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한국사상사학 update

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

  • : 한국사상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6-9441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57권0호(2017) |수록논문 수 : 624
한국사상사학
57권0호(2017년)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18세기 후반 김석문(金錫文)과 『역학도해(易學圖解)』의 발굴 -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齋亂藁)』를 중심으로 -

저자 : 구만옥 ( Koo Mhan Oc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59 (5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해(易學二十四圖解)』는 전통적 역학(易學)·상수학(象數學)과 서양의 천문역산학을 회통하여 새로운 우주론의 지평을 열고자 했던 저술이라고 평가된다. 오늘날 그의 저술과 행적에 대해서 가장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문헌은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齋亂藁)』이다. 『이재난고』에 수록된 김석문에 대한 정보는 양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여타의 문헌 자료를 능가한다. 이 글에서는 『이재난고』를 기본 자료로 삼아 황윤석이 『역학도해』에 접근하게 된 경위와 김석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경로, 그리고 『역학도해』의 내용 가운데 황윤석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학이십사도해』의 모체가 되는 『역학도해』는 18세기 후반에 성효기(成孝基)·성대중(成大中)의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성대중과 친분이 있던 정경순(鄭景淳)·정지순(鄭持淳) 형제와 김용겸(金用謙)을 매개로 하여 『역학도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정경순을 통해서 1766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제1권을 제외한 『역학도해』 네 권을 빌려보았다. 1771년에는 자신이 근무하던 관청의 상관인 종실(宗室) 이련(李?)의 아들 이명찬(李命贊)에게서 『역학도해』 전체 5권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권을 빌릴 수 있었다. 이 무렵 성대중의 집안에서 『역학도해』가 실전(失傳)될 것을 염려해서 그것을 이명찬에게 맡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련은 김석문의 아들인 김도해(金道海)의 사위였다. 이후 8년이 경과한 1779년 7월에 황윤석은 다시 김용겸으로부터 『역학도해』를 빌려서 8월까지 약20일 동안 집중적으로 그 내용을 초록하면서 검토하였다. 이와 같은 몇 차례의 집중적 검토를 통해 황윤석은 『역학도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황윤석은 정경순을 통해 김석문에 대한 정보를 처음으로 입수한 이후 서울과 지방에서의 관직 생활을 통해 알게 된 포천(抱川) 지역 출신의 인물들과 김석문 집안사람들을 통해 김석문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정경순, 김용겸을 비롯해서 김원행(金元行), 백사은(白師殷), 김일묵(金一默) 등이 김석문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황윤석에게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황윤석은 김석문에게 『역학이십사도해』를 출간하도록 독려한 사람이 그의 제자 황재중(黃在中)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김석문으로부터 성효기·성대중을 거쳐 이명찬으로 이어지는 『역학도해』의 전수 과정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윤석은 1779년 자신이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목천(木川)에서 김석문의 스승인 허격(許格)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였다. 이러한 정보에 기초해서 황윤석은 김석문의 행적과 학문적 위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10대 시절부터 주역점(周易占)에 관심이 많았던 황윤석은 김석문의 『역학도해』에 수록된 새로운 서점법(筮占法=筮法)에 주목하였다. 김석문은 대연수(大衍數)를 100으로 보았고, 49개의 시초(蓍草)로 점을 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선천(先天)48책(策), 선천(先天)100책(策), 후천(後天)49책(策)의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였다. 또한 시초의 재료로는 북부 지방의 바다에서 산출하는 용편초(龍鞭草=龍鬚木)를 사용했다. 황윤석은 김석문의 율력산수지학(律曆算數之學)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만년에 이르러 더욱 흥미를 보인 분야는 서법(筮法)이었다. 황윤석은 그의 나이가 50대에 접어든 1779년 7월 무렵부터 김석문의 서법에 본격적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몰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활용해서 다양한 점을 쳤다.


