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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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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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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34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257
대구사학
134권0호(2019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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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 왕경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저자 : 박성현 ( Park Sung-hy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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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 왕경 6부의 위치와 범위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6부의 경계를 구체적으로 추정하고, 6부 구역과 왕도 및 대성군· 상성군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다.
6부 경계의 복원은 『삼국유사』의 고려 경주 6부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 이래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된 면 경계를 참고하였다. 한기부의 경우 대체로 동해안 방면에 비정되지만, 몇몇 사료에 의하면 일찍이 경주 시내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기존 부내면과 내동면의 경계가 주목되는데, 이것은 방을 구획하는 남북 방향 직선 도로로 이루어진 것으로 양부와 한기부 및 본피부의 경계를 형성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처럼 양부와 사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 등은 시내 부근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며, 다만 모량부의 경우에는 서천 서쪽에 위치하여 경주 시내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도시로서의 왕경, 즉 왕도는 5세기 말 6세기 초부터 양부와 사량부의 경계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가지의 확대에 따라 양부의 대부분과 각 부의 일부는 도시 구역에 편입되어 里로 편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 부에는 리로 편제되지 않은 비도시 구역도 남아 있었는데, 「월성 해자 9호 목간」에 보이는 리가 아닌 지명은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왕도의 외곽, 즉 비도시 구역에는 대성군과 상성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두 군의 영역 역시 6부 구역을 고려하여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Based on the theory that the location and scope of the six districts of Silla's capital did not change much, this paper investigated the boundaries of them, and discuss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oyal city, Daeseong-gun, Sangseong-gun and them.
The restoration of the six districts of Silla's capital was based on the information about them of Goryeo's Gyeongju in Samgukyusa, and also referenced the boundaries of myeon (面) subdivision which remained constant since the mid Joseon dynasty. In the case of Hangi-bu, it was usually said in the east coast, but according to some sources, the east of Gyeongju city was also its territory from the earlier period. In this regard, attention was paid to the boundary between the former Bunae-myeon and Naedong-myeon, which is a north-south road dividing square residence districts. This road can be regarded as a eastern boundary of Yang-bu. In this way, it is presumed that Yang-bu, Saryang-bu, Bonpi-bu, Hangi-bu, and Seupbi-bu had some territories in the city. However, in the case of Moryang-bu, it would be located in the west of Seocheon and slightly deviated from the city.
It is presumed that the royal city formed from the boundary between Yang-bu and Saryang-bu in the late 5th century. As part of the expansion of the city, most of Yang-bu and parts of Saryang-bu, Bonpi-bu, Hangi-bu, and Seupbi-bu were incorporated into urban areas and organized as ri (里). However, in each district, there was also a non-urban area that was not organized as ri, which can be seen in No. 9 wooden slips from moat of Wolseong palace. On the other hand, Daeseong-gun and Sangseong-gun were established in the outskirts of the royal city, and the area seems to have been set considering the six distri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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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위덕왕대 왕제(王弟) 계(季)의 활동과 왕위 계승

저자 : 김두용 ( Kim Duy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9-84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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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泗沘時代의 정치사는 管山城 패전을 겪으면서 왕권이 동요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것은 『三國遺事』 武王條를 중요한 사료로 받아들이면서 무왕이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왕조는 기본적으로 彌勒寺 창건에 대한 연기설화라고 보아야 한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新羅의 영향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덧붙여지면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무왕은 역시 『三國史記』의 기록처럼 法王의 아들로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법왕의 아버지이자 威德王의 아우인 季(惠王)의 존재가 주목되는 것이다.
