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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Stadies of Dong Hak

  • : 동학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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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98-7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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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0)~51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523
동학학보
51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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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라북도와 전주 일대의 동학 포덕과정에 관한 연구

저자 : 임형진 ( Hyeongjin 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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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말기의 상황은 조선의 모든 민중들에게 최악의 상태였다. 안으로는 세도정치와 무능한 지도자들의 가렴주구가 일상화되어 있었으며, 밖으로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서세가 밀려오니 민중들은 어느 곳에 의지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등장한 동학은 민중들을 아우르고 그들의 염원을 들어주며 희망찬 내일을 개벽세상으로 약속함으로써 한순간에 전민 중의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동학은 분명 경상도 경주에서 탄생하였지만 가장 뜨겁게 발현된 곳은 호남이었다. 동학이 제시한 개벽된 이상사회는 너와 내가 차별이 있는 세상이 아닌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 인정되고 존중받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너진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는 메시아적 구원의 손길이었다.
조선 전체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 호남은 역설적이게도 그 풍요로움 때문에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된 지역이었다. 그 가운데 전주는 언제나 중심이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개창자인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왕실의 뿌리였다. 그러나 수탈의 본거지이자 중심의 도시가 전주였다. 상처받고 있는 그들 민중을 다독이고 그들에게 위안과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준 동학은 이미 구조적으로 삽시간에 전주 일대로 확산되게 되어 있었다.
전주에서 기록으로 최초의 입도자는 1861년 신모씨였다. 해월 최시형이 1884년 익산의 사자암에 올 때까지 동학은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전북지방을 중심으로 호남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그동안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퍼지던 동학이 비로소 넓은 곡창지대로 진출하는 것이며 당시 억압과 핍박의 상징이었던 농민층으로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호남의 뜨거운 동참은 곧 그들의 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호남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뜨거웠던 지역이 전주였다. 전주는 그 정확한 참여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삼례의 교조신원운동에도 보은의 장내리집회에서도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도 크게 참여하였을 것이다. 들불처럼 전라북도에서부터 퍼져나간 혁명의 열기는 전주로 집결하였다. 전주 감영이 있는 전주성 점령은 동학군들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로서 전주는 더이상 허상뿐인 조선의 고향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개벽세상의 도시가 되었다.


The situatio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as the worst for all the people of Korea. Inside, the corruption of the incompetent leaders was normalized, and the world view centered on China collapsed and the West was coming out. With a collapsed worldview, the people were in a state of uncertainty about where to rely.
Donghak, who emerged in the crisis of the foreign exchange crisis, was put in the mind of the whole people at once by promulgating the hope, tomorrow, receiving the wish of the people. Donghak was born in Gyeongju, Gyeongsang province, but the place where it was most hot was Honam. It is also a dispute that there were many people who were in a harsh situation in the Honam region at that time. Donghak 's gaebyeog sesang was an equal world where all of you and I are recognized and respected by all who are not Hanhwa'ls. And the Messianic salvation hand to present a new vision and hope for a collapsed worldview.
The most affluent land, Honam, was, paradoxically, an area that was subject to abduction and exploitation because of its abundance. Jeonju was always central. Jeonju was the home of Lee Sung - gyeong, the reformer of the Joseon Dynasty, and was the root of the Joseon royal family. Jeonju is not only the spiritual symbol but also the representative city of Honam which is the granary zone. However, the city, which is the center of relative deprivation, was Jeonju, and the symbolic area where the contradictions of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dominant was Jeonju. The Donghak, which has overcrowded the people who are hurting and presented them with comfort and new hope, was already structurally spreading to Jeonju in a short time.
In 1861, Mr. Sheen was the first to join the record in Jeonju. Until Choi Shee-Hyeong came to the Sajaam of Iksan in 1884, Donghak was expanding in Gangwon Province and Chungcheong Province. However, it spread to the entire area of Honam centered on Chonbuk province. This meant that Donghak, which had been spreading around mountainous areas, had advanced into a wide granary area. It was a process of being absorbed into the peasant group, which was a symbol of oppression and persecution. During the Donghak Revolution in 1894, Honam's enthusiastic participation was their desire.
