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대동문화연구 update

  •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5-3820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109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398
대동문화연구
109권0호(2020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겸재(謙齋) 정선(鄭敾), 그 명성(名聲)의 근거 검토

저자 : 高蓮姬 ( Kho Youen-hee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32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謙齋 鄭敾은 眞景(實景)의 奇景을 잘 표현한 화가로 18세기에 명성을 얻었지만 윤두서, 심사정, 강세황 등이 명성의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고, 19세기 겸재의 위상은 특별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겸재 정선은 '眞景'의 화가로 주목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진경'의 의미를 살피면 국토산천을 寫生(근대적 스케치)으로 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전환된 의미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겸재 정선은 민족적 자주성과 근대성의 화가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로는 겸재 정선이 朝鮮中華思想을 발휘한 조선시대 '畵聖'이라 해석하는 논의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 근거자료를 검토하니, 겸재 정선을 후원한 학자들은 조선중화주의를 주장하지 않았고 정선은 화성이라 불린 바가 없었다. 겸재 정선의 명성 상승 과정은 근·현대기의 시대적 소망에 부합하려는 해석의 결과였다고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학계와 문화계에 다양한 의미의 파급을 발생시켰다.


This study briefly outlined the history of rising valuation for Chŏng Sŏn(1676~1759)'s landscape painting, and then traced the points that were presented as evidence of the upsurge in the assessment of Chŏng Sŏn dur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times. The conclusion of this study is as follows. Firstly, 'Chin-kyŏng 眞景,' or true view scenery, described by the early twentieth century Korean scholars as a theme of Chŏng's painting was a desirable subject in the sense of both nationalist under colonial rule and modernists. This study showed that Chin-kyŏng in the eighteenth century had meant purely real scenery, but the meaning was changed into modern sketch of Korean landscapes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Secondly, "an idea that Chosŏn has taken over the authenticity of Chinese civilization since the Ming was conquered by the Qing" was asserted as the background idea of Chŏng's painting which depicted Korean scenery. But this study revealed that the patrons for Chŏng Sŏn did not have the idea but had tried to receive the developed culture of the Qing and several books from China became the reference for Chŏng's pictorial expression. Thirdly, the best evaluation that Chŏng Sŏn was called as 'hwa-sŏng 畵聖,' or the Saint of Painting, which became a colloquial term in praise of Chŏng Sŏn today. As this study explained in detail, this evaluation was the result of complete mistranslation of the original text. The semantic transition and mistranslation in the process of escalating valuation for one painter reflect clearly the desires of each eras in Korea, but this process itself also eventually provided or created a constant interest in Chŏng Sŏn.

