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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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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64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678
한국사상사학
64권0호(2020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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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말 사대부 개념의 역사성과 정치적 분화에 대한 논의

저자 : 김인호 ( Kim In 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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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는 조선후기 한문 자료에서 지배계층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우성은 사회계층성과 연결하여 역사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이기백은 『한국사신론』 등에서 이를 본격화하였고, 권문세족과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제시하였다.
이 개념은 1950년대 한국사회의 변화로 등장한 지식인 계층과 사회이동, 4·19를 통한 시민의 등장 등의 역사상황에서 영향을 받았다. '양반'이란 개념과 달리, '사대부'는 독서층이면서 관료가 될 수 있는 사회계층을 보여준다. 이후 사대부개념은 학계에서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비판은 고려시대 '사대부'의 용례 검토로 이루어지면서, 사회계층성과의 연결이 어려워졌다. 또한 '신흥유신', '신진유자' 등과 같은 여러 용어가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아울러 1980년대 이후 사회개혁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사대부' 개념에 대한 인식적 비판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사대부' 개념을 둘러싼 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필자는 사회계층적 성격과 정치세력을 분리하였을 때, 후자를 어떻게 집단화할 것인지의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해 보았다.
21세기 새로운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정치세력을 보는 시각은 인간과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결합해 볼 것인지에 대한 인식적 비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사대부'든 새로운 용어이든, 고려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정치세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Sadebu is a term that emerges from the data after the Joseon Dynasty. This term means the ruling class. Lee Woo-sung first used this term as a concept of history. He noted that it was a social class. Since then, Lee Ki-baek saw Sadebu as a new class in the late Goryeo Dynasty. He understood it as a political conflict with the power. He developed Korean history through this term.
They were influenced by changes in Korean society since the 1950s. What was noted was the rise of intellectuals, social movements, and citizens. Sadebu is almost the same concept as a 'Yangban(兩班)'. Nevertheless, Sadebu is a reader and a social class who can become a bureaucrat.
Academia later criticized the concept of Sadebu. In particular, after reviewing the historical case for this term, it was considered a wrong concept.
And the new concept was understood by the Neo-Confucianist group. However, the separation between political forces and social classes was not done properly. Therefore, further discussion of the historical concept is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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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전기 사림(士林)ㆍ사림정치(士林政治) 연구의 쟁점과 전망

저자 : 김정신 ( Kim Jeong Shi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7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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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핵심 정치세력이라 논해지는 '사림'에 대해서는 방대한 연구가 집적되었으며, 많은 핵심적 논제들이 이미 해명되었거나 논쟁이 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사림'·'사림세력' 연구는 그 대응 세력으로서 훈구세력을 설정하고, 조선전기 지배세력을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으로 이분화하는 가운데, 16세기 말 사림세력의 정권 장악을 훈구세력으로부터 사림세력으로의 '지배세력 교체'로 간주하고 이를 '성리학'과 '중소지주의 승리'라고 규정하였다.
이와 같이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대립이라는 조선전기 정치사의 통설적 이해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사림'의 개념이 부정확하게 사용되고 있고, 사림에 대한 설명에 실증적 근거가 부족한 측면을 지적함과 동시에 지배층으로서 훈구·사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조선전기, 나아가 한국 지배세력의 장기적 지속성·연속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15·16세기의 조선사회 및 정치세력을 너무 정태적으로만 파악하거나 시대의 역사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을 도덕적으로 준별하는 이분법적인 인식을 지양하면서도 동시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조선전기 지배층 내부의 정치적 대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문제의식이 모아지고 있다. 사실로서 '사화'가 보여주듯이, 지배층 내부에서 현실 지배질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고, 정치운영의 지향을 달리하여 갈등하고 대립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동안 15·16세기 조선전기는 고려적 유제를 청산하고 중세사회를 새롭게 재편하였던 시대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조명되어 왔다. 조선전기 지배층이 이른바 '경국대전체제'의 동요에 맞서, 서로 다른 집권화 방안으로 문제를 수습하고 집권질서를 재정립하려 하였던 것도 큰 틀에서는 중세사회를 재편하고자 하였던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조선전기 지배층의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항하기 위한 권력 다툼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히 자신들 내부의 정치질서, 정치운영에 근거를 둔 '국가상(國家像)'의 수립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조선전기 지배층이 구상하였던 국가상의 다양한 내용과 면모를 시대적 좌표로서 복원해낸다면, 한국 중세 정치세력·정치사상이 조선전기 사회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변화에 조응하여 발전하고 있었음을 동태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Much research has been conducted on the Sarim (士林), the main political force in the early years of the Joseon dynasty, and many of the core issues surrounding this force have been studied in detail or are currently being debated. Research on the Sarim and the Sarim faction that began to take off in the 1970s situated the Hungu faction as the counterforce to the Sarim. This vein of research established the Hungu and Sarim factions as the ruling power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Accordingly, the Sarim faction's seizure of power at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has been considered the turning point at which the ruling power passed from the Hungu faction to the Sarim faction. This shift has been described as the victory of neo-Confucianism and small and medium-sized landowners.
