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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사연구 update

Journal of Korean Literary History

  •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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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7-0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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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69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325
민족문학사연구
69권0호(2019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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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민족'과 '문학'의 안과 밖

저자 : 서재길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7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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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원명교체기, 화이질서의 강화와 동국문명의 형성

저자 : 정출헌 ( Chung Chul-heon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4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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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를 전후한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中原에서는 원-명으로의 교체가 이루어졌고, 東夷의 변방에서는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이 새롭게 건국되었다. 이민족인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漢族 정통왕조인 명나라로 교체된 사실이 웅변하듯, 중화문명의 질서가 완전히 뒤바뀐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원나라와 혈맹관계에 있던 고려왕조의 유산을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명나라와 같은 유교문명 국가로서의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말의 최고 지성으로 꼽히던 이색과 조선의 문명을 이끌어간 주역인 신숙주·서거정의 인식에는 유사한 지점이 발견된다. 이른바 東國文明에 대한 자부가 그것이다. 본고는 그런 면모를 논의의 단서로 삼아 여말선초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공존하고 있던 단절과 지속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를 위해 원-명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강화되고 있던 華夷秩序의 체계와 그 아래에서 독자적인 문명건설의 근거가 되었던 聲敎自由가 어떤 길항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창업의 주역인 정도전과 다르게 수성의 주역으로 자처한 변계량이 도모했던 견제와 조절의 과정을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리고 祭天의 시행 여부를 둘러싼 논란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처럼 조선 건국 초기의 예악문물제도를 관장하고 있던 변계량은 세종의 시대를 맞이하여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명나라 永樂帝 이후 한층 강화된 화이질서의 체계아래에서 中華文明의 수용과 동국문명의 건설이라는 모순적인 과제를 동시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중화문명으로의 편입을 위해 매진한 결과, 훈민정음과 같은 동국문명의 절정에 도달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중화문명과의 동화 노력이 역설적으로 동국문명을 완성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이질서 체계에 기반하고 있는 중화문명과 동국문명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관계는 문명국을 자처한 조선이 다시금 그 주변국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했다. 문명에 중심과 주변을 상정하는 순간, 그런 차별적 위계질서는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의 문명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성종의 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조선은 또 다른 문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선배세대가 추구했던 文章을 통한 문명국가와 달리 道學을 통한 문명국가라 명명될 수 있을 법하다. 그 점을 밝히는 것은 본고에서 제기했던 논점을 이어받아 탐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At the turn of the fifteenth century world order of East Asia started changing rapidly. There was transition from Yuan dynasty to Ming dynasty in China and a new kingdom Joseon that destroyed Goryeo was born in the border of Dongyi(東夷). As represented in the case of Yuan dynasty that was built by Mongols, outward barbarians replaced Ming dy- nasty which is an authentic Han nation, it appeared the whole world turned upside down. In actuality, Joseon regarded the inheritance of Goryeo dynasty that was in blood alliance with Yuan dynasty as something old and attempted complete revolution towards a Confucian state as Ming dynasty.
In spite of all that, there were similarities in the recognition of Yi Saek who was regarded as the best intellectual at the end of Goryeo period and Shin Sukju and Seo Geojeong who were evaluated to lead the completion of Civilization of Joseon. In other words, it is the pride of civilization of Dongguk(東國), Joseon. This article is to examine closely the aspect of severance and sustenance coexisting in the historic transitional period of the end of Goryeo and the beginning of Joseon.
I clarified how the freedom of King's education that provided the original foundation for the establishment of civilization over people worked and competed under the sustaining and strengthening system of China-centered world order in spite of transition from Yuan dynasty to Ming dynasty for that research. I explored the process of Byeon Gaeryang's checks and control through the controversy in acknowledging Dangun and Gija as well as in performing heaven worship ceremony and he considered himself as a leading character in sustaining the new nation unlike Jeong Dojeon, a leading character of creating a new nation.
Byeon Gaeryang who took charge of civilization system of Joseon and pursued Dongguk civilization came to confront a troublesome situation in the period of King Sejong. It is because Byeon Gaeryang had to accomplish the contradictory task of accepting Chinese civilization and establishment of Dongguk, Joseon civilization after the reign of Younglak Emperor of Qing under more forceful China-centered international order. However King Sejong was able to achieve the crux of Dongguk civilization such as Hunminjeongeum, Korean alphabet after an effort of full incorporation into China-centered civilization. King Sejong's assimilation effort towards China-centered civilization paradoxically became a power to complete Dongguk civilization.
The antinomic relations between China-centered civilization based on China-centered world order and Dongguk civilization worked as a mechanism that Joseon, civilized nation discriminated neighboring countries. As soon as they put agenda of putting one nation as a center in civilization, it had an inevitable result. From the pinnacle of the period of King Seongjong who was evaluated to complete Dongguk civilization, Joseon started to dream another Dongguk civilization. That could be designated as a different civilization through Confucian ethics unlike previous scholars who pursued civilization through system of ritual and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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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세기 관료·문인의 김시습에 대한 인식과 그 의미

