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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update

Chonnam Historical Review

  •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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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97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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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74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755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0호(2019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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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동기시대 석기 분류

저자 : 손준호 ( Son Joon-h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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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청동기시대 석기의 형식과 기능 분류를 새롭게 시도하였다. 기존의 축적된 연구 성과를 최대한 참고하여 보다 뚜렷한 분류의 기준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분류안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사실 어떤 자료에나 적용 가능한 절대적인 분류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석기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이를 잘 반영하는 속성을 기준으로 분류가 이루어지면 된다. 즉, 자료의 성격과 분석 목적에 따라 다양한 분류안이 제시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특정 자료에만 적용되는 분류 기준과 방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당 자료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다른 자료와의 비교가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일반화된 분류안의 사용도 필요한 것이다.
분류에 앞서 먼저 석기가 다수 출토된 중요 유적의 보고서를 검토하여 분류 현황 및 그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일정 수준 이상의 분류와 분석이 이루어진 보고서가 많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청동기시대 석기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이 보고서 작성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형식 분류를 시도하였는데, 기존 연구에서 고고학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판명된 속성을 분류의 기준으로 삼아 지나친 세분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석검은 유병식과 유경식, 석촉은 편평형과 능형, 석도는 직인류와 호인류, 석부는 양인류·편인류·이형으로 대별한 다음 각각의 세부 형식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기를 기능에 따라 분류하였는데, 상징 의례구, 수렵구, 무구, 수확구, 굴지구, 벌채구, 목재 가공구, 석기 가공구, 식량 처리구, 방직구, 어구에 해당하는 각각의 기종을 상정하였다.


This paper aims at setting up new criteria in classifying types and functions of the Bronze Age stone tools. Based on accumulated previous research, the better criteria of classification are discussed, producing a widely applicable objective and systematic classification system. In fact, there are not absolute criteria, which can be applied to any data. Classification variables should be selected depending on which traits of stone tools one would like to focus. Thus it is plausible that characteristics and analytical points can make various classification criteria. I hope that my new classification system can contribute to develop classification systems of artifacts further.
I had attempted to classify the major Bronze Age stone tools in my doctoral dissertation. At that time, the classification system was made with the intact artifacts and variables, which proven to be significant in previous archaeological studies, were used as the criteria. In this paper new classification systems based on the previous system amended with new research results, is suggested. The new system has more specified classification categorization: stone daggers are sub-typed into the hilted type and the stemmed type; stone arrowheads are sub-typed into the flat type and the lozenge type; stone knives are sub-typed into the straight type and the curved type; axes are sub-typed into the double blade, single blade, and abnormal types.
Lastly, classification system by use is: symbolic and ritual tools include a stone dagger, a round shaped axe, star-shaped axe and ornament; stone arrowhead, stone spear, throwing stone are hunting tools; stone knife and sickle are harvesting tools; a chipped stone axe is the digging tool; double blade axe is a wood cutting tool and single blade axe is a wood working tool; grinding stone, penetrating tool and cutting tool are the stone processing tools; food processing tools include various types of grinding stone and plates; a spindle whorl is the weaving tool and a net sinker is the fishery t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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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고자료로 본 고대 영산강유역과 큐슈지역과의 교류관계

저자 : 최영주 ( Choi Young-j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6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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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고자료를 통해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의 단계별로 일본열도 큐슈지역과의 교류과정과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제형분 단계에는 고분과 취락을 통한 양방향의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고분의 고총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백제의 전략으로 왜의 교류가 시작되고, 큐슈세력의 확대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고총 고분 단계에는 왜계 석실과 장고분을 통해 단순한 인적 교류를 넘어 정치세력의 확산이 이루어지면서 물적 교류가 많아졌다. 이것은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백제와 왜의 관계가 강화되고, 큐슈지역 아리아케카이 수장연합의 세력 확대과정에서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이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 석실분 단계는 영산강유역 마한이 백제에게 복속되어 교류 주체도 백제로 전환되어 백제계 일색의 인적·물적 교류가 확인되지만 양 지역의 고분 장송의례와 관련된 교류가 확인된다. 나주 복암리일대 세력은 높은 지위를 유지하면서 對왜 교섭에 여전히 관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은 對왜 교류(교섭)을 통해 정치적·문화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왜계 묘제와 매장방식을 도입한 것은 작은 지역집단의 수준에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사회적 전략이라고 이해된다.