The conventional understanding of early Joseon political history holds up the conflict between the Hungu and Sarim factions as a manifestation of the confrontational landscape of the political forces at the time. However, this understanding has been criticized for being innately and excessively formulaic and for involving an ethical value judgment. Other perspectives have emphasized the homogeneity of the Hungu and Sarim factions as both made up of members of the ruling class. These perspectives treat the differences and directions in political thought that arose during this period as arising from differences in the duties of court officials and the Three Offices. These perspectives are significant in that they arise from strictly impartial empirical research techniques. However, they are also problematic in that they understand Joseon society and political powers only from a static perspective by overly emphasizing the long-term persistence and continuity of the ruling power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by extension, Korea. These perspectives carry the risk of concluding that these ruling groups fully represent the identity of the Joseon dynasty.
As such, the focus of the current study on the Sarim faction rejects the dichotomous perception base on moral standard of the Hungu and Sarim factions examines the political confrontation between the two factions. As literati purges shows, the two factions had different understandings of the ruling order and for this reason came into conflict. This conflict is thus a clearly a historical fact. Thus, the task of research is to provide a dynamic and systematic understanding of how political power and thought in medieval Korea were developing in correspondence with the various and dynamic changes taking place in early Joseo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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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ㆍ현대 지성사의 전개와 조선후기 '북학'

저자 : 허태용 ( Huh Tae Yo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3-10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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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이라는 이해틀은 한국 근·현대의 시대적 목적의식에 부응하기 위해서 학술적으로 고안되고 활용되었다. 자강론이 시대적 목적의식이었을 때는 서구문명의 가치에 유비될 수 있는 지적 유산으로 그려졌으며, 근대화론이 시대적 목적의식이었을 때는 근대를 앞서서 지향하였던 지적 유산으로 규정되었고, 민족주의가 시대적 목적의식이었을 때는 민족주의를 앞서서 전망하였던 지적 유산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의 '북학' 연구를 통해서 18세기의 조선보다는 20세기 한국의 지성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8세기의 조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북학'이라는 이해틀의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작업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북학파, 연암일파 등으로 불리는 일련의 구성원들이 단순한 교유망을 넘어서는 공통의 경세론적 지향을 모두 함께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지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Bukhak was academically designed and utilized to serve purpose required by each times of modern Korean history. When the discourse of self-strengthening was purpose of times, Bukhak was described as intellectual heritage that compared to value of western civilization. When the discourse of modernization was purpose of times, Bukhak was described as prototype of modern society. When nationalism was purpose of times, Bukhak was described as prototype of modern nationalism. Therefore, the studies of “Bukhak” in the 20th century will allow us to understand Korean intellectual history in the 20th century more accurately than Joseon intellectual history in the 18th century. If we want to understand Joseon in the 18th century, we need to start by reviewing the usefulness of the paradigm of Bukhak. More than anything it is necessary to carefully examine whether the members called Yeonam faction or Bukhak faction, all had common discourse of governance that beyond simple social network, and whether that discourse of governance was convin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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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 『효경』의 수용과 활용

저자 : 이현주 ( Lee Hyun J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1-14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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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라에서 효경을 수용하고 활용한 정황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진흥왕대에 '포폄(褒貶)'을 기준으로 국사를 편찬하였고, 이는 왕과 신 사이에 '충'을 효과적으로 각인시켰다. 진흥왕 이후, 유학은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다. 왕은 '덕치(德治)'를 하고, 신은 '충효(忠孝)'를 해야 하는데, 그 매개는 '천(天)'이었다. 이처럼 중고기에 유학사상을 전제로 한 새로운 군신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충의 대상은 왕이 아닌 국가이고, 신하 일방이 아닌 쌍방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중대에는 당의 '효치천하(孝治天下)'의 이념이 『효경』을 통해 수용되었고, 정치사상으로 활용되었다. 관리선발의 필수과목인 『효경』을 통해 관인층은 유학의 충효관, 즉 필연적으로 충으로 귀결되는 효를 학습하였다. 경덕왕이『어주효경(御註孝經)』을 수입하면서, 효의 포상을 일반 민에게 확대하였다. 이는 '충효일본'의 유교적 정치사상이 사회윤리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학사상의 '효'는 '충효일본'의 정치사상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대상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이다. '충효일본론'의 대상은 진흥왕대에 '국(國)-신(臣)'으로 전환되었고, 신문왕대에 '국(國)-관(官)'으로, 경덕왕대에 '국(國)-민(民)'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왕의 통치가 제도화되고, 통치력의 범주가 확대된 결과이다.
