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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update

Chonnam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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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97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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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73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747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0호(2019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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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남지역 백제~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의 구조 변천과 배경

저자 : 이정민 ( Lee Jeong-m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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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가마의 구조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속성은 소성실 평면형태이다. 전남지역 백제~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의 소성실 평면형태는 장타원형(Ⅰ형)→장방형(Ⅱ형)→사두형(Ⅲ형)으로 변화한다. 장타원형 평면형태는 삼국시대 토기가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7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장방형과 병행하여 사용되다가 8세기 중반에 소멸한다. 장방형은 10세기를 전후로 소멸하고 사두형은 8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0세기 중반에 소멸한다.
화구~연소실 평면형태는 방형(가형)→역제형(나형)→역철형(다형)으로 변화한다. 방형은 백제~11세기 전반에 사용되고, 역제형과 역철형은 7세기 후반과 10세기 전반에 각각 등장하여 조선시대까지 사용된다.
연소실 후반부 불턱은 백제시대부터 유단식(a형)과 무단식(b형)이 혼용되다가 9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단식(a형)으로 정형화된다.
전남지역 백제~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마의 구조적 변화는 당대의 정치·사회·경제적 변동양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백제시대는 전남지역에서 기와가마가 초현하는 시기로 기와의 본격적인 사용은 불교 유적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백제시대 조와술은 토기제작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와도겸업의 형태로 운영되며, 기와가마의 구조 역시 토기가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1기는 삼국 통일 이후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수반되는 지방 행정구역 및 군사조직의 개편에 따라 국가 중심의 건축공사가 이루어져 각 치소인근에 기와가마가 조영된다. 통일신라 2·3기는 지방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각 지방별로 수요가 발생하는데 기와가마 규모가 작아지고 사찰이나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The plane shape of the firing chamber is the most important attribute that indicates transformation of the structure of the roof-tile kilns. The plane shape of the firing chamber changed in sequence TypeⅠ(elliptic shaped)→TypeⅡ(rectangular shaped)→TypeⅢ(snake head shaped). Type Ⅰ is assum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pottery kiln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Until 8th century when it has been extinct, it has used together with TypeⅡ which appeared at the late 7th century. TypeⅡ is subdivided into the firing chamber length is longer than 320㎝ or shorter than 240㎝. In the late 8th century, TypeⅢ has appeared in the form that firing chamber length is shorter than 300㎝, a maximum width at the middle, and a minimum width at the back. And it became extinct with TypeⅡ in the mid 10th century.
The plane shape of the part from a stokehole to combustion chamber changed in sequence Type가(square shaped)→Type나(reversed trapezoidal shaped)→Type다(reversed convex shaped). Type가 was used from Baekje period to the early 11th century. Type나 which appeared in the late 7th century and Type다 which appeared in the early 10th century was used until the Joseon period.
The structural change of the Baekje~Unified Silla periods the roof-tile kilns in jeonnam area as mentioned above are related to the supply for roof-tile demand. The roof-tile demand is closely related to the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fluctuations.
In first sub-period of the Unified Silla period, due to reorganization of the local administrative area and military organizations involved in the establishment of a centralized system after reunifying Three Kingdoms, the construction was carried out by the government and a roof-tile kilns were built near each Chiso(治所). In second and third sub-period of the Unified Silla period, because the regional authorities gradually grew up, the roof-tile demand has been occurred in each region and roof-tile kilns were built near each region. In this time, the scale of the roof-tile kilns was reduced, and it was mainly managed by Buddhist temples or powerful local c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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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라도 강진 사립금릉학교(私立金陵學校)의 설립과 성격

