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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연구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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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64)~11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412
대동문화연구
110권0호(2020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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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장과 차별, 조선 후기 호적과 신분

저자 : 權乃鉉 ( Kwon Nae-hyu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3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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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호적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유학은 비 양반층 가계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군역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양반들의 생활 문화를 모방하는 이들도 갈수록 늘어났다. 그 가운데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관료를 지낸 이도 있었다. 하지만 비 양반층이 지배층에 편입되기는 매우 어려웠으며, 전통 양반들은 차별과 배제의 방식으로 그들의 성장을 억제하였다. 그것은 변화된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양반층의 보수적 대응이기도 했다. 국가는 종친이나 관료 집단의 영속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편으로 고역인 직역을 통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 양반층 일부는 성장의 기회를 얻었고, 일부는 차별에 의해 성장이 억제되었다. 조선 후기의 호적은 유학의 증가 현상만이 아니라 이처럼 신분 구조와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양반이 가진 특권의 하향 이동과 비 양반층의 양반 모방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Many yuhaks in the 19th-century household registers grew up in non-upper class households. While many wanted to avoid the required military service, more and more people simply imitated the culture and way of life of the upper classes. Some of them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nd served as state officials. However, it was very difficult for the non-upper class to be incorporated into the ruling class, and the traditional upper classes suppressed their growth in by way of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It was also a conservative response of the upper class to the changed political and social realities. The state did not recognize the perpetual privileges of royalty or bureaucratic groups and controlled the hard occupation. During this process, some of the lower classes gained opportunities for growth, and some were restricted by discrimination. The household registers of the late Chosŏn Dynasty show not only an increasing number of yuhaks, but also various aspects of status structure and change. This also meant the downward movement of privileges previously held by the upper class and an increase of the non-upper class' imitation of the upper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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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후기 호적대장 호구차정 원리 ― 언양현 가좌책을 중심으로

저자 : 金建泰 ( Kim Kuen-tae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5-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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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경상도 언양현 천소동 가좌책에서 원호의 경제력[노비보유, 가옥규모, 농우보유, 경작면적] 수준이 협호보다 낮은 사례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부에서 배정한 직역자 수를 채우려면 元戶를 차정할 때 主戶의 신분을 먼저 따져야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렇게 호적대장 원호를 차정할 때 주호의 경제력은 부차적 요소로 작용했다. 조선 후기 호구정책은 경제력이 넉넉한 자연가뿐만 아니라 경제력이 열악한 자연가도 원호가 되고, 빈한한 자연가뿐만 아니라 부유한 자연가도 협호나 적외호가 되는 것을 용인하였다. 수령과 色吏들의 탐욕, 즉 조선 후기 지방관아의 부정부패 때문에 빈한한 원호가 호적에 등재된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호구정책은 호총이 갑자기 증가한 세조대 이후 정착되었다. 세조대 이후 군역자 폭증으로 군인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게 되자 양인 상층은 군역을 회피하게 되었다. 한편 양인 하층은 군역부담을 견디지 못해 몰락했고, 이는 15세기 후반 이후 노비증가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이렇듯 세조대 이후 부유한 양인 상층이 적외호로 남고, 빈한한 양인이 원호[군역자]가 되는 현상이 구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e Gajwachaek (an official document on the household and economic status of each region) of Cheonso-dong, Eonyang-hyeon in the Gyeongsang Province in 1875 displayed many cases in which the economic status of the registered household (wonho), such as their ownership of nobi or farming cattle and the sizes of their houses and farmland, was lower than the economic status of their subordinate household (hyeopho). This was because the social class of the actual household (juho) had to be considered before registering the wonho to meet the number of compulsory laborers set by the government. The records thus showed how the economic status of the actual household was secondary to registering the wonho for household registers. The census policy in the late Chosŏn dynasty made not only relatively wealthy families but also families lacking in economic power become registered households. The policy further allowed wealthy families, other than impoverished families, to be registered as hyeopho or jeokoeho. Impoverished wonho were not registered to the family register because of the greedy local governors and functionaries (saekri), that is, the corruption of the local governments in the late Chosŏn dynasty. Such census policy was set in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when there was a dramatic increase in the number of households. As the number of people who had to serve in the military increased sharply and the social status of the army plummeted after the reign of King Sejo, the higher peasant class began to avoid their military service. The lower peasant class, on the other hand, who were unable to overcome the burden of their military service collapsed, thereby resulting in a sharp rise in the nobi class in the late fifteenth century. Since the reign of King Sejo, the phenomenon of wealthy and higher ranking peasants being registered as jeokoeho and poor peasants becoming the wonho, thereby providing military service, became structura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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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세기 노비호(奴婢戶)의 호적등재 ― 조선왕조 재정의 관점에서

