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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8)~24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39
남명학
24권0호(2019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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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가계와 생애 -기억(記憶)과 기록(記錄)의 잔존과 변질-

저자 : 김학수 ( Kim Hak-su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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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인홍의 가계와 생애를 분석한 것이다. 가계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서산정씨 '동래설(東來說)'의 실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서산정씨는 충청도 서산정씨의 토성이었음에도 족보류에는 본디 송나라 사람으로 정치적 화란을 피해 귀화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로써는 선진 문명 또는 문화에 대한 선호의식이 이런 양상을 수반한 것으로 해석된다.
생애에서는 정인홍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잔존과 변질의 양상을 '난망(難忘)'과 '난감(難堪)'이란 키워드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인조반정 이후의 정인홍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에게서 등을 돌린 것으로 말해지는 인사들의 인식 속에 변호와 변론의 흔적이 남아 있고, 어떤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인사들의 자손들이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들에게 드리워진 정인홍의 색채를 지워가는 장면은 의리를 강조했던 남명학의 실체에 강한 의문을 갖게 한다.


This thesis examines the life and the lineage of Jeong Inhong(鄭仁弘, 1535~1623). In reference to his lineage, this thesis focused on the delusion of the eastward migration of Seosan Jeong clan. According to the records in the category of genealogy, Seosan Jeong clan is reported as people from Song dynasty who were naturalized in Goryeo due to the political strife even though Seosan Jeong clan maintained its position as Toseong(土姓) in Chungcheong-do. The stated preference on the advanced civilization and culture added embellishment to the records at that time.
From the perspective of Jeong Inhong's life, this research had an object in tracking the aspect of residual and corruption of memory and records about Jeong Inhong through unforgettableness(難忘) unbearableness(難堪). There are traces of defense and argument remaining in the perception of those who were said to define Jeong Inhong as a traitor after the King Injo's enthronement and turned their backs against him. A scene in which the descendants of those who had vowed not to betray their faith in any harsh reality compromise with reality and erase the colors of the Jeong Inhong cast upon them raises strong questions about the reality of Nammyeong Studies, which emphasized the righteousness and integrity.

2내암 정인홍의 출처와 경세사상

저자 : 권인호 ( Kwon In-ho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91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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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핵심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의 출처(出處)와 경세(經世)사상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훈척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사화와 당쟁이 일어났다. 이어서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그리고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정인홍은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출처大節)를 특별히 칭송하였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출처를 실천하는데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선배학자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대해서도 출처로서 조식과 비교하면서 비판하였다. 그의 경세사상은 유교의 민본정치 사상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중심이념으로 하였다. 이것은 『대학』의 중심사상으로, 유교의 이상적인 평화로운 세상인 대동(大同)사회로 지향하는 것이다. 광해군의 대동법 실시는 공물(貢物)폐해와 서리(胥吏) 망국론을 주장한 남명학파의 경세론이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에 나라에서 임명한 의병대장을 사임하면서 올린 상소문에서, '오늘날 상황은 사람이 중병에 걸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동서고금의 역사는 나라가 망할 때 외침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정치상층부의 부정부패와 민심의 이반과 분열이 더 큰 원인이라는 것을 정인홍은 주장하였다.
사상이란 '시대의 산물'이고, 특히 철학이란 '시대정신의 정화(精華)'이다.


The essence of this paper is Nae-am Jeong In-hong(鄭仁弘, 1535~1623)'s administration(經世) thought and Idea of obtaining and retiring(出處). In that times, conflicts between Huncheokpa and Sarimpa led to calamities of scholars and party strifes. The later era was a period of troubles both at home and abroad, such as Japanese Invasion in 1592, King Injo Restoration and Manchu Invasion in 1636.
Jeong In-hong especially praised his teacher, Nammyeong (南冥) Cho shik(曺植, 1501~1572) in terms of the idea of obtaining and retiring. And then, he used the attitude of the teacher as a basis for practicing his idea of obtaining and retiring. Moreover, He criticized the enshrinement of confucian Scholars in Munmyo(文廟宗祀) of senior scholars in comparison with Cho Shik in terms of obtaining and retiring.
His administration thought was based on the idea of "self-cultivation and governing people(修己治人)" that was the main political thought of people based-on in Confucianism. This was the central idea of Great Learning, which aimed at the 'Daedong(大同) society', the ideal and peaceful world of Confucianism. The implementation of Daedong-Law in Gwanghaegun period was based on the administration thought of Nammyeong School who advocated abusing on tributary payment and the idea of ruining country by deputies. He resigned from the patriotic army chief who was appointed in the count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saying, "Current situation is like a man suffering from serious illness".
In examining the history of East and West, Jeong In-hong insisted that not only the external invasion but also the internal corruption of the upper echelons and the dissent of the people are more likely to cause the country to collapse.
Thought is "the product of the times", and philosophy is especially "the essence of Zeitgeist".

