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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

  • : 한국사상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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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6-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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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61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658
한국사상사학
61권0호(2019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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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의 '유학 삼부작' -근대 일본 유학사의 시초-

저자 : 이새봄 ( Lee Sae Bom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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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일본의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 1856~1944)의 대표적 저작인 통칭 '유학 삼부작'(이하 삼부작)에 나타난 유학 이해에 대한 분석이다. 삼부작이란,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日本陽明學派之哲學)』(1900), 『일본 고학파의 철학(日本古學派之哲學)』(1902), 『일본 주자학파의 철학(日本朱子學派之哲學)』(1905)을 가리킨다. 기존의 이노우에 연구들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지점은 그의 저작에 나타난 철학 혹은 이데올로기 분석과 그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나 이 글은 이노우에의 대표 저작이자 삼부작이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진 작품들에서 어떻게 각 학파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지 텍스트의 논리를 파악하고, 이른바 근대서양의 철학을 접한 철학자의 렌즈를 통해 동아시아의 전통 유학사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일본의 도쿠가와 유학사를 어떻게 해석했으며 양명학에 부여한 핵심적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삼부작의 내용을 통해서 알기 쉽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교과서나 개론서 등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도쿠가와 유학사의 학파 계보구분은 이노우에의 유학 삼부작에 그 기원이 있음을 지적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명국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기독교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일본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야만 했던 당대 지식인들이 선택하고, 재발견한 대상으로서의 양명학이 현창되는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Inoue Tetsujiro is renowned for repositioning Confucianism's place as a philosophy in the Western academic schema. He theorized this idea by publishing the monumental trilogy on the history of Japanese Confucianism: The Philosophy of the School of Wang Yang-Ming in Japan (1900), The Philosophy of the School of Ancient Learning in Japan (1902), The Philosophy of the School of Zhu Xi in Japan (1905). Most of the previous studies on this trilogy have shown their interests in evaluating Inoue's own philosophical position from the eye of present academia. However, this paper focuses only on extracting the logic of his evaluation on the respective schools. A careful reading on his analysis of the history of Confucianism in Tokugawa Japan as a whole will be offered. Also, providing an explanation on his reasons for putting such emphasis on the School of Wang Yang-Ming is another aim of this paper. In short, this paper aims to offer a clear view on what effects Inoue's trilogy has made in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Japanese Confucianism. The context of the intellectual quest in which Meiji thinkers lied and the rise of the teachings of Wang Yang-Ming in late Meiji period will also be expl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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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전(經典)의 탄생(誕生) -호적(胡適)의 『선진명학사(先秦名學史)』와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史大綱)』 상권(卷上)

저자 : 양태근 ( Yang Tae Ke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7-7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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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학술계의 탄생을 알린 호적(胡適)의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史大綱)』 상권(卷上)은 중국전통학문세계가 현대로 전환했음을 알린 저작이었다. 호적이 북경대 교수로 부임하며 깃발을 높이 들었던 신문학, 신청년, 신학문, 심지어 5『4운동과 신문화운동 같은 개혁의 목소리는 당시 전통 학술계와 끊임없는 사상적 충돌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1920~30년대 보수파와의 다양한 논전 역시 겪게 된다. 1920~30년대 호적은 유럽과 미국학술교육체계를 바탕으로 중국학술계와 교육체계를 새롭게 구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시 일종의 「문화권력」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파와의 논전과 다양한 충돌 역시 이에 대한 반발이었을 수 있음에 주목해보면 이것이 일종의 담론투쟁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호적은 일관되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 중국과 대만의 공산당과 국민당 독재 통치기간 동안 특히 1980년대 까지도 다양한 비판과 폄하운동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호적의 사상과 저작들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중국철학사대강(상권)』의 시대적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야 말로 중국현대사상과 학술계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그리고 적절한 연구 주제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당시 모든 학술계가 싫든 좋든 언급할 수밖에 없던 저작이자 기존의 연구 태도와 방법을 일거에 현대적 서구적 연구체제로 바꾸어 버린 시대적 상징의의는 그 어떤 저작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호적은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자신이 연구한 바를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연구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연구과정이 사회와 개인에게 가져다주는 다양한 상호 영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호작용과 이에 대한 중시가 바로 호적의 저작이 자유주의 상징으로서 여전히 중국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호적의 『중국철학사대강(상권)』이 1919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 100년의 시간이 지났다. 과연 현재 중국학술계는 얼마나 솔직히 연구하고 자신들의 중국사회와 다양한 상호 영향에 주목하고 있을까? 