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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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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4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322
대구사학
140권0호(2020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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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반영된 중국계 원전(原典) 사료의 독법(讀法) - 고구려본기 유리왕 31년조 기사의 검토를 중심으로 -

저자 : 강종훈 ( Kang¸ Jong-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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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서』 왕망전(王莽傳) 등에 보이는 '고구려후(高句驪侯) 추(騶)'의 참살에 관한 중국 측 자료와 그것을 전재하면서도 우리 측 자료를 토대로 하여 '고구려후 추'를 '아장(我將) 연비(延丕)'로 대체해 놓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중국계 원전 사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한서』 왕망전을 비롯한 중국 측 자료에 보이는 시건국 4년(서기 12)의 사건, 즉 왕망이 보낸 장수 엄우(嚴尤)에게 당시 '고구려후 추'라고 불리던 고구려의 왕이 참살당한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1년조에서 『한서』 왕망전의 기사를 발췌하여 실으면서 피살당한 객체를 '고구려후 추'가 아니라 '아장 연비'로 바꾸어 놓은 것은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아장 연비'의 피살은 '고구려후 추'의 피살과는 별개로 고구려 유리왕 재위 시기에 벌어진 중국 세력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다른 사건이고, 엄우에 의해 피살당한 '고구려후 추'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로 알려진 '추모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임을 밝혔다.


In this paper, I compared a Korean article from Samguksagi(『三國史記』) with a Chinese one from Hanshu(『漢書』), both of which deal with the war between Koguryo(高句麗) and Xin(新). The former says that Yeonbi(延丕), a Koguryo's general was beheaded by Xin's general Umwoo(嚴尤) in A.D. 12. However, to our surprise, the latter, which is the original article of the former, tells us that it was the very king of Koguryo whose name was Choo(騶), not the general, that was killed by Umwoo. The conclusions I have reached are as follows;
1) The incident actually happened in A.D. 12 that Umwoo killed Choo, not Yeonbi, as appeared in Hanshu.
2) Yeonbi was killed in a war, different from the incident in A.D. 12.
3) Choo is the abbreviation of Choomo(鄒牟), who has been regarded as the founder of Koguryo, one of the three ancient kingdoms of Korea.
(Professor of the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Daegu Catholic University / kangjh@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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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含資道捴管柴將軍精舍草堂之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저자 : 김수진 ( Kim¸ S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7-6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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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含資道捴管柴將軍精舍草堂之銘」에는 당 황실의 외척인 柴哲威가 '龍朔'의 시기에 정사초당을 지었고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편에 새겨진 단편적인 정보들과 문헌 사료를 치밀하게 조합하여 대백제전에 참전한 당의 행군총관이 백제가 아닌 신라의 영역으로 언제, 어떻게, 왜 이동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먼저 용삭 연간 또 한 명의 함자도행군총관이었던 劉德敏과 시철위의 재직 시기의 선후를 따져보았을 때 유덕민은 함자도총관으로 661년 8월 고종의 칙명을 전달하러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김유신, 김인문 등 신라군과 함께 평양의 소정방 군대에게 군량을 전달하는 임무까지 수행하고 662년 2월 당으로 돌아갔다. 661년 8월 이전에는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었고 예상외로 백제부흥군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당군과 신라군이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림도총관 시철위를 함자도총관으로 변경하면서까지 고구려 방면으로의 작전을 대비할 현실적 이유가 없었다. 시철위는 유덕민의 후임으로 함자도총관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은 소정방의 평양 회군 과정에서 신라로부터 군량을 보급 받고 앞으로의 대고구려전에서도 신라와의 공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백제부흥군의 선전이 이어지자 고종은 웅진의 당군에게 신라로 들어가 사태를 관망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당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662년 7월 유인원은 선택지에 없던 백제 잔류와 증병 요청의 표문을 올렸다. 자칫 고종의 뜻을 거역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시철위와 일부 병력은 신라로 보냈다는 내용도 함께 전달하여 '王言'을 무시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을 것이다. 신라는 당 황실의 외척이라는 시철위의 신분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단 받아들인 후 웅진과 연결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면서 과거의 州治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진 감문군에 체재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문무왕도 662년 7월 동생 김인문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책봉에 대한 사은과 평양으로의 군량 수송,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에서 신라의 공적을 전달하고, 감문군에 체재하고 있는 시철위에 대한 지원까지 신라가 당에 협조한 내용들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에 고종은 김인문을 포상했고 시철위에게는 대고구려전을 대비한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면서 함자도총관을 제수하고 이를 '新羅使' 김인문에게 전달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663년 4월경, 이 신라사가 시철위에게 함자도총관에 제수한다는 칙명을 전달하자 시철위는 충성을 다짐하며 이 비를 새긴 것이었다.