저자 : 엄기영 ( Um Ki-young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5-7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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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세기 관료·문인들에게 김시습이란 인물이 어떻게 인식되었으며, 그 인식에는 어떤 이유와 배경이 있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16세기 관료·문인들에게 김시습은 다양한 이미지로 존재했다.
중종(中宗) 초기의 정국에서 김시습은 성종(成宗) 대 문운(文運)의 융성함을 보여주는 문사(文士)로 여겨졌는데, 이는 이세인(李世仁)의 발언과 _속동문선_에 수록된 김시습의 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겨우 목숨을 건지고 은거한 이자(李耔)에게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망각될 처지에 있는 인재로 여겨졌다.
한편, 개인적인 저작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저작에서도 그를 뛰어난 시승(詩僧)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상당히 넓게 존재했으며, 윤춘년(尹春年)과 이이(李珥)를 통해서는 마침내 백이(伯夷)와 같은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었다. 김시습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 과정에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이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특히 이이가 「김시습전」에서 김시습을 백이에 견준 것은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는바,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김시습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보편화된다.


This paper studies the recognition for Kim Siseup(金時習) in 16th century of Joseon dynasty and the backgroud of its recognition. There were the various images of Kim Siseup to government officials and literati in 16th century of Joseon dynasty.
Kim Siseup was remembered as a literati who symbolized the national prosperity of King Seongjong(成宗)'s reign, or a competent person who was left behind and forgotten, or a monk who wrote a poet well, or a saint like Bekyi(伯夷). And the various images of him formed down in the political and social background.
Especially the biography of Kim Siseup written by Yi Yi(李珥) had great influence on the recognition of the next generation. After that time, Kim Siseup was considered as a symbol of the fide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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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의 남성 인물에 대한 구조적 폭력 연구 : 공주혼을 중심으로

저자 : 공혜란 ( Gong Hye-ran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9-10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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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의 공주혼 속 남성 인물에 대한 구조적 폭력에 초점을 두어, 남성 인물이 구조적 폭력하에 어떠한 감정 양상을 나타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울러 독자층은 이러한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 요한 갈퉁의 구조적 폭력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았다.
남성 인물인 유세형은 공주혼의 구조적 폭력하에서 과도한 상실감과 불쾌감을 보인다. 즉 유세형의 감정이 단순하게 처리되는데, 이에 대한 의미를 같은 작품에서 구조적 폭력을 겪는 여성 인물의 감정 및 다른 작품에서 구조적 폭력을 겪는 남성 인물의 감정과 비교하여 도출한다. 작품의 독자층은 공주혼 속 남성 인물에 대한 구조적 폭력을 크게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첫째, 구조적 폭력에 반발하는 유세형의 모습은 지나친 애정 성취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여성 독자에게는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둘째, 남성 인물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부분 등이 흥미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남성 인물 역시 여성 인물과 마찬가지로 구조적 폭력으로 고통받는다는 것을 그려내었지만, 구조적 폭력을 결국 전복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서술자 의식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This study would investigate the emotional aspects the male characters show under the structural violence and their meanings, focusing on structural violence to male characters in princess marriage in Yussisamdaerok and also investigate how the readers looked at the violence. To reveal this, this study received help from Johan Galtung's concept of structural violence.
Male character Se-hyeong Yu shows an excessive sense of loss and displeasure under the structural violence of princess marriage. Concerning the simple processing of emotions like this, the meaning would be examined, comparing female characters in the same work and male characters in other works. The readers of the work look at structural violence to male characters broadly from two perspectives. First, Se-hyeong Yu's resistance against structural violence was associated with the achievement of excessive affection, and such a part might give vicarious satisfaction to female readers. Second, the part in which the male character changed from a victim to an offender acts as an element that interests the readers. However, it illustrated the fact that like women, men suffered pain from structural violence, but in that ultimately, it did not turn over the structural violence, there is a limi-tation in the narrator's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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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산문답(毉山問答)」 이본 연구

