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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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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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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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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35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269
대구사학
135권0호(2019년)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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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신라의 사회변동과 지방사회

저자 : 손흥호 ( Son Heung-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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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전반 신라 지방사회의 성장은 이후 신라를 멸망하게 만든 호족 세력 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지방사회에서 재지세력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했다. 『三國史記』에는 지방으로부터 서상물의 진상과 특이현상등의 보고가 김헌창 부자의 난(825)이전에는 빈번하게 기록되었지만 이후 거의 기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지방사회는 중앙정부와 더욱 이완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헌창 부자의 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방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해 오던 지방재지세력들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三國史記』 흥덕왕 3년(828) 한산주 표천현의 '速富之術'기사는 사무역의 활성화로 인한 교역을 위해 비합법적인 품목을 제조하거나 채취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때로는 직접적으로 노비 약매를 행하거나, 심하면 해적 활동을 통해서 '速富'를 이루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흥덕왕 3년(828)에 나란히 배치된 장보고의 청해진 설진 명분의 기사와 함께 서남해의 해적 소탕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興德王陵碑文」의 편린을 종합하여 해석하여 보면 청해진과 당성진 설진 등으로 해적과 도적이 퇴치된 지방에서도 규모가 커진 해상 활동에 맞추어 지방민들의 경제 활동도 더욱 왕성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방재지세력들이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지방을 지배할 수 있는 경제적 부의 축적으로 삶의 지향점을 옮긴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The first half of the 9th century, the development of Sil-La local society became the foundation of formation of powerful family which made Sil-La dynasty collapsed. And the local society forces needed economical bases to develop.
Since before 'Kim, Hunchang father and son's rebellion'(825), the reports about presents to the king and unusual movements were frequently recorded in Samguk Sagi(三國史記), but after the uprising, those were hardly ever recorded, we know that the local authorities drifted farther and farther apart from the central one.
It can be said that the 'Kim, Hunchang' father and son's rebellion(825) promoted the growth of local forces who had already dominated the local society for a long time.
Sokbujisool(速富之術)-a skill rapidly becoming a rich- of Pyochun-hyun, Hansan-Ju in the third year of King Heungdeok(828), is estimated that the local forces wanted to achieve the wealth through the production of unlawful items to accumulate wealth, sometimes for direct trading, or for piracy activities.
It is considered that the inside stories of Samguksagi in King Heungdeok(828)that tell about Sokbujisool(速富之術) and the installation reason of Chunghae Jin are commonly associated with the sweeping of pirates in the Southwest Sea.
Synthesizing the parts of the royal tomb inscription of King Gwangdeok, it is presumed that the economic activities of local people became more active since the thieves and pirates had been eradicated by being set up Cheong Hae Jin(淸海鎭) and Dang Sung Jin(唐城鎭).
This can be seen as a result of shifting the point of life as the accumulation of economic wealth that can control the localities in reality rather than seeking political ideals.
Sokbujisool(速富之術)-a skill rapidly becoming a 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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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전기 노인사설의(老人賜設儀) 설행과 정치적 의미