저자 : 김덕진 ( Kim Deok-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5-7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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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금릉학교는 강진 최초의 근대학교로 1906년 8월에 개교하여 1911년에 강진공립보통학교로 이어졌다. 금릉학교 개교에는 군수 조중관의 역할이 컸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학교를 설립하여 본인 스스로 건물을 짓고, 교사를 초빙하고, 학생을 모집했다. 서울 지인들을 통해 몸소 공립으로의 전환도 추진했다. 반대자나 방관자를 설득하여 참여시키는 일도 직접 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실이나 휘하의 이족들을 개교·운영에 투입했고, 군 재정도 지원했다. 군수의 역할도 컸지만, 관내 각계각층의 동참이 금릉학교 개교와 안착에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우선 그 동안 지역의 최고 집단으로 군림해온 양반, 구학문을 고집하는 유림층이 대거 참여했다. 그 가운데 개신유림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보수적인 전통유림도 적지 않게 참여했다. 그리고 강진의 이족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그들은 후원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행정경험을 토대로 총무·서기·회계 등을 맡아 학교 실무를 맡기도 했다. 유림이건 이족이건 간에 참여자 가운데는 과거 합격자나 관직 역임자 또는 지주경영이나 포구상업 및 사채업을 통해 재력을 축적한 이가 적지 않았다.


The private Geumreung School was founded as Gangjin's first modern school in August, 1906 and became a public primary school in the area in 1911. Jo Jung-gwan, the county governor, played huge roles in the opening of the school. Upon his arrival as the new county governor, he started to build a school building, invite teachers, and recruit students to found a school. He also pushed forward the idea of converting the private school into a public one himself by taking advantage of his connections in Seoul. His involvement was also personal in persuading opponents and bystanders and encouraging their participation. He also put Ijoks in the publication office or under his command into the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the school and provided military funds, as well. There is no doubt that he made enormous contributions to the school, but the participation of all walks of life in the county was the biggest driving force behind the opening and settlement of the school. First, the noblemen, who had dominated the community as the biggest power, and the Confucian scholars, who had insisted only on the old study, participated in the project in large numbers. Of them, conservative and traditional Confucian scholars took big part in the project with reformed ones taking the leading role in it. In addition, the Ijoks of Gangjin took comprehensive part in the project. Not only did they made donations, but they also took charge in the practical affairs of the school including general affairs, clerk works, and accounting based on their administrative experiences over the years. Of the participants including Confucian scholars and Ijoks, many passed the state exam, held public office, or accumulated wealth through land ownership and management, port commerce, and moneylending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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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남지역 3·1운동과 종교계 - 선행연구 검토와 향후과제 제시를 중심으로 -

저자 : 한규무 ( Han Kyu-m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7-10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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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호남지역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과 종교계에 대한 선행연구를 검토하고 향후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기소자들이 만세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라 가정한다면, 호남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한 종교계는 천도교·기독교였고 불교·유교의 역할은 미미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의 비중이 천도교인의 비중보다 컸으며, 전남은 기독교인이 천도교인를 압도했고, 전북도 기독교인이 천도교인보다 우세했다.
천도교측에서는 조직적, 기독교측에서는 개인적인 통로로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천도교측은 3월 1~2일 서울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전주교구와 남원교구를 거쳐 다시 각지 교구로 전달되었다. 반면 기독교측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준비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을 듣거나 서울에서 내려온 인사들이 개인적 인맥을 활용하여 준비에 착수했다.
천도교측은 교주 손병희가 3·1운동을 교단적 차원에서 추진했다. 반면 기독교측은, 장로교단이나 장로교단의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독교측은 천도교측보다 학교·병원 등 기관을 많이 운영하고 있었고, 그 교사·학생·직원의 다수가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이 사전에 협의를 거쳐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지역에서 양측이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추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도교측에 비해 기독교측의 3·1운동 초기 준비는 조직적이지 못했지만, 교회·학교·병원이라는 '삼각편대'는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는 데 주효했다.


This study set out to review previous studies on the March 1 Movement and the religious circles in the Honam Region and propose future tasks for them, commemorating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movement. If it is assumed that the indictors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protest, it will be safe to say that Cheondogyo and Christianity took the lead in the protest in the Honam region with Buddhism and Confucianism playing insignificant roles. Overall, Christian believers recorded a higher percentage in the movement than the Cheondogyo believers. While Christian believers overwhelmed Cheondogyo believers in numbers in the movement in Jeonnam, they outnumbered Cheondogyo believers in Jeonbuk.
The Cheondogyo community prepared for the demonstration in an organized manner, whereas the Christian community did through individual routes. The Cheondogyo community ha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elivered from Seoul on March 1~2 and distributed it to each of its parishes via the Jeonju and Namwon parishes. The Christian community made a preparation at the individual level. Individuals that heard about the protest in Seoul or came down from Seoul started to make a preparation for their protest through their personal connections.
Son Byeong-hee, the religious leader of Cheondogyo, pushed forward the March 1 Movement at the level of its religious body. In the Christian community, neither the Presbyterian order nor its level pushed forward the movement. The Christian community, however, managed many more institutions including schools and hospitals than Cheondogyo with many of its teachers, students, and staff members participating in the protest.
There is a question as to whether the Cheondogyo and Christian communities discussed before participating in the protest, and a general answer to the question is that the two religious communities pushed forward the protest independently in most regions around the nation. Even though the Christian community did not prepare for the March 1 Movement in an organized manner at the early stage compared with Cheondogyo, its "triangle formation" of churches, schools, and hospitals was effective for turning the t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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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20년대 초반 조선 지식인의 '조선 미술' 규정과 서술 - 잡지 『동명』을 중심으로 -

