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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64)~105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348
대동문화연구
105권0호(2019년 03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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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환지(沈煥之)의 정치 생애와 벽파 의리

저자 : 최성환 ( Choe Seong-hwa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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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환지의 정치적 생애는 조정에서 김귀주 가문을 대변하고 홍봉한 가문을 배척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 일찍부터 노론 남당계 청류의 영수였던 김종수와 정치 의리를 공유하면서도 외척인 김귀주 가문에 한층 경도되어 있었다.
노론 벽파는 정조의 추왕 시도에 적극적으로 반대해 왔다. 영조대 후반 이래 김종수·심환지가 이끌었던 벽파는 추숭 반대론자로 익히 알려져 있었고, 순조대 초반에 노론·소론·청남 일각의 추왕 추진 세력 제거를 주도했던 정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 말년의 노론 벽파를 추숭 반대세력으로 일괄 규정할 수는 없다. 이때 김종수·심환지 등은 정조의 추왕 계획에도 내밀하게 호응하였기 때문이다.
순조 초에는 정순왕후가 황극의 역할을 대행하였으나, 그는 이를 철저히 노론 벽파를 위주로 운용하였다. 김귀주계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는 정순왕후에 편승하여, 정조로 인하여 제어되고 있었던 노론 벽파의 지론을 거침없이 관철시켰다. 살육을 동반한 환국이 조정을 다시 갈라놓았다. 이에 대한 광범한 반발은 정순왕후의 사후 노·소론 시파의 정치 보복을 초래하였다. 심환지는 김종수와 더불어 역적이 되고 관작이 추탈 되었으며, 김귀주계 벽파는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심환지는 정조대에나 순조대에나 노론 김귀주계 벽파의 정치 의리에 투철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정조의 선세자 추왕 의사를 봉행하고자 하였고, 정순왕후의 선세자 추왕 세력 배척에도 앞장섰다. 그 결과 정조대 후반 화평의 정치에 기여했던 심환지는 순조대 초반 살육의 정치를 주도한 것으로 기억되었다. 이를 심환지 개인의 처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정조에서 정순왕후로 황극이 교체된 것은 심환지의 정치적 일생을 뒤집어 놓았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심환지의 정치 생애는 황극의 작용 여부가 대신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Shim Hwan-ji(沈煥之)'s political career is summed up as representing the Kim Gwi-joo(金龜柱) family in the imperial court and rejecting the Hong Bong-han(洪鳳漢)'s family. He had earlier shared his political loyalty with the Noron(老論) Namdang(南黨) Cheongryu(淸流) but was more inclined toward the Kim Gwi-joo family. Since the late era of King Yeong-jo(英祖), Kim Jong-soo(金鍾秀) and Shim Hwan-ji have been well known for opposing the king, and they were also leading the elimination of the king's forces in the early days of King Sun-jo(純祖). But It can't be defined Noron Beyocpa(僻派) as opposing from the king in early parts of King Jeong-jo(正祖). At that time, Kim Jong-soo and Shim Hwan-ji responded to King Jeong-jo' plot secretly.
The early times of King Sun-jo, Queen Jeong-sun(貞純王后) acted as agent of Hwang-geuk(皇極), but she became to operate the government mainly Noron-Beyopa. Shim Hwan-ji rode on the Queen Jeong-soon, and carried out the political principles of the No-ron's Kim Gwi-joo. Even the slaughter, the imperial court had been re-devided. So the widespread backlash caused political retaliation by No-ron and So-ron(少論)'s Si-pa(時派) after the queen's death. Shim Hwan-ji and Kim Jong-soo became a traitor and was lost government official, and Kim Gwi-joo was completely excluded from the political situation.
The replacement of the Hwang-geuk from King Jeong-jo to Queen Jeong-sun has upset Shim's political life. Shim Hwan-ji's seemingly contradictory political career shows how much influence Hwang-geuk's actions have on his subjects, including his dep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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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초 심환지(沈煥之)의 정치활동

저자 : 김문식 ( Kim Moon-sik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6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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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초 심환지의 정치 활동이 정조의 의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고의 대상 시기는 정조가 사망한 1800년 6월 28일부터 심환지가 사망한 1802년 10월 18일까지이다.
