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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hought and Culture

  • : 한국사상문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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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8)~100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547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0호(2019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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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인들의 황천(皇天) 인식과 소망 성취 방식 - <구지가(龜旨歌)>를 중심으로 -

저자 : 김병국 ( Kim Byung-kuk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6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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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 신화에 보이는 황천(皇天)에 대한 인식이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과 가락(駕洛)의 시조인 수로(首露)의 탄생 과정에서 불려진 <구지가(龜旨歌)>에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위협적인 어사가 나타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성과를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일반적으로 황천의 의미는 같지만, 오늘날 하느님이 우리의 종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리 인식되듯이, 그 당시 역시 사람들은 황천을 지역에 따라 주관적으로 달리 인식했다. 그러므로 수로는 황천의 명령을 받아 외지에서 구지봉(龜旨峯)으로 들어왔으며, 수로가 구지봉 지역의 구간(九干)들에게 알려준 <구지가>라는 노래는 구지봉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구간(九干) 등이 믿고 있는 황천을 향해 불린 주술적 노래다.
<구지가>는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주술적 노래를 거북을 위협하여 구지봉 지역에 그들의 최초의 임금을 내려달라고 비는 주술적 노래(呪歌)로 변환시킨 것이다. 거북은 구지봉 지역에서 신령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었는데, 수로는 구간 등에게 신령스러운 거북을 위협하는 그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구지봉 지역의 사람들이 믿는 황천으로 하여금 구간 등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몽(朱蒙)의 경우와 같은데, 주몽은 금와(金蛙)가 다스리는 동부여(東扶餘)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송양의 지역에서 그와 다툴 때, 해원(蟹原)의 들에서 흰 사슴[白鹿]을 잡아 거꾸로 매달아놓고 그 흰 사슴을 위협함으로써 하늘로부터 송양의 땅에 이레 동안 소나기를 내리게 했다. 그리고 필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기우제(祈雨祭)와 관련된 설화 및 민속을 통해 그 속에 이러한 사유가 내재해 있음을 확인해 보았다.
수로가 하늘로부터 알의 형태로 구지봉 지역에 내려오고 그리고 그 알에서 동자로 변하며, 십여 일 후에 구척(九尺)의 신장으로 자라서 그달 보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이 과정은 『요사(遼史)』'재생의(再生儀)'의 자료를 참고로 할 때, 수로가 구지봉 지역에 와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신성시하여 이를 제의의 통해 나타낸 것이며, 이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가락국기〉이다.


This paper studies the fact that the perception of the heavenly gods[皇天] in Korean mythology varies from region to region, and also examines the reasons why in the song Gujiga[龜旨歌] called during the birth of Suro[首露], the first ancestor of Garak[駕洛], threatening expressions, “If you don't see your head, I will roast and eat you” appeared. The result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of all, the heavenly god generally means the same thing, but at the time people also perceived it differently subjectively according to region, just as we today perceive God's personality differently according to our religion. Therefore, Suro came from the outside into the Gujibong[龜旨峯] area by the heavenly god's command and the Gujiga, which was given to the village representatives, Gugan[九干] of the Gujibong area by him is a magical song sung to the heavenly god, believed by the people who live in the Gujibong area
The Gujiga is a magical song that calls for rain to be transformed into a magical song that threatens tortoise to beg their the first king to the Gujibong area. Tortoise is recognized as spiritual animal in the Gujibong area, and Suro maked the village representative, Gugan, sing the song intimidatingly and created a situation where their God had no choice but to do what they wanted.
This is the same as the case of Jumong[朱蒙]. Jumong, when descended south from the Dongbuyeo[東扶餘] area ruled by Geumwa[金蛙] and quarreled with him in the area of Songyang[松讓], catched a white deer[白鹿] in the fields of Haewon[蟹原], and was hanging it upside down, and threatening it to rain showers for seven days from the sky to the land of Songyang. and I confirmed that this idea is inherent in the folk tales and folklore associated with the rituals that call for rain being comed to be told to us today.
This process that Suro descended from the sky into the area of Gujibong in the form of an egg, and from that egg into a young boy, grew up to the length of Gucheok[九尺] after a dozen days, and was crowned king is to express sacredly through ancestral rites the course that Suro comes to Gujibong area and becomes king, If we refer to the data of Yosa[遼史]'s Jaesaengui[再生儀]. and to express it symbolically is < Garakgukgi(駕洛國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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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봉 송익필 시의 시풍적 특징