The other area in Honam was not as hot as it was in Jeonju. Jeonju could not know the precise number of participation, but it would have participated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fervor of the revolution spreading from Jeollabuk - do like the wildfire gathered in Jeonju. Jeonju castle occupation with Jeonla Gamyeong was a symbol of the Donghak armies. Jeonju was no longer the home of Chosun, which is only a horror, but a city of the world of gaebyeogsesang where people are treated lik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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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브랜드로서 전주동학농민혁명과 지속가능한 역사교훈여행의 과제

저자 : 장세길 ( Segil Ja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7-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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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전주동학농민혁명 사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현대적 계승을 위한 브랜드 전략과 역사교훈여행의 활성화 방안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첫째, 전주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실태를 들여다보고, 둘째, 역사교훈여행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지역동학농민혁명이 지역브랜드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전주동학농민혁명의 브랜드 전략을 탐구하고, 셋째, 전주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중심으로 역사교훈여행의 과제를 살펴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이 지역브랜드로 정립되는 데는 브랜드 실체인 역사적 사실보다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주고자 하는 기획된 상(像)', 이른바 브랜드 정체성이 중요하다. 일본에서 반환된 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이 안치된 장소(녹두관)에 완산전투라는 장소성이 더해지면 저항과 학살이라는 이미지가 기획될 수 있다. 저항과 학살은 브랜드를 위한 핵심요소이고, 전주가 전주동학농민혁명을 활용하여 기획하려는 상, 즉 장소의 가치는 '한국민주주의의 뿌리'이다. 이를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주기 위해서는 법률 개정부터 통합 마케팅, 공간 조성, 시민 교육, 세계화 등의 사업이 종합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기념행사와 기념물에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유적지를 찾지 않는다. 전주동학농민혁명을 알리기 위해 전주시가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전주시민 대부분이 전주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교훈여행은 관광자원, 관광매체, 관광객, 지역주민, 관리체계 등 핵심요소별 조건이 충족되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관광의 산업적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지나치게 경제적 사업에 치중한다는 역사교훈여행에 대한 비판도 새겨들어야 한다. 또한 아시아 국가가 공유하는 근대민주주의와 일제에 의한 학살 및 저항의 기억을 공통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에 기억의 콘텐츠를 채우는 사업이 필요하다. 전주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뿐 아니라, 공통의 기억을 아시아인이 함께 체험하면서 아시아공동체가 형성되는 기억관광의 효과는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llustrate how to create an effective branding strategy for the modern succession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o boost the Dark Tourism, which is mainly focused on the case study of The Jeonju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aim of this paper are threefold. First, it reviews the commemorated programs currently working on. Second, it elaborates the branding strategy of The Jeonju Donghak Peasant Revolution, which is under the assumption that the local Donghak Peasant Revolution should be clearly established for boosting the Dark Tourism. Lastly, it explores the tasks of Dark Tourism through the Jeonju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order to make for the public to consider Donghak Peasant Revolution as a local brand itself, so-called 'Brand Identity' is more vital-targeted image to put in the public's mind-rather than the historical truth itself, the Brand Reality. If you add a placeness of 'Wansan battle' to the place where the Donghak Peasant leader's ashes reposed, which was returned from Japan, you can build a new image showing resistance and genocide. They are key issues of the brand, and the value of place might be 'Korean Democracy', that Jenju wants to define and to build by applying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 do so, there is no doubt that the project should be proceed in the comprehensive way including the revision of the law, integrated marketing, space creation, citizen education, globalization and so on.
If some historic sites fail to show authenticity with their own celebrations and monuments, it is clear that people do not want to visit those places. Namely, this is the reason why local people are eve not aware of and understand Donghak Peasant Revolution properly, even though Jenju has tried to promote the concept of it. Dark Tourism can be managed successfully with the key conditions such as tourism resources, tourist media, tourists, local people, management system and so on.
You need listen to the opposite opinions saying that Dark Tourism tend to emphasize the industrial aspect of it and focus on the economic projects. Moreover, there is also a need for a project to consist memory contents of a place, that people can experience memories of genocide and resistance by Japan and common democracy shared by Asian countries as well. This is because it is expected that not only the globaliz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but also the successful outcome of 'Tourisme de memoire', in which the Asian community experiences the common memory together with the formation of the Asian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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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주성 전투의 전개과정과 문학작품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

저자 : 채길순 ( Gilsoon Chae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7-11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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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주성 전투가 문학작품에 어떻게 형상화 되는지 양상을 살펴, 그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동학농민혁명 시기 전주성 전투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고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에 '전주성 전투'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연대 별로, 그리고 전주출신 동학교도를 고찰한다.
