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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Mun Hak 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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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99)~43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610
한문학보
43권0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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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위(姜瑋)의 천외(天外)감각 -출신의 한계에 갇힌 조선으로부터의 탈주

저자 : 김진균 ( Kim Jinkyun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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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瑋(1820~1884)는 평생 멀리 떠나고픈 의지를 보였다. 강위는 한미한 무반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문과로 진출하려는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한 이후, 시인으로 행세하며 전국을 방랑하였고, 한편 정통 학문인 성리학의 바깥에 놓여 있던 고증학과 병법 등의 잡학을 공부하였으며, 밖으로는 세계 질서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며 청나라를 세 번 일본을 두 번 다녀왔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대단히 드물게 동아시아 3국 여러 곳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다. 물론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 현실 정치의 필요에 따라 개화파 정치세력에 의해 강위가 발탁되어 막후에서 활용되게 된 것이지만, 그 필요에 부응한 강위의 내면에는 조선으로부터 떠나 출신의 한계를 온전히 극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 한계를 벗어나 대등한 인격으로 교유할 수 있었던 외국인들에게는 종자기를 대하는 백아의 심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위는 외국에서 자신의 출신의 한계가 조금 완화되는 경험을 하긴 했지만, 완벽히 제거할 수도 없었고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해야 했다. 더 먼 곳이 필요했다. 출신의 한계가 완벽히 제거되는 그 상상을 이룰 수 있는 먼 곳을 강위는 신선이 노니는 천하의 밖이라고 표현하며 동경하였다. 전근대 천하 질서가 붕괴되고 근대적 세계 질서가 압도해오는 시대에 동아시아 국제 정치의 막후에서 동분서주하던 강위는, 새로운 신분 질서에 대한 열망을 天外의 감각에 담아본 것이다.


Kang, Wi(姜瑋, 1820~1884) showed a willingness to go far all his life. Kang was born as a son of a poor military officer family, and after being frustrated after having hope to advance into the civil servant, he wandered the country as a poet, while studying miscellaneous studies such as archaeological studies and military techniques outside of Seong-ri-hak, a traditional discipline. In addition, he went to the Qing Dynasty three times and Japan twice, not to miss the change of the world system. At that time, it was very rare for Koreans to leave footprints in various places in the throughout three East Asian countries. Of course, Kang was chosen according to the needs of real politics amid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order and was utilized behind the scenes, but in response to those needs, there was a desire to completely overcome the limitations of his native origin from Jo-seon. For foreigners who were able to get out of the limits and communicate with the same personality, he's heart like Baek-a's heart to be close to Jong-ja-ki.
However, although his being discriminated in China and Japan were slightly eased, Kang could not completely escape from discriminating and had to return to Jo-seon. He needed a farther place. He admired the far-off place where the limitations of his native origin could be completely removed, expressing that it is the outside of the world where Shin-seon lives. Kang who was behind the scenes of the international politics of East Asia in an era when the pre-modern world order collapsed and the modern world order overwhelmed, was captured the desire for a new status order in the senses of going out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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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위(姜瑋) 시문학(詩文學)에 대한 당대의 평가 - 20세기 시화(詩話)를 중심으로

저자 : 김보성 ( Kim Bo-sung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9-6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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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琴 姜瑋(1820~1884)는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이 격변하는 19세기를 살아간 학자이다. 강위는 秋史 金正喜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朴珪壽, 吳慶錫, 劉大致 등과 함께 실학적 전통과 개화사상의 가교역할을 한 초기 개화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또 그는 李建昌, 黃玹, 金澤榮의 스승이자 당대 詩壇의 맹주로서 韓末 漢文學 四大家에 포함되는 문인이다. 한국한문학사에서 강위의 위상은, 그와 거의 동시기에 활동한 문인의 증언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현전하는 개인 문집에도 강위에 대한 정보가 있긴 하지만, 강위보다 조금 뒷세대들이 신문에 게재한 글에 강위와 관련된 일화와 비평이 더욱 다양하고 생생하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관료이자 문필가·비평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茂亭 鄭萬朝(1858~1936)와 梅下 崔永年(1859~1935)의 기관지 寄稿(한문본)를 보면, 강위의 근대 시단에서의 위상과 시적 교류 양상, 그리고 그가 남긴 시문학의 작품성을 간접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강위는 조선 말기 위대한 문인이자 사상가로 빠짐없이 거론되지만, 강위만을 온전히 주목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연구들은 강위의 작품 자체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술했듯 문인 강위에 대한 당대 증언이 꽤 남아 있으므로 강위의 작품 자체를 분석하기에 앞서 그의 문학 활동을 주목한 역대 소견, 특히 그간 여러 사정으로 소외되었던 일제강점기 기관지에 게재된 기고의 풍부한 정보를 종합하는 일은 나름 유의미하다.