저자 : 명평자 ( Myoung Pyoung-ja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3-10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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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 송익필(1534~1599)이 살았던 16세기 중반은 송시풍에서 당시풍으로 전이되던 시풍의 변환기였다. 구봉은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력(文章力)을 갖추었던 인물이다. 구봉의 시에는 그가 수학한 학문과 문장의 특성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구봉의 시는 표현 형식에 있어서 성당(盛唐)의 풍운(風韻)을 따르고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 성리학적 설리(說理)와 격양(擊壤)을 노래하는 시풍의 이중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봉은 성당시(盛唐詩), 그 중에서도 이백(李白)의 시를, 시를 배우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구봉의 시에서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중시하고, 주관적인 정감을 표출하며, 묘사를 통해 시의를 전달하고, 낭만시적 경향을 보이는 성당시의 풍격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백의 시에 주로 보이는 소재들을 그대로 구봉의 시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백의 '표일(飄逸)'과 '낭만(浪漫)' 그리고 '청상기절(淸爽奇絶)'의 경지 역시 구봉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은 구봉 시의 내용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론으로서, 구봉의 시집 안에는 구봉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도학시(道學詩), 설리시(說理詩)가 다수 존재한다. 구봉은 자연현상 속에서 발견한 천도와 대자연의 이치를 시로 풀어내고, 천도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인간적인 모습을 시로 엮었다.
내용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구봉시의 또 다른 요소는 격양시(擊壤詩)적 면모이다. '격양(擊壤)'은 구봉이 추구하는 삼대지치(三代之治)의 이상이 구현된 세상이다. 구봉의 시는 '요부(堯夫)의 자득[堯夫之自得]'·'뜻을 격양에서 취했다.[義取擊壤]'고 평가 되는데, 구봉의 시에서는 소옹(邵雍)의 격양시에 보이는 안분(安分)·무욕(無慾)·탈속(脫俗)·자한(自閑)의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The mid-16th century when Gubong Song Ik-pil(1534~1599) lived was a transformational period with a transition from the style of Sung poetry to that of Tang poetry. Gubong was a figure equipped with superb poetic talent(詩才) and writing skills(文章力). Gubong's poems plainly reflect the characteristics of sentences and studies he was involved in.
Concerning the forms of expression, Gubong's poetry pursues the Pungun(風韻) of Seongdang(盛唐), and regarding contents, it can be said to be equipped with dualistic aspects, neo-Confucian Seolri(說理) and the poetical style of singing about Gyeokyang(擊壤).
Gubong did take Seongdang-si(盛唐詩), particularly Lee Baek(李白)'s poems, as a crucial reference to learn about poetry. Therefore, in Gubong's poetry, we can find the style of Seongdang-si that stresses sensuous image, expresses subjective sentiment, delivers poetic meaning through depiction, and reveals the tendencies of romantic poetry. In particular, the subject matters often found in Lee Baek's poetry can be also found in Gubong's poems easily, and Lee Baek's 'Pyoil(飄逸)', 'romance(浪漫)', and the stage of 'Cheongsanggijeol(淸爽奇絶)' can be also found in Gubong's poems.
Moreover, as neo-Confucianism(性理學) is crucial theory that penetrates into the contents of Gubong's poetry, among his collection of poems, there exist a number of Dohak-si(道學詩) and Seolri-si(說理詩) with which we can infer his neo-Confucian view of the world. Gubong wrote poems based on the order of Heaven and the rules of Mother Nature he had found within natural phenomena, and he wrote poems about the ways of human beings living according to the order of Heaven.
In terms of contents, another element of Gubong's poetry that forms a crucial part of it is the aspects of Gyeokyang-si(擊壤詩). 'Gyeokyang(擊壤)' is the world where the ideal of Samdaejichi(三代之治) which Gubong did pursue is realized. Gubong's poetry is appreciated as 'Yobujijadeuk[堯夫之自得]' and 'Uichwigyeokyang[義取擊壤]', and in Gubong's poetry, we can find the attitudes of Anbun(安分), Muyok(無慾), Talsok(脫俗), Jahan(自閑) which can be also found in Soong(邵雍)'s Gyeokyang-si(擊壤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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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문고전으로서의 한문교육 역할 - 미래 4차 산업혁명시대의 포용적 가치를 중심으로 -