심환지는 정조가 탕평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발탁한 인물이었고, 정조가 사망한 이후 자신은 정조의 의리를 계승하는 정치 활동을 한다고 자부하였다. 심환지의 활동에는 정조의 뜻에 부합하는 조치가 있었다. 그는 정조가 순조의 장인으로 정해 둔 김조순을 지지하여 국혼을 진행하였고, 정조의 뜻을 따라 내시노비를 혁파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조의 구상과 거리가 먼 활동도 하였다. 그는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의 『洪翼靖公奏藁』 출판을 저지하고 그 아들 홍낙임을 처형하였으며, 정조가 포용하였던 천주교도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심환지는 이런 조치가 정조의 의리를 계승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심환지는 정조의 조치를 經道와 權道로 구분하고, 권도는 시세 형편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정조가 홍낙임을 보호하고, 천주교도를 포용하며,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모두 권도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정조가 19세기에 살았다면 경도를 실천하여 자신과 같은 조치를 하였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19세기 초에 심환지는 정조의 정책을 따르거나 되돌리는 조치를 하면서 이것이 모두 정조의 의리를 따른 것이라 하였다.
심환지의 정치 활동에서 정조의 의리는 중요한 명분이었다. 19세기 초에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의리를 주도하며 정조 의리의 일각을 담당하는 정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looked at how Shim Hwan-ji's political activities in the early 19th century had to do with the loyalty of King Jeongjo. The target time for this paper is June 28, 1800 when King Jeongjo died, and October 18, 1802 when Shim Hwan-ji died.
Shim Hwan-ji was a figure chosen by King Jeongjo to implement Tangpyeong politics, and he took pride in his political activities to inherit the loyalty of King Jeongjo after his death. Shim's activities had measures to meet the wishes of King Jeongjo. He followed the wishes of King Jeongjo and supported King Sunjo and Kim Jo-sun's daughter getting married. And he abolished public slavery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King Jeongjo too.
However, he also acted far from King Jeongjo's idea. He stopped the publication of Hongikjeonggong-Jugo(洪翼靖公奏藁) of Hong Bong-han, the maternal grandfather of King Jeongjo, and executed his son Hong Nak-im. He then severely punished the Catholics who had been embraced by King Jeongjo and abolished Jangyong-young military camp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King. Shim claimed that these measures were the ones that succeeded the loyalty of King Jeongjo.
Shim saw that the King Jeongjo's actions could be divided into the gyeong-do(經道) and the gwon-do(權道), and the gwon-do could be changed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at that time. He saw that King Jeongjo protected Hong Nak-im, embraced the Catholics, and established Jangyong-young military camp as the gwon-do. And he claimed that if King Jeongjo had lived in the 19th century, the King would have done the same activities as himself by practicing the gyeong-do. At the beginning of the 19th century, Shim Hwan-ji said that all of these were in line with the loyalty of King Jeongjo, while taking steps to follow or reverse the King's policy.
