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대동문화연구 update

  •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5-3820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107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372
대동문화연구
107권0호(2019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언어=사실'의 세계 ― 전쟁과 르포르타주

저자 : 車承棋 ( Cha Seung-ki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27 (2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일제말 전시체제기 '사실의 세기'의 대표적 문학형식으로서 보고문학의 생산이 강요되었던 위기적 맥락에 주목해, 르포르타주적 글쓰기와 관련된 정치적, 미학적 문제를 숙고하고자 했다.
기존의 질서, 가치, 규범 등이 위기 상태에 처해지는 순간, 말과 사물이 맺어온 기존의 관계가 붕괴되거나 위태로워지고 새로운 관계가 모색된다. 이 위기 상태는 늘 그때그때의 사실과 대면할 것을 요구해 왔고, 르포르타주적 글쓰기는 그 요구에 응답해 왔다. 1차 세계대전 후 아방가르드의 자율성 예술 비판, 마르크스주의 문화운동의 선전과 연대, 전쟁시기(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한국전쟁까지)의 종군문학 등이 그 응답의 일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전시체제는 예외상태를 상례화하는 전선/총후의 정치적-의미론적 장치 아래 문학을 포획해 전선의 '사실'을 보고할 것을 강요했다. 이로써 근대 문학의 제도적 존립 근거들과 개인의 자율성 신화가 심각하게 의심받게 되었으나, 위기의 글쓰기로서의 르포르타주는 공식 미디어에 흡수되었고, 문학 자체를 '보고'로 만들어버리는 자폐성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속도, 탈개성성, 조직력이라는 특성을 갖는 반[半=反]-장르로서 르포르타주는, 분리되었던 것을 연결하면서 문학을 다른 사용에 맡기는 실천의 일부로서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다.


This article intends to contemplate political and aesthetic issues related to reportage writing, focusing on the critical situation during wartime that colonial Korean writers were forced to produce reportage literature (bogomunhak) as an representative literary form of the "century of facts".
At the critical moment of order, values, and norms, the existing relationships between words and things collapse or are in jeopardy, and then a way to forge new relationship can be found. Reportage writing has been a response to the demand to confront the facts of the time in the crisis. It can be said that Avant-Garde criticism of the art of autonomy after World War I, the propaganda and solidarity of Marxist cultural movements as well as military literature during wartime from the Asia-Pacific War to the Korean War were such responses.
Imperial Japan's wartime system captured Korean literature in the front/rear political-semantic dispositif to set the state of exception as usual and forced it to report the "FACT" of the front lines. Accordingly, reportage, as writing of crisis, integrated into the official media although the institutional basis of modern literature and the myth of individual autonomy had been seriously questioned. Reportage writing during wartime could not overcome the autistic characterization to limit the literature itself to a 'report.'
However, reportage as an anti/semi-genre marked by promptness, de-individuality, and organizing ability retains its potential as part of its practice to link up separate things and to employ literature otherly.

KCI등재

2반전하는 자의 고투 ― 고바야시 마사루의 한국전쟁

저자 : 金艾琳 ( Kim Ye-rim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53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고바야시 마사루의 『斷層地帶』와 「가교」에 나타난 반전 윤리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50년대 초반 일본의 한국전쟁 반대운동이 지닌 역학과 의미를 분석한다. 고바야시 마사루는 '조선'을 회피할 수도 없고 회피해서도 안되는 '사건'으로 회부하면서 한국전쟁에 협조하는 일본을 향해 통렬한 비판과 성찰의 육성을 들려주었다. 그는 일본공산당 당원으로서 1952년 화염병 사건에 참여했다. 두 텍스트는 이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윤리적 지향은 반전 운동에 참여했던 당원들을 향해 있는데, 이들의 실천과 신념은 일본공산당의 강령 변화와 더불어 온전히 의미화되지 못한 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잊혀졌다. 이 시기를 다룬 고바야시 마사루의 두 편의 소설은 망각된 행동대원들을 기리는 시도이자 당시 일본의 대항세력이 조선에 대해 가졌던 책임을 성찰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작품 사이에는 인식론적 간극이 있다. 이 글은 『斷層地帶』를 진정성의 서사로 파악하고 「가교」를 자기-중심적인 진정성의 서사를 넘어서는 서사로 독해했다. 『斷層地帶』에서 반전 윤리가 뚜렷하게 표명되고 있다면 「가교」는 자기-대상화를 통해 반전윤리를 응시하는 윤리라는 메타윤리를 생성하고 있다.


