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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고대 update

Prehistory and Ancient History

  • : 한국고대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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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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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59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564
선사와 고대
59권0호(2019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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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 학계의 종족 고고학 연구현황과 과제

저자 : 강봉원 ( Kang Bong-wo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4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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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한국 학계 종족 고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주민의 이주'와 '문화 전파'에 의한 설명에 반론을 제기하고 토착인들의 계기적인 진화와 발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한반도의 종족은 홍적세 이래 거주하고 있던 구석기인들이 중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를 지나면서 독자적으로 형성 진화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과거 한국에는 '구석기시대'는 물론이고 '청동기시대'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우리나라고고학의 성장과 발전에 의해 이제 이 학설들은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은 '1000'곳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구석기 유적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한반도에 많은 구석기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주민 구성을 논함에 있어서 '고 아시아족(Palaeo-Asiatics)' 혹은 '고 시베리아족(Palaeo-Siberians)'이남으로 이주하여 온 것이라는 것이 대세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시베리아에서 이주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다른 한편, 고조선을 수립한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요서나 요동지방에서 이주해 온 '예맥(濊貊)'족이라는 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럴 경우 한반도에서 발굴조사 된 신석기시대 유적에 거주하였던 주민들은 부지불식간에 간과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선진(先秦) 문헌에 예맥이 등장하며 이들이 우리 종족의 일부를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그간 확인된 많은 수의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고려하면 구석기시대 이래 한반도에 거주하였던 토착주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하였을 것이라는 측면에 주의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일부 유물과 유구에 보이는 공통적인 속성을 거론하여 종족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This paper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local indigenous peoples' independent development from Palaeolithic to the Bronze Ages in prehistoric Korea. This paper argues that 'migration' and 'diffusion' should be reconsidered as primary factors to explain the formation of ethnicity in prehistoric Korea. In Korean archaeology, Palaeolithic did not exist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1960s. In addition, the Bronze Age was not recognized by the majority of scholars until the second-half of the 1970s either. The rapid growth of Korean archaeology has made it possible to accept the presence of the two ages.
Over one thousand Palaeolithic archaeological sites have been identified in the Korean peninsula so far. This indicates that a great number of Palaeolithic people lived in the Korean peninsular during that time period. When Korean archaeologists were discussing about the composition of ethnicity during the Neolithic, 'Palaeo-Asiatics' or 'Palaeo-Sibeirans' were considered to have migrated into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Maritime region. According to the archaeological excavations conducted in Korea so far, however, a number of Neolithic sites turned out to be much earlier than the sites assumed to have had been formed by immigrants from either Siberia or the Maritime regions.
It has been widely accepted that the Bronze Age people who may have founded Gojoseon (古朝鮮) were 'Yemaek(濊貊)' who were allegedly immigrants from Liaoshi(遼西) or Liaodong(遼東) regions. This paper pointes out that if that is the case, archaeologists are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ignoring the indigenous people who had lived in the Neolithic sites that have been excavated in the Korean peninsula so far.
Yemaek, one of the ethnic groups, appears in Chinese historical documents compiled before Jin(秦) Dynasty and they may be an ethnic group of early Koreans. Considering a number of both Neolithic and Bronze Age archaeological sites which have been identified so far in Korea, we cannot rule out the possibilities that the indigenous peoples who had been inhabited in the Korean Peninsula may have developed over time. This is the focal point of this paper and I emphasized that we have to pay a close attention to that aspect. I also brought up the issue that we have to be very careful not to determine the same ethnicity based on the superficial observation about the similarities in artifacts and features between one group of people and the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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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서 지역 등대식양익형 청동 꺾창의 등장과 전개의 역사적 의미

저자 : 이성재 ( Lee Seong-jai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5-8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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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식양익형(약칭 양익형) 청동 꺾창은 등대·피홈·양익·짧은 슴베 등이 특징인 'ㅓ자형태의 독특한 요령 지역 토착 무기이다. 양익형 꺾창은 요서 지역에서 대략 서기전 4세기전반 초·중엽에 비파형동검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연의 호내식 꺾창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여 서기전 3세기 초까지 사용되었으며 뒤에 연의 호내식에 오히려 영향을 주었다.