In Shim's political activities, the loyalty of King Jeongjo was an important cause. In the early 19th century, Shim Hwan-ji was believed to have led the loyalty of the Noron Byeokpa Party and engaged in political activities in charge of a corner of the loyalty of King J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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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沈煥之 漢詩에 나타난 주요한 특징 중 하나를 魏晉 淸談의 풍격이라고 파악하고 이것의 문학적 성과와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글이다. 沈煥之는 老論 僻派의 지도자로서 훗날 領議政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는 同黨의 선배 金鍾秀가 豊山 洪氏 중심의 정국을 비판하기 위해서 “淸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던 것처럼, “淸淡”의 풍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여기에 정치적인 함의를 담아내었다. 金鍾秀가 後漢 말기 淸議之士를 老論 淸流之士의 희생에 대응시키는 글쓰기를 했던 것처럼, 沈煥之는 正始 연간 淸談之士를 자신에게 대응시켰다. 작품에서 나타난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沈煥之는 正始 연간 淸談 논의에서 사용된 개념어를 직접 시에서 노출하기도 하고, 隱逸, 飮酒, 放達의 형상화로 淸談의 주제를 재현하였다. 또한 불리한 정국의 측면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隱逸과 仙境의 지향을 표방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沈煥之 한시에 나타난 魏晉 淸談의 지향은 英祖 年間 老論 淸流의 이미지를 활용하면서 魏晉 淸談의 문학적 풍격을 통해 老論 僻派가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문학적 상징 구축 작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In this thesis one of the major characteristics of Shim Hwan-ji's Sino-Korean poetry was identified as the style of the poetry of Cheongdam and analyzed the literary achievement and political meaning. He was the leader of the Nolon Byeogpa and later ascended to the position of yeonguijeong. He wrote Sino-Korean poetry with Cheongdam's political implication, while Kim Jongsu wrote Sino-Korean poetry with Cheongui's in order to criticize royal Pungsan Hong family's politics. Kim wrote literary writings to correspond the sacrifice of the Nolon Cheonglyu with later Han's Cheongui. Shim wrote to correspond him with Cheongdam. Looking 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ks in detail, Shim's Sino-Korean poetry exposed the conceptual words in Jeongsi era directly, reproduced the theme of the Cheongdam with the shaping of hiding after retirement, drinking, arbitrary life. In addition, in order to justify his position in adverse political situation, he expressed the orientation of hiding after retirement, and sungyeong and used it politically. It can be said that the purpose of the WeiJin Cheongdam, which appeared at Shim's Sino-Korean poetry, was the work of constructing the literary symbol to obtain the political legitimacy through the WeiJin Cheongdam literary style through the use of the image of nolon Cheonglyu in Yeongjo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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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심환지(沈煥之)의 서화취미와 수집 ― 18세기 경화사족(京華士族) 수장가(收藏家)의 재발견

저자 : 황정연 ( Hwang Jung-yo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7-12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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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 후기 노론 벽파의 영수로 잘 알려진 沈煥之(1730~1802)의 일생을 미술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첫 사례이다. 심환지는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강경한 노선을 걸은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나, 시를 좋아하고 서화에 심취한 또 다른 모습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활동 배경에는 그가 속한 靑松沈氏 가문이 대대로 명필과 화가, 문장가를 배출해 문화적으로도 명문가였다는 사실과 그의 서예적 재능을 후원한 정조의 역할 등이 밑바탕이 되었다.
심환지는 말년에 해당하는 1780년대부터 타계하기까지 서울 北村의 삼청동에 거주하면서 壯洞金氏를 비롯한 경화 사족들과 문예적·예술적으로 교류하였고 조선 후기 대표적 서화가들의 작품을 열람하고 수집하였다. 또한 수집한 작품마다 소장 경위를 밝힌 발문을 첨부하거나 해당 작가에 대한 평가, 필법, 구도, 작품 가치 등에 대해 고루 언급함으로써 나름의 서화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南公轍로 대표되는 동시기 경화 사족이 중국 서화 수집에 열중한 것과 달리 鄭敾(1676~1759), 尹德熙(1685~1776), 沈師正(1707~1769), 金允謙(1711~1775), 姜世晃(1713~1791)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감상하고 收藏하였다. 그중에서도 진경산수화의 대가 鄭敾의 그림을 특별히 愛好한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정선의 《京郊名勝帖》과 <仁王霽色圖>가 그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서울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던 삼청동 일대 北村에서의 거주와 주변인들과 고급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던 사회적 지위, 그리고 그의 일정한 심미안이 종합된 결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he first case on Shim Hwan-ji(沈煥之, 1730~1802), a well-known politician of the late Choson period, analyzed from an art historical perspective. Shim has been known as a tough-line politician in the late Choson history, but he also loved poetry and had another aspect of his passion for painting and calligraphy. His work was based on the fact that the Cheongsong Shim family(靑松沈氏), which he belonged to, had produced many famous calligraphers, painters, and writers for generations to come and become culturally well-known, and sponsored by King Jeongjo.
Shim Hwan-ji lived in Samcheong-dong, Seoul, from the late 1780s to his death, and enjoyed literary and artistic exchanges with Jangdong Kim family(壯洞金氏) and other members of the hardened history family and collected the works of representative calligraphers of the late Choson. In addition, each collection of works was accompanied by an introduction revealing the background of the provenance, and by mentioning the assessment of the author's brush style, composition, and artistic value of the work that he left a review of his own paintings.