This paper explores the dynamics and meaning of the anti-Korean War movement in the early 1950s in Japan, especially focusing on Kobayashi Masaru's ethics suggested in his two works 『斷層地帶』(Fault Plane) and 「Gagyo」(The Bridge). He is known as remarkable novelist criticized Japan's collaboration for the Korean War through submitting Choseon as 'present' problem which can not and should not be avoided by post-war Japan. He participated in anti-Korean War demonstration called "Molotov Cockail event" as a member of action group of Japan Communist Party and wrote two stories transcribing the experiences of the time. His ethical directivity headed for those who engaged in attack munitions factories and actual fight in the street, who became targets of criticism and oblivion following the change of doctrine and tactical strategies of the party. His two works are attempts not only to remember the forgotten activists but also to face up their own responsibility for Choseon and its undeniable limit. There's epistemic distance between 『斷層地帶』 and 「Gagyo」 in that the former is the narrative of authenticity of Japanese anti-war subject, while the latter goes beyond ego-centered authenticity. If 『斷層地帶』 shows ethics of anti-war itself, 「Gagyo」 constructs meta-ethics, in other words, the ethics of gazing at anti-war ethics by self-objectification.

KCI등재

3기지(基地)의 '평화'와 전장의 글쓰기 ― 장혁주의 한국전쟁 관련 텍스트(1951~1954)를 중심으로

저자 : 張世眞 ( Chang Sei-ji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5-88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일본어로 쓰여진 장혁주의 한국전쟁 관련 텍스트들, 특히 『아, 조선』(1952)과 『무궁화』(1954)를 당대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교차하며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전쟁이 벌어진 바로 그 실시간대에 장혁주가 한국과 일본을 두 차례 오가며 쓴, 당시로선 매우 예외적인 한일 간 越境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텍스트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서는 장혁주의 한국전쟁 텍스트들이 견지하는 거의 일관된 특징으로, '중립'의 감각을 제시했다. 우선 한국(어)의 맥락에서 볼 때, 중립이란 남한이나 북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보기 드문 '객관적인' 입장에 해당된다. 『아, 조선』에서 중립의 입장은 북한 뿐 아니라 남한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한 실상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무궁화』의 경우 남과 북의 대립을 지양했던 해방기 이래 '중간파' 정치인 집안의 몰락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 모든 재현은 한국 정부의 검열에서 자유로운, 일본어 글쓰기와 일본 매체 출판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가능한 성취였다.
그러나 일본(어)의 맥락에서 보자면 장혁주 텍스트의 '중립'이란 실은 전혀 다른 지평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 글에서는 장혁주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중립의 태도가 조선의 전쟁에 결코 휘말리지 않겠다는 당시 일본 사회의 주류적인 평화 담론의 맥락 속에서 독해되어야 한다고 파악하였다. 물론, 일본 사회의 평화론은 평화헌법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의의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평화국가라는 일본의 자기 표상이란, 사실상 '기지국가'로서 대규모 인원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킨 현실을 누락시킬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장혁주의 텍스트는 한국의 전장을 직접 목격한 후에 쓰여졌지만, 당시 일본의 전쟁 연루 양상은 말끔히 삭제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장혁주의 한국전쟁 텍스트들은 '강 건너 불'이라는 대중적인 인식 차원의 朝鮮戰爭, 즉 '朝鮮=戰場', '日本=平和'라는, 일본 사회의 주류적인 담론 분할을 깊숙이 내면화하거나 혹은 이러한 인식을 보다 심화시킨 경우에 해당된다.


This article aims to read Chang Hyeuk-Ju's texts on Korean War, especially Alas Chosun(1952) and Mugunghwa(1954) by cross-checking on the historical context of Korean and Japanese society at that time. Chang Heuk-Ju wrote these texts after making two round trips in real time when Korean War broke out, which was very exceptional and make these texts noteworthy.
This paper presents the sense of neutrality as consistent feature of Chang Heuk-Ju's texts on Korean War. In the context of Korea(n), the Neutrality means 'objective' and rare stance taking neither side in the warfare of North and South Korea. This neutral position of Alas Chosun made it possible to criticize not only North Korea but also the incompetence and ward-heeling politics of Rhee Syngman government in a fare and square way. In case of Mugungwha, the neutral position reveals itself in a way that mourns a downfall of Kim(moderate party's politician)'s family which had been rich and influential for generations. All these representations were possible under the condition of Japanese writing and Japanese media which were free from the censorship of Korean government.
However, it should not be overlooked that the neutrality of Chang Heuk-Ju's texts was originated from totally different horizon in considering Japanese context at that time. This paper proposes that the neutral attitude of Chang HeuK-Ju's text must be read in the context of mainstream peace discourse in Japan those days. Peace discourse cannot be underestimated considering that it showed the will to preserve Article 9 of the Constitution. The self representation of Japan, however, was problematic because it was not established before Japan omitted the reality of participating in Korean War in a large scale as a military base state.
In Chang's texts, the aspects of involving in Korean War were clearly erased, though they were written after Chang witnessed the Korean battle field reality. The bottom line is that Chang's texts internalized the popular view that Korean War was a totally another's affair then. Or It can be said that his texts intensified this kind of general opinion.