연구 내용은 1) 동학농민혁명 초기의 전주성 2) 무혈입성 3) 전주성 전투 4) 청일전쟁과 전주화약 5) 2차 봉기와 동학농민군 토벌 6) 전주 출신 동학농민군 활동 등 시기 별 활동 양상과 전주 출신 인물들의 활약으로 고찰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전주성 전투 전개 양상과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과 전주성 전투 양상을 고찰했다. 모든 문학작품은 전주성을 교두보로 지배 권력의 핵심인 서울을 향했지만 청일전쟁으로 좌절되었고, 전주화약이 이뤄졌다.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전주성 집강소를 통해 대중들의 꿈이던 대동 세상을 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경복궁 침탈 사건으로 동학농민군은 9월 18일을 기해 다시 일어났지만 서울을 향한 동학농민군의 열망은 공주 우금치에서 좌절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과정은 일정하게 문학작품에 투영되었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군의 목표 점이었고, 전주화약으로 대동 세상을 열었다. 그렇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 출신 동학농민군의 투쟁활동이 많았지만 소년 장수 이복룡 외에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뤄지지 않았다.


This paper reviews how the battle of Jeonju Fortress is depicted in literature during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in 1894 to identify its historical meaning. To that end, the way the developments of the battle of Jeonju Fortress was depicted in literature that addresses Donghak Farmers' Revolution was reviewed for each decade.
The Jeonju Fortress battle can be reviewed by focusing on the following aspects: 1) Jenju Fortress during the early months of Donghak Farmers' Revolution 2) Entry into the fortress without bloodshed 3) Battle of Jeonju Fortress 4) Qing-Japan war and Jeonju Peace Treaty 5) 2nd uprising and suppression of the Donghak Farmers 6) Donghak Farmers from Jeonju or Jeonju Fortress and their activities.
All literary works depict the Battle of Jeonju as the starting point where although the core power was centered in Seoul, the Qing-Japan War frustrated many national movements, finally leading to the Jeonju Peace Treaty. Although limited in degree, through the Jeonju Battle gathering, a new world opened up for the mass. But with the victory by Japan in the Qing-Japan War, and the subsequent taking over of Gyeongbok Palace, Donghak Farmers rose again on September 18. The movement, however, was brought to its knees in Wugeumchi in Gongju, without being able to reach Seoul. This historical process was reflected on literary works, with the occupation of the Jeonju Fortress becoming the goal of the Donghak Farmers. A new world opened up with the Jeonju Peace Treaty. But at the time of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despite there being many fights and uprisings, there were not many cases where major figures except for Bokryong Lee, a young fighter, who were depicted as a protagonist in no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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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에 관한 고찰

저자 : 성강현 ( Kanghyeon Su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5-169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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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혁명은 조병갑의 학정에 반항한 고부기포가 발단이 되었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은 고부기포를 동학농민혁명으로 확장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에서 재기포하여 26일 백산 대회를 기점으로 혁명을 본격화하였다.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획득한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 호남의 수부인 전주성을 무혈입성해 동학농민혁명의 1차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쫓아온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연패하면서 위기감에 빠지게 되었다. 또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동학농민군은 농번기의 도래와 오랜 타향생활에 따른 피로감도 쌓여갔다. 반면에 조정에서도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청국군의 차입을 요청하였고 이는 일본군의 출병으로 이어졌다. 양국 군대의 차입으로 정치불안이 고조되자 조정에서는 양국의 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동학농민군의 해산이 필요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고 관군의 오랜 숙영으로 인해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
전주화약은 이러한 양측의 필요에 의해 맺어졌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 개혁의 실시를 요구했고, 조정에서는 무기의 회수와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양측은 이에 합의하여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를 빠져나왔다. 조정에서도 중앙군의 일부만 전주에 남기고 철수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군현에 집강소 설치를 수용하여 표면적으로는 화약의 내용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모두에게 만족할 수 없는 불완전한 합의에 불과했다.
전주화약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관민상화의 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어 민의가 국정에 반영되는 첫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는 왕조국가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이후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전투를 통해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전주화약을 통해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동학농민군의 고부 기포에서 전주 화약까지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관군의 기록과 동학농민군의 기록, 그리고 제3자의 기록을 상호 비교해서 서술해야 한다. 동학농민군의 기록은 기포에서부터 전주 입성까지의 기록을 상세하지만, 완산 전투와 전주 화약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반면에 관군의 기록은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그리고 전주 입성 전투에 관해서는 자신들의 과오는 기술하지 않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승전을 한 완산 전투에 관해서는 전과를 십여 배를 부풀리는 과장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3자의 기록은 초기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초기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면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군과 동학농민군, 제3자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여야 한다.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became the beginning of the Kobu Rebellion which rebelled against the tyranny of Cho Bok-Kap. And Yi Tae 's atrocity became the driving force to develop the Kobu revolt into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Donghak Peasant Army, such as Jeon Bongjun, was sewn on March 20, 1894 in the Armed Forces.
