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update

Chonnam Historical Review

  •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975-2431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8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805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0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조선전기 친족의식과 동성혼(同姓婚)

저자 : 박진 ( Park Je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조선건국 후 성리학적 가부장제 사회를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은 부계 동성 친족의 비중을 이성 친족보다 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동성의 친족을 근친으로 여기도록 하는 동성금혼이 추구되었고 이는 곧 동성 친족은 근친이며 이성 친족은 원친이라는 의도적 구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 양측 친족에 대해 동일한 친밀감을 쌓아왔었던 한국 전통적 풍습으로 인해 부계 중심의 인위적 친족 구분은 쉽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 조선의 친족의식은 직접 대면을 통해 친밀도를 확인한 경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같은 조상을 두고 있다 할지라도 이들을 모두 친족으로 이해하는 데는 거부감이 있었다. 결국 동성이라면 본관이 다른 이들까지도 모두 친족으로 여겨 금혼을 법으로 규정했던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전통적 친족의식을 반영하여, 같은 조상을 둔 것이 확인되는 동성동본의 경우에만 금혼을 정착시켜갔다.
이와 동시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16세기까지는 다양한 가문에서 동성동본혼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왕실과 고위 관료의 혼인에서도 확인되는 동성동본혼은 촌수를 계산하기 무색할 정도의 혈연관계 또는 본관이지만 다른 지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의 현실적인 친족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16세기 후반까지는 '본관'에 대한 인식이 아직 확고하거나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지적할 수 있다. 『선원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혼인사례 중 확인 가능한 본관마저 누락되어 있는 등의 사례를 통해 미루어본다면 이 당시의 본관이 조선 후기와 다르게 여겨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친밀한 정도에 있었던 이성친족을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이성친족의 범주를 동성친족보다 좁게 재설정하려는 시도는 동성금혼 시책과 더불어 유학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동성금혼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았던 것은 한국적 전통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유교사회를 향한 열망보다 결코 작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16세기까지 한국의 전통적 친족의식은 친밀도와 대면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의 발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Korea had bilateral kinship consciousness in tradition. It is quite different custom from Chinese model valued on patrilineal society and Korea China had already recognized this dissimilarity. On adopting Confucius orthodoxy in Koryo dynasty, however, there was an attempt for changing Korean traditional kinship with Chinese standard.
Joseon, yearning for ideal Confucius dynasty, began to turn state's conventional bilateral kinship into Chinese patriarchy. But, actual intimacy with non-agnatic kin of mother and affine was a serious obstacle to making paternal-centered society for the reason that Joseon's bilateral convention was regarded as Korean's fine customs to maintain.
With practical reason, the prohibition of intermarriage between close kin was settled down quickly and it was switched to extremely expand the realm of paternal kin. But this intended policy could not be accompanied with legal power. Actually, the prohibition of marriage with same surname members was impossible due to the lack of ancestral information. Hence, there is no room for the prohibition of marriage with same surname like Chinese in Joseon. Instead, the marriage prohibition with same surname and ancestral seats was settled down when they could clarify the ancestral segment.
We can examine few but clear examples of the marriage with member of same surname and ancestral seats existed till 16thC.
Particularly, we can see the cases of royal family and high-status family. In addition to, the marriage with member of same surname and ancestral seats did not make any trouble and punishment in the court.
The characteristics of this marriage is only possible under the circumstance of different segment in same ancestral seats. Noncognatic kin with same surname and ancestral seats but different seats could manage the marriage of same surname marriage.
Close kinship with non-agnatic kin could come from sharing living quarter or frequent visit and similarly, paternal or cognatic kinship only could build intimacy under the same situation with non-agnatic kin like. Even though one had same ancestral seats with another, no cognatic ancestor meant no close kinship. In other words, the consciousness of close kinship was the most significant factor of same surname marriage till 16thC.
At the same time, insufficiency of the awareness on the ancestral seats could be another reason of same surname marriage, also. On the royal family genealogy, Seonwonrok, we can find out numerous personal information without ancestral seats. Of course this tendency means that the information of ancestral seats was not important as later Joseon.
Meanwhile, marriage with same surname but different ancestral seats was popular in early Joseon because this marriage could raise up fellowship among higher class where status system existed.
Factitious separation of intimate 'non-agnatic relatives' and rearrangement of them implied dynasty's strong intention of founding Confucius ideal state. In spite of this trial, Korean conventional kinship based on intimacy was the manifestation of realistic and practical humaneness till 16thC.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1970년대'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주본부(한민통 미주본부)'의 반 유신 운동을 '선 민주·후 통일'지도이념에 따른 냉전기 자유연합 노선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1970년대 미주 한인사회는 폐쇄된 국내조건과 달리반 유신 체제 비판과 통일논의가 가능했다. 한민통 미주본부는 1973년 7월 야당 정치인 김대중의 유신체제 비판에 공감한 미주 한인들의 결합으로 결성되었다. 개신교 배경의 명망가들이 모여 느슨한 조직체로 출발한 한민통 미주본부는 1974년 11월 국내 민주인사이자 개신교 자유주의신학자 김재준의 결합으로 제1차 총회를 개최하여 자유진영 연합 노선을 채택하였다. 1976년 제3차 총회 이후 국내에서 선포된 「3·1민주구국선언」을 지도노선으로 채택하여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념과 '선 민주·후 통일'노선을 천명함으로써 초대의장 김대중의 정치노선으로 조직이념을 강화했다. 현실적으로는 미 의회 및 행정부, 미국교회 등의 대한정책 변화를 요구함으로써 박정희 유신정부를 압박하는 자유연합노선으로 전개되었다. 한민통 미주본부의 자유연합 노선은 1970년대 후반 해외 한인민족민주 흐름에서 민족자주계열의 동포연합운동과 대조를 이루는'보수화 경향'으로 설명된다.