저자 : 김미선 ( Kim Mi-se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7-13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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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인문고전으로서의 한문교육 역할-미래 4차 산업혁명시대의 포용적 가치를 중심으로-」이다. 문제 제기와 연구목적은 '한국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실적 문제에 두었으며 연구방향은 인문고전으로서의 한문교육 역할을 4차 산업혁명시대의 효용적 가치를 찾는 데에 두었다. 먼저, 현재 우리의 고전 인문학 위기에 따른 한문교육의 역할을 찾아내기 이전에 이러한 위기 상황이 야기된 원인 성찰을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4차 산업혁명시대의 포용적 가치를 이미 함유하고 있는 인문고전으로서의 한문교육에 대한 방법을 논의하였다.
한국 인문학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인문고전으로서의 한문교육 역할을 4차 산업혁명시대의 효용적 가치를 찾는 데에 두고 살펴보았다. 1. 인문고전의 지식 창고 2. 인문고전의 전인교육 3. 인문고전의 글로벌화에 이미 우리 인문고전은 그 중심에 있는 자리를 찾아가며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인문학적 소양은 결여된 채 오로지 경쟁논리로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정책 제도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고자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서의 한문교육이 미래 4차 산업혁명시대에 포용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며 실효성에 접근해 갈 수 있는 우리의 전통 한문교육 방법 속에서 그 대안을 찾아 제시하였다. 첫째 포인트형 교육, 둘째 프로젝트형 교육, 셋째 플랫폼형 교육, 넷째 서당식형 교육방법이다. 이는 이미 4차 산업혁명시대가 요구하는 facilitation과 gervernance에 가장 적합한 맞춤형 교육방법으로 우리의 인문고전 한문교육이 전통적으로 해온 역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UN에서 제정한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양질의 교육에 우리의 인문고전 한문교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고, 사람이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없듯 그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This Presentation problem raise and study aim are already implied on real problem such as 'Korea Humanity Crisis'. This article study direction lies on searching of Chinese education role as a humanity classic is comprehensive value in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era. At first, before searching Chinese education role according to present our classic humanity crisis, I have considered these raised crisis situation causes. Externally the whole global village faces humanity position examining according to the change of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nd internally I intend to consider the system and policy for our humanity classic education. In this base I discussed the method of Chinese education as a humanity classic which already contains comprehensive value in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era.
Therefore I present to newly establish new humanity demanding open and fusion in era. This consideration is based as follows: 1. Humanity classical knowledge storage 2. Humanity classical all-round education 3. Humanity classical globalization. After this I present the alternation about practical Chinese education which can demonstrate the comprehensive value in the future 4th industrial revolution era as a humanity classic. First, point type education , second, project type education, third platform type education, fourth, Seodang type education method, these are discussed and intend to draw road map. Through this, I intend to search make sense and importance of Chinese education role as the comprehensive value in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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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우리말 때매김 연구

저자 : 김승곤 ( Kim Seung-g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3-15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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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어의 때매김은 시제와 시상의 구별 없이 시제와 시상을 모두 시제라 하여 다루어 왔음이 일반적이다. 글쓴이 역시 국어형태론에서 때매김을 이원화하여 시제로는 현재「-는-」, 과거로는「았-/-었-/-었었-」, 미래로는「-겠-/-리-」로 다루었고 시상으로는 「았었-/-었었-」, 「았겠-/-었겠-」,「-더-」, 「았더-/-었더-」, 「-겠더-」등으로 다루었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국어의 때매김은 시제로 받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싶어 다시 많은 예문을 통계 내어 보니 「-았-/-었-」은 과거보다는 완료를 보는 것이 합당한 것 같고 「-겠-/-리-」는 추측 의도 가능으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 같아서 이 논문을 쓰게 된 것이다. 영어에서는 시제와 시상의 두 체계로서 때매김을 하고 있으나 국어에서는 그런 체계로는 보기 어려움이 있어서 우리의 때매김은 시상 하나로 보기로 한 것이다.


