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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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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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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41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333
대구사학
141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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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견당사(遣唐使) 어의(語義)의 재발견과 그 함의

저자 : 小宮秀陵 ( Komiya Hidetak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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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遣唐使라는 용어에 담겨진 원래적인 語義, 그리고 근현대에 투영된 古代像에서 왜곡된 부분과 그 배경을 고찰하였다. 견당사의 어의에는 협의로 사신의 대표자나 四等官으로 구성된 관인만을 가리키는 의미와, 광의로 수행원까지 포함한 전체 집단을 가리키는 의미가 있었다. 한편 동아시아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용어로 '入+지역명+使'라는 구조를 갖는 표현이 확인되고 '入唐使'의 경우 협의의 의미에 해당된다. 광의의 의미는 근대에 들어 다시 중요시되었고 문명의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 견당사의 우수성과 신라 견당사의 停滯性이라는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에서의 견당사 용어 채택은 굴절된 신라 대당외교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遣唐賣物使'와 같은 표현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시 동아시아 외교상을 깨려고 한 연구에서 나타났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견당사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때도 관심은 신라 대당외교의 특색을 찾는 데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견당사의 광의와 같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다. 견당사 용어의 사용 여부를 논의할 때에는 신라의 특성 추구라는 측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본고에서 제시한 입당사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만한 새로운 역사용어로 보이지만 자각적으로 비판적인 성찰을 하면서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original meaning of the term 'Gyondangsa(遣唐使)'- Korean envoy to Tang- and Kentoshi(遣唐使) -Japanese envoy to Tang, and the distorted part of the image of ancient history projected in modern times. In terms of Kentoshi(遣唐使), there was a meaning to refer only to the officials consisting of the representatives of the envoys or sergeants, and to the whole group including the attendants in a broad sense. On the other hand, a term commonly used in East Asian countries with a structure of '入 + area name +使' is confirmed, and 'Ipdangsa/Nyutoshi(入唐使)' is the meaning of consultation. The broader meaning of Kentoshi(遣唐使) became important again in the modern era, and based on the understanding of civilization, it influenced the evaluation of the excellence of the Japanese Kentoshi(遣唐使) and the identity of the Shilla Gyeondangsa(遣唐使).
The adoption of the term Gyeondangsa(遣唐使) in Korean history was an effort to overcome the lowered images of Shilla envoy to Tang diplomatic award. Expressions such as “Gyeondangmaemulsa(遣唐賣物使)” appeared in a study that attempted to break the diplomatic prize in East Asia at the time in terms of economics. Since the 1960s, the term Gyeondangsa(遣唐使) has been used in earnest. At this time, interest was also in finding the characteristics of Silla envoy to Tang, and in the process, it had the same meaning as that of Japanese Kentoshi(遣唐使). When discussing whether to use the terms of Gyeondangsa(遣唐使), a deep reflection on the aspect of pursuing thecharacteristics of Silla will be needed. Although it seems to be a new historical term that can be used in common in East Asian countries, it is necessary to use it with self-conscious and critical reflection.