제도가 생긴 이후에 멈출 줄 알아야 비로소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중국의 현재는 과연 어디쯤 있을까? 1919년 5·4 운동 역시 이 100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중국에선 영원한 자유주의자 호적의 평가와 연구는 과연 어떤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가 호적의 저작에 여전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Hu Shih's “An Outline of The Chinese Philosophy" was the paradigm shifting and revolutionary text to lead the new era to transform traditional Chinese academia into one of accepting the modern western academic standards, also announcing the birth of Chinese Philosophy History as an academic discipline. When 26 years old Hu Shih was appointed as a professor of the Beijing University at 1917, raised the banner of New Literature, New Youth and New Academia, he eventually was becoming one of the main promoters and leaders of the May Fourth Movement and the New Culture Movement. During 1920 to 1930, Hu Shih wa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cultural, academic leaders and powers, but also a target who was fiercely attacked by Chinese modern conservatives. Because Hu Shih was the promoter of the ideal “Democracy and Science” and pursued “Individualism” and “Liberalism” in the politic area, he was constantly denounced and attacked by various criticisms and defamation campaigns under the ruling of Kuomintang or Communist Party's dictatorship respectfully in mainland China and Taiwan until the 1980s. As Hu Shih's ideology and writings have such symbolic meaning, there is no doubt that it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and relevant research topics to study on the Hu Shih's “An Outline of The Chinese Philosophy" to fully understand the modern Chinese philosophy academic discipline. During that time, related all academic field had no choice but to mention about Hu Shih's “An Outline of The Chinese Philosophy" as it changed the existing traditional research method into the modernized western research system at once and no other works could keep up with the symbolic meaning that his work had. Hu Shih's “An Outline of The Chinese Philosophy" was published in 1919 and his writings always emphasized positive influences on the individuals and societies. His works addressed that it is important to propose the research to speak openly, frankly and freely regardless whether it is right or wrong, only if with patience and sincerity which he always emphasized his research method like “Bold Hypothesis and Careful Verification". As Hu Shih quoted Lao Zi,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ystem “When they know to rest in it, they can be free from all risk of failure and error”, if we looked inside China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Communist Party and PRC's extraordinary economic developments and its achievements, now where China rested in it now! What Hu Shih had achieved in his academic, cultural and political life was the tools for social impact and reformation for the higher good. We should understand that the importance of the various interactions and communications, how these processes bring to individuals, researchers, and societies positive impacts for the higher good, at the same time we should notice what kind of impacts of these processes will bring to the audience and further future studies. That's why we still need to review Hu Shih's astonishing academic works, through microscopic research we could grasp two related and progressed sibling works, which were “The Development of The Logical Method in Ancient China" and “An Outline of The Chinese Philosophy", real meaning of social and academic impact on the May Fourth Movement and New Cultur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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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조선학, 『이조불교(李朝佛敎)』와 조선사상의 특성

저자 : 김용태 ( Kim Yong Tae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9-10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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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조선총독부의 종교·도서조사 촉탁을 거쳐 경성제대 조선어학문학 교수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일본에서 조선학회 창설을 주도한 식민지기의 대표적 관학자이다. 본고에서는다카하시의 이력과 조선학으로의 학문 여정을 살펴보고 조선 불교의 전통을 형상화한 『이조불교(李朝佛敎)』의 내용을 분석한 후, 그가 조선사상의 특징으로 내세운 의타성과 고착성, 정치성과 이중성의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주로 활용한 자료는 『이조불교』와 다카하시의 그 밖의 논문들, 새로 발굴된 경성제대 사상사 강의노트 등이다.
먼저 다카하시가 도쿄제대에서 동양학의 연구방법론을 체득한 후 식민지 관학자로 활동하는 과정의 학문적 이력을 동양학으로서 조선학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이어서 그의 대표작인 『이조불교』에서 형상화된 조선시대 불교전통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검토하고 그 성과와 함께 한계를 언급하였다. 끝으로 다카하시가 제시한 조선사상의 특징을 의타성(타율성)과 고착성(정체성), 정치성(정치적 종속)과 종교문화의 이중성(유교와 불교 및 무격)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이처럼 다카하시의 조선학에 내재된 사관과 지향점을 고찰함으로써 조선시대 불교를 넘어 한국학의 관점에서 다카하시와 그의 연구를 재평가해 보았다. 그가 추구한 조선학은 비록 식민사관이 투영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한국학의 토대를 닦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Takahashi Toru 高橋亨(1878~1967) was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government-patronized scholars of Imperial Japan. He worked as a part-time employee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n Korea for the research of religious texts and then served as a professor for the Korean language at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After Liberation, Takahashi led the foundation of the Society for Korean Studies in Japan. This paper explores Takashi's life and intellectual journey which led eventually to Korean Studies. In particular, the paper examines the question of the four features- heteronomy, stagnancy, politicality, and duplexity-in which he characterized Joseon thought, after closely looking at his Richo Bukkyo that formed the image of Joseon Buddhist tradition. The paper also uses his lecture notes for the intellectual history class at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as well as his other articles.