저자 : 채송화 ( Chae Song-hwa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7-1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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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 이본을 망라하여 소개하고 비교 분석하였다. 새로이 발굴한 전남대본 『담헌집』「의산실언」과 숭실대본 『담헌서』「의산문답」을 비롯하여 고려대본 『의산문답』과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박규수 소장본 『의산실언』 모두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현존하는 3종의 필사본 이본과 활자본 『담헌서』「의산문답」을 비교하면 오자, 윤문, 분단 수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의산문답」 이본은 「의산실언」 계열과 「의산문답」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두 계열은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본 간 차이를 분석하여 그 선후 관계를 밝혔다. 「의산문답」 이본 간의 차이는 작품 해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홍대용 문집 편찬 과정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This article introduces the current status of Hong, Dae-yong(洪大容)'s written Uisanmundab(醫山問答) variants. This paper examines the newly discovered Damheonjib (湛軒集) housed b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he Damheonseo(湛軒書) housed by Soongsil University, Uisanmundab(醫山問答) housed by Korea University, and Park Kyu-soo(朴珪壽)'s collection of Uisansil-eon(醫山實言) a book only left on records. By comparing the three currently existing manuscripts with the printed version of the Damheonseo Uisanmundab three differences can be found.
This article can be divided into two major groups. Which are 1. Uisansil-eon group variants, 2. Uisanmundab group variants. These two groups are different in content as well as in title. The differences were analyzed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was revealed. These differences present new possibilities in the interpretation of works, and provide clues for the study of the compilation process of the whole Hong Dae-yong's literary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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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네이션의 번역이 네이션의 자격을 둘러싼 정치적 계쟁의 장이었음을 살펴보는 연속 연구의 일환으로, 19세기 중후반 국제법과 제국주의의 법정초적 폭력 사이의 내재적 관계가 네이션 개념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살펴보았다. 유럽의 국제법은 먼저 자연법의 보편주의를 벗어버림으로써 비서구의 타자들을 법 바깥으로 밀어냈고, 이후에는 유럽의 국제법이야말로 보편적임을 주장하면서 그들을 법 바깥에서 붙들었다. 동아시아에 번역되어 큰 영향을 끼쳤던 헨리 휘튼과 J.C.블룬칠리의 국제법 저작들은 서구 국제법의 '보편화' 과정이 nation의 함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휘튼은 nation을 people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 사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지만, 국제법을 오로지 문명화된 nations 사이의 실정법으로 정의함으로써 비서구를 법 바깥으로 배제한다. 반면 블룬칠리는 국제법이 보편적 인륜성에 기초한다고 전제하지만, 국제법의 주체인 nation을 people 일반과는 달리 '보편적' 인륜성(서구적 문명)을 향한 진보에 기여할 자격을 지닌 정치적 집단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이들의 저작을 번역한 마틴의 『만국공법』과 『공법회통』에서 nation은 독자적 개념으로 포착되지 못한 채 삭제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국제법의 유래인 제국주의의 법정초적 폭력을 은폐하는 역할을 했다.


