar in structure to that of the Tomb of Princess Jeonghyo.
There are only two passages in the Jiu Tang shu(舊唐書) concerning the use of stupas for burials(塔葬, Ch. Tazang, Kor. Tapjang,) related to the Tang imperial household within a time frame corresponding to the construction of the Princess Jeonghyo Tomb. According to these records, there were attempts to construct stupas according to strict Buddhist ritual in the funeral proceedings of the children of Emperor Dezong(德宗) of Tang as symbols of mourning for the children lost to a premature death.
The period of stupa constructions coincided with the Fanzhen(藩鎭) Rebellion which wrought immense political turmoil in China. Princess Jeonghyo also met death prematurely before her father, Balhae's King Mun(文王). When the tomb of Princess Jeonghyo was under construction in the late 8th century, Balhae also was faced with great political instability. In light of this context, the stupa as well as the brick chamber structure of its basement may be seen displays of memorial symbolism evincing hope for political stability.
On the other hand, burial ceremony utilizing stupa in place of mound chamber, or Tapjang was not a unique feature in either China or Balhae. Cases of Tapjang culture appeared in Tibet(吐蕃), Uighur(维吾尔), Seoha (西夏) and Unified Silla(統一新羅) between the 8th and 12th centuries. However, there are as yet no confirmed instances of burial mounds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utmost dignified customs of Buddhist ritual practice other than that of the Balhae Myosang-geonchuk or the Princess Jeonghyo tomb. The Princess Jeonghyo Tomb, therefore, occupies a distinctive position among East Asian Tapjang cases, and merits further scrutiny in future investigation of stupas or stupa sites.