In 660 the General Chái zhé wēi(柴哲威) attended war against Baekje as a marshal of the Army for Garim(加林道行軍摠管). During Lóngshuò(龍朔 年間 661~663), he moved to Gam-mun in Silla from Woongjin in Baekje and set up the commemorative stela of General Chái(柴將軍碑) which was found in Mireugam Hermitage, Gimcheon. There have been no many explanations when and how Chái zhé wēi moved to Silla and the reason why.
In March 662, Gaozong(高宗) of Tang Dynasty ordered his army in Woongjin either to move to Silla and watch the situation or to retreat to Tang Dynasty as Baekje Restoration Forces(百濟復興軍) had continued to win the battles. However, Liú rén yuàn(劉仁願), the regional military commander, decided to stay in Baekje and continue to fight while he tried to avoid misunderstanding that he disregarded the imperial edict. Consequently, Liú rén yuàn sent Chái zhé wēi and some troops to Silla in July 662.
At that time king Mun-mu dispatched his brother, Kim In-mun, as an envoy to Tang Dynasty. It seems that Silla wanted to emphasize their achievement in the battle against Baekje Restoration Forces while delivering the fact that they embraced and supported Chái zhé wēi who is the royal maternal relative. Gaozong appointed Chái zhé wēi to the marshal of the Army for Hamja(含資道摠管) in order for him to prepare for the war against Goguryeo. Gaozong made Kim In-mun convey his mind to Chái zhé wēi.
Around April 663, Kim In-mun delivered the appointment of the marshal of the Army for Hamja to Chái zhé wēi. Then Chái zhé wēi built the stela for this appointment.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okmin University / kistorys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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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영조대 영남 남인 류정원의 관계 진출과 관직 생활

저자 : 우인수 ( Woo¸ In-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5-11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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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역의 남인은 중심인물이던 이현일이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화를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왕실에 대한 죄인이라는 낙인은 이현일을 따르는 많은 영남 남인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영조 초년에 일어난 戊申亂에 영남 남인 일부가 가담한 것으로 인해 재차 타격을 받게 되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조금 넓어졌으나, 중앙 정계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확보하기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류정원이 활동한 시기는 바로 이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안동의 유력가문 중의 하나인 전주류씨 가문 출신으로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이은 김성일의 학맥에 연원을 두고 있었다. 그는 영조대에 활동한 영남남인의 대표적인 존재 중의 한 명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 류정원 개인에게 관심을 보인 연구는 없었다. 본고는 류정원을 통해 영남이라는 지방에 거주하는 크게 현달하지 않은 가문 출신의 남인이 관계 진출 과정에서 겪은 견제와 시련, 그리고 관직 생활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남인 차별, 지방 차별, 가문 차별의 삼중고 속에서 한 관료가 겪은 구체적인 모습을 살핀 것이다.
그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관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臺官의 지적에 따라 탈락하였다. 이후 재출사하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후 淸職인 홍문관 관원이 되기 위한 후보자 명단인 도당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다는 대관의 지적과 견제로 인해 좌절되기에 이르렀다.
출사 초반 두 차례의 좌절은 심리적인 위축과 더불어 관료로서 성장할 적정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도 그는 도와주는 주변인물을 만난 덕에 재기할 수 있었다. 그가 관직 생활에서 스스로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서연에 참여하여 세자를 수개월동안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이 때 그는 자신이 가진 경학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국왕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칭찬과 관심을 받았다. 그는 세 지방의 수령을 도합 4년 남짓하면서 목민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후일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 우리나라 관료로서는 가장 많은 12회나 모범 사례로 인용되었다. 마침내 당상관에 올랐지만 이미 50대 후반의 나이에 건강이 좋지 않은 때였다. 세자의 공부와 마음 다스리기를 강조한 대사간 사직소를 마지막으로 올리고 생을 마감하였다.