The Donghak peasant army, which acquired confidence with the victory of the battle of Hwangtohyeon and the battle of Hwangryongchon, achieved the first goal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by entering the center of Honam, Jeonju Province, on April 27th. However, after the successor Hong, Gye-hoon led a losing streak to the government and fell into a sense of crisis. In addition, Donghak peasant army, which is mainly engaged in farming, has accumulated fatigue due to the arrival of the farming season and the long-time living. On the other hand, the court also asked the King Dynasty army to take down the Donghak peasant army, which led to the dispatch of the Japanese army. As the influx of the two countries led to political instability, the Donghak peasant troops needed to be dissolved in order to return the armies of the two countries. In addition, lack of troops to suppress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long-term residents of the municipal government, the morale was lowered, and necessary reconciliation.
The Jeonju Agreement was concluded by the needs of both sides. The Donghak peasant forces demanded the installation of the docking stations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demolition reforms, and demanded the return of weapons and dissolution of Donghak peasant army. The two sides concluded an agreement in the prefecture, and Donghak peasant troops exited Jeonju province. In the mediation, too, only a part of the Central Army left the poles and withdrew. The Donghak peasant army accepted the installation of the docking station in Cholla province and performed the contents of the agreement on the surface. However, it was merely an incomplete agreement that could not be satisfied for the Donghak peasant and government forces.
The Jeonju Agreement is meaningful in that it is the first case in which the establishment of an institute which is the institution that harmonizes the people and the people is established for the first time in Korea. This is an uncommon example in the dynasty country, and it has created an opportunity to reflect the people in the aftermath. Therefore, although the Donghak peasant troops gave many casualties through the Jeonju battle, there is a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at it opened the way to reflect the people to the national affairs through the Jeonju treaty.
In order to reveal the facts from the Kobu to the Jeonju Agreement of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records of the Tribunal, the record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records of third parties should be described in comparison with each other. The record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detail the record from the uprising to the entrance to Jeonju, but briefly describe the Battle of the Wansan Mountain and the Jeonju Treaty. On the other hand, the records of the Tribunal refer to the Hwangtohyeon battle, the battle of Hwangryongchon and the arrival of Jeonju without simply describing their mistakes. On the other hand, he did not hesitate to exaggerate the fact that he was a victorious battle. Therefore, in the situation that Donghak peasant 's records are lacking, the record of the third person is an important data that can reveal the reality of the early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conclusion, in order to grasp the reality of the early Donghak peasant revolutions, the records of the military units, Donghak peasant army, and third parties should be comprehensively compared and describ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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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학농민혁명과 전쟁 사이, 집강소(執綱所)의 관민(官民) 협치(協治)

저자 : 안외순 ( Woesoon Ahn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1-20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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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동학농민혁명군의 관민상화기 집강소 체제의 성격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기존의 경우 이는 주민자치 혹은 통치기구로 이해되거나, 정반대로, 관변보조기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 모두 관민상화(官民相和) '라는 당시의 핵심원칙과 다소 어긋난 정의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개념적으로나 실질 기능적으로나 말그대로 관민/민관 협치(協治)였다. 첫째, 이 시기 집강소는 관민/민관 협치, 곧 오늘날 열린 행정을 의미하는 거버넌스의 성격을 지녔다. 둘째, 당시 집강소가 지니는 전통적인 요소는 '근대적이지 못하다'든지 '여전히 봉건적' 요소를 탈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전통의 진보화 혹은 근대화' 성격을 지닌다. 나아가 이것은 서학에 맞서 '자생적 근대'를 추구했던 동학 창도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셋째, '관민상화기 집강소'의 국소적이고 짧았던 생명력은 한계이기 보다는 그것이 '혁명'과 '전쟁'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론적 구조, 곧 혁명의 결실로 탄생하여 전쟁이라는 외적 변수가 등장함으로써 전국적 확산이나 제도화하지 못하고 해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는 관점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evaluate the characteristics of the Jipgangso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utual cooperation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ary Army. For this purpose, the contents of the study cover the nature, the implementation period and the process of Jipgangso.