백제는 관산성에서 패전을 겪었지만, 扶餘 陵山里 寺址의 「昌王銘石造舍利龕」銘文을 통하여 위덕왕대 왕권이 聖王系 왕족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위덕왕의 同氣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계는 성왕계 왕족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계는 관산성 패전 직후인 위덕왕 2년(555)에 청병사 자격으로 倭에 파견되었다. 비록 대규모 청병에는 실패하였지만, 왜에 머물면서 정권의 유력 씨족인 蘇我氏 세력과 사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에 호위 성격의 군사집단과 귀국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후에 백제와 왜의 교섭이 20여 년간 공백기를 맞이하였지만, 한반도 정세의 변화로 위덕왕 22년(575)에 對倭 교섭이 재개되었다. 여전히 백제에게 대왜 교섭은 중요하였으며, 계의 역할과 영향력도 점차 증대되었을 것이다.
扶餘 王興寺址에서 출토된 「靑銅製舍利盒」명문은 위덕왕 24년(577)에 왕자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 건립과 사리봉안의식을 주도적으로 행하였다. 이는 죽은 왕자가 위덕왕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위덕왕은 유일한 아들이 사망하자, 성왕계 왕족의 핵심이며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해왔던 계를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덕왕대에 이루어진 왕제 계의 역할과 그의 왕위 계승은 백제말기를 새로운 왕계로 이끌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축적된 힘은 훗날 무왕과 義慈王代 왕권강화의 토대로 작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백제가 다시 한 번 중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It has been understood that Baekje was in a state of confusio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in Gwansan fortress (554 CE) because it was considered King Mu (600-641 CE) came to throne unexpectedly according to the article of King Mu, Samguk Yusa. However, the article should be viewed as a tale that explains the origin of Mireuk temple. Based on Samguk Sagi, King Mu succeeded the throne as a son of King Beop (599-600 CE) who was a son of King Hye (598-599 CE), that is Gye. Gye was a younger brother of King Wideok (554-598 CE), that is Chang.
According to King Chang's inscription on stone reliquary excavated from the temple site in Neungsan-ri, Buyeo, it can be understood that king's authority was sustained on the basis of the King Seong's royal lineage. Gye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especially in the field of the relation with Wa (Japa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in Gwansan fortress, Gye was delegated to Japan as an envoy. Although he failed to receive military assistance, he developed personal relationship with Soga family which was the government's major political party. Followed by a year, he returned back with a small group of troops as escort, that showed his political and diplomatic capability. Although the interrelation between Baekje and Japan ceased for 20 years, it resumed in 575 CE following the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at Korean peninsula. The relationship with Japan was still important with Baekje in this period, so Gye's role and influence expanded.
The inscription on bronze reliquary excavated in 'Wangheung temple site' in Buyeo has confirmed the fact that the prince of King Wideok has passed away in 577. After the death of King Wideok's only prince, the king accepted Gye as his successor.
The role of the King's Brother Gye in the king Wideok period and his succession to the throne led to a new genealogy of kings in the late Baekje Kingdom. In addition, the powers accumulated during this period later became the basis for the strengthening of the royal authority of King Mu and King Euija (641-660 CE), and furthermore, Baekje was the driving force for the revival of th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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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현행 중등 역사 교과서의 통일신라·발해 부분 서술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저자 : 강종훈 ( Kang Jong-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5-13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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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재 중·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의 내용 가운데 통일신라·발해 부분을 주 대상으로 삼아, 서술상의 문제점들을 검토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통일신라 정치사 관련 주제 네 개와 발해사 관련 주제 하나를 선택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전자에 관해서는, 신라 중대 왕실의 개창자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 중대 왕권을 '전제 왕권'으로 규정하고 국왕과 진골 귀족, 국왕과 6두품, 진골과 6두품의 상호 관계를 각각 대립, 유착, 경쟁 관계로 파악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는 점, 신라 하대 전 기간을 왕위 쟁탈전으로 점철된 '정치적 혼란'의 시기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신라 말 '호족'의 출현 시점을 진성여왕 대 농민 봉기 이전으로 소급하여 이해하는 것 또한 시대상을 오도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오랫동안 관행화된 서술 체재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학계의 논란거리 중 하나인 발해 영역을 지도상에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In this paper, I tried to examine the problems in the description concerning the history of Unified Silla and Palhae in current middle and high school textbooks, and make some suggestions to correct them. The topics mentioned here are as follows;
1) It is not proper to describe Kim Chunchu(King Muyeol of Silla) as the first king that acceded to the throne from the status of Jin-gol.