3내암의 하학전통 계승과 정치사상의 특징

저자 : 송치욱 ( Song Chi-wook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3-143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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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남명이 강조한 '하학'이 유학의 본령을 담고 있는 전통이며, 이러한 남명의 하학 전통을 내암의 정치사상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내암은 남명의 고제高弟로서 '하학下學'을 강조하는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남명은 퇴계와 갈등하면서까지 하학을 강조하고, 하학을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천리天理를 입에 담는다며 당대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남명에게 있어 하학은 상달의 공부를 위한 단순한 입문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유학의 본령을 담고있는,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송유宋儒는 물론이고 내암 또한 지적하듯 '하학'은 불교나 노장으로부터 유학을 구별하게 하는 주요한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유학에서 하학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러한 하학을 강조한 남명의 사상은 내암으로 이어져, 그의 출처관, 시대인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내암은 스승인 남명의 행장을 찬술하면서 '하학'을 강조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으며, 남명의 출처에 대한 퇴계의 비판에도 '하학'의 기준에서 반박하고 변호하였다. 그리고 현실을 강조하는 하학을 기반으로 당대의 주요한 문제를 '허위虛僞'라 인식하고, '실實'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의 '실實의 정치사상'은 시의時宜와 현장성, 직접성, 적실성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고원한 것보다는 비근한 것을 추구하며,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하학의 전통이 기반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유학의 민본사상과도 이어지는 것이었으며, 내암에겐 보민保民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clarify that the 'Ha-hak' emphasized by Nam-Myeong was the tradition containing the main principle of Confucianism, and how the Ha-Hak tradition was connected to Nae-Am's political thought. As an eminent disciple, Nae-Am succeeded to Nam-Myeong's academic tradition of emphasizing 'Ha-hak'. Nam-Myeong emphasized 'Ha-hak' even when he was at odds with Toe-Gye, and criticized scholars of the day, who talked Natural Law(天理) but did not practice Ha-hak. For Nam-Myeong, 'Ha-hak' was not a simple introductory course for the study of Shang-dal(上達), but it should not be left with the main purpose of Confucianism. As both Confucian scholar of Song Dynasty(宋儒) and Nae-Am stated, 'Ha-hak' contains a major identity that distinguishes Confucianism from Buddhism and Taoism. In this article, I intended to emphasize the importance of the 'Ha-hak' study in the Confucianism and to clarify that Nam-Myeong's ideology emphasizing Ha-hak succeeded to Nae-Am, and effected his view of Chulcheo(出處, working for state or living in seclusion) and awareness of time accordingly.
Nae-Am stressed the point of the emphasis on "Ha-hak", while praising the master of the teacher, Nam-Myeong. Despite of Toegye's criticism about Nam-Myeong's Chulcheo(出處), he refuted and defended it under the Ha-hak standard. Based on Ha-hak that emphasizes the reality, he recognized the main problem of the time as 'falsehood(虛僞)' and tried to overcome it through Practicality(實)'. His practical political thought was to pursue appropriate time(時宜), realism, directness and appropriateness, and it was based on the tradition of Ha-hak, which emphasized the daily practice, pursuing something rather than a lofty one. This was followed by 'People-oriented thought(民本思想)' of Confucianism. For Nae-Am, it was eventually developed into 'Thought for the people(保民思想)'.

4내암 정인홍의 강학과 교육

저자 : 사재명 ( Sa Jae-myung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5-18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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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은 남명으로부터 敬과 義를 체득함으로써 남명학을 계승하게 되었다. 내암의 문인형성과 더불어 강학공간에 기반하는 강학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강학활동의 기반은 내암의 교육관과 목적, 그리고 교육내용과 방법을 구체화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통해서 그의 교육사상의 대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내암은 13세 때(1548)에 안음현의 葛川林薰에게 잠시 배웠다가, 15세 때 삼가 외토리 토동마을의 계부당으로 남명을 찾아가 입문하였다.
내암과 남명문인간의 강학활동공간은 남명의 강학지인 김해의 산해정, 합천의 뇌룡정, 그리고 산청의 산천재를 비롯하여, 누정재사와 서당, 서원 등이 있었다.
내암은 당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경쟁사회의 역기능이 만연하는 풍토를 비판하였다. 당시 현실교육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내암은 아동의 양육, 교사론, 그리고 선비관에 대한 자신의 교육철학을 피력하였다.
내암은 경사에 두루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비를 변론하는 일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그의 교육과정을 통해 함양되고 심화된 것으로 보이며, 교육의 내용은 사서와 오경, 성리서는 물론, 제자백가, 천문, 지리, 역리, 병진 등이며, 이를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이상적 인간상으로서의 교육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하학상달, 합자연의 강조, 개인의 적성에 따른 진로지도, 인재교육과 인재변화와 교육에 대한 교육방법론이 모색되었음을 볼 수 있다.


