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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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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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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3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301
대구사학
138권0호(2020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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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 나일관계(羅日關係)의 추이(推移)와 김태렴(金泰廉) 사절단(使節團)의 도일(渡日)

저자 : 야마다후미토 ( Yamada Fumit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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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반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된 상태에 있었다. 735년 2월, 신라 조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국이 “王城國”임을 표방하자 일본 조정은 사신을 돌려보냈다. “왕성국”은 신라가 당의 제후국임을 표방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세계관을 가지는 일본에 대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자국이 우위에 있음을 확고히 하는데 작용하였다. 이후 양국 사이에 외교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752년에 약 9년 만에 양국 간의 외교가 진행되었다. 이때 신라는 왕자 김태렴을 필두로 한 700여 인이라는 사상 최대의 규모를 갖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은 신라 사신으로서 약 17년 만에 일본의 京에 들어가 교역 활동을 비롯한 외교를 진행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에 관한 기록을 보면 대체로 그들이 일본에서 朝貢國으로서의 禮를 갖추어 외교를 진행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김태렴 사절단이 파견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와 같은 외교 방식을 취하였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일본 율령법의 이념에 의해 윤색된 기록을 근거로 도출된 것이다. 일본 측 사료에는 김태렴 사절단이 상위 국가로서의 예를 갖추어 일본과의 외교를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나,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간과해 왔다.
일본 조정은 김태렴 사절단에 대해 외교 방식에 관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는 752년 4월에 거행된 東大寺 大佛開眼會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신라에 대해 조공국으로서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종래의 대일 외교 방침을 유지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의 도일은 일본 조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신라 조정은 김태렴 사절단을 파견하여 요청된 물품을 전달하는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교역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 조정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서, “왕성국” 표방 이래 일본과의 사이에 표면화된 정치적 긴장 속에서 다시금 자국의 문화적․권위적 우위성을 과시하며, 나아가 대내적으로도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I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political tensions had surfaced in Silla-Japan relations. In February 735, the court of Silla claimed that his country was a "Wand Seong Guk" through his messenger, and the Japanese court sent his messenger home. “Wand Seong Guk” is a symbolic expression that advocates that Silla is a Tang lord, and its own country is superior to Japan, which has its own world view centered on the Emperor, in the international order of East Asia Worked to ensure that Later, political tensions surfaced, with a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over diplomatic systems.
Under these circumstances, diplomacy between the two countries took place in 752 for the first time in about nine years. At this time, Silla dispatched the largest mission ever in Japan, with about 700 people led by prince Kim, Tae-ryeom. The Kim, Tae-ryeom Mission entered the capital of Japan for the first time in about 17 years as an ambassador to Silla and conducted extensive diplomacy, including extensive trade activities.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Kim, Tae-ryeom Mission, they stated that they had advanced diplomacy in Japan as the Empire. It has been understood in previous research that Kim, Tae-ryeom's diplomatic approach was used to achieve the mission purpose. However, the record of the Kim, Tae-ryeom Mission is not likely to convey the actual situation, because it is based on the principles of the Japanese Ritsuryo Law, centered on the Emperor. In fact, it has been confirmed in the Japanese archives that the Kim, Tae-ryeom Mission adopted a diplomatic system as a high-ranking nation and advanced diplomacy with Japan.
The Imperial Court of Japan has presented the mission to Kim, Tae-ryeom with diplomatic requirements. This was based on a new world view formed through the opening of the Great Buddha Eye of Todaiji Temple in April 752, and demanded that Silla establish a gratitude as a tributary country. However, Silla did not accept this, and maintained its foreign policy with Japan, which has been adopted since the "Wand Seong Guk Case".
The arrival of the Kim, Tae-ryeom Mission to Japan was at the request of the Japanese court. The Shilla Imperial Court dispatched the Kim, Tae-ryeom Mission to send the requested goods and at the same time conduct trade activities to pursue economic benefits. The dispatch of a large delegation, led by the Prince, was due to the political intentions of the Silla Court. It was to show off and to increase the status of the kingdom in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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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후기 경상도 읍지 편찬 사업 재검토

저자 : 이재두 ( Lee Jae-d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7-8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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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의 『영남여지』(1841)와 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 경상도편(1878, 이하 『고궁읍지』)의 편찬 시기와 읍지 유형 및 저본을 살펴보았다. 『영남여지』는 92%가 『경상도읍지』 유형이며, 『고궁읍지』 경상도편은 72%이다.
