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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Honam Archaeological Society Honam KoKo - Hakbo

  • : 호남고고학회
  • : 인문과학분야  >  인류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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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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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3)~58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303
호남고고학보
58권0호(2018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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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탐라 이전 송국리형 주거취락의 변화 양상 : 삼양동·용담동 일대 유적을 중심으로

저자 : 오원홍 ( Oh Won-hong )

발행기관 : 호남고고학회 간행물 : 호남고고학보 5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25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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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탐라 이전 송국리형 주거취락의 변화상을 삼양동과 용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탐라 이전 송국리형 주거취락의 변화상은 총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토기의 변화상을 중심으로 1단계는 B.C. 7~5세기에 송국리계 심발형토기가 주류이다. 2단계는 B.C. 4~2세기에 원형점토대토기와 삼양동1식토기가 주류이며, 3단계는 B.C. 1~ A.D.2세기에 삼각형점토대토기와 삼양동2식토기가 주류이다. 1단계 취락은 송국리문화의 소규모 유입기이자 제주도 적응기로서 산발적인 주거지 분포와 위계성을 찾을 수 없다. 반면 원형점토대토기를 중심으로 한 2단계는 주거지의 밀집 현상과 각종 분묘가 출현한다. 3단계는 재지화된 위석식 지석묘의 축조와 서남부지역으로의 확산 등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대외교류를 기반으로 하는 주호의 상위계층이 수장층으로 성장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계별 취락의 성장을 통해 3세기쯤에는 탐라정치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hanges in the Songguk-ri Residence villages before the Tamra era, focusing on Samyang-dong and Yongdam-dong areas. The changes in the Songguk-ri Residence villages before the Tamra era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phases based on the change of pottery: the 1st phase where Songguk-ri-type pottery deep bowl was usually produced in the 7th to 5th century BC; the 2nd phase where circular clay-stripe pottery and Samyang-dong type 1 pottery were mainly produced in the 4th to 2nd century BC; the 3rd phase where triangular clay-stripe pottery and Samyang-dong type 2 pottery were mainly created in the 1st century BC to the 2nd century AD. In the villages at the 1st phase where Songguk-ri culture was introduced on a small scale and which is characterized by adaptation to Jeju Island, sporadic distribution and hierarchy are not found, whereas, in the villages at the 2nd phase where circular clay-stripe pottery was mainly produced, the concentration of dwellings and different types of tombs are found. The villages at the 3rd phase show advanced aspects, such as the construction of localized surrounding-stones-type dolmens and their spread southwestwards. This may be related to the transition of the upper class, which was based on foreign exchange, into the ruling class in the Juho era. It is presumed that the phased development of villages led to the transition to the Tamra political system around the 3rd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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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헌과 고고자료로 본 탐라의 대외교류

저자 : 김경주 ( Kim Kyoung-ju )

발행기관 : 호남고고학회 간행물 : 호남고고학보 5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6-51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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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이후 삼한과의 교섭을 통해 성장한 주호가 3세기쯤 상위계층이 등장하면서 대외교류의 주체인 탐라정치체로 전환되었다. 용담동 철기부장묘는 바로 한반도 남부지역 제소국과의 교역체계에 참여했던 상위계층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이다. 탐라는 3세기 후반까지 서남해안의 신미제국을 거점으로 연결되는 교역루트를 통해 마한의 선진문물과 함께 변진한 지역의 철기를 수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3~5세기대 탐라의 거점취락에서 출토되는 마한계 외래토기는 당시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의 정치체와 상호 교류의 증거이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은 5세기 후반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으로 축소되고 6세기 전반경 백제가 섬진강유 역까지 진출하면서 직접지배 영역으로 포함된다. 이처럼 교역의 거점이었던 서남해안지역 마한세력의 소멸과 백제 의 영역확장은 탐라의 교역체계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로 인해 무령왕 8년(508) 백제와 첫 통교를 하게 된다. 이후 탐라는 무령왕~위덕왕대 신속관계를 맺게 되는데 외교권을 위임한 채 자치권을 보장받는 간접지배 방식을 택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에 복속된 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지배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7세 기 후반 신라의 탐라 경략으로 직접지배 방식의 복속관계로 전환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백제 신속 기간과 멸망 후 신라의 탐라 재경략 이전까지 종래의 곽지리식토기 전통이 잔존하고 있지만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의 고고학적 물질문화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3세기대 등장한 탐라는 서남해안 지역의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의 다양한 정치체와 교역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루트는 백제의 영역확장과 신속 그리고 신라의 복속과 경략 과정에서 축소되고 와해되었지만 8세기 이전까지 國체제의 자치권을 인정받으면서 탐라라는 국명으로 지속되고 있다.