The paper consists of three main parts. First, it restructures Takahashi's intellectual career as a journey toward “Korean studies within East Asian studies” in which he learned methodologies of East Asian studies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and served as a scholar ofthe colonial government. Second, it investigates Takahashi's portrayals of Joseon Buddhist tradition in the book Richo Bukkyo and discusses the accomplishments and limitations of the book. Finally, it summarizes his characterization of Joseon thought in terms of the four features: heteronomy, stagnancy, political subjugation, and religio-cultural duplexity. The paper re-evaluates Takahashi and his researches from the perspective of broader Korean studies beyond the field of Joseon Buddhism by looking at his historical view and orientation in his studies on Korea. It cannot be denied that he laid the foundation for Korean studies even though his research was inevitably influenced by Japanese colonialist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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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인보의 『양명학연론』과 근대 양명학파 계보의 재구성

저자 : 신현승 ( Shin Hyun Se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7-1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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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鄭寅普, 1893~1950, 납북)는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신유학(新儒學)의 한 축을 이루는 양명학의 역사에 관해 『양명학연론』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저술하였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양명학사' 이자 일본 양명학에 대한 서술이 빠져있기는 하지만, 동아시아 양명학사였다. 더 엄밀히 말하면 '한중(韓中) 양명학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중국 양명학과 조선 양명학(하곡학파)에 대한 연구의 특징은 종국에 가서 국학에 대한 연구처럼 자신의 민족주의적 국학관(觀) 및 이분법적 역사관 안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논고는 본문의 첫째 장에서 이와 같은 『연론』의 이분법적 역사관과 학문관을 다루고 저작의 구성방식까지 우선적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연론』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저작의 동기이자 이유 등을 제시한 「1 논술(論述)의 연기(緣起)」와 맺음말에 해당하는 「후기(後記)」의 담론을 주요한 근거자료로 하여 정인보의 역사관과 학문관이 어떠한 양상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연론』의 구성방식은 물론이고 집필정신 및 그 사상사적 의의 등에 관해서도 검토하였다. 본문의 둘째 장에서는 『연론』을 '한중(韓中) 양명학사'로 규정하고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 및 중국 양명학파의 계보에 관하여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고찰하였다. 또 이 뒤를 이어서 『연론』의 가장 주목받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양명학파 계보의 새로운 구축 등에 관해서도 검토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이 논고에서는 『연론』 다시 읽기 및 재조명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연론』은 넓은 의미로 근대 동아시아 양명학사, 좁은 의미로는 한중 양명학사라는 의미와 근대적 학술이라는 의의가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특히 정인보의 학파 분류법은 당시 중국과 일본의 학술 상황을 시야에 넣더라도 매우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Jeong Inbo (1893~1950?) wrote the history of Yangmingism, which was an axis of East Asian Neo-Confucianism in the early 20th century under the title, Yangmyeonghak-Yeonron for the first time in Korea. It was the 'Korea's first history of Yangmingism' and the 'history of Yangmingism in East Asia' despite it missed the description of Yangmingism in Japan. To speak more strictly, it should be called the 'history of Yangmingism in Korea and China.' His studies of Yangmingism in China and Yangmingism in Joseon are characterized by the discussion about them within his nationalist view of studies of Korea and dichotomous view of history in the end, like studies of culture and heritage of Korea.