앞으로의 서술은 다음의 단계를 거치고자 한다. 첫째, 강위의 문필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목도했던 정만조의 글을 통해 당대 시단에서 강위가 점했던 위치를 구체화한다.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정만조의 <榕燈詩話>를 주된 근거 자료로 삼았다. 둘째, 강위의 시문학을 체계적으로 비평한 최영년의 글을 통해 강위 작품의 특징을 파악한다. 최영년은 『신문계』와 『매일신보』에 詩話를 장기 연재하며 근대 문인들을 두루 비평했던 인물이다. 정만조의 시화에 일화 비평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 최영년의 시화에는 작품 비평 혹은 이론 비평의 비중이 더 크다. 최영년의 여러 시화 속 예리한 비평을 발판 삼아 강위의 시가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지 살펴본다. 이상 20세기에 편찬된 詩話에 남은 강위의 문학적 자취를 따라감으로써 당대 대표 시인 강위의 면모를 명확히 마주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Kang Wi(姜瑋, 1820~1884) is a scholar who was active in the 19th century, when the paradigm of East Asia was rapidly changing. Kang Wi learned from Kim Jeong-hee(金正喜), and is evaluated as 'an early Enlightenment(開化) theorist, who linked between practical science philosophy and enlightenment ideology together with Park Gyu-su(朴珪壽), Oh Kyung-seok(吳慶錫), and Ryu Dae-chi(劉大致)'. In addition, Kang Wi was a teacher of Lee Gun-chang(李建昌), Hwang Hyeon(黃玹), and Kim Taek-young(金澤榮), and was the head of the poets at that time, and was among the four literary men(四大家) of Sino-Korean Literature(漢文學). Kang Wi's reputation in the history of Sino-Korean Literature can be estimated through the testimonies of literary men who were active at about the same time. The personal writings remain now containing information on Kang Wi. However, the stories and criticisms of Kang Wi are more diverse and vivid in the articles submitted to the newspaper by juniors born a little later than Kang Wi. For exampl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eong Man-jo(鄭萬朝, 1858-1936) and Choi Young-nyeon(崔永年, 1859~1935), who were active as bureaucrats and writers and critics, wrote articles (written in Chinese) that were submitted to the Maeil-Shinbo(每日申報). Based on these articles, you can indirectly experience Kang Wi's reputation among modern poets, the way he communicated with poetry, and the literary value of his poems.
Kang Wi is frequently mentioned as a great literary man and theorist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studies that focused solely on Kang Wi were rare, and these studies only analyze specific literatures of Kang Wi. As mentioned earlier, there were a lot of testimony about Kang Wi as a 'Moon-in(文人)'.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past views on his literary activities rather than analyzing his writings only. In particular, it is useful to synthesize a wealth of information from the articles submitted to newspape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hich were not noticed due to various circumstances.
This paper addresses two major issues. First, through the writings of Jeong Man-jo who witnessed Kang Wi's literary activities, the status of Kang Wi among the literary people at the time is revealed. Jung Man-jo's < YongDeung-ShiHwa(榕燈詩話) > serialized in Maeil-Shinbo was used as the main material.
Second, the paper analyzes the characteristics of Kang Wi's poems through Choi Young-nyeon's writings that systematically criticized Kang Wi's poems. Choi Young-nyeon is a person who criticized modern literary men for a long time in Sinmungae(新文界) and Maeil-Shinbo. Jeong Man-jo's writings contain a lot of anecdotes. On the other hand, Choi Young-nyeon's writings put more weight on literary criticism. Based on the sharp criticism of Choi Young-nyeon's, the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Kang Wi's poems. The paper suggests that through the literary traces of Kang Wi, which are left in the Shi-Wha created in the 20th century, Kang Wi who was representative poet at the time, can be clearly revea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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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80년대 초반 강위(姜瑋)의 일(日)·청(淸)여행과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

저자 : 이헌주 ( Lee Heon-joo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1-10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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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는 동아시아 삼국이 내우외환으로 큰 혼란을 겪던 격동의 19세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선각적 지식인이자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詩人이었다. 그는 한미한 무반 가계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종신토록 자신의 포부와 역량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뛰어난 식견으로 문호 개방을 전후한 시기 위정자들이 정책 결정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한문학에서도 한말 사대가로 불릴 정도로 큰 족적을 남겼다.