This research discussed the exchange and the background of Mahan in the Yeongsan River basin with the Kyushu area in the Japanese Islands stage by stage through the archaeological data. At the trapezoid tomb stage, there were two-way human - material exchanges through the tombs and the community, and later on it also affected ancient tomb paintings. It seems to have occurred in the process of expansion of the Kyushu power and Wae's interchange with the Baekje strategy in the chan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t the stage of the ancient tombs, material exchanges increased with the spread of political forces beyond simple human exchanges through the use of the Wae style stone-chamber tomb and the keyhole-shaped mound tombs. It is understood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Wae had been strengthened due to the rapid chan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it appeared that the Mahan forces in the Yeongsan River basin had established their unique position in the process of expanding the forces of the Ariake-Kai Chiefs' Union in Kyushu.
At the stage of Baekje's stone-chamber tomb, Mahan in the Yeongsan River basin was subordinated to Baekje and the exchange subject was converted to Baekje. So the exchange of people and material related to Baekje was confirmed, but the exchanges related to the burial rituals in both areas was also confirmed.
Thus, the Mahan forces in the Yeongsan River basin grew politically and culturally through exchanges (negotiations) of Wae. In particular, the introduction of the burial system and method of Wae-style is understood as a social strategy to seek change in cultural identity at the level of a small local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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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무왕릉비」에 나타나는 북방(北方)과 출계 인식의 변화

저자 : 김수미 ( Kim Su-m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5-9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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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에 나타난 서쪽의 '백무'와 북쪽의 '황룡가주몽'은 신라 중대의 사방 관념을 드러내는 용어들로 신라의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상징하였다. 특히 북방의 '황룡가주몽'은 능비 후면의 '환산'과 연결되어 고구려 시조 주몽의 신화적 죽음을 통해 고구려의 멸망을, 그리고 신라 문무왕의 고구려 정벌을 상징하였다. 또한 북으로는 고구려의 옛 땅에 인접하였다는 신라의 북쪽 경계를 나타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신라왕의 비문에 기록된 주몽과 환산은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 유민 「천남생묘지명」에는 중모와 환산으로 기록되었다. 당과 신라라는 다른 공간의 두 비문이 고구려 멸망에 대한 원인과 상징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당에 망명한 고구려인과 신라왕의 비문에 동일한 용어들이 나온 배경은 신라로 망명한 고구려왕(보덕국) 안승의 존재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남생과 안승은 모두 고구려의 지배층으로 그들이 공유한 고구려의 역사와 상징은 그대로 당의 「천남생묘지명」과 신라의 「문무왕릉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7세기 신라 중대의 「문무왕릉비」과 「김인문비」의 출계 인식은 소호금천씨-투후 김일제-태조성한왕-태종대왕으로 이어진 형태였다. 9세기 신라 하대의 재당 신라계 인물인 김씨부인 묘지명의 출계는 소호금천씨-투정후(김일제)-요동으로 인식되었고, 이때의 요동은 두 가지를 내포하였다. 첫째는 신라 김씨의 출자관으로서 태조성한왕-태종대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중대 왕실의 출계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는 고구려의 옛 영토라는 관념으로의 영역을 의미하였다. 즉 요동=신라로 파악하였는데, 이것은 「문무왕릉비」의 '북접읍루'를 통해 고구려 옛 영역에 대한 신라의 관념적 영유를 7세기 신라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요동을 신라와 동일하게 보는 관념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었으며, 9세기에 이르러 요동은 신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또한 「문무왕릉비」에 일통을 상징하는 “직구합일광 동정서벌”이 기록되었는데 이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안승 세력이 신라에 포섭되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의 일통이 완성되었다는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684년 보덕국이 해체된 이후 신라는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였는데, 이것이 9세기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신라와 동일시되는 요동이 등장하게 된 이유로 보인다.
이처럼 문무왕의 업적에 해당하는 서방과 북방에 관념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나당전쟁 이후 경색된 당과의 관계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나온 조치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문무왕릉비」의 사방관은 백제·고구려의 위상이 모두 신라로 이어짐을 의미하며, 이 사방 관념은 문무왕대의 일통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The 'Baekmu' in the west and the 'Jumong on top of a yellow dragon' in the north appearing on the tombstone of King Munmu symbolize the Baekje and Goguryeo punishment of Silla in terms of the four sides of the Shilla.
The awareness of the rise of the tombstone of King Munmu and the Tombstone of Kim Inmun in the middle of Silla in the 7th century led to the yodong of the tombstone name of Kim and his wife, a member of Silla's ruling family, in the 9th century. In this case, yodong implies two kinds. First, it includes the recognition of the exodus of the royal family of the Silla king, which leads to the King Taejo SungHan and King Taejong as the capital of Silla Kim. Second, it meant the domain of the idea of the ancient territory of Goguryeo.
The idea of looking at Yodong as the same as Silla was formed during the mid-century of Silla, and by the 9th century, it was believed that Yodong was a natural term for Silla. In addition, the square of the tombstone of King Munmu meant that Baekje and Goguryeo were all connected to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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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17세기 나주나씨(羅州羅氏) 일문(一門)의 활동과 그 의미