『고궁읍지』와 『영남여지』를 통해 1786년과 1832년 편찬한 『경상도읍지』 가운데 분실한 읍지의 원형을 추적하여 보유편을 확보할 수 있다. 경상도의 1786년지는 9개 고을 읍지를 분실하였다. 『고궁읍지』 경상도편에는 이들 읍지가 두 책에 연속하여 실려 있는데, 1786년지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9개 고을의 1786년지는 『경상도읍지』 유형 4개, 『여지승람』+알파(α) 유형 3개, 『여지도서』(경상도) 유형 1개, 『여지도서』+α 유형 1개가 된다.
1832년지는 4개의 읍지를 분실하였다. 『영남여지』를 통해 김산군, 영덕현, 고성현의 『경상도읍지』 유형을 확인할 수 있으며, 『교남지』(1938)를 통해 의성현의 『경상도읍지』 유형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832년지의 각 고을 읍지는 『경상도읍지』 유형이 100%이다.
조선후기 읍지들을 숙종, 영조, 정조 때 개발한 몇몇 유형으로 분류하여 파악하면, 저본으로 사용한 읍지의 편찬 시기와 수록 항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역사 연구에서 조선후기에 편찬한 읍지를 활용하려면 읍지의 편찬 시기와 유형 및 저본 등을 제대로 파악하여야 한다.


In this article, we looked at the time of compilation, the eupji type, and the origin of Yeongnam Yeoji(1841) and Gogung Eupji(Gyeongsang-do sections, 1878). The original form of the lost eupjis was revealed out of the Gyeongsang-do Eupji, compiled in 1786 and 1832 through Gogung Eupji and Yeongnam Yeoji.
Yeongnam Yeoji is 92 percent of the Gyeongsang-do Eupji type, and Gogung Eupji is 72 percent. Gogung Eupji is believed to be based on Gyeongsang-do Eupji(1786), as lost eupjis from nine counties are bound by two books. If so, it appears that there were four Gyeongsang-do Eupji types, three Yeojiseungram+α types, one Yeojidoseo types, and one Yeojidoseo+α types.
Gyeongsang-do Eupji(1832) lost eupjis in four counties. Yeongnam Yeoji confirmed the the Gyeongsang-do Eupji type in Gimsan-gun, Yeongdeok-hyeon and Go Seong-hyeon, and Uiseong-hyun can check the traces of the Gyeongsang-do Eupji type through Gyonam-ji(1938). In this way, each county in Gyeongsang-do Eupji(1832) has a Gyeongsang-do Eupji type of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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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암 손후익의 가계와 유림단의거

저자 : 강윤정 ( Kang Yun-j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3-11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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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巖 孫厚翼(1888~1953)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유림의 當然之理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당연지리로 여겼던 파리장서운동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손후익은 이중업과 함께 유림단의 결속력을 강조하며, 나라 밖의 김창숙과 연대하여 재차 독립청원운동을 시도하였다. 손후익이 독립청원운동을 행동으로 밀고 나가는 데는 김창숙을 비롯한 한주학파의 지향과 인맥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곽종석·이두훈·장석영과 사승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한주학파의 맥을 잇고 있는 김창숙·이기원·김황 등과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또 한편으로는 증대고모부이자, 유년시설 스승으로 모셨던 이만유와의 인연으로 이중업·권상익·이원각 등 정재학맥의 인사들과도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심산 김창숙과 연결된 중국을 상대로 한 독립청원 시도가 한주학파에 국한되지 않고, 이중업 등과 함께 추진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 뒤에도 손후익은 국내에서 김창숙을 지원하며, 제2차 유림단의거를 밀고 나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1923년에는 처남이었던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자금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이어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가 전개되자, 그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항일투쟁의 시작은 독립청원운동이라는 외교방략이었지만, 점차 김창숙이 이끄는 독립전쟁론에 공감하고, 그 목적을 위해 적극적인 군자금 모집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그가 이끌었던 독립청원운동과 제2차 유림단의거는 1920년대 유림들의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손후익을 비롯한 그 일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Munam Son Huik(1888~1953) recognized Paris Jangseo Movement in 1919 as a matter of course of Confucians. But when the Movement did not turn out as successfully as expected, Son, along with Lee Jungeop, stressed solidarity of Yurimdan(Confucian Scholars) and attempted a petition for independence again, together with Kim Changsook who were then outside the country. Son's networking with Hanju School as well as with Kim Changsook was the significant influence on his petition for independence.