본 논문에서는 1880년대에 강위가 감행한 두 차례의 일본 여행과 연이은 중국 상해 여행을 중심으로 그의 만년의 삶을 다루었다. 강위는 환갑이 되던 년 제 차 수신사 1880 2 김홍집을 수행하여 첫 번째 일본 여행을 했고, 2년 후인1882년초김옥균과함께두 번째 일본여행에 나섰다. 제2차수신사행에서 일행에게는 조일 양국의 외교적 현안의 해결과 이홍장이 보낸 밀함과 관련한 일본의 동정 파악과 개화 문물의 시찰이라는 명확한 소임이 있었다. 이 때문에 수신사 일행의 움직임은 외교 현안 해결에 집중되었고, 개화문물 시찰이나 일본 측 인사들과의 교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의 국정 탐색과 함께 국채 모집의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1882년의 일본 여행에서는 상대적으로 기간과 세부 일정 등에서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메이지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근대화의 실상을 자세히 살피고 다양한 인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제2차 수신사행이 귀국 때 『조선책략』을 가져오자, 이를 계기로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개화정책 추진을 가속화하였고, 청국 정부에도 영선사를 파견하여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여 조미조약을 조인하였다. 하지만『조선책략』의 반입으로 국내에는 거센 반개화 운동이 촉발되었는데, 강위는 유생들의 반대 논리를 반박하는 두 편의 글을 지어 개화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이는 조선 정부의 대미수교 개화정책 추진의 논리와 명분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두 차례의 일본 여행을 통해서 강위는 일본의 근대화 추진 실태와 함께 흥아회가 주창하는 '아시아 연대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귀국하던 중 임오군란 소식을 듣고 어윤중과 사태 수습을 논의하기 위해 天津방문을 계획했던 강위는 이후 양무운동의 산실인 상해의 근대문물을 살펴보고 귀국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미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 추진 실태를 살펴보았으니 청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양무운동의 성과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위가 청일 양국의 근대화 정책 추진의 실태를 두루 살피고 귀국한 것은 1882년 11월의 일이다. 귀국 후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이는 고령의 나이에 무리한 외유를 했던 후유증 때문이기도 있지만,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과 친밀했던 그의 이력으로 인해 갑신정변 실패 이후 기록의 대부분이 인멸되었기 때문이다.


Gang Wi is a visionary intellectual and iconic poet of his time who lived like a flame in swirling turbulence of the 19th century when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were stuck in great confusion due to troubles at home and abroad. His relatively lowly social status from a military noble family prevented him from obtaining a position and opportunity to be able to exercise his aspirations and capabilities for life. However, his outstanding knowledge and deep insight made a great impact on politicians in making their policy decisions around the time of the opening the national door to foreign countries and left a distinct mark in Sino-Korean literature as one of the four masters.
This paper focuses on the late years of his life when he took two trips to Japan, followed by to Shanghai, China. Gang Wi took the first trip to Japan in 1880 when he turned 60 years of age to accompany Kim Hong-jip, the second envoy to Japan(第2次 修信使), and made another trip two years later in early 1882 together with Kim Ok-gyun. The second envoy team had clear duties of resolving pending diplomatic issues between the two countries, identifying what Japan was up to with regards to the documents sent by Li Hung-chang and inspecting the civilized culture of Japan at the time. Accordingly, the envoy team focused on resolving pending diplomatic issues with limited resources assigned to inspecting the civilized culture and the exchanging friendship with Japanese officials. On the other hand, his second trip to Japan in 1882, which appeared to be intended to understand the Japan's state affairs and to raise funds with government bonds, allowed more leeway for the envoy to set the schedule and itinerary. For this reason, they were able to make a closer inspection of ongoing Meiji Restoration and modernization sought by Japan and to meet with various figures.
The second envoy team brought the Strategy for Korea(『朝鮮策略』) on its way back from Japan and the Joseon Dynasty accelerated its policy of progressive movement, which had made little progress since signing the Ganghwado Treaty, sent another envoy to the Qing Empire to ask for an arrangement for a treaty with US and eventually signed the Joseon United States Treaty in 1882. However, the introduction of the Strategy for Korea triggered a strong anti-progressive movement in Korea while Gang Wi defended the legitimacy of implementing the progressive policy by writing two articles refuting the anti-progressive movement among Confucian scholars, which has a significant implication in that it provided the reason and justification for the Joseon government to push ahead with making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and promoting its progressive policies.