KCI등재

4냉전 금제와 프로파간다 ― 반란(叛亂), 전향(轉向), 부역(附逆) 의제의 제도화와 내부냉전

저자 : 李奉範 ( Lee Bong-beom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9-143 (5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반란, 전향, 부역 등 주요 냉전의제의 기원 및 제도화 과정과 그것이 장기 지속될 수 있었던 원천을 프로파간다에서 찾고 있다. 미소 분할점령 하 한반도는 세계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냉전의 소용돌이에 갇힌다. 특히 모스크바 삼상회의협정을 계기로 국내 모든 세력이 반탁/지지로 분립되어 형성된 왜곡된 프레임의 극단적 전개는 때 이른 냉전질서가 부식되는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1947년 9월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한반도의 대내외적 냉전화가 촉진되는데, 그것은 냉전이 한반도에서 명시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선단정 국면을 거치며 민족국가 수립 관련 의제들의 압축적 분출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을 거쳐 분단의 제도화로 귀결된 뒤 국가보안법 제정을 계기로 반란, 전향, 부역 의제가 한층 강화된 냉전적 진영대립과 결합하여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의미 변용과 계기적 연쇄를 통해 한국사회에 전일적 냉전구조가 고착되기에 이른다. 여순사건은 극우반공체제가 촉진·구축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공식적으로 토벌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지리산공비토벌, 제2, 제3의 여순사건 등의 명명을 통해 재생되어 내부평정작업을 뒷받침하는 이념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반란의 대명사로 고착, 각인되었다. 그 과정에서 문학, 영화, 사진의 특정 이미지 재현과 관민합동의 프로파간다를 통해 반란으로서의 여순사건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학살의 정당화,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공포, 적대, 증오가 조장되었다. 국민보도연맹 창설로 본격화된 전향은 국가보안법의 뒷받침 속에 대량탈당을 통해 사회주의자는 물론이고 중도파,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까지 망라된 방대한 전향으로 현시된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의 포섭, 교화 단체였을 뿐만 아니라 좌익섬멸단체로서 남·북로당 분쇄를 비롯해 반정부세력 일체를 파괴하는 공작을 시행하였고, 전향-감시-동원의 권력테크닉을 구사했다. 인간의 사상을 개조한다는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논리로 전향제도가 시행되었기에 이 시스템은 더욱 폭력적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었다. 문화영역의 전향은 색출, 포섭, 전향, 동원, 감시의 전향메커니즘이 잘 구현된 경우로 문화적 내부냉전구조와 상시적인 동원·감시체계를 정착시키고 반제반봉건 문화의제가 완전히 좌절되는 가운데 친일문화인의 제도적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다. 반민특위 해체와 한국전쟁, 법적으로는 반민법과 부역법의 교차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민족 가치를 압도한 가운데 附共 부역이 반역의 단일한 표상으로 대두한다. 친일파가 빨갱이를 단죄하는 아이러니컬한 형국이 조성된 것이다. 잔류했거나 부역혐의가 의심되거나 부역자로 입증된 문화인들은 합동수사본부와 자체 부역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했더라도 자신의 부역 체험을 고백, 참회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고, 그로 인해 각종 체험수기가 속출했다. 당시의 모든 체험기는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고 대공전선 강화를 위한 선전전 자료로 활용되면서 공포와 적의를 고취시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담론 효과를 발휘했다. 일부는 자유세계로 전파, 확산되어 냉전 심리전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문화계는 부일 부역과 부공 부역을 결합시킨 민족반역프레임이 가동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좌익, 전향, 부역, 월북(남) 등의 냉전금제들이 종합적으로 재구성된 민족반역프레임이 주조, 구축되면서 국가폭력을 능가하는 규율장치로 군림하는 가운데 냉전분단체제의 문화권력을 (재)생산하는 장기지속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 같은 냉전금제들은 프로파간다를 통해 침투, 부식되었다. 대내외적 냉전구조의 정착과 대응해 한반도는 선전전(Propaganda War)의 전장으로 비화되었고, 미국의 전략심리전과 한국정부의 대북 선전전 및 대내 선무심리전이 결합적으로 전개되었다. 냉전반공을 공동의 자원으로 마음의 점령을 목표로 한 관민협동의 선전전을 통해 생성한 이미지가 반복 재생되어 고정화되고 그것이 법, 제도, 담론, 일상, 신체, 정신의 영역 전반에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회로가 구축됨으로써 疑似합의적 냉전mentality가 용이하게 부식될 수 있었다.