류정원에 대한 본 연구는 영남 남인 계열의 한 출중한 인물을 한국사학계에 소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아울러 영조대 탕평정국과 벌열정치 하에서 지방인 영남지역의 비집권세력인 남인의 처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Ryu Jeong-won was active during the time when the Namin group of Yeongnam suffered difficulties as its central figure, Lee Hyeon-il, was stigmatized as a culprit in a crime against the royal family. The Namin group of Yeongnam was also hit by a revolt of military officials in the early years of King Yeongjo's reign during this period. Ryu Jeong-won was born into the family of Jeonju Ryu, an influential family in Andong. His academic origin was in the academic genealogy of Kim Seong-il, who inherited the academic heritage of Lee Hwang. Ryu Jeong-won was politically one of the representative figures who was active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in the Namin group of Yeongnam.
There has not been any research that shows interest in Ryu in the circles of Korean historical studies. Thus, this study focuses on Ryu Jeong-one, a member of Namin, who was from a family that was not very prominent in the region of Yeongnam, and examines the checks and ordeals he went through in the process of entering the government circles and the aspects of his life in public service. The study traced the experiences of an elite government official amid the triple package of hardship: discrimination against Namin, discrimination against a local province, and discrimination against a family.
Ryu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with relatively high grades and was deployed to Seungmunwon, but his deployment was later cancelled after a high-ranking official pointed out that Ryu was from a humble family in a local province. Since that time, it took him 14 years to go into government service a second time. He was put on the Dodangrok, which was a list of candidate members for Hongmungwan, a government agency of integrity. After another high-ranking official pointed out that Ryu did not meet all the requirements; thus, Ryu faced this frustration again. His attempt at government service was disrupted two times in its early stage, and he had missed the right timing for his growth as a government official.
Ryu was, however, able to make a comeback thanks to some people around him who were willing to help him. Throughout the course of his life in public service, he kept his pride because he had participated in royal lectures and taught the crown prince for several months. This opportunity allowed him to exert his abilities in Chinese classics to his heart's content. He also distinguished himself with his remarkable abilities as a local government official, serving three areas as a Suryeong for a total of four years. Later Jeong Yak-yong cited 12 of his cases as exemplary in his Mokminsimseo, which made him a record holder among government officials in the nation. Finally, Ryu was promoted to Dangsanggwan, but he was not in good health in his late fifties. His last act before his death was to submit Daesagan Sajikso in which he emphasized that a crown prince should know how to control his mind.
The present study on Ryu Jeong-won is significant in that it introduces a remarkable man from the Namin line of Yeongnam to the circles of Korean historical studies and offers a case to shed light on the circumstances of Namin that had no power in the local province of Yeongnam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Professor,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iswoo@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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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광무양전과 방위(方位) 인식

저자 : 김소라 ( Kim¸ So-r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1-13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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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충청남도 한산군 4개 마을의 광무양안과 식민지기 토지대장, 지적도를 비교 분석하여 양안에 기록된 양전 방향과 四標의 의미, 역할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기에도 양안에는 개별 필지의 위치를 나타내는 별도의 지적도가 부기되지 않았다. 대신 매 필지마다 양전 방향과 사표를 동서남북 네 개 방위로 기록해 두었다. 분석 결과 문자로 기록된 양전 방향이 이웃한 두 개 필지간의 실제 위치관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약 30%에 달했다. 이 경우 사표 역시 비뚤어진 方位를 기준으로 작성되어, 제3자로 하여금 필지의 위치비정을 어렵게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4방위만을 활용하며 위치 정보를 텍스트로만 제시했던 것은, 실제 양안의 정보를 사용할 이들 간에는 해당 정보 만으로도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山林天澤 인근에서 남북 축 자체가 재설정되곤 했으나, 이 역시 해당 현장에서 양전 경로를 효율적으로 설계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결국, 양전 경로와 사표는 해당 정보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증빙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효과적인 양전 수행을 위한 경로 안내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indigenous sense of directions in the Chosŏn society by comparing directional records in the Kwangmu Land Registers and the colonial cadastral maps. The analysis shows that although Chosŏn had a detailed 24-directional system, only the four-cardinal-points were used for the Kwangmu land survey. The accuracy of cardinal information of the Kwangmu registers was not high, and the axis of north-south was readjusted near the natural terrains. However, this was not just a mistake, but a result of a flexible sense of directions in the society. The realism was the most important, which made records for someone who will be in the same environment with the surveyors. For them, it was no matter whether a third party can find the exact location of each land piece.