'효녀 지은' 일화는 효가 충으로 연결되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다. 진성왕은 여성이지만, 효를 행함에 있어서 효자와 다를 바 없는 '효녀'의 일화를 통해 왕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진성왕대의 '효녀 지은' 일화는 '효'의 표창이라는 통치행위의 일환이었고, 아울러 '빈녀(貧女)'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빈민구휼의 대책이었다.


The Hyogyeong(孝經) is the story about the filial piety of Confucianism. It was a test subject when electing an official. The study revealed the context and meaning of the acceptance and utilization of the Hyogyeong in Shilla.
The full-fledged acceptance of studying abroad in Shilla was made through Goguryeo during the Maripgan period(麻立干期). The compilation of the history of the King Jinheung(眞興王) was proposed by Yisabu(異斯夫) and compiled by Geochilbu(居柒夫). National history was compiled based on the "praise and censure(褒貶)," which effectively imprinted the "loyalty(忠)" between the king and vassal. After King Jinheung's reign, studying abroad was used as a governing ideology. After King Jinheung, the king had to do "deokchi(德治)" and vassal had to do "chunghyo(忠孝)," which was a medium of "cheon(天)." Since then, the idea of studying abroad has been used as a governing ideology. As such, a new relationship of the king and vassal was formed based on the confucianism.
In shilla around the 7th century, the confucianism was understood as a knowledge related to the principles of control and operation. Therefore, the confucianism became more important after the middle period of shilla dynasty, along with the readjustment of the government system and the expansion of government officials. As the Royal Family in the middle period of shilla dynasty, which began with King Taejong Muyeol(太宗武烈王)'s ascension to the throne, aimed at centralizing the country through internal system readjustment and the convenience of the people, the need for human resources with Confucian knowledge to take charge of it was expanded. In particular, the subject that government officials must learn after the Shilla Dynasty was "the Hyogyeong(孝經)," and the necessary qualities were "Filial duty(孝)." Filial duty was the premise of loyalty(忠), and the ideology of the Tang's "the Hyogyeong(孝經)" was accepted through "Hyo-kyeong" and used as a political ideology in Shilla.
From Shilla' middle period, the loyalty and filial piety of Confucianism served as the governing ideology of state management. However, the nobility of Shilla practiced filial piety and loyalty, focusing on the father's side, while the common people practiced filial piety and good deeds mainly on their mothers. But in an anecdote of "Jieun the Filial Daughter(孝女知恩)," private good deeds were called public rewards. In other words, the "Jieun(知恩)" anecdote is located at the interface leading to the filial piety. And the national reward for "filial piety" soon led to the creation of "filial duty" as ethical norms.
Although King Jinseong(眞聖王) was a woman, he wanted to secure the legitimacy of the throne through anecdotes of filial piety, which is no different from filial piety. This was part of the ruling act of the commendation of filial piety, and it was also a measure for the relief of the poor by awarding a filial daughter and her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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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학연의(大學衍義)』와 조선의 정치사상

저자 : 정재훈 ( Jung Jae Hho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5-18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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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송시대에 진덕수가 지은『대학연의』는 주희의 정치사상을 계승한 성리학적 이상이 담긴 제왕학의 교본이다. 원, 명, 청대를 거치면서 제왕의 정치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이 책은 고려 말 한국으로 전래된 이후 조선시대의 정치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전기에는 현실의 정치에서 중요하게 참고되는 기준이 되는 책으로서 인용이 많이 되었다. 특히 『대학연의』에서 주목된 것은 왕조운영에 적합한 제왕학의 모델이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신하들과의 관계, 궁중 내부의 비빈과의 관계, 환관 등에 대한 경계에 대한 풍부한 사례 등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가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 점은 원대나 명대에서 『대학연의』가 주목되었던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용의 결과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과 같이 『대학연의』의 사실과 고려사의 사실을 덧붙여서 만든 책이 출현하기도 했고, 『치평요람(治平要覽)』과 같이 치국, 평천하의 영역을 보완하려는 책도 등장하였다.