Unlike the fact that the Kyeonghwa sajok(京華士族, noble class-literati), which is represented by Nam Gong-cheol(南公轍), was influenced by Chinese paintings collection, Shim mostly appreciated works by artists of the late Choson period such as Jeong-seon(鄭敾, 1676~1759), Yoon Deok-hee(尹德熙, 1685~1776), Kim Yoon-gyeom(金允謙, 1711~1775), and Kang Se-hwang(姜世晃, 1713~1791). In particular, the fact that Jeong-seon's True-view landscape paintings were featured in his collection, such as Gyeongyo Myeongseung-cheop(京郊名勝帖, Painting Album of Famous Places in Seoul and Kyeonggi Districts) and Inwang Jesaek-do(仁王霽色圖, Landscape Painting of Inwang Mt.), which are considered important works in Korean painting history today, were included in his collection reflects his high connoisseurship, along with his tendency to share social status with his political-cultural colleagues in Bukchon(北村, northern village),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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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심환지(沈煥之)의 장서인(藏書印)

저자 : 박철상 ( Park Chul-sa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9-146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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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많은 학자들은 인장을 몹시 사랑했다. 그들은 인장에 姓名·字號 및 貫鄕을 새겼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새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 임금이었다. 그는 100방이 넘는 인장을 사용했는데, 그의 인장 사용은 신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정조가 깊이 신뢰했던 신하 심환지는 정조의 인장에 자극을 받아 자신의 志趣가 담긴 인장을 사용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그가 사용한 인장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Many scholars of the Choson Dynasty loved seal very much. Not only did they engrave name, byname and native place, on the seal, but they also engraved the words of what they were aiming for. The representative figure was King Jeongjo. He used more than 100 seals, whose use of the seal also affected his subjects. In particular, Shim Hwan-ji who was deeply trusted by King Jeongjo, used a book seal containing his aspiration and interest. In this paper, I looked at the meaning of the book seal he u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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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宋史』·「楊時列傳」에 보이는 “때마침 고려에 사행을 다녀온 자가 있었는데, 고려 국왕이 龜山선생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었다.[會有使高麗者, 國主問龜山安在.]”라는 일화의 변증을 통해 북송 성리학의 초기 수용 문제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한 것이다. 먼저 楊時의 존재가 고려 지식계에 인식된 경로는 당시 북송을 빈번하게 왕래하던 고려 사절단, 그리고 고려에 귀화한 북송 지식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만 「楊時列傳」에 보이는 '楊時東傳'의 일화는 당시 북송 사절단의 副使 傅墨卿이 귀국 후에 徽宗에게 楊時를 천거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이제까지 '楊時東傳'의 일화를 근거로 제기되어왔던 북송 신유학의 초기 수용 문제는 재고되어야 한다.