(Lecturer(full-time), Department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Dokkyo University / komikomm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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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대·고려 초 울산지역 변동과 울주(蔚州)의 성립

저자 : 전덕재 ( Jeon¸ Deogj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77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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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울산지역 지방통치조직의 변천, 울산지역의 역할과 위상, 나말여초 울산지역 호족 朴允雄의 고려 歸附 배경과 蔚州의 성립에 대해 살핀 것이다. 신라는 530년대에 굴아화촌과 생서량촌을 郡治로 삼아 屈阿火郡, 生西良郡을 설치하고, 거기에 각기 栗浦村과 于火村을 예속시켰다. 신라는 신문왕대에 王京의 범위를 축소하고, 옛 왕경지역에 毛火郡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굴아화군을 縣으로 강등하여 율포현과 함께 모화군의 領縣으로 재편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 울산시의 태화교 아래에 위치한 絲浦가 海上에서 신라 왕경을 연결하는 주요 關門港으로 기능하였다. 6세기 중반 이후에 党項津이 중국과 교통하는 관문항으로서 새롭게 부각되고, 게다가 통일 이후에 王京에서 양산을 거쳐 김해 또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倭國으로 나아가는 사례가 증가하면서 關門으로서의 울산지역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에 대신하여 신라인들은 울산지역을 王畿地役이자, 신라 王京과 마찬가지로 佛國土로서의 위상을 지닌 곳으로 새롭게 인식하였다. 927년(경애왕 4)에 후백제가 신라 왕경을 습격하여 박씨인 경애왕을 죽이고 金傅(경순왕)를 왕위에 앉힌 상황에서 930년 정월 고창전투 이후 고려가 후백제를 압도하게 되자, 이 해 9월에 皆知邊(울산)의 朴允雄이 고려에 歸附하였다. 박윤웅이 고려에 귀부함에 따라 고려는 慶州 이남의 군 · 현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지배 영역이 경주시 일원으로 국한된 신라를 사방에서 포위 · 압박할 수 있는 유리한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에 고려 태조는 박윤웅의 공로를 인정하여 河曲縣과 虞風縣, 東津縣을 합쳐 興禮府를 설치하였다. 이후 고려는 940년(태조 23)에 興禮府를 蔚州로 개칭하고, 여기에 東安郡을 合屬시켰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nges in the local governance organizations in the Ulsan region, the role and status of it during the Three Kingdoms and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the background behind the surrender of an Ulsan Hojok Park Yunung to Goryeo and the establishment of Ulju from the Late Unified Silla Dynasty to the Early Goryeo Dynasty. In the 530s, Silla established Gulahwagun(屈阿火郡) and Saengseoryanggun(生西良郡), using Gulahwachon and Saengseoryangchon as the center places of Gun(郡), and respectively subordinated Yulpochon(栗浦村), Uhwachon(于火村) to them. Silla decreased the size of its capital during the reign of King Sinmun and established Mohwagun(毛火郡) in the former capital areas. Silla also simultaneously demoted Gulahwagun to Gulahwahyeon, and made it and Yulpohyeon the subjugated Hyeon of Mohwagun. Prior to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the Sapo (絲浦) located under the Taehwagyo Bridge in the Ulsan City served as the main gateway port(關門港) connecting the Silla Capital and the sea. After the unification, the role of the Ulsan region as a gateway decreased, as Danghangjin (党項津) newly had emerged as a gateway port for the exchange between Silla and China in the mid-sixth century, and as the number of people going to Japan by water via Yangsan from Gimhae or Geojedo had increased. Consequently, the Silla people started to recognize Ulsan region as the territory around the capital(王畿) and also as the land of Buddha(佛國土) like the capital of Silla. Therefore, in September 930, Park Yunung surrendered to Goryeo after theLater Baekje's attack to the capital of Silla which resulted in its killing of King Gyeongae whose last name was Park, and throning Kim Bu(King Gyeongsoon) in 927(the 4th year of King Gyeongae) and the Goryeo's overpowering of Later Baekje after the Battle of Gochang in January 930. Thanks to his surrender to Goryeo, Goryeo was able to secure a key military base and therefore was able to control the counties and prefectures south of Gyeongju. It created an advantageous situation for Goryeo as it could surround and pressure Silla from every direction since Silla was only controlling the Gyeongju area at that time. Therefore, the King Taejo of Goryeo merged Hagokhyeon(河曲縣), Upunghyeon (虞風縣), and Dongjinhyeon(東津縣) into Heungryeobu(興禮府) to give credit for Park Yunung's contributions. In 940, Goryeo renamed Heongryeobu to Ulju(蔚州) and also subordinated Dongangun(東安郡) to it.
(Department of History, Dankook University/ ms8794@chollian.net; dj8794@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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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사암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찰

저자 : 최정환 ( Choi¸ Jeong-hwa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9-1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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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대구지역에 남긴 문화유산으로 크게 두 가지를 둘 수 있다. 첫째 하나는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를 들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선사암(仙槎菴) 일대의 세연지(洗硯池) · 난가대(欄柯臺) · 무릉교(武陵橋) 등을 들 수 있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선사암 옛터에 1636년(인조 14)에 이 강서원이 세워졌다. 이강서원이 설립되기 이전에 정사철(鄭師哲)이 먼저 1587년(선조 20)에 선사서재(仙槎書齋)를 세웠다. 이 선사서재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어 서사원(徐思遠)이 1599년(선조 32)에 이를 다시 개축하여 강학소로 삼은 것이 선사재(宣査齋)이다. '仙槎'와 '仙査'는 발음이 같으며, 같은 의미로 둘 다 '뗏목'이라는 뜻으로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뗏목 배를 의미한다. 최치원 당시에는 선사(仙槎)하였는데, 서사원 때부터 선사(仙査)라 하였다.