Thus, this study dealt with the dichotomous view of history and view of learning of Yeonron in the first chapter of the main body and first examined the method for the composition of the work. Especially, with the discourses in “1. Reason for discussion,” Preface, presenting the motive and reason for writing and in “Epilogue,” Closing Remarks of Yeonron as the main basic data, this study investigated the aspects ofJeong Inbo's view of history and view of learning. Next, this study examined the writing spirit and the significance of historical thought as well as the method of the composition of Yeonron. The second chapter of the main body defined Yeonron as the 'history of Yangmingism in Korea and China' and discussed how it reorganized the genealogy of the founder of Yangmingism, Wang Shouren and Chinese Yangming School. Next, this study also examined the new construction of the genealogy of Yangming School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which is the content the most attention is paid in Yeonron. Through the above discussions, this study attempted the re-reading and reviewing of Yeonron. Consequently, it was reconfirmed that Yeonron has a significance as the history of Yangmingism in East Asia in the modern period in a broad sense and a significance as the history of Yangmingism in Korea and China and a modern study in a narrow sense. Especially, it was noted that Jeong Inbo's method for the classification of the school was very creative and original, even if academic situations in China and Japan were included in the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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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병도(李丙燾), 『자료한국유학사초고 (資料韓國儒學史草藁)』 -한국유학사의 근대적 출발-

저자 : 최영성 ( Choi Young S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1-16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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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역사학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1896∼1989)는 한국의 유학사(儒學史)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 대표적 저작물이 『자료 한국유학사 초고』다. 1937년에 저술을 한 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59년에 등사본 형태로 발표를 하였다. '초고'라는 이름은 이 저작이 미완성임을 시사한 것이고, '자료'라는 말은 저술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뒷날 1987년에 번역과 수정 보완을 거쳐 '한국유학사'로 다시 태어났다. 본고는 유학사연구의 '근대적 출발'을 고찰하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이병도의 『자료 한국유학사 초고』는 1937년 당시의 유학사 연구 수준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저술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근대성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출발'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둘 때, 1949년에 정식 출판된 현상윤(玄相允)의 『조선유학사』와 비교하면서 살펴볼 대목이 적지 않다. 다만 이병도의 위 저작은 '충분조건'에다 '필요조건'까지 결부시키면 온전하게 평가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193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 당시의 주어진 조건을 감안하여 근대성 여부를 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Korean historian Lee Byeong-do (李丙燾: 1896~1989) who holds a large position in modern Korean history has also made remarkable achievements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His representative work is Rough Copy of Data on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資料韓國儒學史草藁). After writing it in 1937, he published it in 1959, 22 years later, in the form of mimeograph copy. The expression "rough copy" suggests that the work is incomplete and the word "data" reveals its nature. Later, the book was reborn in 1987 as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after being translated and revised. This article was written for the purpose of examining the "modern beginning" of research o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儒學史). Lee Byeong-do's Rough Copy of Data on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is an important writing that shows the level of the study o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in 1937. I think we can discuss modernity in many ways. In particular, when we focus on the word "beginning," I think there are many points to consider in relation to theHistory of Joseon Confucianism of Hyun Sang-yoon (玄相允), which was officially published in 1949. The above work of Lee Byeong-do will be difficult to evaluate thoroughly if the "necessary conditions" are combined to "sufficient conditions". It would be desirable to go back to the end of the 1930s to discuss whether modernity is possible taking into account the conditions given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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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의상의 계율관

