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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JI COLLECTION OF WORKS

  • : 온지학회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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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66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742
온지논총
66권0호(2021년 0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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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김중청(金中淸)의 중국사행 송별시첩 <부경별장첩(赴京別章帖)>

저자 : 윤세형 ( Yoon Se Hy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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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청은 1614년 중국사행을 하였다. <赴京別章帖>은 김중청의 중국사행 때 67人의 知人들로부터 받은 친필 詩章들을 장첩한 것이다. <赴京別章帖>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던 분들의 육필 원고라는 점에서 사료적, 보존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김중청의 교우관계 및 당시 중국사행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Ⅱ장은 <赴京別章帖>의 제작과 전승 과정을 살폈다. <書赴京別章帖後>는 김중청이 사행을 떠날 때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들을 모아 <赴京別章帖>으로 제작한 경위를 밝힌 글이다. 김중청은 사행의 명령을 받은 날로부터 4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에 지인들로부터 전송연과 전송의 글을 받았다. 옥하관 체류시에 이를 상하 두 질의 粧帖으로 만들어 자기를 가다듬고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다.
Ⅲ장은 <赴京別章帖>의 내용을 1) 전별연의 풍속 2) 壯遊의식, 使命의식 3) 개인적 당부 4) 제자의 애틋한 정 등 네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먼저 <赴京別章帖>에 실린 인물은 당시의 저명한 관직자를 비롯하여 친족, 동료, 문인 제자 등 다양하다. 전별연의 풍속에서는 동향인 벼슬아치들이 궁궐 掌苑署에 모여 전별연을 행했음을 살폈다. 壯遊의식과 使命의식은 <赴京別章帖>의 거의 전 詩章에 나타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개인적 당부는 사신의 직무를 잘 수행하라는 勉勵가 기본이지만, 몸조심하라는 말, 시를 지어오라는 말, 사적인 부탁 등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문인 제자들의 詩章에서는 스승을 향한 제자의 애틋한 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인물의 使行에 있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送序또는 送詩를 써 주었고, 이를 帖으로 엮은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가치있는 일이다. 중국사행 관련 贈序類는 연행록 연구에 있어 중요한 항목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Kim Joong-cheong went to China in 1614. <赴京別章帖> is an augmented version of the handwritten texts received from 67 intellectuals during Kim Joong-cheong's envoy's trip to China. <赴京別章帖> has historical and conservative value in that it is a handwritten manuscript by those who represented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it is a valuable data in that it allows you to guess Kim Joong-cheong's relationship with fellowship and perceptions of envoy's trip to China at that time.
Chapter Ⅱ examines the production and transmission process of <赴京別章帖>. Kim Joong-cheong received a poem to tell goodbye from acquaintances in the preparation period of about four months from the date of receiving the order of meditation. When he stayed at the house of the house, he made it into two types of upper and lower qualities, and used it as a material to refine himself and to be alert.
Chapter III analyzed the contents of <赴京別章帖>. The people who wrote the farewell words were diverse, including renowned officials at the time, relatives, colleagues, and disciple.
I researched <赴京別章帖> by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1) Farewell banquet, 2) Recognition of 壯遊, Mission recognition 3) personal request, and 4) Heartfelt feeling of disciples. You can also glimpse the scenery of Farewell banquet. The personal request is based on a message to perform the duties of a ambassador well, but there are various aspects such as words to take care of yourself, to write a poem, and to personal requests.