Kim Seok-mun's Yeokhakisipsadohae is considered to open a new cosmology, combining the teachings of traditional I-ching studies, xiangshuxue(象數學) and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of the West. One book that contains the most various information on him and his work is Hwang Yun-seok's Ijaerango(?齋亂藁). By reading Ijaerango, this paper explores how Hwang approached to Yeokhakdohae and collected information on Kim Seok-mun, and discusses major themes of Yeokhakdohae that drew Hwang's attention. Yeokhakdohae, from which Yeokhakisipsadohae stemmed, was in the custody of Seong Hyo-gi and Seong Dae-jung's family in the late 18th century. Hwang was able to get access to the book through the Jeong brothers(Gyeong-sun and Ji-sun) and Kim Yong-gyeom, who were friends with Sung Dae-jung. First, Hwang borrowed four volumes of Yeokhakdohae except vol. 1 during a 10 months period between April 1766 and February 1767 through Jung Gyeong-sun. In 1771, Hwang borrowed the essential volume 1 of Yeokhakdohae from Yi Myeong-chan, who was a son of a royal family member, Yi Ryeon. That was possible because the Seong family, in worrying about loss, bestowed Yeokhakdohae to Yi Myeong-chan. Yi Ryeon was a son-in-law of Kim Do-hae, the son of Kim Seok-mun. Eight year passed and Hwang again borrowed Yeokhakdohae from Kim Yong-gyeom in July, 1779, and analyzed it intensively for 20 days. Now, after several accesses to the book, Hwang had a clear grasp of the essence of Yeokhakdohae. Hwang first collected information about Kim Seok-mun from Jeong Gyeong-sun, and later from people of Pocheon region he got acquainted with during his days in the office and also from the family members of Kim Seok-mun. Kim Won-haeng, Baek Sa-eun, and Kim Il-muk, as well as Jeong Gyeong-sun and Kim Yong-gyeom, offered numerous information about Kim Seok-mun. Hwang verified that Kim's pupil Hwang Jae-jung encouraged him to publish Yeokhakisipsadohae, and also realized the passage of Yeokhakdohae from Kim Seok-mun to the Seong family and then to Yi Myeong-chan. Moreover, Hwang Yun-seok collected intelligence on Heo Gyeok, Kim Seok-mun's master, in Mokcheon region where he served as an regional officer. With all sources he gathered, Hwang was able to analyze Kim Seok-mun's achievements and academic position comprehensively. Hwang, who was much interested in I-ching divination from the early days, paid special attention to a new procedure of divination using milfoil stalks in Kim Seok-mun's Yeokhakdohae. Kim considered 100 as dayanshu(大衍數) and created a new ways of divination using 48, 100, 49 milfoil stalks instead of using conventional 49 stalks. He used ryongpyeoncho(龍鞭草) from Hamgyeong-do for the raw material for the stalks. Hwang also showed much interest in Kim's luli suanshu zhi zue(律曆算數之學, study on harmonics, calendar, and mathematics), but his most devoted field of study was divination using milfoil stalks. As he approached his 50s in 1779, Hwang began studying Kim's divination in good earnest, and told fortunes using it toward the end of his life.

KCI등재

2방정환의 교육철학과 동학사상 -무위이화의 생명원리와 모심의 영성을 중심으로-

저자 : 김용휘 ( Kim Yong Hwi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61-8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방정환의 교육철학의 배경으로서 동학과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동학의 어떤 사상이 그의 아동관과 교육철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조명한다. 방정환의 아동관은 기존의 동심천사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동학의 시천주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아동을 '몸과 기운과 생각'의 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방정환의 교육철학에서 가장 핵심은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아이 스스로를 성장의 주체이자 교육의 주체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칙은 동학의 '무위이화'의 생명원리를 교육에 적용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방정환 교육철학에서 두 번째로 중시되고 있는 것은 아이는 기쁨으로 자란다는 것이다. 셋째로 방정환은 학교교육보다는 소년회 같은 동료들 상호 간의 배움을 중요시 하고 있다. 방정환 교육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동심의 회복이다. 이는 동심에 대한 낭만적 예찬이 아니라 동학의 시천주, 즉 '모심'의 영성에서 나온 개념이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nection with Donghak as the background of the thoughts of education in Bang Jeong-hwan. Particular, I examine what ideas of Donghak influences his view of children and the idea of education. The children's understanding of him is basically based on the human view of 'Sicheonju' of Donghak. In addition, he sees the child as a triple element of 'body, ki(energy) and thought'. The most important point in education theory of Bang Jeong-hwan is that the child is regarded as the subject of education itself based on the principle that 'the child grows by himself'. This principle can be understood as applying the principle of life of 'muwiihwa' of Donghak to education. The second emphasis in his theory of education is that children should grow up with joy. This is also the reason for emphasizing art education, including fairy tales. Third, he emphasizes that children learn from each other. The goal of education is to say, "children grows up themselves, learns from each other, and grows up with joy." And this foundation is based on the idea of Donghak.