It is now possible for Nae-am to inherit Nammyung-hak by acquiring reverence and righteousness from Nammyung. The lecture activity was actively developed based on the lecture space in addition to the formation of the School of Nae-am. The foundation of these lecture activities came to formalize the teaching view and purpose of Nae-am, and the teaching content and methods, and through this it became possible to grasp the large aspect of his teaching thought.
When he was 13 years old (1548), he learned a moment from Galcheon lim-hoon in An-eum-hyeon, and at the age of fifteen, he visited GyeBuDang of Todong of OeToRi of Samga and entered the Nam-myung.
The lecture space between Nae-am and a disciples ofNammyung's was SanHaeJeong of Gimhae, NoeRyongJeong of Habcheon, and SanCheonJae of Sancheong, and there were the Ru, Jeong, Jae, Sa, Seodang, Seowon etc.
At the time, he criticized a climate in which the reverse function of a competitive society, which had been pursuing only for the benefit of the individual, was prevalent. With the reflection on the actual education at that time, Nae-am expressed his educational philosophy about child rearing, teacher theory, and sonbi.
Not only did Nae-am pass through everything in his Scripture and History, but also arguing about his prosperity was exceptional. This seems to have been recharged and deepened through his educational curriculum, and the content of education is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四書五經), as well as Books of human nature and natural laws(性理書), all philosophers and scholars(諸子百家), astronomy, geography, Zhou Yi(周易), an artillery position(兵陣), etc. We all overseed it. Also, in order to pursue the purpose of education as an ideal human figure, from concrete to abstract things(下學上 達), according to the nature, the course guidance according to the individual fitness, the educational methodology on the personality training, the character change and the education was explored you can see.