저자 : 이자랑 ( Lee Ja Ra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1-19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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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상가로 유명한 의상(義湘, 625∼702)은 계율 수지에서도 남다른 철저함을 보여 지계의식이 뛰어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계율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적어 사실상 지금까지 구체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의상의 전기를 전하는 자료에서 계 율과 관련된 대표적인 세 기록을 발췌하여 재음미하고, 이를 통해 의상 이 실천한 계율행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첫째,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을 통해 알게 된 『열반경』의 존재이다. 당나라 유학 후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화엄 공동 체를 설립하여 활동할 때 『열반경』에서 설하는 '팔부정재(八不淨財)'를 근거로 국왕의 전장(田莊)과 노비 보시를 거절하고 있다. 이 배경에는 필시 팔부정재의 축재를 교단 타락의 주된 원인으로 보며 엄격하게 금지 하는 『열반경』의 가르침이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당대(唐代)의 대표적 율승(律僧)인 도선(道宣, 596∼667)과의 만남이다. 의상은 지엄(智儼, 602∼668) 밑에서 수학하는 동안 도선율사 와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교류 가능성 은 도선의 제자였던 신라승 지인(智仁)의 존재를 통해서도 유추 가능하 다. 또한 황복사의 탑 구조나 사천왕사호탑신의 존재 등을 근거로 의상 이 도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는 최근의 연구 성과 역시 이 두 사람의 교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셋째, 도선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율승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의정 (義淨, 635∼713)의 영향이다. 『송고승전』 「의상전」에는 “또한 항상 '의 정의 세예법'을 실천하고 있었다.”라고 하여 의상이 의정의 영향을 받았 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 나오는 '의정의 세예법'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불살생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 세 가지 전승에 대한 검토 결과에 근거해서 볼 때, 의상은 삼의일발 (三衣一鉢) 등 수행자로서 유지해야 할 기본적인 생활양식을 철저히 유 지했고, 나아가 불살생이나 소욕지족, 평등 등 불교 계율의 근간을 이루 는 핵심적인 이념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Silla新羅monk Ŭisang(義湘, 625∼702), who lived around the latter half of the 7th century, is well known for keeping buddhist precepts strictly. However, since there is not enough data to confirm his practice of precepts, we do not actually understand the details. In this paper, I will review on Ŭisang's view of buddhist precepts, examining three representative cases from the data conveying Ŭisang's biography. First, it is the relation with the Northern Edition of the Nirvāṇa Sutra北本涅 槃經which he learned through Goguryeo高句麗monk Bodeok普德. After returning to Silla after studying Tang, Ŭisang builds Buseoksa浮石寺 and establishes Huayan華嚴community. At this time, He rejected the offering of land and slavery by the king on the basis of the teaching of the Nirvāṇa Sutra. I think he knew the Nirvāṇa Sutra's position that the accumulation of the eight kinds of dirty goods is a major cause of the corruption of the buddhist order. Second, it is a meeting with Toseon 道宣, a representative vinayadhara律師of the Tang Dynasty. The Ŭisang seemed to have had a chance to meet him during the study period under Zhiyan智儼. The possibility of exchange between the two persons can also be inferred through the existence of the Silla monk Zhiyin智仁, who was a disciple of Toseon. Third is the influence of Yijing義淨, who was one of the vinayadhara representing Tang withToseon. Song Gaoseng zhuan宋高僧傳also said, “He was always practicing 'how to wash the dirty' of Yijing,” which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Ŭisang was influenced by Yijing. It is not yet clear what the meaning of 'how to wash the dirty' here is, but it is presumed that it was a way of practicing ahiṃsā不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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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성립사 연구 -기이(紀異)를 중심으로-

저자 : 남동신 ( Nam Dongsi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9-24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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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이(紀異)에 초점을 맞추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성립사 문제를 검토하였다. 먼저 제1장에서는 편찬 취지와 관련하여, 기이 앞머리에 실린 「서(敍)」를 문법과 용례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그것이 기존의 통념과 달리 『삼국유사』 전체가 아니라 기이에 국한되는 서문임을 밝혔다. 즉, 서는 기이(紀異)를 편찬하는 의도를 드러낸 글이다. 이어서 제2장에서는 편찬자와 관련하여 「무극기(無極記)」를 지은 무극(無極, 또는 混丘, 淸玢)을 집중 검토하였다. 특히 사제관계인 일연(一然)과 무극의 사상적 차이를 부각하였으며, 「일연비」에 등장하는 청분(淸玢)과 산립 (山立)이 서로 다른 인물임을 논증하였다. 마지막으로 제3장에서는 고본 (藁本) 『삼국유사』의 최종 성립 시기가 1360년 겨울 무렵임을 추론하였다. 특히 기이2 「오가야(五伽倻)」조에 인용된 『본조사략(本朝史略)』이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일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는데, 이는 일연과 무극이 아닌 제3의 인물이 고본 『삼국유사』의 편찬에 개입하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This article addresses the question of the Samguk Yusa's formation history, focusing on the first part, “Giyi” 紀異(“Records of Strange Events”).
In the first section, we reinvestigate the “Seo” 敍preface at the beginning of the “Giyi” chapter with regard to the intent of the compilation, taking into account grammar and word usages. It is shown that, contrary to common belief, the “Seo” is not a preface to the Samguk Yusa as a whole, but only refers to the “Giyi.” The second section investigates the compiler of the “Mugeukgi” 無極記, i.e. Mugeuk 無極(aka Hon'gu 混丘or Cheongbun 淸玢, 1250~1322). In particular, the ideological differences between Ilyeon 一然(1206~1289) and Mugeuk, who shared a master-disciple relationship, are emphasized. Also, it is argued that Cheongbun and Sanrip 山立(n.d.), who both appear on the “Ilyeonbi” 一然碑stele, actually are two different people. Lastly, in the third section, the possible time of origin of the Samguk Yusa manuscript is narrowed down to around winter 1360. For the first time, evidence is provided that the term bonjo saryak 本朝史略, quoted in the “Five Gaya settlements” 五伽倻entry in “Giyi” 2, refers to the Historicaloutline 史略compiled by Yi Jehyeon 李齊賢(1288~1367) right after 1357, which strongly suggests that another person apart from Ilyeon and Mugeuk was involved in the compilation of the Samguk Yusa manuscript.