This article is a part of a series essays on the concept of 'nation' as a field of political struggles over the qualification of the nation. This article, relying on the postcolonial reinterpretation of the 'sovereignty', examined the intimate relations between the international law and law-founding violence of the Western imperialism. European international law first excluded others from the law by breaking itself from universalism of the natural law and then captured them outside the law by declaring that the European law itself is 'universal'. Henry Wheaton's and J.C.Bluntschli's works on the international law, which were translated in East Asia by A. P. Martin and exerted great influence on the region, apparently show how the 'universalization' of the European international law changed the concept of nation. Wheaton used 'nation' as a synonym of 'people' which refers to any cultural society of the world, defining the international law as the positive rules confined to the nations of the civilized Europe. On the other hand, Bluntschli insisted the jurisdiction of the international law reach all the world but restricted the definition of nation to the equal legal subjects qualified with presumably universal, European civilization. However, in A. P. Martin's translations of their works, 萬國公法 and 公法會通, nation was not grasped and translated as a concept, which resulted in concealing law-founding violence of the European international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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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세기 초 판소리 공연 환경의 변동과 서민 향수층의 행방

저자 : 이태화 ( Lee Tae-hwa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5-20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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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환경의 변화는 단순히 장소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 공간의 확장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공연의 향수층도 바뀌는 것이 아니라 폭넓어지고 두터워진다. 다만 어느 시기에 어떤 공간이나 향수층이 보다 큰 영향을 끼치는가에 따라 판소리 공연문화의 특색이 달라져왔고, 대개의 판소리사 논의 또한 그와 관련한 흔적들에 주목했다. 그런데 판소리 향수층은 이원적으로 상정해 두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왕에서부터 중인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보수를 주며 광대를 부를 수 있는 이들을 주도적 향수층이라 부를 수 있다면, 소문을 듣고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서민 이하의 사람들은 추종적 향수층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수 자체는 후자가 훨씬 많을 것이고, 이들이 바로 민중예술인 판소리의 향수층 기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의 기록에 이 구경꾼들의 모습은 존재하기는 하되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신문과 잡지가 상업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에도 마찬가지다.
본고에서는 1900년대의 협률사 희대와 1910년대의 광무대를 중심으로 판소리 서민 향수층의 존재 양상을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협률사 희대와 그를 이은 원각사, 그리고 광무대에 이르기까지 극장은 주로 상층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정착되어 간 탓에 도시의 서민들이 극장을 통해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연희를 즐기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당대의 기록자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은 영역이었기 때문이거나 실상 주목할 만한 특이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10년대가 되어 다수의 도시 서민을 대상으로 삼는 극장의 영업 양상이 본격화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판소리의 통속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즉 극장 문화 전반은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연행되는 판소리나 구극은 정통성의 훼손과 함께 이후에 가속화될 침체일로에 들어섰던 것이다. 판소리가 찾아가서 즐기는 공연물이 아닌 보호해야 할 유산이 되었다는 현실에 동의할 때, 그러한 변화의 시작은 향수층 앞에 놓인 극장의 문턱에서 비롯되었다. 근대화의 흐름이 급격히 밀려오던 20세기 초반에 판소리는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들에 대응하기 위해 통속화를 택했으며, 그에 따라 서민 향수층이 정통성을 지닌 판소리를 감상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Changes in the performance environment do not simply mean the movement of places, but also the expansion of possible space. Similarly, the audience for the performance does not fluctuate, but rather becomes wider and thicker. However,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Pansori performance culture have changed depending on which space or audience influence more, and most of the discussions on Pansori history have also focused on the traces related to it. However, the Pansori audience needs to discuss the issue with a two-way approach. Those from the king to the middle class who can invite artists with a certain amount of remuneration can be called the Leading audience. On the other hand, people below the working class who listen to rumors and go around looking for performances are a Follow-up audience. Of course, the latter will be much larger, and they will be the foundation of the Pansori audience, a folk art. However, in records prior to the 20th century, the onlookers exist, but rarely are described in detail. This is the same in the early 20th century, when newspapers and magazines began to be published commercially.
In this paper, I put the Hyeopryulsa(協律社)'s Huidae(戱臺) of the 1900s and the Gwangmudae(光武臺) of the 1910s at the center of the discussion, and looked at the appearance of plebeian audience of Pansori. As a result of the review, it was difficult to find concrete aspects of the city's ordinary citizens enjoying traditional entertainment, including Pansori, because the theater was largely established as a cultural space for members of the upper class society.
It could be because the recorders at that time did not pay much attention to the area, or because there were not many notable specialties in reality. In the 1910s, the business of the theater, which was aimed at a large number of urban residents, began to take full swing. However, this was also a time when Pansori secularization was active. In other words, theater culture as a whole has become the center of popular culture, but the Pansori or old drama that is carried on in it has entered into a recession that will accelerate in the future, along with the damage to its traditional character. When we agree with the reality that Pansori has become a heritage to protect, not a performance to visit and enjoy, the beginning of such a change came from the threshold of the theater in front of the audience. In the early part of the 20th century, when the tide of modernization was rapidly rising, Pansori chose secularization to cope with new and curious attractions, thereby reducing the chance for ordinary people to appreciate traditional pan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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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경전에서 텍스트로 : 20세기 초 『詩經』에 대한 근대 시인들의 인식 변화