(Ph.D. Candidate, Korean History Departm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 sorakh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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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 초기 사립교육령과 독일 선교사들의 실업교육 활동

저자 : 박보영 ( Park¸ Bo-yo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7-16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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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초기 '간이하고 실용적인 지식'은 중등 이하 실업교육에 부합하는 지적 체계였다. '개념지식'을 차단하고 하층 '기술지식' 보급을 구조화한 1910년대는 결과적으로는 식민지 공업화의 기술인력 공급의 예비기간이었다. 통상 '식민지 우민화' 정책으로 호명되는 이 시기에 독일 선교사들은 실업학교인 '숭공학교'를 통해 수공업 기술인력을 양성하고 자립경제가 가능한 중산층 신자 형성을 꾀했다. 그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대중적 흡인력이 높아지기를 기대했다. 식민지 교육체제는 관공립 우선정책과 사립학교 억제정책, 종당에는 종교교육 철폐로 선교사들의 교육사업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중등 종결교육으로서 실업교육은 묵인하며 억압 수위를 조절했다. 당시 실업교육의 현황은 사회적 기대 수준에 비해 단기실무양성 확대로 사회적 불만을 무마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독일 선교사들은 고등교육을 포기하는 대신 실업교육의 내실을 기하고, 인력보강과 규모확대를 위한 설계를 갖추어나갔다. 교육 내용은 자립경제가 가능한 한 사람의 기술가이자 경영인으로 양성되도록 강도 높은 실습 위주의 도제방식이 적용되었다. 3년간의 견습과정 수료 후 제도와 원가계산, 실습제작을 완료하는 시험을 통과하면 숙련공 자격이 주어졌다. 그 어떤 구호보다 강하게 '자립'을 함축하고 있는 독일 선교사들의 도제교육은 식민지 질서 안에서 치밀한 통제대상이었던 이론교육의 범주를 빗겨나 있었다. 노동하고 땀 흘리며 행위실천으로 전이되는 장인(匠人)의 기술지식은 텍스트로 발화되지 않고, 손과 손으로 내면화 되는 '개념 지식'이며, 생을 통해 관철되는 무형의 자산이었다. 식민지 교육정책의 갖가지 억압적 요소 가운데서도 숭공학교는 꾸준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제1차대전의 여파와 1920년 원산교구 설정과 함께 주어진 새로운 선교과제는 숭공학교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실업 혹은 공업교육이 절대적으로 미진하고 하급지식에 머물던 초기 식민지기, 독일 선교사들의 자립적 수공업자 양성은 하나의 대안적 가치로서 주목할만 하다.


At the beginning of the colonial rule, the 'easy and practical knowledge' represented the intellectual system that corresponded to technical training below secondary school level. The 1910s saw the prohibition of 'conceptual knowledge' and the structuralized dissemination of the lower level 'technical knowledge'. In this sense, it was a preliminary period of technical labor supply for the colonial industrialization. During this period, commonly known as the 'colonial unenlightenment' policy, German missionaries fostered manpower for manual labor at the Soong-gong Technical School with a view to forming middle-class believers who could manage a self-reliant economy. In doing so, they hoped to increase the social influence of Catholicism and thereby render the Church more attractive to the masses. The colonial education system relied on a policy of prioritizing public schools and controlling private schools, while religious education was ultimately abolished, neutralizing the educational work of missionaries. Nonetheless, the level of repression was somewhat adjusted and technical training was still tolerated at the end of middle school. But in regard to social expectations, technical training could only amount to alleviate social discontent by expanding short-term work training. Instead of giving up on Koreans' higher education, German missionaries focused on improving the quality of technical education and worked out a plan to expand its scale and reinforce manpower. The training method consisted of an intensive, practice-oriented apprenticeship to form technicians capable of self-reliant economy. One was qualified as skilled worker after completing the 3-year apprenticeship and passing the examination that concluded the system, cost calculations and practical manufacturing. The apprenticeship training provided by the German missionaries implicitly promoted 'self-reliance' more than any slogan and deviated from theoretical education, which was tightly controlled within the colonial order. The technical knowledge of hard-working craftsmen is a type of 'conceptual knowledge' transferred through practice and internalized through hands rather than expressed through texts, as well as an intangible asset achieved through life. Amid the various elements of repression under the colonial education policy, Soong-gong School was able to maintain its name. However, with the aftermath of World War I and the new missions that came along the establishment of Wonsan Diocese in 1920 Soong-gong School was abandoned. The German missionaries' efforts to promote technical education based on industrial apprenticeship and emphasis on self-reliant craftsmanship could serve as an alternative case study when looking into this early colonial period such knowledge and industrial education remained as a very low level.