저자 : 김아네스 ( Kim Agnes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5-7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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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노인사설의의 정비와 의식 절차, 설행 계기와 의미에 관하여 검토하였다. 노인사설의는 국왕이 노인 등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의례를 가리킨다. 고려 초 목종대 후반 또는 현종 즉위년 무렵부터 노인에게 잔치를 베푸는 의례를 개설하였다. 문종대에 이르면 노인사설의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국왕이 궁 안에서 80세 이상의 국로와 서로·명부, 효자·순손·의부·절부, 환과고독과 독·폐질자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노인사설의는 설행 계기를 중심으로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 신왕의 즉위, 왕실 책봉, 순행 등 왕실의 경사를 맞아서 사설의를 열었다. 둘째 가뭄이나 천변 등 재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국왕이 노인 등 백성에게 은택을 내리고자 개최하였다. 셋째 국왕이 노인을 봉양하며 효도를 권장하는 덕치와 교화를 실현하는 의례로써 노인사설의를 거행하였다. 그 의식 절차를 보면 국왕이 노인과 효자 등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꽃과 술 등 예물을 하사하였다. 이 의례의 목적을 살피면 첫째 국왕이 유교적 덕치를 펴서 노인과 불우한 백성을 구휼하는 데 있었다. 둘째 국왕이 국로를 우대하여 국정의 자문을 구하고 고언을 듣는 데 있었다. 셋째 국왕이 노인을 공경하고 효도를 실천하여 백성에게 효행을 권장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노인사설의는 왕이 유교적 덕치와 교화를 실현하는 상징적 의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senior banquets in the early Goryeo and their procedures and aims to explore the significance of senior banquets. Senior Banquets were the ceremonies in which a king invited the elderly to the palace and treated them to foods and drinks. The system of banquets treating the elderly was established in early Goryeo during the last years of King Mokjong's reign or around the time King Hyeonjong ascended to the throne. Later, King Munjong revamped the senior banquets. Kings held feasts at the palace for state elders over 80 years old, elderly in lower ranking positions or no position, court ladies, filial sons and grandsons, faithful widowers and widows, and the disadvantaged. Senior banquets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groups based on their motives. First, Senior banquets were held when the nation celebrated joyous occasions such as a king's ascension to the throne, the investiture of the royal family, royal tours. Secondly, when natural calamities like drought or extraordinary natural phenomena occured, the king gracefully held a senior banquet. Thirdly, senior banquets were held as a symbolic ritual to enlighten people and to perform Confucian politics that emphasized respecting senior citizens and practicing filial piety to one's parents. The procedures of the ceremony include the king's treat to the elderly and filial sons with foods and drinks, followed by granting gifts of flowers and drinks to them. The purpose and significance of the ceremony are the following. First, the king intended to relieve elderly and the disadvantaged through his virtuous ruling. Second, the ceremony was significant as the king favored state elders and sought consultation regarding national affairs. Third, the ceremony was meaningful as the king's performance of filial duties and respect to the elderly served as a recommendation for his people. The significance of the senior banquet lies in its role as a symbolic ritual where the king performed Confucian virtues and enlighte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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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원정(曺元正)의 반란을 통해본 명종대의 재조명

저자 : 장상주 ( Jang Sang-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7-11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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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종대 재위 후반기에 일어난 조원정의 반란은 명종 후반기 정국의 큰 변수로 작용하였다. 난을 주동한 조원정·석린·이의민 등은 의종말 庚寅年의 政變에 이의방에게 협력하여 출세하였다. 특히 조원정은 이의방·정중부·경대승 등 여러 차례의 정변에도 생존하여 고위직에 등용 되었다.
정중부·기탁성·진준 등 고위 무신 세력이 사거하는 경대승 집권기에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여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권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경대승 집권기 명종도 민영모·유공권·염신약·유공권 등 翼陽府 文臣을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 세력을 양성하였다. 경대승이 사망하게 되는 명종 13년부터 이의민이 上京한 同王 14년까지 뚜렷한 무신집권자는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조원정은 정치적으로 부상하여 확고한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지는 '조원정의 得勢期'로 새롭게 파악된다. 이후 이의민이 상경한 명종 14년 무렵부터 조원정이 반란으로 제거된 동왕 17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국왕과 이의민의 측근 및 조원정의 族黨과 黨與가 공존하는 '限時的인 過渡期的 寡頭制'로 국정이 운영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여러 차례의 정변으로 정계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명종 17년에 일어난 조원정의 반란을 통해 명종대 후반기 정국을 再檢討해 보고자한다.