It was around the third century AD that the upper class emerged among the Juho, which grew through its negotiations with three Hans since the first century BC, made a transition to the Tamna political system as the subject of foreign negotiations. The tombs with iron grave goods in Yongdamdong imply the presence of the upper class that participated in the trade system with the small states in the southern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It seems that Tamna imported the advanced civilization of Mahan and the ironware of Byeonhan and Jinhan via the trade route networked around the Sinmi Empire along the western and southern coast until the second half of the third century. That is, the Mahan-style foreign pottery excavated at the base settlement of Tamna from the third to the fifth century is the proof that it had mutual exchanges with the political regimes along the western and southern coast including the basin of the Yeongsan River. The Mahan force around the basin of the Yeongsan River was reduced by King Dongseong's direct rule over Mujinju in the latter part of the fifth century and included in the territory of Baekje's direct rule in the former half of the sixth century when Baekje advanced to the basin of the Seomjin River. The extinction of the Mahan force along the western and southern coast, which was Tamna's base of trade, became a huge threat to its trade system along with the territorial expansion of Baekje. Tamna thus made its first friendly relation with Baekje at the eighth year of King Munyeong's rule(508). Since then, Tamna formed a relation of subordination with Baekje during the rules of King Munyeong to King Wuideok with its diplomatic rights delegated to Baekje and its autonomy guaranteed by it in the indirect rule structure. The same style of rule was maintained even after Baekje fell and was subjected to Silla. In the second half of the seventh century, Silla ruled Tamna and converted its old structure of indirect rule into that of direct rule based on subordination. These historical contexts derive from the remaining heritage of the old Gwakjiri-style pottery and the absence of clear archeological material culture in the styles of Baekje and Unified Silla between the period of its subordinations to Baekje and the fall of Baekje and Silla's rule over Tamna again. Emerging in the third century, Tamna had a trade system with various political regimes in the southern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based on the political force of the western and southern coast. Its trade routes were reduced and collapsed in the process of Baekje expanding its land and subordinating Tamna to its rule and in the process of Silla's subjugation and rule, but Tamna had its autonomy as a state system recognized and kept its name until the eigh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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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탐라의 형성과 고고자료의 상관관계 연구

저자 : 박경민 ( Park Gyeong-min )