Son had a teacher-student relationship with Gwak Jongseok, Lee Duhoon and Jang Seokyeong and knew Kim Changsook, Lee Giwon and Kin Hwang who carried the legacy of Hanju School. It was also noted that Son was related to Lee Manyu, who was his great grandfather and childhood teacher therefore knew Lee Jungeop, Kwon Sangik and Lee Wongak from Jeongjae School. This influenced the background of the petition for independence to China which was developed not only by Hanju School but also by Lee Jungeop and others.
Son Huik continued to support Kim Changsook in the country and established a foundation for the 2nd Yurimdan's Independence Movement. In 1923, he supported fund-raising by Kim Changsook, through Jeong Sugi, his brother-in-law and in 1925,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whole process of the 2nd Yurimdan's Independence Movement. Although his resistance against Japan started by a diplomatic means in a form of a petition for independence, he eventually joined Kim Changsook and advocated his independence war, which made him actively participate in fund-raising for the war. The petition for independence and the 2nd Yurimdan's Independence Movement led by him were the most well-known Yurimdan's Independence movements in the 1920s. Son and his family played significant roles in the Mov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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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黙)의 중국 관내(關內)에서의 민족운동

저자 : 조규태 ( Cho Kyu-t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5-14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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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북 선산의 양반 출신인 김정묵(1888~1944)이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사망한 1944년까지 중국의 상해와 북경, 만주 등지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일제의 정보문서, 신문, 독립운동가의 일기와 증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등을 활용하였다.
김정희는 1911년 장인의 동문인 한계 이승희가 있는 중국 밀산 한흥동에 가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4년 한계 이승희가 공교회운동을 하기 위해 북경에 이동한 것에 맞추어 북경에 유학하였다. 그는 1914년 북경법정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하여 4년간 근대적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그는 1919년 4월 경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그는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각종의 정책을 결정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성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운영에 불만을 품고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경으로 가서 신채호 등과 무장투쟁세력의 통일과 이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다만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에 의해 군대를 양성하려는 박용만과 신숙 주도의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김좌진 등과 연계하여 중국의 지원에 의한 군사단체의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1920년대 중반 소·일협약과 三矢協定에 의해 일본과 소련, 일본과 봉천군벌과의 화해 분위기기 형성되고 중국과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이 난관에 봉착하고, 또 국내에서도 타협적 독립운동인 자치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투쟁적 독립운동노선을 견지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25~26년 의열단과 연계하여 김창숙의 제2차 유림단의거를 지원하였고, 1926년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에 참여하였다.
한편 그는 1926년 11월 경 북경에서 入籍墾民會를 발기하고 만주지역 한인의 입적을 도와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만주지역의 한인을 괴롭히는 마적과 관계를 개선하고, 반한인감정을 갖고 있던 중국인들의 태도를 개선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 그는 만주에서 북경으로 이동하여 1932~33년 경 김원봉과 항일구국회 활동을 벌였고, 열하에 중한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한인의용군 사령부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한편 그는 1932년 8월 이후 군사위원회 북평분회 법무관이 된 것을 활용하여, 중국 국민당의 간부 및 군사위원들과 접촉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의 개설과 학생의 모집, 운영 등을 후원하였다.
양반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아 유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독립운동이라는 험한 길을 걸었다. 그의 인생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선각적 독립운동가의 모습이었다.


The topic of this article is Kim Jung-mook(1888-1944) who was a patriot born in Sunsan, Gyeongsangbookdo Province. I reviewed his activities in Shanghai, Beijing, Manchuria and elsewhere in China, from 1911 until 1944. To do this research, I made use of information documents of Japan government, newspapers, testimony from independence activists, and ect.
In 1911, Kim Jeong-mook went to Hanheung-dong in Milsan, China, where with his father-in-law's alumni, Lee Seung-hui, he made an efforts to build an independence movement foundation. IN 1914, he went to Beijing and entered into Peking Law School, and studied modern laws for four years.
Around the end of World War I in 1918, he did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and Primorsky of Russia. And immediately after the establishin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Shanghai around April 1919, he went to Shanghai and become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He decided on various policies, and prepared measures to raise fund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whe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Hansung Government and the Korean National Assembly were merged in 1919, he supported the integra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and the Provisional Legislative Council of the Republic of Korea.