저자 : 孫炳圭 ( Son Byung-giu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1-10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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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가 호를 대표하는 奴婢戶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시기의 호적대장에 가장 많이 등재되었다. 본고는 17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호적등재 원칙의 관점에서 노비호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며, 17세기 말에 노비호가 대거 등재되는 이유에 대해서 추론한다.
호를 단위로 하는 '稅役'의 부담을 책임지는 자로서, 호의 대표자는 '職役'을 가진'良人'으로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17세기 초까지 호적에 사노비들로 구성된 호가 없지 않으나, 모두 '노비소유주+노비'의 형태로 등재되었다. 노비소유주가 그 호의 주체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7세기 말의 호적대장에는 호의 대표자로서 사노비가 소유주의 앞에 기재되고 소유주가 기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그러한 호는 전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이러한 호의 사노비 소유주는 한 지역의 호적에 자신의 호와 함께 그의 노비들로 구성되는 복수의 호를 등재하고 있다.
17세기 말의 호적장부에는 가능한 한 많은 호구를 파악하고자 하는 정책에 힘입어 등재되는 호구수가 증가하였다. 지역사회에서는 그곳에 할당된 호구의 총수에 준하여호를 단위로 하는 세역 부담이 분배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세역 부담을 사회경제적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노비호의 등재에 노비소유주가 깊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1720년경의 토지대장에도 필지마다 토지소유자로서 노비소유주와 노비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거나 노비명만이 기재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조선왕조 재정의 관점에서 17세기의 노비호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The household registers compiled from the late 17th to early 18th centuries registered a large number of nobi household heads. This study traces the process of composing the household with nobi heads until the late 17th century. Also, this study suggests the reason why the household registers needed to record households of nobi heads.
As the person in charge of national taxation and corvée for the household, the household head used to be chosen among free-born in principle, having an occupational record. The households of nobi were registered in the form of 'owner + nobi' in household registers until the early 17th century. This form tells us that the nobi owner was the real head of the household, even it had a nobi head. However, the household registers of the late 17th century used to record the nobi instead of the owner of the nobi, and some households did not report the owner. As a result, we can find not only the household of the owners of nobi but also several households of his nobi in a registe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and population in the registers in the late 17th century increased due to the financial policy of the government which intended to find more households as possible. The total amount of national taxation and corvée, which was imposed on a county, was allocated to sub-counties by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This study supposes that composing and registering households with nobi heads were invented by nobi owners as a means of distributing national taxation in considering the socio-economic capacity of each household in a sub-county. A similar feature was reported from the land register compiled around 1720 which recorded the information of the landowner in the form of 'owner + nobi' or nobi alone to represent the real landowner. From the perspective of national finance, these recording patterns were deeply related to the process and reason for increasing households with nobi heads in the household register in the 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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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다산 정약용의 호구운영론(戶口運營論) ― 『목민심서』를 중심으로