발행기관 : 호남고고학회 간행물 : 호남고고학보 5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52-79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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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탐라'의 사회적 성격과 정체성을 고고자료를 통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목적으로 한다. 선행연구에서는 고고자료를 통해 불평등사회로의 진입, 수장층의 등장, 대외교류의 강화와 같은 정치사 중심적인 연구경향과 신진화주의 발전도식이 접목된 해석이 주로 진행되었다. 본고에서는 탐라전기의 고고자료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 성격, 즉 불평등 사회에 관한 것과 인간집단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탐라전기의 무덤이나 취락자료에서는 뚜렷한 위계화의 증거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불평등은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적어도 제도화된 계층사회를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탐라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로서 파악하기보다는 전통과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또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물질문화는 공유되는 요소와 차별화된 요소가 공존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공유와 차별이라는 복합적 정체성이 존재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정체성은 물질문화를 제작·사용하던 인간집단과 그것을 보거나 들어서 기록한 사가(史家), 그리고 그 물질문화와 기록된 문헌을 검토하는 연구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 가능한 동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The purpose of the present article was to discuss how to understand the social characteristics and identity of 'Tamna' through archeological specimens. Previous studies have mostly been showing the tendency of focusing on political histories such as entering into unequal society, emergence of head groups, and strengthening of foreign exchange through archeological specimens and interpretations combined with the development scheme of neoevolutionism. The present article discussed about how to recognize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time, i.e., unequal society and human group identity through the archeological specimens of Tamna. Since clear evidence of hierarchical ranking has not been confirmed in the grave or settlement specimens of the early period of Tamna, the possibility of concealing inequality exists, and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discuss about an institutionalized hierarchical society. The identity of Tamna should be understood as a 'process' or 'phenomenon' that is continuously changing according to traditions and context rather than as a fixed entity. The material culture at that time can be considered to have both shared and exclusive elements coexisted, and through such forms of ownership, the complex identity of sharing and exclusiveness existed. Accordingly, it should be understood as a dynamic culture that is changeable through interactions among people who made and used the material culture, historians who recorded by seeing or hearing, and researchers who review the material culture and recorde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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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풍현(西豊縣) 서차구(西?溝) 고분군의 문화적 성격과 계통 -토기의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오강원 ( Oh Kangwon )

발행기관 : 호남고고학회 간행물 : 호남고고학보 5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80-107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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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패식과 금속 이기류 등은 서로 다른 물질문화-간에도 수장층의 수요와 집단 성원의 선호에 따라 공유될 수 있는 반면, 토기의 경우에는 성격상 정치적 고려와 일시적인 선호에 의해 쉽게 바뀌지 않는 까닭에 문화적 정체성과 계통을 밝히는데 유효한 분석 대상이 된다. 서풍현 서차구 고분군은 부장 토기의 기종 조합과 개별 기종의 문양과 기형 등이 제1송화강 유역 남북 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한서문화와 유사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기원전 2~1세기 서차구 고분군은 물론 서차구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동요하 유역 서차구유형의 직접적인 문화 기원이 한서문화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차구 고분군은 한서문화 전형의 일부 기종이 결여되어 있다든지 하는 점에서 한서문화와도 일정하게 구분된다. 여러 점을 고려할 때, 서차구유형과 포자연유형은 동일 문화(포자연문화)에 속하되 시공간성과 지역성을 달리하는 물질유형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점은 두 유형 모두 표지 기종이 한서문화를 계통적인 기원으로 하고 있되, 토착적인 유물 요소의 수용과 복합 정도에서만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 동북아시아에서 두 유형만이 비파형동검 청동검병의 요소가 복합된 조형병식 동병철검·연령병식 동병철검·노하심형 이식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While the bronze buckle ornament and metal instrument can be shared according to the demend of the leader class and the preference of the group members between different material culture, in case of the pottery, it can not be changed easily by the political considertion or temporary preference, so it should be an available subject of analysis to confirm cultural identity and system. The Xichagou tombs in Xifeng is similar to the Hanshu Culture in the southern and northen area of the first Songhua River in the pottery combination and each pattern and form. Considering this point, the direct cultural origin of the Xichagou tombs as well as the Xichagou Assemblage in the East liao River should be the Hanshu Culture. Meanwile, the Xichagou tombs are partially different from the the Hanshu Culture as lack several forms. The Xichagou Assemblage and the Paoziyan Assemblage belong to the same culture, however, they each should be the cultural assembalge that itemporality and locality is different. It is verified that the acceptance and combination level of the indigenous artifact element has got local difference and only these two assemblage in Northeast Asia share an iron sword with bird-shaped bronze hilt, an iron sword with bronze hilt attached bell and the Laoheshen type earring even though the typical froms of these two aeemblages are originated from the Hanshu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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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타날문토기 등장과정에 대한 재해석 -해남 군곡리유적을 중심으로-

저자 : 한옥민 ( Han Ok-min )