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during this period, Jipgangso had the characteristics of governance, which means today's open administration, that is, an association between the government and civilians. Second, in the process of materializing this, I particularly criticized the perspective that says the traditional elements of Jipgangso were not "modern" or had not yet broken away from "feudal" elements, and on the contrary I interpreted it from the viewpoint of 'advance or modernization from tradition'. Furthermore, I recognized this in the context of the traditional spirit when preaching Donghak, which pursued the indigenous modernity against Western learning (Seohak). Third, in looking at the "Jipgangso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utual cooperation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I refuted the unfair underestimation by recognizing that it was an existential structure located between the "revolution" and the "war", that is, recognizing that it was a structure that was created as a result of the revolution and was essentially a structure affected by the emergence of the external variable that is war and, therefore, forced to disperse without national proliferation or institution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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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동학의 무위이화(無爲而化) 비교 연구

저자 : 김용휘 ( Yonghwi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7-2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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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동학의 '무위이화' 개념이 가진 실천적 의미를 이와 유사한 개념인 도가의 '무위자연'과 비교를 통해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도가의 도와 동학의 천도를 비교를 하고, 이를 통해 도가의 '도'는 동학의 '천도'보다는 '천'의 개념과 상응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도가와 동학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자율적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로 이해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삶을 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만 동학은 우주 자체를 영과 기로 가득 찬 영적 실재, 즉 하늘님으로 보고 있다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 차이로 인해 동학의 무위이화는 하늘의 조화의 덕에 마음을 합치시키는 어떤 실천, 즉 수심정기로 표현되는 수양을 강조하며, 마음이 운용의 주체가 되어 하늘의 기운과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이런 무위이화의 삶은 동학의 2세 최시형에 와서는 삼경(三敬), 특히 물건까지도 공경하는 경물(敬物)의 생태적 삶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동학의 무위적 삶은 하늘의 기운과 연결하여 그 힘과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기 삶을 잘 운용하고 창조해나가는, 창조적 주체로서의 삶, 그리고 무기물과 주변의 사소한 물건까지도 공경하는 삶을 강조한다. 이런 생태학적 명령, 책임 있는 창조적 주체로서의 역할, 이것이 도가의 무위와는 조금 다른 결로써 오늘날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practical meaning of the concept of 'muwi-ihwa' in Donghak by comparing it with that of 'muwi-jayeon' which is a similar concept in Daoism. In order to do this, we first show that the 'Dao' of Daoism corresponds to the concept of 'Chun, Tien' rather than 'Chundo, Tiendao' of Donghak.
Taoism and 'Donghak' are basically common in that they understand the universe as a world operated by autonomous principles and seek a life that follows them. However,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ce in the view that Donghak regards the universe itself as spiritual reality filled with spirit and energy(Ki).
Because of such difference, Donghak's 'muwi-ihwa' emphasizes the cultivation expressed as a kind of practice that reconciles the mind by virtue of 'Chun, 天', 'susimjeongki'. In addition, the mind becomes the subject of the operation and pursues a way of life that actively utilizes the energy and wisdom of 'Chun' The life of this 'muwi-ihwa' comes to the second generation of Donghak, Choi Si-hyeong, and leads to the ecological life of 'Three reverence(三敬)', which especially respects even things(敬物).
Therefore, the life of 'muwi-ihwa' in Donghak emphasizes the subjective life that connects with the energy of 'Chun' and actively utilizes it, and emphasizes especially the life that respects things around. These ecological commands, their role as responsible creative agents, are a way of life that can be an alternative in today's ecological crisis, which is somewhat different from Tao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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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동학의 인간정신론 - 동학의 지기와 정기신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전광수 ( Kwangsoo Jeon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9-27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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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동학 주문수행의 요체인 지기와 동의보감의 정기신의 변화작용을 중심으로 인간의 존재성과, 동학사상에 내재된 인간정신론의 근거를 밝히고자 한 연구이다.