However, he resigned from the interim parliament in 1920 after learning that Lee Seung-man had insisted on mandatory rule. Then he went to Beijing to organize a military unification promotion association with Shin Chae-ho and Park Yong-man and called for the unification of armed struggle forces. However, he did not participate in the military unification conference led by Park Yong-man and Shin Sook, which was to train troops by the support of Soviet Russia, but tried to achieve the unification of military groups supported by China in conjunction with Kim Jwa-jin.
In the mid-1920s, whe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hina and the Maritime Provinces faced difficulties, and the autonomous movement, which was a compromise, was developed at home, he proceeded to maintain the militant independence movement line. He supported Kim Chang-sook's second Yurimdan struggle in 1925-26, and participated in the Great Independent Party Organization Beijing Promotion Conference in 1926.
Meanwhile, he launched the Civil Society in Beijing around November 1926 and helped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to defend their rights and interests. In addition, activities were carried out to improve the stable relationship and the attitude of the Chinese who had anti-Korean sentiment in Manchuria.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occurred in 1931, he moved from Manchuria to Beijing to engage in anti-Japanese activities. There around 1932-33, he tried to organize a Korean-Chinese military headquarters to stage a War against Japan. Meanwhile, using his status as a lawyer for the Military Commission's North Pyeongbun Division since August 1932, he contacted senior officials and military members of the People's Party of China to sponsor the opening of the Chosun Revolution Military Political Officer School and Nakyang Military Academy, recruiting and operating students. As a nobleman, he was able to live comfortably with a higher education, but he walked on the rough road of independence movement. His life was one of a visionary independence activist who practiced Noblesse Ob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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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본서기(日本書紀)』와 <일본기(日本紀)> 명칭에 관한 소고(小考)

저자 : 이재석 ( Lee Jae-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7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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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720년 일본 최초의 정사로서 간행된 『일본서기』의 명칭의 문제에 관해 검토한 것이다. 기존의 주요 쟁점은 사서의 원래 명칭이 『일본서기』인가 '일본기'였는가 하는 문제였다. 필자의 입장은 『일본서기』가 원래의 서명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필자 나름의 근거를 몇 가지 제시하였는데, 첫째 『일본서기』 서명이 가장 먼저 보이는 730년대 후반기 성립의 古記(大寶令의 주석서)의 표기를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 둘째 『일본서기』의 찬진을 전하는 『속일본기』 양로 4년(720) 5월조의 기사(“修日本紀”) 속의 '일본기'는 사서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國史'의 의미로 사용된 보통명사적 의미였다는 점, 셋째 '일본기'와 '국사'의 호환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撰日本紀所' · '撰國史所'의 용례를 포함하여 몇 가지 존재하는 점을 통해 상기 “修日本紀”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언급하였다. 한편 720년 『일본서기』의 편찬 이후에도 『일본서기』와 '日本紀' 명칭이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797년 후속 사서인 『속일본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일본서기』만이 유일무이한 국사이자 '일본기'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속일본기』 등이 편찬된 이후에도 '일본기'를 말할 경우는 대개 최초의 '일본기'였던 『일본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져 갔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일본서기』가 차지하는 위상과 무게감이 후속하는 정사와는 남달랐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This paper reviews the issue of the naming of Nihonshoki, published in 720. The main issue of the past was whether the original name of the history book was 『Nihonshoki』 or 'Nihongi'. My opinion is that 『Nihonshoki』 was the original title. The basis of the argument is as follows : First, it's difficult to disregard the notation of 'Koki'(古記, The commentary book of Taiho-ryo)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late 730s, when 『Nihonshoki』 was first appeared. Second, the term 'Nihongi' in the article (“修日本紀”) -the article written in May, the 4th year of the reign of Yoro(720) was included in the book 『Shoku-Nihongi』 which is about presenting 『Nihonshoki』 to the king- was not a book name but a common noun used in the mean of 'Kokushi(history of nation)'. Thrid, there are several instances including the use of 'Sen-Nihongi-sho (撰日本紀所)' · 'Sen-Kokushi-sho(撰國史所)' as an example showing the compatible relation between 'Nihongi' and 'Kokushi'. In