The writings of the disciples occupy a large portion, and you can see the Heartfelt feeling of disciples toward the teacher. Many people wrote 送序or 送詩in envoy's trip to China, and it is very valuable that the version of the handwritten texts are preserved until now. It is necessary to study the 贈序類 related to the study of envoy's trip to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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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니산(尼山) 남정찬(南廷瓚)의 삶과 지향 - 의령 사족으로서의 위상과 관련하여 -

저자 : 김남이 ( Kim Nam Yi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83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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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경남 의령 지역 사족인 尼山 南廷瓚(1850-1900)의 문학의 특질과 지역사에서 위상을 규명한 최초의 연구이다. 본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만큼 남정찬의 연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둘째, 『니산집』에 수록된 시를 분석하였는데 그의 삶에서 경남 단성의 신안서사, 개인 정자인 유연정, 그리고 의령 남씨 가문의 공동공간인 경모재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남정찬은 가문의 당론인 노론의 春秋大義를 외치고, 사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학문적·윤리적 수련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중앙-서울의 정계와 학계에서 소외된 상태였지만 지역의 교유망을 충분히 활용하여 사족으로서 자기 책무를 향촌에서 다하고자 했다. 셋째, 『니산집』의 체재와 구성을 통해 의령 사족으로서 남정찬과 의령 남씨 가문의 위상을 추적해 보았다. 1950년대 중반 『니산집』을 편찬한 후손들은 작품배치를 통해 남정찬과 의령 남문이 노론의 자장에 여전히 속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도 문집은 영남 남인들에게 익숙하게 전수되어 오던 체재대로 편차하였다. 문집 구성 자체에서 남인의 체재와 노론의 지향을 모두 보여준 것이다. 이같은 자연스러운 혼효는 의령 지역의 학문적·사상적 특색이다. 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영남의 사족들이 처한 환경이 만든 것이다. 즉 영남의 사족들은 몇 차례의 심한 정치적 굴곡을 겪으면서 중앙-서울의 학계·정계로부터 소외되었다. 조선은 일본이 침탈 야욕을 가시화하면서 외부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이런 시대에 향촌사족으로 살면서 좁은 지역에서 당론과 당색으로 상호 대립·배제하는 것은 계층적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가문과 당론의 전통을 견지하는 한편, 한문학 전통 자산을 매개로 사족으로서 정체성과 동질성을 공유했다. 『니산집』은 그와 지역 사족의 생태적 삶의 조건과 그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This paper aims to identify the life and literature characteristics of Nisan Nam Jung-Chan who is sajok in Uiryeong, Gyeongnam and Nam Jung Chan's status in history of mentality of Gyeongham. The late 19th century to early 20th century when Nam Jung-Chan lived was a period of upheaval in history of Korea and also a period of transition of civilization. Korean studies in the 20th century have described the history of this period centering on the metadiscourse in central-Seoul region. But the recognition that this does not reflect the actuality of history wholly is now shared sufficiently. This is proven by the fact that'regionalism' or 'locality'is now an important topic in Korean studies and being addressed as practical research topic. This paper is a result of the study sketching the history of mentality of Gyeongnam region based on such problem recognition. The main data is 『Nisan Collection』 published by Nam Jung-Chan's descendants in Uiryeong in 1955.
The main contents of the body are as follows. First, the chronicle of Nam Jung-Chan was briefly summarized as he was introduced in the academic world for the first time. The life of an intellectual who had lived the period of upheaval of Daehan Jeguk in Chosun was reconfigured. Next, the poems in 『Nisan Collection』 were analyzed. Especially this study focused on the space where he pursued and shared studies with teachers, friends, and juniors. The space that had an important meaning in his life included Sinanseosa(Danseong, Gyeongnam), hyanggyo of Uiryeong, Yuyeonjeong (Nam Jung-Chan's private villa), and Gyeongmojae (community space for Uiryeong Nam family). In such spaces, Nam Jung-Chan professed Noron's strong and conservative 'confucian thought of righteousness' and expressed his willingness for academic and ethical training to have dignity as sajok. He tried to do his duty as an intellectual in the region where he was living by utilizing academic, blood-related, and regional networks although he is alienated from the political and academic world of Central-Seoul.
In late 19th century to early 20th century, sajok(or class that controlled farmers in rural community society in late Chosun Dynasty) in Youngnam region became alienated perfectly from the academic and political world in Central-Seoul after several serious political upheavals. Japan's plot to invade the South Korea was realized and Chosun became the arena of the struggle among the external forces. Nam Jung-Chan kept his identity and family as sajok while living as an intellectual who adhered to the value of traditional era in Gyungnam region in that period and desperately tried to preserve the rural area that was his foundation of life. His literature shows this clea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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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세기 동아시아 자전문학의 특징적 국면(Ⅱ) - 서술적 특징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진성 ( Park Jins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5-12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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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존 자전 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출현에 주목하여 17세기 동아시아 자전문학의 서술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기존 자전 양식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自傳과 自撰墓誌銘, 自序를 중심으로 기존의 정형성을 탈피한 새로운 글쓰기 양상을 고찰하였다. 자전은 정태진술과 과정진술을 복합적으로 사용하거나 다자간의 문답을 통해 인물을 형상화하는 多元的 서술기법을 선보이는 등 새로운 서술방식이 삼국 공통으로 나타났다. 자찬묘지명은 중국과 일본에서 간결하면서도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글쓰기가 시도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작자의 개성을 극대화시킨 傳奇같은 자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17세기 각국에서 처음 출현한 자전 양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에서는 자전적 自序와 自撰年譜, 필기잡록형 자전이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자전과 자찬묘지명 등 한문학 자전 양식 외에 和文과 漢文을 혼용한 수필형태의 자전이 창작되었다. 중국에서도 壽序 형태의 자전과 2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새로운 유형의 작품이 처음 등장하였으며, 회고록 형태의 자전적 소설이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7세기 동아시아의 자전문학은 전통적 자전 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자전 양식의 등장이라는 공통된 현상 속에서 양과 질적으로 한층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자전문학의 성장과 변화는 혼란한 시대적 상황과 문예사조의 변화, 자기 존재 가치의 증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17세기 동아시아 자전문학의 특징적 서술 양상은 18~19세기 동아시아 자전문학의 변화와 발전에 밑바탕이 된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This paper looks at the narrative style of 17th-century East Asian autobiography, noting the changes in existing autobiographical styles and the emergence of new ones.