조선중기에는 조선전기 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 위에서 새로운 국가운영 원리를 모색하려는 사림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대학』에 대한 이론적 탐색을 심화하였고, 그 결과 이언적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에서 『대학연의』의 군주수양론을 보다 정밀하게 구체화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대학연의』의 내용을 완전하게 해체해서 치국, 평천하의 영역까지 포괄하여 조선에 맞는 제왕학으로 재구성 하였다. 이는 사림들의 붕당정치가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전제가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적 경세론이나 제왕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노력이 나타났다.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서경』을 통해 국왕의 왕권을 강조하는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출현하기도 하였고, 정조(正祖)는 『대학유의(大學類義)』를 통해 국왕이 직접 경세의 영역을 주도하는 질서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19세기의 세도정치시기에도 권상신이 지은 『국조대학연의(國朝大學衍義)』와 같이 중국의 제왕 사례가 아니라 조선의 국왕의 사례로써 완전히 내용을 바꾼 조선판 『대학연의』가 출현하였다.
이와같이 『대학연의』는 조선의 정치사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그 논리는 조선에서 완전하게 변용되거나 새롭게 이해됨으로써 조선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파악할 수 있다.


Daehak Yeoneui was written by Jin Deok-su(陳德秀)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and has been regarded for centuries as the ultimate guidebook to ideal monarchy, as it contains Neo-Confucian ideals first conceived by Ju Hi(朱熹). This book continued to inspire many rulers (and their political philosophies) during the Yuan, Ming and Qing periods, and it was also introduced to the Korean peninsula at the end of Goryeo period to have a huge impact on Choson's political philosophy as well.
In the early half of the Choson period, this book was often cited as an important standard to be cherished in real life politics. What Daehak Yeoneui essentially presented was an ideal model for the governance of the monarchs who had to rule entire countries. And the book contained numerous examples of past kings' relationships with his vassals, his queens and concubines, and eunuchs (which attracted Yuan and Ming monarchs' attention as well). The book's natural fame led to publications of similar materials such as Daehak Yeoneui Jib'ryak(大學衍義輯略), which added historical facts of the Goryeo period to the original Daehak Yeoneui, or Chipyeong Yoram(治平要覽), which was created to guide the Choson kings in their ruling of the country and pacifying bigger planes.
Then, in the middle period of Choson, the Sarim figures appeared and began searching for a new set of principles to run the Choson dynasty, based on a fairly critical take on how things went earlier in Choson. They studied Daehak much more profoundly and in a more academic fashion. As a result, for example, Yi Eon-jeok meticulously analyzed the argument of “Rulers should vigorously build their character” [featured in Daehak Yeoneui] in his Jung'yong Gu'gyeong Yeoneui(中庸九經衍義), and Yi Ih, in his Seonghak Jibyo(聖學輯要)' completely dismantled and then recomposed all the contents of Daehak Yeoneui and even add other issues such as “Chiguk(Rule the country)” and “Pyeongcheonha(Pacify the universe),” to compile yet another form of 'Principles for Monarchy(or Monarch studies)' which would fit the reality of Choson nicely. And most importantly, these efforts were what enabled the Bungdang Party politics to prevail and blossom in this period.
In later periods, emerged were some efforts that tried to break free from Neo-Confucian dynasty-governing theories or monarchy studies. With party collisions heating up, arguments in favor of the monarch's absolute authority (based on Seogyeong) were suggested through books such as Hongbeom Yeoneui(洪範衍義), and King Jeongjo(正祖) himself authored Daehak Yu'eui(大學類義) to emphasize his own role in leading the agenda of world governing. Even during the “Sedo politics” period (during which powerful houses controlled the Choson political arena) in the 19th century, published were books like Gwon Sang-shin's Gukjo Daehak Yeoneui, which was essentially a Choson version of Daehak Yeoneui, filled with not Chinese but Choson kings' examples.