KCI등재

3“인주지직 재론일상(人主之職 在論一相)”과 조선 초기의 권력 구상 - 권력의 통합론으로서 의정부서사제 논의 -

저자 : 송재혁 ( Song Jae Hye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91-123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기존의 연구들은 조선 초기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의 권력구조의 변동 속에 “권력의 분할”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투영해 왔다. 이 글은 당대의 정치가들이 권력의 구조 논의 속에서 빈번하게 사용했던 “인주지직 재론일상(人主之職在論一相)”이라는 구문에 주목한다. 필자는 이러한 구문의 전거(2장), 조선건국기의 정치가들이 이러한 구문을 언급한 맥락(3장), 의정부서사제의 구체적인 시행 논의(4장)를 순서대로 분석하여,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가 모두 “권력의 통합”이라는 관점에 서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Previous studies have focused on the division of power shown in the systemic changes between Uijeongbu Seosa(議政府署事) System and Yukjo Jikgye(六曹直啓) System in the early Choseon Dynasty.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meaning of the phrase “人主之職 在論一相”, which was often quoted by politicians during their discussion on power structure in the early period of Choseon Dynasty. This paper argues two different systems had been indeed on the same premise of power centralization. Chapter 2 examines the origin of the phrase, and chapter 3 provides the situational context of the usage. Lastly, in chapter 4, historical examples of the phrase being referred are reviewed in detail.

KCI등재

4『경제육전』 도승·도첩 규정으로 본 조선초 도승제의 의미

저자 : 양혜원 ( Yang Hye W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25-159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초 도승(度僧)·도첩(度牒) 규정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최초의 공식법전 『경제육전(經濟六典)』 도승의 조문을 추출·분석하였다. 『경제육전』은 실물이 현전하지 않아 조문의 원형을 알기 어려운데, 본문에서는 조선초 실록의 도승제 인용 기사만을 집중 검토하여 기존 『경제육전』 복원 성과의 도승 관련 조문들을 전면적으로 수정·보완하였다. 『경제육전』 체제하에서 변함없이 지속된 도승 규정을 추출한 결과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도승 대상 및 절차관련 규정이고(도승 3-1, 3-2), 다른 하나는 도승 금지 및 위반자 처벌에 대한 규정(도승 3-3)이다. 도승 절차와 그 위반자 처벌이 한 조항내에 들어있는 까닭은 『경제육전』이 수교모음집 형태이기 때문이다. 도승 규정을 종합적으로 살폈을 때 이 시기 도승제는 소수의 관인층 자제인 '양반 자제'라는 높은 신분 기준과 까다로운 신고 절차, 정전을 납부할 재력, 재행(才行) 등을 복합적으로 요구하여 도첩승의 자격을 제한하는데 주안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승제 위반자의 처벌은 『대명률』의 규정을 전제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조선초 도승제하에서 승(僧)은 도첩을 소지하여 제도적 출세간으로 간주되는 '도첩승'과 그렇지 못한 '무도첩승'으로 구분된다. 도첩은 면역(免役)의 법적 증빙이 되었으므로, 국가는 과다한 승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특히 도첩승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다.