As for the changes in the existing autobiography style, we consider new writing methods that deviate from the traditional orthodoxy, focusing on Autobiography(自傳), Own's epitaph(自撰墓誌銘), and Self-preface(自序). As a result, the autobiography showed the same new narrative style in the three countries, such as the combination of fixed and time-changing descriptions and the multi-faceted descriptive techniques that shape characters through questions and answers from multiple people. In the case of Own's epitaph, new writing was attempted to reveal the character's personality in short sentences in China and Japan, and a Self-preface to maximize the author's personality appeared in China.
Next, this paper looks at the first autobiographical form of appearance in each country during this period. In Korea, Autobiographical self-preface, Auto chronology(自撰年譜), and Pilgijaprok(筆記雜錄)-style autobiographies first appeared in the 17th century, and in Japan, many Essay-style autobiographies using Japanese and Chinese characters were created in addition to classical autobiographies such as Autobiography and Own's epitaph. In China, a new type of work using Su-seo(壽序) style autobiography and second-person narrative techniques first appeared, and Autobiographical novels in the form of memoirs were created.
As such, the 17th-century East Asian Autobiographical Literature was further developed in quantity and quality amid the common phenomenon of changes in traditional autobiography styles and the emergence of new autobiography styles. This growth and change in East Asian autobiography is the result of a combination of chaotic times, changes in literary trends, and proof of self-presence values.
The characteristic narrative of the 17th-century East Asian Autobiographical Literature is particularly meaningful in that it was the background for the change and development of East Asian Autobiographical Literature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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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퇴계 이황과 우담 정시한의 삶과 학문 - 자경(自警)과 습서(習書)를 중심으로 -

저자 : 리기용 ( Lee Ki Yo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3-15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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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퇴계 이황과 우담 정시한의 삶과 학문을 첫째 군자의 상징 중 매(梅)와 죽(竹)의 은유, 둘째 죽음을 앞두고 생을 정리하며 쓴 자명(自銘)과 자경(自警),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간과된 주제인 습서(習書)와 경(敬)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퇴계와 우담의 삶과 학문의 단면을 대비시켜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보고자 한 글이다. 그들의 삶과 학문의 성격을 당시의 학자들과 구분시켜 파악하기 위하여 유가와 도가를 상징하는 명교(名敎: 廟堂)와 자연(自然: 山林)이라는 개념을 유학자들의 출처와 대비시켜 그 특징을 정형화시켰다.
고찰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와 우담은 모두 매화[梅]와 대나무[竹]에 대한 깊은 사랑을 매화를 바라보며 시로 노래한 영매(詠梅)와 매화를 곁에 두고 그림으로 옮기는 화매(畵梅)를 통해서 퇴계와 우담의 특징을 설명하였으며, 풍락정에 옮겨 심어 놓은 대나무[移竹]과 그곳에 부임하는 손자에게 그것을 사표 곧 선생죽(先生竹)으로 삼으라는 일화로 양자의 가교로 삼아 대비시켰다.
둘째, 퇴계와 우담은 모두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며 자명(自銘)과 자경(自警)을 썼다. 여기에는 자신의 부족한 자질, 허약하고 젊은 시절의 병치레, 정치적인 회의와 뒤늦게 학문에 전념하며 도를 즐기며 살다[樂道] 한평생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마감하는 삶이 요약되었고, 소박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통해 은일의 삶 속에 자연스런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었다.
셋째, 작은 일상의 습서 공부에서도 학문 전체에 일관된 경(敬) 공부가 실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정명도에서 주자를 통해 퇴계에게 전해지는 서자명(書字銘)을 통하여 글씨의 점과 획을 익히는 순간순간 경 공부를 잃지 말라는 습서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었다. 퇴계는 습서라는 시를 통해 그 정신을 제자에게 전했으며, 이것은 시간을 뛰어넘어 우담의 습서하는 삶과 학문의 일부로 계승되고 있었다.
이 고찰을 통하여 17세기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우담 정시한이 퇴계의 삶과 학문을 본받는 학퇴계(學退溪)의 구체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이것은 산림자연을 지향하는 삶의 자세와 정·주(程朱)로부터 퇴계를 거쳐 우담으로 계승되는 경(敬) 공부의 정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paper aims to find similarity between Woodam(愚潭) Jeong Si-Han(丁時翰) and Toegye(退溪) Lee Hwang(李滉) by comparing their respective academic works, focusing on the following: first, metaphor on plum and bamboo, the symbols of sage(君子), and second, Self-Inscription(自銘) and Self- Alert(自警) that reflects life before death, and generally neglected topic, calligraphing and mindfulness. To understand their life and characteristics of studies, this paper categorizes characteristics of the studies by contrasting the concept of Mingjiao(名敎, Miaotang廟堂) and Ziran(自然, Shanlin山林) - symbolizing Confucianism and Taoism - with respect to the origins of Confucianists.