최치원이 선사암(仙槎菴)과 새연지· 난가대· 무릉교 등에 머문 흔적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부읍지』, 『대구읍지』 등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양희지의 『대봉집』, 권문해의 『초간집』에는 선사암· 세연지 · 난가대에 얽힌 시가 등장한다. 이 뿐만 아니라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선사사(仙槎寺), 도석규(都錫珪)의 「서호병십곡(西湖屛十曲)」에도 선사암과 난가대에 관한 시가 등장한다. 최치원이 머물고 노닐던 선사암· 난가대 · 무릉교 · 세연지를 대상으로 시를 짓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이다. 선유도는 서사원이 장현광(張顯光), 여대로(呂大老) 등 23명을 초대하여 선사(仙査)에 완락재(玩樂齋)를 지은 기념으로 뱃놀이를 한 그림이다. 이와 같이 최치원이 머물었던 선사암 옛터에는 시와 그림 등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유명한 곳이다.
서사원(徐思遠)은 그의 문집 『낙재선생문집(樂齋先生文集』 선사(宣査)에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추억하며 세연지, 난가대에 얽힌 사실을 시로 남기고 있다. 서사원의 이러한 시는 폐허된 선사암(仙槎菴)과 잊어져 가는 최치원에 대한 기억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서사원이 세상을 떠난 후 21년 뒤인 인조 14년(1636년) 선사재(仙査齋) 자리에 이강서원(伊江書院)을 건립하였다. 인조 17년(1639년)에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서원의 면모를 완전하게 갖추게 된 것이다.
최치원이 머물었던 선사암(仙槎菴) 옛터에 세워진 이강서원은 영남학파 유교문화의 형성과 발달에 크게 기여했던 중요한 서원이다. 선사암 · 세연지 · 난가대 · 무릉교를 비롯한 이곳을 역사 문화유적지로 지정하여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In the Daegu area, there are two main cultural heritages originated in Chiwon Choi(崔致遠). The first one is the Palgak-deungru-Gi(Records)(八角燈樓記) for the Hoguk-Seong(Fortress)(護國城)[also called Geomdan-Toseong(Earthen Fortress)] in Suchang-Gun(郡 province) in the age of Silla(新羅) Dynasty, and the other is Seyeon-Ji(Pond)(洗硯池), Nanga-Dae(Pavilion)(欄柯臺), and Mureung- Kyo (Bridge)(武陵橋) in the area around the Seon-sa Hermitage(仙槎菴). Leegang Seowon(Academy)(伊江書院) was built in 1636 (14th year of the King Injo) in the prehistoric ruins where Chi-won Choi visited in the end of the Silla Dynasty. Already in 1587 (20th year of the King Seonjo), however, prior to the establishment of Leegang Seowon,Sacheol Jeong(鄭師哲)had established the Seonsa Seojae(Study-Library Room)(仙槎書齋) in the same place. This Library had been a ruin during the Imjin War, and it came to be rebuilt by Sawon Seo(徐思遠) in 1599 (32th year of the King Seonjo) turning it into Study Room calld Seonsa-Jae(仙査齋).