KCI등재

2최북(崔北), 기인(奇人) 화가의 탄생

저자 : 劉宰賓 ( Yoo Jae-bi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9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崔北(1712~?)의 화가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최북의 당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그의 기행에 대한 일화가 대부분 그의 사후에 생성되었다는 확인할 수 있었다. 최북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그와 가깝게 교유했던 여주 이씨와 근기지역의 남인 소북인 등에 의해 남겨졌다. 이들은 그를 진지한 대화상대로 여겼으며, 애정 어린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말년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궁핍함을 안타깝게 여기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그의 기행이나 주색에 기인한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의 그림에 대한 화평은 찬사에 가까웠으며, 주로 그림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정밀하다”거나 “고아하다”와 같은 평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기이함'과 '일탈'보다는 정재 되어 있는 미감에 주목한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에 지어진 남공철의 「최칠칠전」과 조희룡의 「최북전」은 이후 최북에 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헌이다. 이들은 최북의 생전 기록보다 더 생생하게 그의 기행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기록은 상당부분 '전기'라는 문학 형식에 기반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남공철은 본인이 직접 경험한 최북이, 세간의 통설과는 반대로 지식과 예술을 겸비한 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최북의 기행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였으며, 조희룡은 여항인의 울분과 기개를 극대화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후반기의 인물사전과 전기집은 이전 세대의 기록을 반복하며 다른 의미로 재생산하였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 『금릉집』의 「최칠칠전」을 그대로 전재하였다면, 장지연의 『일사유사』는 신문 기고글로서 전거 없이 「최칠칠전」을 풀어서 이야기하였다. 다른 문헌이나 본인의 평어도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삽입하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은 철저히 개입을 자제하고 최대한 많은 자료를 전거와 함께 그대로 전재하였다.
이들 문헌은 이후 고전 문헌에 밝지 못한 이론가들도 조선의 서화에 접근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0세기 중반기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윤희순, 김용준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최북의 기행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이들에게 기행은 화가가 세상의 모순과 부딪히며 '미'를 추구해나가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들에게 최북은 조선시대에 태어난 낭만주의 화가였다. 최북은 출신이 분명하지 않고, 그 자신이 남긴 기록도 없다. 이러한 모호함이 오히려 후대인들이 기록의 빈자리를 상상력으로 메우고, 자신의 화가상을 투영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image of artist was established over time in case of Ch'oe Puk, the middle class artist in the 18th century Chosŏn. He was known as an eccentric artist, however, stories of his idiosyncratic behaviors were mostly written after his death. His contemporaries- close friends and patrons regarded him as sincere conversation partner and a talented artist. Those who met him in his latter years, regretted his privation but did not consider it as a result of his impulse or alcoholism.
The number of biographical literature on Ch'oe Puk were produced after his death. The most cited biographies are Ch'oe Ch'ilch'il-chŏn by Nam Kongch'ŏl and Ch'oePuk-chŏn by Cho Hŭiryong. They introduced new episodes on his idiosyncratic behaviors and described them vividly as if he was in front of their eyes. It is related to the characteristics of biographical literature, "chŏn" in the late 18th century Chosŏn. "chŏn" began to include the people in the lower class who had special talents or eccentric lifestyle as subject of biographies, let alone aristocrats of great achievement. The biography of Ch'oe Puk emphasized his eccentricity in order to magnify the gap and conflict between his low position and exceptional artistic talent. The imaginations of the biography writers may have been exploited to make the writings more interesting as the usual biographies on low class did at that time.
Those two biographies on Ch'oe Puk became authoritative documents in the modern period. In the late 19th century, biographical dictionaries or the compilation of biographies repeatedly cites the two texts. The contemporary theorist in the mid 20th century paid more attention to Ch'oe Puk's unusual behaviors than his paintings. They regarded him as a solitary genius in a romantic way. As seen above, the identity of Ch'oe Puk as an eccentric artist was built over time after his death reflecting 'the idea of an outside artist' of the time. Key Words : Ch'oe Puk, ec

KCI등재

3신윤복 <미인도>의 부상

저자 : 金芝慧 ( Kim Ji-hye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1-95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오늘날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명화이자 당대 최고의 미인을 담은 미인도로 인정받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나, 작품이 알려지고 이와 같은 평가를 받게 된 시기는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1957년 전후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국외전시 출품작으로 처음 공개된 이래,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선정되어 유럽과 일본, 미국에서 열린 순회전시에 진열되었으며, 해외전시 후 열린 귀국전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었다. <미인도>는 이처럼 해외전시들에 출품되며 문방의 미인도에서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발견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 일간지와 화집 등에 간략하게 언급되다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서술되며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잇었다. <미인도>는 한국미술사를 개괄한 주요 전시들과 미술사 저서들, 매체를 통해 춘정 혹은 여속을 그린 그림에서 인물화의 걸작으로, 작품 속의 여성 또한 기녀에서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재평가되었다.