This paper comprehensively reviews the early acceptance of Neo-Confucianism in the Northern Song Dynasty through the textual research of the "Koryo King asked What official position is Guishan in(國主問龜山安在)" in the "Biography of Yang Shi(楊時東傳)" in the book of History of Song Dynasty(宋史). This article argues that Yang Shi's existence was probably recognized by the Koryo intellectuals through exchanges with the Koryo diplomatic corps in the Northern Song Dynasty and by the scholars and official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who naturalized to Koryo. The "King asked if Guishan is safe" appeared in the biography of Yang Shi may be added in the process of introducing to Huizong of the Song Dynasty by Fu Moqing(傅墨卿), the Deputy envoy of the Northern Song Dynasty's diplomatic corps. Therefore, the early acceptance of Neo-Confucianism in the Northern Song Dynasty should be re-exam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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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쌍화점(雙花店)>의 삼각형 욕망 구조

저자 : 이완형 ( Lee Wan-hy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3-193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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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한 작품이다. 대담한 성적 표현과 그에 대한 모방 욕망, 그리고 고려시대의 사회적 풍향과 조선시대의 문화적 경향을 읽어낼 수 있는 문제작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쌍화점>에 얹혀진 은유적 구조와 모방 욕망을 살펴보는 작업은 문학과 삶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또 다른 방법론이라 할 것이다. 제1여인과 제2여인의 갈등구조를 르네 지라르의 '삼각형 욕망' 구조에 접맥시켜보는 작업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2여인이 성적 대상자에게 가고자 하는 욕망은 제1여인을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이때 주체인 제2여인을 중개하는 것은 제1여인이라는 것이다. 대상(회회아비, 사주, 우믓 용, 짓 아비)을 꼭짓점으로 중개자인 제1여인과 주체인 제2여인 사이에서 확대되는 경쟁 관계가 르네 지라르의 '삼각형 욕망'과 일치한다. <쌍화점>에서 이러한 방법론이 가능한 것은 은유가 지속적으로 소리와 짜임과 이미지에서 중요한 틀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쌍화점>은 동일반복형 구조로 짜여 있으면서도 각 연마다 독특한 제재가 등장하고 거기에 따른 소리가 남달라서 모방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들은 연의 마지막에 와서 그 의미가 크게 확장되는데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은유는 핵심체이자 매개체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쌍화점>의 구조는 각 연이 “방문 장소 및 목적 은유(1행) → 성적 대상자 및 성행위 은유(2행) → 염문 예상 은유(3행) → 목격자 경계 은유(4행) → 성적 욕망 은유(5행) → 부정 및 질시 은유(6행)” 등으로 전개되면서 은유가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은유들은 제1여인의 발화를 통해 제2여인의 모방 욕망을 자극하면서 그 욕망을 더욱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쌍화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틀이 된다.


This essay is composed of the intention to understand the metaphorical structure revealed in < Sanghwajeom > and to find the Mimetic Desire hidden at its base. The originality of the composition of < Sanghwajeom >, the superficial boldness, the character's specificity and historical acceptability are enough to open such a possibility. This methodology is possible because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metaphor. It is for that reason that the desire to be saved from the phenomenal world of unity and abundance by imitating and imitating the transcendent object of truth is at its root. In < Sanghwajeom >, metaphor is constantly acting as an important framework in sound, texture, and image. < Sanghwajeom > is structured in the same repeating structure, but unique sanctions appear every year, and the sound that accompanies them stimulates the Mimetic Desire. They come to the end of the year and its meaning is greatly expanded. In this structure, metaphor is the core. The metaphorical structure in < Sanghwajeom > is that each kite is visiting place and purpose mention metaphor (line 1) → sexual subject and a sex act metaphor (line 2) → gossip about a person's love affair expect metaphor (line 3) → witness caution metaphor(line 4) → sexual desire metaphor (line 5) → denial and jealous looks metaphor (line 6). These metaphors are an important framework for understanding < Sanghwajeom > in that they stimulate the Mimetic Des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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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훈몽자회(訓蒙字會)』의 훈(訓)에 실린 한자음 고찰