The two trips to Japan allowed Gang Wi to develop keen interest in Japan's modernization move and the Theory of Asian Solidarity(亞細亞連帶論) sought by Heungaheu(興亞會). Hearing the the Im-O Military Revolt(壬午軍亂) on his way back home, Gang Wi decided to inspect the modernization of Shanghai, the cradle of the Chinese Westernized Reform(洋務運動) before returning home, after discarding his original plan to visit Tianjin to discuss how to respond to the situation with Eo Yun-jung. He wanted to witness the achievements of the Chinese Westernized Reform led by the Qing Dynasty after examining the Japan's modernization status through two previous trips.
It was in November 1882 that Gang Wi returned home after inspecting the ongoing modernization of the two countries. It is a pity that we are not able to gain a clear understanding of what activities he engaged in after returning home due partly to the aftereffects of his overstretched overseas trips at a late age and partly to the destruction of most of the relevant records following the failure of the Gapsin Coup orchestrated by the Enlightment Party due to his close relationship with the party's key figures, including Kim Ok-g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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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今年又三十東坡出”考

저자 : 鄭墡謨 ( Jung Sun-mo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7-1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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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 문단에 나타난 '東坡崇尙(東坡風)'의 형성 과정 및 “올해 또 30명의 소동파가 나왔네![今年又三十東坡出]”라는 유행어의 함의에 대해서 검토한 것이다. 고려 문단에서는 인종연간(1123-1146)부터 '동파풍'의 전조현상이 나타났고, 의종연간(1147-1170)에는 '동파풍'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무신란(1170) 이후로 '동파풍'이 두드러지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모방 및 표절 현상도 나타났다.
한편 “今年又三十東坡出”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하는 李奎報의 答全履之論文書는 그가 28세 때인 명종 25년(1195)에 작성되었는데, 당시 고려문단에서 일고 있었던 '동파풍'의 실상 및 이에 대한 이규보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이규보는 당시 문단에 대한 全履之의 비판적 태도에 동조하면서 “세상의 떠들썩하게 소동파를 따라 배우면서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世之紛紛效東坡而未至者]”의 한 예로써 “今年又三十東坡出”이라는 유행어를 언급하고 있다. 즉 당시 고려 문단에서는 매번 과거 시험 합격자가 발표될 때마다 “올해 또 30명의 소동파가 나왔네!”라고 말할 정도로 소동파 시문 학습열이 대단했지만 이로 인한 모방과 표절 문제 또한 두드러졌다. 이규보는 이러한 시류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시를 지을 때 불가피하게 '어구와 뜻을 창조[創造語意]'하게 되었다고 변명하는 방식으로 그의 시학관을 천명하고 있다.


In this paper, the forming process of “the Dongpo東坡trend” and the meaning of “another thirty Dongpos will come out this year” in the Koryeo literary world will be discussed. In the Reign of In Jong (1123-1146), the precursor of “the Dongpo trend” came into being in the Koryeo literary world and then got formally established in the Reign of Ui Jong (1147-1170). After the Munsin-ran (1170), it was further developed with its bad effects arising. Shortly after, Lee Kyubo李奎報, in A letter in reply to Cheon Iji全履之's poetry writing written around 1195, had a critical attitude towards “the Dongpo trend” and pointed out its drawbacks in the Koryeo literary world at that time with the statement of “another thirty Dongpos will come out this year”. Moreover, he also expressed agreement with Cheon Iji's criticism that “all poets have been writing after the fashion of Dongpo but they have not been on the same level yet”. Moreover, Lee Kyubo had repeatedly stressed his unique distinct poetic view of “creating words and meanings” in order to overcome the resulting disadvantages of parody and plagiarism in the process of “the Dongpo trend” prevailing in the Koryeo literary world and the popular comment that “another thirty Dongpos will come out this year” appe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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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전기 『수계교본도연명시집(須溪校本陶淵明詩集)』의 간행과 유진옹 비점의 양상

저자 : 노요한 ( Johann Noh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9-185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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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溪劉辰翁(1232~1297)은 南宋의 遺民, 宋末의 愛國詞人, 혹은 당대를 대표하는 평점가로서 알려져 있다. 남송 멸망 후 본격적으로 평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가 평점을 남긴 시인은 두보, 이백, 맹호연, 왕유, 위응물, 소식, 이하 등 58명에 이른다. 이들 수계본 중 일부는 고려말-조선초에 우리나라에 유입되고 목판 또는 활자로 간행되어 문인들 사이에서 널리 독서되었다. 『수계교본도연명시집』은 『정간보주동파화도시화』와, 『풍아익선시』 『문장정종』 등 시문선집과 더불어 조선전기 문인들이 도연명을 읽고 이해해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진주 간본 『須溪校本陶淵明詩集』을 대상으로, 그 간행 사실과 유진옹 비점의 양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유진옹 평점의 특징에 대해 程鋸夫는 嚴元德詩序(『程鋸夫集』)에서 자신을 작자와 중첩시켜 작품을 읽는 '작자와의 同化'의 태도를 들었다. 또한 유진옹의비평관에 있어 가장중요한것은작품속에들어 있는 '情'을중시하는 자세라고 평가된다. 이를 바탕으로 본고는 『須溪校本陶淵明詩集』의 비점 양상을 1) 眞의 추구와 탈세속의 境界, 2) 인생의 유한함과 及時行樂, 3) 전원의 일상과 노동하는 삶, 4) 지음의 부재와 고독감의 발로 등 크게 4가지로 구분하여 분석을 하였다. 