This study finds out the origin of major Cold War taboo like rebellion, conversion, treachery and its process of institutionization and the sources it could have lasted for a long time in propaganda. In September 1947, Korean issues transfer to the United Nations and it causes to promote internal and external Cold War on the Korean Peninsula. This means the Cold War has been clarified on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an the phase of single-handed election and separate government, ideological confrontation and compressed eruption of agendas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state are concluded by institutionalization of division. After that, the Cold War confrontation caused by enactment of National Security Law is combined with agendas like rebellion, conversion, treachery, thus, a full time Cold War structure has set in Korean society through the opportune connection and transformation of various ideological meaning. Yo-Soon Revolt became an opportunity to promote and construct the anti-communism and extreme right system. In that process, a fear, hostility, hatred about communism and justification of genocide and distorted recognition about Yo-Soon Revolt has been fuelled by private-public joint propaganda and the reappearance of special image in literature, film, photographs. National guidance federation, an organization for bring round convert and also annihilate left party was implement the operation that destroy the opponents of the regime and commands the power technique of conversion-surveillance-mobilize. Conversion in cultural area is instance of best implemented conversion technique of hunt down, bring round, conversion, mobilize, surveillance. Institutional reinstatement of pro-Japanese cultural artist is realized while constant surveillance-mobilize system and cultural interior Cold War structure become established and ultimately discouraged anti-imperialist and anti-feudal cultural agenda. While ideological value overwhelmed the nation value because of the Korean War, communism treachery has emerged as single representation. Treachery cultural artists had to go through the procedure of confession and repentance, it caused appearance of various memoirs of experiences. At that time, all experience records used for propaganda material to reinforce the anticommunist front by inspiring fear and hostility, which strongly demonstrates ideological discourse effect. The Korean War caused forming frame of the nation rebellion entangled with Cold War taboo like the left, conversion, treachery, defection to North Korea. It functioning as long-lasting apparatus reproducing the cultural power of the Cold War division system and reigning as discipline apparatus which surpass the state violence. Cold War taboos as above are infiltrated and rotten by propaganda. The image made by the propaganda war cooperation between the state and people which aimed at the occupation of the mind and made a Cold War against communism to common resources has been displayed repeatedly and fixed. Through this codification, the course formed and it functioning as ideology in law, system, discourse, daily life, the body, spirit so that pseudo-Consensual Cold War mentality could corroded easily.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拓跋珪(道武帝) 登國年間 기록을 재검토하여 拓跋珪가 처음부터 代北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확립되었다고 기록한 『魏書』 「太祖紀」의 기록이 사실을 왜곡했음을 논증한 논문이다.
383년 淝水의 전쟁 패배 이후 前秦이 붕괴되자 後燕을 세운 慕容垂는 代北의 獨孤部·賀蘭部 등 유목세력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 밑에 있던 拓跋珪를 보내 拓跋部의 수장이 되도록 공작하였다. 拓跋珪의 주변에 拓跋部의 수장 자리를 다투는 숙부 拓跋窟咄과 사촌동생 烏渥, 獨孤部의 劉顯, 숙적 鐵弗部의 劉衛辰의 숙적들이 있었다. 後燕은 窟咄, 劉顯의 獨孤部, 賀蘭部 등 적대세력을 격파하여 代北에서 反後燕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代北에서 拓跋部를 견제할 강력한 세력이 사라지게 되어 拓跋部가 상대적으로 강해졌고, 이는 拓跋珪가 後燕으로부터 자립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는 本稿에서 北魏 道武帝 登國年間 後燕과 北魏의 관계를 복원하였고, 北魏는 後燕의 代北 정책 가운데 반사이익을 얻었고, 자력으로 劉衛辰의 鐵弗部를 정복한 후에야 後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魏書』 「太祖紀」는 처음부터 拓跋部(北魏)가 後燕을 조공국으로 둔 '皇帝國'이었으며, 拓跋部와 後燕의 실제 세력관계를 반대로 서술하며 왜곡하였다. 또 前秦이 拓跋部(代)를 정복한 후 영토의 서쪽을 鐵弗部의 군주 劉衛辰에게 다스리라고 한 『魏書』의 기록은 『晉書』, 『魏書』, 『資治通鑑』에 기록된 劉衛辰의 활동 기록을 검토하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拓跋部는 鐵弗部 정복 이후 鐵弗部 정복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前秦의 拓跋部 정복 이전부터 鐵弗部가 拓跋部의 영토 혹은 屬國처럼 粉飾한 것이다. 이는 拓跋部에 충성했고 舊拓跋部의 동쪽을 통치했던 劉庫仁이 실제로 죽기 전까지 前秦의 苻堅에 충성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賀蘭部와 獨孤部는 拓跋部에 의해 강제로 부족(部落)이 해산된 것이 아니라 後燕에 의해 격파되어 後燕의 영토로 遷徙되었고, 拓跋部는 남은 소수의 賀蘭·獨孤 2部의 잔여세력을 어부지리로 얻었을 뿐이었다. 賀蘭部가 수십 部, 獨孤部가 36部를 거느린 세력이었음을 고려하면, 後燕과 拓跋部의 공격을 받아 이산된 諸部는 두 部가 거느리고 있던 수십 部와 36部였다. 즉 賀蘭部와 獨孤部의 “離散諸部” 혹은 “散諸部落”은 부족연합체의 해체와 개별 부족으로의 환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다른 부족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논문은 拓跋部의 멸망부터 北魏의 河北 점령 이전까지 拓跋珪(道武帝)의 초기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왜곡되었음을 밝히고 後燕 중심의 代北 遊牧諸部의 세력 관계와 흥망의 原像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This thesis is on reconsideration of Taizu Annals of Weishu and demonstration of foreign relation between Later Yan and Tuoba Tribe(Northern Wei). According to Weishu, after Former Qin's lose in Feishui river, Tuoba Gui rebuilt and founded the Tuoba Tribe(Northern Wei), conquering Dugu, Helan and Tiefu Tribe, defeating Later Yan and occupied the Hebei region. But, examining Comprehensive mirror for aid in government(資治通鑑) and Jinshu, Tuoba Gui's success was due to Murong Chui's military aid checking enemy Dugu and Helan Tribes which were loyal to Former Qin. He helped his nephew Tuoba Gui to become the tribal leader of the weakest Tuoba Tribe in Daibei regions and to win in the succession dispute of Kuduo, assisted by Murong Ying, opponent of him. And he conquered Dugu and Helan Tribes to reinforce military soliders and horses, and to get rid of rear enemy, fighting the residue forces of Former Qin, Murong Ying, and Eastern Jin, which was the start of Tuoba Gui's rising. Using this power vacuum, Tuoba Gui defeated old enemy Liu Weichen, the leader of Tiefu Tribe, and conquered many small tribes in Daibei and Yinshan region, after all beat Later Yan. Murong Chui regarded Tuoba Gui as childish and weak nephew of Tuoba tribe leader didn't expected the latter was stronger and had the power to defeat his army, so didn't keep an eye out young nephew, which was his fault. I argued that Tuoba Gui could not dissolve the tribes himself such as Dugu and Helan Tribes which was defeated by Later Yan, so tribal dissolution was not true.