So far, the tense and aspect of Korean language have been generally handled as all tense without separating tense from aspect. The author also dualized the tense and aspect in Korean morphology, and then handled the tense as present「-neun-」, past 「at-/-eot-/-eoteot-」, and future「-get-/-ri-」, and the aspect as 「ateot-/-eoteot-」, 「atget-/-eotget-」, 「-deo-」, 「atdeo-/-eotdeo-」, 「-getdeo-」. However, it would be difficult to handle the tense and aspect of Korean language as all tense. According to the statistics of many example sentences, it would be right to view 「-at-/-eot-」as the perfect instead of the past, and it would be also proper to view 「-get-/-ri-」as the possibility of intention to guess, which is the reason why the author starts writing this thesis. Even though the tense and aspect are handled in the two systems of tense and aspect in English, it is difficult to apply this system to Korean language, so that the tense and aspect of Korean language would be viewed as a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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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한 표준어 규정 정책의 변화 연구

저자 : 김재원 ( Kim Jae-w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7-18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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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란 본래 언어통일의 방법이다. 한 나라의 공용문이나 학교, 방송 등에서 보이는 규범으로서의 언어 주로 세계 각국의 수도에서 쓰이고 있는 말을 기초로 해서 성립된다. 한국에서는 서울의 중간계층의 말을 탁마(琢磨)하고 보정(補正)한 것이다.
표준어의 반대개념인 방언은 어떤 지방이나 어떤 계급층에 한하여서 행하여지는 언어의 체계를 말한다. 한 나라의 언어 중에서 지역에 따라서 발음, 의미, 어휘, 음운, 이법 등이 표준어와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진 말이다. 오늘날 외래어가 난입되어 우리말과 혼용되고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표준어 개념을 개략적으로 정의하고는 다음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표준어 규정의 역사를 시대별로 논구한다. 뿐만 아니라 현행 표준어 규정을 검토한다. 제1부에서는 먼저 표준어 사정 원칙을 검토해 보고 다음으로는 발음 변화에 따른 표준어 규정에 대하여 논구한다. 2부에서는 주로 표준 발음법을 논구한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우리나라 개화(開化) 이후의 표준어 정책 변화의 역사를 연구해보려는 것이 본 연구의 주된 목적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남북 통일문제가 가깝게 논의 되는 시점이 북측에서 표준어라고 자칭하는 평양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구하여 비교해 보려고 한다.


Standard language is essentially a method of language unification. It is based on language as a norm in public texts, schools, and broadcasts in a country, and on words spoken mainly in capitals around the world. The standard language in South Korea is the word of the middle class in Seoul being polished and corrected. Dialect, the opposite of standard language, is a system of language that is practiced only in a certain province or class. Their pronunciation, meaning, vocabulary, phonology, and method of the language of a country are different from the standard language.
Today, Korean language is intruded by, mixed with, and deteriorated by foreign languages. However, this study has no time for discussion.
In this study, firstly the concept of standard language is briefly defined, and then the history of standard language regulation in Korea is discussed. In addition, it reviews current standard language regulations. In the first part, the principles of standard language assessment are first reviewed, and then, the standard language regulation according to pronunciation changes is discussed whereas the part 2 mainly discusses standard pronunciation.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earch the history of policy changes after the enlightenment of Korea.
Unfortunately, I would later have to discuss and compare Pyongyang language, which the North Koreans claim to be the standard language at the current time when the issue of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is closely discu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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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홍익인간이념의 전개과정과 미래상