이러한 유진옹의 비점이 도연명 수용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publication of Collection of Taoyuanming poetry from the corrected text of Xuxi Liu Chenweng (須溪劉辰翁, 1232~1297) in the early Chosŏn period and its aspects of his comments and punctuations. Liu Chenweng is well known as a leftover citizen of Sung dynasty, a patriotic author of Ci (詞) as well as a representative commentator of the late Sung period. He began his commentary work after the decline of Sung dynasty and it amounts 58 poets' works including Du fu, Li Bo, Meng Haoran, Wang Wei, Wei Yingwu, Su Shi etc. where he added comments and punctuations. Some of collections of poets from the corrected text of Xuxi, so-called corrected edition by Xuxi, were imported in the late Koryŏ-early Chosŏn period and reprinted with wooden block as well as bronze type that they were widely read among Koryŏ and Chosŏn literati. It is presumed that Collection of Taoyuanming poetry from the corrected text of Xuxi was one of texts with which Chosŏn literati understood Taoyuanming's poetry with other collections of Taoyuanming poetry and anthologies including Jingkan Buzhu Dongpo he Tao Shihua (精刊補註東坡和陶詩話), Fengyayi Xuanshi (風雅翼選詩), Wenzhang Zhengzong (文章正宗).
Cheng Jufu (程鋸夫) in his preface to Yan Yuande's poem (嚴元德詩序) pointed out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mments and punctuations of Liu Chenweng can be summarized as his sympathetic mind with the author. It is also estimated that the most important element found in the comments of Liu Chenweng is his viewpoint of emphasizing the mind of poets. Based on that, this article divides the aspects of comments and punctuations of Liu Chenweng found in Collection of Taoyuanming poetry from the corrected text of Xuxi into four categories: 1) pursuit of the truth and the boundary beyond vulgarity, 2) the finitude of life and carpe diem, 3) the daily routine of the countryside and the life of labor, 4) the absence of the deep friendship and the expression of loneliness. Follow-up research will deal with the problem how these comments and punctuations of Liu Chenweng influenced Chosŏn literati who were eager to understand Taoyuanming's poetry prope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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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약천 남구만의 국방론과 그 지향점

저자 : 신태영 ( Shin Tae Young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7-21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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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우리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架橋에 해당한다. 400여 년 전 해양(일본)과 대륙(청)의 침략을 받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은, 재발할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함경도 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지낸 南九萬(1629~1711)은 조선의 국방 정책에 심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구만을 당대 최고의 병조판서로 극찬하였다. 이에 본고는 남구만의 국방론을 다음 네 가지 코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남구만의 문학 연구와 작가 의식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고는 그의 국방론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리미리 대비해서 스스로 강해지자는 '有備無患'의 자강론, 실체를 갖추면서도 그 소문이 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有實無聲'의 현실적인 전략, 무용한 제도나 정책 등을 과감하게 폐기하거나 개선해서 실제적인 효과를 기대한 '移無用爲有用'의 군정 혁신, 북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하자는 '立賢無方'의 인재 등용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의 국방론의 지향점은 조선 古土의 회복이나 청에게 복수하기 위해 北伐을 하자는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미 북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남구만은 오히려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 지역 백성의 안정된 삶'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그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국방의 안전을 도모하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As it is known, Korea's geopolitical loc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corresponds to a bridge between the continent and the ocean. More than 400 years ago, Joseon was struggling to prepare for the war that had been invaded by the ocean(Japan) and the continent(Qing Dynasty). At that time, Nam Gu-man(1629-1711), who served as the governor of Hamgyung-do and the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contributed greatly to the defense policy of the Joseon Dynasty. This Nam Gu-man is a symbol of the minister of defense guaranteed by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herefore, this paper seeks to examine his defense theory through the following four codes. This work will also help to develop his literary research and literary consciousness.
His defense theory is prepared ahead of time(yubimuhwan-jaganglon), a realistic strategy to prepare for the rumor that you have reality(a realistic strategy of yusilmuseong), military policy innovation that expects actual effects by discarding or improving useless systems and policies, people who want to treat people in Hamkyung-do fairly without discrimination, and so on the study was divided into four parts.