저자 : 宋亮燮 ( Song Yang-seop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7-1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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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일체의 호구누락을 허용하지 않는 '핵법'을 戶政의 원칙이자 법제로 공표하였다. 하지만 현실의 호구운영은 대강의 총액을 자체적으로 조사하는 '관법'의 방식이었다. 관법의 호구파악방식은 이서배들의 농간이나 촌락간 호총의 불균, 각종 토색 등 많은 문제를 낳고 있었다. 정약용은 현실의 관법을 인정한 위에 수령의 권능이 허용하는 한에서 호구운영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효율적인 개선책을 강구하는데 집중했다. 우선 호적개수의 행정절차를 재정비하고 가좌책을 현실가호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핵법적 장부로 자리매김하였다. 立戶는 가좌책의 家戶를 大家·中家·小家 등으로 구분하여 해당군현에 배정된 호총에 대응하여 적절한 비례식을 적용, 充數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시 호남지역에서 관행하던 방식이었다. 핵법적 원칙에 의해 자연호에 가깝게 파악한 가좌의 총수를 통해 立戶의 근거를 최대한 넓힌 후 지역에 부과된호총에 대응하는 방식은 보다 유연하고 공정한 호구운영을 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이었다. 아울러 수령은 상사와의 협의를 통해 호총이 과중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했다. 여기에는 호적개수에 들어가는 공식 항목 이외에 일체의 추가징수를 금하고 호적의 정보변개를 차단하는 등 갖가지 조치가 수반되었다. 이서들에게는 이들이 가진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력과 실무과정의 노고를 일정하게 인정해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방안의 실제 적용과 그 효용의 지속성에 대해 정약용은 회의적인 입장을 떨치지 못했는데 이는 일개 수령의 권한으로 호구운영이 가진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현실의 벽은 지나치게 높음을 자인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약용의 호구운영론은 핵법의 이상을 염두에 두고 관법의 현실을 인정한 위에 현실의 제도와 관행을 적절히 손질하여 수용한, 철저한 순속적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Haekbeop(total registration), which does not allow any omission of population in the register, was legislated as the principle of population policy by Chŏson dynasty. However, Gwanbeop(partial registration), a method of autonomous investigating with the approximate sum of population, was utilized in practice. Population measurement of Gwanbeop style resulted in various problems such as manipulation of functionaries, imbalance of Hochong(sum of household), and varieties of extortions. Jeong Yakyong focused on specific and efficient improvement in the management of population register as far as the authority of the magistrate would be allowed while admitting Gwanbeop in the real world. First, he rearranged the administrative procedure of revising population register, and approved Gajwachaek as the ledger of Haekbeop style where actual households were inspected. In the process of Ip-ho(registering households), each Gaho(a household) was categorized as Dae-ga(large household), Jung-ga(medium household), So-ga(small household), etc., and was designed to be added to the number in proportion according to Hochong allocated to each Counties and Prefectures. This was the method which had been adopted in Honam region at the time. The method, in which under the principle of Haekbeop the total number would be registered close to the actual number of households, was a reliable alternative for the flexible and fair management of population register to correspond Hochong allocated the region. Moreover, the magistrate was required to actively consult with his superior to make Hochong not a heavy burden. Several more measures were taken; banning additional collection other than official items needed for revision of population register, cutting off alteration of information in register, and so on. Functionaries were considered thoughtfully by acknowledging their influence on the local community and their service in the practice. Yet, Jeong was still skeptical about the application of his method and stability of its utility, presumably because he realized the barrier of reality too high to resolve the structural problem of the population register by mere the authority of the magist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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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돈이 신화 형성과 주희의 역할 ― 도학 도통론에서 주돈이와 「태극도·설」의 부각