The myeongiongdae Jowonjeong that took place a reign of the second half of the second half of the political situation as a big variable had.
Column for the first mover Jowinjeong uijongmal is-seongnin Gyeonginnyeon work his way in the world to be my partner in political upheaval.
In particular, the transmitter and Jeong jung bu, Yi ui bang, jowon jeong, Gyeong dae seung series of political upheaval, survived was elevated to high office.
Jeong jung bu senior Gyeong dae seung to buy to the military forces- Middle and Jin joon, Gitaksseong, Jipkkwongi by deploying his own people Leading power has become an advance ICT as a pillar of conducting state affairs.
Myeongjong of this period, transmitter and the munsin of yeomsinyak, minyeongmo, yugonggun, igyangbu I positive influence his aides around getting open Yi ui min and the king at 14 years to Seoul to dongwang jowonjeong of minority rule, which both forces close to zero.
udged to be government was run. Politics to several times in this regard noted in the final announcement of political upheaval is done, Myeongjong of 17 years through rebellion of the jowonjeong myeongiongdae of trying is sparking renewed discussion about the political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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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서울 무뢰배의 도박

저자 : 송정란 ( Song Jeong-ra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1-14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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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도박의 유희를 즐겼던 사회였다. 이 시기 도박의 유행은 사회문화현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본 연구는 무뢰배를 조선후기 서울에서 도박의 유흥을 주도했던 핵심세력으로 보고 그들의 활동을 살폈다. 무뢰배의 한 부류인 왈자와 악소는 유흥과 일탈을 일삼으며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왈자의 주요핵심세력으로 하급관리를 볼 수 있는데, 특히 掖庭署 下隷와 군관들이 도박을 해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악소의 도박도 살필 수 있다. 왈자는 妓夫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도박은 자연스럽게 기방에서 열리거나 혹은 도박자금을 빌려주는 物主가 제공하는 장소에서 도박을 했다. 또한 한강변은 조선후기 무뢰배들의 주요 활동 장소였기 때문에 여기서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뢰배는 도박의 유흥을 주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도박을 통해 고리대를 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소송, 폭력, 환곡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무뢰배는 조선후기 서울에서 도박을 통해 불법적인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The late Joseon was a society in which the amusement of gambling was enjoyed by people, regardless of their status. In this period, gambling was popularized in every corner of the country, so it could be regarded as a sociocultural phenomenon. This study identified scoundrels as the core forces leading the amusement of it in Seoul during the late Joseon. Waljas(曰者) and Aksos(惡少), a class of scoundrels caused a variety of troubles, while engaging in entertainment and deviation. There were lower-level officials as the main core forces of scoundrels especially, Harye in Aekjeongseo(掖庭署 下隷)and military officers made trouble due to gambling. It is also valuable to examine Aksos' gambling. Since Waljas often became Gibus(妓夫), gambling was naturally held in Gibang(妓房) or some places provided by the bankers who lent gambling money. In addition, gambling was also opened in the Han-riverside, as it was a scoundrels' main field of action. They did not only lead the amusement of gambling, but also gain economic benefits through usury based on it. They used some methods such as lawsuit, violence and the exchange of grain, in order to the money they lend. They participated in illegal economic activities through gambling, in Seoul during the lat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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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시기 경상북도 영천군의 금호수리조합과 일본인 농업경영

저자 : 손경희 ( Son Kyoung-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9-18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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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일제시기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수리조합(이하 금호수조라 약함)과 일본인 농업경영을 살펴보았다. 금호수조는 산미증식계획 시기인 1931년 2월 설립되어 1962년까지 운영되었다. 금호수조의 몽리구역은 영천군 금호면, 청통면, 경산군 와촌면 일대로 몽리면적이 530정보였다. 금호수조 설립 주체는 영천군청과 대지주들이었다. 영천군의 대표적인 대지주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흥업주식회사 경산관리소, 정해붕 등이었다. 그들은 일제초기부터 금호강 유역의 비옥한 대구평야에 주목하였다. 당시 영천군은 경북의 대표적인 곡물생산지이자 곡물이출지였다.
금호수조 설립 측에서 내건 설립 목적은 조합 구역 내 토지의 농업상 이용을 증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제 금호수조 설립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영천군은 기존의 수리시설(제언)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으로 새로운 수리시설이 필요 없는 지역이었다. 몽리구역 내에 수원은 저수지 5개소, 보 1개소였다. 둘째, 금호수조 몽리구역의 논 비율이 98.2%로 비옥한 토지가 대부분이었다. 지목변환이 필요한 밭과 산림이 적었다. 결국 당시 금호수조 설립 목적은 영천군으로 이주한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인 대지주의 농업경영에서의 이윤 확대가 목적이었다.
영천군에는 일제 초기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흥업주식회사 경산관리소가 소작을 통한 농업경영을 하였다. 당시 영천군은 경북지역에서도 소작쟁의가 많이 일어난 곳으로 인근 대도시인 대구에 사는 지주들이 많았다. 금호수조 구역 내 지주 가운데 이주일본인, 동척, 조선흥업 경산관리소, 정해붕 등이 소유한 토지가 전체 금호수조 몽리면적의 79.6%를 차지했다.