저자 : 조한석 ( Cho Han-suk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7-21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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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홍익인간의 기원과 전개 과정, 그리고 미래의 바람직한 홍익인간상에 대해 살펴보는 데 있다. 인간은 태초로 접하는 자연환경의 변화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환인은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통찰하면서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삶의 지혜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전하였다.
배달국이 개국되던 시기에는 백성들이 진정한 삶의 지표를 잃어버리고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다투었다. 이 시기에 환웅은 문자를 만들도록 독려하여 녹도문(鹿圖文)을 발명하였고,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해석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울러 농사·생명·질병·형벌·선악 같은 인간세상의 360여 사를 주관하며 가르침을 베풀었다.
단군의 고조선시대에는 환인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환국오훈(桓國五訓)의 가르침이 배달시대와 고조선시대로 이어졌다. 특히 단군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론했고, 젊은이들에게 책읽기, 활쏘기, 말 타기, 예절, 음악, 기수련 같은 육예(六藝)를 가르쳤으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스려 '우아일체(宇我一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런 고조선은 2,000여 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다행히 '국자랑'에게 가르쳤던 오상(五常)과 육예(六藝)와 환국오훈의 낭가정신(郎家精神)은 부여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이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했고, 신라에선 이들을 화랑(花郞)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국자랑이라고 하였다. 아쉽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고려가 멸망하면서 그 맥이 끊어졌다.
역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 민족을 구원했던 힘은 바로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호국정신'이었다. 홍익인간은 서로를 도와 한 사람도 섭섭하고 답답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심신(心身)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할 때 항심을 유지하며 유익하게 활동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이러한 유익한 활동능력의 근본배경은 결국 인간의 뇌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건강과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선도수련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This article will cover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Hongik Ingan, 'the greatest service for the benefit of humanity', and its ideal image for the future. Human beings had to strive to survive the changes in the natural environment that they encountered from the beginning. In the process, Hwanin by closely observing and taking insight into its changes had enlightened the providence and the order of nature, and cultivated his people to apply his enlightment as a wisdom of life.
During the time when the Baedal-guk was established, people were confused and did not know what to do with their lives, thus the mayhem began with hurting each other in accordance with each other's interest. During this time, Hwanwoong invented the Nokdo Gate by encouraging his people to create a language, and had the Cheonbu-kyung and Samil Shin-go be interpreted and have his people to keep the written tranlation. In addition, he supervised and taught his people 360 sectors of the human activities such as farming, life, disease, punishment, and good and evil.
During the Gojoseon era in Dangun, the teachings of Hwanguk Ohun, which had been passed down from the Hwanin era, continued into the Baedal era and the Gojoseon era. Dangun, in particular, lectured on Cheonbu-kyung and Samil reports, taught young people how to read books, archery, horse riding, etiquette, music, and kisu-ryeon, and called them "gukjarang." They tried to control their bodies and minds to achieve a "Uia Ilche." This highland line has maintained its history for more than 2,000 years. Fortunately, the spirit of Oh Sang, Yook Ye, and Hwanguk Oh Hoon, who taught Gukjorang, continued through Buyeo until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Goguryeo, they were called Jo Ui-seon, and in Silla they were called Hwarangs, and in Goryeo they were called Gukjorang. Unfortunately, this teaching was stopped by the fall of Goryeo. In the dynamic course of history, the power that saved our people at every moment of crisis without ceasing was the "Hong-ik Ingan Spirit", 'the greatest service for the benefit of humanity', and the "Ho-guk Spirit","I serve to protect my own country". HongIk-ingan is not to leave out anyone and help eachother to have every single man to feel that they are at home. This spirit, in harmony with the balance of mind and body, is the source of a healthy environment that keeps you on the edge of your body and is able to function informally. The fundamental background of this beneficial activity is ultimately dependent on the human brain. Therefore, it will be necessary to accurately understand human health and ability and to take forward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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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홍서봉의 가계와 정치적 활동