KCI등재

6『보한집(補閑集)』에 나타난 최자(崔滋)의 사륙문(四六文) 비평(批評)

저자 : 張玲玉 ( Zhang Lingyu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7-215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고려시기 사륙문은 고문보다 더 성행하였다. '사륙문'이란 명칭은 중국 당나라 때 이상은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표, 장, 계, 전 등의 공문서를 포함하고, 후대에 주로 사용되는 '변려문'이나 '여문'이라는 명칭보다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은 편이다. 사륙문의 성행에 따라 고려시대 사륙문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시화·시평집인 『보한집』에는 사륙문과 관련된 이론까지 등장하였다.
최자는 『보한집』에서 사륙문은 중국 위진시기에 윗사람에게 올리는 글에서 기원하였고, 수·당 시대에 들어와 율부의 영향을 받은 이후부터 정착되었다고 보았다. 최자의 주장에 따르면 사륙문은 위진시기에 기원하고 당나라 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기 사륙문의 문풍은 유화와 같은 문인들에 의해서 구절이 길고, 옛사람의 말을 그대로 베낀 데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김부식을 고려시기 사륙문 창작의 전범으로 여기면서, 임종비와 정지상의 사륙문을 모방하거나 이규보의 표문을 배우는 것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최자는 사륙문을 구체적으로 논평할 때 대구가 사실과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글의 서사까지 언급하여 당시의 다른 사륙문 비평과 차이점을 보인다. 이처럼 『보한집』에 실려 있는 사륙문에 관한 비평의 분석을 통해 고려시기 이미 사륙문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과 이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n Koryo Dynasty Pianliwen(騈儷文), which was always called Foursix(四六文) at that time, was more prevalent than Guwen(古文). The name Foursix was first used by Lishangyin(李商隱) and it contained official documents such as Biao(表), Zhuang(狀), Qi(啓), Jian(箋) etc, whose confines was more narrow than Pianliwen or Liwen(儷文) in the Joseon Dynasty. Because of the prevalence of Foursix, there were not only many Foursix proses in Koryo Dynasty, but also proses that criticize Foursix in the book of poetic criticisms, Bohanjip(補閑集).
In Bohanjip, in Choi Ja(崔滋)'s opinion Foursix's origion could be found in proses presented to one's superiors in China's Weijin(魏晉) period. And this kind of writing was completed in Sui(隋) Dynasty and Tang(唐) Dynasty under the influence of Lvfu(律賦). In his opinion Foursix originated in Weijin period and completed in Tang Dynasty. He also thought that in Koryo Dynasty writers began to use long sentences in Foursix after Ryuhwa(柳和). Choi Ja also thought that Kim Busik(金富軾) was the paradigm of Foursix writing in Koryo Dynasty, but Lim Jongbi(林宗庇), Jeong Jisang(鄭知常)'s Foursix or Lee Kyubo(李奎報)'s Biao(表), on the contrary, should not be the model that other writers learnt from. In Choi Ja's view, the sentences in Foursix should accord with facts. He also criticized the narration skill of Kim Ji Dae(김지대)의 Foursix.