The words, '仙槎' and '仙査' both, pronounced the same 'seonsa', are related to the same meaning, 'raft', that is, a raft-boat on which the demi-gods ride. It had been nominated Seonsa(仙槎) in the period of Chiwon Choi, but by the days Sawon Seo lived and after, it was called 'Seonsa (仙査)'. The traces of Chiwon Choi's visit in the Seon-sa Hermitage, Saeyeon-Ji, Nanga-Dae, and Mureung-Gyo are clearly proved in 『Shinjeung Dongguk Yeoji Seu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Daegbbu Eupji(Village anthology)(大丘府邑誌)』, and 『Daegu Eupji(Village Anthology)(大丘邑誌)』. Also, in Hee-ji Yang's 『Daebong- Jip(Anthology)(大峯集)』 and Moonhae Kwon's 『Chogan-Jip(Anthology)(草澗集)』, poems referring to Seon-sa Hermitage, Seyeon-Ji, and Nanga-Dae are intraduced. Besides, poems about Seonsa Hermitage and Nanga-Dae appear in the Seon-sa Tmeple(仙槎寺) composed by Jongjik Kim(金宗直) and the Seohobyeung- Sipgok(Ten-Songs)(西湖屛十曲) by Seokgyu Do(都錫珪). Poems were composed of about Nanga-Dae, Mureung-Gyo, and Seyeon-Ji where Chiwon Choi had visited, and on the basis of which 『Geumho-Seonsa Seon-yu-do(Boat-Riding Picture)(琴湖仙査船遊圖)』 came to be drawn. This Seon-yu-do is a painting, where 23 people, including Hyeon-gwang Jang(張顯光) and Daero Yeo(呂大老), were invited by Sawon Seo to go boat-riding in commemoration of the establishment of Wanrak- Jae(Study Room)(玩樂齋). As such, Sensa Rock has been a famous place from which numerous literary works as well as paintings originated.
Sawon Seo(徐思遠) remembers Go-Un(孤雲, Nickname of Chiwon Choi), Chiwon Choi, in his writing under the title, Seon-sa(仙査) in Nakjae-Seonsen- Munjip(Anthology)(樂齋先生文集), transmitting the facts on Seyeon-Ji and Nanga-Dae as a form of poetry. These poems by Sawon Seo played a major role in spreading the memories of the ruined Seon-sa Hermitage and the forgotten Chiwon Choi to the world. In 14th year of the King Injo (1636), 21 years after the death of Sawon Seo. Leegang-Seowon was to be rebuilt on the site of a Seon-sa Jae(仙査齋), and in the 17th year of the King Injo (1639), a commemoration tablet was settled to result in a complete dignity as a Seowon(Academy)(書院).
Leegang-Seowon, built on the ruins where Choi Chiwon visited, is a significant academy which greatly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Yeongnam School of Confucian culture. This essay is intended to be exploited as a source to widely promote our history and traditional cultur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by designating these places, including Seon-sa Hermitage (仙査菴), Se-eon-Ji, Nanga-Dae, and Mureung-Gyo as formal historicalcultural properties.
(Emeritus Professor,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Chairman/President Cultural Research Institute for Chiwon Choi / jhwchoi@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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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광해군대 척신의 세력화와 상호갈등

저자 : 권은나 ( Kwon¸ Eun-n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3-168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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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서 척신(戚臣)이 국왕(國王)을 보조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 논문에서 광해군대의 척신에 주목한 이유는 명종(明宗)대의 척신정치가 몰락한 후, 다시 재등장했던 시대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이 시기는 사림세력이 명종대의 척신을 직접 제거하며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척신의 정치참여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렇기 때문에 척신이 정국을 독점하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에 선조(宣祖)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정국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척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척신은 다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즉위하였음에도 선조의 적장자(嫡長子)가 아니었고,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이 생존해 있었으며, 명(明) 황제에게 책봉(冊封)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대내외적인 상황으로 광해군 또한 자신의 척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정국을 운영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광해군의 척신 또한 자신의 미약한 정치적기반을 국왕과의 결합을 통해서 강화시켰다.