The main object of this paper is to make sense of the legal provisions related to doseung(度僧) and dochup(度牒) in Gyongjeyukjeon (經濟六典) of early Joseon Korea. Gyongjeyukjeon is the code established in 1397 shortly after the birth of Joseon Dynasty. The early Joseon on this paper refers to the period from the end of the 14th century to the middle 15th century when enforced Gyongjeyukjeon. Buddhist monks who existed on a large scal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those who received dochup from the government and those who did not. The key difference between the two depends on whether or not they are legally exempted from the forced labor of the state. The early Joseon government tried to regard them as Buddhist monks excluded from the forced labor only if they received dochup under legal procedures of doseung. The most important qualification requirement for receiving a dochup in the system of Gyongjeyukjeon was the superiority of 'a son of yangban(兩班)' and the economic ability to pay jeongjeon(丁錢). Finally, Joseon tried to strictly control the qualification of dochup by doseung law.

KCI등재

5충청지역 종교계의 국채보상운동

저자 : 이승윤 ( Lee Seung Y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61-191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07년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작은 힘이라도 보태 나라를 구하고자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은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스스로 나선 구국운동이다. 종교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고에서는 충청도라는 지역 범위 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종교계의 입장과 국채보상운동 참여 동향을 분석하였다. 종교 단위의 참여 동향은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지역 단위 분석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가장 적극적인 참여를 보인 것은 불교계이다. 1907년 3월 3일 불교연구회의 참여 결의 이후 사찰 승려들은 적극적으로 국채보상에 참여하였다. 특히 충남에서는 승려의 80%가 의연에 참여할 정도였다. 개신교는 교단에서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단위로 한 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특히 단체의연에 나선 교회 대부분이 미감리교 공주 스테이션의 중점선교지역에 위치해 있어 종교의 확산이 교인들의 정치·사회적 각성에 기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교회 상당수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는 양상도 확인된다. 천주교와 천도교는 교단의 소극적 태도 때문인지 의연사례가 거의 없다. 다만 옥천성당의 홍신부가 5원을 의연한 것은 천주교회 내부에서도 국채보상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국채보상운동은 '의연금 납부'라는 동일한 행위로 표현되었지만 그 안에 다양한 정치·사회적 인식과 의도가 담겨 있다. 본고에서는 충청지역에 국한하여 서술하였지만, 종교계를 포함한 계층 단위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동향은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다양한 계층에 주목한다면 '전민족적 구국계몽운동'이라는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In 1907, a lot of Koreans came to save the country even with a small force.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is a national movement that all the people of this land have made themselves, without discrimination between men and women. Religious people were no exception. This paper analyzed the position of the religious community in various areas within the Chungcheongdo and the tendency to participate in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Religious participation trends are different from the general analysis result. The most active participated group is Buddhist. On March 3, 1907, Buddhist monks participated actively in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after the decision to participate in the Buddhist Study Group. Especially in Chungnam, 80% of the monks participated in the contribution. Protestant denominations did not go directly to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However, Protestant Christians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church as a unit. In particular, most of the churches involved in collective action are located in the key mission area of the Methodist Gong-ju branch. It can be seen that the spread of religion contributed to the political and social awakening of the religious people. In addition, many of the churches participating in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also participated in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Catholic and Chondogyo have very little contribution because of their passive attitude. However, the priest Hong who belonged to Ok-cheon Catholic Church donated 5-won and it shows that there is a desire for treasury compensation in the Catholic Church.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has been expressed as the same act of 'paying a contribution' but it contains various political and social perceptions and intentions. In this paper, although it is described in the Chungcheong area, the nationwide trend of participating in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including the religious system needs further study. If we pay attention to the various classes that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the value of 'the national saving country and enlightenment movement' will shine brighter.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승조의 법신론은 스승 구마라집의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 실상, 무자성의 공(空), 무상(無相)·무위(無爲)론을 계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승조의 법신론에는 이전 붓다 중심의 생신과 법신이라는 2신설 구도를 벗어나 세간 범부의 육신과 출세간의 대승 불·보살의 법신이라는 2신설로 전환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범부의 육신은 대승의 법신에 의해 구제되어야 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승조의 불·보살의 대승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마라집의 불신론은 초기 대승불교의 2신설에서 중기 대승불교의 삼신설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승조 역시 이의 연장선에서 법신·응화신·보신의 삼신설을 더욱 확장하여 짙게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 법신은 삼계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또 응신과 화신은 법신의 방편으로서의 몸으로 중생의 구제를 위해 일시적으로 세간에 드러내고 있는 것에 비하여, 보신은 삼계에 두루 퍼져있으면서 모든 육정의 작용에 의해 생긴 번뇌에서 일어나 분별의 상을 짓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또한 대승 방편으로서의 응신과 화신에 비교하여 보신이 오히려 폄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승조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경전' 즉 '심경'을 대승의 불신이며 법신이라고 주장하여, 대승의 방등경을 공(空)·무상(無相)·무작(無作)·무기(無起)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또한 구마라집까지의 법신과 색신의 2신설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강력한 법신 중심의 불신론을 제안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당시 남쪽의 여산 혜원이 불변하는 법체가 항상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상반된 것이어서 더욱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5세기 전후의 법신론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한 것으로 사료된다.