3근대 전환기 한국 지식인의 진보적 시간의식 연구

저자 : 김명재 ( Kim Myung Jae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1-150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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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192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사에서 시간의식의 '근대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진보적 시간의식과 근대 서구 진보 개념의 수용 여부는 비서구권에서 근대화의 척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기존의 한국 사상사·제도사 연구에서도 근대 전환기 서구 진보 개념과 진보적 시간의식의 도입은 한국의 근대가 타자에 비해 '지체'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이자, 그 과정도 비교적 순탄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192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에 서구의 직선적이고 진보적인 시간의식의 도입과정은 일방적이고 전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를 전후로 보편적 역사의 진보를 상정하는 '進步' 개념이 형성된 서구와는 달리, 조선 후기 進步 용어는 주로 '개인의 도덕적·학문적 향상'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진보적 시간의식의 수용과정에 개입하는 전통적 시간의식으로 정통론은 '동국'의 정체성과 기자 문화의 계승을 나타내는 '연속'의 측면에서, 순환론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역사와 시세가 전환(순환)하고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는 '변화'의 측면에서 시간의식을 담지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을 거친 서구의 근대적 '진보' 개념이 수용되면서, 進步 용어는 개인 단위를 넘어 문명·국가로 확장되고 단계적 시간의식을 띤 '진보'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진보' 개념은 1900년대 중반 전후 사회진화론과 국가 위기론 속에서 서구문명 및 민족국가를 목표로 하는 핵심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지식인들은 '진보'를 舊에서 新으로의 변화이자, 우주 및 역사의 진화 법칙과 퇴보의 언설을 통해 시간의식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인식된 한국사의 전개는 서구의 직선적 진보와는 대비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근대 역사학의 3시기 구분법과 사회진화론의 단계적 발전론은 한국의 진보적 시간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 낙후된 현실과 진보의 부재를 인정하는 공통인식 상에서 '암흑기'를 설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암흑기'는 특히 한국사를 고대 이후 현재까지 하강·쇠퇴의 구도로 설명하는 데 활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시간의식으로 사회진화론의 '보편적 법칙'을 설명하여 쇠퇴 원인과 그 극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절대적 정체'처럼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순응 논리를 만들어 낼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대한제국 지식인의 '암흑기'는 '일시적이며 그 속에 주체적 진보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의미를 가진 '制限的 停滯期'의 성격을 가졌고, 이 '정체기'를 인정하며 전통적인 시간의식과 결합한 한국의 진보적 시간의식, 즉 '螺旋的 進步'가 창출되었다. 이 '나선적 진보'는 한국의 '정체기'를 전통적인 순환론과 정통론적 사유에 기대어 진보의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고, 서구의 직선적 진보 및 식민주의 역사학의 '절대적 정체'와 구분되며 민족국가의 퇴보와 침체 속에서 한국사의 부흥과 재생을 상정하는 근대 시기 한국의 진보적 시간의식이었다. 이와 같은 '제한적 정체기'론과 진보적 시간의식은 1900년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민족 주체가 국망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부단한 실천과 독립의 방략을 모색하는 원천으로 기능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진화론 기반의 '진보' 개념은 1920년을 전후로 한 개조론 시기에 전환되었고, 主義·反動 등과 함께 쓰이면서 시간의 표상으로서의 성격을 한층 더 강하게 띠었다. 또한 '제한적 정체기'론은 여전히 성쇠를 역사 진보의 맥락 속에서 보는 인식이 강고하게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문명 비판의 시대 사조에 힘입어 한국사 차원을 넘어 세계사의 굴곡진 전개를 설명하는 논리로 변화하여 양적으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진화론의 지배적인 위치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던 '나선적 진보'는 서구와 전통적 사유를 경유한 '정체기'를 기반으로 개조론의 사상과 세계사의 전환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였다. 즉, '제한적 정체기'론의 확장과 진보적 시간의식의 공고화에는 근대 시기의 세계정세와 서구 사조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유도 여전히 강하게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한적 정체기'를 바탕으로 한 진보적 시간의식은 3.1운동을 계기로 구체적인 실천과 방법론 차원에서 결합되었는데, 그 내적 논리에 따라 지식인들 간에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일어났다. 「민족개조론」논쟁과 「물산장려논쟁」의 핵심 쟁점은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진보적 시간의식과 그 내적 논리로서 역사 발전의 법칙성 및 이를 추동하는 인간의 주체성, 그리고 '제한적 정체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transition to a modern consciousness of time during the period from the opening up of the nation's ports(開港, 1876) to the first half of the 1920s.
With the acceptance of the modern concept of “progress” from the West via Japan following the opening up of Korea's ports, “progress” transcended the level of individuals and extended to the nation and civilization itself. It morphed into a concept of “progress” encompassing a step-by-step time consciousness. Meanwhile, the three-age system of modern historiography and the theory of step-by-step development of social Darwinism affected linear time consciousness in Korea around the middle of the first decade of the twentieth century.
Out of a shared perception acknowledging the nation's backward reality and apparent lack of progress, there arose a tendency to set out and identify a “dark age”(暗黑期). And, to intellectuals under the Korean Empire(大韓帝國, 1897-1910), this “dark age” generally signified a “period of limited stagnation”(制限的 停滯期) that encompassed the possibility of self-reliant progress and was temporary. In addition, “spiral progress”, which acknowledged this “period of stagnation” combined with traditional time consciousness, was used also to relativize the logic of social Darwinism. Though these temporal constructions of a “period of limited stagnation” and “spiral progress” failed to find general favor in the first decade of the 1900s, they nevertheless functioned as sources for ethno-national subjects to search for stratagems for ceaseless praxis and independence, even amidst the crisis of national demise.
Transformed into the theory of reformation(改造論) around 1920, the concept of “progress” came to establish itself as a representation of time through its use together with “-isms”(主義) and “reactions”(反動). The theory of a “period of limited stagnation” still existed so that approaches seeking to view the theory of cycles within the context of historical progress continued, and, furthermore, quantitative expansion that sought to explain both general history and world history by incorporating them into this theory of a period of stagnation arose. In addition, “spiral progress” came to be formalized based on the “period of stagnation”, which had expanded quantitatively. In other words, “spiral progress”, which presupposed the “period of stagnation” that had been demonstrated in world history since World War I, was consolidated among Korean intellectuals.
Founded on this “period of limited stagnation”, “spiral progress” in turn combined with the former on the level of concrete praxis and methodology. In accordance with its internal logic, fierce debates and conflicts arose among Korean intellectuals. In sum, the crux of the controversies surrounding the theory of national reformation(民族改造論) and the Korean Product Promotion Movement(物産奬勵運動) was: how were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concept of “spiral progress”, the laws of historical development as the internal logic of this idea, humans' self-reliance driving such progress, and the “period of limited stagnation” to be viewed?