저자 : 李大承 ( Lee Dae-se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9-17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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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주돈이는 공맹의 도통을 잇고 유가의 우주론을 담은 「태극도」(도설 포함)를 지어 도학을 처음 창도한 '도학종주'로서, 그의 도는 이정 형제 그리고 주희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주돈이의 도가 정이에게 전해졌다는 '주정수수론'과, 그들의 도가 이후 주희에게 전해졌다는 도학의 도통론은 주희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신화로서, 도학의 실질적 창시자는 정이라는 시각이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주돈이와 그의 「태극도」는 주희 이전에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고, 또 도통론은 어떻게 구축되어 갔는가?
본고는 도학의 '주정수수론' 혹은 도통론 연구의 일환으로서, 남송 시기에 도학자로서의 주돈이 이미지가 구축되고, 그의 「태극도」의 위상이 정립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주돈이를 공맹 도통의 계승자로 여기고, 그가 이정에게 도를 전했다는 주정수수의 시각은 주희에 앞서 호상학파의 호굉에 의해 제시되었다. 하지만 호상학파에서 중시한 문헌은 「태극도」가 아닌 『통서』였다. 주돈이의 「태극도」는 남송 도서학 전통에서부터 『통서』에서 독립되어, 역학적 우주론을 서술한 독자적인 문헌이자, 주돈이가 이정에게 전수한 문헌으로 부각되었다. 주희는 주돈이 문헌을 편정하고 장사본(1166), 건안본(1169), 그리고 남강본(1179)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호상학파와 도서학 전통의 논의를 종합하였다. 또 그 과정에서 「태극도」를 주돈이 사유의 핵심으로 선창하고, 「태극도」를 통해 주돈이와 이정 형제간의 도통을 구축하며, 고원한 도학자로서 주돈이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를 통해 도학 전통 측면에서 주돈이는 도학의 종주로 자리매김 되고, 그의 「태극도」는 도학의 핵심을 밝힌 문헌으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주희의 시각은 원대 이후 역사전통에서 도학의 정통적인 시각으로 공인되었다.


This article is part of the Southern Song Intellectual History study related to the Theory of Line of the Way(道統論) by so-called Neo-Confucianism or the School of the Way(道 學).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image of Zhou Dunyi as a Neo-Confucian scholar during the Southern Song period, and the status of his Diagram of the Supreme Ultimate.
Believing Zhou Dunyi as the heir to Confucius-Mencius, the view that he delivered the Way to two Cheng(二程) brother was presented by Hu Hong(胡宏) of School of Hu-Xiang. But the book that was important in the School of Hu-Xiang was not Zhou Dunyi's Diagram of the Supreme Ultimate(太極圖, TaiJi Tu), but Comprehending the Book of Change(通書, Tong Shu). The importance of TaiJi Tu as an independent literature separated from Tong Shu began with the tradition of Southern Song School of I-ching Diagrams. In this tradition, TaiJi Tu was highlighted as an independent document describing the theory of relating I-ching study cosmology, and as a literature passed down by Zhou Dunyi to two Cheng.
Zhu Xi arranged and compiled Zhou Dunyi's books and published Chang-sha's editions(長沙本, 1166), Jian-an's editions(建安本, 1169), and Nan-kang's editions(南康本, 1179). He synthesized the discussions of the School of Hu-Xiang and the School of I-ching Diagrams tradition in the process. He also preached TaiJi Tu as a key literature containing Zhou Dunyi's ideas. And through TaiJi Tu, he built a line of the Way between Zhou Dunyi and two Cheng brothers, highlighting Zhou Dunyi's image as a Neo-Confucian Scholar.
Through this process, Zhou Dunyi became the head of the school of the Way tradition, and his Taiji Tu was established as a document that revealed the core ideas of the School of the Way. And Zhu Xi's argument was recognized as an orthodox view after the Yu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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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임진왜란 피로인(被擄人)과 도환인(逃還人)들의 흔적을 찾아서 ― 17세기 초 호적으로부터