이 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론에 관해 유불도사상의 통합적 체계를 시도한 서우 전병훈의『정신철학통편』과 김성환의『우주의 정오』, 한동석의『우주변화의 원리』를 통해 우주론과 정신론은 무엇인지 개념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둘째, 한의학의 기본서라 할 수 있는『황제내경』, 『동의보감』,『동의수세보원』과『주역』의 관계성을 통해 우주와 인간의 변화관계를 오행론 및 오운의 생극과 육기의 자화(自化)라는 변화원리 속에서 정과 신의 생성과정 및 우주정신과 인간정신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을 통해 동학 주문수행에 있어서의 지기와 정기신과의 관계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심성론과 수양론을 제시한 동무 이제마의 사상론과 동학의 인간정신론을 통해 심성론의 방향을 소론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정신의 생성원리와 생명의 근본원리는 정기신의 작용과 관계를 가진다. 즉, '정기신'은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이며, 정기신이 엉기고 모여 정신의 근간이 되는 참나(眞)를 이루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정의 기화(氣化)작용을 통해 신을 이루게 된다. 둘째, 동의보감에서는 사람의 몸은 천지의 수기(秀氣)를 품부 받아 생겨나고 음양에 의탁하여 형성되기 때문에 일신 가운데서 정기신(精氣神)이 중심이 되며, 신은 기에서 나고 기는 정에서 난다고 보았다. 인간이 늙어 간다는 것은 신체의 수기(水氣)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정신을 통일하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화해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의 기화와 명화라는 수행의 목적이 제기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과정이란 유아기, 청·장년기, 노년기를 거치면서 죽음을 맞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본래 생명의 근원인 수기를 저장시켜 생명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는 것이 된다. 셋째, 동학의 시천주, 해월이 강조한 사인여천, 의암의 인내천사상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몸속에 들어있는 천지의 광명인 한(韓)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하늘과 땅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즉, 하늘의 청정과 참됨, 땅의 덕성과 선함을 본질로 하여 인간은 '미능대지체(美能大之體)'의 존재로 거듭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human nature and reveal the theory of human spirit inherent in the theory of Donghak, focusing on the change in the Jeongkisin and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which are the factors of Donghak's the Spiritual Practices.
The following are the contents of this study. First, try a conceptual approach to cosmology and psychology through Jeon Byeong-hoon's Mental Philosophy Translation, Kim Sung-hwan's midday of the Universe and Han Dong-seok's Principles of Space Change, which attempted to integrate Confucian, Buddhist, Taoist ideas on psychiatry. Seco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universe and human beings, and the spirit of God and the spirit of the universe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Yellow Emperor's Classic of Medicine,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Longevity & life preservation in oriental medicine, and I Ching, which are the basic books of oriental medicine. Through this relationship, we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Giki and Jeongkisin of the Donghak's the Spiritual Practices. Third, in order to preserve and restore human purity, I would like to refer to the direction of the theory of psychology through the ideas of Izema, which refers to psychological Theory and human psycheology of Donghak.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principle of the creation of the human mind and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life are related to the action of Jeongkisin. In other words, Jeongkisin is a component of a person's body, and the Jeongkisin goes through the process of forming a tangled and congregated and pure self. Second, in Principle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Jeongkisin is central in the midst of the monotheistic body because it is created by the grace of heaven and earth and formed by the influence of yin and yang, and God is born from the flag and comes from the spirit of the spirit. The fact that humans are getting old is that the Suki of the body goes deep inside, unifies the mind, and prepares to die by becoming a new life. Here the purpose of the performance of Kihwa and Myeonwha of the mind can be raised. Second, the process of human life is to die through infancy, youth, adulthood, and old age, but paradoxically, humans also have to recreate life by storing Suki, the source of their original. Third, through the spirit of the Donghak's Sicheonju, Haewol's Saincheon, and Uiam's patience, human beings must realize and fulfill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Korean people and the ideals of heaven and earth in real life through Han, the heavenly light in their bodies. In other words, it means that man will be reborn as an The Great Body of Beauty based on the cleanliness and sincerity of the heaven and the virtue and goodness of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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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아동 대상 위인전에 나타난 영웅 스토리텔링의 특성과 의미 - 『WHO? 한국사 조선시대 전봉준』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채영 ( Chaeyoung Lee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3-30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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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아동 대상 위인전의 서사 구조를 분석하고 서사 구조에서 드러난 특성을 파악하여 위인전에 나타난 스토리텔링 전략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에 있다. 이에 대한 연구 방법으로 다수의 영웅 이야기를 분석하여 구조화한 선행 연구의 이론들을 정리하였고, 이러한 이론들이 실제 위인전인 『WHO? 한국사 조선시대 전봉준』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비교, 분석하였다.