저자 : 김만호 ( Kim Man-h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5-12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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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의 조선사회는 1587년 손죽도(損竹島) 왜변(倭變), 1589년의 기축옥사(己丑獄事),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광해군(光海君)의 집권과 이어진 인조반정(仁祖反正), 1624년 이괄(李适)의 난,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당시 나주는 전라도의 거읍(巨邑)이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사건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정치적으로 볼 때 나주 지역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공존하고 있었다. 양측의 경쟁은 치열했으며, 때로는 격한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또한 나주는 영산강(榮山江)을 통해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면 격전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즉, 16~17세기 나주 지역은 국내의 정치적 격변과 대외적인 전쟁 상황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나주의 대표적인 가문 중 하나였던 나주나씨(羅州羅氏) 일문은 이러한 역사적 변곡점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본고에서는 나주나씨 직장공파(直長公派) 후손인 나사침(羅士忱)과 그 여섯 아들을 다루었다. 나사침은 나주의 대표적인 동인계 인물로, 나주목사였던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을 받아 경현서원(景賢書院)을 설립하였다. 또한 정개청(鄭介淸)을 모셔와 아들들을 가르쳤다. 나사침의 여섯 아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거나,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노량해전(露粱海戰)에 참가하였다. 막내아들 나덕헌(羅德憲)의 경우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세 차례 심양(瀋陽)에 다녀왔으며, 명(明)-청(淸) 교체기에 끝까지 명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주나씨 일문은 나사침을 포함한 자손 3대에서 2충신(忠臣), 2효자(孝子), 4열녀(烈女)가 배출된 즉, 8정려(旌閭)의 집안이었다. 나주시 남내동에 위치한 나주나씨 삼강문(三綱門)이 그간의 활동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야말로 16~17세기 나주나씨 일문은 손죽도 왜변, 기축옥사, 임진왜란, 명청교체기의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기축옥사를 통해 큰 피해를 당하였음에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을 도와 구국(救國)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괄의 난을 제압하는 데에도 활약하는 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후손들은 꾸준히 스승에 대한 신원(伸寃) 운동을 벌였으며, 경현서원을 중심으로 나주 지역 사회의 주도권을 점유해 나갔다.