고대 중국의 전형적인 꺾창인 호내식은 전차 위에서 전차에 탑승한 적의 목을 베거나 자르는 데 편리하도록 고안된 무기이다. 이에 반하여 양익형은 예각인 착병 각도, 비교적 짧은 자루 길이, 등대의 존재를 통해 근접 전투 시 사용하기 위해 고안된 타격 병기임을 알 수 있다. 요서 지역의 동검은 길이가 짧아 자위적 성격이 강하고, 찌르는 창은 검보다 공격 범위가 넓고 살상력이 비교적 강하지만 방어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하여 단병인 양익형은 동검보다 공격 범위를 연장할 수 있고 살상력이 강하면서도 가벼워 한 손으로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손으로 방패 등의 방어구를 드는 것이 가능하다. 요컨대 요서지역 토착 세력이 기존 무기 체계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원계 호내식을 근접 보병 전투에서 살상력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고안한 것이 양익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시대 이후 북방에서 동호가 세력을 확대하고, 연과 고조선이 대립하는 등 동북아시아지역의 정치·군사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양익형이 등장하여 유행한 시기와 지리적 범위는 위와 같은 국제 정세와 대체로 부합하고 있다. 따라서 양익형은 주변 세력과의 정치·군사적 갈등 속에서 요서 지역 토착 세력의 효율적인 살상 무기 제작에 대한 관심과 무기 제작측면에서 연산 이남 지역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요서지역에서 근접 전투 전용의 타격 무기인 양익형 꺾창이 사회적 위세와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무기로 제작되고 고위 신분의 특수 집단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요서지역에 보병이 존재했으며 보병이라는 병종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The Raised median ridge type double winged bronze kkeokkchang dagger-axe(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 is a unique indigenous weapon in liaoxi region in the form of ' ' shape, characterized by a raised median ridge, blood grooves, two wings and a short tang.
The 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s appeared in the Liaoxi region in the early or mid 4th century BCE, inheriting the tradition of Mandolinshaped bronze dagger culture and they were influenced by Hunei(胡內) type ge dagger-axes of Yan. They were us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third century BCE and influenced the Hunei type ge dagger-axes of Yan.
Ancient China's typical Hunei type ge dagger-axe is a weapon designed to make it easier to cut off the enemy's neck on a chariot. On the contrary, 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 is a striking weapon designed for use in close combat through the acute angle between the blade and the shaft, the short shaft length, and the raised median ridge.
Bronze dagger in the Liaoxi region takes a role of self-defense because of its short length. The stabbing spear has a wider range of attack than the bronze dagger and a relatively strong killing power, but it is difficult to defend. However, since 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 has longer attack distance than bronze dagger, and is not only stronger but also lighter, it can be used with one hand, so it is possible to take shield with the other hand. In short, it can be said that the indigenous forces of Liaoxi region had devised a 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 to complement the lack of existing weapon systems and to increase killing power in close combat.
After the Warring States Period, political and military conflicts in Northeast Asia had increased steadily. For example, in the north, Donghu extended its forces to the south, and Yan and Gojoseon clashed. 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 shows interest in making weapons with strong lethality of indigenous forces in liaoxi region in political and military conflicts with surrounding forces. And this is an artifact showing close interaction with the areas of south of Yanshan(燕山) in terms of weapons production.