이 연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영웅의 여행' 이론과 조동일의 '영웅의 일생' 이론의 도식을 비교, 검토하였다. 둘째, 『WHO? 한국사 조선시대 전봉준』의 서사 구조를 체계화하였다. 셋째, 『WHO? 한국사 조선시대 전봉준』이 보글러의 이론과 조동일의 이론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결과로 『WHO? 한국사 조선시대 전봉준』에서 보글러의 이론과 조동일의 이론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다수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활용되지 않은 영웅의 여행/일생 구조의 요소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반영하고 있다는 특성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며, 이러한 일부 요소는 전설 요소의 계승으로 서사에서 변용되었다.


This study aims to make an analysis of the strategy and significance of storytelling observed in biographies of great people by analyzing narrative structure and figuring out characteristics of narrative structure of biographies of great people oriented to children. As for the research methods, this study arranged theories of previous studies structured based on the analysis of a number of stories of heroes, and made a comparative analysis of how such theories are applied in the real biography of "WHO? Jeon Bongjun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in the Korean History."
The research content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ly, this study made a comparative review of diagrams between the theory of "Hero's journey" of Christopher Vogler and theory of "Hero's life" of Cho Tong-il. Secondly, this study analyzed how "WHO? Jeon Bongjun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in the Korean History" applies theories of Vogler and Cho Tong-il and inquired into the relevant meaning.
Based on the research results, it was possible to understand that "WHO? Jeon Bongjun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in the Korean History" is considerably applying theories of Vogler and Cho Tong-il as a storytelling technique.
It is estimated that the elements of structure of hero's adventure and life, which are not applied, are observed due to the features reflecting life of a real person, and some elements transformed in the narrative as succession of a legendary e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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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청일전쟁기 조(朝)-청(淸) 항일 연합전선의 구축과 동학농민군

저자 : 유바다 ( Bada Yoo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5-3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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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1894년 6월 일본군은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동학농민군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淸軍과의 제휴를 전략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청군의 조선 진주는 그 목적은 서로 달랐지만 일본군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이들 사이에 일종의 연합전선이 구축되고 있었다.
먼저 조선 내부에서부터 국왕 고종은 淸에 밀사를 파견하는가 하면 대원군 또한 밀서를 淸軍에 보내기도 하였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도 이에 호응하여 9월 초 대원군의 효유문을 받고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대원군을 매개로 항일 봉기에 돌입하여 청군과 보조를 맞추게 된 것이다. 이때 평양에 있었던 민병석도 밀서를 전봉준에게 전달하여 동학농민군과 청군 사이에 항일 연합전선을 구축할 것을 타진하였다.
물론 각 주체마다 그 동기나 목적은 달랐기 때문에 이 연합전선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강력한 적 앞에서 미약하나마 연합전선을 구축했었던 경험은 이후 한국과 중국 양국 인민이 줄기차게 전개해나갈 항일투쟁의 시초가 되었다.


In 1894, Donghak Peasants War and Sino-Japanese War took place simultaneously in Joseon. In June 1894, Japanese army attempted to capture Joseon's Gyeongbok Palace to take control of the Joseon government and overthrow the Donghak Peasants Army. Therefore, the Donghak Peasants Army had to strategically consider its alliance with Qing's army, which was in conflict with Japanese army. The uprising of Donghak Peasants Army and the Joseon entry of Qing's army differed in purpose, but there was a kind of united front against the communal enemy of Japanese army.
King Gojong first would dispatch a secret envoy to Qing from within Joseon, and Daewongun also would send a secret letter to Qing's army. Jeon Bongjun, leader of Donghak Peasants Army, responded accordingly, and was ready for second uprising in early September with Daewongun's letter. Donghak Peasants Army entered anti-Japan uprising through a medium of Daewongun to keep up with Qing's army. At that time, Min Byeong-seok at Pyeongyang also sent a secret letter to Jeon Bong-jun to engage in building an anti-Japan coalition between Donghak Peasants Army and Qing's army.