광해군의 척신인 삼창(三昌)으로 불리는 유희분(柳希奮) · 박승종(朴承宗) · 이이첨(李爾瞻)과 임취정(任就正)은 학파(學派)를 기반으로 하여 세력을 형성한 것이 아니므로 학문에 입각한 정국운영논리를 갖추지 못하였다. 척신은 정국을 운영하는 방향으로 광해군이 추구하는 왕권강화책에 발맞추었고, 이를 통해서 획득한 권력으로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척신세력 내부에서는 갈등이 발생하였고,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광해군대는 정치적인 옥사(獄事)가 다수 발생하였다. 계축옥사(癸丑獄事) 이전의 옥사들은 광해군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기 위한 옥사였다면, 신경희옥사(申景禧獄事) · 최기옥사(崔沂獄事) · 허균옥사(許筠獄事)는 척신 간의 갈등으로 이용된 옥사였다. 또한 광해군대 후반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와 같은 요직에 오랜 기간 동안 인사를 임명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척신 내부의 갈등으로 파생된 결과였다. 이렇듯 척신 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고조되었으나, 광해군의 정국운영 방식은 조율하지 못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했던 요인 중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재야언론과 유생언론이 수용되면서 공론정치(公論政治)가 활성화되어 정치참여계층이 확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계축옥사와 폐모론(廢母論)을 계기로 정국을 운영하는 주체로 척신세력이 아닌 정치세력은 거의 정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치참여계층이 확대되는 시기였지만, 오히려 정치에 참여하는 범위는 축소된 것이다. 광해군 또한 폐모론을 중지하는 등의 공론을 수렴하지 않았고, 척신세력을 계속해서 중용하였다. 결국 광해군대의 정국은 타협이나 공존은 없는 정국으로 귀결되었다. 광해군이 척신만을 중용하면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 이는 인조반정이 여타의 반발 없이 수용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It was not uncommon for Chucksin (戚臣) to assist the king and exert political influence in the Joseon Dynasty. Nevertheless, this study focused on Chucksin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to zoom in on the tendency that emerged again after the fall of the Chucksin politics of the reign of Myeongjong (明宗). During this period, Sarim (士林) were extremely wary of Chucksin taking parts in the politics as they personally removed Chucksin of Myeongjong to take control of the nation. Therefore, it was quite difficult for Chucksin to participate in politics. Thereafter, Seonjo (宣祖) began to take the lead in running the country to restore the authority lost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壬辰倭亂), which led to his appointment of his Chucksin who thereby began to gain political influence. Although enthroned, Gwanghaegun (光海君) was not a legitimate eldest son of Seonjo, with Yeongchangdaegun (永昌大君), the legitimate son, and Imhaegun (臨海君), the eldest son, alive. In addition, he was not proclaimed as heir by the Ming emperor. Due to such internal and external circumstances, Gwanghaegun chose to run the nation by actively appointing his own Chucksin. Chucksin of Gwanghaegun also strengthened their weak political base using union with the king.
Yoo Hee-bun (柳希奮), Park Seung-jong (朴承宗), Lee Yi-cheom (李爾瞻), and Lim Chwi-jeong (任就正), also known as Samchang (三昌) meaning Chucksin of Gwanghaegun, were not able to come up with a logic of political administration based on academics, as their influence had not been built on anyschool of thought. Chucksin chose to keep in step with the measures to strengthen the kingship sought by Gwanghaegun as a means of running the nation and focused on gaining personal interest as a result of power acquired accordingly. Amidst such a situation, a conflict arose within Chucksin, which escalated to a sharp confrontation over control of political influence.
Oksa (獄事) became frequent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While Oksa prior to the Oksa of Gyechuk (癸丑獄事) were made to reinforce the kingship of Gwanghaegun, Oksa of Shin Gyeong-hee (申景禧獄事), Choi Ki-ok (崔沂獄事), and Heo Gyun (許筠獄事) were used in conflicts between Chucksin. In addition, appointments of Yijopanseo (吏曹判書) and Byeongjopanseo (兵曹判書) was not made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Gwanghaegun era for a long time because of the conflict within Chucksin. which was a result of internal conflict. As such, the conflict between Chucksin escalated as time went by. However, Gwanghaegun was unable to make adjustments in the way he ran the country, which came to contribute to Injobanjeong (仁祖反正).
Furthermore, this period is understood to have expanded the class participating in politics due to active Kongron politics (公論政治) as a result of shadow press and press activities by students of Confucianism. However, because of the Oksa of Gyechuk (癸丑獄事) and controversy over disposal of Queen Mother Inmok (廢母論), the political forces other than Chucksin rarely came forward to participate in political affairs. Although the class participating in politics expanded, the range of participation itself reduced. Gwanghaegun did not accept public opinions such as putting a stop to the controversy over disposal of Queen Mother Inmok, and continued to use his Chucksin. Eventually, the government of Gwanghaegun resulted in a political state with no compromise or coexistence. Gwanghaegun, while continuing to use his Chucksin, did not solve problems that came with his decision, which triggered Injobanjeong (仁祖反正) without resistance.
