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update

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 : 대구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5-9039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36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284
대구사학
136권0호(2019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초창기 우리 학계의 동향과 나의 연구생활 그리고 대구사학회

저자 : 이병휴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1 (1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2다시 도약하는 대구사학회의 모습을 그려보며

저자 : 노중국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20 (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3대구사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간담회

저자 : 김엽 , 김진수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24 (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4대구사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간담회 발표문

저자 : 김진웅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29 (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5신라 중고기 국왕근시조직(國王近侍組織)의 정비와 내정기구(內廷機構)

저자 : 김숙희 ( Kim Suk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72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신라 중고기 國王近侍組織은 국왕을 근시하는 직이 내정기구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법흥·진흥왕대 국왕근시조직은 일부에서 일정한 질서에 따라 조직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舍人은 국왕을 근시하는 직으로 진평왕대에 이르러 내정기구로 편제되었고 上舍人·下舍人, 사인 등으로 분화 또는 변화하며 공존하였고, 일련의 양상은 신라 하대까지 이어졌다. 내정기구는 진평왕대를 기점으로 체제를 갖추고 중대 이후에 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소속한 관직은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중앙행정기구와 같은 유형의 관직으로 내정기구에 소속한 관원의 관등상한과 상관관계가 있다. 다른 하나는 내정기구에서만 나타나는 유형의 관직으로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는 직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로 해석했다.


King's vassal organization in Silla's Middle Ages was thought to reflect the transition of the king's closest aides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government organization. The vassal system was found to be organized in part in a certain order during King Beop-heung and King Jin-heung. 'Sain(舍人)' was appointed as the closest assistant to the king from the vassal system, and was organized as an internal organization by King Jinpyeong. Afterward, Sain(舍人) coexisted with differentiation or change as Sangsain(上舍人), Hasain(下舍人), Sain(舍人), etc., and such a pattern continued until the end of Silla. The internal organization was able to establish a system from King Jin-pyeong of Silla Dynasty and is believed to have established after Silla's Middle Ages.
The offices belonged to Sain(舍人) can be divided into two types. One of which is the same type of office as the central administrative body, which is estimated to correlates with the upper limit of officers' duty, and the other is the type of office that appears only in the internal organs, which is interpreted as the result of organizing the types of offices that perform various tasks.

KCI등재

6왜계석실(倭系石室)로 본 가야(加耶)와 왜(倭)의 교류(交流)

저자 : 김준식 ( Kim Jun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3-106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6세기 가야와 왜의 대외교류는 유물뿐만 아니라 왜계석실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왜계석실이 출현하는 지역은 아직까지 가야 남부지역과 백제 서남부지역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왜계석실의 계보는 일본 규슈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데, 다시 규슈 북부지역과 중서부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고국명(古國名)으로 살펴보면, 규슈 북부지역은 치쿠젠(筑前)과 부젠(豊前), 규슈 중서부지역은 치쿠고(筑後), 히젠(肥前), 히고(肥後)에 해당한다. 이들은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을 무대로 활발한 교류활동을 벌인 고대 소국들이라 할 수 있다. 가야지역 중 규슈 중서부지역 계통의 왜계석실을 축조한 집단은 가야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분군을 조영하였고, 그 규모와 위상도 거의 그대로 유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규슈 북부지역 계통의 왜계석실을 축조한 집단은 가야 멸망 이전에 이미 축조가 중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야지역과 백제 서남부지역에 분포하는 다수의 왜계석실은 결국 일본 규슈지역과의 활발한 대외교류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규슈 북부지역은 최고수장층과의 긴밀한 관계, 규슈 중서부지역은 교류 및 교역의 목적에 의해 가야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출현 배경과 목적은 가야 멸망 이후의 왜계석실 축조 세력의 동향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규슈지역에 계통을 둔 왜계석실이 백제 서남부지역과 가야 남부지역에서 모두 다 확인되는 것을 통해 5~6세기 남해안 일대의 해상교통로가 매우 활발하게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Stone-chamber tomb of Wae's style is one of the clues that shows exchanges between Gaya and Wae in the 6th century. The only regions in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where stone-chamber tombs of Wae's style have been found so far are the southern Gaya and the southwestern Baekje. It is generally understood that stone-chamber tomb of Wae's style is originated from Kyushu in japan and more specifically it can be subdivided into the Northern and Midwestern of Kyushu.
With regard to the name of ancient country in the period of ancient burial mounds, the northern Kyushu was composed of Chikuzen(筑前) and Buzen(豊前) and the mid-western Kyushu was composed of Chikugo(筑後), Hizen(肥前), Higo(肥後). These ancient countries are presumed to be active in exchanges with Gaya. It is confirmed that the politic group who built tombs of the mid-western Kyushu's type kept building stone-chamber tomb of Wae's style while also keeping its size and status even after the fall of Gaya. But on the contrary to this, the politic group who built tombs of the northern Kyushu's types stopped building stone-chamber tomb of Wae's style before the fall of Gaya.
In conclusion, it is considered that a number of stone-chamber tombs of Wae's style is attributed to the result of vigorous exchanges with Kyushu in japan. More specifically, the exchanges with the northern Kyushu took place out of political purpose. And in the case of the mid-western Kyushu, it took place out of trade. In addition, the fact that stone-chamber tombs of Wae's style are located in the southern Gaya and the southwestern Baekje means that their exchanges on the sea lanes in the southern coast of Korea in the 5th to 6th century was vigorous.