This paper finds the following. First, both Toegye and Woodam show strong love toward plum and bamboo. The characteristics of Toegye and Woodam can be explained with Yongmei(詠梅), poetry about plum, Huamei(畵梅), paintings of plum, and story about replanting bamboo in Fengleting(豊樂亭) and making it Xianshengzhu(先生竹) for grandchildren. Through this comparison, it can be shown that both scholars symbolically show their aim toward natural life of Shanlin using the nobility of plum - blooming after long winter but not selling its fragrance (梅不賣香), and virtues of bamboo - constancy, integrity, emptiness and uprightness, representing loyalty and integrity of scholar.
Secondly, Toegye and Woodam wrote Self-Inscription and Self-Alert to prepare for their natural death by reflecting their life. The essays show their lack of talent, weak and frail youth, political skepticism, devotion to academia late life, joy of living in Tao(樂道), and their will to have humble funeral, preparing for natural death.
Thirdly, it is verified that study of mindfulness through calligraphing has been practiced in everyday life as well as the study of structure and content of Confucianism. Woodam inherits the life of calligraphy as part of study that originated from Chengmingdao(程明道), Zhuzi(朱子), passed down to Toegye as Shuziming(書字銘) - the writing implying the spirit of calligraphy not to forget study of mindfulness even when learning the art of writing.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The life and study of Toegye and Woodam, living in obscurity without going into government, pursuing Shanlin, not Mingjiao show the view of Seonbi(士) toward origins. Also, it broadens our understanding of Confucianist view of life and death by studying Self-Inscription and Self-Alert, accepting and preparing natural and humble death. Lastly, the records about calligraphy as the process of study, not the result, restores the image of practicing the art of writing, and it verifies the essence and aspect of calligraphy practicing mindfulness, passed down from Chengmingdao and Zhuzi to Toegye and inherited by Woodam.
Through this study, it is possible to create detailed view of Woodam Jeong Si-Han, representative scholar of Toegye school in 17th century. following the life and study of Toegye(學退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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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중서(董仲舒)의 국가주의(國家主義) 교육사상

저자 : 신창호 ( Shin Chang H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9-18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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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나라 초기 동중서의 교육적 사유와 정책을 교육의 기조에서 근거와 지향, 그리고 실천이라는 구조를 통해 검토한 것이다. 동중서는 당시 사회상황을 신중하게 인식하고, '대일통(大一統)'과 '독존유술(獨尊儒術)'의 국가철학을 수립하였다. 이에 교육도 국가이념으로서 유학을 기반으로 그 기초를 마련하였다. '인재양성'을 교육의 기조로 하여, 중간계층인 중민(中民)의 본성을 인간의 표준으로 내세웠고, '중민'의 본성을 소유한 인간을 교육의 주요 대상으로 파악하고 그들의 정(情)을 선하게 바꾸어 나가는 도덕적 인격을 지향하였다. 특히, '삼강(三剛)'을 도덕의 '기본 준칙'으로 설정하고 '오상(五常)'을 도덕의 '핵심 관념'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양식은 힘써 노력하는 '면강(强勉)'과 집중하고 몰입하는 '전일(專一)', 그리고 치밀하게 생각하는 '정사(精思)'의 유기체적 실천을 통해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교육의 기조 제시에서 실천 방식에 이르기까지 중화사상의 구축과 국가교육의 원칙을 제공하는데 기여하였다.