As we can see, while Daehak Yeoneui heavily affected changes in the Choson politicians' political philosophy, the Choson people also managed to understand it from an entirely different angle. In other words, Choson's view on Daehak Yeoneui lets us understand the nature of Choson's political philosophy and its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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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숙종대 국왕 종묘 전알(展謁)의 정식화와 의미

저자 : 신진혜 ( Shin Jean Hae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5-21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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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종묘 전알(展謁)은 전란 이후 종묘에 대해 친향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시행되다가 숙종대에 이르러 매년 시행하는 정기적인 의식으로 정해졌다. 전알은 제향에 비하면 배례(拜禮)를 행하고 실내를 봉심(奉審)하는 무척 단순한 의식에 불과하지만 국왕이 직접 대신들과 함께 종묘와 영녕전으로 향한다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국조오례의』의 규정상 국왕이 영녕전의 제향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던 반면, 전알에 있어서는 종묘와 영녕전에 모두 국왕이 직접 배례를 행한다는 측면에서도 유의미했다. 재위 국왕은 별묘 영녕전까지 모두 접함으로써 조선왕조를 이어왔던 모든 선조를 뵈었던 것이다.
국왕은 춘 1월과 추 7월에 주기적으로 대신들을 이끌고 종묘에 들어가 배례를 행함으로써 계승의 정당성을 보이는 것은 물론, 조정 질서의 중심에 서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국왕의 조상들을 향해 국왕과 함께 배례를 하는 과정에서 대신들로 하여금 국왕이 어떤 존재인지, 왕실이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몸소 체험하는 효과가 있었다. 본래는 종묘 오향대제를 통해 이러한 형식을 구현했지만 이를 한결같이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연간 2회의 전알을 추가적으로 시행하여 정성을 더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 해에 국왕이 종묘 친향과 춘추 전알을 모두 행할 경우 국왕과 대신들은 연간 3회 종묘를 접하게 되었다.
종묘는 천명을 받아 건국했던 태조부터 조선 후기의 역대조가 모두 봉안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것은 조선 건국으로부터 숙종의 즉위까지 약 282년의 시간동안 천명을 보존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종묘에서 제향함으로써 조선을 건국하고 통치했던 역대조로부터 전해진 왕통이 인조로부터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 자신에게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국왕의 종묘친향 뿐만 아니라 연간 2회의 전알까지 추가적으로 수행하여 이러한 의미를 강조할 수 있었다. 숙종대에 성립된 이러한 종묘의례의 빈도와 강도는 삼종혈맥에 대해 강조되었던 영조대부터는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The Jeonal(展謁) ceremony of Jongmyo was usually performed when they unable to perform the sacrifice cause of the situations, battle or king's sickness. And during the reign of King Sookjong, it was formalized as a regular ceremony held every year. Compared with the sacrifice, the Jeonal is a very simple ceremony to perform. Jeonal ceremony was simply composed with a bowing(拜禮) and observing the interior(奉審) of Jongmyo. However, it is possible to confirm the importance because the king heading to Jongmyo and Yeongnyeongjeon with his ministers and government officers. In the regulation of Gukjooreui(國朝五禮儀), the king didn't perform any ceremonies or sacrifices to Yeongnyeongjeon. However, through the Jeonal ceremony, the king could contact both of Jongmyo and Yeongnyeongjeon. It means the king contacted all of ancestor's of Jongmyo and Yeongnyeongjeon.
After the King Sookjong 's reign, the king did the Jeonal ceremony every year of January and July, and the king was able to show the legitimacy o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by entering the Jongmyo and bowing down. It also meant that the king himself was at the center of political order.
Jongmyo was the place where all the ancestors' tablets were enshrined, from King Teajo(太祖), who founded Joseon with mandate of heaven(天命), to the kings of late Joseon Dynasty were established. This symbolizes the fact that, from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reign of King Sookjong, the 'mandate of heaven' was preserved for about 282 years. At the time of King Sookjong's reign, he was able to emphasize this meaning by performing not only the king's sacrifice but also two additional Jeonal ceremonies per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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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 후기 목민서의 제사(題辭) 비교와 수령정치 구상

저자 : 홍해뜸 ( Hong Hae Ddem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9-25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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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것이 결국 정치라는 점에서 청송은 수령 정치영역에서 중요 부분이었다. 수령은 백성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불만을 해소하면서 자신의 역량과 정치력을 발휘하고 이 과정에서 수령의 정치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수령의 역량과 정치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제사였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목민서가 제공하는 갈등 처리 원칙과 제사 내용을 분석하여 수령의 정치 구상을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 여러 갈등 중 수령의 정치적 업무 수행과 밀접한 관속-민 갈등과 양반-민 갈등분석을 시도하였다.