KCI등재

7경주 칠불암 사찰 구조와 석경의 봉안 형태 연구

저자 : 김영옥 ( Kim Young-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7-152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경주 칠불암은 남산의 동쪽 높은 곳에 위치하며 마애삼존불과 사면석불 등 일곱 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어 칠불암으로 불린다.
칠불암의 구조는 사면석불을 중심주로 하여 그 둘레를 이중으로 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고 추정한다. 즉 사면석불을 중심으로 안쪽을 돌며 요잡행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벽체를 사이에 두고 바깥으로 마애삼존불을 바라보며 돌 수 있는 공간이 또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면석불과 마애삼존불 사이의 벽체를 받치는 것이 도무상 대석인데 이것은 앞뒤 양면으로 조각이 되어 있어 양쪽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대석의 상면에는 비석 받침의 촉을 받는 것처럼 홈이 파여져 있어 이 위에 벽체가 세워졌을 것으로 판단되고 그 벽체의 양면에 석경이 부착되었다고 생각된다.
칠불암은 사면석불을 중심주로 삼고 그 둘레에 도무상 대석으로 내진을 구성하고 그 벽면 안쪽에는 『약사경』을, 바깥쪽에는 『금강경』의 석경을 부착하였으며 그 둘레에 다시 외진을 구성한 이중회랑의 구조를 가진 사찰로 추정된다.


Gyeongju Chilbulam is located in the high eastern part of Namsan and is called that way because seven Buddha statues, including Ma-ae Samjonbul (The three rock-carved Buddhas) and Samyeonsukbul (The four sided rock-carved Buddhas), are engraved on it.
The structure of Chilbulam is assumed to have a space enough to go double rotation around Samyeonsukbul. In other words, there seems to be an inner space where you can turn around Samyeonsukbul while bowing, and another space where you can turn around Ma-ae Samjonbul while looking at it toward outside with a wall in between. The pedestal rock of the wall between Samyeonsukbul and Ma-ae Samjonbul is Domusang (a statue in figure of dancing and jumping), which is carved on and visible from both sides. A groove is cut out on the top side of this pedestal as if making the nib of the base of tombstone stand up. Accordingly it is believed that a wall has been built on it, and that a Buddhist Stone Scripture has been attached to both sides of the wall.
The Chilbulam is estimated to be a temple with a double corridor that there is Samyeonsukbul as the central pillar, around which there is the pedestal of Domusang comprising the inner wall, of which the Buddhist Stone Scripture of 『Yaksagyeong』 is attached to the inside and the Buddhist Stone Scripture of 『Geumganggyeong』 to the outside, and the outer wall surrounds the whole structure.