2) It should be avoided to explain that the sovereignty of the kings in the middle age of Silla was despotic.
3) It is not true that the whole period of Hadae(the late age of Silla) was a period of the political and social anarchy.
4) Hojok had not appeared before the peasant's uprisings during the reign of Queen Jinseong.
5) It is desirable to amend the stereotyped form of description about the history of Pal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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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新羅) 성덕왕대(聖德王代) 모벌군성(毛伐郡城) 축조(築造)의 배경(背景)과 목적(目的)

저자 : 야마다후미토 ( Yamada Fumit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3-16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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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伐郡城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동남부, 울산시와의 경계 지역에 축조된 長城이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모벌군성은 성덕왕 21년(722) 10월부터 축조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침입로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모벌군성의 규모는 12킬로미터였고, 축성하는 데 39,262명의 역도가 동원되었으며, 신라의 최고 관위를 소유한 인물이 축성 사업을 감독하였다.
관련 기사에는 모벌군성이 일본의 침입로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전하지만,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면 당시 신라를 침략하려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일본은 애초에 신라를 침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관련 기사에 보이는 모벌군성 축조의 목적은 축성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모벌군성이 일본의 침입로를 막을 수 있을 만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다만 축성 시기나 위치 등은 성덕왕대 신라의 집권 세력의 주체적인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모벌군성 축조 당시 신라가 일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세력이 모벌군성을 축조하는 데 일본의 침입로를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유는 신라인들이 일본을 적대적이고 신라를 침략하는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덕왕대 신라의 집권 세력은 721년 일본 조정의 신라 사신에 대한 이례적인 대응을 구실로 삼아 신라인들의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을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모벌군성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막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하겠다.
모벌군성은 특정 영역을 가시적으로 구별하는 장성이었으며,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關門으로서 기능하였다. 말하자면 모벌군성의 축조는 왕의 직할지인 수도를 가시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하겠다. 성덕왕대 신라의 집권 세력이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모벌군성을 축조하여 수도에 대한 개혁을 추지한 이유는 신문왕이 주도한 달구벌 천도 계획이 좌절된 이후 기존의 수도를 통일왕국의 수도로 발전시켜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었기 때문에 성덕왕대 신라의 집권 세력은 일본의 침입로를 막기 위함이라는 국가적인 대응이 필요한 문제를 축성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모벌군성의 축조는 일본의 불온한 동향을 계기로 추진된 왕권 강화책이었다고 판단된다.


Mobeolgun Castle is a great castle built in the border area with Ulsan city in the southeastern part of Gyeongju, North Gyeongsangbukdo. According to the literature record, Mobeolgun Castle was constructed in October 21st year of King Seongdeok, and was built to block the invasion route of Japan. In addition, although Mobeolgun Castle was recognized as a gate, it seems that the place name was attached because 臨關郡 was a place where facing the gate, which was the place where the castle was built. The size of Mobeolgun Castle was 12 kilometers, 39,262 people were mobilized for the castle, and the person who owned the highest post of Silla directed the construction project.
In the related article, the purpose of the construction that Mobeolgun Castle was built to block the invasion road of Japan is transmitted, but when we consider the situation in Japan at that time, the movement that tried to invade Silla at that time was seen at all. In other words, at that time Japan was not in a situation to invade Silla in the first place. Therefore, it seems that the aim of building the Mobeolgun Castle found in the related article was only for promoting the construction business.