저자 : 이준환 ( Yi Jun-hwa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5-22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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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訓蒙字會』(1527)의 訓에 실린 한자어와 한자어를 구성 요소로 포함하는 어휘에 반영되어 있는 한자음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으로, 「叡山本」과 「東中本」을 텍스트로 삼아 훈에 제시된 한자음이 音部에 제시된 한자음과 다른 경우와 수록 한자가 없는 탓에 音部에서는 볼 수 없는 한자음이 훈에 보이는 경우로 나누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聲母와 관련해서는 전청 성모의 격음화와 관련한 양상, 日母(/ㅿ/)의 변화와 관련한 양상, 舌上音 聲母의 正齒音化와 관련한 양상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韻母와 관련해서는 한자음의 층위와 관련하여 의미 있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었는데, 通攝의 '纛둑', 遇攝의 '礎츄', 蟹攝의 '芥계', 流攝의 '頭도' 등과 같이 근대음적 층위를 반영한 것과 臻攝의 '根□', 曾攝의 '賊□' 등과 같이 고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외에 '구화', '모과' 등과 같은 다수의 근대 한어계 차용어가 들어와 쓰임을 통해 근대 한어와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 등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양상을 보이는 『훈몽자회』 훈 속에 담긴 한자음은 실제 국어 언중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는 어휘 속의 한자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국어 한자음의 층위와 관련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기도 하며, 국어 속에 들어와 있는 한어계 차용어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휘 속에서의 日母, 來母 등의 한자음의 음운 변화의 양상을 잘 보여 주며, 국어 한자음의 격음화 양상을 살피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국어 한자음에서의 복수음자의 사용 실태를 살피고, 국어 한자음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끼친 유추 등에 관하여 생각해 볼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등 어느 하나로 성격을 단정짓기가 어려우므로 앞으로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 나갈 필요가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aspects of Sino-Korean reflected in the vocabulary, which includes Chinese characters and Chinese characters in Hunmongjahoe(1527). For this purpose, I used Yesanbon and Dongjungbon as texts in this article. And the case where the Sino-Korean presented in the meaning(definition part) is different from the Sino-Korean presented in the note and the case where the Chinese character which can not be seen in the note is seen in meaning because there is no recorded Chinese character. As a result, we could see the aspect related to becoming an aspirated sound and the aspect related to the change of ilmo(日母)(/ㅿ/) related to initials and so on. As for the finals, we could see that there is not much that can be meaningfully examined in relation to the layer of Sino-Korean. In this sense, the Sino-Korean in the meaning of the Chinese character is shown in the form of Sino-Korean in the vocabulary circulated among the Chinese characters and preserves the data related to the layer of Sino-Korean. It shows the appearance of borrowed words from Chinese well. And it shows the aspect of the phonological change of Sino-Korean in the vocabulary. Also, it is meaningful in that it provides data to consider about the actual use of multiple Sino-Korean characters in Sino-Korean, and the analogy which affects the formation and change of Sino-Korea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continue research on the Hunmongjahoe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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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장생의 『경서변의(經書辨疑)-맹자(孟子)』에 대한 일고

저자 : 함영대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9-25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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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의 『맹자변의』는 저자의 만년인 71세에 완성한 『경서변의』의 하나로 맹자 주석사에서는 교정청 언해가 만들어진 후에 제출된 최초의 맹자 주석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경전에 대한 隨手箚記적 성격을 지닌 저작으로, 義理를 강론하는 것은 바로 '天下公共之事'라는 주희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희의 견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흥미로운 저작이다.
기존 연구를 통해 이 『경서변의』가 정경세의 「金沙溪經書疑問辨論」이나 한원진의 『經義記聞錄』, 『朱子言論同異考』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 이 『경서변의』의 저작을 통해 湖西士林의 宗匠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사서삼경에 대한 주자주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면서 조선 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조선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한 점이나 주자학적 경학서가 폭증하는 계기를 마련한 점도 평가받았다. 또한 성리학의 심층을 탐구한 내용이 경전 주석에 반영된 것을 17세기 학문의 심화로 평가하는 시각도 제출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맹자변의』의 분석을 통해 사계의 경학이 사서집주대전에 수록된 주자주를 본격적으로 주목하고 그 내용의 득실을 분석했다는 것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시하여 검토했다. 義利之辨에 대한 의미의 부여와 대전본 주석에 등장하는 역사사실과 인물고증의 문제를 문헌비판을 통해 짚어내고 있는 점을 살펴보았다. 양혜왕 삼십 년에 제나라가 위나라를 격파하고 그 태자 申을 포로로 잡은 사실과 曾西에 대한 고증에서 사계는 매우 치밀하게 역사사실과 인물고증을 전개한다.