4고려 중기 법상종(法相宗)[자은종(慈恩宗)]과 해린(海麟)

저자 : 남동신 ( Nam Dongsin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1-18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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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려 중기에 부흥하는 法相宗[慈恩宗]의 사상사적 의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智光國師 海麟(984-1070)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고려 중기 법상종의 교학은 『瑜伽師地論』에서 『成唯識論』으로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동시에 『成唯識論』의 編譯과 註釋을 주도한 慈恩大師 基(632-682)의 교학, 즉 慈恩學이 主流였음을 의미한다.
고려 법상종의 특색은 『金光明經』을 중시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金光明經』은 불교교단과 세속사회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역설하는데, 고려 법상종단이 이 경전의 '護國'내지 '護世' 사상에 크게 공감한 듯하다. 다만 기존에는 '護國'을 국왕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는데, 본고에서는 불교의 관점에서 '護世'의 중요성도 부각하였다. 고려 중기 법상종 승려들이 보여주는 放生, 慈善, 救濟 등의 활동상은 분명 『金光明經』에 경전적 근거를 둔 것이다.
법상종의 『金光明經』 중시가 나말여초 禪宗의 흥기에 대한 대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경쟁 종단인 華嚴宗의 義天(1055-1101)이 渡宋遊學 때 강렬한 禪敎 충돌을 체험함으로써 귀국 이후 기왕의 華嚴學에 실천성을 강화하고 나아가 교종 중에서도 가장 실천수행을 강조한 天台宗을 개창한 것과 비교된다. 당시 법상종단의 중심 인물 중에서 義天 만큼 禪敎 간의 강렬한 충돌을 체험한 사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고려 중기 법상종이 보여준 현실 중시의 주된 배경이 고려 사회 내부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significance of the revival of the Beopsang School of Buddhism(法相宗 or Jaeun-jong, 慈恩宗, Ch. Faxiang-zong), centered around National Preceptor Jigwang Haerin(智光國師 海麟, 984-1070).
First it looks at the precepts of mid-Goryeo Beopsang and examines how its emphasis shifted from the Yugasajiron(瑜伽師地論, Discourse on the Stages of Concentration Practice) to the Seongyusikron(成唯識論, Discourse on the Theory of Consciousness Only).
The special feature of Beopsang-jong in the Goryeo can be found in the importance it accorded the Geumgwangmyeong-gyeong(金光明經, Sutra of Golden Light), which stressed the idealistic relationship between the Buddhist clergy and secular society. The Beopsang-jong clergy of Goryeo greatly sympathized with the hoguk(護國, saving the nation) and hose(護 世, saving the world) thought of this religious text.
However, prior scholarly understandings of hoguk have largely emphasized the perspective of the national monarch, but this paper stresses as well the importance of hose. The range of activities of Beopsang-jong monks in the mid-Goryeo period such as pangsaeng(放生, release of living creatures), jaseon(慈善, benevolent goodness), guje(救濟, relief of suffering) had a textual basis in the Geumgwangmyeong-gyeong.
It is difficult interpret the importance accorded the Geumgwangmyeong-gyeong as a response to the rise of Seon(禪宗) Buddhism in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This is in comparison to the case of Uicheon (義天, 1055-1101) of the Hwaeom School(華嚴宗) who when studying in Song China had a bout of fierce conflict with Chan(禪宗) Buddhism, an experience that after returning to Goryeo strengthened his practice of his earlier Hwaeom study, and to go further led to his founding of the Cheontae(天台宗, Ch. Tiantai) school, which among the various Buddhist groups was the most devoted to Buddhist practice.
Down to the present, among the main members of the Beopsang clergy, there no contemporary instance known of someone who personally had such a fierce encounter with the Seon school. The Buddhism of Liao, with which at the time Goryeo had an active exchange, was led by the Gyo School(敎宗) and the Esoteric Buddhism(密敎). Among these, the Emperor Daozong(道宗), who had a deep attainment in Huayan(華嚴宗) study, was highly critical of Chan(禪宗). In the end, during the mid-Goryeo period the importance placed by the Beopsang-jong on reality hints strongly hints that it had found for itself a place within Goryeo society.