(Kyoungpook National University / eus2e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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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영조의 국정운영과 문화

저자 : 정재훈 ( Jung¸ Jae-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9-19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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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서도 18세기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에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에 이르는 국왕이 재위하면서 조선의 문화를 절정으로 이끌었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18세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52년 동안 임금으로 있으면서 절대적으로 많은 업적을 만들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통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학문과 문화, 예술의 여러 방면에서 이른바 '조선왕조의 중흥'혹은 '문예부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꽃피우는 일까지 감당하였던 국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적인 방면에서 영조는 사림 또는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공(公)에 대한 주도권을 국왕이 확보하여 국가의 공공성을 높이려고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왕권강화의 형태였지만 국가의 제도와 체제에서 다양한 방면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주례』에 대한 주목, 어진(御眞)의 활용, 『속오례의』, 『속대전』, 『대훈』등의 편찬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문화는 탕평책의 일방적인 시행이 아니라 사대부의 의리를 주장하였던 반(反)탕평파와의 긴장 속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국가 또는 왕과 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이것은 민의 안정과 성장, 서민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영조대에 만들어진 분원의 백자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로 대표되는 산수화 등은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영조가 새롭게 조선의 체제와 문화를 재정비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In the Joseon Dynasty, the 18th century is regarded as a period when King Sukjong (r. 1674-1720) to King Jeongjo (r. 1776-1800) reigned, leading to the climax of Joseon's culture. Among them, King Yeongjo (r. 1724-1776) made an absolute number of achievements during his 52 years as king, which is half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political stability through Tangpyeong policy, King Yeongjo was regarded as a king who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o-called revival of the Joseon Dynasty or the revival of culture and arts in various fields, including academic, cultural, and artistic aspects.
In terms of politics, King Yeongjo sought to enhance the public character of the nation by securing the king's initiative in public affairs, which had been centered on his own people or his own people. On the surface, it was a form of strengthening royal authority, but various aspects of readjustment were carried out in the national system and system. Examples include the attention to "Ju-rye," the utilization of eo-jin, and the compilation of "Sok O-rye(續五禮儀)", "Sokdaejeon(續大典)" and "Dae-hun(大訓)" This culture was created not in the unilateral implementation of the Tangpyeong policy but in the tension with the anti-Tangpyeong faction, which insisted on the loyalty of the nobleman.
In addition, the Act was implemented with the intention of closely connecting the state or the king with the people, which influenced the stability and growth of the people and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e of the common people. The white porcelain of the branch made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the landscape painting represented by the true landscape of Jeongseon, Gyeomjae and Jeongseon, were the result of King Yeongjo's new re-organization of Joseon's system and cultur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insojung@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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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후기 역병(疫病)에 대한 정부의 대응 - 정조(正祖) 시기의 특징을 중심으로 -

저자 : 이기봉 ( Lee¸ Ki-b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3-22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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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도 전염병의 발생은 큰 사회 문제가 되듯, 전근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 재난에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으며, 한성 등 도시의 성장도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인구의 규모를 위협할 수 있는 역병과 같은 전염병에 대하여 조선 정부는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본 논문에서는 조선후기에 역병에 대하여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역병에 대한 조선후기 정부의 대응을 여제의 시행, 의료적 구제, 휼전의 시행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전염병치료와 구제에 모범을 보인 왕이 정조이다. 정조는 역병을 극복하기 위한 제사의 축문을 직접 적기도 하였고, 조선시기 왕이 편찬한 유일한 의서인 『수민묘전』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진역구료절목』을 간행하여 역병이 발생하였을 때의 응급구료시스템을 구체적으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역병과 흉년의 발생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자휼전칙』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구호에 필요한 거의 모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망라하였다.


The epidemic outbreak in the modern society is a big social problem. It was the same in the premodern society. And always it got attention that how the government responsed at the national disasters. Especially in the late Joseon the population increased greatly and the urban growth like as Seoul accelerated. At this time, the Joseon government was sensitive to the yeogbyeong(疫病, epidemic disease) because it could threaten population scale. Based on these concerns, in this paper I researched that how the government responsed at the national disasters like as yeogbyeong in the late Joseon. For this, I divided and organized the government responses as in the enforcement of rite, medical relief and the enforcement of hyupjeon(恤典).
And the king who set an example in epidemic treatment and relief was Jeongjo. To overcome the yeogbyeong, he wrote prayers for the rite. He compiled the 『Suminmyojeon(壽民妙詮)』, which was the only medical book that the king of the Joseon compiled. And he wanted to build up the Emergency Care System by the publication of the 『Jinyeokguryojeolmok(疹疫捄療節目)』. Also he published the 『Jahyuljeonchik(字恤典則)』, which was compiled for the relief of abandoned children in the period of yeogbyeong and bad year. It covered specifically all contents for relief, so we can make an assessment that it was very advanced law which was enacted in the 18th century.