KCI등재

7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의 「당문평(唐文評)」 연구

저자 : 申在湜 ( Shin Jae-sik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7-240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朝鮮後期 文學史를 이해하자면 그 핵심이 되는 唐宋派 文學의 수용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李象秀는 조선후기 당송파 계열의 문장가이다. 그는 農巖系 文人과의 교유를 통해 당송파의 文學論을 습득하여 독창적인 문학론을 창안하고 독서와 작문에 실천한다. 특히 「唐文評」(『峿堂集』 권20)은 이상수의 文學觀이 잘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당송파의 전범이 되는 唐나라의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창작에 동원된 논지와 구성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 문학비평인데, 당송파의 문학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이상수 문학론의 정수가 반영되어 있다.
이상수 비평의 특징은 창작에 동원된 간결한 구성, 엄선된 제재, 컨텍스트 파악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간결한 구성이란 최소한의 언어량으로 최대한의 묘사를 해내는 것으로, 제재의 엄선, 유기적 조직, 정리된 표현 등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당송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엄선된 제재란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한 창작의 단서가 되는 주제인데, 주로 '국가의 치세'와 '군주의 덕망'에 유용한 내용으로 儒家의 修己治人에서 나온 것이다. 컨텍스트란 텍스트가 이루어진 상황이나 맥락으로 작품의 주제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관건이다. 이러한 컨텍스트의 파악은 폭넓은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정한 법도가 있다고 여겨서 그 법도를 습득하면 우수한 작품이 된다는 논리가 당송파의 문학론을 계승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古文의 범주에 對偶文을 포함시켜 그 중요도를 높이고, 당송파의 창작론을 비평에 적용시켜 컨텍스트의 파악에 바탕한 텍스트의 분석을 비평의 단서로 삼은 것은 이상수의 진일보한 창작과 비평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litera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necessary to examine the history of embracing the literature of the Tang and Song Dynasties which is in the core. Sang-soo Lee is the Tang-Song style writer in the late Joseon Dynasty. He learned the literary theory of the Tang-Song school through the associating with literary people associated with Nongam and created his own original literary theory which he practiced in reading and writing. Especially, 「Review of Tang's Literature」 is a typical work that fully represents Sang-soo Lee's literary view. It is a literary review which analyzed the literary works from the Tang Dynasty, which becomes the predecessor of the Tang-Song School, in two aspects: the thesis and composition, and it reflects the essence of the literary theory of Sang-soo Lee who succeeded to and further developed the literary theory of the Tang-Song School.
The characteristics of Sang-soo Lee's review can be generally summarized into concise description, select theme, and context identification. Concise description means to describe maximum by using the least amount of language, and it undergoes a series of processes such as the careful selection of theme, organic composition, and neat expression, which are influenced by the Tang-Song School. Select theme is the carefully selected theme that becomes the clue for creation, and it was mainly the contents useful for 'State Governance' and 'Moral Influence of the Monarch' from the idea of 'cultivating oneself before appeasing others' in Confucianism. Context is the matter of identifying and analyzing the theme of the literature based on the circumstance in which the text is formed. Identifying the context requires extensive reading.
The logic that there is a certain custom in literature and any author who masters that custom can create excellent literature is no doubt the legacy of the literary theory of the Tang-Song School. However, including antithesis in the category of ancient Tang-Song literature to increases its significance and applying the creative writing theory of the Tang-Song School in reading to use the analysis of text based on context identification as the clue for criticism and creation are from Sang-soo Lee's own analytical literary theory. This demonstrates the substance of the succession and development of the Tang-Song School in the late Joseon Dynasty.