The “Giyi” represents well the overall characteristics of Samguk Yusa, which is 'a book of books' and at the same time an unfinished one. Thus, in future studies on the formation history of the Samguk Yusa it will be even more necessary to return to the ancient printed book (goganbon 古刊本) edition (presumably published in 1394) that is closest to the orig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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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시대 해주 소현서원의 운영과 위상

저자 : 이경동 ( Lee Kyung Do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1-286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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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서원(紹賢書院)은 이이(李珥, 1536~1584)가 해주에 건립했던 강학처인 은병정사(隱屛精舍)를 모태로 김장생, 박여룡 등 이이의 문인들에 의해 건립된 서원이다. 이이를 배향한 최초의 서원이며, 지역명을 따서 석담서원(石潭書院)으로 병칭되었다. 은병정사는 1610년 '소현'으로 사액되면서 학파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액 이후 소현서원은 문인계(門人契)의 제정, 『율곡집(栗谷集)』의 간행과 같은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학파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소현서원의 제향과 강학은 황해도 인근에 건립되었던 서원들의 모델이 되었다.
소현서원은 1586년 이이의 유지를 받들어 문인들이 주자사(朱子祠)를 건립하여 주희, 조광조, 이황을 배향한 이후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을 추향하였다. 추향의 과정은 추향인물들의 문묘종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율 문묘종사의 과정에서 17세기 중반 성혼이 추향되었고, 김장생과 송시열은 각각 문묘에 종사된 이후 소현서원에 추향되었다. 이러 한 과정은 서인·노론계 인사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7세기 후반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계 문인들은 이이를 '동방의 주자(朱子)'로 인식하며 주희-이이-김장생으로 단일화된 도통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과정은 이기론이나 격물설과 같은 성리설(性理說)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소현서원 또한 제향과 이이의 강학처라는 의미로 인해 도통론과 연계되어 있었다. 소현서원은 주희가 강학했던 백록동서원이나 무이정사와 비교되며 조선의 대은병(大隱屛)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노론계 문인들은 제문(祭文)·시문(詩文)·기행문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기면서 자신들이 소현서원에 방문하여 느낀 사항들을 기록하였다. 송시열은 17세기 후반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차운(次韻)한 「고산구곡시(高山九曲詩)」를 그의 문인들과 함께 작성하며 소현서원과 그 주변의 구곡(九曲)을 관념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와 같은 회화 작품도 노론계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제작되면서 자신들이 관념화한 이이와 소현서원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이 과정에서 소현서원은 율곡학파계열 인물들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명승지로 정착되었다.
학파 차원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소현서원은 이이를 배향하는 최초의 서원으로서 주목되었다. 소현서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은 다른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치제(致祭)와 서책을 하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외에 묘정비(廟庭碑)의 건립 등과 같은 조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후반 문묘종사 이후 선정(先正)으로서 이이의 위상 확립과 연관되어 있었다. 18세기 영조와 정조를 비롯한 이후의 국왕들은 선정(先正)이나 정학(正學)의 상징으로서 이이의 표상을 강조하며, 소현서원을 이이와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현서원은 학파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위상이 확립되면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원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Sohyeon-seowon (소현서원, 紹賢書院) is a Neo-confucian academy constructed by the disciples of Yi Yi (이이, 李珥, 1536~1584) based on Eunbyeong-jeongsa (은병정사, 隱屛精舍), a place that Yi Yi built in Haeju, where the master taught his followers. It is the first seowon that gave a memorial service for Yi Yi, and was also called Seokdam-seowon (석담서원, 石潭書院) after the place name. Eunbyeong-jeongsa grew into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cademy in 1610 when it was recognized by the country under the name of 'Sohyeon-seowon'. Afterwards, the memorial rites and the academic regulation at Sohyeon-seowon influenced the construction and operation of numerous academies not far from it. In this process, Sohyeon-seowon consolidated the status of the school by establishing the regulations related to the solidarity of the members and publishing collected writings of Yi Yi (Yulgok-jip, 『율곡집(栗谷集)』). Sohyeon-seowon upgraded its status as it gradually added to its list of personalities enshrined Zhu Xi (주희, 朱熹), Jo Kwang-jo (조광조, 趙光祖), Yi Hwang (이황, 李滉), Yi Yi, Seong Hon (성혼, 成渾), Kim Jang-saeng (김장생, 金長生), and Song Si-yeol (송시열, 宋時烈). The personalities added for its memorial service were added for the memorialservice at the Confucian Shrine (문묘, 文廟) in the capital city and then at Sohyeon-seowon. The inclusion of personalities for memorial service at the Confucian shrine had to do with the growth of the political and academic group that followed Yi Yi. The process continued through the 17th and the 18th century. The intellectuals who followed Yi Yi's scholarship upheld him as Zhu Xi and thereby worked to set up a unified academic lineage under Yi Yi. In general, such efforts were related to the Neo-Confucian theories such as world view