(Pusan National University / runrun4d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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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월혁명기 대구지역 대학 학생운동의 양상과 성격

저자 : 허종 ( Heo¸ J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7-26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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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기에 대구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아성이었고, 그 중심에 대학생이 있었다. 대학생은 4월 19일 시위를 시작으로 학생운동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학생들은 학생 자치와 학원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학원민주화운동과 4월혁명 정신의 보급과 완수라는 취지로 선거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벌였다. 이때까지 대구의 학생운동은 국적 흐름과 일치했을 뿐 두드러진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대구의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을 계기로 두각을 나타냈다.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가 분단에서 비롯되었으며, 후진성 극복과 자립 경제의 달성을 위해서는 통일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전국에서 음으로 학교 단위의 통일운동조직을 결성했으며, 혁신세력이 주도하는 일운동에 참여하였다. 학생운동은 신생활운동,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차이로 보수적 · 개량적 성격과 진보적 성격의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학생들은 일본의 경제 침략과 제2의 식민지화를 우려하면서 일본경제사절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또한 한국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한미경제협정의 체결을 반대하며 평등한 내용의 협정을 촉구하였다. 어 장면 정권이 대중운동과 통일운동을 막기 위해 추진하는 반공법과집시법의 제정을 저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연합조직을 결성하여 전국에서 처음으로 투쟁을 시작했고, 다른 지역 학생과 연대투쟁을 이며 투쟁의 전국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등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후 통일운동에 집중하여 남북학생회담추동과 회담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 시기 학생들은 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으며, 이는 박정희 정권기에 전개된 민족민주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During the April Revolution, Daegu was the heart of a progressive social movement, and college students were at the center of it. College students emerged as the main body of the student movement starting with the demonstration on April 19th. After the fall of Syngman Rhee's regime, a school democratization movement was launched to realize student autonomy activities and autonomy of academy, and to eliminate undemocratic school management. Subsequently, in April, campaigning for election enlightenment and new life was held with the aim of spreading and fulfilling the spirit of the revolution. Until then, the student movement in Daegu was consistent with the nationwide trend, but was not outstanding.
Daegu's student movement stood out with the unification movement. Students recognized that various problems in Korean society originated from division and that unification should be premised on overcoming backwardness and achieving an independent economy. It was the first in Korea to form a school-level unification movement, and participated in the unification movement led by progressive forces. With the unification movement as an opportunity, the student movement was differentiated as it was confronted with the powers of the self-governing student council, which took on a pro-government character and placed importance on non-political activities.
The students fought against the entry of the Japanese economic delegation, fearing the Japanese economic aggression and the second colonization. It also opposed the conclusion of the Korea-US economic agreement that violates Korea's independence and urged an agreement with equal content. Subsequently, the regime fought against the enactment of the anti-communist law and the Law on Assembly and Demonstration, which were promoted to prevent mass movements and unification movements. The students formed a coalition organization and started the struggle for the first time in the country, and they engaged in a solidarity struggle with students from other regions and tried to bring out the nationalization of the struggle. Afterwards, they focused on the unification movement and actively carried out activities to promote the inter-Korean student talks and to realize the talks. During this period, students worked at the center of a progressive social movement to solve problems in Korean society, such as democracy, human rights, and reunification, and this became the foundation of the national democracy movement developed during the Park Chung-hee regim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hjong@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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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세기 오스만제국의 수피즘과 에블리야 첼레비의 『여행기』

저자 : 김영화 ( Kim¸ Young-hw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1-29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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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세기 오스만제국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에블리야 첼레비(EvliyaÇelebi, 1611-1683?)와 그의 작품을 다룬다. 즉 『여행기』(Seyahatname)를 17세기 오스만제국의 수피(Sufi) 문화를 반영하는 이른바 '데르비시(derviş) 문학'의 맥락 속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상정하고, 지금까지 이 작품의 부차적 요소로 간주되어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데르비시, 꿈, 지야레트(ziyaret)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여 작가가 어떤 이들을 독자로 상정했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지, 나아가 이작품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했는지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작품의 또 다른 측면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에블리야 첼레비는 『여행기』에 일종의 자전적 성인전기의 성격을 부여했다. 스스로를 데르비시, 즉 수피로서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구도자로 칭했던 그는 이 작품에 50여 년 간 지속된 여행가로서의 삶 속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영적 깨달음의 순간과 그러한 것을 통해 자신이 구도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자 했다. 요컨대 이러한 일화들, 그리고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순간 꾸었던 꿈들, 그리고 오스만제국 전역에 분포한 성소와 그에 얽힌 전승에 관한 이야기는 여행가이자 한 사람의 데르비시로서 자신이 세상을 방랑하며 직접 보고 들은 것, 그리고 또 겪은 것을 기록하여 후손들이 영지(靈知)를 얻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의도를 표방한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기록이자 이 작품에 일종의 영적 지침서의 성격을 부여하는 요소였다.