His aim of defense theory was not to restore the old age of Joseon or to avenge Qing. Considering the reality of Joseon, it was already impossible to punish the North. Therefore, Namguman made 'steady life of the people in the northern region' a top priority, such as Hamgyeong-do and Pyeongan-do. It was intended to present realistic measures for the safety of national defense by actively developing the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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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삼연 김창흡의 시경체 한시와 시경론과의 관련성 - 다산 정약용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진영 ( Kim Jinyoung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7-276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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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체 한시란 『시경』의 형식 및 체제를 본 따 지은 한시를 말한다. 본고에서는 삼연 김창흡(1653~1722)이 독자적인 시경론 저술을 남기는 한편 다수의 시경체 한시를 창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의 시경체 한시와 시경론 사이의 관련성을 타진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다산 정약용(1762~ 1836)의 경우와 비교해봄으로써 조선후기 한시사 및 시경학사의 한 국면을 탐색해보고자 하였다.
삼연의 시경체 한시는 초기에는 민요의 정취를 재현하는 작품들이 지어졌으나, 중기 이후로는 특정 인물과의 일상적 교유를 바탕으로 한 贈詩가 많이 지어졌다. 그리고 설악산 은거시기에는 작자의 일상생활과 주변풍경을 소재로 하여 「파경집구」라는 집구시가 창작되었다. 다산의 시경체 한시는 초기에는 벗에 대한 찬미, 유배지에서의 신세 한탄 등 개인적 상념을 읊는 작품들이 창작되다가, 1806년 이후부터는 현실 비판적 성격이 짙은 愛民詩 계열이 주를 이루게 된다. 1809년에 지어진 「전간기사」는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주제·소재 면에서 삼연의 시경체 한시에 개인적 서정의 면모가 두드러진다면, 다산의 시경체 한시에는 사회적 서정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삼연과 다산의 시경체 한시에 나타나는 '개인적 서정'과 '사회적 서정'의 차이는 양자의 시경론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삼연의 시경론은 주자의 국풍민요설을 지지하는 宋學 쪽에 가까웠고, 다산의 것은 「毛詩序」의 美刺說을 지지하는 漢學 쪽에 가까웠다. 삼연은 국풍민요설을 바탕으로 '자연발생적 서정시'로서 민요가 지닌 천진성을 높이 평가했다. 나아가 사대부 한시가 이를 배워 그 천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미자설을 바탕으로 하되, 사대부로서 지니는 풍간의 책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를 폈다. 그리고 스스로가 맹자가 말하는 大人이 되어 시로써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들은 각자가 파악한 『시경』의 精髓를 작품화하여 시경체 한시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Shijing(詩經) style poetry means a poem whose form and style imitates that of Shijing. Focusing on the fact that Samyeon(三淵) Kim Changheup(金昌翕, 1653~1722) not only left his own Shijing-hermeneutics(詩經論) writing but also wrote a number of Shijing-style-poems, this study tries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 between his Shijing style poetry and his Shijing-hermeneutics. At the same time, I also try to compare this to the case of Dasan(茶山) Jeong Yagyong(丁若鏞, 1762~1836), so that we can explore a facet of the poetry writing and Shijing-hermeneutics during the late-Joseon(朝鮮) period.
Samyeon's Shijng style poetry, in early stage, was mainly composed of the works reproducing the taste of folk song; but later, gift poems related to companionship with specific persons were frequently created. During his secluded days in Mountain Seorak(雪嶽山), Samyeon compiled A Collection of Cento Poems Composed of Phrases from Shijing(葩經集句) portraying the poet's everyday life and landscape around him. Dasan's Shijng style poetry, in early days, was composed of works describing the poet's personal emotions such as admiring friend or dwelling on his misfortune in exile; but after 1806, poems with social themes like describing the weary life of peasants became mainstream. Reportage on Rural Incidents(田間紀事), written in 1809, was a typical example of such poems. The theme or subject of Samyeon's Shijing-style poetry more focused on personal lyricism whereas that of Dasan's more focused on social lyricism.