Today, Sin Yun-bok's Miindo(A Beauty) is recognized and loved by people as a famous painting representing Chosŏn Dynasty and portrait of the best beauty of the period, but it was relatively recent times when the work became known and received the evaluation. Since Sin Yun-bok's Miindo was firstly open to the public as an entry to the overseas exhibition "Masterpieces of Korean Art" in 1957, it was selected as a famous work representing Korean art history, displayed in a traveling exhibition of Europe, Japan, and America, and introduced in Korea through homecoming exhibition. As Miindo was exhibited in overseas exhibitions, it was discovered as an art work representing Korean art. In addition, it seems to be mentioned briefly in daily newspaper, art book, etc. of same period and incorporated into art history while described from the 1970s in earnest. Through main exhibitions, books of art history, and media that introduced Korean art history, Miindo could be reevaluated from a painting of Yeosok(lives of common women; or girly things) to a masterpiece of portrait, from a Gisaeng(female entertainer) to the best beauty of the Chosŏn Dynasty for a woman of the work.

KCI등재

4오원 장승업 ― 작가적 위상 정립과 평가의 궤적

저자 : 金素延 ( Kim So-yeo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7-121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조선말기 화단의 大尾를 마무리하는 화가 吾園 張承業(1843~1897)의 畵名이 그의 사후 100여 년간 어떠한 방식으로 구축, 평가되었는지 면밀히 고찰해 보는데 그 목적을 둔다. 장승업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음에도, 天才를 발휘해 산수, 화조, 영모, 인물, 기명절지까지 모든 장르에 뛰어났던 화가이며, 안중식·조석진에게 화풍적 영향을 미쳐, 한국 근대 화단의 화맥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에 본고는 장승업에 대한 근현대기 문헌자료들을 검토하고, 장승업에 대한 인식, 작품 평가 및 변화의 제 양상에 주목했다. 먼저 仁同 張氏라는 큰 틀 아래서, 장승업은 역관들의 후원에 힘입어 화가로 성장한다. 장지연, 최남선, 오세창과 같은 지지자들에 의해 화가로서의 생애가 처음 기록되었으며, 김용준에 의해 상술되며 재발견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예술적 기질이 충만한 천재화가로서의 신화가 반복하여 생산되는 가운데, 오세창의 안목으로 컬렉션의 기반을 다졌던 간송미술관에서 수차례 특별전이 개최되면서 대가로서의 명성을 더욱 굳혔음을 관찰했다.
다만, 장승업에 대한 회화사적 평가는 많은 변화를 거쳤음을 목도할 수 있다. 오세창을 필두로 근대 초기의 기록들은 기명절지화를 주문에 대응하는 수응용 화목으로 보고, 정교하게 묘사한 산수와 인물에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점차 정선과 김홍도의 '조선적' 화풍에 비견되면서 장승업의 특장이었던 산수와 고사인물도는 모화적, 전통 회귀적이며 기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이에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명성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에 대한 엇갈린 품평이 존재하게 된다. 중국풍의 정치한 산수와 호방한 기명절지로 대표되는 화풍과 평가기준 변화의 문제뿐만 아니라, 口傳에 구전을 덧입은 생애사, 작품의 평가를 초월한 大家의 畵名, 好酒와 奇行·代理 落款에 의해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진위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thoroughly contemplate how the fame of Jang, Seung-eob, the painter who was at the finale of the art world of late Chosŏn period, was established and evaluated for 100 years after his death. Although he did not receive any official education in painting, Jang, Seung-eob showed his genius as a talented painter in all genres including landscape, flowers and birds, birds and animals, portraits, and flowers and fruits with dishes; he influenced Ahn, Jung-sik, and is understood to have affected the establishment of the art tradition of Korean modern art world.
Thus, this paper examines the modern and contemporary documents on Jang, Seung-eob, examines the awareness about Jang, Seung-eob today, and inspects the evaluation and change of artwork by Jang, Seung-eob. First, this paper observed that Jang, Seung-eob, from Indong Jangs, developed into a painter by sponsorship from Chinese interpreters, and his life as a painter recorded by his supporters including Jang, Ji-yeon, Choi, Nam-seon, and Oh, Se-chang. Another notable point is that Kim, Yong-jun, who searched for the future of Chosŏn painting through traditional painting, had rediscovered Jang, Seung-eob.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the myth as a genius painter full of artistic spirit had been repeatedly produced; through the insight of Oh, Se-chang, several special exhibitions were held in Gansong Art Museum, where the foundation of his collection was laid, and his fame as a master was consolidated even further.
On the other hand, evaluation on Jang, Seung-eob was actually observed to go through much changes in the long period of time. Lead by Oh, Se-chang, the records of early modern period considered the flowers and fruits with dishes paintings as paintings that were drawn upon request, while relatively giving higher value to the landscape and portrait which were meticulously descriptive. However,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the landscape and figure painting from old stories were gradually compared to the 'Chosŏn Style' painting methods by Jeong, Seon and Kim, Hong-do, and were considered Chinese-oriented, recursive to tradition, and mannerist. Thus, it seems that the tendency of today's academia is to evaluate Jang, Seung-eob as only the progenitor of 'Oh Won Painting Group.' This is not only due to the problem of his painting style and status represented by the Chinese style of meticulous landscape and magnanimous flowers and fruits with dishes; but also due to the accumulated problems of life history formed from oral tradition upon oral tradition, the fame as a master that surpasses the evaluation on his works, and the difficult authenticity that rises from his love of alcohol, eccentricity, and signature by deputies due to his illiteracy.