발행기관 : 호남고고학회 간행물 : 호남고고학보 5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8-125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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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최근까지 연구자간 상호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철기시대 前期의 시간적 공백 문제와 관련한 답을 찾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경질무문토기에 반영된 제작기술의 변화가 타날문토기와 관련되는지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제까지 경질무문토기는 기면에 직접적인 타날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날문토기 이전의 토기군 또는 취사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 지체현상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군곡리의 토기 관찰 결과, 繩文打捺된 경질무문토기의 존재를 통해 타날문토기 제도 기술의 인지 이후로 본격적인 제작과 확산이란 프로세스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자료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근거할 시 타날문토기에 대한 인지 시점은 기원전 1세기대로 상회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다만, 호남지역에서 선출하는 타날 문양은 격자문이 절대적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기원전에 성형·소성된 경질무문토기 외면에 베풀어진 승문타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다. 물론 타날문토기의 출현을 토기 기면 전체를 타날한 경우로 한정한다면, 기원후 2세기대로 보는 기존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타날문토기의 개념에 대해 완벽한 제품을 변화 획기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 내면에 담겨진 새로 운속성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


This study aims to find an answer to the problem of time gap in the Early Iron Age, over which researchers have a continuous argument until recently. To this end, this study focuses on finding out whether the change in manufacturing technique, applied to hard plain pottery, was related to beating patterned pottery. So far, hard plain pottery has been understood as a pottery group that existed before beating patterned pottery or as displaying a delayed development resulting from the difference in cooking space. The reason is that there is no clear beating pattern on the surface of hard plain pottery. Among the pottery excavated in Gungok-ri is hard plain pottery with beating pattern, which has been confirmed to be important archeological materials that can explain the process of the full-fledged manufacturing and expansion after the recognition of the manufacturing technique of beating patterned pottery. In this light, my opinion is that the recognition period of beating patterned pottery can date back to the 1st century B.C. However, given that the lattice pattern accounts for the majority beating pattern of pottery excavated in the Honam region, it remains to be solved how to understood the seungmun beating pattern on the outer surface of hard plain pottery that was shaped and fired in the B.C. era. Of course, I would not make an issue of the existing argument that beating patterned pottery appeared in the 2nd century, when its appearance is limited to being related to the pattern present on the whole surface of pottery. I expect that this problem can be solved if an agreement is reached on whether to take a perfect product as a standard to decide the period of change or to take a new property contained inside a product as a new stan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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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남지역 마한·백제와 가야의 교류

저자 : 하승철 ( Ha Sehng Cheol )