This study examines the Sufism in Evliya Çelebi's Seyahatname, considered as a Sufi literature in the 17th century Ottoman Empire. Especially, it focuses on the concepts of dervish, dreams, and ziyaret. In Seyahatname, he wrote the personal anecdotes, the dreams he had in the turning points in his life, and the sanctuaries and their traditions in all parts of the empire. These were composed under his careful and systemic scheme. And these took a certain part of his all 10 volumes, and not a minor but very important component of them.
Evliya represented himself as a dervish, a seeker after truth. In Seyahatname, he interspersed his own experiences of the spiritual enlightenment and growth on the long journey for almost 50 years. In short, his writing, as a Sufi literature, is very characteristic of autohagiography. Namely, it has an aspect of spiritual guidebook, reflecting the intention of assisting his descendants who would be in search of a sacred wisdom in the world.
(Pusan National University / coffeemonste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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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국사 게이미피케이션을 위한 서양사 전략 게임 분석

저자 : 배은숙 ( Bae¸ Eun-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9-33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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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서양사 전략 게임을 분석하여 궁극적으로 한국사 전략 게임의 지향점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연구 대상은 대중성과 역사성을 골고루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토탈워: 로마2>와 <문명5>이다. 이들 게임은 전쟁 순서를 게임의 규칙에 내재해 시대적 사실성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주면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편제 변화나 공성전의 발전은 단순한 설명식 전개 방식이 아니라 등급 향상, 즉 플레이어가 획득해야 하는 항목으로 각색되었다. 전술적 측면에서 전투 대형 전개나 병력 투입과 철수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있다.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구사하는 전술들이 대부분 고대 전투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전술이므로 전투 방식의 역사적 사실성은 갖춰져 있다.
한국사 게이미피케이션을 위한 제언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식 전개가 불확실성의 감소로 대중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역사적 사실성이 내포되면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설명식의 사건 전개나 무구나 인물 같은 세부적인 사실 묘사보다는 플레이어에게 재량권을 부여하되 역사적 사건과 변천 과정을 알도록 규칙을 내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플레이의 불확실성, 도전과 위기의식, 성취감을 불어넣으면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게임 규칙을 만드는 일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strategy games of Western history and ultimately seek the direction of Korean history games. The subjects of the study are < Total War: Rome 2 > and < Civilization 5 > which are considered to be both popular and historical. In terms of the realism of the times, these games tended to naturally unravel the order of the wars by embedding it into the rules of the game. The players were given a choice and not allowed to escape the limitations of the times. The variation in the compilation or the development of the siege warfare has been adapted into a rating improvement, that is, an advanced form that the player can acquire, rather than a simple explanatory deployment method. On the tactical side, it is up to the player to decide when to deploy a combat deployment or to deploy and withdraw troops. Since most of the tactics the player uses freely are those that were actually used in ancient battles, they have historical realism in the style of combat.
If historical realism is included after thorough examination, the games can instill a correct sense of history into the player. But it is important to give players discretion, and at the same time embedding rules to know historical events and the process of transition. We should consider creating game rules that do not go beyond the limits of the times while instilling uncertainty in play, a sense of challenge and crisis, and a sense of accomplishment.
(Professor of Keimyung University / jejs@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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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문헌과 고고 자료로 그려낸 신라 왕경 - 이동주, 『신라 왕경 형성과정 연구』 (경인문화사, 2019) -

저자 : 서지영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1-338 (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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