The 16th and 17th centuries of Joseon society was an era of convulsion, involving Japan's Invasion of Sonjukdo in 1587[損竹島倭變], the Gichuk oksa[己丑獄死], the Imjin War[壬辰倭亂], Gwanghaegun[光海君]'s rise to power and King Injo's subsequent restoration[仁祖反正], Yi Gwal[李适]'s Insurrection in 1624, and the Manchu Invasion of 1636[丙子胡亂]. As Naju was the capital of Jeolla Province at the time, it sustained a considerable impact from the turn of these events. Particularly from a political point of view, it appeared that the Easterners[東人] and the Westerners[西人], the two major political factions since the 16th century, coexisted within Naju. The rivalry between the two groups was fierce, which sometimes was blown out of proportion violently. As Naju was located at the mouth of the Youngsan River[榮山江], it could be used as an entrance point to all Jeolla counties once hostilities broke out. For this reason, Naju was often the battleground for warring parties. During the 16th and 17th centuries, Naju was unable to avoid political skirmishes and invasions.
The Naju Na Clan, which was one of the most prominent families in the region at the time, engaged in various activities at this important historical juncture. This thesis deals with Na Sa-chim[羅士忱], the descendant of the Naju Na Jikjang-Gong Clan[直長公派], and his six sons. Na Sa-chim was one of the most powerful Easterners in Naju, who founded the Gyeonghyeon Academy[景賢書院], with the help of Kim Sung-il[金誠一] who was the former minister of Naju. He also invited Jeong Gae-cheong[鄭介淸], a famous scholar, to teach his sons. The six helped Admiral Yi Sun-shin[李舜臣] in the naval battle of Noryang[露粱海戰]. In the case of his youngest son, Na Deok-hun[羅德憲], who has been to Shenyang[瀋陽] three times in recognition of his diplomatic abilities, was highly praised for keeping his integrity towards the Ming Dynasty until its overthrow by the Qing Dynasty.
The Naju Na Clan is also famous for producing eight men and women of great accomplishments, including two patriots, two filial sons, and four virtuous women from three generations of descendants, including Na Sa-chim. The Samkangmun Monument commemorating the clan, located in today's Namnae-dong in Naju, signifies their good deeds in that era.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the Naju Na Clan, engaged in various activities during the convulsion times, including Japan's Invasion of Sonjukdo, the Rebellion of Jeong Yeo-rip, the Imjin war, and the Ming-Qing transition. Although the clan sustained great damage through the period of the Gichuk oksa, they did not turn away from the national crisis and helped Admiral Yi carry out defeating Japanese invaders and subdue Yi Gwal's rebellion. After the war's end, their descendants continued to campaign for the amnesty of master and took the initiative of the Naju community, centered around the Gyeonghyeon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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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중국 청대(淸代) 도광연간(道光年間)에 “천하제일 대선인(大善人)”이라 칭송된 반증기(潘曾沂, 1792~1852)의 자선업적을 토대로 19세기 엘리트들이 자선(慈善)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자선의 문화적 특징을 도출하였다.
특히 관부 중심의 기록이 갖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반증기개인과 가문이 남긴 자료들을 참고하였는데, 연보(年譜)·보권(寶卷)·반씨가문 족보(潘氏家門族譜) 등 개인과 가문의 기록을 활용함으로써 당시 지역의 현황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활동했던 강소성(江蘇省)은 건륭(乾隆)~도광(道光)시기에 수재(水災)의 빈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1814년에 발생한 한재(旱災)에 이어 10년 뒤 발생한 1823년의 수재(水災)는 이후 10년 동안 풍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시 이러한 환경의 악조건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자선사업이 활발하게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관직생활을 접고 낙향한 반증기가 지역사회의 실상을 목도하면서, 실질적인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였고, 파생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맞춤식의 원조와 구제방법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반증기의 생애, 지역사회에서의 위상, 교류 관계, 자선활동 내용, 지역사회의 특징 등을 통해 중국 전통시대의 자선 정보를 정리하고 자선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실증적 차원의 사례연구를 보충하였다.


This study analyzed the philanthropic achievements of a philanthropist named P′an. Tsengi (1792-1852), who was active during the Dokwang Emperor during the Qing Dynasty in China. Based on this, we analyzed in more detail the motives for the 19th century elites' participation in charity and derived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charity. In particular, he referred to data left by his personal and family members to compensate for the limitations of government-oriented records. These records provided a clear picture of the situation in the area at that time. He closed office and went back to his hometown to look at the realities of the community and approached the substance of the real problem. Later, he began to implement customized aid and relief to solve social problems that had been derived.
Thus, he supplemented his empirical case study by organizing information on charity and identifying the nature of philanthropic culture in the traditional Chinese era through his life, his status in the community, his relationship with the community, his charitable activities and characteris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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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50년대 초기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무통분만 담론

저자 : 유연실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5-19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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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중국 공산당이 보급한 무통분만법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이론에 근거한 소련의 선진과학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무통분만법은 출산에 수반되는 감각적 통증을 언어적 조건반사에 의한 잘못된 인식으로 치부하였다. 그리하여 분만과 아픔을 연결시키는 언어체계에 대한 수정과 더불어 산전교육과 호흡법과 같은 보조적 조산 동작을 통해 여성은 '아픔 없이도 출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상징' 체계가 구축되었다. 즉 출산에 따른 '고통'과 '아픔'이 언어적으로 소거됨으로써, 여성이 분만 시 아프다고 크게 소리 지르는 행동은 '비정상적' 조건반사로 치부되었으며, 여성이 웃으며 행복하게 출산을 하는 것이 '정상적' 모습으로 그려지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를 통해서 중국 공산당은 여성을 출산의 고통에서 해방시킨 '구원자'의 이미지, 여성의 신체를 세심하고 자상하게 보살피는 '복지'의 이미지를 확산시킴으로써, 여성들에게 '感恩式' 아이덴티티를 구축하였다. 이처럼 '산통'은 사회주의 국가의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중국이 국민당에서 공산당으로 지배질서를 전환하는데 사회주의·中蘇우호 관계·여성해방·복지 등 개념을 실체화하는 중요한 매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국가·의료인·무통분만법을 체험한 산모로 대표되는 담론 주체들은 기존의 출산문화에 대해 일정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정치적·의료적 개입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무통분만을 통해 기대하는 바는 그들의 정치적 목적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국가·의료인·산모는 '의료적 개입을 통해서 고통 없이 출산할 수 있다'는 인식에는 일치를 보았지만, 국가는 무통분만법을 통해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공산당의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의료인들은 무통분만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부르주아'적 혹은 '유심주의'적이라는 정치적 낙인을 회피하고, 의료에 대한 신뢰의 회복과 의료적 간섭의 확대를 기대하였다. 무통분만법의 수용자였던 산모들은 정작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국가적·의료적 선전 담론 속에서 '산모가 실제로 출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는 은폐되거나 혹은 왜곡·과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무통분만 담론 속에서 산통의 의미 혹은 자연스러운 출산의 개념은 정치적으로 재구성되었으며, 이 개념을 통해 여성들의 경험과 요구는 선별적으로 부각되거나 삭제되었다.