the next breath, I pointed out that only 『Nihonshoki』 was recognized as the one and only history book and also recognized as 'Nihongi' until the appearance of the sequel book 『Shoku-Nihongi』 in 797, against the backdrop of the coexistence of the names 『Nihonshoki』 and 'Nihongi' after the compilation of 『Nihonshoki』 in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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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당대(唐代) 보고제도(保辜制度)의 규정(規定)과 적용사례(適用事例)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저자 : 박구철 ( Park Seo-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9-21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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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사건이나 상해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의 피해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刑量을 정해야 한다. 이와 관련한 법률 규정에 의거하여 운영된 시스템이 바로 保辜制度이다. 保辜制度는 피해자의 회복상태를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일정한 회복기간을 두어 회복상태를 파악한 후 회복상태의 여하에 따라 가해자에 대해 定罪量刑하는 제도를 지칭한다. 일정한 기한이 바로 보고기한에 해당하는 辜限이다. 保辜制度가 완비되기 시작한 시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중국 대륙학계에서는 唐代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본고에서는 唐代 保辜制度에 대해 개괄적으로 검토하고 아울러 보고제도의 적용사례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唐代 保辜制度에서 보고기한은 10일, 20일, 30일, 50일 모두 4종류가 있었다. 이 중에서 10일부터 30일까지의 보고기한은 폭행을 행사할 때 사용한 도구를 기준으로 설정한 기한이며, 50일은 피해자의 상해 상황에 의거하여 규정된 기한이다. 唐代 保辜制度가 적용되는 범위는 폭행죄의 경우에는 상해의 유무와 관계없이 보고기한이 설정되었으며, 상해죄의 경우에는 폭행의 유무와 관계없이 보고기한을 설정되었다.
保辜制度는 당시의 의료수준의 한계, 관료를 포함한 귀족들의 법률적 특권의 존재, 지방관과 가해자와의 유착관계의 존재가능성, 상해와 살해와의 인과관계에 대한 불명확한 해명 등과 같은 한계성이 존재한 위에 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법적인 행위도 발생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형사사건에 대한 손해배상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다하도록 유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가해자가 간병 등과 같이 人身으로 배상하게 하는 간접적인 배상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각종 의료비용도 부담했을 것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일정 정도의 직접적 배상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he Baogu System guaranteed the victim's convalescence within a fixed period by law, which is called 'Baogu Period(保辜期限)', to check a victim's condition of recovery after an assault incident or an injury case. There are relatively lots of records on the Baogu System in the Tang dynasty in terms of the quality and quantity and it is concretely specified in the law. This paper examines the Baogu Period and its range of applications, the relation between Baogu Period and punishment, and application examples of Baogu Period. In the Tang dynasty, the Baogu System had four terms of Baogu Period such as 10, 20, 30, and 50 days. The Baogu Period which has 10, 20, and 30 days was determined based on the kit of violence and the Baogu Period of 50 days was determined based on a victim's degree of injury. The Baogu System was generally applied to violence crime or a charge of injuring. In terms of the application range of Baogu System, violence crime had the Baogu Period irrespective of injuries and a charge of injuring also had the Baogu Period irrespective of violence.
First, after the Baogu Period, violence crime or a charge of injuring could changed into a charge of murder. Second, if the causal relationship between a victim's death and injuries or violence was not clear, violence crime or a charge of injuring applied to cases that a victim died during or after the Baogu Period. Third, if a victim's condition was improved after the Baogu Period, the punishment could be mitigated.
The Baogu System of the Tang dynasty has three characteristic cases. First, the Baogu System was applied to the case that a criminal died during the flogging execution. Bureaucrats implicated in the case also were penalized. Second, a bureaucrat was sentenced to a severe punishment because the bureaucrat, who took a bribe from a victim, caused a death of a criminal who during the Baogu Period after a flogging execution. The case indicates that illegal activities related with the Baogu Period were made by bureaucrats. Third, the Baogu System was applied to the case such as a traffic accident. Although a victim generally could require the Baogu Period, an assailant also could require the court to set the Baogu Period. The court required an assailant to make a guarantor who stand joint surety and the guarantor was also penalized if the assailant escaped or failed to perform a duty. The guarantor and assailant had to stay in a certain area and take measures for a victim.