(Researcher, center of Asia study, KNU / jeanne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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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5전쟁 전후 영덕군에서의 민간인 학살

저자 : 전현수 ( Jeon¸ Hyun-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1-20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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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제4대 국회의 조사에 의하면 6.25전쟁 전후 시기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약 5,082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는데, 영덕군에서는 도내에서 가장 많은 피해가 발행하여 574명(전체 피해자의 11.3%)이 희생되었다. 2009년 필자가 이끈 연구팀의 조사 결과 제4대 국회에서 집계한 피해자 수의 약 2배에 달하는 1,093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덕군은 1읍 8면 117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15개 리를 제외한 102개 리에서 피해가 발생하였다. 절대 다수의 지역에서 주민들이 전쟁 피해를 입은 것이다.
영덕읍 같이 도시화가 진전된 지역은 피해가 적었던 반면, 산지가 많은 북부 지역에서는 피해가 컸다. 피해자의 성별은 남자가 대부분이었다. 연령대별로는 20대와 30대가 74퍼센트를 차지하였다. 피해자의 직업은 1,016명이 농업으로 나타났다. 시기적으로 전쟁 전해인 1949년과 전쟁 발발 해인 1950년에 피해가 집중되었다. 사건유형별로 보면 군경토벌로 인한 피해가 가장 컸으며, 그 다음이 보도연맹사건의 피해자였다. 피해 원인으로는 총살이 772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According to a 1960 probe by the fourth National Assembly, about 5,082 civilians were slaughtered in the Daegu-Gyeongbuk region in the period immediately preceding and following the Korean War. 574 of the victims (11.3% of the total) perished in Yeongdeok-gun, making it the most affected area in the Gyeongbuk province. Upon further investigation in 2009, my research team ascertained that the true figure of civilian casualties in Yeongdeok-gun was 1,093, approximately twice the original estimate by the National Assembly. Yeongdeok-gun is comprised of 1 eup, 8 myeons, and 117 lis.
An absolute majority of the townships were ravaged by the war, as residents were slain in 102 of the 117 lis. Within Yeongdeok-gun, urbanized pockets such as Yeongdeok-eup endured relatively little damage, but the more mountainous northern portion sustained heavy casualties. Most of those massacred were male and in their twenties or thirties; 1,016 of the victims had held agricultural occupations. Temporally, the civilian casualties were concentrated in 1949 and 1950, the year before the outbreak of the conflict and the year of. The two most prominent types of casualties were those effected by the military and police and then those related to the Gukmin Bodo Yeonmaeng incident. 772 of the victims, a plurality, were shot to death.
(Professor of History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eonhs@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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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운문사 전탑의 구조와 석조여래좌상 및 사천왕석주의 배치 연구

저자 : 김영옥 ( Kim¸ Young-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4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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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의 작압전에는 석조여래좌상 1구와 사천왕석주가 있다. 운문사 작압전의 사천왕석주 4구와 석조여래좌상은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 기록되어 있는 보양국사가 건립한 작갑사의 5층 전탑에서 유래하였다고 생각되는데, 현재 작압전과는 다른 위치에서 다른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절 안에는 목탑의 사리공을 닮은 석괴가 있어 이것이 전탑의 사리를 봉안하였던 사리공으로 생각되고 전탑 중심의 지표면이나 지하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리장치의 위쪽에는 목탑의 사천주처럼 사리장치를 보호하는 중심주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천왕석주로 생각된다. 이들 중 동과 서, 남과 북의 사천왕상이 각각 비슷한 높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등을 마주하고 밖을 향하여 사리를 외호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조여래좌상은 대좌와 광배를 두루 갖추고 있음에도 크기가 매우 작다. 대좌는 하대가 육각형인데 특이하게도 좌우로 넓고 앞뒤가 좁다. 이렇게 특이한 형태의 불상은 아마도 높이가 낮고 앞뒤가 좁은 공간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하나의 불상이 독존으로 있으나 원래는 4구의 불상이 중심에 선 사천왕상 앞에서 동 · 서 · 남 · 북의 문을 내다보는 위치에 각각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 · 서 · 남 · 북에 각각 봉안되어 있었던 석조여래좌상은 세월이 흘러 전탑이 무너지고 이건하는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건물에 하나만 남은 불상이 독존으로 모셔진 것으로 생각된다.