A Study on the Geumho Irrigation Association in Yeongcheon-gun County, Gyeongsangbukdo Province and the Agricultural Manag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ooked at the Kumho Irrigation Association in Yeongcheon-gun, North Gyeongsang Provin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Japanese agricultural management. Kumho Irrigation established in February 1931 during the period of the plan to increase the number of years before its operation until 1962. The Mongri-myeon area of Geumho Irrigation was 530 information in the area of Geumho-myeon, Yeongcheon-gun, Cheongtong-myeon, and Wachon-myeon, Gyeongsan-gun. The purpos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Geumho Irrigation was to promote agricultural use of land within the confederacy zone.
However, the real purpos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Geumho Irrigation was to increase profits in farming management of large landowners who were absent from Yeongcheon County. The owners of the Kumho Irrigation were the owners of Dongyang Cheok Sik Co., Joseon Heungkuk Co., Gyeongsan Management Co., and Jeong Hae-bong of the Daegu Department. Since the early days of Japanese colonial rule, they have been engaged in agricultural management in Yeongcheon-gun, paying attention to the fertile Daegu Plain in the Geumho River basin. At that time, Yeongcheon-gun was a rural area adjacent to Daegu, a large city, and was noted for its representative grain production and grain source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Geumho Irrigation was established by the power of Yeongcheon County Office and its owner, the landowner. As a result, it was directed toward forcing local residents to sacrifice and collapse. In response, some landlords staged a campaign to revoke the approval right after the approval of the association. There were two reasons. First, it was a problem of excessive business expenses resulting from the establishment of a repair union. Geumho Irrigation was established as part of its plan to increase the production cost, but the decline in grain prices made it difficult for the company to cover taxes and annual construction costs. At that time, the "Mongli District of Geumho Irrigation" was also a "massive wilderness"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adding to the burden on residents of the massive repair unions. Second, it was due to the deceitful behavior of the Geumho Irrigation. In Geumho Irrigation, the residents were deceived and the project was scaled down to receive an agreement. In particular, the agreement of 1,300 landowners was received in a different language than the design. It also contributed to the campaign to revoke the license with coercion and deception.
Meanwhile, in the Geumho Irrigation area, Japanese and Korean landowners, who were absent from Yeongcheon County, were operating farming as tenants. Dongcheok was Youngcheon County's largest owner. At that time, Yeongcheon-gun was an area where the problem of land ownership was serious. The share of sharecroppers was second only to Gyeongju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In particular, 79.6 percent of the land owned by Koreans living in the Geumho Irrigation area was owned by the Lee Ju-Jo, Tongyang Cheok-Sik Corporation, the Gyeongsan Management Office of the Joseon Heungeop Corporation, and Jeong Hae-Bung. Yeongcheon-gun's absentee landowners were able to build the Geumho Irrigation. The absentee owners of Yeongcheon-gun tried to maximize the profits of farming by establishing the Geumho Irrigation. As a result, the peasants' struggle in the Geumho Irrigation area was intens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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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해혁명 전후 장사쇠(章士釗)의 근대국가구상