KCI등재

5누가 김정희를 만들었는가 ― 김정희 명성 형성의 역사

저자 : 金秀珍 ( Kim Soo-ji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3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金正喜(1786~1857)가 '大家'가 되는 데에 있어 작가 자신의 창조적 역량 외에 다른 어떤 외부 요인이 작동했는가를 究明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김정희가 재세 연간 및 사후에 어떤 이들과 역학 관계를 맺으면서 조선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게 되었는지를 논의하였다. 아울러 김정희의 제자 許鍊(1809~1892)이 어떻게 김정희의 추숭 작업을 통해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는가를 논의하는 한편 1930년대 이래 미술 경매 시장에서 김정희의 작품이 점하는 위상에 대해 분석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김정희 스스로가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는지, 또한 그것을 후대에 누가 계승하였는지, 현대에 김정희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s what kind of external factors contributed to Kim Chŏnghŭi's being a celebrated artist besides his own artistic creativity. In order to do so, this study first focuses on the social relations Kim managed to forge not only with his companions but also with artistic patrons and clients, by whom Kim became revered as the best Chosŏn artist both in his lifetime and posthumously. In addition, this study sheds light on the role played by one of Kim's followers, Hŏ Ryŏn, in raising Kim's public profile by circulating reproductions of Kim's masterpieces in lower prices after Kim's death. Ultimately, this study will be an attempt to elucidate Kim Chŏnghŭi's self-image in the art society, its inheritance by his followers, and its impact on the contemporary evaluation on him.

KCI등재

6조선후기 서화시장을 통해 본 명작(名作)의 탄생과 위작(僞作)의 유통

저자 : 徐胤晶 ( Seo Yoon-j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5-186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고는 명작의 탄생과 그 사회 문화적 의미를 조선후기 18세기 서화 애호 풍조와 僞作의 의미와 상징성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명작은 畵品을 나누어 그림의 우열을 논하고 화가를 品評하는 동양 특유의 畵論의 전통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위작의 등장은 미술품의 소장과 미술 시장을 전제로 한다. 명말의 尙古主義적인 경향의 중국 예술 서적의 수입과 중국 골동서화의 수입은 조선후기 고동 서화 수집 및 감상의 풍조를 유행 시켰고, 이와 더불어 경제력을 바탕으로 급부상한 상인 계층이 서화 시장의 새로운 고객층으로 급부상함으로써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서화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경제적인 구매력을 갖춘 고객층의 등장으로 인한 서화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와는 별도로, 한정적인 서화로 인해 조선 후기에 수많은 위작이 제작, 유통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 논문은 위작의 제작과 유통을 동아시아의 서화 제작 관습과 서화의 유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탐구하기 위해 위작의 기준작으로서 명작의 조건을 분석하고 위작과 진작을 구분하는 감정과 감평에 관해 기록한 화론서에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위작과 위작 연구의 두 가지 가치를 재조명 하고자 한다. 첫째는 위작이 내포하는 다층적인 역사적 시간성이며, 두 번째는 명작 혹은 정전(canon)을 중심으로 기술 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단선적인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미술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다.