KCI등재

8신라(新羅) 수창군(壽昌郡) 호국성(護國城) 팔각등루기(八角燈樓記)의 새로운 고찰

저자 : 최정환 ( Choi Jeong-hwa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3-190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신라 수창군(壽昌郡) 호국성(護國城) 팔각등루(八角燈樓)를 세운 이는 이재(異材)이고, 그 등루기(燈樓記)를 찬술한 사람은 최치원(崔致遠)이다. 이재가 건립한 호국성은 달불성(達佛城 ; 달성공원)의 동북쪽, 천왕지(天王池 : 서문시장) 서북쪽에 오늘날 고성동(古城洞)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이재가 팔각등루를 세운 남령(南嶺)은 연구산(連龜山)으로 오늘날 제일중학교 거북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이재가 팔각등루를 세운 목적은 나라의 경사를 빌고 전쟁으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최치원은 밝히고 있다.
최치원이 지은 팔각등루기가 없었다면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에 보이지 않는 당시 대구지역의 호국성, 팔각등루, 달불성(達佛城 ; 달성), 불체제(佛體池 ; 사리못), 천왕지(天王池 ; 서문시장), 남령(南嶺 ; 連龜山), 불산(佛山 ; 대덕산) 불좌당(佛佐塘 ; 배자못), 마정계사(摩頂溪寺 ; 송림사), 장산(獐山 ; 경산) 등에 얽힌 여러 역사적 사실을 전혀 살필 길이 없었다. 팔각등루기를 비롯한 사산비명(四山碑銘) 및 그의 시와 문장, 그리고 여타 금석문 속에서 남긴 최치원의 정치이념과 사상은 천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음을 우리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It is Lee Jae (異材) who constructed the Octagonal Lantern-Pavlion (八角燈樓) and Hokukseong(護國城 Castle Protecting the State) in the Suchang- Province(壽昌郡) in the period of Silla(新羅) Dynasty, while Choi Chi-Won (崔致遠) composed Memorials of Octagonal Lantern-Pavlion (八角燈樓記). It has been discovered that Hokukseong, built by Lee Jae, finds itself in Goseong-dong (古城洞), which is located in the northeast to Dalbul Castle (達佛城, today's Dalseong Park) and northwest to Cheon-wang Pond (天王池, today's Seomun Market). And the Octagonal Latern-Pavlion (八角燈樓) is found in the South Pass (南嶺 Nam-Reong), located on the Yeon-Gu Mountain (連龜山), the site of which is identified with today's Turtle Rock neighboring the Jae-Il Midde School. According to Choi Chi-Won, the purpose of building Octagonal Lantern-Pavlion was to have the country blessed and to protect it from the disasters caused by war,
In case without the Memorials of Octagonal Lantern-Pavilion written by Choi Chi-won, there would have been no way to localize archaeological sites around Deagu Area, that is to say, Hokukseong, Octagonal Lantern-Pavlion, Dalbulseong, Buddha's Body Pond (佛體池, called Sari Pond), Cheonwang Pond, South Pass (Nam-Reong), Buddha Mountain (佛山, today's Daedeog Mountain), Pond Protected by Buddha (佛佐塘, today's Bae-Ja Pond), Polished-Summit Valley Temple(摩頂溪寺, today's Song-Lim Temple), Deer Mountain (獐山, today's Kyung-San), which does not appear in the texts of official history including the Memorials for Three Countries (三國史記). It is a great honor to Korean people to have Choi Chi-Won's works survived, Memorials of Octagonal Lantern-Pavlion, Four Mountains Monuments (四山碑銘), his poems and verses, and other texts on the monuments, which prove his thoughts having endured through a thousand years to breath still with us today.

KCI등재

9제4차 교육과정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고대사 서술 특징과 배경

저자 : 신선혜 ( Sin Sun-hy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1-230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제4차 교육과정기는 민족 자주성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교육 목표 및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체성을 강조한 제3차 교육과정기와는 다소의 차이가 발견된다. 아울러 교육과정의 개발이 한국교육개발원에 위탁되어 여러 차례 세미나 등의 자리가 만들어짐으로써 교육 내용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담아내려는 의지가 있었던 점 역시 제4차기의 특징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국사교과서의 경우 여전히 국정화 기조를 유지하였고, 신군부의 정치적 의도가 교육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 교육과정기의 연장선적 성격도 발견된다.
제4차 교육과정기 교육 내용의 특징을 살피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교육과정 및 교과서의 서술체제를 검토한 후 교과서의 구체적인 서술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시대구분법 및 국가발달론이라는 큰 틀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이 반영되었고, 발해 단원 설정의 변화 등의 특징이 발견되었다. 이는 교육과정 개정을 위한 여러 차례의 연구 및 세미나의 실시와 함께 교과서 연구진 및 집필진의 개편을 배경으로 하였고, 발해 인식의 경우 민족 자주성과 공동체 의식의 강조라는 당시 정권의 교육 이념이 단원 구성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제4차기 교과서 서술 변화의 배경에는 학술외적 국내외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1960년대 이래로 기존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교과서 서술에 그들의 주장을 반영시키고자 했던 유사역사학계의 도전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고조선 및 한사군의 서술은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1982년에 다시금 주장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한-일 관계 서술 역시 변화되었다. 이밖에 전곡리 유적에 대한 서술 추가, 백제의 지방제도, 신라 골품제도 관련 서술의 변화는 당시까지 축적된 국내학계의 고대사 연구성과가 교과서 서술에 반영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제4차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고대사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은 1980년을 전후한 시기의 국내외적 상황에 대한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의 적극적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As fourth education curriculum had educational goals and ideologies that emphasize national independence and community spirit, it differs from the third education curriculum which emphasizes national identity. In addition, as the development of education courses was entrusted to the Korea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which hosts several seminars and other events, willingness to capture opinions from all walks of life. Of course, the extension of the previous curriculum is also found in the fact that national history textbooks still maintained the state-authored version, and that the political intentions of the new military are included in the education content.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fourth curriculum, this study first reviewed the curriculum and the description system of the textbook and analyzed the specific descriptions of the textbooks. As a result, a new perspective was reflected in the large framework of the period classification method and nation development theory, and changes such as Balhae chapter setting were found. This was possible due to the reorganization of textbook researchers and authors, along with the implementation of several research and seminars to revise the curriculum. In the case of Balhae's perception, the educational ideology of the regime, which emphasized national independence and a community spirit, was found to have influenced the change in the chapter setting.
The reasons behind this change in the fourth textbook description were largely influenced by both domestic and abroad factors. First, challenge of pseudo history, which has been trying to reflect their arguments in textbook descriptions. They judge the existing historians have not been able to escape the influence of colonial history since the 1960s. As a result, the descriptions of Gojoseon and Han Sa-gun were inevitably affected, and the descriptions of Korea-Japan relations were also changed due to Japan's distorted history textbooks again claimed in 1982. In addition, descriptions of the relics in Jeongok-ri, the change in descriptions with the local system of Baekje and the Silla rank-system are examples that reflect the research achievements of Korean scholars in ancient history that had accumulated up to that time.
As such, analyzing the fourth curriculum textbook based on ancient history is important in terms of reaction from the history and education circles to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situations of the 1980s.