or cosmology. In the process, Sohyeon-seowon was identified with Bailudong-shuyuan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 or Wuyijingshe (무이정사, 武夷精舍), the Neo-Confucian schools run by Zhu Xi while he was alive. Those intellectuals who operated at Sohyeon-seowon left various literary works, in which they recorded how they felt on visiting Sohyeon-seowon. Thus, they contributed to consolidating the status of Sohyeon-seowon. The practice has continued since the 17th century, and the eminent contemporaries often left their traces by creating plaques or stone inscriptions inside or around the academy. Or, they visualized the conceptual images of Yi Yi and Sohyeon-seowon by depicting in paintings the academy and other scenic spots close by. Thus, Sohyeon-seowon established itself as a scenic spot which the academic followers of Yi Yi were required to pay a visit to. As Sohyeon-seowon was the first Neo-confucian academy giving a service in memory of Yi Yi, the country gave special consideration and supports to it. The kings of the Joseon dynasty showed interest in Sohyeon-seowon by sending its officials to give a memorial service at the academy or delivering Neo-Confucian books published by the royalty. This happened as the country was increasingly convinced that Yi Yi was an important personality for the country. Such interest was pronounced from Yeongjo and Jeongjo, the two kings in the 18th century, who directly expressed interest in Yi Yi and Sohyeon-seowon as byhaving people paint the scenes around the academy or having stone inscriptions bearing their own writings erected at the academy. In that process, Sohyeon-seowon had its status consolidated not just for the school but also or the country and established itself as an important seowon of the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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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당 한원진의 도통(道統) 개념 -정통, 학통의 결합과 정치로의 지향-

저자 : 송재혁 ( Song Jae Hye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87-31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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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한원진(南塘韓元震, 1682~1751)은 주자 이후 유학의 도가 동방으로 옮겨와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승인 권상하의 행장에서 비록 권상하가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아 송시열과 같은 사업의 공로는 없었지만, 전현들의 학문을 잇고 이를 발전시켰다는 이유로 도통(道統)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원진은 자신이 언급한 도통의 계보를 잇기 위해 평생 노력을 경주했다. 불교와 양명학과 같은 이단, 그리고 같은 주자성리학 내에서도 퇴계학파, 낙학파에 대한 그의 격렬한 비판은 그러한 노력의 실천이었다.
기존 연구에서 김태년은 “입정학(立正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러한 한원진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김태년, 2006). 그의 연구는 한원진의 행적을 “학문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원진이 일생동안 끊임없이 보여준 정치로의 지향을 고려한다면, 그가 얻고자 했던 권력은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송시열의 도통에 대해 설명하면서,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도를 세워, 성대한 사업을 더불어 다툴 수가 없었다.”고 표현하면서 정치적 업적의 측면을 강조했다. 한원진은 이이와 송시열을 본받아 현실정치를 꿈꾸었으며, 이후 실제로 권력으로의 지향을 끊임없이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 글에서는 도통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실록과 문집에 나타난 한원진의 행적을 순차적으로 추적한다. 그가 사용한 도통의 개념은 이이와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업적의 측면인 정통(政統)과 학문적 측면인 학통(學統)이 결합된 것이었다. 한원진은 당대의 군주였던 영조(英祖)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권상하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항상 이이, 송시열과 같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정치적 지향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Han WonJin(韓元震, 1682~1751) believed that after the death of Zhuxi(朱熹) Confucian Dao(the Way) had been transmitted to those scholars in Joseon(東方) including Lee Yi(李珥), Song SiYeol(宋時烈), and Gwon SangHa(權尙夏). As an academic successor of Gwon SangHa, he wrote in Gwon's eulogy that Gwon was one of the transmitters of the daotong(道統) despite the fact that Gwon had never served in the government as Song SiYeol had. Through his whole life, Han made effort to transmit the daotong of the teachers he mentioned. This is why Han strongly disapproved of other schools of neoconfucianism, not to mention heresies including Buddihism and Yangming school.
While explaining Han's thought using the concept of “Lizhengxue(立 正學)”, Kim TaeNyeon's work does not go further than arguing Han intended to “seize the academic power.” Considering Han's lifelong orientation to politics, however, his ultimate goal should be more than that. Han wanted to work in real politics and kept trying to hold political power. The supporting evidence is that Han honoured Song SiYeol's outstanding political achievement, saying Song was the one“make up his mind for the world, build the dao for the people, so there is no one who can compete with him in those great works.”