Of course, the motive and purpose of each subject was different, so the united front was not very successful. Nevertheless, the slight experience of building a united front with a strong enemy of Japan became the beginning of the struggle of the two people of Korea and China deemed to spread it out since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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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군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특징

저자 : 김중규 ( Joongkyoo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41-37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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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군산지역(임피, 옥구, 군산진)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 확인과 함께 이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특징을 알아보는 데 있다 연구의 내용은 군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첫째 1차 봉기와 군산지역 동학농민군 활동, 둘째 초토사 홍계훈의 군산상륙, 셋째 집강소 시기 군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넷째 2차 봉기 이후 군산지역 동학농민군 활동과 진압을 주제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군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본 바,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군산지역의 기능과 역할을 주제로 하여 군산지역이 지닌 포구시설, 육상 교통의 원점, 군산진성의 군사적 기능, 금강의 물류 통제 기능 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를 볼 때 군산지역이 동학농민군과 진압군 양측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특히 군사전략적 기능과 식량 병참기지로서의 역할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둘째, 갑오년 군산지역 중에서 군산진을 특정하여 동학농민군과 군산진 수성군의 상호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전라도의 53개 군현에서 지방 관청과 집강소가 병존했던 것처럼 군산진에서도 동학군과 수성군 양측이 상호 공존했음을 확인하였다. 공간적으로는 군산진 27개리(里) 중에서 수성군은 군산진성이 있는 현 장미동 지역을 거점으로 주둔하였고, 동학농민군은 그 외 군산진의 나머지 지역에 주둔하며 서로 견제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셋째, 군산지역의 동학참여자 신분과 관련해서는 군산진의 포구문화와 상업적 성격으로 양반(좌수), 중인(아전), 백성(상인) 등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고 특히 아전들은 처벌이 두려워 절반 이상이 도망치는 상황이 전개된 것으로 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기간 군산지역은 임피현, 옥구현 그리고 군산진에 집강소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1차 봉기와 2차 봉기에 많은 군산지역 동학농민군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군산지역 중에서 군산진의 경우에는 포구라는 상업문화의 특징 때문에 양반, 중인, 일반백성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수천 년 내려온 계급사회 제도를 근대 시민사회로 변화시키는 백성들의 저력을 보여준 동학농민혁명의 자랑스러운 노력을 군산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구였으나 집강소의 위치 확인과 운영관련자료 그리고 군산지역 동학세력의 재기 노력과 3.1만세운동 참여 등은 차후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hich occurred in Gunsan area(inc. Impi, Okgu, Gunsanjin), along with identify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volution. On the basis of this, this study investigat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hich was taken place in Gunsan with four stages; First, the activities of Donghak peasant army in Gunsan area during 1st upspring. Second, the landing in Gunsan area of Chotosa, GyeHoon Hong[홍계훈], and the activities of Donghak peasant army in Gunsan area during Jipgangso was installed and operated. Last, the activities and suppressions of Donghak peasant army in Gunsan after 2st upspring. Based on the the characteristics of Donghak in Gunsan area, the result is as below. First, I identified the characteristics of Gunsan area with the theme of functions and roles such as the port facilities, the origin of land transportation, the military functions of Gusanjin-castle and the logistics control function of Geum-river. In this regard, the Gunsan region was found to be strategically important to both Donghak peasant army and provincial suppression forces. In particular, I examined the possibilities of military strategic functions and the role of food logistics bases.
Secondly, I investigated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Donghak peasant army and the suppression force(the army of Susung)especially in Gunsanjin in Gunsan area in the year of horse and identified the coexistence of Donghak army and provincial armyas the other local authorities and Jipgangso coexisted in 53 towns in Jeolla province. Of the 27 villages(리 里; village) in Gunsanjin, the suppression force(the army of Susung) was based in Jangmi-dong where Gusanjin-castle was used to be located and the Donghak army was stationed in the rest of villages in Gunsanjin area, presuming that they held each other in check.
Third, regarding the social status of participants in Donghak in Gunsan area, government official of a provincial town, so called Yangban, and the ordinary people, such as Jungin, Sangmin participated in Donghak, presuming that this situation is related Gunsanjin's commercial characteristics and port culture and especially more than half of Ajeon were seen to have been afraid of punishment and fled in a hurry. Through the above, in Gunsan area during the Donghak revolutionary period, I presume that Impi, Okgu and Gunsanjin are where Jipgangso was installed. The participation of Donghak Army in many villages in Gunsan area in the first and second uprisings are identified. In the Gunsan area especially in the case of Gunsanjin, participation of Yangban, Jungin, and Sangmin were distinctive feature because of Gunsan's commercial characteristics as port.
This study is meaningful especially to verify the proud power of the Donghak Revolution in Gunsan area which showed the courage of the people who changed the hierarchical[class] society system from the thousands of years to the modern civil society. However, the location of Jipgangso, the management materials related to the place, and the effort of recovery of Donghak in Gunsan area and the participation of 3.1 independence movement be left as a future research project.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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