저자 : 이상구 ( 李相九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1-22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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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해혁명 전후 章士釗의 근대국가구상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청말 章士釗는 혁명파의 일원으로 혁명운동에 참가하였으나 좌절을 겪은 뒤 '求學救國'을 선택하였고,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유학시기 이미 『帝國日報』를 통해 영국식 정당정치를 국내에 소개하였으며, 이어서 『民立報』와 『獨立週報』를 통해 중국의 당면한 정치현실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정치적 주장을 이어갔다.
『帝國日報』 시기 章士釗는 영국 정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국회, 정당, 내각, 정당내각 등 개념을 소개하였다. 비록 그의 인식과 소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일반적 지식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세워지기 이전 章士釗가 근대정치체제를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선구자였음을 보여준다.
『民立報』의 주필로서 章士釗는 당면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영국식 二院制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중국의 현실에 맞는 一院制를 주장하였고, 뚜렷한 정강을 갖추지 못한 정당의 문제를 거론하며 '毁黨造黨論'을 주장하였다. 특히 毁黨造黨論은 정당들의 난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 구상이라는 점에서 章士釗의 거시적 국가구상을 보여준다.
『獨立週報』 시기 章士釗는 袁世凱의 집권으로 인한 중국의 모순된 정치상황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중화민국은 비록 內閣制를 채택하였으나, 일부 미국식 총통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내각제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約法體制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헌법의 制定과 起草 방안을 제시하였다. 章士釗의 근대국가구상은 헌법에 기반을 둔 보다 성숙한 중국의 건설이었음을 보여준다.


本文的主旨在於闡釋辛亥革命前後章士釗的近代國家構想。淸末章士釗作爲革命派一員參加了革命運動,經歷挫折以後,他選擇了“求學救國”,在英國留學期間對近代政治體制産生了深刻理解。此時期,他通過《帝國日報》介紹了英國式政黨政治,又通過《民立報》和《獨立週報》分析了中國當時的政治現實,發展了自己政治主張。
在《帝國日報》時期,章士釗主要介紹了英國政治體制的重要組成部分如國會、政黨、內閣、政黨內閣等槪念。雖然他的認識和介紹在今天看來不過是一般的常識,但他在《帝國日報》發表的文章却表明,中華民國建立以前,章士釗是最準確理解近代政治體制的先驅。
作爲《民立報》主筆,章士釗提出了多種解決當時政治問題的政治方案。他批判了英國式二院制的問題,主張適應中國現實的一院制,提出不分政綱的政黨的問題,宣揚“毁黨造黨論”。尤其是“毁黨造黨論”,對解決政黨亂立問題具有劃時代意義,顯示出章士釗宏觀的國家構想。
而在《獨立週報》時期,章士釗在袁世凱執政的背景下,努力解決中國矛盾的政治狀況。他認爲,中華民國雖然采用了內閣制,却采取一部分美國式總統制形式的問題,所以他强調內閣制的優越性。爲了克服約法體制的矛盾,他又提出憲法制定和起草的方案。因此,章士釗的近代國家構想是根基於憲法的一種更成熟的中國國家設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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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개발

저자 : 구소영 ( Ku So-yo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7-26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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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2000년부터 '서부대개발' 전략을 실시하여 지역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고 지역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서부대개발이 실시된 지 17년이 경과한 지금, 신장은 확실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철도, 항공, 고속도로 등 교통인프라의 정비와 개선은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지역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러한 신장의 발전은 전략적 지정학적 배경과 위치, 풍부한 자원 기반, 증가된 국가 지원과 보조금 및 각종 정책들, 교통 인프라의 대폭적인 개선에 따른 주변국과의 교류 확대 등에 의해 더욱 촉진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부대개발' 전략이 실시되는 동안 신장의 경제성장은 오히려 신장의 지역 간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우루무치, 카라마이, 스허쯔, 창지 등 신장 북부는 에너지자원의 개발 및 가공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확실히 더 발달되어 있다. 반면 신장 남부의 대부분의 인구는 농업 등 제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1인당 GDP, 소득 수준, 교육수준도 낮았으며 빈곤인구도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는 정부 통계와 지역 경제 격차를 나타내는 몇 가지 통계지표로 뒷받침되고 있다.
개발에 따른 신장의 번영과 이익은 신장 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공유되고 있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신장 북부의 핵심 산업도시들이나 남부 지역 가운데 1인당 GDP가 높은 지역에서는 한족이 지배적인 반면에, 신장의 경제지형에서 계속해서 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카슈가르, 호탄 등 신장 남부에는 위구르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개발이 신장의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소득 격차가 민족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다.