This study examines Dong Zhongshu's educational thoughts and policies in the early Han Dynasty through the structure of grounds, orientation, and practice in the aspect of education. Dong Zhongshu carefully assessed the social situation of the time, and established dual national philosophy of 'the Great Unification(大一統)' and 'the exclusive respect for Confucianism(獨尊儒術)'. As a result, education became the foundation for Chinese Confucianism as a national ideology. With the 'cultivation of talents' as the basis of education, the nature of a middle class was established as the standard for human beings, and those possessing the nature of the 'middle class(Jung-min)' were regarded as the main objects of education, and their thoughts were considered. They aimed for a moral character that would change them for good. In particular, 'Samgang(三剛)' was recognized as the 'basic rule' of morality, and 'Osang(五常)' was understood as the 'core idea' of morality. This style of education took a form of embodiment through the integrated practice of 'great endeavor(强勉)', 'intensive concentration(專一)', and 'thorough thinking(精思)'. This has contributed to providing the principles of Sino-centric national education and presenting the keynote of education to the way of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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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이학휘편(理學彙編) 경적전(經籍典) 역경부(易經部)에 대한 시론적 고찰

저자 : 임재규 ( Im Jaekyu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1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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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에 대한 초탐의 성격을 지닌 글이다. 아직까지 중국 역학계나 한국 역학계에서 연구되지 못한 미개척의 분야인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에 대한 최초의 연구라는 점에서 본 연구는 앞으로 우리 학계에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는 易經部彙考, 易經部總論, 易經部藝文, 易經部紀事, 易經部雜錄, 易經部外編, 易經部易學別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易經部彙考는 청초까지의 『역(易)』 관련 문헌 기록, 서, 목록서를 수집 정리한 것이고, 易經部總論은 청초까지의 『역(易)』 관련문헌 중 총론에 해당하는 글을 수집 정리한 것이고, 易經部藝文은 역대의 『역(易)』 관련 문헌 중 시, 부 등의 문학적 글을 수집 정리한 것이고, 易經部紀事는 역대의 『역(易)』 관련 문헌 중 역사적 글을 수집 정리한 것이고, 易經部雜錄은 앞의 易經部彙考, 易經部總論, 易經部藝文, 易經部紀事에 수록된 내용을 제외하고 기타 문집류 등에 기록되어 있는 『易』관련 내용을 수집한 것이고, 易經部外編은 전통적이고 주류적인 『易』과 관련한 내용을 제외한 기타 『易』관련 기록을 수집한 것이고, 易經部易學別傳은 경학적 성격의 역학서로 볼 수 없는 역학서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이상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의 易經部彙考, 易經部總論, 易經部藝文, 易經部紀事, 易經部雜錄, 易經部外編, 易經部易學別傳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를 통해서 필자는 대략 다음과 같은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의 특징 및 의의를 추출할 수 있었다. 첫째,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는 청초까지 수집 정리된 최고의 역학 관련 자료 집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易經部總論은 중국의 기타 유서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역학에 대한 총론적 성격의 자료집성이라 할 수 있다. 둘째,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는 청초까지 수집 정리된 최고의 역학 관련 목록학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역학 관련 목록은 청초까지 발행된 역학 관련 거의 대부분의 목록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된다. 셋째, 『古今圖書集成』 理學彙編 經籍典 易經部 易經部易學別傳에 수록된 9종의 역학 문헌은 발간 시기로 볼 때 『四庫全書』에 수록된 동일 문헌보다 더 판본상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This is an article with the character of first exploration on the Yijing Bu(易經部) of Gujin Tushu Jicheng(古今圖書集成). As it is the first study on the Yijing Bu(易經部) of Gujin Tushu Jicheng(古今圖書集成). this study is expected to present new data and new perspectives to our academia.
The Yijing Bu(易經部) of Gujin Tushu Jicheng(古今圖書集成) are composed of Yijing Bu Huikao(易經部彙考), Yijing Bu Zonglun(易經部總論), Yijing Bu Yiwen(易經部藝文), Yijing Bu Jishi(易經部紀事), Yijing Bu Zalu(易經部雜錄), Yijing Bu Waibian(易經部外編), Yijing Bu Yixue Biezhuan(易經部易學別傳). Yijing Bu Huikao(易經部彙考) is a collection and arrangement of records, books, and lists of literature related to Yi(易) up to the beginning of the Qing Dynasty, and Yijing Bu Zonglun(易經部總論) is a collection and arrangement of articles that correspond to general discussions among the literature related to Yi(易), Yijing Bu Yiwen(易經部藝文) is a collection and arrangement of literary texts such as poetry among the literature related to Yi(易), Yijing Bu Jishi(易經部紀事) is a collection and arrangement of historical texts among the literature related to Yi(易), Yijing Bu Zalu(易經部雜錄) collects the contents related to 『易』, which are recorded in other writings, except for the contents of the preceding Yijing Bu Huikao(易經部彙考), Yijing Bu Zonglun(易經部總論), Yijing Bu Yiwen(易經部藝文) and Yijing Bu Jishi(易經部紀事), Yijing Bu Waibian(易經部外編) is a collection of other records related to Yi(易) except for traditional and mainstream Yi(易), Yijing Bu Yixue Biezhuan(易經部易學別傳) is a collection and arrangement of Yixue(易學) books that cannot be seen as Jingxue(經學).