저자 : 지두환 ( Ji Doo-hwan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7-266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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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곡 홍서봉은 선조대에 태어나 임진왜란을 겪고, 광해군~인조대에는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와중에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선비의 절개를 꿋꿋이 지키며 살아간 인물이다. 당시는 선조대 사림정치가 붕당정치로 발전하였고, 인조반정으로 폐모론을 주도하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한 뒤에는 사림과 산림들이 성리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시행하여 가는 시기였다.
홍서봉은 선조 27년(1594) 23세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에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나 광해군과 북인 정권이 궁궐을 5개 지으며 재정을 탕진하고, 김직재 무옥 등 역모를 조작하여 사림들을 죽이고 몰아내며, 급기야는 폐모론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정국이 혼란해지자 이를 바로 잡고자 김류·김상헌·이후원·조속 등과 반정을 도모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윤리를 회복하려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때 화의를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이후에도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인조대의 복잡한 대내외 사건을 해결해 나가며 국왕을 적극적으로 보필 하였다. 인조 23년(1645)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세손이 계승하는 것이 상도(常道)라고 주장하였으며, 이 해에 졸하였다.
이렇듯 홍서봉은 중국의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에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한 개혁적인 사상가였으며, 이러한 노력을 후손들과 제자들이 이어받아 조선 후기 영·정조 문예부흥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Hak-Gock Hong-Seobong was born in the King SeonJo's reign and suffered Imjin War. During in the Gwanghaegun to King Injo's reign, He is the man who stood firm on the principles of Seon-bi, even in the course of a Qing invasion of Joseon during a Transition from Ming to Qing Dynasties. At that time, Sarim politics at the King SeonJo reign developed into Bung-Dang politics. Then King Injo Restoration broke out and Gwanghaegun, which had led the opinion of expelling the Queen Dowager Inmok, was abolished. After King Injo ascended to the throne, Sarim faction and Sanlim faction has implemented Benevolent Royal Government based on neo-Confucianism.
Hong-Seobong passed Imperial examination at age 23, the 27th year of King Seonjo's reign(1594), and started his official career. But Gwanghaegu and Buk-In regime wasted its fortune by building palaces, drove out the opposition forces, and led discussions the opinion of expelling the Queen Dowager Inmok. When the political situation became chaotic, Hong Seo-bong wanted to correct the situation. So he pursued a Restoration with Kim-Ryu, Kim-Sangheon, Lee-Hoowon, Jo-Sock. After King Injo Restoration, he set the country at rights and tried to restore ethics.
However, when the situation was not ready, Qing Dynasty invaded Joseon. At this time, Hong-Seobong insist reconciliation and did all he could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and stabilize the country. Thereafter, he go through prime minister and the first vice-premier of Joseon dynasty, actively assisted the king in solving complex internal and external affairs. At the 23rd year of king Injo(1645), Crown Prince Sohyeon suddenly died after returning from the Qing Dynasty. Hong-Seonbong insisted that it was proper for oldest son of the crown prince succeed him as Crown Prince, and he died this year.
Like this, Hong-Seobong was reform-minded thinker who wanted to protect the independence of Joseon, during a Transition from Ming to Qing Dynasties. His efforts were inherited by his students and descendants, which led to the revival of literature and art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J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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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담와 홍계희와 이재 황윤석의 교류

저자 : 김승대 ( Kim Seung-dae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7-30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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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와 홍계희와 이재 황윤석은 동시대인 영조대에 활동한 호남지역 출신 실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홍계희는 영조대의 괄목할 만한 균역법과 같은 현실개혁을 위해 부단히 활약했던 대표적인 경세가로 평가되며, 황윤석은 18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경(京)·향(鄕)을 뛰어넘는 통유(通儒)로 평가된다.
홍계희와 황윤석은 26세의 나이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윤석은 자신의 기록인 『이재난고』을 통해 홍계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홍계희는 영조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관료로서 균역법, 청계천 준설, 역사·지리·국어·외국어·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경세가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황윤석은 전라도 흥덕현 출신으로, 그는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문집인 『이재난고』를 통해 정치·문학·산학·예학·도학·지리학·언어학 등 여러 방면을 총망라한 당대의 귀중한 학술자료를 남긴 18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재난고』를 통해 보면 황윤석의 교유인물 중에 스승인 김원행 사문(師門)의 인물들과 영·정조 당대의 이름 있는 고관들이 확인되는데, 홍계희와의 교유도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홍계희와 황윤석은 벌열가문과 호남출신으로 학문적 공통점과 도암(陶庵) 이재(李縡) 학맥의 기반을 두고 교유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당대 호남 관련, 눈여겨 볼 유학자로는 우선 도암 이재 문인으로 목산 이기경, 남원 출신의 백수 양응수가 대표적이며, 순창 출신의 여암 신경준, 장흥 출신의 존재 위백규, 무장 출신 태평산인 강후진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담와 홍계희와 이재 황윤석은 호남출신 실학자로서 호남실학에 대한 연구도 가일층 연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At the time period of King Yeongjo in Joseon dynasty, Hong Gye-hee(1703~1771) and was a great scholar and politician as well as official. Hong Gye-hee and Hwang Yoon-suk grew up based on the Honam region. Hong Kye-hee is from Jeonju, Jeolla Province. He is regarded as one of the leading lightsellers. He was ahead of the reform of the system of taxation, military, etc. He also worked in various fields such as history, geography, Korean language, foreign language, and math.
Hwang Yun-seok is from Gochang, Jeolla Province. He is a pupil of Kim Won-haeng. It was written by Lee Jae-nan and he wrote. He left valuable academic material in various fields, including politics, literature, mathematics, geography and linguistics. A naturalist can be called.
Hong Gye-hee and Hwang Yoon-seok continued to interact. Their common ground is that they belong to the same school as they are from South Jeolla Province. belong to the school of Doam Jae- Lee Ki-kyung, Yang Eung-soo, Wi Baek-gyu and Kang Hoo-jin, who were also active in the same era, should also be examined. In the future, studies on Honam, including two people, will have to continue. In particular, research on Honam Silhak will have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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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성균관 유생들과 승려들 간의 패싸움 소고 - 『세종실록』을 중심으로 -