It is true that Mobeolgun Castle had the function to prevent Japan's invasion route. However, the timing and location of the castle was the result of reflecting the subjective intention of Shilla's campaign power of the King Seong-deok's Era. At the time of construction of the Mobeolgun Castle, despite the fact that Silla was not exposed to the military threat from Japan, despite the fact that the enforcement forces blocked the invasion route of Japan when laying the Mobeolgun Castle The reason was that Silla recognized Japan as hostile and invasion of Silla as a heterogeneous existence. The enforcement forces of the Seong-deok's Era Silla need to evoke the perception of the Silla people to Japan on the grounds of an unusual response to the Japanese Silla Amnesty in 721, and furthermore they emphasized that they need to build Mobeolgun Castle and to stop the invasion route of Japan.
Mobeolgun Castle is a Great Wall that visibly distinguishes specific areas and also functions as a gate from the institutional aspect. Construction of Mobeolgun Castle had a primary purpose in strengthening the kingship by visibly emphasizing the capital which is the direct jurisdiction of the king. The reason why Shilla 's regime forces of the Seong-deok's Era built refilling county castles as part of measures to strengthen the kingdom and made reforms to the capital was because after the fall of Dalgubeol transition city plan led by King Sinmun, the existing capital city It was because he was devoting his efforts to develop into the capital as a unified kingdom and to build a dominance system based on the king. Since this was a policy to strengthen the kingdom at the same time, the regime power of Silla of the Seong-deok's Era raised the problem which required national correspondence to prevent the invasion route of Japan as the name of the castle. Therefore, it is judged that the creation of the Mobeolgun Castle was a measure to strengthen the kingdom promoted by the unrest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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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인들의 압축적 통사서술에 나타난 한국사 인식 - 곳체, 크노헨하우어, 옴, 로트를 중심으로 -

저자 : 박보영 ( Park Bo-yo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4-174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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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1668) 이후 서구사회에 한국이 소략하나마 역사서술의 대상으로 이런저런 문헌들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 이후 한국은 약탈적 무역시장의 잠재적 대상으로서 단독 호명되기 시작했고, 한국에 대한 정보는 탐사보고문 형식으로 간헐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런가 하면 상대적으로 한국 체류기간이 길고 집단지성의 상호작용을 거친 선교사들의 보고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40여년 동안 꾸준히 축적되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아내는 이러한 문헌들에는 간략하고 압축된 한국사 서술이 곁들여지고는 했는데 이러한 압축적 한국 통사 서술은 주로 한일관계사의 쟁점에 관련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독수호통상 직후에 쓰여진 곳체(1886)는 종래 영미권 주도 한국사 담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이며, 임나일본부설은 생략하고 임진왜란 후 일방적인 조공관계가 아닌 상호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여 종래 정보의 오류를 지적했다. 크노헨하우어(1901)는 한국이 과거 고대문명의 우세에 비해 현재적 격차를 보이는 역사적 배경에 의문을 표하며, 임진왜란 후 잔혹한 조공관계가 현재의 상업적 식민지로 연결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3.1운동 후 2차 교육령 시기인 옴(1930)은 한국의 기원을 전설상의 단군조선으로 소급하고, 임나일본부설은 시기적 불일치를 들어 오류로 지적하였고 임진왜란에서 쇄국정치의 연원을 찾았다. 로트(1936)는 한국 기원을 단군조선으로 표명하고, 위만조선을 배제했으며, 신라와 불교 중심의 문화사적 서술을 보이는 한편 한일관계사는 행간에 함축하였다. 이들이 두꺼운 연구서가 아닌 간편한 읽을거리로 제공되고, 특화된 주제의 한 부분으로 간략하게 삽입된 한국사 서술이었던 만큼 당대 서양인들에게 가장 빈번히 노출되고, 손쉽게 소비되었던 한국사의 면모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fter 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68), it was only from the opening of ports in mid-nineteenth century onwards that Korea began to appear in various documents as a subject of Western historical accounts.