Now that 17 years have passed since the West Development strategy, which was carried out to relieve the problem of regional imbalances and improve the people's livelihoods in autonomous regions, the region has certainly become materially rich. The maintenance and improvement of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such as railways, aviation and highways, will closely connect the region around Urumqi. Such developments in Xinjiang are expected to be further fueled by its strategic geopolitical background and location, abundant resources, increased state support and subsidies, significant improvements in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and increased exchanges with neighboring countries.
While the West Development strategy is in progress, however, Xinjiang's economic growth is rather deepening the gap between regions in Xinjiang. The prosperity and benefits of development were not shared equally among everyone in Xinjiang. While Han ethnic groups dominate key industrial cities in the economically affluent northern Xinjiang or in areas with high per capita GDP among the southern regions, there are many Uyghurs in southern Xinjiang, including Kashgar and Hotan, which continue to rank lower in Xinjiang's economic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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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안경의 제작과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중국 문헌 자료에 나타난 유리 제작을 중심으로-

저자 : 한지선 ( Han Ji-s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5-30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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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은 복합적 기술과 지식의 산물로 다양한 물산을 병합한 결과물이지만 특히 유리 제작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은 고대부터 독자적인 유리 제작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납유리는 불투명해서 안경렌즈에 합당하지는 않았다. 송대 중국에는 광학지식과 함께 아랍의 유리제품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10세기 무렵 인도양 교류 네트워크를 장악했던 아랍은 수정과 같은 맑고 내구성 있는 유리제품의 제작과 수출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였다. 아랍이 유리 제작에서 이룬 성과는 인도 혹은 벵골 등으로 연결되는 문명권역과의 교류에서 확보된 자산이었다. 붕사의 유통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곳은 사천과 운남, 티벳 등지이지만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유리 제작 기술을 주도한 것은 아랍이었다. 아랍은 유리 제작에서 붕사를 활용하여 유리의 내구성과 투명도를 높였다. 독일어로 안경을 의미하는 브릴러(brille)라는 말은 그리스어 베릴로스(Beryllos), 아랍어 Billur(水晶) 등 녹주석의 보석 이름에서 전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랍의 유리로 알려진 玻璃(bori)나 붕사(borax) 역시 독일어 브릴러의 어원과 관계가 있었다. 파리나 왜납 등의 유리 제품들의 보급과 함께 인도양 곳곳에서는 유리 관련 공통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13세기 해양과 육상이 광범위하게 연결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상품과 정보의 에너지에 추동되고 움직이는 이 광역적 문명공간이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에 의해 출현한 '인도양 세계'이며 이 공간이 바로 안경이 제작된 요람이었다.


We have been focusing on identifying where the center of eyeglasses manufacturing technology was through bibliographical information. However, eyeglasses are results of converging complicated technologies and knowledge with diverse materials. Due to the complexity, when they are manufactured on the spot, materials to be acquired and technological limits should be considered. When they are simply copied, they reflect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can not be faithful to their original functions as they have peculiar shapes and mass.
Therefore, to identify the center of eyeglasses manufacturing, this study considered technological information relating to composition and general conditions including manufacturing of glass as a material of lens, and classified and examined glass manufacturing, development of optics, use of lens, and problems on eyeglasses manufacturing based on Chinese historical records.
China had independent culture in glass manufacturing. However, as its lead glass was opaque, it was not suitable for lens of eyeglasses. Arabia had a special technology of glass manufacturing. It was that borax can make glass have more durability.
The achievements of the Arab glass production would have been the assets gained from the interaction with civilizations linked to India or Bengal. Sichuan, Yunnan, India and Southeast Asia formed a special culture in the distribution of borax and the production of glass. Having dominated the Indian Ocean network, the Arabs were able to absorb extra information in glass making.
Arabic glass manufacturing technology at that time deserves attention in that glass that was used for eyeglasses making must have high transparency and endure usual shocks.
'Brille' that meas lens of eyeglasses or spectacles in German was evolved from 'Beryllos' in Greek, Billur in Arabic or Balungr and Beryl in Hindi. Beryllos or Beryl is a rough stone of beryllium(element number 4) and indicates variants of all colors except emerald green and aquamarine blue in beryl variants.
However, in addition to beryl, 'bori(玻璃)', which was one of the kinds of glass in medieval China, can also be a source of 'Brille'. 'bori(玻璃)' products were made of special glass with high transparency from Arabia and India. Although sodium glass had more transparency than lead glass of China, eyeglasses made of Billur which was made in India and Arabia and called pseudo-crystal in Arabia had much more strength and durability than sodium glass. It seems that glass products made in Arabia were called crystal in the East and the West and had a specially dominant position in eyeglasses 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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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기 4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아타나시우스의 세력기반의 요소들과 그의 정치전략적 면모-