저자 : 韓相祐 ( Han Sang-woo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3-20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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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끌려갔지만, 그중 돌아온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극소수 사족층 피로인들의 체험 기록을 제외하면, 우리는 여전히 누가 일본에 끌려갔으며 누가 살아 돌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이에 본 연구는 호적에서 발견되는 끌려간 자(被擄人)들과 도망쳐 온 자(逃還人)들의 기록에 주목하였다. 17세기 초산음, 단성, 울산의 호적에서 발견되는 141명의 피로 기록과 17명의 도환인들의 성별, 연령, 직역 등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호적상 피로인들은 대부분 노비로 20세를 전후한 나이에 잡혀간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도망쳐 돌아온 도환인들은 20대 후반에 피랍된 양인 남성이 다수임을 확인하였다. 또 도환인들은 호적 작성 직전에 배우자를 찾고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호를 구성하여, 정부 차원에서의 정착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Korean scholarship on the Imjin War estimates that approximately one hundred thousand Koreans were captured and taken to Japan during the six year conflict (1592~1598), and only a few of them returned to Chosŏn Korea. For the most part, we do not know who these captives and returnees were because, with the exception of a few upper class returnees, most did not leave their name to history. To rectify this, this study pays attention to the household registers of Korea, which contain not only members of the upper class but also the lower classes. I found 141 captives and 17 returnees within the registers compiled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in Sanŭm, Tansŏng, and Ulsan counties. My study illuminates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se captives: most were of lower social status, and their average age when captured was around 20-years-old. I analysed the features of the households of these returnees, and discovered that they did not have children in the household. It means that they married and settled just before compiling the household register of 1609. This study also suggests that most returnees received government support, such as exemptions from taxation, corvee labor, and low born status. These concessions helped them to start a family and to settle down in a specific district, things which the local government concerned wished to encou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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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 후기 『사기(史記)』 「화식렬전(貨殖列傳)」 주석서의 문헌적 연구

저자 : 安大會 ( Ahn Dae-hoe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1-23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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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후기 학자의 『史記』 「貨殖列傳」 주석서를 조사하고 발굴하여 분석하였다. 특히 『貨殖傳註解』와 『古今集註新校貨殖傳』 2종의 주석서를 발굴하여 분석하고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18세기 이후 단행본으로 유통된 「화식열전」의 주석서는 몇 종에 이른다. 그중 『經史註解』의 일부인 『화식전주해』와 鄭亮欽이 편찬한 『고금집주신교화식전』이 단행본으로 편찬되어 다수 필사되었다. 이밖에도 漢陰이란 호를 가진 학자의 주석서가 있었고, 1796년에 正祖의 명에 따라 金履喬와 洪奭周 등이 『史記選纂注』를 1차 완성하였고, 1798년에 丁若鏞이 번다한 주석을 刪正하여 개정하였다.
2종의 단행본 주석서는 기왕에 널리 이용된 주석서와는 전혀 다른 내용과 특징을 지녔다. 修辭學的 관점에서 텍스트를 이해하여 단락을 구분하고 문장의 서술구조와 문리와 문맥을 중시하여 창의적 주석을 단 참신한 주석서였다. 또 널리 활용되던 三家注나 『史記評林』의 주석을 참조는 하되 독창적 주석을 달았고, 새로운 해석을 많이 하였다. 2종의 주석서는 「화식열전」을 정확하고 흥미롭게 읽는 데 기여한 저술로서 동아시아 학계의 『사기』와 「화식열전」 주석사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This paper uncovered and analyzed commentaries on Shiji Huozhiliezhuan that were written by scholars during the late Chosŏn dynasty. This paper newly presented and examined two volumes -Hwasikjeonjuhae and Gogeumjipjushingyohwasikjeon- to discover the following findings.
There are several commentaries on Huozhiliezhuan, which was published as a single volume after the eighteenth century. Among such commentaries, Hwasikjeonjuhae, a part of Gyeongsajuhae, and Gogeumjipjushingyohwasikjeon, which was a book compiled by Jeong Yang-heum, were published and transcribed many times. Other notable commentaries included a book written by a scholar who used Haneum as his penname, the first edition of Sagiseonchanju, written by Kim Yi-gyo and Hong Seok-ju under King Jeongjo's order in 1796, and a revised compilation of multiple commentaries completed by Jeong Yakyong in 1798. The two commentaries examined in this paper dramatically differed from the other popular commentaries in their content and characteristics.
The two commentaries examined the text rhetorically by separating the paragraphs and added original footnotes by focusing on the narrative structures, connotations, and context of the sentences. While there were references to the popular Sanjiazhu and Shijipinglin in the books, the two commentaries also included original annotations and new interpretations. The two commentaries stand out in the history of commentaries on Huozhiliezhuan as companions that contributed to a more accurate and fascinating understanding of Huozhiliezh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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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후기 의과 입격자의 친족 네트워크와 결속