The fact that Double winged kkeokkchang dagger-axe, a close combat weapon in the Liaoxi region, was made of a bronze weapon symbolizing social authority and used by a high-ranking special group indicates that infantry existed at that time and social evaluation of infantry was not 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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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여(夫餘)의 천하 중심의식 고찰(考察)

저자 : 윤상열 ( Simon Yun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1-10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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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광개토왕릉비에도 보이듯이 천하관과 연계되는 일정한 중심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주었던 부여 역시 초기적인 중심의식을 갖추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전승은 여러모로 해모수신화와 비슷한데 이는 양 신화가 공통적인 전승에서 갈라져 나와 각각 중국과 국내전승의 형태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즉, 동명과 해모수는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의 발생은 국내전승에서 중국 측 사료에 정착할 때 원래 신화의 신성성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부여시조의 원래 신화 형태는 해모수 신화의 내용대로 하늘의 혈통을 받은 지상 최고의 중심존재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부여의 지배구조를 통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존재했고 비록 고조선처럼 분봉적 요소가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출도'의 예에서 보이듯이 지방세력들도 일정한 권력분점을 바탕으로 왕권으로 집약되는 특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고조선 멸망이후의 세력공백을 이용해 고조선의 '동방세계' 상당부분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놓았고, 따라서 부여가 동방세계를 자신을 중심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의식한 중국 측 기록에는 이러한 부여 帝王의 위상이 '天子'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부여의 건국신화지배구조대외관계를 검토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부여의 중심의식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Koguryo, as displayed in the Gwanggaeto Stele, had a certain centrism based on its world view. So it would be logical to hypothesize that its historical mentor Buyeo may have had some elements of its own centrism as well. Buyeo's foundation myth has two versions, because the original form changed according to the accommodation pattern of Chinese and Korean, Dongmyeong and Haemosu respectively, records. In other words, the Buyeo founder Dongmyeong and Haemosu both refer to the same subject. This difference occurred since the Chinese form obviously eliminated any signs of sanctity from the prototype, while the Korean side retained the essential motif, which basically embodied the notion that the heavenly founder and the state were the most ultimate beings on earth.
When analyzing the ruling system of Buyeo, one can ascertain that although enfeoffment structure cannot be easily traced as Old Joseon, there were indeed local powers like Sachuldo subduing to strong kingship in return for certain sharing of power. Externally, Buyeo managed to capitalize on the aftermath of Old Joseon's demise by bringing much of Joseon's 'world' under its influence. Chinese documents clearly were aware of Buyeo's centrism, as they expressed the status of Buyeo king as '天子'. Thus, it is the conclusion of this article that there is a considerable possibility that Buyeo centrism did exist through studying Buyeo's foundation myth, ruling system and internation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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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종시(世宗市) 백제(百濟) 운주산성(雲住山城)의 축조(築造)와 운용(運用)

저자 : 정운용 ( Jung Woon-yo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5-1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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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를 포함하여, 세종시를 둘러싼 천안 목천이나 청주 문의 등은 土質이 좋은 곡창이다. 또 목천은 전근대사회에서 전략 자원이라 할 수 있는 鐵과 함께 牛馬가 많이 산출되던 곳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의 지역의 토산으로 鐵을 언급하면서 鐵場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전의 전동 지역은, 주변의 곡창과 함께, 철 소 말 등 생산과 군사 전략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아울러 전의 전동 지역은 공주 부여와 교통로 작전선 상에서 직접 연결되는 곳이다. 이러한 점이 운주산성의 입지와 축조 운용 문제를 검토할 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여러 地理志를 검토한 결과, 조선 중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이 편찬될 당시 지금의 雲住山은 高山으로, 雲住山城은 高山山城으로 명명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여지도서 에서는 고산이 雲注山으로, 고산산성이 雲注山城으로 개칭되었다. 여지도서 의 雲注山雲注山城이 지금의 雲住山雲住山城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대동지지 는 지금의 금성산을 운주산으로, 지금의 李城과 金伊城(金城山城)을 각각 운주산북성과 운주산남성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아마 전의 전동 지역 현지에서는 당시까지 여전히 금성산을 운주산으로 관념하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운주산성은 일부 조사된 성벽의 축조 방식에 의해 그 축조 국가를 확정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운주산성 출토 백제 토기편이나 기와편에 주목하였다. 특히 일정한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이루어진 축성은 백제 중앙의 기술이 적용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 內城수습 백제 기와편에 주목하여 운주산성의 축조는 백제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삼국사기를 참고하여 운주산성은 백제 무왕 때인 6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가 신라나 고구려의 침공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로 축성한 것이라 추정하였다.
즉, 운주산성은 백제 무왕 때 웅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함으로써 사비 도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군사적 측면에서 축조된 것이라 여겨진다. 이때 높은 산에 입지한 운주산성은 공주 부여 지역으로 진군하고자 하는 신라나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하여 대규모 산성의 존재를 과시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백제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본다. 또 운주산성의 내성에는, 지금의 西門과 연관하여, 산성 전체를 지휘하는 지휘부 건물이 입지했을 것이라 추정해 보았다.