저자 : 손태창 ( Son Tae-cha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3-34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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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말 로마 제국의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주교인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종교적 신념인 '니카이아 신조'를 지키기 위한 부단한 저항으로 아주 유명하였다. 그런데 본 연구에서는 이 교회성직자의 또 다른 측면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이 황제의 지지자들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압박을 극복하였고 심지어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이후에도 내내 존속하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것을 가능케 했던 것일까?
이 의문점에 실질적인 근거로서 그의 세력적 기반의 세 가지 요소들이 고려된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자체, 두 명의 황제들(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그리고 영향력이 강했던 주교들(율리우스, 리베리우스 그리고 오시우스).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콘스탄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적인 주교들에 맞서는 투쟁을 위한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그 교회와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그는 그를 대체하여 부임한 적대적인 후임자들의 실제적인 권위를 잠식시킬 수 있었고 자신이 효과적으로 복직하는 예비적인 길을 마련해 둘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 아들들 간의 라이벌관계를 이용해서 이득을 챙겼다. 즉 콘스탄티누스 2세를 설득하여 아타나시우스 자신이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다시 귀환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편지를 쓰도록 했으며 콘스탄스도 역시 그에 의해 사주되어 콘스탄티우스에게 전쟁의 위협을 불사하는 위협조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결국 아타나시우스를 도왔다. 여기에 아타나시우스는 당시의 유력한 주교들이 자기편이 되게 하는 데에도 수완이 있었다. 콘스탄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과 투쟁하기 위해 그는 로마 주교 율리우스로 하여금 로마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유도하였다. 이후 그의 후임자인 리베리우스 역시 여전히 아타나시우스의 명분을 위해 협조를 했으며 코르도바의 주교 오시우스도 아타나시우스와 공조하여 그와 함께 세르디카 공의회에서 콘스탄티우스측을 교회정치적으로 대항하였다.
위의 아타나시우스의 세력기반들을 검토해 보면 아타나시우스라는 인물이 지닌 상당한 정치적 면모가 감지된다. 그는 니카이아신조의 아주 충실한 지지자이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종교인답지 않게 현실정치에 있어서도 아주 민감한 자로 여러 사람들을 그의 명분에 적절히 이용하였던 자였다. 이른바 “정통 교리”(orthodox doctrine)를 위한 그의 장구한 투쟁은 동시에 그의 교회정치적인 전략과 계산을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즉 그가 그의 명분을 위해서 아주 정치적이면서도 전략적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정략적인 면이 교회정치사에서 좀 더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A remarkable bishop in Church History during the Later Roman Empire, Athanasius was very famous for his constant resistance for the sake of the Christian creed: namely the "Nicaean Creed". This paper, however, focuses on another aspect of this churchman. He overcame oppression from Constantius II and his supporters -Arian Christians- and survived even the emperor Constantius. What made this possible?
As practical proofs, three elements of his power base might be considered: The Church of Alexandria, Both Augustus(Constantinus II and Constans) and the influential bishops such as Julius, Liberius and Ossius. Firstly, he used the church of Alexandria as the base camp for his struggle against Constantius II and the Arian bishops. Through constant contacts with it he could even check the actual authority of his opposing successors and paved the way for his effective comeback there. He profited from the rivalry among the three sons of the late Constantinus the Great. He persuaded Constantinus II to write a supporting letter on his reinstitution while Constans attempted to intimidate Constantius II even to the point of war. Athanasius was also very clever in getting mighty bishops to his side. In order to fight against Constantius II and the Arians he led Julius the bishop of Rome to prepare for the institution of one council all over the Roman empire. Later the successor of Julius, Liberius, was still helpful to Athanasius, not to mention of the bishop of Cordova, Ossius who joined the Serdican council together with Athanasius.
We need to consider one very political aspect of the person Athanasius. He was on the one hand a very faithful supporter for the Nicaean Creed. But on the other hand he was surely a very practical political person who used several kinds of influential people for his cause. His long struggle for the orthodox doctrine is also one clear evidence that he was very shrewd and strategic in pursuing his cause. This very humane aspect, in other words, the political character of the man should never be overloo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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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차 대전 이후 독일 지멘스(Siemens AG) 기업문화 - 기술개발만이 오직 살길 -