관속-민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은 『목민고』와 『선각』이 유사하였다. 관속은 수령의 행정실무자로서 대민접촉이 활발하였다. 목민서는 관속의 비리가 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고 수령 행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엄격하게 재판할 것을 권하였다. 이를 통해 수령은 관속을 통제하고 민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양반-민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은 두 서적이 상이하였다. 양반-민 갈등은 범분과 침학으로 나눌 수 있다. 『목민고』는 사건의 이면을 파악하여 신분의 고하로 먼저 결론을 단정하지 말고 누가 피해를 보는지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잔약한 양반과 소민이 피해 입지 않기를 기대하였다. 또한 『목민고』는 향전과 양반들의 등장을 처리하는 방식도 제시하여 호강한 자들을 저지하고 소민 보호를 표방하였다. 『목민고』는 향촌 사회 지역민의 동향과 입장을 고려하면서 국가의 억강부약 정책 실현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목민고』식 방안은 조선 후기 강화된 수령권을 토대로 억강부약을 실시하여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 질서 확립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 역시 양반-민 갈등을 다루었다. 범분이 발생하면 민을 엄중히 다스리라고 하였다. 『선각』에서는 범분 발생의 원인이 양반에게 있어도 민을 가볍게 태벌하라 하여 『목민고』식 방법과 차이가 났다. 『선각』은 민이 분수를 어기는 행위를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겼다. 양반의 산림천택 사점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도 경전을 인용하여 그들이 깨달아서 비리가 없기를 기대하였다. 『선각』은 기존에 형성되어 온 향촌 신분 질서가 유지되어 각자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목민고』와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선각』이 상대적으로 풍속·윤기 관련 갈등에 관심이 많고 통치 방법으로 교화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선각』은 『목민고』 방식에 비해 갈등 해결에 소극적일지라도 현실 질서 붕괴를 저지하는 점진적 방안이었다. 이와 같은 『선각』식 방안은 향촌사회 양반과의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여 지역 사회 협조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Cheongsong(聽訟) was an important part of the political domain of Suryong(守令) in the sense that resolving and mediating conflict is equivalent to politics. Suryong(守令) was able to establish political order by exerting his competence and political power in the process of moderating the conflict and resolving the dissatisfaction of the people. The source material that allows us to identify the competence and political power of Suryong(守令) is court sentencing records(題辭). In this article, I examine the political conceptions of Suryong which appear in Mongmin'go and Son'gak, among the Cheongsong principles and court sentencing records provided by Mongminso(牧民書)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the analysis of government-public conflict and the Yangban-public conflict,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performance of the political work of Suryong(守令).
These two books handled the government-people conflict in a similar way. Gwan-sok(the government workers of Hyangri and Gwan-a), as an executive of Suryong(守令), was in active contact with the public. It was advised that Gwan-sok's corruption be judged strictly, given that it directly influenced the people and negatively affected the Suryong administration. Through this, Suryong(守令) tried to control Gwan-sok and gain public support.
On the contrary, the two books differed in the way they handled the conflict between the Yangban and the public. The Yangban-public conflict can be divided into a challenge of the social order and tyranny. Mongmin'go grasped the other side of the case and noted who was harmed by the situation without predicting the conclusion with respect to rank. In addition, Mongmin'go also presented a way to deal with Hyangjeon and the appearance of the Yangban members, putting a restraint on the luxurious groups and claiming to protect the people. Through this, Mongmin'go pursued the policy of “suppressing the strong and assisting the weak(抑强副弱)”, which is the nation's public policy, considering the trends and positions of local residents in Hyangchon.
Amidst the conflict between the Yangban and the public, Son'gak focused on the public's disruption of the social order and punished the people's challenge of the social order, even if the reason for the conflict was the corruption of the Yangban. After that, Son'gak ordered the punishment of the Yangban according to the gravity of the offense. In particular, among the various conflicts in Hyangchon society, Son'gak paid attention to the incidents of edification. Son'gak sought to stabilize the Hyanchon order by acting in accordance with people's classes and positions. Son'gak sought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the Yangban society in order to build community cooperation.