5임진왜란 초기 내암 정인홍의 의병활동

저자 : 박용국 ( Park Yong-guk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5-245 (6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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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 정인홍은 왜군의 침략 소식을 늦어도 4월 14일 저녁이전에 알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내암의 문인 雪壑李大期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4월 15일에 듣고 내암에게도 전달했던 것 같다. 내암은 그 이후 전황도 그의 문인들과 家僮을 통해 속속 전달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는 4월 18일 밤을 무릅쓰고 영산에서 낙동강의 朴只谷津을 건너 초계로 退走하였다가 19일에 다시 합천으로 물러났다. 이 소식을 접한 정인홍은 합천에서 김수를 만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제의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정인홍은 향병만이 아니라 흩어져 달아난 장졸을 불러 모아 규율을 세우고, 그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적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정인홍의 사회적 관계와 남명학파의 인적 네트워크는 합천의병의 조직과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었다. 또 그것은 각기 분산적인 의병활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경상우도 방어에 효과적인 연계망의 구축과 상호협력적인 방어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정인홍의 합천 의병은 처음에 합천 야로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학덕으로 모인 문인 중심의 조직이 모체가 되어 召募에 나섬으로써 家僮·村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향병에 그쳤다. 이후 정인홍은 달아나 흩어져 숨었던 관군을 차츰 불러 모아 의병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인홍 의병은 향병이라고 칭하지만 그 대소의 장교들은 처음부터 모두 무너져 흩어졌던 當領·應領의 軍丁으로 구성되었다.
정인홍 의병은 임진년 茂溪·洛江·安彦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10월 진주성 전투 때 김준민 등이 진주성을 外援하여 단성과 단계를 약탈하던 왜군 2천여 명을 격퇴하였다. 이 가운데 정인홍의 낙강 승전은 넓게 보면 초계의 沙幕에서 창녕의 馬首院灘에 이르는 낙동강에서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전투 현장에서 보면 낙강의 승전은 낙동강의 甘勿倉津에서 마수원탄에 이르는 물길에서 왜군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따라서 기존 연구에서 정인홍 의병의 낙강 전투를 초계의 마진 승전으로 칭하는 것은 그 전투 현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정인홍의 견해에 따라 낙강 승전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초계와 마진 승전으로 칭하는 게 옳다. 정인홍 의병의 낙강 승전은 왜선의 낙동강 물길 이용을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초기의병활동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정인홍의 의병활동의 인적 구성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중위장 손인갑이다. 1589년 1월 비변사의 무신 不次採用때 李山海는 손인갑을 첫손가락에 꼽아 추천하였다. 정인홍 의병이 임진왜란 초기 주요한 전투에서 승전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은 손인갑과 김준민을 중위장으로 삼은 의병 조직의 인물선택에 있었다. 이처럼 정인홍은 용병술의 핵심인 용장을 가려내어 중위장으로 삼아 적진을 맨 먼저 돌진하게 하고, 용감한 자를 군사로 가려 뽑아 밤중의 기습 공격을 위한 행군에도 동요가 없도록 했다. 내암은 단순히 고을을 지키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도로가 모인 곳인 關防, 즉 무계와 안언역, 감물창진이나 마수원탄에서 적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내암은 選士와 知勢에 능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관방에서 승전하여 임진왜란의 전세 역전에 기여하였다.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the Jeong In-hong`s Euibyeong activities of in the early years of the Imjinwaeran. It is assumed that Jeong In-hong knew the news of Waegun(倭軍)'s invasion on the morning of April 14. Jeong In-hong received the message through his disciples and family errand boys. Gyeongsang Provincial Auditor Kim Su(金睟) crossed Nagdonggang(洛東江) and fled to Hapcheon(陜川). Jeong In-hong met Kim Su in Hapcheon to discuss countermeasures. Jeong In-hong met Kim Su at Hapcheon and discussed the measures. However, Jeong In-hong did not get any results. Jeong In-hong was stimulated by Cho'yu-mun(招諭文) of Cho'yu-sa(招諭使) Kim Seong-il and promised Changeui(倡義) with his comrades and disciples and formed an organization of Euibyeong. Jeong In-hong's Euibyeong initially recruited Euibyeong as the center of the disciples centered on Hapcheon Yaro(冶爐) area. The composition was small-scale Hyangbyong(鄕兵), composed of Gadong(家僮) and Chonmin(村民). Jeong In-hong gradually gathered the Gwangun, who had fled and had been hiding, and became the size of Euibyeong. The officers of Jeong In-hong's Euibyeong were officers of the Gwangun, who collapsed and scattered from the beginning. Most of the soldiers were composed of soldiers from the navy and army.
Jeong In-hong`s Euibyeong won a great victory in Mugye (茂溪)·Nakgang(洛江)·Aneon(安彦) in 1592, and Kim Jun-min and others who supported Jinjuseong outside Oct. in Jinjuseong(晉州城) battle, defeated 2,000 Waegun(官軍) who plundered Danseong(丹城) and Dangye(丹溪). On a larger scale, Jeong In-hong's Nakgang victory means the battle that took place in Nagdonggang, from Chogye(草溪)'s Samag(沙漠) to Changnyeong(昌寧)'s Masuwontan(馬首院灘). In the battlefield, Nakgang's victory was the battle of defeating Waegun on a waterway from Gammulchangjin(甘勿倉津) in Nagdonggang to Masuwontan. As a result, Jeong In-hong Euibyeong secured Nagdonggang waterway and blocked the use of Waeseon(倭船)'s Nagdonggang waterway. This is significant in the Euibyeong activities of the early Imjinwaeran period. Imjinwaeran early Jungwijang(中衛將) Son In-gap and Kim Jun-min were the main factors that Jeong In-hong's Euibyeong could win in major battles. In January 1589, Son In-gap was recommended for the Musin (武臣) Buchachayeong(不次採用) of Bibyeona(備邊司). Jeong In-hong picked up the valiant longevity, the core of the millitary art, and made it Jungwijang. When they met the enemy, they were the first to rush to the enemy's camp. And Jeong In-hong was able to win the battle by selecting a brave soldier and organizing units. Jeong In-hong let his Euibyeong keep and guard the military strategic points from the enemy.