Focusing on fake paintings in tandem with the culture of collecting and appreciating art in the late Chosŏn dynasty, this essay investigates the process in which works of art achieved masterpiece status and their socio-cultural meanings. In premodern East Asia tradition, theoretical treatises on art use evaluation system to determine the quality of painters or paintings, which affects the establishment of masterpieces. Meanwhile, forgeries emerged as the art market, and collectors appeared. Late Ming antiquarian books and imported ancient works of art stimulated Chosŏn elites' interests in collecting and appreciating antiques and works of art. Besides, the rise of the nouveaux riches, who became the important clientele of the art market in the late Chosŏn used their increased financial resources to purchase works of art. The rise of the value of masterpieces thus touched off increased production of imitation, fakes, forgeries of ancient paintings.
This study explores the production and circulation of forgeries from the non-Eurocentric perspective embedded in the premodern East Asian Society. To do so, I examine how we define masterpiece or canon and how these are used to make fakes. A close look at artistic treatise dealing withing appreciating art and connoisseurship is further provided. In sum, I hope this essay show two values of forgery and the study of forgery. First, it reveals the multiple historical temporalities, and second, it broadens the horizons of art history research by providing various possibilities and alternatives, which would have long been lost in the conventional writing of art history centering canon and masterpiece.

KCI등재

7료대(遼代) '발해인(渤海人)' 정치체로서의 올야부(兀惹部) 연구

저자 : 朴淳佑 ( Park Soon-woo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7-211 (2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발해 연파의 요 배반과, 定安國으로의 귀부, 다시 兀惹城으로 피신한 뒤올야부와 연대하여 대요 항쟁을 지속한 과정을 검토하여 정안국과 올야부가 각기 다른 발해인 정치체임을 논증하였다. 발해국 멸망 후 발해인들의 활동은 연구 초기부터 주목받았지만,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제약으로 확정할만한 주장은 거의 없는데, 올야부의 정체에 대한 논의도 그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올야부와 정안국을 동일 정치체로 인식하는 논자들이 생겨났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정안국과 올야 모두 발해인 정치체이긴 했으나, 정안국의 이칭이 올야부였다거나, 또는 그 반대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the Balhae faction Yeonpa broke free from Khitan Liao, surrendered to Jeong'an-guk(定安國), and then sought refuge in the Olya-seong(兀惹城) castle, and continued its allied relationship with Olya-bu(兀惹部) to fight Liao. What is explicitly argued here is that Jeong'an-guk and Olya-bu, although both related to the late Balhae, were clearly separate entities.
There have been numerous studies focusing on the lives and actions of the Balhae refugees and descendants after Balhae fell, but lack of materials and records always plagued efforts to expand the scope of discussion concerning relevant issues, and the nature of Olya-bu was one of such topics that had never been sufficiently discussed. Recently some scholars came out arguing that Olya-bu and Jeong'an-guk were not two different entities but merely two different names referring to a single entity, but such assessment seems to be in need of reconsideration, as a concrete evidence to support the argument that Olya-bu was simply another name for Jeong'an-guk or vice-versa has never been suggested.