This paper reviews Han's life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focusing on the concept of the daotong. Han's concept of the daotong, similar to those of Lee Yi or Song SiYeol, is the combination of Zhengtong(political orthodoxy, 政統) and Xuetong(academic orthodoxy, 學統). Although Han failed to persuade the then king Youngjo(英祖) and followed suite of Gwon SangHa, he always dreamt of becoming politicians like Lee Yi and Song Si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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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정약종(丁若鍾)의 『쥬교요지』에서 불교 비판 담론이 갖는 사상사적 함의

저자 : 신주현 ( Sheen Joo Hy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9-34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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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의 신앙과 학자로서의 소양에 대해서는 복수의 사료와 연구를 통해 확인돼왔다. 본고에서는 텍스트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기존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쥬교요지』 상권의 18장에서 27장에서 나타나는 불교 비판론을 검토하고자 한다. 비중으로 보자면 이는 상권의 4분의 1 이상이 불교 비판 혹은 불교와 천주교와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처럼 높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18장에서 27장의 10개 항목에 해당하는 『쥬교요지』 내의 불교 비판 부분은 그간 연구자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첫째, 정약종의 불교 비판 부분이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것은 정약종의 신학적 성과가 갖는 독창성 평가문제와 일정 부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둘째, 정약종 혹은 초기 천주교회의 불교 비판 동기에 대한 천착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불교와의 차별화 문제가 조선뿐 아니라 16세기 중반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아시아 사회에 천주교를 소개한 이래 한·중·일 초기 천주교회 공통의 난제였다는 점이 간과돼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간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불교 비판 항목들을 분석해 보면 『쥬교요지』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사이에 더욱 긴밀한 형식적·내용적 상관관계에 있음이 드러난다. 단순한 텍스트적 상관관계를 넘어 정약종이 리치의 불교 비판론, 더 나아가 보유역불론(補儒易佛論)의 접근법을 충실히 계승하여 발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천 주실의』와 가장 큰 영향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은 불교의 윤회 교리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난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논의한 윤회 비판의 구체적인 논점들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직접적으로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는 기존에 언급돼왔던 것과는 달리 정약종의 불교 비판론이 단순히 『천주실의』의 비유를 한두 개 차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본고에서 다룬 정약종의 불교 비판 논점들은 그 자체로 조선 천주교회의 독창적인 적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형식상으로는 비유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내용상으로 는 압축적이고 생략된 서술방식을 채택하는 특징으로 나타났다. 정약종의 이러한 집필 의도 또는 전략은 중국 천주교회에서 예수회가 수행하였던 적응주의 전략을 전환하거나 폐기하는 방식이었다기보다는 그것을 조선교회의 사정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 다른 적응의 산물, 즉 '재적응'의 과정이었다. 만일 이들의 담론을 하나의 신학적 '실험'이라 상정할 수 있다면 그 수행과정은 필연적으로 기존 실험결과의 '반복(replication)' 이 아니라 '재현(reproduction)'을 해내는 것이었다고 본다. 요컨대, 『쥬교요지』의 독창성은 16세기 후반부터 예수회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천주교회의 역사적 공통유산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About Chong Yak-jong, researchers have discussed his life, faith, martyrdom, and his scholarly achievements. But with all the significance in volume, there have been few discussions on the anti-Buddhist discourse in his book Chugyo yoji. Possible reasons why the discourse has not been shed lights on would be: the notion of creativity of the part of yoji to some extent hindered scholars in analyzing inter-textual relationships of the part with other Christian texts in classical Chinese; there have not been enough considerations on the practical motivations for criticizing Buddhism by Chong himself or Catholic Church in Korea; less considered is the common ground of the difficulty in distinguishing Catholicism with Buddhism when the new religious teaching was first introduced in Early Modern East Asia, namely Japan, China, and Korea as order. By closely analyzing anti-Buddhist discussions in Chugyo yoji, we can find that Matteo Ricci's Tianzhu shiyi and yoji were in much closer textual interrelationship, both in contents and technical formats. Furthermore, not only sincerely inherited the legacy of Ricci's buru yifo (complementing Confucianism and replacing Buddhism), but ChongYak-jong applied the approach within the context of Korean Church. He actively utilized metaphors that Ricci wrote in shiyi, but Chong rather featured his anti-Buddhist discussions in a simpler, easier, and abbreviated version than Ricci did. His strategic choice can be understood as a re-accommodation of Jesuit accommodation in China. If we assume Chong's writing the first Korean Catholic catechism as an intellectual experiment, the process and result of the experiment would be a reproduction of previous experiments, rather than a replication of them. In sum, the creativity of Chugyo yoji lies in the efforts to accommodate contemporary social and historical context of late Choson period, under the shared legacy of Jesuit accommodationism in the Early Modern East Asia since late sixteen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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