The Baogu System had illegal activities because it had limits such as limitation of medical state, the legally privileged class including bureaucrats and aristocrats, possibility of close relationship between a local government official and an assailant, and vague elucidation about the causal relationship between injuries and homicide. Although the Baogu System had no direct connection with compensation for damages, it played an important role to make an assailant fulfill his moral responsibility for a victim. The Baogu System was a kind of indirect compensation for damages to provide manpower such as nursing. In addition, the Baogu System played an role as direct compensation for damages in providing medical costs. Therefore, the Baogu System performed functions as liability of compensation as well as criminal reconciliation between an assailant and a vict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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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제2차 만주 폐페스트의 유행(1920-21)과 방역정책의 전환: 하얼빈 도시공간의 재편과 관련하여

저자 : 신규환 ( Sihn Kyu-hwa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3-24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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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21년 만주지역에서 유행한 페스트를 제2차 만주 폐페스트라고 부른다. 제2차 만주 폐페스트는 1920년 10월 하이라얼에 시작되어 1921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종결되기까지 1년여 동안 지속되었으며, 사망자는 러시아인 600여 명을 포함하여 9,300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러시아인 300여 명을 포함하여 사망자의 절반 이상은 하얼빈에서 발생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제2차 만주 폐페스트는 우롄더라는 중국인 방역책임자의 주도로 성공적인 방역활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서는 1920년대 하얼빈 정국과 도시공간의 변화상를 제대로 담아내기 어렵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동청철로 개발로 시작된 하얼빈은 도시개발 초기부터 러시아인이 거주하는 다오리구와 중국인이 거주하는 다오와이구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사법, 행정, 외교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동청철로를 관할했던 동청철로관리국은 철도 운영뿐만 아니라 다오리구의 행정, 사법, 외교 등 각종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청철로관리국은 방역 실무를 자치공의회가 담당하게 했는데, 그들은 하얼빈 각지에 방역소를 설치하여 방역행정을 주도했다. 동청철로관리국과 자치공의회는 중국인 거주지인 다오와이구를 전염병의 온상으로 지목하면서 다오와이구에도 방역행정을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 하얼빈의 정국은 급변했다. 러시아 사회의 불안으로 러시아인들이 다오리구로 몰려들었지만, 다오리구의 러시아당국이 붕괴되면서 다오리구는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국면이 연출되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중국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1920년 제2차 만주 폐페스트가 시작되면서 다오리구는 더 이상 페스트의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이전과 달리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이 페스트에 희생되었다. 다른 한편, 제2차 만주 폐페스트는 방역정책에서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페스트 유행 시기 선페스트 법령과 대책을 반복했던 중국정부는 호흡기 감염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기존의 쥐잡기대책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공조 속에서 마스크 착용, 경찰신고, 의사진단, 소독, 격리, 차단 등 새로운 방역조치를 강구해 나갔으며, 다오리구에 대한 공간통제를 확대해 나갔다.


The plague, which was prevalent in Manchuria from 1920 to 21, is called the Second Pneumonic Plague Epidemic in Manchuria. The Second Pneumonic Plague Epidemic in Manchuria began in October 1920 in Hailar and lasted for about a year until it ended in Vladivostok in October 1921, with the death toll reaching some 9,300, including 600 Russians. More than half of the deaths occurred in Harbin, including more than 300 Russians. In the previous study, the Second Pneumonic Plague Epidemic in Manchuria was emphasized that successful quarantine activities were conducted under the leadership of a Chinese quarantine officer named Wu Lien-teh. However, in this view, it is difficult to capture the changes in the Harbin political situation and urban space in the 1920s.
Beginning in the early 20th century with the development of Russia's Chinese Eastern Railway(CER), Harbin had been divided into Daoli District, where the Russians reside, and Daowai District, where the Chinese reside, from the early days of urban development, and each region was building its own territory in judicial, administrative and diplomatic affairs. The CER Administration, which had been in charge of the CER, was controlling various powers, including administration, judicial and diplomatic affairs of the Daoli District as well as the operation of the railway. The CER Administration had the local council in charge of the quarantine work, which led the quarantine administration by setting up quarantine stations in various areas of Harbin. The CER Administration and the Autonomous Council also expanded quarantine administration in Daowai District, citing the Chinese residential district as a hotbed of infectious diseases.