발행기관 : 호남고고학회 간행물 : 호남고고학보 5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26-14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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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전남지역에서 출토되는 가야토기를 통해 가야 각국과 전남지역 마한·백제의 교류 또는 교섭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남의 가야문화는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 일대, 전남 동부지역으로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은 교류를 통해 가야 유물이 반입되는 반면 전남 동부지역은 가야문화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금관 가야와 아라가야 유물은 4세기부터 5세기 전반의 시기에 산발적으로 출현하고, 소가야 유물은 5세기부터 급증한다. 대가야 유물은 5세기 후엽부터 전남 동부지역에 다량 유입된다. 소가야는 5세기부터 마한·백제와 가야의 교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전남 동부지역과 소가야는 토기양식은 물론 주거지의 형태와 구조, 묘제에서도 공통점이 많으므로 소가야 문화권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가야 유물은 5세기 후엽부터 운평리고분군에 집중적으로 유입된다. 대가야 위세품의 도입과 함께 고총이 축조되고 대가야식 봉분제사, 주구제사가 실시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운평리 수장층과 대가야 수장층의 긴밀한 관계망이 구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가야의 영향력은 섬진강 하류역 전체에 미치지 못하므로 대가야의 간접지배나 직접지배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운평리 M2·M5호분 등은 오히려 소가야 묘제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전남 동부지역은 백제계 고분과 주거지, 산성의 출현시기로 보아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여수 고락산성, 용강리고분군,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 등은 백제의 진출과정을 소상히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Gaya culture in Jeonnam can be distinguished by the Yeongsan River basin, the southern coast, and the eastern area of Jeonnam. The Yeongsan River basin and the southern coast of Jeonnam are associated with exchange with Gaya whereas the eastern area of Jeonnam belongs to the cultural area of Sogaya. Exchange between Jeonnam, Geumgwangaya, and Aragaya was done from the 4th century up to the early 5th century. Sogaya led exchange between Mahan·Baekje and Gaya from the 5th century. Daegaya exchanged with the eastern area of Jeonnam from the late 5th century. The eastern area of Jeonnam is similar to Sogaya in the western area of Gyeongnam in terms of the patterns of earthenware, structure of the dwelling site, and forms of the tombs, so it is regarded as the cultural area of Sogaya. A large amount of Daegaya relics was introduced to the Complex of the Unpyeong-ri Tombs from the late 5th century. It is meaningful that Daegaya relics were induced, and also, old tombs were built, and Daegaya-style memorial services were carried out. With this, we can see that close networks were established between the heads of Unpyeong-ri and Daegaya. In the eastern area of Jeonnam, from the mid-6th century, Baekje-style ancient tombs, dwellings, and Baekje's mountain fortresses appeared. With this, we can see that from this period, the eastern area of Jeonnam came to be included into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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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마한 토기와 마한의 일상용기를 정의하고, 호남 서부지역 마한 주거지 출토 토기의 관찰을 통해 생산(성형) 공정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마한의 대표적 일상용기로는 심발·장란형토기·시루·원저단경호·주구토기·이중구연호 등이 있으며, 이들 토기는 점토제작 → 기본성형 → 정형 → 건조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기본성형 공정에서는 구연의 형태가 결정되는데, 이는 제작자의 손동작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정형 단계에서는 원저단경호나 장란형토기의 동체가 부풀려지고 바닥이 둥글려지지만, 시루의 경우는 바닥에 증기공을 뚫고 파수를 부착하는 과정을 통해 기형이 완성된다. 동체 부풀리기와 바닥의 원저화 공정은 타날기술의 도입으로 가능해졌으며, 동체를 두드리는 과정에서 점토의 접합력을 높임과 동시에 얇은 기벽의 토기를 생산 할 수 있게 되었다. 원저화 과정에서는 물레(회전대) 축흔 등 제작과 관련된 흔적들 일부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후 토기의 건조 단계를 거치는데, 건조의 구체적인 방법을 현재의 고고자료를 통해 유추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시루나 주구토기는 파수에 남겨진 지주흔과 반달홈을 통해 건조과정의 일면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즉, 수분을 함유한 파수는 그 무게로 인해 시루나 주구토기의 기형을 변형시킬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수 아래에 지주대를 받쳤음이 추정된다


This study defined Mahan earthenware and Mahan everyday pottery and attempted to restore the production(molding) process by observing the excavated earthenware from the Mahan settlements in western Honam. The most common everyday potteries of Mahan are deep bowl earthenware, long egg shape earthenware, Siru(steamer), round based jar with short neck, earthenware with a ditch(Jugu), and earthenware with a two-fold mouth. These potteries are produced through a series of processes such as clay making → basic molding → shaping → drying. In the basic molding process, the mouth shape is determined, which is closely related to a potter's hand movement. In the molding stage, the body of round based jar with short neck or long egg shape earthenware is widened and the bottom is rounded, but in the case of Siru(steamer), the shape is completed through the process of making a steam hole at the bottom and attaching the handle. The widening of the body and the process of rounding the bottom became possible by the introduction of beating techniques, and it was possible to increase clay adhesion and produce the thin walled earthenware during the process of tapping the body. In the process of rounding the base, some of the production-related signs such as spinning wheel(rotating frame), etc., disappear. The last stage is drying of earthenware, and it is very difficult to assume the concrete method of drying through the current archaeological data. However, Siru(steamer) or earthenware with a ditch(Jugu) were able to estimate one aspect of the drying process through pillar traces and half moon grooves left in handles. In other words, the handle containing water can deform the shape of the Siru(steamer) or Jugu (earthenware with a ditch), and it is assumed to put a support under the handle to preven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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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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