Sengzhao's theory of Buddha-body is characterized by shedding the previous structure of the two-body theory of Buddha-centered Born-Body and Dharmakaya, and then shifting to the two-body theory of the normal physical body of an ordinary man and the supra-mundane world's Dharmakaya of Buddha & Bodhisattva of the Mahayana. With such a change, concrete theories have yet to be established, but terms such as Sambhogakaya and Nirmanakaya and Transformation-body are found to be frequently used. Here, in particular, Nirmanakaya and Transformation-body do not make formulation(無作相) and discrimination(無分別), thus have a planar structure like Dharmakaya which has transcended the three realms (Kama-dhatu, Rupa-dhatu, and the realm of formlessness). Meanwhile, Sambhogakaya remains in the three realms and has accumulated karma yet, thus bing disparaged as making discrimination (分別) and formulation(作相). And, Mahayana Bodhisattva in a higher class than the sixth stage of cultivation(六住) has entered the position of Dharmakaya, and has gained true mind of no-hindrance(無?), and wisdom of mind with tranquility, thus entering and remaining in samadhi permanently. If Kumarajiva's view of Dharmakaya has been in the intermediate phase between the two-body theory of early Mahayana Buddhism and the trikaya theory of middle Mahayana Buddhism, then the emergence of Sengzhao's theory of Dharmakaya and Nirmanakaya and Transformation-body is seen to follow the same orbit. However, to more accurately discuss the issues related to Kumarajiva's and Sengzhao's theory of Dharmakaya, it is necessary to make an in-depth comparison and observation of their notes in the annotations on the Vimalakirti sutra.