KCI등재

8『漢城周報』 소재 한글체 기사의 특질 연구 ― 그 한계와 의미

저자 : 金榮敏 ( Kim Young-mi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1-267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근대 매체의 한글 사용은 근대문학사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문학사 토대 연구에서 근대매체의 한글 문체 정착 과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논문은 『한성주보』 소재 한글체 기사의 특징과 한계 및 의미를 연구한 것이다. 『한성주보』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거의 주목 받지 못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1886년 창간되어 1888년까지 간행되었던 『한성주보』는 근대 매체 가운데 가장 먼저 한글체 기사를 수록한 신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한성주보』 한글체 기사의 게재 현황을 파악한 후, 한글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면에서 어떠한 용도로 활용되었는가를 확인해 보았다. 분석 결과 『한성주보』 소재 한글체 기사의 대부분은 외국 자료의 번역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외보 기사와 집록 기사의 비중이 95%에 이른다. 『한성주보』 한글체 기사의 특징을 드러내는 주목할 만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종결어미라고 보고 이들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그 결과 한글 기사의 대부분은 설명 및 전달의 기능을 수행하는 평서형 종결어미로 마무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성주보』의 한글체 기사는 외국어 설명 문장의 번역에 주로 활용이 되었던 것이다. 『한성주보』 한글체 기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시도한 것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냈다. 이는 『독립신문』 위주의 띄어쓰기 기원론에 대한 수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성주보』에서 한글은 타인을 위한 번역의 도구일 뿐 글 쓰는 이 자신을 위한 의사 표현의 도구가 아니었다. 『한성주보』의 한글 기사들은 일본어와 중국어가 먼저 한문으로 번역된 후 다시 한글로 표기되는 절차를 밟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주보』의 독자는 그 전신이었던 순한문 신문 『한성순보』의 독자와 큰 차이가 없다. 그 점에서 보면, 『한성주보』의 독자들은 한문 기사의 한글 번역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이 아니었다. 『한성주보』에서 한글 기사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 용도가 불분명했다는 점에 있다. 『한성주보』의 한글체 기사가 시도한 빈칸 띄어쓰기는 근대 국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선구적 의미에 비하면 실질적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한성주보』의 한글체 기사는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 한 사실은, 이를 통해 당시대 지식인들이 최초로 공적 영역에서 한글을 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성주보』의 한글체 기사는, 근대 초기 개화파의 국한문혼용체 신문 발행의 소망을 실현했다는 점 등에서도 의미가 있다. 『한성주보』의 한글체 기사 정착 실패의 경험은 근대 매체의 문체 선택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요인이 독자층의 성격이라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문체에 맞는 기사 영역의 개척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일깨워 주었다. 『한성주보』의 한글체 기사의 정착 실패 경험은 이후 발간된 『독립신문』과 『제국신문』 등 근대 신문의 문체 선택 과정에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작용했다.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features, limitations, and meaning of the Hangul articles published in the Hansungjubo. I also studied why the Hangul article suddenly disappeared without being used for a long time. This newspaper was founded in 1886 and was published until 1888. This newspaper was the first to include a Hangul article among the media published in early modern times in Korea. In this paper, I investigated the specific use of Hangul in the Korean language articles. Most of the Hangul articles published in the Hansungjubo were translations of foreign materials. The Hangul article of Hansungjubo was mainly used for translating foreign language sentences that convey facts.
In Hansungjubo, Hangul was a translation tool for others and not a tool of expression for writer himself. The Japanese and Chinese articles were first translated into Hanmoon, and this was translated into Hangul again. The biggest reason for the sudden disappearance of Hangul articles in Hansungjubo is because its usage is unclear. The readers of the newspaper did not want to translate Hanmoon texts. The translation sometimes made it difficult to understand the original text. However, the Hangul article of Hansungjubo is meaningful in several respects despite its failure. One of the most remarkable facts is that intellectuals first encountered Hangul in the public domain. The failure experience of Hangul in Hansungjubo has taught us that the character of the reader is important in the choice of literary style. He also taught me that we need to develop the area of articles appropriate to style. This experience has become an important lesson in the choice of style in other modern newspapers published later.

KCI등재

9딱지본 대중소설의 작가 철혼 박준표 연구

저자 : 裵定祥 ( Bae Jeong-sa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9-303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철혼 박준표는 딱지본 대중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딱지본 대중소설 작가로 활동하면서, 소년소녀 잡지의 발행과 다양한 실용서적들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딱지본 대중소설은 외국소설의 번역 및 번안, 근대소설의 모방 및 대중적 확산, 신소설의 지속과 변용, 고소설 다시 쓰기, 정사 사건의 반영 등 다채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순수한 창작이라기보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번역 및 번안하거나, 둘 이상의 작품을 복합적으로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기획된 딱지본 대중소설의 일반적인 특성과도 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출판 활동이 식민지 서적출판문화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 넣거나 독서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Cheol-Hon(哲魂) Park Joon-pyo is a representative writer of Ddakjibon popular novels. He has worked as a Ddakjibon popular novelist, publishing boy and girl magazines and writing various practical books. His Ddakjibon popular novels show various features such as translation and adaptation of foreign novels, imitation and popular spread of modern novels, continuity and transformation of Sinsosoel(新小說), rewriting of Korean traditional novels, reflection of a lover's suicide affairs. However, most of his works are not pure works, they are translated and adapted works with the original works, or imitate a combination of two or more works. This is also connected to the general character of Ddakjibon popular novels designed as a commodity in the capitalist market. Nonetheless, it is hard to deny that his writing publishing activities have contributed enormous vitality to colonial book publishing culture or popularized reading.