This article sought to identify the anti-Yushin movement of “the 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Unification-North American Branch(한민통 미주본부)”as the Principle of "선 민주·후 통일“ in the 1970s. In the 1970s, unlike closed domestic conditions, the Korean community in the U.S. was able to criticize the anti-Yushin system and discuss unification. “The 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Unification-North American Branch(한민통 미주본부)” was formed as a union of Korean Americans who sympathized with opposition politician Kim Dae-jung's criticism of the Yushin regime in July 1973. The 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Unification(한민 통 미주본부), which started out as a loose organization of famous Protestant backgrounds, held the 1st General Assembly in November 1974 with the union of domestic democratic man and Protestant liberal theologian Kim Jae-joon, and adopted the line of Free-World Alliance. After the 3rd General Assembly in 1976, the “3·1 Democratic Declaration” was adopted as the guide principle and declared the liberal democratic political ideology and the line of “선 민주·후 통일.” In reality, the line was developed as a free-world alliance that pressed the Park Chung-hee Yushin administration by demanding policy changes to the US Congress, the administration, and the American church. The free-world alliance line of “The 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Unification-North American Branch(한민통 미주본 부)” is in contrast to the national independence line in the Korean- American national democratic coalition movement abroad in the late 1970s.

KCI등재

3김대중의 역사인식과 한국사 이해의 특징

저자 : 류시현 ( Ryu Sihy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1-92 (2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국정 책임자인 대통령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활동과 영향력과 관련해서 외교와 통일을 포함한 정치 영역에서의 연구 성과는 많이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적 활동과 결정의 기반이 되었던 그의 사상에 관한 연구는 적었다. 따라서 김대중의 정치활동에 기반이 되었던 그의 역사 인식이 어떠했는가에 관한 연구가 요구된다.
김대중은 아놀드 토인비와 그의 『역사의 연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류문명사의 '도전과 응전', '창조적 소수자'의 역할 등의 개념을 한국 역사 이해에 적용하고자 했으며, 민족사의 적용과정에서 형성된 역사 진행과정에 관해 '낙관'적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민중 주체의 개혁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세계사와 한민족사의 경험에 기초한 역사 발전에 관한 믿음은 민족주의에 관한 유연한 인식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사에 관한 이해는 민주주의와 통일이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용했다.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의 심판을 중요시 했던 김대중은 자신의 역사관을 그의 정치활동의 정신적, 사상적 자산으로 삼았다.


Kim Dae-jung a politician who represents the modern Korean history and national responsibility, a former president. Reflecting his influence, many research achievements in the political area including diplomacy and unification have been accumulated. However there was less researches on his ideas which were relatively the basis of political activities and decisions. Therefore his A Study on the historical perception as well as Kim Dae-jung's political activities is required.
Arnold Toynbee and his book A Study of History affected to Kim Dae-jung. He wanted to apply the role of "challenge and retort" and "creative minority" in the history of human civilization to understanding Korean history. The "optimistic" outlook on the progress of history, which was formed during the application of national history was given. And positively understood the reform of the people's subjects. Belief in the development of history based on the experience of world history and Korean history has made it possible to have a flexible perception of nationalism. And the understanding of national history was used as a way to solve the challenges of democracy and unification. Kim Dae-jung regards history as his mental, spiritual assets of his political activities.

KCI등재

4서세창의 『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 판본에 대한 고찰

저자 : 강길중 ( Kang Gillj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3-118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00년 이후 청은 내우외환의 국내외 정세를 극복하기 위해 신정(新政)을 실시하였다. 특히 만주족 발흥지역인 동북지방의 경제사회발전과 안전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서세창을 초대 총독관(1907-1909)으로 임명하여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동북지역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군사와 외교면을 중점으로 삼고 전반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2 년의 개혁을 걸쳐 동북지방의 정치, 경제, 군사와 대외관계 등 면에 성과를 얻었으며 후일 이 지역 발전의 기반을 세웠다. 그러나 지역 현실상황의 한계성과 서구열강들의 간섭 등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일부 개혁정책들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11년 서세창은 동북지방을 떠난 이후 그의 개혁정책과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총 12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동북개혁의 배경, 과정과 성과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청말 민초(淸末民初) 정치사와 지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동삼성정략』은 총 4 가지 판본(1911, 1965, 1989와 2002년 판본)이 있다. 이것들은 간행의 시기와 장소 그리고 인쇄방식 등에 차이가 있다. 그 중에 1989년 판본은 다양한 전공의 20여 명 교수들이 각자 전공분야 별로 나누어서 원문의 구성을 유지하면서 그 중에 모호하고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정밀하게 점교(點校)하고 수정 보완한 책이다.
1989년 판본은 1911년 판본의 내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 중에 오탈자(誤脫字), 변체자(變體字)와 간체/번체자 혼용 문제 등을 수정하여 1면 4매의 인쇄방법을 활용해서 간편하게 보관하고 검색할 수 있도록 편찬한 책이다. 본문은 이 판본들의 편찬과정, 내용구성, 제본양식 등을 비교 분석하여 그 중에서 편집방식과 보존상태가 좋고 광범하게 유통되고 있는 1989년판본이 연구자료로서 가장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 통해 근현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동아시아 근현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라고 여겨진다.