The representative Mongminso(牧民書) of the late Joseon Dynasty, mongmin'go and son'gak contains the principle of the judgment and the contents of the court sentencing records(題辭) which were written in accordance with the perception of reality and the direction of governance. Through this we can identify the conception of Suryong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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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세기 시무개혁 세력의 성장과 개혁론의 성격-박규수와 어윤중의 계승 양상을 중심으로-

저자 : 한보람 ( Han Bo Ram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9-29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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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시무개혁 세력'은 정조대 북학의 맥을 잇는 개혁적 성향의 관료집단이다. 이들은 공공정치의 암흑기로 설명되는 세도정치기부터, 급변한 대내외적 환경이 밀어닥친 개항기까지, 세대를 넘어 시대적 현안 해결을 위한 보수적 개혁을 이끌었다.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선배 세대는 국가 제도와 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철종대 농민항쟁의 위기에 대처하였으며, 민본의식을 기반으로 한 민생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근대적 세계 체제로 나아가는 개항의 현장에서 서구식 개념과 다른 부국강병 개념을 설정하였고, 이 역시 민생 안정의 목표와 맞닿아 있었다. 또한 어윤중을 중심으로 한 후속 세대도 국가공동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기반으로 부국강병 개념을 설정하였는데, 팽창적 군사력을 배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세대를 관통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후속 세대는 농민에게 여전히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부담시키는 기존의 사회 구조와 세금 부과 방식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새로운 개혁론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부강을 위한 방법으로 농민에 대한 세금을 과감히 면제해주는 한편, 새로운 세원으로 제조업과 운송업을 육성하고 통상을 발달시켜 국가를 안정시키는 방안을 추구하였다. 민생 안정과 평화 유지라는 기본 가치는 선배 세대와 공유하고 있었지만 개혁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급변한 대내외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시무개혁 세력은 동일한 문화적 기반 위에 세대를 이어 전통적 가치를 계승하였으며,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주어진 현실 상황에 맞추어 단계별로 시무개혁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Shimugaehyeok Seryeok) in the 19thcentury was reform-minded bureaucracy which carried on the legacy of Northern Learning from Jeongjo's Reign. They led conservative reforms to solve periodic pending issues over many generations from the era of in-law government(sedo chŏngch'i), which is seen as the dark ages of public politics, to the open-port period which led to internally and externally rapid changes. The senior generation, where Park Gyu-su was at the center of power, coped with the crisis of a peasant resistance movement (nongmin hangjaeng) with trust in the government system and the people, and sought the stabilization of the people's livelihood based on a people-oriented consciousness. They set the new concept of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which is different from a western concept, in the historic scene of Joseon's moving forward to the modern frame of world in the open-port period. This, as well, was targeting the goal of the stabilization of the people's livelihood. The succeeding generation, where Eo Yun-joong was at the center of power, also set the concept of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based on strong trust in the state community. Both generations had consistency in transcending generations in that they excluded extensive military power. However, the succeeding generation sought new reforms while recognizing that the preexisting social structure and tax system, which laid most of the fiscal burden on farmers, could not be effective anymore in the changed situation. They pursued new stabilizing methods for the state's wealth and power that could foster manufacturing and transport industry and develop commerce with a new source of taxation, resolutely waiving farmers' tax. Even though they shared the basic values of the stabilization of the people's livelihood and peacekeeping with the senior generation, they tried to change there form methodology according to rapid domestic and foreign changes.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Shimugaehyeok Seryeok) carried on traditional values based on the same cultural footholds over generations, and at the same time inherited and developed reforms step by step according to new realistic situations after the change of the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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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제하 백남운의 부르주아 경제사학 비판과 맑스주의 역사인식의 형성과정

저자 : 이태훈 ( Lee Tae Ho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5-33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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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듯이 일제하 조선사회경제사연구를 개척한 백남운이 극복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조선사회정체성론'이었다. 그의 스승 후쿠다 도쿠죠가 주장한 '정체성론'은 조선역사의 발전과정과 조선민족의 현실극복가능성을 부정하는 논리였다. 식민지 민족해방을 목표로 조선역사를 연구했던 백남운이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백남운은 조선정체성론의 발상지인 도쿄상과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였고, 1920년대 후반까지도 자신의 배운 역사방법론을 극복할만한 방법론적 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조선사회정체성론은 조선역사에 대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경제발전법칙에 대한 주장이었다. 조선사회정체성론을 극복해야 했던 백남운으로서는 조선역사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역사연구방법론을 함께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불충분한 학문기반을 바탕으로 연구를 시작한 백남운은 초기에는 후쿠다 도쿠죠의 방법론 안에서 조선역사의 정상성을 확인하려 하였다. 조선의 시장과 사회조직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례연구를 통해 후쿠다의 논리로도 조선역사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례를 통한 연구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연구한 사례로는 토지소유권의 미발달 같은 정체성론의 핵심문제를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의 주장은 후쿠다의 연구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증거에 의해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는 것이었다. 후쿠다의 연구방법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런 한계를 알고 있던 백남운은 후쿠다의 방법론 저변에 존재하는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본질과 경제사연구방법론의 한계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가 도달한 결론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본질은 사회내부의 모순관계를 부정하거나 인식할 수없는 지배이데올로기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경제사연구방법론은 사회내부의 모순관계를 특수성과 형태중심논리로 은폐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극복해야 할 경제사연구방법론의 근본적 한계가 특수성과 형태중심 인식에 있다는 생각은 경제사회관계의 발전과정을 '잉여착취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잉여착취관계'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연구방법론으로 역사적유물론을 인식한 것이었다.