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German-Korea Treaty of 1883, Korea was constantly mentioned as a potential target of a fierce trade market. Information on Korea was sporadically provided in exploration reports. On the other hand, missionaries consistently produced reports throughout the forty years or so of the Japanese colonization as they stayed in Korea for relatively long and interacted with local intellectuals. These reports on Korea were accompanied by brief and condensed overviews of the history of Korea, which, however, mainly focused on issues related to Korea-Japan relations. In the wake of the German-Korea Treaty, Gottsche (1886) expressed criticisms towards a Korean history discourse driven by Anglo-Americanism. He cast light on historiographical errors by dismissing the Japanese colony of Mimana and arguing for reciprocal and equal relations between Japan and Korean after the Imjin Wars, rather than a unilateral, tributary relationship as claimed hitherto. Knochenhauer (1901) questioned the historical context wherein Korea fell behind the supremacy of ancient civilizations and recognized that the so-called tributary relationship following the Japanese Invasions was to be understood within the framework of mercantile colonialism. After March 1st Movement and the Second Education Decree, Ohm(1930) traced back the origins of Korea to the legendary Dangun Joseon Dynasty, pointed out Mimana as a historiographical error, and found the source of Korea's seclusion policy in the Imjin Wars. Roth(1936) argued for Dangun Joseon as the origin of Korea, excluded Wiman Joseon, and provided culturo-historical descriptions centered on Silla and Buddhism, leaving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hip to be read between the lines. These Korean historical narratives were inserted as a specialized subject section and were consequently rather well exposed to the Westerners of the time. As brief, reader-friendly accounts rather than exhaustive history books, they contained all the aspects of the Korean history that could be easily consumed, so to sp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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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려 삼별초의 진도 입도와 진도용장성전투 검토

저자 : 김명진 ( Kim Myeong-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9-20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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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이 몽고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개경으로 돌아가자, 삼별초는 반발하였다. 삼별초는 1270년 5월에 강화도에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며 봉기하였다. 그들은 8월에 지리적 이점 등 방어에 장점이 많은 진도 용장성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삼별초는 기세를 올리며 위력을 떨쳤다. 마침내 다음해인 1271년 5월에 '진도용장성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 글에서 벽파정 일대가 당시 섬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 보았다. 연합군은 밀물 시 벽파정이 일시적으로 섬이 되어 있을 때에 삼군을 분산하여 상륙에 성공하였다. 결국 삼별초는 대패하여 탐라(제주)로 웅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진도에서 삼별초의 패배 원인은 네 가지였다. 첫째, 삼별초의 방심이었다. 둘째, 원래 같은 고려군 출신으로서 서로의 수를 잘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고려와 몽고가 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삼별초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하였다. 셋째, 연합군의 분산 상륙작전이 삼별초에 혼선을 안겨주었다. 넷째, 연합군이 신무기인 화약을 사용한 것이 큰 효과가 있었다.


As Wonjong of Goryeo declared the cessation of war against the Mongols and returned to Gaegyeong, there was a backlash from Sambyeolcho against the decision.
In May 1270, the Sambyeolcho rose in rebellion in Ganghwado, in an attempt to continue to fight against the Mongols. In August, they made an entry into Yongjangseong in Jindo. Initially, the Sambyeolcho increased their momentum, flexing its muscles. Eventually, in May 1271, the Jindo Yongjangseong Battle was fought between the Goryeo-Mongol allied forces and the Sambyeolcho. This study elucidates a new fact that the area around Byeokpajeong was an island. The allied forces dispersed into three groups of troops when Byeokpajeong became an isolated island during high tide, which led to their successful landing at the island. In the end, the Sambyeolcho, defeated, fled to Jejudo.