Through a study on Yijing Bu Huikao(易經部彙考), Yijing Bu Zonglun(易經部總論), Yijing Bu Yiwen(易經部藝文), Yijing Bu Jishi(易經部紀事), Yijing Bu Zalu(易經部雜錄), Yijing Bu Waibian(易經部外編), Yijing Bu Yixue Biezhuan(易經部易學別傳), I was able to extract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following. First, the Yijing Bu(易經部) of Gujin Tushu Jicheng(古今圖書集成) is the best data collection of Yixue(易學) ever collected and compiled up to the beginning of the Qing Dynasty. In particular, Yijing Bu Zonglun(易經部總論) can be said to be a generalization of data on the Yixue (易學) that cannot be found in other Leishu(類書) in China. Second, it can be said that the Yijing Bu(易經部) of Gujin Tushu Jicheng(古今圖書集成) is the best catalogology of Yixue(易學) that has been collected and organiz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Qing Dynasty. The list of Yixue(易學) included here is considered to have very high academic value in that it contains almost all of the lists of Yixue(易學) publish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Qing Dynasty. Third, 9 kinds of Yixue(易學) documents in Yijing Bu Yixue Biezhuan(易經部易學別傳) are more valuable in edition than the same ones in Siku Quanshu(四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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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광개토태왕비 제2면에 대한 고찰(考察)과 변정(辨正) - 미독자(未讀字) 해독(解讀)및 '임나(任那)·아라[安羅]'에 대한 문제 제기를 중심으로 -

저자 : 朴光敏 ( Park Kwang-mi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71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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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溫知論叢』 제64집(2020.07.30.)에 발표한 「광개토태왕훈적비 제1면에 대한 試釋」을 이은 글이다. 광개토태왕훈적비 解讀방식은 연구자마다 다르겠지만 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탁본에 나타난 字形을 살피는 일과 그 자형을 뒷받침할 수 있는 典故를 찾는 일이다. 『詩經』이나 『書經』과 같은 古代기록에서 문장의 典故를 확인하거나, 여러 古碑와 古人의 서법에서 같은 자형을 찾아내는 것이다. 전고와 자형 확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典故와 字形이 해당 문장의 文脈과 합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原拓자료를 求得해 참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다. 설령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같은 사람이 탁본 작업을 했더라도 탁본마다 자형이 같을 수가 없다. 原拓뿐 아니라 석회탁본과 사진도 중요하다. 필자는 이같은 방식으로 제1면을 해독하여 「광개토태왕훈적비 제1면에 대한 추독과 試釋」이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이번에 제2면에 대한 해독을 시도한 것이다.
제1면은 鄒牟王의 고구려 建國, 廣開土太王의 勳績, 裨麗 討伐, 百殘토벌 등 대략 4개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면 제10행부터 제2면 제5행까지는 광개토태왕이 百殘을 親征하여 빼앗은 58개 城의 명칭이 나열되었고, 百殘主의 항복을 받고 돌아온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면 제5행 하단부터 제10행까지는 5만 명의 步騎를 보내 百殘과 和通하여 新羅에 쳐들어온 倭賊을 정벌해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이다. 百殘과 倭賊에 대한 討伐과 여러 주변국과의 戰役은 제3면 제8행 상단까지 이어지며 당시의 국제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皐罘婁禾亥赫拒城晉易古秉蹙殘賊迫賊氣橫擊西便獻款跼沉銜取捋耶聆讙待連腹徙腹早晨俄凣更侑突酣” 등 총 45자 정도를 추가로 해독하거나 새롭게 추독하였으며, '任那加羅'와 '安羅人戍兵'에 관해서도 문제 제기차원에서 살펴보았다. 필자의 推讀案이나 문제 제기 중 잘못이나 오류가 있다면 순전히 필자의 寡聞에서 비롯된 것이며, 훗날의 補完을 기약하고자 한다.


This paper is the second study following 'An Interpretation of Section 1 of King Gwanggaeto's Stele', which was published in The Onji Collection of Works, vol. 64 (2020). This study aims to explore the letter type and find an authentic precedent to identify the letter on King Gwanggaeto's Stele. For this, it is required to inspect the sentences and letters of ancient documents, for example, The Book of Songs or The book of History, and to discover the same letter types from various steles and ancient calligraphy. Moreover, it is important that the authentic precedents and the letter types must be agreed with its context as well. It is a fundamental process to find and refer to a number of primary sources. Each stone rubbings differs according to the occasions, even if the same person made them on the same day. Rubbings after lime and other related photographs are important as well as rubbings before lime. The previous the article, 'the Section 1 of King Gwanggaeto's Stele' took this methodological approach to examine the first section of the Stele, and this study followed the same.
Section 1 of the Stele mainly consists of four parts: the establishment of Goguryeo by King Chumo, the achievement of King Gwanggaeto, the suppression of Biryo, and the suppression of Baekjan. From line 10 of Section 1 to line 5 of Section 2 is the list of 58 castles, which were taken after King Gwanggaeto had conquered Baekjan, and its story about coming back after Baekjan surrendered. The last part of line 5 to 10 of Section 2 is about helping Silla by sending 50,000 foot soldiers and defeating Japanese pirates and its allied Baekjan who invaded Silla. The story about suppressing Baekjan and Japanese pirates, and the war campaign against other countries continues to the beginning of line 8 of Section 3, and it makes the stele as an critical source for overviewing its contemporary internationl affairs.