There are a Seated Stone Buddha and the Sacheonwang Stone Pillar in Jakapjeon of Unmunsa Temple, Cheongdo.
It is thought that the four Sacheonwang Stone Pillars and a Seated Stone Buddha in Jakapjeon of Unmunsa Temple originated from the five story brick stupa, which was established by State Priest Boyang as recorded in 'BoyangiMok' of 『SamgukYusa』and which is judged to be located in a different place from the current Jakapjeon.
There is a stone in the temple that resembles the Sari hole of the wooden stupa, and this is thought to be the Sari hole in which the Buddha's relics(Sari) of the brick stupa was enshrined and to be located on the surface or underground of the center of the brick stupa. It is assumed that there was a central column that protects the Sari device on upper side of it like the Sacheon column of the wooden stupa, and the Sacheonwang Stone Pillar is assumed to play the role. It is assumed that the Sacheonwang stone pillars of the east, west, south and north each had similar height, facing each other's backs and defending the Sari outwards. The Seated Stone Buddha is very small even though it has both pedestal and halo. The pedestal has a hexagonal base, which is unusually wide from side to side and narrow from front to rear. This unusual shape of Buddhist Statue was probably placed in a space with low height and narrow from front to rear. There is one Buddhist statue currently, but it is presumed that each of the four statues was originally enshrined in the position of looking out the gates of east, west, south, and north in front of the Sacheonwang statue which stands at the center.
It is assumed that the Seated Stone Buddha, each of which was enshrined at east, west, south and north, came to remain with a single Statue in the current building after going through the collapse and movement of brick stupa as time passed.
(Ph. D., Department of Cultural Heritage, Gyeongju University / toham-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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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고대 중국 청동기의 다층적 함의

저자 : 이성원 ( Lee¸ Sung-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5-288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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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는 청동기를 주조하면서 초기 국가 단계로 진입하였다. 초기 청동기는 석기에서 청동기라는 소재의 전환 뿐만 아니라 제사공동체에 중요한 제사용기로 활용되면서 그 신성성이 배가되었다. 청동 무기류의 사용은 전쟁에서의 폭력성을 가중시키고 집단 내부에서의 폭력성, 특히 형벌의 폭력성이 적나라해지면서 직접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장강유역에서는 전설상의 고성왕의 모습을 청동으로 제작하고 숭배했던 것 같으며 아울러 청동으로 제작된 두상을 희생물로 봉헌하였다. 고대 중국에서 청동기의 새로운 전환은 서주 이후 청동악기를 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주로 제사의식에서 활용되는 악무활동에서 청동 악기, 특히 대규모의 편종은 가장 중요한 기물이 되었으며 소위 '예악'문화의 성립이 된 것이다. 기타 고대 운남지방의 滇문화권에서는 동고와 저패기 등 자신들의 문화와 밀착된 독자적인 청동기를 제작하였으며 대체적으로 무문자 생활에 기반했던 전문화권에서는 대신 청동기에 그들의 자연과 일상 등 사실적인 문화상을 문양으로 남겼다.


In ancient China, there were several neolithic civilizations developed simultaneously near the great rivers, the Yellow River, the Long River, the Liao River, etc. But With bronzes used some kingdoms appeared near the Yellow River approximately B.C.2000, for example Xia(夏) or Shang(商) dynasty. The transition from stone ages to bronze ages has multiple implications in ancient China.