저자 : 정기인 ( Chong Ki-in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7-2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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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까지 시의 유일무이한 경전의 위치에 있던 『시경』은 20세기 초반에 그 절대적 권위를 잃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전면적인 단절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서 다양한 시인들에 의해 점차 변화되었음을 이 글은 밝혔다.
최남선과 이광수에게 『시경』은 절대적인 경전의 지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세계 문학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최남선에게 『시경』은 동서고금 보편적인 시를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반면에 이광수에게 『시경』은 “남의 것”이었다. 김동환과 김억에게도 마찬가지로 『시경』은 조선어로, 조선적 시 형식으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타자의 것이었다. 여기서 김소월은 더 나아가, 『시경』과 이와 관련한 공자의 말은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는 공자가 지양한 “鄭聲衛音”을 지향하고, 공자가 지향한 “哀而不傷”을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시 세계를 정립했다.
이처럼 『시경』은 처음에는 시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으로, 나중에는 반면교사로 한국 근대시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The Book of Odes(『詩經』) was poetry's unique scripture until the Choson Dynasty. But it lost its absolute authority in the early 20th century. This did not happen overnight, it gradually changed by various poets over the decades.
For Ch'oe Namson and Lee Kwangsu, The Book of Odes did not occupy the position of absolute scripture, but it had the authority as an important world literature. In particular, for Ch'oe The Book of Odes was the standard to explain universal poetry. On the other hand, for Lee, it was a “other's book”. For Kim Ŏk and Kim Tonghwan, The Book of Odes was other's book which had to be translated into Korean language and poetry form. For Kim So-wol, The Book of Odes and the words of Confucius in relation was something to be avoided. He established his own world of poetry through the rejection of Confucius's aim of “鄭聲衛音” and aimed at Confucius' rejection of “哀而不傷”.
As such, The Book of Ode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modern Korean poetry, first as a universal standard for poetry and later as a rejection o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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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독립신문』 소재 이광수 논설의 재검토