There were four contributing factors to the Sambyeolcho's defeat in Jindo. One factor was unguardedness on the part of Sambyeolcho. Another factor was, not only the Goryeo government forces but also Sambyeolcho knew each other's next move since they both had served in the same Goryeo army. In addition to this, the formation of an alliance between Goryeo and the Mongols gave the Goryeo-Mongol allied forces a relative advantage over the Sambyeolcho. Third, the dispersed landing operations conducted by the allied forces caused confusion to the Sambyeolcho. Fourth, the new gunpowder weapon that the Goryeo-Mongol allied forces used proved to be eff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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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효종(孝宗)대 정국변화와 재이(災異) 논의의 활용

저자 : 하서정 ( Ha Seo-j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3-23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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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재위 : 1649~1659)은 호란의 피해를 수습하고, 국가를 재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17세기는 소빙기로 인해 자연재해가 잦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효종대 역시 자연재해의 발생이 정국의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효종대 災異 기록의 빈도를 『孝宗實錄』과 『承政院日記』를 통해 확인해보면 효종 3년과 8년에 집중되며, 6년에는 비교적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징적인 재이'보다 '현실적인 재이'가 더욱 중요해졌는데, 과학의 발달로 인해 '상징적인 재이'가 더 이상 권력을 상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재이'는 다양한 정책을 실현시키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반대로 정책을 반대하는 역할도 하였다.
효종은 인조대 후반부터 이어진 재이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을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求言敎書를 자주 내리거나, 신료들에게 응지상소를 올리도록 촉구하였으며, 직접 祈雨祭에 참여하고자 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효종대 재이 논의는 활발해졌다.
그러나 효종 5년, 金弘郁 옥사의 발발로 다소 잘 이루어졌던 재이 논의가 침체되었다. 효종의 정통성과 관계되는 이 사건은, 그것이 벌을 주어서는 안 되는 '應旨上疏'에 벌을 내렸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효종은 대신은 물론 공론을 중시하는 산림들과도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효종은 꾸준히 자신의 명분이자 大義인 北伐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벌이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고, 신료들은 이것을 분명한 명분을 통해 저지해야만했다. 그 명분 중 하나가 '재이의 발생'이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북벌을 시행할 수 없다는 함의에서 출발하였으며, 이러한 정책들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위기 즉, 재이의 발생이나 민폐가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재이 논의로 인한 북벌론의 좌절은 재이 논의를 통한 공론의 회복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King Hyo-jong (孝宗, 1649-1659) tried to recover from the damage caused by the Manchu war of 1636 of and reorganize the country. It is known that natural disasters occurred frequently in the 17th century due to the ice age. And Reign of King Hyo-jong's occurrence of natural diststers also affected various parts of the political world. When analyzing the frequency of King Hyojong's records[孝宗實錄] through the log and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承政院日記], The frequency of natural disasters`s records increased in 1652(孝宗 3) and 1657(孝宗 8), and decreased in 1655(孝宗 6). This reflects changes in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朝鮮], realistic Zaiyi(災異, the natural disasters of the traditional era) became more important than symbolic, as the development of science stopped symbolic Zaiyi from representing power. Realistic Zaiyi also influenced the implementation of various policies, but he also played a role in opposing the policy.
The incident, which relates to King Hyo-jong`s legitimacy, was a problem because the material punished a 'Eng-gi-sang-so(應旨上疏)' that should not be punished. This caused King Hyo-jong to conflict not only with the deities but also with the San-lim(山林).
In this atmosphere, King Hyo-jong consistently argued The policy`s Subjugate the North(北伐論). But it was impossible to realize that The policy`s Subjugate the North was realistically, and the subjects had to stop it for a clear reason. One of the causes was the occurrence of Zaiyi.
In Confucian society, the occurrence of Zaiyi was understood to be directly related to the depravity of the ruler, and the realistic damage of the Zaiyi was a big problem for Joseon Dynasty, which was an agrarian society. The subjects argued that policy cannot be implemented due to the occurrence of the Zaiyi, and that violent policy enforcement causes Zai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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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46년 10월 대구·영남 사건의 명명 작업과 그것의 정치성 : 사건·사태, 소요·소동, 민요·민란을 중심으로

저자 : 임종명 ( Im Chong-my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9-325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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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의 10월 대구·영남사건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본 논문은 10월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또 그 직후 이루어진 명명 문제와 함께 그것의 의미화에 유의하면서, 명명 작업과 그것의 정치성을 파악한다. 해방 직후 언어 형태의 명명을 둘러싼 경쟁은 당대 언어 의식과 관련된다.