Including Sejong City(世宗市), Choenan Mokchoen(天安木川) and Cheongju Moonui (淸州文義) and others surrounding the city have good soil quality. Also, Mokchoen is the place where iron, cattles, and horses that can be used as a battle resource are produced abundantly. In addition, iron was a regional speciality in Jeonui(全義), and there is a record that the region had an iron field in the period of Joseon Dynasty(朝鮮時代). In other words, Jeonui Jeondong(全東) Area was surrounded by granary zone, moreover, there were plenty of military strategic resources such as iron, cattles, and horses. Besides, Jeonui Jeondong Area was the region directly connected to Gongju(公州) Buyeo(扶餘) as a traffic route and lines of military operations. These points should be considered when viewing the location, foundation, and operation of Unju Mountain fortress.
Meanwhile, investigating multiple geographies of Joseon Dynasty, Unju Mountain and Unju Mountain fortress were named as Go Mountain(高山) and Go Mountain fortress(高山 山城) according to Shinjeung Donggukyeojiseongram(新增東國輿地勝覽) in the mid- Joseon. Then, according to Yeojidoseo(輿地圖書) in the latter part of the 18th century, Go Mountain and Go Mountain fortress were renamed Unju Mountain(雲注山) and Unju Mountain fortress(雲注山城). Unju Mountain(雲注山) and Unju Mountain fortress(雲注山城), mentioned in Yeojidoseo, is the Unju Mountain(雲住山) and Unju Mountain fortress (雲住山城) we know in the present. Even so, Daedongjiji(大東地志), compiled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clarified the currently called Geumseong Mountain(金城山) as Unju Mountain(雲住山), and named Yiseong(李城) and Geumseong Mountain fortress(金城山城) as North Unju Mountain and South Unju Mountain fortress each. This is probably resulted from the idea in Jeonui Jeondong Area themselves that Geumseong Mountain is Unju Mountain.
There is difficulty to ascertain the construction country of Unju Mountain fortress only with the construction method of the fortress wall which was partially investigated. Therefore, in this article, attention is paid to the several buildings and roof tiles excavated at Unju Mountain fortress. Particularly, it is understood that using a certain size of bricks for a fortress based on the application of main technology, and focusing on the pieces of roof tiles that were collected from the inner fortress(內城), the construction of Unju Mountain fortress is based on Baekje(百濟). Also, considering the record of Samguksaki(三國史記), Unju Mountain fortress was built during the time of King Moo(武王) in about 630 to express the intention to shield from the invasion of Goguryeo and Shilla beforehand.
In other words, it is considered that Unju Mountain fortress was built for the military purpose to protect the capital city Sabi(泗沘) by strengthening the defense ability of Woongjin(熊津) in the period of King Moo. Unju Mountain fortress, located on a high mountain, is regarded as a reflection of purpose of Beakje that the massive fortress, showing off the existence itself against the military force of Silla and Goguryeo trying to march on Gongju Buyeo Area, would block the enemy's sharp attack in advance. In addition, it is estimated that the control tower which commanded the whole fortress was located inner for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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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급중학교 중국역사 교과서(2016년 판)의 한국고대사 서술 내용과 특징 -구판(2014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저자 : 양승훈 ( Yang Seung-hun ) , 박현숙 ( Park Hyun-soo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1-16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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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교육은 문화대혁명 이후 기존의 계급투쟁 중심에서 벗어나 애국주의에 기초한 민족통합 기조 강화로 변화하였다. 이는 역사교과서에서의 자국사 중심 서술로 구현되었으며, 1990년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정립과 함께 더욱 체계화되었다. 동북공정 등 정부 주도의 역사공정은 외연 확장을 통한 자국사 중심의 역사 재해석의 정점이었고, 그 결과물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2016년에 새로이 간행된 『의무교육교과서 중국역사』는 10년 만의 개정판으로서, 교과서 내용 역시 민족통합 논리와 자국사 중심 논리가 한층 구체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2014년 구판 교과서와의 비교 대조를 통해, 2016년 신판 교과서의 한국고대사관련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신판 교과서는 정치사 위주의 편년식 서술에 스토리텔링 요소를 가미하여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소수민족에 대해 우수한 중원 문명과 漢族문명의 영향을 받아 漢化되어, 오늘날의 '한 가족'을 이루었다는 논리를 한층 직접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민족통합 기조의 강화를 엿볼 수 있다.