While examining the Section 2 of King Gwanggaeto's Stele, this study tried to decipher and re-interpret the additional 45 letters of “皐罘婁禾亥赫拒城晉易古秉蹙殘賊迫賊氣橫擊西便獻款跼沉銜取捋耶聆讙待連腹徙腹早晨俄凣 更侑突酣” and also reviewed 'Imnagaya (任那加羅)' and 'Arainsubyeong (安羅人 戍兵)' to raise some questions. If there is any error, it is from my lack of knowledge and the further advanced studies of others will be highly appreci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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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본 오가타가尾形家 소장 강희안(姜希顏)의 묵죽도(墨竹圖) 모사본(模寫本)에 대한 연구

저자 : 박은순 ( Park Euns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30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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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일본 에도시대 중 규슈 후쿠오카한에 소속되어 활동한 대표적인 어용화가집단인 오가타가에 전해진 묵죽도 모사본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오가타가에는 4700 여점이나 되는 회화자료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增訂古畫備考』 「高麗朝鮮書畫傳」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畫題가 기록된 묵죽도가 포함되어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 묵죽도와 「고려조선서화전」의 기록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하면서 묵죽도에 관련된 주요한 사실들을 구명하였다.
오가타가는 에도가노江戶狩野派의 문하에서 학습하고 가노파의 관습을 따르던 화파였다. 에도가노파의 창시자인 가노 단유狩野探幽는 회화감정가이자 화가로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중국, 일본, 한국 그림들을 보았고, 중요한 작품들을 모사한 축도를 만들어 畫本으로 삼거나 전수하는 관례를 만들어 이후 가노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지방에서 활동하던 오가타가에 소장된 회화자료들도 이러한 성격의 자료들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 중 묵죽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묵죽도는 강희안의 묵죽도 원본을 보고 그린 축도로 여겨지는데, 일본에서 이 작품이 중요하다고 인식되고 축도로서 제작된 것은 에도시대 중에 북송 소식의 작품으로 전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가타가의 묵죽도에는 제화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제시의 끝 부분에 '剛中'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증정고화비고』 「고려조선서화전」에 '강중'이란 항목이 있고, 여기에 오가타가의 묵죽도에 기록된 것과 같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고려조선서화전」에는 이 시와 함께 두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다른 한 작품에 대한 제시가 포함되어 있고, 두 작품이 조선 국왕의 수장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이 작품이 한국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강중이란 인물은 15세기에 활동한 유명한 사대부 문인인 徐居正이 강중이란 자를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오가타가의 묵죽도에 기록된 제시 중에 菁川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 청천이 조선 초의 사대부화가 강희안의 別號이고, 서거정과 강희안이 막역하게 교류하였으며, 서거정이 강희안의 대나무 그림에 대해서 여러 번 기록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강희안은 조선 초의 대표적인 사대부화가로서 시서화 삼절로 높은 평을 받았다. 서거정의 제시에는 강희안의 작품을 趙孟頫에 비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조선 전반기에 松雪體가 유행하였을 뿐 아니라 조맹부의 죽도에 대한 기록들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오가타가의 묵죽도 모사본은 조맹부의 죽도와 화풍 상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 한편 오가타가의 묵죽도 모사본이 구성과 소재, 필묵법, 石法등에 있어서 조선 중기 묵죽의 대가인 李霆의 작품과 화풍상 유사점이 있어 보이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본고에서는 일본에 전하는 강희안 관련 묵죽도 모사본을 발굴하여 여러 기록과 비교, 고찰하면서 이 작품이 일본에 전래된 조선 초기 묵죽도를 토대로 제작된 작품이고, 구체적으로는 강희안의 묵죽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구명하였다. 앞으로 이를 토대로 조선 초기 묵죽도 및 강희안의 묵죽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The Ogata family is an official painter group served for the Hukuoka han in the present Kushu area during the Edo period. The family inherited 4700 pieces of painting materials to this day. The collection includes an ink bamboo painting inscribed with poetry that is also enlisted in the Revised Version of the Record of Old painting ,“Records on the painting and callifgraphy of Koryo and Joseon Dynasty”. This study compares and analyzes the poetry written on the bamboo painting and the records in“Records on the painting and callifgraphy of Koryo and Joseon Dynasty”.
The founder of the Edo Kano school, Kano Tanyu was an appraiser and a painter. He invented an artistic convention of making small copies of important paintings and used them as painting manuals. Paintings of China, Japan, and Korea that Kano Tanyu had recorded were descended upon painters of the Kano school, influencing them significantly.
Since the Ogata family belonged to the Edo Kano school, they followed the tradition and teachings of the Kano school. Therefore, painting materials kept by the Ogata family, including their collection of an ink bamboo painting, also display the above mentioned characteristics of the tradition of Kano school. This ink bamboo painting, a sketch copies a work by Gang Huian, a famous Korean literary painter active in the 15th century. It was recognized as a significant piece of painting during the Edo period in Japan, because it was mistakenly perceived as a painting by Shu Shi of the Nothern Sung dynasty.