역사유물론의 핵심을 '잉여착취관계'의 발전과정으로 파악한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를 보편적 잉여착취관계의 발전사로 설정하였다. 즉 씨족공산제, 노예제, 아시아적 봉건제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로 발전해 가는 보편성의 역사였다. 물론 그의 이런 주장은 아시아사회의 정체적 성격에 주목한 사회주의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잉여착취관계 발전'의 보편성이야말로 지배계급의 역사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학문연구를 통해 맑스주의에 도달한 그와 운동을 통해 맑스주의에 도달한 다른 사회주의 지식인들과의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인식의 차이는 현실인식의 차이로 이어지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다른 국가건설론을 주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As is widely known, Paek Nam-un, who opened the research area on the socioeconomic history of Korea during the colonial rule, had to overcome the so-called “theory of the stagnation of Korean society.” Paradoxically, Fukuda Tokuzo, one of Paek's teachers was a pioneer of “stagnation theory” in which Fukuda denied the developmental process in the history of Korea and even the prospect for Korean people's future.
Paek Nam-un studied in the Tokyo Commercial College (the precursor of Hitotsubashi University) where the theory of the stagnation of Korean society was initiated, and until the late 1920s he did not have any methodological framework to refute the historiography he was learning in Tokyo. The theory of stagnation of Korean society was not only an explanation for Korean history but also an assertion about more universal principle of economic development. This means that Paek, who had to disprove the theory of stagnation of Korean society, had also assignment to go beyond the historiographical paradigm itself surrounding stagnation theory.
Conducting research with limited academic foundation, Paek Nam-un made effort to find out the 'normality' of Korean history within Fukuda Tokuzo's theoretical framework. Especially through his historical case studies on Korean markets and social organizations, Paek argued that the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could be found and proved even in the perspective of Fukuda's theory. However, Paek's case studies had clear limitations because they could not directly refute the core assertion of stagnation theory like the 'underdevelopment of landownership.' Furthermore, Paek's argument was still rooted in Fukuda's theoretical framework and thus could be overturned by another cases or examples at any time. Paek had to get over Fukuda's paradigm itself fundamentally.
Paek Nam-un began to examine the limitations of bourgeois social sciences and economic-historical studies on which Fukuda's theory was based. Paek contended that the essence of bourgeois social sciences was dominant ideology, which was unable to recognize or acknowledge contradictions inside the society. Paek also asserted that the research methodology of economic history as a part of the bourgeois social sciences had concealed the relationship of contradiction inside the society with the perspectives of uniqueness and formation. All his arguments led to a conclusion that the relationship of exploitation of surplus value should be central in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economic social relationships. He understood historical materialism as a framework for elucidating the universal developmental process of 'the exploitation relationship of surplus value.'
Paek Nam-un defined 'the socioeconomic history of Korea' as a development history of the universal exploitation relationship of surplus value, which followed the universal course of primitive communist society, slave society, Asian feudal society, and modern capitalist society. Of course, Paek's historiographical framework was criticized by socialist intellectuals who paid more attention to the characteristics of Asian stagnation. However, Paek firmly believed that the universal development of 'exploitation relationship of surplus value' was an essential scientific framework to overcome the historiographical ideology of the ruling class. Paek's scholarly approach to Marxism was different from socialist intellectuals' political Marxist movement. This divergence of historiographical understandings led to the distinction in recognizing the political situation, which resulted in Paek's differentiated advocacy for state-building from that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after the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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