저자 : 장재천 ( Chang Jae-che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1-32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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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는 조선의 역사가 5백여 년이나 되는 만큼, 또한 많은 인원들이 생활하는 만큼 각종 사건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균관 사건들을 현존하는 문헌에서는 다 기록하지도 아니 하였고, 또 일관되게 같은 사건들을 『태학지』, 『승정원일기』, 『반중잡영』, 『증보문헌비고』등에서는 동일하게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조선왕조실록』에서 성균관 관련 사건들을 드문드문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것마저 모두 연구재료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일단 『세종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세종시대로 한정한 이유는 삼각산 덕방암 패싸움 사건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여서 전후사정과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터질 수밖에 없는 징후들이 그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결국 세종 24년 7월 21일에 가서 터졌는데, 사건 처리를 두고 세종과 신하들 간에 장기간 논박이 심하였다. 유생들이나 덕방암 관련 승려들이나 양쪽이 다 문제였지만 세종은 점점 사적으로 불교를 친애하다보니 은근히 승려들을 비호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성균관과 국왕을 견제하는 기관의 신하들은 오히려 유생들을 옹호하는 편이었다. 형조나 의금부는 형벌을 집행하는 기관으로서의 입장을 취하다보니 폭력행위에 주로 초점을 두고 유생들을 구금하고 재판하였다.
결국 세종은 교관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어 구금시켜서 4개월 이상이나 시간을 끌었다. 이유는 유생들이 사찰출입금지 법령을 어긴 것과 이를 사전에 단속하지 못한 교관들의 교육적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성리학적 입장의 상소와 교육적인 석방 청원에 세종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1월 30일에 가서야 모두 보석으로 석방시켰다. 이로써 왕권시대라기보다는 신권시대였고, 불교보다는 유교가 우선적 가치였으며, 승려들 보다는 성균관 유생들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The reason for this limitation was to record the details of the triangular Deokbangam defeat, and to understand the postwar situation and the whole story of the incident. Signs that had no choice but to break out began to appear before, and eventually broke out on July 21, 24, King Sejong. Both yusang and monks related to Deokbangam were a problem, but Sejong's private love for Buddhism tended to quietly defend the monks, and the officials of Sungkyunkwan and the king's restraint tended to defend yusangs. The criminal and funding departments took the position of executing punishment and detained and tried yusangs with a focus on violent acts.
Eventually, King Sejong took the instructors to blame for more than four months. The reason was that the yusangs violated the ban on temples and the educational responsibility of the instructors who failed to crack down on them was greater. However, due to the continued appeal of the doctrinal position and the petition for educational release, King Sejong was not able to hold on anymore until all of them were released on November 30th. This proved to be priesthood rather than kingship, Confucianism over priority, and Sungkyunkwan yusangs should be protected rather than mo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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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단원 김홍도 화제(畵題)의 서체와 낙관인

저자 : 손환일 ( Son Hwan-il )