Bronze was a divine material and the core of political power and high technology, so bronze was absolutely different from stone. Bronze was the symbol of ritual and martial community in ancient China. Lots of ritual container made of bronze contained sacrifices for the purpose of communicating with gods in those ancestral rites. Kings of Shang and Zhou dynasty reinforced and sanctified his power through the ritual ceremonies using bronzes. So when those kings shared the power with lords and royal classes, it was very important to bestow bronzes.
Weapons made of bronzes strengthened violences in war and penalty. Using bronze weapons resulted in huge casualties in war and legislated a specific penalty system cutting and damaging body of criminal in direct, so called Rouxing(肉刑). Meanwhile there was another ancient civilization, Shu (蜀) near the Long River far from the Yellow River. They moulded several big bronze statues taking after sage kings who had been said to be the progenitor of Shu civilization. They were absorbed in making bronze statues.
Most dramatic variation of bronze was moulding lots of musical instruments. Music was also a core of ritual ceremony. Since the ends of Zhou dynasty Chinese moulded sets of suspended bells(編鐘). Bronze bells became the heart of the Ritual and Music(禮樂) culture in ancient China.
(Department of Histor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 luxlee6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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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종 24년(1442) 몽골-오이라트의 대조선(對朝鮮) 통교(通交) 요청과 그 전후의 세력 확대

저자 : 권용철 ( Kwon¸ Yong-cheo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9-32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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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5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정국 변화를 살펴보고 아울러 몽골의 카안 톡토부카의 역할을 부각하기 위해 조선, 명, 몽골 측의 자료를 분석했다. 조선 측의 자료는 톡토부카의 대외 확장 시도를 직접 보여주고 있고, 명의 자료에서는 톡토부카가 주로 조공을 바치는 몽골의 수장, 에센과 연합하여 변경을 괴롭히는 인물이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몽골측의 자료에서는 톡토부카가 주도한 요동, 조선으로의 팽창 시도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톡토부카와 토곤-에센의 관계를 검토하기 위해서 명, 조선 측의 기록과 함께 비교하며 살펴볼 내용들이 존재하고 있다.
세종 24년(1442)에 몽골의 '황제'가 조선에게 通交를 요청하며 접촉을 도모한 일은 시도로만 끝이 나고 더 이상의 상황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많이 받지는 못했던 사건이었다. 물론, 조선과 몽골의 관계로만 한정한다면 몽골의 접촉 시도 이후 별다른 진전이 보이지 않고 있고 소문으로 퍼져나가던 조선에 대한 몽골의 침입도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朝鮮世宗實錄』의 기록은 한때의 '해프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정국의 변동을 범주에 넣고 생각하게 되면 조선 측의 기록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몽골-오이라트의 대외 팽창에서 몽골의 카안인 톡토부카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해야 한다.
오이라트의 權臣 토곤에 의해 1433년에 카안이 된 톡토부카는 토곤의 사망 이후 에센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도 에센과 함께 몽골-오이라트의 확대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에센은 칭기스 칸의 후손이 아니었으므로 몽골 전체를 장악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톡토부카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에센은 이 점을 충분히 활용했고 兀良哈 3衛는 물론이고 여러 여진족 세력을 포섭하는 데에는 톡토부카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朝鮮世宗實錄』의 기록에서는 톡토부카가 조선과도 연계를 맺기 위해 朶顏衛와 忽剌溫 사람을 이용했다는 점과 칭기스 칸, 쿠빌라이 및 몽골-고려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언급하며 조선과의 通交를 시도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포섭 방식은 몽골, 여진 계열의 여러 민족들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일정정도 발휘했을 것이고 몽골제국의 기억 내용을 담은 칙서는 오로지 톡토부카만이 작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This article analyzed historical resources of Joseon, Ming, Mongol to examine the political changes in East Asia in the mid-15th century and to highlight the role of Mongol's Khan Toγto-Buqa[脫脫不花]. Joseon's resource directly illustrates Toγto-Buqa's attempt to expand its territory, while Ming's resource reveals that Toγto-Buqa was a person who usually pay tribute to the Ming empire. The Mongol's chronicle resource does not include detailed stories about the attempts to expand to Joseon led by Toγto-Buqa, but there are contents to compare with those of Ming and Joseon to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Toγto-Buqa and Esen[也先].