10월 사건을 둘러싼 명명 작업에서 해방 직후 당대 무정형성 등이 반영되어 명명의 자료가 되는 관련 단어의 의미조차 분명치 않았다. 탈식민화라는 해방 직후 상황은 당대 언어의, 따라서 10월 사건 명명에 동원된 단어들의 불안정성을 낳았다.
10월 사건의 명명 작업에 있어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사건'이었다. 10월 사건의 가치중립적인 '사건' 명명은 10월 사건에 대한 의미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 우익지는 10월 사건을 '사건'이라고 명명하지만 기사 제목이나 본문의 서사를 통해 그 사건을 정치적으로 반(反)민족적인 '폭동'으로, 또는 '민중·인민 봉기·항쟁'으로 의미화하였다.
명명과 의미화 작업은 10월 사건의 '소요·소동'과 관련해서도 확인된다. '소요·소동'은 '사건'이나 '사태'(事態)와 마찬가지로 사전적 의미상 '비정치적' 언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요·소동'은 10월 사건을 명명하는 데 있어 명명자가 독자들의 의제 이탈 방지 장치를 마련해야 했고, 또 실제로 10월 사건을 '폭동' 또는 '항쟁'으로 의미화하였다.
10월 사건의 명명 작업에 있어 문제적인,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그러한 명칭으로는 '민요·민란'이 있었다. '민요·민란' 명명은 '민(民)'을 주체화하는 '민 친화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민(民)에 반(反)'하거나, 최소한 '민을 대상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민요·민란 명명은 폭동 명명과 만난다. 바로 양자가 만나는 것이 민요·민란 명명의 다른 모습이었다.


The October Incident in 1948 Taegu and Yongnam was a historical event. This article examines the contemporary competitions of Naming the Incident and its politics. The competitions were closely related to the contemporary problematics of language.
The competitions carried with themselves the problems that the words developed to name the Incident did not have clear meanings, a reflection of the post-colonial amorphousness. The post-colonial South Korea brought forth the instability of the words exploited to name the Incident.
In general, contemporary newspapers called the Incident a value-free 'incident'(사건). The naming necessitated the signification of the Incident. Thus, the newspapers signified the Incident as anti-nationalist one even though they called it as an incident.
This strategy could be witnessed also in the naming of the Incident as 'a disturbance'(소요). A disturbance was a-political naming, so it was problematic to the contemporary political newspapers. Thus, newspapers developed every means to prevent their readers' deviation from the messages newspapers encoded in the naming.
The naming of the Incident as 'a popular revolt'(민요) was problematic, too. The popular-revolt naming subjectivized the popular people, favoring them. At the same time it objectified the people, de-subjectivized them. Furthermore, there followed the meeting between popular revolt and riot which constituted an another aspect of a popular revo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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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중국의 마조신화(媽祖神話), 사실, 상징

저자 : 유채원 ( Yoo Ch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27-35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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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女神) 마조(媽祖)는 중국의 동남부 연해안에서 숭배되었던 해신(海神)이다. 마조는 송대(宋代)에 복건(福建)지역에서 해신신화(海神神話)로 시작되었으며 발전과정에서 다른 전통의 종교들과 교류하고 정치와 문화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의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마조신화는 중국 대륙과 대만 및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으며 중국인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마조의 사묘(祠廟)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인들에게 마조는 국가통합과 찬란한 문화적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조가 신격화되면서 신앙이 되고 시대에 따라 변화된 속성의 특징을 몇 가지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그녀의 신분 변화라든가 부여된 명칭과 외형 이미지 그리고 수용에 대한 차이와 양상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마조의 다양한 기능을 검토하였는데, 그 특징적인 점은 마조는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생산의 이미지를 표상했다는 것이다. 또한 경계와 소통 그리고 정화와 치유의 기능을 상징하며 재생의 이미지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마조는 신성한 힘을 통해 일상적 공간으로부터 벗어난 신비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것과 차별되는 특수한 기능을 가져야 하며 최고 권력자에 의해 성별화하는 제의를 필요로 하였다.