저자 : 羅榮勳 ( Na Young-hu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1-26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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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623년(인조 1)부터 1870년까지 의과에 입격한 1,100명을 대상으로 '친족 네트워크'를 파악하고 그들의 결속 배경을 살폈다. 특히, '통혼 네트워크'에 집중하여 의과 입격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결속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동성 부계 친족'의 강한 결속을 지닌 것은 물론, '통혼 관계'에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1,100명 가운데 886명, 80.5%가 의과입격자간의 통혼 관계로 결속되어 있었다. 의과 입격자 177개 가계 가운데 156개 가계는 서로 어떤 방식으로든 통혼 관계로 얽혀 있었다. 의과 입격자가 이처럼 강력한 결속을 했었던 배경에는 왕실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의원집단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대로 '世醫'로 결속하여 왕실의 필요에 부응하였다.


This paper identified the 'Kinship network' of 1,100 people who entered the Uikwa(醫科)-Examination from 1623 to 1870 and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ir solidarity. In particular, the association of the Passers of the Uikwa-Examination(醫科入格者) was confirmed by focusing on 'marriage relationship'. They were strongly united as 'an agnate' and 'marriage relations' were widely influenced. Of the 1,100, 886 were bound by a common marriage between the Passers of the Uikwa-Examination. Of the 177 families who entered the Uikwa-Examination, 156 were intertwined with each other in some way. The background of such a strong alliance between the Passers of the Uikwa-Examination was due to the need for a reliable group of doctors in the royal family. They were united for generations to meet the needs of the royal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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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천주교 인식과 대응 양상

저자 : 趙志衡 ( Cho Ji-hyo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1-29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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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燕巖 朴趾源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이 그의 손자 瓛齋 朴珪壽에게 계승·확장되는 양상을 탐색하였다. 연암이 지닌 천주교 인식과 대응의 양상을 살피는 것은 18세기 노론 인사들의 서학-서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살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연암은 노론 핵심인 반남박씨 가문 출신으로 北學派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북학파 문인들은 일찍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燕行을 통해서 자신들의 학문적 논의를 진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북학파 문인들은 종교적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북학파 문인들과는 달리,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서 허황된 학설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암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친서학-반서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양상은 沔川郡守 재임 시기의 행적에서 잘드러난다. 이 시기 연암에게 천주교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내어 비루한 습성들을 지니게 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는,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형벌을 가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신에 수령이 지극한 정성과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어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연암은 이러한 방식을 직접실행에 옮겨, 천주교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고 배교시키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은 가문 내 후손들에게 계승·확장되었으며, 연암의 손자였던 박규수가 남긴 「闢衛新編評語」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규수는 몇 차례 진행된 국가적인 천주교 박해가 실효성이 없었음을 강변하는 한편,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 천주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연구하여 그 모순점을 비판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주력하며 천주교도를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았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은 조부 연암이 보여준 모습과 상호 참조가 된다.