KCI등재

816~17세기 '서원제도' 보급 과정

저자 : 安多美 ( Ahn Da-mi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3-240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향풍 교화' 공간인 '사우'와 '인재 양성' 공간인 '서원'을 모두 갖춘 조선의 '서원제도'는 향촌 사회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보급'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획된' 국가 제도였다. 조선 시대 '서원제도'는 '향촌교화 시스템'과 '인재선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서원제도'에서 '선별'된 주체는 '지방 양반'들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른바 '지방 정부'를 통해 국가 정책 이념을 향촌 사회에 보급하여, '향촌 사회질서 정립'이라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방 양반들을 '서원제도'를 통해 '선별'하였다. 이렇게 '선별된 지방 양반'들은 '자율성'을 보장받았고, 이를 토대로 향촌 사회에서 '서원제도'의 운영권을 '위임' 받았다.
조선 시대 서원 시스템은 국가 시스템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법'에 규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제도'는 국가 정책 방향에 따라 '유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서원제도'가 가지는 '유동성'은 '사회적 계층'이었던 지방 양반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 양반들은 '사회적 지위'를 고수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서원제도' 속에서 일련의 노력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지방 양반들의 '서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방 양반들의 '서원 운동'이 격렬해지면서 조선 정부가 시행하던 서원 정책은 '서원 남설 현상'과 '제향 인물 중심의 사당화 현상'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두 문제는 '서원제도'가 시행되던 때부터 조금씩 제기되었으며, 17세기 무렵이 되면서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The private academy system' of the Chosŏn Dynasty which combines 'a shrine', space for rural community enlightenment, with 'a private academy' space for 'cultivating talent' was created by the Chosŏn government's effort to achieve a political goal of distributing confucian ideology to rural communities. The private academy system of the Chosŏn Dynasty was the 'organization' for enlightening rural communities and selecting talent to distribute 'confucian ideology' to society. 'Talent' selected by Chosŏn government's political plans means 'local noblemen.' In return for guarantee of 'autonomy' from the Chosŏn government, 'local noblemen' had to be responsible for roles and duties to assist the local governments to distribute and realize its policies to rural communities. The space that a series of these tasks was arranged was the very 'private academy.' 'The private academy system' of the Chosŏn Dynasty was closely related with 'noblemen' who was the 'social class.' The Chosŏn government already tried to utilize 'private academies' as space to 'select' 'local noblemen' from the beginning. And 'the private academy system' was operated with 'flexibility' which was not prescribed by 'the national law' under this purpose.
In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private academy system', 'local noblemen' had to make a ceaseless effort to stick to their 'autonomy' granted by the government and secure their social status called the mandator of 'establishing order of rural communities'. A series of 'noblemen's efforts appear in 'the private academy system', which can be described as local noblemen's 'private academy movement.' By the way, Local noblemen's 'private academy movement' set another task to the Chosŏn government. It is the 'Private Academy Namseol' phenomenon and the 'Confucians Shrined-centered privatization (私黨)' phenomenon that were raised by Gyeongsang Governor Lim Dam on August in the 22th year of the reign of Injo of Chosŏn. Among them, the most urgent issue before the Chosŏn government was the 'Private Academy Namseol' phenomenon related to efficiency of local financial allocations. Therefore, Lim Dam suggested 'the license system of building private academies' to solve this problem but it was not very effective. In the end, this problem continued to the 19th century and was barely solved after so-called 'work to abolish private academies' was executed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Gojong of Korea.