In the 24th year of Joseon King Sejong's reign(1442), the Mongol Khan sought contact with Joseon by asking for a favor, which was not very noticeable because it ended only in an attempt and there were no further changes in the situation. Of course, the record of Joseon's Veritable Annal could be seen as a “happening” at one time because little progress has been made since Mongol's attempt to contact the Joseon Dynasty. However, if we think about the changes in the East Asian political situation, we should judge that record of Joseon's Veritable Annal was not just a happening, but an important material that illustrates the role of Mongol Khan Toγto-Buqa in the expansion of Mongol-Oirat.
Toγto-Buqa, who became Khan in 1433 by Toγon[脫歡], played a certain role in the Mongol-Oirat expansion with Esen. Esen was not a descendant of Chinggis Khan, so he had some limitations in taking control of the entire Mongol, but because Toγto-Buqa did not, he fully utilized this point, so the role and legitimacy of Toγto-Buqa was greatly important. In particular, the Joseon's Veritable Annal clearly show that Toγto-Buqa used the Doyan[朶顏] and Hulawen[忽剌溫] people to connect with Joseon, and that he attempted to establish friendly relations with Joseon, referring to memories of Chinggis Khan and Khubilai. This approach would have had a certain effect on attracting various ethnic groups from Mongol and Jurchen, and only Toγto-Buqa could write an edict containing the memory of the Mongol Empire.
(Korea University / kycgand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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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차 마케도니아 전쟁(171-168년)의 책임문제 - 전통적인 마케도니아의 대외정책과 로마정치권에서의 homines novi의 대두 -

저자 : 손태창 ( Son¸ Tae-cha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25-35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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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로마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전쟁들과 비교하면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 전쟁 이후 로마인들은 대체로 다른 민족들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경향을 보여주었고 팽창주의적 정책을 강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로마 대외정책의 태도상의 변화를 발견케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마케도니아를 포함해서 코린트와 카르타고 등이 로마의 속주로 병합되는 경로에 들어섰다.
관련된 주사료인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는 다른 이유로써 이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설명을 한다. 즉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푸스 5세와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맞서 전쟁을 계획했고 실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연구들에서는 이것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다. 이 친 로마적인 사료들은 전쟁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본고는 이 전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설득력있고 사실적(factual)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존하는 사료들로부터 다시 검토하는 경우에 눈에 띄게 주목되는 것이 기원전 170년대 이후 로마 정치권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 점이다. 이들은 이른바 “호미네스 노비”(homines novi)라고 불리던 자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신인(新人)”이라고 번역이 되는 플레부스(plebus) 계층의 정치세력들이 바로 그들이다. 호미네스 노비는 아주 호전적이었고 정치적 명예를 위해 굶주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주요한 대외 전쟁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는 데에 혈안이 된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권을 놓고 아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누가 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발발에 있어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호미네스 노비가 주된 구성원이 되어 버린 기원전 170년대 후반 로마인들에게서 해답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의 문제는 전쟁의 원인으로서 이 자들의 심각한 책임을 배제시켜 버린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The 3rd Macedonian War has a different character compared to the traditional warfare with foreign lands in the history of Rome. Since then the Romans usually tended to be more aggressive against other peoples and enforced their expansionist policy. Here we find the change of Roman attitudes in foreign policy. As a result of the war several foreign territories like Macedonia, Corinth and Carthage etc. have been annexed as Roman provinces in the gradual.
The two main primary sources, Polybius and Livius, explain the cause of that war with another reason. Namely the Macedonian King Philippus V and his son Perseus planned the war against Rome and caused it. But most modern studies interpret the situation in a different view. The pro Roman sources hide the real cause of it. They are regarded as the biased historical writings. Their evidences are neither clear nor sufficient.
The author of this paper has the opinion that the more persuasive and factual evidence is needed for the explanation of the cause of the war. What is found easily out of the preserved sources, is the rise of a new power group since 170 years B.C. in the Roman politics. It was so called “homines novi”. Namely these “new men” were generally from the plebus class. They were very belligerent and hungry for political honor. Through the achievements of major foreign wars they longed for rise of their social status. Therefore they were enormously competitive for the command of the Macedonian war. And during the war they showed their brutality even in non combatant areas.
The question as to who were responsible for the outbreaking of the war must therefore be found on the side of the Romans, most of whom were the homines novi in the late 170's B.C. The problem of Polybius and Livius excluded the heavy responsibility of those people as the cause of the war.
(Korea University, Department of History / fertilec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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