한국사 서술은 1990년대 이후 단편적 나열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그 비중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 그나마 주요한 소재로 다루어지던 당-신라 관계마저 2016년 판 교과서에서는 온전히 제외되었다. 인접 국가로서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유지했던 한국사를 정면으로 다루던 부분은 모두 삭제되었으며, 피동적인 교류대상으로 언급되는데 그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첨부된 지도 자료에서는 전국시대부터 한반도 지역이 중국의 영역으로 표기되고 있다. 왜곡된 변경 인식과 역사 서술의 축소는 학습자로 하여금 한국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After the Cultural Revolution, history education in China changed from a class-struggle centered to a reinforcement of national integration, which is based on patriotism. This is shown through a Chinese-centered narration in history textbooks, and it became systematized with an establishment of Unificative Multiracial State in 1990s. Government-lead historical projects, such as Northeast Asia Project, was a peak of reinterpretation of history in the perspectives of China, and the results were actively reflected in the curriculum and textbooks.
『Compulsory Education Textbook Chinese History』(Yanbian Education Press), newly published in 2016, is a revised edition in 10 years and is nation's only government-authorized textbook that was issued with political change that occurred in 30 years. Returning to such system can be interpreted as a willingness to further reinforce the implantation of governmentled ideologies. In fact, the contents of textbooks are more specific and systematized in the logic of national integration and the logic of national history.
In this paper, the contents of the new textbooks, especially on the parts about Korean ancient history, were analyzed through comparing and contrasting with the previous editions of textbooks. The new textbook, focusing on political history, introduces detailed accounts of the rise and fall of various dynasties by adding a storytelling element to a chronology. The emphasis that minorities, through the influence of superior Chinese civilization, have become sinicized and as a result, formed a 'one family' today, shows an effort to strengthen the national integration.
Since the 1990s, the parts on Korean history has remained as a mere fragmentary arrangement, and its importance has been declining sharply. Even the Tang-Silla relationship, which had been covered as main subject matter, was completely excluded from this textbook. All parts that described Korea as a neighboring country, which maintained a various political and cultural relationship, have been deleted, and instead, Korea is only mentioned as a target of passive exchange. And according to the map attached in this text, Korean Peninsula is marked as Chinese territory since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Because it is a great concern that distorted alterations and reduction of history instill a false perception about Korean history, it needs to be impr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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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발해사 서술 현황과 그 문제점

저자 : 김종복 ( Kim Jong-bo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1-19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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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사학계에서는 당위로서의 남북국시대론과 현실로서의 통일신라론이 논쟁중이다. 물론 후자에서도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지만 신라와 발해의 위상이 같지 않다고 보고 있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도 통일신라론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 신라의 성립 이후에 발해의 건국과 발전을 배치함으로써 삼국에서 남북국으로의 전개 과정을 단절시키고 발해를 부수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는 이상, 발해사를 한국사 속에서 부각시키는 구성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행 교과서들의 또다른 문제점은 통일 신라의 영역이 대동강~원산만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나당전쟁 직후 임진강에 그쳤던 신라의 서북 경계선이 대동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와 당의 충돌 때문이었지만, 이에 대한 서술이 없다. 또한 발해가 대동강 이북을 포함한 요동지역을 차지했다고 서술하지만, 대동강~원산만을 경계로 서로 접한 신라와 발해가 거의 교섭이 없었던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한반도 서북부를 포함한 요동지역은 신라와 발해와 당 삼국간의 완충 지대였다.
이처럼 현행 교과서는 신라와 발해를 각각 단절적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많다.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한다는 당위론에서 벗어나 신라와 발해를 하나의 단위로서 서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Korean historical academics are arguing over the North-South States Period theory as Sollen versus the Unified Silla theory as Sein. Although the latter recognizes Balhae as part of Korean history, it does not see that Silla and Balhae have the same status. Current high school Korean history textbooks focus on the Unified Silla theory. They thus place the founding and development of Balhae after the establishment of Unified Silla, thus cutting off the process of developing into the South-North States from Three Kingdoms, and presenting Balhae as a subsidiary state. This is causing problems. So long as the history of Balhae is recognized as part of Korean history, there is a need to think seriously of how to highlight the history of Balhae in the Korean history.