The poetry written on the ink bamboo painting possesed by the Ogata family includes the term 'Kangjung'. Interestingly,“Records on the painting and calligraphy of Koryo and Joseon Dynasty”in the Revised Version of the Record of Old painting , written in the 19th century, contains the'Kangjung' catagory, and upon it records the identical poetry. Kangjung is the Korean literary bureaucrat Seo Geojeong, who was active in the 15th century. The term of'Cheongcheon', was included in the record of “Records on the painting and calligraphy of Koryo and Joseon Dynasty” and the poetry in the Ogata family's bamboo sketch. The fact that the term is a Gang Huian's hao, a pen name is also confirmed. Seo Geojeong and Gang Huian, two representative literati in the early Joseon period, interacted closely, and Seo Geojeong recorded multiple times on Gang Huian's bamboo paintings.
Gang Huian often represented paintings of bamboo. Seo Geojeong compared Gang Huian's bamboo with Chao Mengfu, a famous literary painter of the Yuan Dynasty. Chao Mengfu's style of calligraphy was popular in the early Joseon period and Gang Huian was excellent in that calligraphic style. More than few recordings of Chao Mengfu's bamboo painting still remain. However, the bamboo painting of the Ogata family show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when compared with Chao Mengfu's bamboo paintings. Meanwhile the fact that the ink bamboo painting of the Ogata family exhibits stylistic characteristics of Yi Jeong, a master of bamboo painting who was active in the early 17th century Joseon, in terms of composition and motives, techniques of brush and ink, and the way of describing stones, is also worthy of taking 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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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 초기 궁중연향별 성격과 악대 사용에 관한 연구 - 성종대 정립 양상을 중심으로 -

저자 : 임영선 ( Lim Young-s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3-33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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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초기 예악제도가 성종대에 이르러 정립되었다는 관점하에 당시 시행되던 여러 궁중연향의 특징과 연향별 악대 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왕의 참석 여부와 연향의 중요도에 따라 전상악, 전후고취, 전정헌가가 변별적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먼저 사연(賜宴)과 같이 왕이 참석하지 않는 연향에는 전상악만이 설치되어 정재를 반주하였다. 그리고 왕이 나라의 지존으로서 참석하고 공신이나 종친 등 소수의 관원이 참여하여 친애의 정을 나누는 진연(進宴)에는 왕의 거동에 주악하는 전후고취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진연은 왕이 참석하지만 의주를 갖추어 정전에서 시행되는 연향이 아니기 때문에 전정헌가는 설치되지 않았다. 반면, 전정헌가까지 설치되어 전상악, 전후고취, 전정헌가가 모두 설치되는 연향으로는 회례연(會禮宴)과 양로연(養老宴)이 있다. 회례연과 양로연은 왕이 참석하며 정전(正殿)에서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의주에 따라 시행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연향이었다.
조선 초기 여러 궁중연향은 국가 예전에 의주 수록 여부, 시행 장소, 왕의 참석 여부 등에 따라 성격이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연향별 특징에 따라 악대 역시 변별적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 초기 궁중연향별 악대의 구성은 질서와 규범에 맞게 음악을 사용하여 예치를 이루고자 하였던 조선 초기 예악의 운영의 구체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negotiations In this paper, features of various court feasts and composition of band for each feast held during the reign of the King Seongjong are examined with a viewpoint that Ye-ak became firmly established in that period. As a result, Jeonsangak, Jeonhugochwi, and Jeonjeongheonga were confirmed to be differently composed in accordance with presence of the king and importance of the feast.
First of all, at a feast like Sayeon which the king didn't attend, only Jeonsangak was organized to play Jungjae. In a feast like Jinyeon where the king and a few officials including meritorious officials and members of the royal family attend to promote friendship, however, Jeonhugochwiwhich was accompanied with presence of the king to play music was additionally set up. Meanwhile, Jeonjeongheonha was not set up for a Jinyeon because it was not the type of feast held in the main building in the palace in accordance with the record of Uiju(the precedents and annotations of ceremonies) though the king attended the feast, whereas in feasts like Hoeryeyeon and Yangroyeon, all compositions of band from Jeonsangak and Jeonhugochwi to Jeonjeongheonga were set up for the feasts. Hoeryeyeon and Yangroyeon were significant feasts of the nation and were held in the main building in the palace in accordance with the record of Uiju which was contained in Gugjo-oryeui.
In other words, characteristics of various court feasts held in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are divided based on whether their precedents were recorded in Uiju about feasts, where they were held, whether the king attended the feasts, etc., and the band was organized differently following the characteristic of each feast. It can be said that such varied compositions of band for court feasts in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is one of the specific examples of operating Ye-ak in the early Joseon period when governing the nation with courtesy was pursued by properly using music in accordance with order and stand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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