저자 : 류시현 ( Ryu Si-hy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5-125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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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민족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참여한 활동이었다. 비록 독립이란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3·1운동은 민족적 자아(自我)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족이 재발견되었고, 이후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중심의 '대중운동'의 시대가 열렸다.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민족적 자아란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 것일까?
근대적 민족주의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조선 지식인들에게 교육과 언론 매체를 통해 조선 역사와 문화 연구를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근대적 학문 방법론에 입각하여 조선 역사와 문화와 관련해서 '조선적인 것'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일본인 주도의 조선 역사와 문화 연구에 대한 학술적 대응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최남선이 주도한 잡지 『동명』을 중심으로 1920년대 전반기 조선 역사와 문화에 대한 대중적 소개를 살펴보았다.
1920년대 전반기는 다양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지식인이 주도해서 담론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다양한 출판물 가운데 조선 미술에 관한 정리는 민족사서술의 일환이며 동시에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었다. 더불어 1920년대 전반기 조선 문화 특히 조선 미술에 대한 정리는 '조선문화 연구'의 일환인 '조선학'의 형성과정을 살필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우선 1920년대 전반기 조선 미술사(美術史)에 대한 논의에는 아직 조선인의 속에 이루어진 체계적인 조선 미술사가 서술되지 않았기에, 조선 미술사 구성의 방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당대 조선미술사 연구가 일본인 연구자와의 대결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점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당대 대표적인 미술사 연구자인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중국 미술의 '모방' 논의와 통일신라시대를 예술의 황금기라고 보는 논리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 미술사의 구성과정을 검토했다.


The many colonized Korean peoples participated in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Even though this movements did not accomplish the main goals of Korean independence, the Korean intellectuals earnestly scrutinized in the essence of Korean-ness based on the Koreans' self-confidence.
In general the Modern Nationalism which called the Printed-Nationalism ware usually built by both nation education and mass-communication such as Korean news papers, Korean magazines and so on. This paper focuses on the discourses of Korean identities by Choi Nam-son(崔南善)'s arguments and the articles of magazine Dong Myeong(東明) during the early 1920s.
The academic finding of Korean-ness was called the Korean Studies(朝鮮學). One of these fields was the re-evaluation of Korean Arts. For the purpose of writing the history of Korean Arts, many Korean intellectuals competed with Sekino Tadashi(關野貞)'s theories on Korean Arts.
Sekino Tadashi who was a professor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participated in the research and classification of the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s. Based on these researches, he emphasized on two themes. The first, he said that all of Korean Arts were the mimic of the Chinese Arts. Second, through the history of Korean Arts, the Unified Shilla dynasty was evaluated the age of Golden period by him. On the contrary, the Korean intellectuals recognized anew the values of Korean Arts and translated the Japanese scholars' articles on positively evaluated Korean ceramic wares during the Koryo and Choson dynasty against Sekino's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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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순 10.19' 관련 구술 사업의 현황과 과제