저자 : 최주한 ( Choi Ju-han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7-26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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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상하이 시절 이광수의 문필활동 및 사상을 논구하기 위한 전제로서 『독립신문』 소재 이광수의 논설을 특정하고 그 의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광수의 상하이 시절은 이광수 연구에서 가장 취약한 시기에 속한다. 2·8 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상하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관여하며 다방면의 눈부신 활동을 펼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필활동 및 사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더욱이 이 시기 이광수 문필활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독립신문』 소재 논설마저 그 윤곽이 구체적으로 규명되지 않은데다 대상 작품이 아직껏 정전화되어 있지 않아 접근이 어렵다. 이에 본고에서는 '天才'라는 필명, 이광수의 휴무기간 사설란의 성격, 기존 연구에서 집필자가 주요한으로 특정되어 배제된 사설 7편, 사설란 외의 기명·무기명 논설의 재검토를 통해 『독립신문』 소재 이광수의 논설 목록을 특정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이광수 연구에서 『독립신문』 소재 이광수 논설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논하였다. 본고의 논의는 상하이 시절 이광수의 문필활동 및 사상에 대한 온전한 규명, 나아가 대륙방랑시절의 독립준비론 이래 2차 유학시절과 귀국 후의 활동을 잇는 사상적 연속과 단절에 대한 고찰 등 후속 연구의 기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termine Lee Kwang-su's editorials in The Independent Newspaper and to discuss its importance as a precondition for Lee Kwang-su's writings and ideas during the Shanghai era. Lee Kwang-su's Shanghai era is one of the weakest periods in research of Lee Kwang-su. Despite the fact that it was a time of many activities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his writing activities and thoughts were not well known in this time. Moreover, even his editorials in The Independent Newspaper, which is the core of his writing activities, is not clearly identified and the target works have not yet been determined. In this article, I determined list of Lee Kwang-su's articles in The Independent Newspaper by reviewing the pen name “天才”, the character of the editorial column during Lee Kwang-su's absence, the editorials of seven excluded in the previous research. And based on this, I discussed the status of his editorials in The Independent Newspaper. This discussion will be the basis for further research such as a study of Lee Kwang-su's writings and ideas during the Shanghai era, as well as a review of ideological continuity and disconnection between activities after returning home from secondary studying ab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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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신문지법과 필화의 사이 : 『신생활』 10호의 발굴과 연구

저자 : 박현수 ( Park Hyun-soo )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간행물 : 민족문학사연구 6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9-30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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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법에 의해 처음 발행되었다는 점, 이후 필화사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점, 또 사회주의 운동조직과의 관계를 말해준다는 점 등에서, 『신생활』 10호가 지니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신생활』 10호는 1922년 11월 4일 발행되었는데, 그때까지 『신생활』은 거듭된 발매금지와 압수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연대를 나타내는 제호와 표지장화는 『신생활』 10호에 이르러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세 븨씀에關한一考察」, 「國際運動小史」, 「民族主義와코쓰모포리타니즘」 등의 글은 볼셰비즘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고리키를 소개하거나 마르크스나 레닌의 글을 번역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로 보인다. 「所謂民族一致와活字魔術」, 「民族主義와 푸로레타리아運動-「東明」의朝鮮民是論을駁함」 등은 민족주의와 그것을 주장한 『동명』에 대해 비판한 글이다. 「分明□事 實에對□ 想涉君의誤診」은 염상섭에게 진정한 개혁론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동포'라는 말을 사용했는지를 거듭해서 확인한다. 한편 이 논문은 유실된 8면에 「物價調節과無産階級」, 「生活改善과無産階級」 등이 게재되었음을 추정했다. '신생활사'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와 노선을 달리 했던 김명식, 유진희 등과 민족주의 계열과 분리를 시도한 '서울청년회'의 일부가 결합한 것이며, 그 지향을 분명히 한 것이 『신생활』 10호에서였다. 한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동조를 내세운 『신생활』의 입장에서는 『동명』에서 일하게 된 염상섭의 음영을 지워내는 일 역시 필요했다.


New Life(新生活) 10 was first issued by press law. We can also find traces of serious slip of the pen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socialist movement organization. New Life 10 was issued on November 4, 1922. Until then, New Life has been repeatedly prohibited from the sale and seized. The sign indicating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of the proletariat symbolizes change. The writings in New Life 10 make the following claims. First, it discusses Bolshevism and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It is also for the same reason that introducing Goriki or translating the text of Marx or Lenin. Second, it criticizes nationalism and The Bright of East(東明) that it claims. Third, ask Yeom Sang-sub whether he is a true reformist and make sure he uses the word 'compatriots'. This paper, on the other hand, speculated on what was on the missing eight pages. Considering the argument of New Life 10, 'The Corporation of New Life' is understood as a combination of the following two organizations. One is Kim Myeong-sik and Yu Jin-hee who had different routes to the domestic departments of 'Shanghai Communist Party'. The other is part of the 'Seoul Youth Group' which attempted to separate it from the nationalism. The writings of New Life 10 make two big claims. It reveals the image of New Life published by press law and also allows access to the serious slip of the pen of New Life indirec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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