韻書와 字書를 인용하여 사물고증을 통해 명확한 본문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나 주석의 문헌을 비교 검토하여 나아가 주자주석의 同異점까지 따져보면서 본인의 견해를 제시하는 점이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국가적인 작업을 통해 제출되었던 언해에 대해서도 그 문맥과 音을 검토하고, 구두에 대해 조정하는 등의 수준을 짚어 보았으며, 대전본의 판본을 두루 검토한 정황과 다양한 참고서목을 제시하여 본격적인 경전 주석으로서의 면모를 짚었다. 특히 師友들과 진행한 토론 정황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여 당시 조선학계의 수준을 보여준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다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語彙와 句文의 해석에 비교적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초보적인 해석 단계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여전히 『맹자석의』의 영향력이 지속되었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비판적 독서물로서의 성과는 소홀히 평가할 수 없지만 그 주석의 수준은 여전히 낮은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경학의 입장에서 조선 주자학은 퇴계와 율곡에서 정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성장하고 있었던 정황을 보여준다. 조선 맹자학사의 흐름에서는 퇴계의 『맹자석의』의 성과를 수용하여 뒤에 등장하는 조익의 『맹자천설』과 권득기의 『맹자참의』를 견인하며 해석적 시야를 확대, 심화한 것으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Maengjabyeonui(孟子辨疑)』 of Sagye Kim Jang-saeng is one of 『Confucian Classics Byeonui(經書辨疑)』 that it has a significant implication as the first connotation of Mencius submitted after having the Korean annotation of Gyojeongcheong(校正廳) (temporary government agency to overview policy legislation in Choson Period) for the connotations of Mencius. It is the writing for his final days having the characteristics of manually recorded for the Scriptures. On the basis of theory of Zhu Xi that preaching of righteous way is the 'natural and open affairs of the world', it is an interesting article as it presents the critical opinion on the opinion of Zhu Xi as well.
Through existing studies, it has pointed out that this 『Confucian Classics Byeonui』 has influenced on 「Kim Sagye's Confucian Classics Uimunbyeonron(金沙溪經書疑問辨論)」 of Jung Gyeong-se(鄭經世) and 『Gyeonguigimunrok(經義記聞錄)』 and 『Jujaonrongongigo (朱子言論同異攷)』 of Han Won-jin(韓元震) as well as the fact that it was a turning point to settle as the master of Hoseo Scholars through the writing of 『Confucian Classics Byeonui』. It is assessed for preparing the turning point for the full-scale deployment of the Jujahak(new Confucianism) in the Choson Period by quoting the assertions of scholars while reviewing the Annotation of Zhu Xi on the Saseosamgyeong(四書三經) (the Seven Chinese Classics the Four Books and the Three Classics) during the Choson Period or the point of laying down the foundation to dramatically increasing the books on Confucian Classics on Jujahak after the Confucian Classics Byeonui. There also is a view that evaluated the reflection of contents sought for in-depth study on Neo-Confucianism onto the connotation of the Scriptures that was assessed to be deepening of the 17the century academics. However, it is required to calibrate the existing opinions through the detailed analysis on documents.
Under this thesis, it has presented and reviewed of detailed contents that it paid full attention on the Annotation of Zhu Xi listed on the 『Saseojipjudaejeon(四書集註大全)』 for the Confucian Classics of Sagye through the analysis of 『Maengjabyeonui』 and made the analysis on gains and losses on its contents. It has taken a look at the point shown through the literature criticism for the issues of verifying the historic facts and persons appearing on the connotation of Daejeonbon along with the implication on Uirijibyeon(義利之辨). Sagye deployed the historic fact and personnel in its extreme sophisticated ways on Jeungseo and the fact that Kingdom of Je defeated the Kingdom of Wei in the 30th year of King Hui of Liang and the Prince Shin was captive from the war.
It is highly assessed for the point of pursuing the clear interpretation of context through the full verification by quoting essays and dictionary and presenting one's opinion by considering the same and different points of annotation of Confucius with comparison and review of written literatures of annotation. For the annotations submitted through the national work, the context and sound are reviewed and the level to adjust the verbal statement was assumed, and it presents the phases to present the situation to review the copied version of Daejeonbon and various reference publications to display the appearance as the full-scale connotations of Scriptures. In particular, it enthusiastically presents the situation of discussions with colleagues in a way of affirming the level of academic sector of Choson Period of the time.
However, notwithstanding such a fact, it still has its limitation in that the influence of 『Maengjaseokui(孟子釋義)』 has continued through the aspect of primitive interpretation phase that displays overwhelming interests in the interpretation of vocabularies and idioms. The outcome as the critical reading may not be evaluated for too low, but the level of connotation has to be acknowledged as still in low phase, and in the position of Confucius Classics it has to agree that the Neo-Confucianism of Choson Period has been growing after Toegye Yulgok. It requires reviewing the subject read by Sagye and its facilitation in more in-depth.