발행기관 : 한국사상문화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과 문화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27-380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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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강세황에게 배워 서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림의 다양성은 그의 천재적 기질에서 발현된 것이다. 김홍도가 구사한 서체는 초서와 행서, 해서, 팔분과 전서 등이 있다. 초서와 행서는 강세황과 함께 왕희지 행서필법을 따랐다. 소자(小字) 해서도 강세황과 같은 왕희지의 소자 해서를 썼다. 그러나 대자(大字) 해서는 원나라 이부광의 액체(額體)를 따랐고, 화제에도 당나라 안진경체를 따른 점이 강세황과 다른 점이다. 전서는 이한진과 임득명을 따랐으나 글자에 회화성을 가미한 점이 이한진과 구별되고, 팔분은 유한지를 배웠다.
김홍도의 아호와 인장은 당시 나이, 개인적 상황, 주거지역 등을 엿볼 수 있다. '서호(西湖)'에서는 안산을 떠난 서울생활, '사능(士能)'에서는 청년 시절, '옹(翁)'에서는 노년, '단원(檀園)', '소단(小檀)'에서는 명나라 이유방(李流芳)의 제자임을 자처하여 화법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의 낙관인은 음각과 양각, 그리고 방인(方印, 네모인장)과 원인(圓印, 둥근인장)을 사용하였다. 주로 음각을 많이 사용하였다. <전김홍도추성부도>는 날인된 낙관인 '신홍도(臣弘道)'와 '사능(士能)'을 통하여 김홍도가 그린 그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낙관인과 관지(款識)의 서체가 생소한 그림들은 김홍도의 그림으로 보기 어려운 요건들이 있다. 낙관(落款)의 서체와 인장에 김홍도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두인의 내용에는 그의 취향과 성향이 나타나있다. 많이 사용한 두인 중 '일권석산방(一卷石山房)'은 그의 자화상, '심취호산수(心醉好山水)'는 그의 산수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낙관에는 서체와 인장에서 작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림은 유사하게 그릴 수 있으나, 글씨를 같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Kim Hong-do had a great influence on painting and calligraphy. He had learned from Kang Se-hwang, a representative painter, calligrapher of Joseon period; however, the variety of painting was from the genius of Kim Hong-do. The handwriting style of Kim was following Cursive script(Choseo), Semi-cursive script(Haengseo), Regular script(Haeseo), Palbun(a kind of Clerical script) and Seal script(Jeon-seo). Cursive script(Choseo) and Semi-cursive script(Hangseo) of Kim Hong-do followed the Semi-cursive script(Haengseo) writing style of Wang Xizhi as Kang Se-hwang. Also Kim Hong-do was following the style of small-letter-Regular-script(Haeseo) writing style of Wang Xizhi as Kang. However for the big-letter-Regular-script(Haeseo) writing style, Kim Hong-do accepted the style of Aekche(額體: writing style used in Pyeon-aek, a signboard) of Lee Bugwang of Yuan Dynasty; he used the writing style of Yan Zhenqing, a Chinese calligrapher, of Tang Dynasty, in contrast with Kang Se-hwang. For 전서, Kim followed Lee Han-jin(a calligrapher of Joseon) and Im Deuk-myeong(a painter of Joseon) in part; however, he added the pictorial feature, it was the different point from Lee Han-jin. For Palbun(a kind of Clerical script), he learned from Yu Hanji(a calligrapher of Joseon).
Through the pen name and the seal of Kim Hong-do, it is possible to guess his age, personal situation, residential area and so on. The pen name '西湖(Seo-ho)' showed 'his Seoul life, leaving Ansan area', the seal '士能(Sa-neung)' showed his youth, the pen name using '翁(Ong)' suggested his old age. Also the pen name '檀園(Dan-won)' and '小檀(So-dan)' reflected his respect to Li Liufang(Yi Yu-bang) of Ming Dynasty, thinking of himself as a disciple of Li; it showed that Kim Hong-do was influenced by the style of Li Liufang.
Kim Hong-do used various style of Signature Seal(落款印: Nakgwanin), using the technique of 'depressed(intaglio) engraving' and 'embossed(relief) carving', and with the circular shape and the square shape. Kim used the depressed(intaglio) engraving seal. The signature seal '臣弘道(Shinhongdo)' and '士能(Sa-neung)', of < Jeon Kim-Hong-do Chu-seong-bu-do(a painting by Kim Hong-do, expressing the poetry of Song Dynasty) >, had confirmed the painting as a genuine work of Kim Hong-do. On the contrary, some paintings with unfamiliar signature seal were difficult to be considered as the works of Kim Hong-do; Kim Hong-do has a significant feature of calligraphy and seal of his own. At the contents of Du-in(頭印: a seal used to beginning of the work), it is possible to guess his taste and tendency. Among the frequently used Du-in, '一卷石山房(Ilgwonseoksanbang)' meant his self-portrait, '心醉好山水(Simchwihosansu)' reflected his landscape paintings. As can be seen, Signature Seal was important to show the feature of artist through writing style and seals. Someone can draw the painting similarly, however it is hard to copy the same calligraphic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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