6래암정인홍(來庵鄭仁弘)의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대한 반론과 변론 -『퇴계학설반대상소문(退溪學說反對上疏文)』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전병철 ( Jeon Byeong-cheol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7-291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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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退溪學說反對上疏文』이라는 책을 통해 鄭仁弘의 晦退辨斥에 대한 논란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논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했다. 하나는 이 책과 『光海君日記』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실록을 편찬할 당시 어떤 자료가 삭제되고 생략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퇴계학설반대상소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회퇴변척에 대한 논란을 살펴보았을 때, 『광해군일기』의 편찬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퇴계학설반대상소문』을 『광해군일기』와 대조한 결과, 실록에는 기사로만 적시하여 내용을 알 수 없던 상소문 중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19건이 있었으며, 언급조차 되지 않은 상소문으로 8건이 더 있었다.
회퇴변척과 관련된 상소문 가운데 『광해군일기』에 생략되거나 기사로만 제시된 상소문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편찬 방법은 의도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이 주도한 정국이 잘못되었다고 인식시키기 위해 그들이 행한 훌륭한 측면은 생략하고 잘못한 일들은 자세히 기록하는 편찬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임금을 몰아붙이는 강경한 언사도 간단하게 기사로 처리함으로써 상황의 흐름이 전개된 구체적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한 측면이 역력하다.
특히 『퇴계학설반대상소문』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는 李爾瞻의 상소문은 회퇴변척에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정치적 판단과 함께 정인홍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내용인데, 『광해군일기』에는 하루 전인 4월 14일의 기사로 기록하면서 정인홍이 자신의 스승인 까닭에 동료 관원들과 함께 차자를 올릴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수록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검토 내용을 토대로 말한다면, 『퇴계학설반대상소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회퇴변척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당시의 정황을 보다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to contemplate the process of dispute on 'Hoetoe Byeoncheok (晦退辨斥)' of Jung In-hong (鄭仁弘) through the book of 『Sangsomun in Opposition to the Academic Theories of Toegyeo (退溪學說反對上疏文)』. The discussion was processed in two directions. One is to compare and analyze the contents of this book and 『Diary of King Gwanghae-gun (光海君日記)』 to confirm what data of the time to compile the actual records was omitted and deleted. The other is the find out how the compilation of 『Diary of King Gwanghae-gun』 was made when looking at the controversy on 'Hoetoe Byeoncheok' with the focus on the contents of 『Sangsomun in Opposition to the Academic Theories of Toegyeo』.
As a result of contrasting 『Sangsomun in Opposition to the Academic Theories of Toegyeo』 with 『Diary of King Gwanghae-gun』, there were 19 data that could be confirmed with the full context from those Sangsomun (memorials to the king) that did not fully disclose the contents since the actual records indicated for article.
When looking into the fact of what contents were contained in the Sangsomuns that were presented only the articles or deleted from 『Diary of King Gwanghae-gun』 of Hoetoe Byeoncheok related Sangsomuns, this type of compilation method was understood to have the intentionality. In order to imprint the fact that the political situation led by King Gwanghae-gun (光海君) and Daegul (大北) regime, it used the compilation method to record in details about what they had done wrong, but omitting the aspect of what they done great. In addition, it processed in simple article for the rigid remarks to corner the king in a way of clearly showing the aspect of unable to find out the detailed status deployed for the flow of situations.
In particular, the Sangsomun of Yi Yi-cheom (李爾瞻) that could be confirmed of its full context from 『Sangsomun in Opposition to the Academic Theories of Toegyeo』 had the contents well representing the mind set of Jung In-hong together with the political decision not intending to worsen a series of Hoetoe Byeoncheok related developments, and in 『Diary of King Gwanghae-gun』, it was recorded in article of April 14 with the method of succinct record with the contents that it could not submit along with the colleague government employees since Jung In-hong was his teacher. Speaking based on such a review content, it is possible to assess its implication that it was the turning point to find out in details for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time of occurring around Hoetoe Byeoncheok through the analysis on 『Sangsomun in Opposition to the Academic Theories of Toegyeo』.