Under the flow of Mencius Haksa, it accommodates the outcome of Toegye's 『Maengjaseokui(孟子釋義)』 to lead the later appearance of 『Maengjacheonseol(孟子淺說)』 of Jo Ik(趙翼) and 『Maengjachamui(孟子僭疑)』 of Deuk-ki Kwon(權得己) in an evaluation for its implication to expand and deepen the interpretative insight.

KCI등재

10조선 세 중신(重臣)의 심양(瀋陽) 구류와 교유 ―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이경여(李敬輿)의 경험

저자 : 오항녕 ( Oh Hang-nyeong ) , 최옥형 ( Cui Yu-he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5-29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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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수도 瀋陽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잡혀 온 포로와 인질, 분주히 오가는 사신들이 머물렀다. 침략과 패배를 겪은 조선인에게는 특수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다. 본고에서는 심양에 억류되었던 조선의 세 重臣인 김상헌, 최명길, 이경여를 중심으로 심양살이의 실제와 의미를 살펴보았다. 특히 '척화(=항전)와 주화'의 당사자들이 심양에서 같은 곳에 구금되어 서로 이해하고, 그 경험이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심양은 치욕과 분노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은 서로의 마음만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전후의 노선을 '經權'의 관점에서 풀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은 심양 구금 생활을 통해 오해를 풀고 정당성을 얻었다. 여기에 이경여도 간여하면서, 현실 대응이 달랐을 뿐 명분과 지향은 같았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심양의 경험은 이후 송시열, 남구만, 이민서, 김수항, 김수증 등 세 중신의 후손이자, 조선의 정치-사상계의 주역들에게 전해졌다. 김상헌은 의리의 표상을 굳건히 하였고, 최명길은 한켠의 의심을 씻고 나라를 구한 공을 인정받았으며, 이경여는 온후함으로 이들 사이의 지렛대가 되었고 復讐雪恥의 또 다른 기둥으로 떠올랐다. 심양의 영향은 이들 중신 집안의 혼인과 교유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己巳士禍와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심양의 경험과 기억은 파탄났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이 김수항의 賜死를 주도했던 오시수 등을 천거하여 등용한 일이었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 김창흡은 최석정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 이 절교는 20여 년 뒤 최명길의 손자 최석항이 앞장서서 김상헌의 증손자 김창집 등과 이경여의 손자 이건명, 이이명 등을 무고하게 죽이는 신임사화에서 더 악화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Shenyang, the capital of Qing China, was the place of the captives, hostages, and envoys of Choson after the Qing Invasion in 1636. For the people of Choson who defeated Shenyang was also the place of complex sentiments with indignity and dishonor. I studied the life and reconciliation of the three persons of Choson who did a leading role at the dispute during the Namhan-fortress resistance and were interned in Shenyang one by one.
Kim Sang-heon, Choi Myeong-gil and Yi Kyeong-yeo were transferred and imprisoned with different reasons and times each other. For them Shenyang was the place of rage and resentment and the chance to reflect the idea of the others because of the time of unable. The conflict between the cause and response could resolve in this time.
The experience of Shenyang prison transferred and reminded Song Si-yeol, Nam Gu-man, Yi Min-seo, Kim Su-hang who were their descendants and followers with positive memories strengthening the representative of Kim Sang-heon of the cause in the resistance 1636, recognizing the merit of the negotiation of Choi Myeong-gil, endowing the new face to Yi Kyeong-yeo. The experience appeared in marriages and relationship among them.
However the favorable relationship was ruined in the course of the calamity of literati in 1689. After the restoration of 1694 Choi Seok-jeong, a grandson of Choi Myeong-gil, recommended Oh Si-su, Yi Seo-wu etc. who insisted the death penalty on Kim Su-hang, a grandson of Kim Sang-heon, and Yi Sa-myeong, a grandson of Yi Kyeong-yeo in 1689. Kim Chang-hyeop and Kim Chang-heop sent a letter breaking off friendship. The break in 1698 resulted in the disastrous false accusation and oppression of the Soron to the Noron in 1721~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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