After 1900, Qing implemented the new government to overcome domestic and foreign affairs. In particular, Xu Shichang was appointed as the first governor (1907-1909) to implement reform policies in order to improve the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and safety situation in the northeastern region, which is an area where Manchuria was developed. Based on his accurate perception of the realities of the Northeast, he focused on military and diplomatic aspects and implemented overall reform policies. Over the course of two years of reformation, the development had been achieved in terms of politic, economy, military and foreign relationships in the Northeast China, and later laid the foundation for the administration of this region. However, some reformation policies were not realized properly due to direct or indirect factors such as the limitations of local reality and interference from Western powers.
In 1911, Xu Shichang compiled “The Political Strategy of Three Eastern Provinces in China” (12 volumes) to record his reformation policies and experiences since he left the Northeast China. This book was an important source of historical information in the study of Chinese politics and local history in the late Qing Dynasty, detailing the background, process, and achievements of the Reformation in Northeast China.
There are a total of four editions of the book which can be seen today. They differ in terms of the timing of publication and the way they are printed. Among them, the 1989 edition reflects all the contents of the original one (1911) and corrects the problems such as typographical errors, mutations, and simplified/traditional characters, which can be easily stored and searched using the four-page printing method. The text compares and analyzes the compilation progress, content composition, and style of the book, and among them, the 1989 edition, which has good editing and printing conditions and is widely distributed, is considered the most valuable research document using in this filed.

KCI등재

5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제국의 인도 침공 계획에 관한 소고

저자 : 이정하 ( Lee Jeong-h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9-148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 이후 러시아 제국은 인도에 대한 수많은 군사 침공을 계획하였다. 모든 계획이 결국은 여러 문제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의 인도에 대한 침공 위협과 그로 인한 영국의 공포는 이후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불리게 될 두 제국 간 경쟁의 주요 원인이자 내용이 되었다. 침공 작전 그 자체뿐만 아니라 관련 논의를 통해서 러시아제국이 구상하고 있던 전략의 많은 측면이 드러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레이트 게임을 다룬 연구들은 군사적 측면을 피상적으로 다루곤 하였다.
많은 연구들이 크림전쟁 이후 흑해와 발칸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러시아가 다른 돌파구를 찾고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였다고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레이트 게임의 의미를 명확하기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사 및 외교부문을 넘어서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조사 및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본고는 일종의 예비작업으로 7년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이후 러시아 제국의 지전략적 변화와 몇몇 인도 침공 계획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고 다음 문제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크림전쟁 이후 등장했던 인도 침공 계획의 주목적은 무엇인가? 과연 침공과 점령은 가능한 것이었는가? 혹은 다른 전략적 목적이 있었는가?


After the Crimean War (1853-1856), many military invasion plans against British India were made by the Russian Empire. Although none of the plans ever executed, Russia's potential invasion to British India and the fear by the British Empire caused the confrontation between two great powers, which turned out to be so-called the Great Game. Not only the military plans themselves, but also discussions for the plans show many sides of Russia's geopolitical strategy. Ironically, however, the studies on the Great Game have treated the miliary issues superficially.
Many studies tend to assume that Russian Empire launched the military advance toward Central Asia because she lost her political influence upon the Black Sea and the Balkans after the defeat of the Crimean War. To overcome this simplistic approach and to elucidate the meaning of the Great Game, it is necessary to conduct researches on various aspects including the miliary and diplomatic issues.
As a preliminary study, this paper examines geopolitical changes that occurred in the Russian Empire after the Seven Years' War (1756- 1763) and focuses on some invasion plans against British India. And this paper tries to answer these questions: What was the purpose of the Invasion plans that raised in the post-Crimean War period? Were the invasion to and occupation of British India practicable? Or was there any other purpose for the plans?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전남대학교 경희대학교
 145
 89
 77
 67
 56
  • 1 서울대학교 (145건)
  • 2 고려대학교 (89건)
  • 3 연세대학교 (77건)
  • 4 전남대학교 (67건)
  • 5 경희대학교 (56건)
  • 6 이화여자대학교 (43건)
  • 7 중부대학교 (43건)
  • 8 숭실대학교 (39건)
  • 9 공주대학교 (37건)
  • 10 서강대학교 (33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