This paper examined the perception of the Catholic and the aspect of correspondence of Park Ji-won. In addition, it has been looked into how Park Ji-won's perception and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ere inherited and extended to his grandson Park Kyu-su.
This study has its significance in examining one aspect of the Catholic and Western learning perceptions that the Noron scholars had in the 18th century.
Park Ji-won was from a core family of Noron and a representative literary person of Northern Studies. The scholars of Northern studies were very interested in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and natural science, and they advanced their academic discussions through history travels to Chinese. Park Ji-won had a negative perception of the Catholic and thought it's an absurd theory. In other words, Park Ji-won was taking the position of 'pro-Western learning, anti-the Catholic' that was positive about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but negative about Catholicism
During his tenure as a Myeoncheon governor, Catholicism to Park Ji-won was recognized as a very dangerous idea that enticed foolish people to have poor habits. However, when it comes to the way of corresponding Catholicism, he raised the problems of a strong response to arrest and penalize Catholics, and instead insisted that Suryeong should be moved and taught the people with sincerity and trust. In fact, he put this in practice by himseld and made good results.
Park Ji-won's perception of and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ere inherited by his grandson, Park Gyu-su. Park Gyu-su argued that the several Catholic persecutions at 『Byeokwuisinpyeongeo』 were ineffective, while he insisted that actively accepting and studying Catholic books and criticizing its inconsistency to prevent the spread of Catholicism. Also, at the time of the Byeongin Catholic Perceptions in 1866, he focused on educating the people as a Pyeongan-do governor and did not execute even a single Catholic. Such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as similar to his grandfather, Park Ji-won.

KCI등재

10조선시대 문학관의 변화와 한국문학의 정체성(1) ― 유가 성리학적 이념의 구현과 체현으로서의 문학관을 중심으로

저자 : 朴京男 ( Park Kyeong-nam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9-32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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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문학관을 매개로 한국문학의 정체성 및 정체성 개념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전통적 문학관의 다기한 측면을 소개하고, 그중하나의 문학관을 택해 조선시대 문학관을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근대 이전 시기의 문학관을 '학문과 박학으로서의 문학관'만으로 단순하게 요약하는 근대 문학 연구자들의 생각과 달리, 전통시대에는 이 밖에도 '뜻과 정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문학', '사물·인간의 기질과 기상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문학', '울분과 불평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문학', '유가 성리학적 이념의 구현과 체현으로서의 문학' 등 문학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이 일정한 계보를 형성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본고는 전통시대 문학관의 이러한 '복수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중 '유가 성리학적 이념의 구현과 체현으로서의 문학관'의 역사적 변모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전통시대 문인들이 자신이 처한 위치와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다양한 문학관을 펼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본고는 '동일성'에 기반한 기존의 정체성 개념 대신 '복수성'과 '관계성', '차이' 및 '변화'에 입각한 새로운 정체성 개념을 제안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문학의 정체성이 새롭게 모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This paper is to reconsider the concept of identity and identity of Korean literature through a point of view on Literature. To this end, we introduced a diverse aspect of the point of view on literature in the pre-modern East Asia, and took one of them, examined the literary views of Chosŏn Dynasty periodically.
Most modern literary researchers recognize that thinking about literature in the pre-modern is mixed the concept of academic and literature. But except the point of view of literature as an academism, more various thinking about literature existed in the pre-modern. That is to say, literature as an expression of meaning and affection; literature as a manifestation of the temperament of things and men; literature as a manifestation of one's pent-up and grumbling mind; literature as the embodiment of confucian ideology etc. each had its own lineage and coexisted. This paper revealed this pluralism of the point of view of traditional literature, at the same time, showed that an intellectuals in the pre-modern expressed various thinking about literature in his position and historical time and space, through reconsidering literature as the embodiment of confucian ideology.
Based on this, this paper proposes a new concept of identity based on 'plurality', 'relationship', 'difference' and 'change' instead of existing identity based on 'sameness'. And emphasized that the identity of Korean literature should be newly searc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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