저자 : 김건우 ( Kim Geon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41-37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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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전자기기 공학기업이었던 지멘스는 2004년 미래전략보고서를 통하여 유럽과 세계시장을 철저히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노령화에 따른 인구변화와 친환경에 대한 관심증대, 연금부담으로 인한 가처분소득의 감소, IT산업의 발전과 확대로 인한 재택근무가 늘어남에 따라서 부각되는 스마트홈, 그리고 고학력 엘리트들이 경제와 문화를 지배하며 의료관광이 증가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지멘스는 현재 2004년 미래전략보고서에 따라서 기업의 핵심 사업을 에너지, 환경, 의료분야로 재편하면서 그 외 사업들인 가전과 통신, 휴대폰 사업은 다른 기업과 합작을 하거나 기존 사업체를 매각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유명 제약업체인 바이엘의 의료진단 사업부를 인수해 핵심사업의 역량을 강화하여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더욱 더 탄탄한 기업으로 변모하였다. 새롭게 진출한 사업 이외에도 향후 지멘스는 '친환경'이라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바탕으로 기후변화, 도시화, 세계화, 인구노령화 등 세계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기업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지멘스 기업의 다양한 변화와 발전 속에서 본 논문은 2차 대전 이후, 지멘스 기업 기업문화를 밝히는 것이다. 원래 창업 초기 지멘스 기업문화는 보편적 의미에서 전기의 기술적, 과학적 사용 및 실용화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기술개발'이었다. 이러한 초기 기업문화를 바탕으로 2차 대전 후, 지멘스 기업은 먼저 바로 기초과학을 상업화 하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낸다는 사실이다. 발전기를 선두로 인공심장 박동기, 실시간 진단 초음파 기계 등의 의료기기를 최초로 개발했고, 디지털 방식의 전자교환 시스템, 컬러 액정의 유럽형 이동통신 방식과 함께 발전기 터빈과 조명분야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시작된 근로자들의 기업경영의 참여가 마침내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는 국가적 차원뿐만 아니라 지멘스 기업차원에서도 중요한 기업문화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기업 구성원간의 그 어떤 갈등과 어려움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해결점을 찾아내는 것은 서로간의 오래 동안 '신뢰'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인의식'은 기업 구성원의 책임감을 바탕으로 주인의식을 고취하여, 기업의 미래가 자신들 손에 달려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행동함으로써 구성원간의 연대와 공존으로 함께 길을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


This paper studies the business culture of Siemens after World War II. Originally, Siemens' business culture in the early days of start-ups was 'infinite technological development' based on the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use and commercialization of electricity in a universal sense. Based on this early business culture Siemens Corporation first commercialized basic science and created a new market.
After World War II, the participation of workers in corporate management, which started at the national level, has finally become a characteristic. This has also become an important business culture at Siemens' corporate level. Any conflicts and difficulties between labor and management communicate rationally with each other and find a solution in the long-standing 'trust' between them.
Finally, 'owner's awareness' promotes the responsibility of the members, thereby making a path together through solidarity and coexistence among its members by self-aware and acting on its own that the future of the company is in their h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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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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