After World War I and the Russian Revolution, the political situation in Harbin changed rapidly. The Russian people flocked to Daoli District due to unrest in Russian society, but the collapse of the Russian authorities in Daoli District created a political and social chaos in Daoli District, and the leadership of the political situation was transferred to the Chinese government. With the start of the Second Pneumonic Plague Epidemic in Manchuria in 1920, Daoli District was no longer a safe zone for the plague. Not a few Russians have fallen victim to the plague as before.
On the other hand, the Second Pneumonic Plague Epidemic in Manchuria was a new turning point in quarantine policy. The Chinese government, which repeated the bubonic plague regulations and measures during the plague, has begun to recognize the importance of respiratory infections. In a departure from the existing rat-fighting measures, the Chinese government has sought new quarantine measures, including wearing masks, reporting to police, medical examinations, disinfection and isolation, and block and con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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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후 독일의 미국연구: 베를린의 <존 F. 케네디연구소(John F. Kennedy Institute)>를 중심으로

저자 : 박용희 ( Park Yong-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9-28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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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의 재건과정에서 미국의 개입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의 관심사는 고등교육과 학술연구 분야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살피는데 있다. 사실 군정 초기부터 미국은 교육정책 전반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며, 서독 정부가 구성된 이후에도 엄청난 재정적, 인적 및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일환으로 미국은 독일에서의 미국연구를 적극 지원했으며, 1963년에는 그 대표적 연구기관으로 <존 F. 케네디 연구소>가 베를린에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미국은 전후 점령과정에서 독일에 대한 민주주의 재교육 정책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냉전의 전개와 함께 강화된 문화정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독일사회에 미국을 알릴 필요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또한 이는 유럽사회에 만연한 오랜 미국관련 문화적 편견을 극복할 필요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런 차원에서 독일 내에서 미국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글은 우선 독일에서의 미국연구가 전후 미군의 점령과 함께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후에도 그것은 독일인들 스스로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사실 독일의 미국연구의 전통은 미약했지만 세기 전반부터 전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통은 종전 이후 새로운 세계패권국으로 성장한 미국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필요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전후 재건을 위해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관심을 표명하였으며, 이는 전후 독일에 미국연구가 자리 잡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전후 독일에서 미국연구가 성장하는 과정은 서독의 미국 전문가들과 이를 지원한 미국의 문화정치 양자가 상호협력하고 결합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글의 관심사인 베를린에 만들어진 <존 F. 케네디연구소>는 냉전의 전개와 함께 긴밀해지고 있었던 양측의 이해관계가 만들어낸 대표적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점령 초기부터 미국은 독일내 여러 대학에 미국연구소 및 교수직 설치에 막대한 지원을 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60년대 들어 이런 지원이 '선택과 집중'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이 글에서 다룬 베를린의 <존 F. 케네디연구소>의 설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The scholarly occupation with the United States in Germany was not exclusively a product of the post-war years. American Studies in Germany had a tradition up to the beginning of the century. Yet it was the post-war years in which the study of the U.S. became institutionalized in most universities of the Federal Republic.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s an "inter-facultative" Amerika-Institut in Berlin.
American Studies during this early phase was not the name of an independent field of studies but rather a collective name for scholarly explorations of American society and culture carried out by scholars in various disciplines. Ernst Fraenkel, the founding father of the institute, worked for the foundation of an "Amerika-Institut" that corresponded to this early concept of American Studies as a loose conglomerate of different areas and/or disciplines.
The political scientist Ernst Fraenkel played a key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Institute. This dynamic advocate of liberal positions formerly had been a lawyer in the Weimarer republic, was then exiled from Germany and emigrated to the U.S. where he became an American policy advisor, then, after his return to Germany, professor at the Political Science Institute (later the "Otto-Suhr-Institut") of the Freie Universität Berlin. Fraenkel had dreamed of such an opportunity for some time: namely to make America (which represented liberality and humanism to him) the subject of coordinated academic training and research which would bridge the traditional borders of disciplines and faculties.
But the situation in post-war Germany was not good. Especially Berlin was at the forefront of the Cold War with division. Therefore, the construction of a Amerika-Institute was not easy. At this time, US financial support was crucial. After negotiations with the political senate of Berlin, the Board of Trustees and the Ford Foundation, the academic senate decided in November 1962 to found an "inter-facultative" Amerika-Institut on the basis of Fraenkel's concept. The institute began its work on July 1, 1963 and received its present name after the assassination of John F. Kennedy several months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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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나인호,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인종주의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서울, 역사비평사, 2019)

저자 : 김건우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3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83-286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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