The thematic difference between the two poets' Shijing style poetry can be explained through their Shijing-hermeneutic viewpoints. Samyeon's viewpoint was more close to the Song School(宋學) Shijing-hermeneutics which supported Zhu Xi(朱子)'s theory that Guofeng(國風) is mainly composed of folk song; whereas Dasan's viewpoint was more close to the Han School(漢學) Shijing-hermeneutics based on the Commentary on Shijing by Mao School(毛詩序) claiming that Guofeng is mainly composed of socio-historical poems. Based on the Zhu Xi's Guofeng theory, Samyeon emphasized the naturalness of the folk song as a spontaneous lyric poetry. He also proclaimed that literati's poetry should learn folk song and recover the naturalness. Based on the socio-historical viewpoint about Guofeng, Dasan paid more attention to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literati as a poet. And he himself tried to become the Great Man(大人), as Mencius(孟子) said, and alert king's mind through poetry. Samyeon and Dasan had different thoughts about what the essential theme of Shijing was, and they embodied it in the form of Shijing style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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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百拙 韓益相 硏究 試論

저자 : 윤재환 ( Yoon Jae-hwan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7-30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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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拙韓益相은 下廬黃德吉의 문하 제자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로, 황덕길의 수제자로 알려진 허전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황덕길 문하의 어른이었다. 그는 85세를 살면서 비록 중앙 官界의 최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다양한 요직을 두루 거쳤고 수차례의 지방관직을 통해 淸白吏라는 명성을 얻었다. 한익상은 『自娛集』이라는 불분권 6책의 필사본 문집을 남겼는데 이 중 1책과 2책의 경우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지만, 3 6책의 경우 교정의 흔적과 함께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다.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한익상의 글은 내용으로 볼 때 대부분이 실용적 목적이나 개인적인 수양을 위한 것이고, 문학을 바라보는 인식 역시 유가적 보편 관념과 부합한다. 詩文의 이상적 전범을 『시경』과 『서경』에 둔 것이나 세대가 내려올수록 詩文의 수준이 저하된다고 본 점, 詩文창작을 위한 학습의 현실적 지표를 漢文唐詩로 설정하고 詩文을 통해 진솔한 인정과 정치의 득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은 당대 문인 학자들의 일반적인 문학관과 별다른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문집에는 이런 목적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글 역시 수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문학의 다양한 기능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그의 문집에는 문학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낸 부분이나 흥미와 관심의 결과물까지 담겨있다. 이와 함께 한시의 창작에서 개성적 독창적인 창작의 가치를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어 그가 漢詩의 창작에 상당히 주목하였고,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한익상의 한시가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한익상 시문학의 본격적인 검토와 그의 시문학 작품들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시문학 작품에 대한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Baekjol Haniksang was the earliest disciples of the pupils of Haryeo Hwangdeokgil. He was a considerable influence on Heojeon, also known as the the best pupil of Hwangdeokgil. He lived at the age of 85 and although he did not climb to the top of the central office, he went through various positions and earned a reputation for several local offices. He left a manuscript book of six books called Jaojip, which is relatively well organized in the case of one and two books, but in the case of from three to six books, it is not organized at all with the traces of correction
Haniksang's writings in the literary works are mostly for practical purposes or personal cultivation, and the perception of literature also corresponds to the universal idea of confucianism.,The fact that the ideal war criminals of the writings are placed in the Scripture of Documents and Classic of Poetry, and that the level of the writings is lowered as the generation comes down, and that the realistic indicators of learning for the creation of the writings are set as the sentences of the Han dynasty and Chinese poetry of Tang dynasty, and the truthful recognition and political gains through the writings should be confirmed. This view does not show any difference from the general literary view of literary scholars of the period.
However, his literary works also contain articles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this purpose, and in that sense, he thinks that he was fully aware of various functions of literature.,Especially, his literary collection contains the part that reveals the secret pride of literature, and the result of interest and interest.,Especially, it seems to advocate the value of individual and original creation in the creation of Chinese poetry, so he paid considerable attention to the creation of Chinese poetry and recognized the value and meaning.,Therefore, in order to confirm the specific meaning of Chinese poetry of Haniksang, who had such a perception, a full-scale review of Haniksang's poetry literature and a comparative review of his poetry works and his surrounding characters' poetry works should be m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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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정조대 관찬(官撰)과 사찬(私撰)의 이중주 - 이덕무와 성해응의 어정명찬서 편찬과 사적 저술 활동 -

저자 : 손혜리 ( Son Hye-ri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07-33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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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했던 서얼 출신 문사들의 御定命撰書 편찬 활동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 저술과의 상관성을 탐색한 글이다.
이를 위해 정조대 검서관으로 활동했던 15명에 대한 인적사항과 재임기간, 관력, 저술 등을 조사하고, 朴齊家·柳得恭·李德懋·成海應·朴宗善·柳本學 등 6명의 문집이 현재 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중 이덕무와 성해응은 각각 『靑莊館全書』와 『硏經齋全集』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바, 이들이 검서관으로 재임하면서 참여한 어정명찬서 편찬 사업이 개인 저술 활동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포착하였다.