KCI등재

7나말려초(羅末麗初) 선승(禪僧)의 이상과 현실 - 굴산문(?山門) 출신의 행적(行寂)과 개청(開淸) 선사를 중심으로 -

저자 : 조범환 ( Cho Bum Hwa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25-251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나말려초 굴산문 출신의 두 선승인 행적과 개청을 중심으로 당시 선승들의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두 명의 선승은 범일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는 길은 각각 달랐다. 행적은 도당 유학을 하였고, 스승이 열반에 들자 건자난야에 머물면서 신라 왕실에 계속해서 눈길을 보냈다. 궁예와 손을 잡기도 하였으나 멀어졌고, 결국에는 그가 원하던 대로 신라 왕실로 가서 국사로 활동했다. 반면 개청은 도당 유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범일 곁에 머물다가 스승이 열반에 들자 민규 알찬이 제공한 보현산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종신토록 지냈다. 보현산사에서 지내는 동안 단월이 왕순식으로 바뀌었는데,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 경순왕이 그를 국사의 예로 대접했으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왕순식이 고려 태조 왕건과 밀접하게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왕건과 거리를 두었는데, 이는 개청이 중앙의 권력과는 거리를 두겠다고 하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명의 스승 아래 공부한 두 명의 제자가 확연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음을 말해준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각각 다른 방식을 통해 이상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행적이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방법과, 개청이 가졌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두 사람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두 선승들 이외에도 당시 많은 선승들이 행적 혹은 개청의 방식을 택하였는데 이는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Many Son-Master of Late Silla and early Koryo period tried to redeem common people and to promulgate Buddhist teaching. However, those periods were age of chaos, and it was hard for them to accomplish their ideal. Therefore, many of Son-Masters were having close relationship with Gentry Powers. By doing so, they tried to announce and educate their Buddhist discipline to the public. HaengJeok and GaeChung from Gulsan Meditation School were one of these categories. HaengJeok tried to announce Buddhist teaching by associate with central powers. GaeChung did not leave Gangreung, had relationship with Gentry Powers, and stayed in Gijangsunwon until he died. His life was similar to Buddhist Huiyuan of Mount Lushan. Two Son-Master were taught under a same teacher Beomil, but they pursued different paths. Though the way they tried to realize the ideal was different even if they lived during the same time period, strived for the same ideal. It seems that they had different awareness for their time period. However, we are not able to tell right from wrong because their own religious conviction is regarded as the best way to accomplish their own ideal. Lots of Son-Masters chose the same way HaengJeok and GaeChung did, and it shows that Son-Masters could not oppose the period.

KCI등재

8한말 연극 인식과 연극개량운동

저자 : 주운화 ( Ju Woon Wha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53-286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문화계몽운동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연극개량에 대한 논의들은 문화와 정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말의 연극개량운동은 조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민족주의 계열과 통감부에서 견지하고 있는 저마다의 노선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 힘든 현실에서 연극을 통한 계몽은 매우 긴요한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제 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컨텐츠 즉 국민의식을 발휘시킬 수 있는 충국열사, 애국지사들을 소재로 한 각본이 필요했다. 통감부는 비단 극장뿐만이 아니라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문화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극개량회를 통한 극장의 정치적 통제를 이미 경험했던 일제는 조선의 극장 운영에 대해 전반적인 통제를 하였고 이인직의 '은세계' 공연은 통감부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의 신연극 은세계는 조선의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신소설 은세계는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시정개선을 찬양하는 내용이 더하였다. 그러나 통감부의 의도아래 기획되었던 탓에 이인직은 더 이상의 공연작품은 남기질 않았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various discussions on the drama reform, which were under the influence of the Cultural Enlightenment Movement, as a good example of the nexus between culture and politics in the late Korean Empire. The Theatre Reform Movement reveals two very different visions that each of the Korean Nationalists and Japanese Residency-General of Korea had on Korea's future. Under the circumstance of educational inequality, the Nationalists viewed drama as an efficacious means of enlightenment. They needed proper cultural contents for the enlightenment of the masses, such as the dramas based on the stories of loyalists and patriots, which could arouse the national sentiments of Korean people. However, the Residency-General maintained tight control over the overall domains of popular culture as well as theatres.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which had already have an experience of political control over Japanese theatres through the Theatre Reform Society (Engeki kairyo kai), attempted to regulate overall management of Korean theatres. The staging of Yi In-jik's A Silver World (Eunsegye 은세계) reflected Residency-General headquarter's concern on contemporary culture. This “New Drama” (Sinyeongeuk) was a criticism over the dominant social order in Joseon, and the admiration of the development of Korea under the Japanese rule was added to Yi In-jik's “New Novel” (Sinsoseol) A Silver World. However, this was Yi In-jik's last work staged in a theatre as the performance was planned by colonial authorities.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121
 98
 74
 72
 60
  • 1 서울대학교 (121건)
  • 2 동국대학교 (98건)
  • 3 고려대학교 (74건)
  • 4 성균관대학교 (72건)
  • 5 연세대학교 (60건)
  • 6 백석대학교 (44건)
  • 7 이화여자대학교 (44건)
  • 8 공주대학교 (42건)
  • 9 충남대학교 (39건)
  • 10 서강대학교 (37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