1949年中華人民共和國成立以后,毛澤東提出了“婦女頂着半邊天”以强調男女平等的重要性。其背后則是暗藏了社會主義經濟建設需要女性勞動力這一政治目的。事實上,20世紀50年代初,女性的生育健康開始成爲衡量勞動力的標准。女性的身體作爲勞動的主體需要由國家來進行管理,女性的身體也铭刻上了所謂國家恩賜的'福利'。婦幼保健院的設立、新法接生的普及、托兒所的建立使得這個國家的恩賜得以實現。在這個過程中, 女性雖然承受着生育和勞動的雙重痛苦,但是她們被賦予了'勞動者'這一崭新的階級身分, 建立了作爲社會主義國民的認同感。
1952年中國共産黨普及无痛分娩法時,是以巴甫洛夫的條件反射爲理論依据的蘇聯先進醫學來對其進行介紹的。无痛分娩法認爲隨着分娩而感到的疼痛是由于語言條件反射而造成的錯誤認識。于是,通過修正連接分娩和疼痛的語言媒介,以及使用呼吸法、腹部按摩等輔助助産動作,建立了女性'分娩可以完全无陣痛'的新的'象征'體系。卽,從語言上消除伴隨分娩的疼痛就會産生女性分娩時大聲哭喊疼痛的行動是“不正常的”條件反射,微笑着幸福的分娩才是“正常的”樣子這種逆向的情況。這樣,中國共産黨推廣自己使女性從分娩痛苦中解放出來的“解救者”形象,對女性身體細心慈祥照顧的“福利”形象,使女性們建立起了“感恩式”的認同感。“産痛”在社會主義國家建構的語境中被借用,成爲中國從國民黨轉移共産黨的統治秩序,社會主義、中蘇友好關系、婦女解放、福利等槪念的實體化所不可或缺的媒介。
1952年包裝爲蘇聯的先進“科學”或者國家福利“恩賜”的无痛分娩法在新生社會主義國家的一次政治運動動員后,突然在歷史舞台上消失了。當然,无痛分娩法直到1957年依然在婦産科和臨床醫療上實施,然而雖然可以見到其普及率擴大的事例,但是輿論對其的關心明顯地減少了。這也反過來證明了其本身或許是國家對'无痛的分娩'的虛構,而在國家的政治運動中連女性分娩的呻吟都必鬚徹底地沈默的現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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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곡과 마곡의 이미지 변화 - 루터파 성서삽화를 중심으로

저자 : 오종현 ( Oh Jong-hy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1-21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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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과 마곡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플롯이었다. 이는 대항 할 수 없는 악마적 집단의 등장과 이를 감금시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부분과 인류의 마지막 때에 이들이 다시 출현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플롯은 성경과 꾸란에 공통으로 등장하며 문화적으로 공유되었다.
곡과 마곡 플롯은 중세 말부터 널리 공유되었다. 특히 중세의 지도 속에서 곡과 마곡의 위치가 종종 확인된다. 특히 '마파문디'에서는 북쪽에 감금된 곡과 마곡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지도에서 나타나는 곡과 마곡의 모습은 알렉산드로스 로망스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산맥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흉폭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에서 곡과 마곡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주목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빈 포위 이후 만들어진 오스만제국에 대한 두려움은 성서 내에서 새로운 삽화로 표현되었다. 삽화 속에서 빈은 선한 믿음을 지닌 이들이 모인 신성한 성이 되었고, 이를 포위한 오스만 군대는 곡과 마곡으로 그려졌다.
루터파의 입장에서 빈은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의 수도였다. 빈을 선한 성도가 모인 도시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충돌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빈 포위가 가져다 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충격은 논리적인 사고를 앞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곡과 마곡이 벌이는 최후의 전쟁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빈이 신성한 도시로 표현된 것이다.