저자 : 박병섭 ( Bak Byeong-seop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16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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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각종의 구술 수집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순 10.19사건의 구술 현황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여순 관련 구술의 존재 상황을 파악하고, 과제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하 '여사연'),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이하 '동사연'),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이하 '여순연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등의 단체에서 추진된 구술 수집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신문과 방송의 증언 인터뷰, 군사편찬연구소의 군지휘관, 사병들의 진술, 학교사 속의 증언들, 자서전(회고록) 등 전기물, 『순천시사』와 읍면지의 구술 수록, 순천문화원, 순천시(산하 기구) 등의 구술 수집, 개인의 증언 수집, 고흥, 광양, 보성 등지의 구술 수집 현황도 함께 실었다.
다음 항목으로 제주 4.3의 구술 자료 노력을 살펴봄으로써 역으로 여순사건구술이 나아갈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제주도가 2001년 전 6권의 자료집을 펴내고, 제민일보(제주 지역언론사)와 제주 4.3연구소 등이 주축이 되어 시행한 구술 수집 작업을 계속해온 측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제주 4.3연구소의 '1000인 증언 채록사업'은 특히 43명의 경찰 증언을 확보하고 있는 점이 주목될 만하다.
여순사건 구술 수집의 과제는 총 8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체계적인 구술 수집을 위한 기구의 설립, 둘째, 진실 규명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증언 채록을 서두를 것, 셋째, 먼저 확보된 구술의 정리, 넷째, 아카이브 구축과 병행할 것, 다섯째, 가공을 맡을 전문 작가와의 협력 체제 갖추기, 여섯째, 한국사회 지도층의 여순사건 미투(me-too) 조직, 일곱째, 2세대의 증언 수집, 여덟째,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어르신들의 목격담 정리 기회 주기가 그것이다.


As 'the age of the oral history' has been emerged with enormous historical interview data, this research is focused on Yeosun Revolt with respect to various types of oral data. This research consists of reviewing Yeosun Revolt-related interview data in the present circumstances and of suggesting improvements by summing up the present oral history of Yeosun Revolt.
Firstly, the researcher searched through data from several large institutions such as Yeosu Community Research Institute, East Jeonnam Community Research Institute,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Suncheon Citizens' Solidarity for Reconciliation and Peace of Yeosun Revolt,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Korea and so forth, all of which has been involved in Yeosun Revolt's oral history. Meanwhile, testimonial interviews by newspapers and broadcasting, statements made by military commanders and soldiers of the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MND), testimonies in the School history or autobiographies (or memoirs), testimonies described in 『The history of Suncheon city』, other local documents on the town history, Suncheon Cultural Center and locally affiliated organizations, personally collected interviews, as well as interviews gathered in Goheung, Gwangyang and Boseong has all been put together and analysed in this paper.
Subsequently, by looking at other oral history's efforts in terms of Jeju 4.3, this research points out what Yeosun Revolt's oral history should be oriented toward the future. This paper gives a high remark of Jeju Island on having been published 6 volumes of materials on Jeju 4.3 and playing pivotal roles on continuing oral history of Jeju 4.3 by collaborating Jemin Ilbo, local daily newspaper, with Jeju 4.3 Research Institute. Jeju 4.3 Research Institute's “1000 victims collection of testimonials” is the most noteworthy achievement in that it has been acquired 43 testimonies by the police.
At the same time, this research presents the 8 issues and suggestions of Yeosun Revolt's oral interview collection: First, the establishment of an organization for systematic oral interview collection, Second, the urgent recording of testimony by those of yet unclarified truth, third, prior data arrangement, fourth, in parallel with foundation of archives, fifth, the collaboration system with professional writer dealing with process, sixth, the association of Yeosun Revolt's “me-too” movement by social leaders, seventh, gathering second generation's interview data, and eighth, opportunity for elderly witness to express and share experience through lifelong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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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여순사건과 순천지역 좌·우익 세력의 동향