7설화에 나타난 來庵鄭仁弘의 형상과 그 의미

저자 : 황명환 ( Hwang Myeong-hwan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3-33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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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설화에 나타난 내암의 형상과 그것이 지닌 의미에 대해 구명하였다. 내암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드러냈으며, 이로 인해 남명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는 남명의 가르침을 받들어 평생 敬義로써 자신을 단속하였으나, 스승에 대한 존숭이 지나친 나머지 독선적인 노선을 견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직된 사고로 인해 그는 인조반정 당시 반대파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내암 설화에는 이러한 내암의 모습이 잘 형상화 되어 있다.
'중동'으로 나타난 그의 모습과 높은 벼슬아치에게도 굽히지 않는 그의 태도는, 바로 내암이 지니고 있었던 뛰어난 자질을 형상화 한 것이다. 그리고 내암 설화에서 내암은 스승인 남명을 보호하기 위해 중동을 이용하여 구렁이를 죽인다. 이를 통해 구렁이가 내암이 배척한 타학파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내암 설화에서 내암은 장모 혹은 퇴계의 입을 통해 역적으로 죽을 것임이 예견된다. 그러나 내암 설화 내에서 내암은 폐모살제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즉, 내암의 죽음에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화 전승자들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고는 설화에 나타난 내암의 형상이 지닌 의미를 역사적 측면, 지역적 측면, 구비전승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역사적 측면에서는 내암 설화가 서인세력에 의해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지역적 측면에서는 내암 설화에 담긴 경상남도 지역의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같은 경상도 지역이라 할지라도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에서 내암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다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내암 설화가 지역에 따른 학파의 결집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구비전승적 측면에서는 구비설화가 지닌 특성으로 인해 설화 전승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내암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본고의 논의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내암과 관련된 보다 다양한 자료들을 함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내암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여러 인물들에 대한 설화도 함께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온전히 검토되어야만, 내암 설화가 지닌 의미가 보다 폭넓고 정치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figure of Jeong In-hong in the folktale and the meaning of it. Jeong In-hong revealed his outstanding talents from his youth and became Nam Myoung's best pupil. He has been in control of himself for the rest of his life with the teachings of his master, but respect for his teacher went too far and he became a self-righteous person. And because of this rigid accident, he is framed and killed by opponents at the time of King Injo's Restoration.
In the folktale, Jeong In-hong's figure is well shaped. His appearance as 'compound eyes' and his attitude that does not bend to the high government official are shaped Jeong In-hong's outstanding qualities. And in the folktale, Jeong In-hong killed the serpent by using the compound eyes to protect his teacher. From this, we can guess that the serpent was a different school from Jeong In-hong. Meanwhile, in the tale, Jeong In-hong is expected to die as a rebel through the mouth of his mother-in-law or Toegye. In the folktale, however, Jeong In-hong is portrayed as a figure who disagrees with the confinement of Queen In-mok and the murder of the General Yeong-chang. In other words, the storytellers tried to tell that Jeong In-hong's death was injustice.
This study looked at the meaning of Jeong In-hong's figure in the folktale in terms of historical, regional and oral literature aspects. From a historical point of view, folktail of Jeong In-hong tried to correct the distorted facts by Seoin party. And from a regional perspective, we could confirm the pride of the Gyeongsangnam-do region, which was included in the folktail about Jeong In-hong. This is illustrated by the conflicting views of Jeong In-hong in between Gyeongsangnam-do and Gyeongsangbuk-do. This fact is significant as it shows that the folktail of Jeong In-hong is related to the solidarity of school districts by region. Finally, a oral literature point of view, because of the characteristics of folktail, storytellers were able to freely evaluate Jeong In-hong.
To compensate for the discussion in this study, more diverse materials related to Jeong In-hong need to be reviewed together. It is also necessary to check the folktails about the various characters opposite to Jeong In-hong. If these points are thoroughly examined, it is likely that the meaning of Jung In-hong's folktails can be revealed more broadly and clearly.

8『논어』에서 공자의 덕치이념에 대한 일고찰 : 주자와 다산의 敬과 德治에 대한 주석을 중심으로

저자 : 임헌규 ( Lim Heon-gyu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3-37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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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修己를 통해 德을 쌓은 군자가 덕치를 시행하여 지선의 공동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치이념으로서 유교의 덕치는 『서경』의 「요전」에서부터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공자 또한 수기치인의 덕치이념을 계승ㆍ발전ㆍ정착시켰다. 요컨대 공자에 따르면, 敬으로 修己를 이룬 군자는 덕치로 안민ㆍ안백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그 수단으로서는 예악을 우선으로 하고 형정을 부차적인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논어』에 나타난 공자 정치이념의 핵심을 형성하는敬과 德治개념을 여러 주석들의 대비적 고찰을 통해 그 의미를 추적하여, 유교정치의 특징과 (신고주와 대비한) 다산 주석의 특징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서경』에서 敬과 德(敬德)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폈다. 다음으로 『논어』의 敬과 德治개념 및 그것이 나타난 구절과 주석을 살핌으로써 공자가 이 개념을 정립한 맥락과 후대 고주와 신주 그리고 다산의 정의ㆍ주석을 정리하고 상호 대비되는 논점을 제시하였다. 마지막 결론으로, 주자와 다산의 敬과 德治개념의 주요특징을 대비적으로 서술하였다.


This Articles intend to articulate Cu-Hui and Dasan' commentary of Confucian Political Philosophy centered on definition of reverence(敬) and Te(德) in Confucian analects. The most critical question in political philosophy was what are truly a human Virtues and a good life? Confucius believed in reality of the human Virtues. Confucius's political philosophy is based upon human Virtues.
Tsze-lu asked what constituted politician. Confucius said, "The cultivation of himself in reverential carefulness." and He said, "He who exercises government by means of his virtue may be compared to the north polar star. If they be led by virtue,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the rules of propriety, they will have the sense of shame, and moreover will become good."
Neo-Confucian, Chu-Hui attempted to metaphysically approach to what is a reverence(敬) and Te based on theory of Li-Ki(理氣論). He thought that reverence(敬) and Te are essentially tied together as a process of universe. Chu-Hui considered a reverence(敬) as the only beginning and ending of 'to become a sage'. Dasan defined a reverence(敬)' as one of many ways of 'to become a sage.'
Chu-Hui considered a politics by Virtues as revelation of innate Virtues. Dasan defined Virtues as a process of life.