KCI등재

9한글기행문 <북정동유록>의 작자와 작품세계

저자 : 鄭雨峰 ( Chung Woo-bo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1-281 (4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한글기행문 <북정동유록>의 작자와 작품세계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북정동유록>은 그동안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신자료이다. 모두 2권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이다. 이 논문에서는 <북정동유록>의 작자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북정동유록>에 나타난 작품 세계를 분석하였다. 작품 내 관련 정보를 근거로 <북정동유록>의 작자는 釣隱 李世澤(1716~1777)임을 밝혔다. 李世澤은 溫溪 李瀣의 후손으로서, 영조시대 탕평정국 속에서 영남 남인으로서 대사헌 등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李世澤은 1761년에 北評事로 임명되어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공무 수행했는 데, 그때 쓴 기행문이 <북정동유록>이다.
<북정동유록>에서 주목할 부분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첫째, 작자는 산수 유람의 과정 및 빼어난 경관에 대해 핍진한 묘사와 참신한 비유 등을 활용하여 유람 공간의 현장감 및 작가의 감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유람하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는 한편, 산수 유람 속의 청정하고 탈속한 공간의 이미지를 강조하여 부각하였다. 둘째, 조선 왕실 유적에 관한 관심을 보인 부분이다. 이세택은 함경도 지역을 방문하였을 때에 조선 왕실의 개국과 관련된 여러 유적들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각종 설화, 일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주목된다. 셋째, 함경도 지역민에 대한 작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낙후하였던 변방 지역인 함경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작자는 그곳에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상업도시로서 번성하고 있던 원산의 모습을 부각시켰고, 함경도 지역 문사들의 문장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작자는 함경도 지역에 대한 기왕의 소문이나 통념과는 다른 방향에서 자신이 직접 목도한 경험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In this paper, I explored and showcased the author and work of new Korean record, Bukjeongdongyurok. This work is a new record unknown to the academic world. Bukjeongdongyurok recorded the experiences of Lee Se-taek's trip to Hamgyeong province and Mt. Geumgang in 1761. He was appointed to the office of Bupyeongsa, and he worked in Hamgyeong Province.
This work has a work structure in which the part of performing public service and the sight-seeing spot are interlaced. The first part of the work, '北征錄', stands out as an official who performs public service, while the second part of the work, '東遊錄' stands out as a tourist who visits the famous natural landscape. The work is structured in a combination of the two.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e works were divided into interesting and realistic descriptions of natural landscapes, widespread use of interesting narratives and tales, interest in Choson royal ruins, and public service as officials.

KCI등재

10이태준의 <산사람들>과 제11회 정기공연 무산의 의미

저자 : 金南奭 ( Kim Nam-seok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0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3-309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태준의 <산사람들>은 1936년 5월 극예술연구회 제11회 정기공연(작)으로 예정된 작품이었다. 비록 <산사람들>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공연이 무산되었지만, 이 작품이 공연 예정작으로 선정되면서 자연스럽게 담보하게 된 연극사적 의의는 상당하다고 해야 한다. 즉 <산사람들>은 1936년 '신방침' 발표 이후 새롭게 변모되는 극예술연구회의 활동상을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기획이기도 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산사람들>이 지니는 공연 대본으로서의 차이점 그리고 공연작 선정 과정, 검열 미통과 이유를 점검하였다.


Sansaramdeul(<산사람들>) written by Lee Taejun was scheduled for the 11th regular performance of the Korean Society for Dramatic Arts in May 1936. Although Sansaramdeul did not pass the censorship of Japan and the performance was dismissed, the significance of the historical history that was naturally secured as Sansaramdeul was selected as the scheduled production of the performance was significant. In other words, the Sansaramdeul provided an important opportunity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the newly-developed Gegyesuryeonguhoe since the announcement of the New Policy in 1936. Therefore, this study examines the differences in performance scripts revealed by Sansaramdeul, the process of selection of performances, and the reasons for the nonpass of censorship.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단국대학교
 123
 118
 107
 97
 88
  • 1 서울대학교 (123건)
  • 2 성균관대학교 (118건)
  • 3 연세대학교 (107건)
  • 4 고려대학교 (97건)
  • 5 단국대학교 (88건)
  • 6 경희대학교 (54건)
  • 7 이화여자대학교 (52건)
  • 8 동국대학교 (52건)
  • 9 한국예술종합학교 (51건)
  • 10 경북대학교 (40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