저자 : 임송자 ( Yim Song-j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5-20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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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수,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 6군의 지역사적인 운동경험을 먼저 연구하여 밝힐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지역사적인 관점에서 여순사건을 밝히는데 소홀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여순사건에 이르기까지 좌우세력의 동향을 살펴보고, 이들이 여순사건이라는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었으며, 그리고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탐색하였다.
해방 후 전면에 나타난 순천지역의 좌우세력은 일제시기 청년운동, 신간회활동,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순천지부는 우익세력이 주도하는 형태로 결성되었으며, 김양수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한국민주당 순천지부를 결성하여 우익정치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좌익 쪽에서는 노동조합평의회와 순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좌우익의 세력관계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군정의 한민당 우대정책, 강력한 물리력을 동반한 좌익탄압책으로 우익세력은 유리한 위치에서 좌익과의 대결을 펼치면서 지역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가 있었다. 또한 1946년 1월 21일 광복군이 청년동맹 급습하여 야기됐던 피살사건 이후 좌우대립이 심각한 형태로 전개됐으며, 1947년에 들어서 우익조직이 상당히 강화되었다. 좌익활동가들의 전향도 이어져 지역운동에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5 · 10선거를 전후해서 순천지역의 우익세력이 분화되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 한독당 세력, 한민당 세력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갑구와 을구로 나뉘어 치러진 순천지역의 선거에서 한민당 후보가 모두 패했다. 이는 순천지역의 반한민당 정서가 강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발생한 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역 좌익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던 상태였으며, 남로당 순천군당은 봉기군을 통제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의 전면에 자신들을 드러내놓고 활동을 전개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다수의 희생을 초래했다. 그런데 좌익세력이 무차별적으로 우익세력을 처단했다는 지금까지의 인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처형의 대표적인 사례로 양계원 순천경찰서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48년 4월에 순천경호대를 결성하여 5개월 동안 훈련을 시켜 9월에 이르러 의용단으로 개편한 일로 지역민으로부터 반감이나 원성을 샀다.
정부군의 진압작전 과정이나 순천 탈환 후 봉기 가담자나 부역자 색출에서 무원칙적으로 무질서하게 처리함으로써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황두연 사건을 들 수가 있다. 황두연을 소장파로 분류하거나 이승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시정될 필요가 있다. 황두연 사건은 5 · 10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이 여순사건을 기회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편을 색깔론으로 공격하면서 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It is necessary to research the movement experience of the 6 counties' local history in the eastern Jeonnam province including Yosu and Suncheon, for understanding thoroughly Yosun incident. So far, little research about local history regarding Yosun incident have been presented. This paper was based on the need for research in the local history. I looked upon the movement of the left and right by the Yosun incident in Suncheon and searched for their situation and roles in the vortex of Yosun incident. Most of the left and right wing in Suncheon after the Korean liberation had been working with the youth movement, Shingahoe activities and socialist movement during the colonial rule.
The Suncheon branch of the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was mainly organized by the force of right wing. The force of the right wing with Kim Yang Soo had formed a branch of Korean Democratic Party and led the right wing activities. Meanwhile, the left wing organized the council of trade union and people's committee of Suncheon and unfolded their activities.
The power balance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reversed aft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settled down in South Korea. The things developed favorably for the right wing through the U.S. Military Government's policy for the Korean Democratic Party and strong repression against the left.
Also since the homicide which broke out right after the Liberation Army's abrupt attack against the youth alliance, conflict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became serious. Gradually the force of the left wing weakened and the wight wing organization strengthened considerably from the year of 1947. Additionally, the leftists continued to convert to the right wing and it affected the local movement. The right wing of Suncheon was divided into Syngman Rhee's supporters, Korean Independence Party's supporters and the Korean Democratic Party's supporters around the general election on May 10, 1948. All the candidates of the Korean Democratic Party lost the election which was done into Gab and Eul area. This fact showed that anti-Korean Democratic Party sentiment was strong in Suncheon.
At the point of the Yosun incident which broke out right after the foundation of Syngman Rhee's government, the left wing of Suncheon was not able to control the uprising force of the incident. However, the leftists exposed themselves and worked in the frontline of that indent. Even if the period of the incident was short, it resulted in a large number of victims.
It needs to reconsider an idea that the left wing indiscriminately killed the people of the right wing. Yang Gye Won, the chief of police station in Suncheon at the point was well-known example of the victim by the left wing. It seemed that he incurred the resentment of local people because he organized a security guard of Suncheon in 1948 April. Then he trained the security guard for 5 months and reconstructed them into militia in September.
A large number of local people were unfairly victimized because of the government army's indiscriminate repression or hunting out participants and collaborators without a principle. A well-known example was the incident of Hwang Du-Yeon. He has been regarded as the member of Younger Faction or a critic against Syngman Rhee. That kind of idea should be revised. The incident of Hwang Du-Yeon broke out because the force who were defeated in the election on May 10 attacked the opponent ideologically in order to win political power with taking advantage of the Yosun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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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
 123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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