9「신명사도(神明舍圖)」의 현대적 해석 시도 -마음의 인지와 소통의 기능을 중심으로-

저자 : 조창섭 ( Cho , Chang-sub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73-41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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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신명사도(神明舍圖)」는 마음을 왕이 통치하는 국가에 비유하여 도식화 해놓은 것이다. 도식화 되어 있는 마음은 마음을 수양하여 티 없이 맑고 밝도록 하여 세상사를 처리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만들도록 도식화 해 놓은 수양론의 집약도이다.
그러므로 이 도식은 마음을 갈고 닦아 본성을 보존하여 선(善)에 나아가고, 내부의 인욕을 없애고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어 존재의 일반원리와 합일되어 성학(聖學)을 추구하려는 노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신명사도」에 대한 연구의 모범은 후산(后山) 허유(許愈)나 복암(復菴) 조원순(曺垣淳)의 연구와 최근에 연구된 몇 편의 논문과 저서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연구와 저서에서는 「신명사도(神明舍圖)」의 구조물이나 관직명 그리고 개념어(槪念語) 등을 성현들의 말씀과 일치시켜 훈고(訓誥)학적 방법으로 연구 하였다. 이들 연구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태일군(太一君)은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마음을 다스리는 통치자이다, 통치는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하여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왕도정치를 펼친다. 우주만물의 덕을 일깨우는 천덕(天德)을 경(敬)에서 얻어 가진다는 것을 중시하여 도식의 중앙에 천덕과 경을 배열시켜 놓았다.
타고난 마음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보존(保存), 명상과 같은 정적인 정신활동을 통하여 착한 마음을 기르는 존양(存養), 외부 세계를 접촉하는 동적인 활동에서 자신을 점검하는 성찰(省察), 감정과 욕심 그리고 충동을 이성적 의지로 눌러 이기는 극기(克己)는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단계별로 나아가며 실천하여야 하는 덕목이다.
수양론의 이러한 실천덕목은 안으로 내면세계를 밝히는 경(敬)과, 밖으로 외부세계의 제반사를 올바르게 처리하도록 결단을 내리는 의(義)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경과 의는 지행합일을 이루어 남명의 실천유학을 성립시키는 근간을 이룬다. 지금까지의 『신명사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측면에서 수행되어 왔다.
그러나 왕이 통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전제군주제와 가부장적 사회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그려진 이 「신명사도」에 대한 연구는 왕조시대에서 자유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사회 변화를 감안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가 제기된다.
본인은 「신명사도」의 구조물과 관직이름 그리고 개념어 등을 인지(認知)와 소통을 수행하는 요소들로 간주하고, 이들을 인지론의 핵심 요소인 지각(知覺), 기억(記憶), 상상(想像), 개념(槪念), 판단(判斷), 추리(推理)등으로 분류하여 그 역할과 기능을 밝히고, 마음의 교환이라는 대화를 소통(疏通)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연구를 위해 마음을 정신과 일치시키는 용어의 확대와 그리고 현재의 인문과학에서의 인지이론과 소통이론 그리고 스키마(Schema) 이론 등을 인용하여 「신명사도」해석에 활용할 것이다.