KCI등재

10가개섬 울릉도(鬱陵島)의 여러 별칭과 우산도(于山島)의 실체

저자 : 鄭演植 ( Chung Yeon-sik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5-345 (4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鬱은 울창하다, 陵은 언덕을 뜻하므로 '鬱陵島'는 울창한 언덕 섬이라는 뜻이다. 鬱은 뜻이 같은 蔚, 芋, 茂로 대체되어 蔚陵島, 芋陵島, 茂陵島라는 이름이 생겼고, 芋와 羽, 茂와 武가 음이 같아서 羽陵島, 武陵島라는 이름도 생겼다. 울릉도는 전체적으로 완만한 언덕 모양의 陵島이지만, 복판의 성인봉이 매우 높고 해변 평지가 거의 없어 거대한 산 모양의 山島이기도 하다. 그래서 芋陵島는 芋山島가 되고, 芋는 음이 같고 형태가 비슷한 于로 대체되어 于山島, 于山國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런데 울릉도의 별칭 于山島는 착오에 의해 15세기에 독도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편 함경도 안변의 菁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加支達縣이었으므로 加支가 울창하다[菁, 鬱]는 뜻을 지닌 고대국어 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支는 백제, 신라에서는 위진남북조 시기 江東方音을 사용하여 *ki로 읽었으나, 고구려에서는 洛陽의 中原音을 사용하였으므로 *kε/*ke로 읽었을 것이다. 따라서 가개/가게[加支]는 울창하다는 뜻의 고대국어이다. 그것은 신라 6촌의 하나였던 大樹村의 茂山이 蔚介山[가개산]으로 표기된 것으로도 입증된다.
『정조실록』에 可支島로 표기된 觀音島를 현지에서는 까깨섬/까께섬으로 불러왔는데, 된소리가 없었던 고려시대 이전에는 가개섬/가게섬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것은 울창한 섬이라는 뜻이며, 加支島 또는 可支島로 표기할 수 있다. 鬱陵島의 우리말 이름 가개섬/가게섬이 관음도의 이름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시대 문헌과 지도에 보이는 '于山島'가, 고지도에서의 위치나 초기기록이 독도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기록의 불일치는 '于山島'가 15세기 이전에는 울릉도의 이름이었기 때문이고, 고지도에서의 부정확한 위치는 19세기 <東輿島>의 섬 표시에 나타나듯이, 바다에서 거리 측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鬱 means thick and 陵 means hill, so 鬱陵島(Ulleungdo) means 'thick hill island'. 蔚, 芋, 茂 could be substituted for 鬱 for their meanings, and 羽, 茂, 武 could be substituted for 芋 or 茂 for their pronunciations. 芋陵島(Ureungdo) was also called 于山島(Usando), for it was very high. 'Usando' was changed into the name of 獨島(Dokdo) by mistake in the 15th century.
加支達 district in Goguryeo means 'thick mountain'. The pronunciation of 支 was *ki in Baekje and Silla, but *kε or *ke in Goguryeo, so Old Korean *kakε meant thick. 可支 as well as 加支 could be used for the inscribing of Old Korean meaning thick. Guaneumdo(觀音島) by Ulleungdo was called 可支島[*kakεseom] meaning thick island in the 18th century and its meaning was same with Ulleungdo. We can find the name of 可支島 was the nickname of Ulleungdo originally.
Some Japanese researchers assert that Usando on maps and documents of the Joseon dynasty was not Dokdo(獨島), for the relative location, size and distance between Ulleungdo and Usando don't correspond to those of between Ulleungdo and Dokdo. The assertion is not correct. The inaccuracy of relative location, size and distance between two islands in Korean old maps was common, for the measurement was so difficult on the sea. The islands around Anheungjin(安興鎭) drawn on Dongyeodo(東輿圖) map in the 19th century are good examples.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경희대학교
 124
 105
 77
 72
 53
  • 1 고려대학교 (124건)
  • 2 서울대학교 (105건)
  • 3 성균관대학교 (77건)
  • 4 연세대학교 (72건)
  • 5 경희대학교 (53건)
  • 6 한림대학교 (42건)
  • 7 한국외국어대학교 (31건)
  • 8 이화여자대학교 (28건)
  • 9 University of Toronto (27건)
  • 10 한국학중앙연구원 (27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