'Gog and Magog' was a plot widely spread in the Mesopotamia. It consists of the emergence of an unguardable demonic folk, the part of Alexander the Great who confined it, and that at the Armageddon they will again appear and attack the believers. This plot appeared common to both the Bible and the Qur'an and was shared culturally.
The Plot was widely shared from the end of the Middle Ages. Especially in the map of the Middle Ages, the Gog and Magog is often confirmed. In 'Mahamundi', it often located on the north place. The Gog and Magog appear on the map faithfully reflect the content of Alexandros Romance
In September and December Bible, images of Gog and Magog was not used as illustration. After the Siege of Vienna, this theme was inserted as an illustration in the Lutheran bible. Vienna became a sacred city and the Ottoman armies like that surrounding them were depicted as Gog and Magog.
From the position of Lutheran, Vienna was the capital of the political forces against the Reformation. Expressing Vienna as a city of believers was a problem that could conflict with their identity. Nevertheless, the shock of the siege of Vienna made it impossible to think logically. So in the Lutheran Bible, Vienna was illustrated as the sacre city.

KCI등재

8세계사 속의 5.18-피털루, 잘리안왈라공원, 그리고 광주-

저자 : 이영석 ( Lee Young-su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9-24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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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세계사의 시각에서 광주학살을 새롭게 살피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국가 폭력에 의해 빚어진 다른 두 학살(피털루 학살 및 잘리안왈라 학살)과 광주를 서로 비교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려고 한다. 피털루 학살은 1819년 8월 맨체스터의 한 광장에 의회 개혁을 요구하며 운집한 수 만 명의 군중을 군 기마병이 공격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학살을 가리킨다. 잘리안왈라 학살은 1919년 4월 신년맞이 축제에 몰린 군중을 영국군이 강제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사건을 뜻한다.
두 사건은 전개과정이 광주학살과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 즉, 이 세 사건은 모두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빚어졌고, 그 학살의 경험과 기억이 그 후 민중의 저항운동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세 사건에서 우리는 당시 폭력을 감행한 지배세력이 민중에 대한 멸시감과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 사건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광주항쟁만이 가진 특이성이 있다. 그 것은 1980년 광주에서 그 학살과 그에 대한 항쟁을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가졌던 집단적 부끄러움이 그 이후 사회변혁을 향한 도덕적 집단의식을 형성했으며, 이 집단의식이 그 후 이 지역 출신 젊은 세대가 한국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으로 함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참여와 헌신을 통해서 광주 항쟁은 전국적으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했던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take a new look at the Gwangju massacre from the perspective of world history. To this end, we try to find common ground and differences between these three massacres by comparing the Gwangju massacre with the two other massacres caused by national violence, that is, the Petaloo massacre and the Jalianwala Bugh massacre.
The Petaloo massacre refers to the accident that the military horsemen attacked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ho gathered at a Manchester square in August 1819 to demand parliamentary reform, and as a result, hundreds of people were killed or hurt. The Jalianwala Bugh massacre marks an incident in which many people were killed or injured when British troops fired indiscriminately in the process of forcibly disbanding a crowd driven by the New Year's celebration in April 1919.
The two incidents were very similar in many respects to the Gwangju massacre. In other words, all three cases were caused by the state-violence, and people's experiences and memories of the massacres have since served as an important driving power of the popular resistance movement. In the three cases, we can confirm that the ruling classes who carried out the violence at that time had a sense of strong contempt and hatred toward the people.
Although the three incidents have something in common, there is a peculiarity only of the Gwangju uprising. That is the fact that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of 'shame' of those who witnessed and experienced the massacre in Gwangju in 1980 has since shaped a moral sense of collective mentalite toward political and social reforms, which has led the younger generation from the region to take the lead in the democratic movements in Korea. Through their participation and dedication, the Gwangju uprising was regarded as a national symbol of resistance to dictatorship, and has made the biggest contribution to the Korean democratic movement. This is the peculiarity of the Gwangju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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