Yet another problem of the current textbooks is that they define the territory of Silla as far as the border line of Daedong River to Wonsan Bay. Right after the Silla-Tang war, Silla had its northwestern border line just as far as the Imjin River, but could extend it to the Daedong River because of Balhae-Tang confrontation, which was not described in the textbooks. Further, they describe Balhae as occupying the Liaodong area including the area north of the Daedong River, but they fail to explain how Silla and Blahe, neighboring each other by the border of Daedong River to Wonsan Bay, had little diplomatic relationships. The then Liadong area, including the northwest Korean peninsula, was a buffer zone among three states of Silla, Balhae and Tang.
As such, current textbooks are significantly inclined to present a disconnected description of Silla and Balhae. There is a need to describe Silla and Balhae as a unit away from having to include the history of Balhae in the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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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 분석 -고대사 부분의 서술내용을 중심으로-

저자 : 정동준 ( Jeong Dong-ju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5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5-22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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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2009 교육과정에 의거한 2014년판 8종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를 검토하여 고대사 부분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을 분석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종 교과서 공통의 지적사항으로는 사실관계의 오류, 균형이 잡히지 않은 서술, 최신 성과의 누락 또는 미반영을 들 수 있었다. 사실관계의 오류로는 노비의 수공업 생산, 장보고의 사망연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서술로는 한민족의 형성, 백제의 역사 편찬, 발해 유민의 고려 귀부, 최신 성과의 누락 또는 미반영으로는 고대국가, 백제의 멸망 원인, 아프라시압벽화의 고구려 사신 등과 관련된 일련의 서술을 들 수 있었다. 이들 서술 중 상당수는 국정교과서 국사 의 서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일부는 심지어 국정교과서 국사 보다 후퇴한 측면도 보였다.
민족주의적 서술로는 단일민족 형성과정의 강조, 연대 끌어올리기, 영역의 과장, 주변국가에 대한 잘못된 정보 등을 들 수 있었다. 단일민족 형성과정의 강조는 삼국통일과 민족형성의 문제, 연대 끌어올리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 시기, 고이왕대 정책들 중 6좌평의 설치, 영역의 과장은 고조선의 영역, 주변 국가에 대한 잘못된 정보는 7세기의 십자형 외교, 나당전쟁의 종료과정 등과 관련된 일련의 서술을 들 수 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서술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연구성과가 충실히 반영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라 자국 중심으로 일면적인 서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왜곡된 경우가 많았다.


In this article, eight Korean history textbooks published in 2014 were reviewed to analyze nationalistic narratives in ancient history sections. A summary is as follows.
Common problems of eight textbooks include errors in facts, unbalanced descriptions, omission or non-application of the latest research results. Errors in facts include a series of descriptions related to the manual industry products by slaves, the period of Jang Bogo's death. Examples of unbalanced descriptions are the formation of the Han ethnic group, the compilation of Baekje history, and Balhae people's defection to Goryeo. Omission or nonapplication of the latest research results cases are the concept of the ancient state, the cause of Baekje destruction, and the envoys of Goguryeo in the murals of Afrasiab. Many of these descriptions followed those of the government-designated textbooks, and some even showed a retrogression from that textbooks.
Nationalist narratives can be found in the overstatement on the formation process of single ethnic group, an earlier timeframe for historical events, territorial exaggeration, and misinformation on neighboring countries. The overstatement on the formation process of single ethnic group case includes descriptions related to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and ethnic formation. An earlier timeframe for historical events include examples such as the timing of using iron farming tools and the establishment of a six-jwapyeong system during the King Goi's reign. Territorial exaggeration appears in the territory of the Gojoseon part. Misinformation on neighboring countries includes descriptions related to the cross-strait diplomacy in the seventh century, and the ending process of the Silla-Tang War. Several aspects to point out in common about these nationalist narratives are that the problems have arisen because the research achievements since the 1990s have not been faithfully reflected, and the facts have been distorted as a result of one-sided narratives based on nationalistic viewpo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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