The philosophical pursuit of the 16th century Neo- Confucianists in the Joseon Dynasty focused on xin 心(the mind-heart). Cho Sik (1501-1572), a.k.a. Nammyeong (his pen name), also was concerned with xin and explained it with a diagram called Sinmyeongsado 神明舍圖. However, unlike his contemporary Neo-Confucianists who analyzed xin in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the liqi 理氣(principle and vital force) doctrine, he explained it from the perspective of cognitive structure and on the basis of mind-controlling self-cultivation theory.
The diagram Sinmyeongsado 神明舍圖, which means 'the picture (圖) of a house (舍) inhabited by the mind (神明)', compares the mind to a kingdom, and encircles it with castle walls whose passages are the perceptive organs such as the eyes, ears, and mouth. 'Cognition' perceived by the cognitive structure means knowing something through a series of physical and mental processes. The Neo-Confucianist xingli 性理(the principle of natural tendency) doctrine claims that man has the fundamental innate nature of siduan 四端(four beginnings), i.e., ren 仁(humanity), yi 義(rightness), li 禮 (ritual propriety, rituals), and zhi 智(wisdom), along with qiqing 七情(seven feelings) occurring from contact with things. Therefore, what is perceived by the cognitive structure is integrated into the mind by the innate siduan and qiqing.
Nammyeong suggested that perceived knowledge and information is stored in the mind, whereas modern philosophers maintain that it is remembered by the brain. In order to explain Sinmyeongsado 神明舍圖in the framework of modern cognitive theory, this paper argues that the mind discussed by Neo-Confucianists is equivalent to the spirit in modern cognitive theory, and classifies the types of cognition as follows:
1. Cognition by way of the perception of objects through sensory organs,
2. Cognition by way of the memory that stores previous impressions or experiences,
3. Cognition by way of the imagination that visualizes unexperienced phenomena or things,
4. Cognition by way of the conceptualization of general knowledge regarding certain things and/or phenomena,
5. Cognition by way of the judgment of perceived things with logic or criteria,
6. Cognition by way of the inference of unknown things based on the known.
This paper uses the above cognitive framework to discuss the roles that these cognition types play. Although Sinmyeongsado 神明舍圖does not address olfactory perception, gustatory perception, or tactile perception in discussing cognition by way of perception through sensory organs, it does present two spiritual elements, gui 鬼 (spiritual beings, ghosts), the spiritual being that communicates with the spiritual/ghost world, and meng 夢 (dreams), the hope or ideal desired to be materialized. Considering the academic atmosphere of that time, these ideas can be regarded as creative.
The Neo-Confucianists' xiuyanglun 修養論(the Theory of Self-Cultivation) discusses wangdao 王道(the Way of the King), the method for a king to rule a country, and tiande, 天德(the morality of heaven). Wangdao 王道means ruling with humanity and morality; a king should pursue ruling under wangdao 王道, not badao 覇道(the Way of the Hegemon; rule by might), even when he has complete power to rule. Tiande 天德means that a ruler must have the morality of heaven that triggers the minds of all things in the universe.
Nammyeong took jing 敬(reverence) as the core theme of xiuyanglun 修養論, and yi 義(rightness) as the pillar of yililun 義理論(the Theory of Rightness and Principle), so he placed jing 敬and yi 義at the center of his personal and academic life. Jing 敬, which is the heart of xiuyanglun 修養論, is a guardian of the king's mind that preserves, cultivates, and reflects upon the mind, leading it to self-control and self-denial. Here, to 'preserve' means to maintain one's nature; to 'cultivate' means to cultivate one's mind through static mental activities such as meditation; to 'reflect' on one's mind means to check oneself during dynamic contacts with the outside world; and to 'self-control' means to suppress one's feelings, greed, or impulsivity with the power of reason. As Sinmyeongsado 神明舍圖discusses these functions, it overcomes the limitations of pure Neo- Confucianism and thus embraces even Laozi's and Zhuangzi's philosophies.

10한시로 그린 회연서원(檜淵書院)과 그 주변

저자 : 정우락 ( Jung Woo-rak )

발행기관 : 남명학연구원 간행물 : 남명학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17-460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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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회연서원과 그 주변을 역대의 시인들이 어떻게 한시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를 향사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무흘구곡 제1곡인 봉비암과 결합되어 있어 명실상부한 성주의 제일 명승지다. 김종직과 주세붕 등이 이곳을 문학 창작공간으로 삼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정구가 이곳에 회연초당을 짓고 강학을 하기 전부터 양정(陽亭)의 봉비암 일대는 절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학자 정구의 회연 이거(移居)와 사후의 서원 건립은 심방
(尋訪)과 이에 따른 창작을 더욱 증폭시켰다. 시기적으로는 정구 당대에서부터 최근세까지 이어지고, 정파적으로는 영남 남인을 중심으로 노론까지 포괄한다. 이 과정에서 선비들은 정구에 대한 존모는 물론이고 회연서원을 둘러싼 다양한 사연을 작품에 담기도 했다. 특히 18세기의 정위, 19세기에 정관영 등 정구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회연서원은 새롭게 부각되는데, 이로부터 회연서원에 대한 관심은 가야산(伽倻山)과 소산(梳山) 등 주변 경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how generations of poets embodied the Hoiyeon Seowon and its surroundings in Chinese poetry in an intensive manner. Not only is the Hoiyeon Seowon the place to hold a memorial service for Hangang Jeong Gu, but it is also the best scenic spot of Seongju true to its name, being combined with the Bongbiam, the first valley of Muheulgugok. Kim Jong-jik and Ju Se-bung found a place for literary creation here, which indicates that it had enjoyed its reputation for its fine scenery even before Jeong Gu built the Hoiyeon Chodang and began the pursuit of study here.
The great scholar Jeong Gu moved to Hoiyeon, and a Seowon was built in his honor after his death. A series of these events further promoted visits to the place and creative works. They have lasted from the days of Jeong Gu to recent years and encompassed even the Noron faction as well as the Namin faction of Yeongnam. In this process, classical scholars displayed their respect and yearning for Jeong Gu and also created works telling various stories around the Hoiyeon Seowon. The Hoiyeon Seowon was highlighted anew by descendents of Jeong Gu including Jeong Wi in the 18th century and Jeong Gwan-yeong in the 19th century. Since then, interest in the Hoiyeon Seowon was further extended to its surrounding landscapes including Mt. Gaya and Mt.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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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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