5조선후기 마을 위상과 전세량의 관계

저자 : 김건태 ( Kim Kuentae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5-22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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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집이 모여 있는 곳과 그 주변 언저리를 동리로 인식했다. 하지만 동리의 지리적 경계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희미하거나 애매했다. 그리고 인민들의 이동 또한 매우 활발했는데, 경계가 희미해서 인민들의 이동이 자유로웠는지, 인민들의 이동이 활발해서 경계를 분명히 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없다.
호적을 작성할 때 마을 경계를 무시하고 인민을 배치하는 현상이 빈번히 나타났다. 이웃에 거주하는 사람을 각기 다른 동리 호적에 등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통할 때 아예 동리를 무시하고 여러 동리 사람을 한 통으로 묶기도 했다. 나아가 거주하는 동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도, 여러 동리 사람을 한 통으로 묶기도 했다. 그렇게 작통하면 같은 동리 사람만으로 작통할 때에 비해 같은 동리 사람들끼리의 결속력뿐만 아니라 같은 통 사람들끼리의 결속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정부는 사람들 간의 수평적[횡적] 연대를 방해하기 위해 이렇게 작통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끈끈한 연대감 없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할 때 국가는 그들을 더욱 쉽게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인민들 간의 수직적[종적] 지배는 인정했다. 노비제, 양반 우대 전세정책 등이 그러한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양반 우대도 어디까지나 그들이 정부의 시책을 잘 따를 때 일이다. 국가는 양반들이 정부시책에 잘 따르면서 향촌교화에 앞장 설 때는 그들을 士族이라 치켜세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혹은 다른 사족들과 연계하여 정부정책에 저항하는 때는 그들을 무단토호배로 몰아 처단하기도 했다.


The divergence between villages in the Joseon period as they were deemed to exist physically and their representation in official records presents a conundrum. In the Joseon period, villages(dongni) were generally understood as areas where dwellings were clustered, circumscribed by a well-defined perimeter. However, in practice the geographical boundary of dongni proved to be very vague or unclear even to the point of non-existence. People actively moved in and out of villages, but it is unclear whether they moved so freely due to the vague nature of boundaries or whether the boundaries became blurred over time because of the active relocation of the people.
When the official census registers were being prepared, residents frequently ended up being listed in complete disregard of the village boundaries; neighbors were sometimes registered in different villages. When local residents were grouped for administrative purposes, people from different villages were sometimes grouped together. Even after advising the authorities that their villages of residence were entirely different, individuals from separate locales were still at times lumped together.
When groups are composed such a haphazard manner, not only is the unity of the people in the same village but also the unity of those in the same group significantly diminished compared with the normal situation where residents of the same village are grouped together. The government choice to muster local villagers in this manner may well have been deliberately designed to prevent lateral solidarity among the people, under the calculation that the state could control the populace more easily when its members were isolated from each other and deprived of the intimate solidarity of community.
The government did permit various types of vertical dominance among groups within the populace Joseon, as evidenced by the slavery system and the farm tax policy that gave preferential treatment to the elite yangban class. However, such advantages enjoyed by the yangban were valid only to the extent its members were compliant with government dictates. The state praised yangban as the noble class when its constituent members conformed to government policy and took initiative in improving the rural communities. However, when the individuals or coalitions within the class resisted governmental policies, the state punished them by branding them as illegitimate local hege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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