따라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덕무가 편찬한 『宋史筌』「遺民列傳」과 「磊磊落落書」, 그리고 성해응이 편찬한 『尊周彙編』과 「皇明遺民傳」의 상관성을 집중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 어정명찬서의 편찬과 간행을 주로 담당했던 규장각 검서관의 직무와 역할에서 나아가 관찬활동이 개인 저술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의 직무와 역할의 외연이 심화 확장되었음을 확인하였다.


This paper is a research of correlationship between official publication and private publication of seo-eol(庶孼) literati in Kyujanggak(奎章閣) gumseogwan (檢書官) at King Jeongjo period of Late Choson.
For the research, this paper searched informations as biographic data, record of official service, and publication list of 15 gumseogwans, and it is found that 6 of them, Park Je-ga(朴齊家)·Yu Deuk-gong(柳得恭)·Lee Duk-moo(李德懋)·Sung Hae-ung(成海應)·Park Jong-seon(朴宗善)·Yu Bon-hak(柳本學), left personal collection(文集). Especially, Lee and Sung left a publication of large volume, each Cheongjanggwan-jeonseo(靑莊館全書) and Yeongyeongjae-jeonseo(硏經齋全書). It tells us that their experience of participating in 'Collection of Royal Highness(御定命撰書)' as gumseogwan has close relation with their personal writings.
Thus from this point of view, this paper closely investigated correlation between Lee's publication, Yuminyeoljeon(遺民列傳) in Songsajeon(宋史筌) and Noeroenangnakseo(磊磊落落書), and Sung's publication, Jonju-hwipyeon(尊周彙編) and Hwangmyeongyuminjeon(皇明遺民傳). Furthermore the research examined that experiences of official publication for Kyujanggak gumseogwans above their duties and tasks have affected their personal publication practices. Therefore it is clear that denotation of duties and tasks for Kyujanggak gumseogwans in Jeongjo period has developed more broad and more com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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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세기 초에 편찬된 한국 한시 선집의 여러 양상

저자 : 임미정 ( Lim Mijung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41-37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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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한국 한시 선집의 현황과 실상을 파악하는 목적에서, 조사 가능한 자료들을 살피고 각 시선집의 구성과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먼저 34종의 한국 한시 선집 목록을 만들었고, 이 자료들의 출간 배경, 편찬 방향과 내용을 검토하여, 이 시기 한국 한시 선집이 보여주는 몇 가지 방향성에 대해 논해보았다.
20세기 초 한국 한시 선집의 대표적 성과는 『海東詩選』(1917)과 『大東詩選』(1918)류의 역대 한국 한시를 총정리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幷世集』(1910), 『朝鮮近代名家詩抄』(1926)와 같은 19세기 작가를 중심으로 엮은 선집도 등장하여 근대 작가의 시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한편 여성의 한시만을 수록한 선집도 단독으로 간행되었고, 특정 지역 출신 인물의 시만을 소개한 시선집 등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여전히 기존의 시선집을 토대로 재편집한다든지, 근대 작가를 포함하지 않은 18세기까지의 한시만을 대상으로 한 시선집도 제작되면서 여러 모습의 시선집이 혼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20세기 초에 간행된 한국 한시 선집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주로 한시 작가 연구의 보조 자료로 활용된 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한시 향유층의 확대와 근대식 출판 환경의 성장에 기댄 한국 한시 선집의 간행 실상에 주목하여 한국 한시를 정리했던 일련의 작업들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자 하였다.


This study observes Sino-Korean poetry anthologies of Korea created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and introduces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each anthology. A list was made of over thirty kinds of Sino-Korean poetry anthologies of Korea and discussions were conducted of various directionalities shown in the Sino-Korean poetry anthologies of Korea during this time period.
Sino-Korean poetry anthologies of Korea from the early twentieth century are mainly books that organize Sino-Korean poetry of successive generations focusing on writers of the nineteenth century. Also, sole publications were made of anthologies that only contained Sino-Korean poetry of female writers and verse reference books along with poetry anthologies that introduced only poetry of people from specific areas also appeared. However, even during this period, existing poetry anthologies were reorganized and poetry anthologies were made including only writers from until the eighteenth century, showing that there were blends of various forms.
Sino-Korean poetry anthologies of Korea published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have mainly been used as supplementary material for research on Sino-Korean poetry writers of the nineteenth century. This article focuses on expansions of Sino-Korean readers and the publication realities and actual aspects of Sino-Korean poetry anthologies of Korea that base themselves upon modern publication environments to introduce Sino-Korean poetry in the forms of when they were last organ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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