KCI등재

10해방 후 경상북도 영덕군의 군경토벌 작전과 민간인 학살

저자 : 김순규 ( Kim Soon-gy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1-270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진행된 군경토벌 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연구하였다. 경상북도 영덕군의 좌익진영은 1946년 10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좌익진영은 영덕군의 대중들을 동원하여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거나 봉홧불을 올리는 등 선전 선동 활동을 강화해나갔다.
경찰은 좌익진영의 활동에 참가한 영덕 군민들을 탄압하였다. 경찰은 좌익진영을 학살하고 그 가족들에 대해서 일상적인 감시를 하였다. 경찰의 탄압은 좌익진영이 탄압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 활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야산대는 북한에서 남파된 남조선인민유격대와 합류하면서 활동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국군은 1949년 9월에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영덕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소개 작전을 실시하게 된다. 농민들을 생업의 현장으로부터 분리하는 소개 작전은 처음부터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주민들은 생업을 위해 소개 지역으로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작전지역 내의 주민들은 빨치산 협력자로 간주되었다.
1947년부터 군경토벌 작전이 종료되던 1950년 5월까지 영덕군에서의 학살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군인과 경찰은 수시로 마을을 드나들면서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체포, 구금, 학살을 진행하였다.
군경토벌 작전 시기의 영덕군은 국가폭력이 일상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민간인 학살의 주체가 군인과 경찰이었다는 것은 학살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늦었지만, 학살에 대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The study is about the massacre of civilians happened during the operation to suppress by the military and police in Yeongdeok-gun, Gyeongsangbuk-do, after liberation.
Since 1946, the leftists in Yeongdeok-gun in Gyeongsangbuk-do engaged in activities in earnest to establish the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y reinforced propaganda campaigns by forcing the masses of Yeongdeok County to hail the People's Republic or raise the beacon fire.
The police cracked down on the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left-wing movement and massacred the leftists as well as kept the family under constant surveillance. Consequently, the leftists went into the mountains and continued the activity to escape from police repression. Since then, they could step up their activities by joining North Korean Partisan which was sent to South Korea.
Accordingly the south korean military set up the Taebaek Mountain District Combat Command post in September 1949 and carried out a large-scale evacuation operation in the Yeongdeok-gun which separated residents from the site of their livelihoods despite strong opposition of the residents from the beginning
Unfortunately, the residents had no choice but to go back and forth for a living between two places, which caused them to be considered as partisans.
The massacre had became a daily occurrence in Yeongdeok until the Military and Police forces finished the operation to suppress from 1947 to May 1950. Soldiers and police frequently went in and out of the village and conducted arrests, detention and massacre by treating the residents as enemies.
The fact that the main agents of the civilian massacres were the Military and the Police forces means that the government should take the responsibility for them, even though it is late.

12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경북대학교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144
 107
 106
 88
 78
  • 1 경북대학교 (144건)
  • 2 고려대학교 (107건)
  • 3 서울대학교 (106건)
  • 4 연세대학교 (88건)
  • 5 성균관대학교 (78건)
  • 6 동국대학교 (56건)
  • 7 전남대학교 (53건)
  • 8 경희대학교 (51건)
  • 9 서강대학교 (50건)
  • 10 부산대학교 (46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