The goddess Mazu is a seashore that was worshipped on the southeastern coast of China. The Mazu originated in the Fujian area of Song Dynasty and developed into a representative folk belief of China, interacting with other religious traditions and receiving a combination of political and cultural influences. Today, it is widely distributed across the Chinese continent, Taiwan, and the world. Wherever the Chinese are, you can see the shrine of Mazu. For the Chinese, in particular, Mazu is regarded as a brilliant cultural symbol for national unification.
In this paper, the most famous god in the history of China mentioned several characteristics of attributes that became religious and changed over time as the Mazu became deified.
For example, it is about her change in status and the differences in name and appearance and acceptance. Based on this, the various functions of the Mazu were also considered. Its characteristic is that it symbolizes eternal life and represents an image of production. It also has an image of boundary and communication, symbolizing the function of purification and healing, and an image of regeneration. In particular, the Mazu must have a mysterious space that deviates from the everyday space through divine power, has a special function that distinguishes him from the general one, and needs an offer to be made gender by the most power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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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올리버 크롬웰 치세의 아일랜드 정복과 코나트(Connacht) 이주(transplantation) 정책

저자 : 김중락 ( Kim Joongla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59-39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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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50년대 크롬웰 정권의 아일랜드 정복과 토지정착에서 코나트로의 이주가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누가 주도했는지, 그리고 이주정책의 과정과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 것이다. 반란군의 토지몰수와 가톨릭 지주의 코나트 이주 계획은 아이어턴의 제안과 1652년 아일랜드 정주법 및 1653년 배상법으로 마련되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시행한 인물은 크롬웰이 아니라 당시 아일랜드 총독이었던 찰스 플릿우드였다. 코나트 이주는 “지옥이냐, 코나트냐”라는 표현과는 달리 크게 엄격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양보 가운데 이루어진 반쪽 정책이었다.


The aim of this article to examine how the transplantation of the Irish Catholic proprietors and those who had been in arms to Connacht was designed and carried out during the Cromwellian settlement of Land in Ireland. The famous watchword, Hell or Connaught has been used to describe the harsh policy of the Cromwellian policy of transplantation, and Oliver Cromwell has been understood as the main prosecutor of the policy, as well as the massacres of Drogheda and Wexford.
A closer look at the details of the initial design of land confiscation and the land settlement guides us into a different understanding of its design. Henry Ireton's suggestion of qualification on pardon in early 1651 was the basis for the Irish land settlement, which was later legislated into the Act for the Settling of Ireland in 1652 and the Act of Satisfaction in 1653. Although the number of people who were exempted from pardon was not small, Ireton allowed the Irish landowners to keep some part of their lands according to their position in the federate army. Cromwell's other son-in-law, Charles Fleetwood, Lord Deputy of Ireland, was most enthusiastic in the transplantation scheme. Due to the powerful drive under the leadership of Fleetwood, 44,200 names of Irish landowners and their dependents were recorded in the certificates submitted to the revenue commission of Galway by 1 May 1654.
One of the major obstacles to the transplantation scheme was Cromwell himself. Most of the protestant royalists including the Ulster Scots were exempted from either land confiscation or transplantation under the protection of Cromwell. Appointment of his son Henry Cromwell as Lord Deputy in the expense of Fleetwood illustrates his reluctance of the harsh prosecution of transplantation. The death penalty for those who failed to transplant themselves to Connacht reduced to Barbados banishment even in the most severe cases, which hardly justified the concept of Hell or Conna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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