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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update

Chonnam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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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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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97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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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7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792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0호(2020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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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 중고기 영토 확장과 정치집단의 역동적 대응

저자 : 임평섭 ( Lim¸ Pyeong-seob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36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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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고기 신라의 영토 확장을 둘러싼 정치집단의 역사적 경험과 대외인식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가 당면했던 국정 과제를 수행하는 정치집단의 대응 양상을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중고기 정치사의 역동성을 재조명하였다. 기존 중고기 정치사의 기본적인 관점은 왕과 귀족의 대립적인 관계로 이해해왔고, 상황에 따라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인물을 강조하였다.
왕과 귀족 간 갈등과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을 적용하여 살펴본 견해들은 다양한 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고기 정치사의 복잡한 전개과정을 분명하게 해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중고기 신라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인 영토 확장을 둘러싼 논의는 국가적 성장, 영토 확장 과정과 범위, 왕권강화라는 단편적 이해가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렇지만 중고기 신라의 영토 확장은 왕대별로 차이가 크며,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집단의 대응에 따라 다양한 양상이 간취된다.
영토 확장에 관한 정치집단의 인식과 대응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대' 차이이다. 이는 5세기에서 6세기로 넘어가는 급격한 정치, 사회, 대외관계의 변화와 맞물려 세대 간 역사적 경험의 차이와 대외 인식, 대응 방식의 특징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해당 논의를 통해 왕의 역할이나 왕과 귀족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의하던 중고기 정치사를 이해하던 프레임에서 벗어나 정치집단의 변화에 따른 역동적인 전개 과정을 부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This paper is supposed to examine the perceptional difference and historical experience between political groups in the middle period of Silla. In multidirectional terms, the paper shows political dynamics, occurred in the middle period of Silla, considering both components, such as changing overseas situations and political elites' responses to them. Previous research has maintained the perspective that king and elite are always oppose to each other. Besides, it has usually emphasized behaviors of a few associates to king.
Even though a lot of arguments has been suggested so far, some research has still focused on a dichotomous stand, like a conflict and cooperation between king and elites. However, even some academic debates about territorial expansion of Silla have tended to be simply handled to explain the complicated political situation in the period. So it is remarkable that political conditions could be changeable according to who was a king and elites' responses.
To overcome these research tendency, the paper is focusing on the gap of 'generation'. This new notion can make the range of understanding on a history during the middle period of Silla broaden. Through this attempt, it is aimed at contributing to suggest some dynamic characteristics of the period. So I anticipate that new discussions about the middle period of Silla will be more activated from my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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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세기 중·후반 안동(安東) 사족(士族) 권호문(權好文)의 향촌사회활동

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7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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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庵 權好文은 「獨樂八曲」과 「閑居十八曲」 등의 작품을 남긴 문인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그간 그의 작품과 관련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在地士族으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시대적 역할에 대해서는 간과된 면이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16세기 중·후반 향촌사회의 일단을 이해하고자, 慶尙道 安東에서 활동한 권호문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그의 향촌사회활동을 살펴보았다. 권호문의 안동권씨 가문은 고려조 이래 안동의 鄕職을 세습해 오다, 여말선초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안동 지역을 비롯한 경상도 북부권의 명문 가문, 그 중에서도 퇴계학맥과 연결되어 있는 眞城李氏·奉化琴氏·光山金氏 등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를 매개로 지역 내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고, 16세기 무렵에는 안동의 향촌질서를 주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退溪 문인이었던 권호문도 이 시기 안동 지역에서 교화·교육 사업 및 각종 향촌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퇴계학맥의 계승자로서 퇴계의 문적 정리와 陶山書院·廬江書院 祭享과 같은 추숭 사업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권호문의 향촌사회활동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서당 설립과 강학 활동이다. 서원·서당을 이상적 藏修處로 인식했던 퇴계의 구상을 계승하여, 안동에 鏡光書堂과 靑城精舍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함으로써, 지역 내 사족 세력과 퇴계학맥을 부식시켜 나갔다. 또한 권호문은 留鄕所·司馬所와 같은 향촌자치기구에서 활동하였으며, 鄕飮酒禮의 거행 절차를 새롭게 규정한 「洞監」을 저술하였다. 특히 「동감」은 조선의 사정과 달랐던 성리학적 교화 체계를 실제 동리에서 어떻게 적용시키고 효과를 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Songam(松庵) Kwon Ho-mun(權好文) has been recognized as a scholar who had the works of 「Dokakpalgok(獨樂八曲)」 and 「Hangeosippalgok(閑居十八曲)」 and others that there haws been a number of studies realted to his works. However, as a local wealthy gentry, there are many aspects that overlooked about his role that he displayed. Therefore, under this study, it has sought for the social and economic bases of Kwon Ho-mun family and his local community activities in Andong, Gyeongsang-do in order to understand an aspect of local communities during the middle to late 16th century when the private clan-oriented local community control order was beginning to take place. The Andong Kwon-clan of Kwon Ho-mun had been handed down its social status in Andong since the Goryeo Dynasty and had grown into the well-established family at the end of Gorye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Thereafter, the family ties with esteemed families in the northern part of Gyeongsang-do, particularly in the Andong area, in particular, Jinseong Lee Family(眞 城李氏) that was connected to Toegye academic sector, Bonghwa Geum Family, Gwangsan Kim Family and others through marriage. Through this practice, the family solidified its social status even more firmly and it was able to lead the community order of Andong during the 16th century. Under the circumstance, Kwon Ho-mun, a pupil of Toegye began to undertake various local community activities and educational endeavors in the Andong area during the time. First of all, as the succrssor of the Toegye Scholars, he led the projects of summarization of Toegye's literature and posthumopus praises for Dosan Seowon, Songgang Seowon(廬江書院) and other memorial services. Establishment of seodang and ganghak activities are the most spotlighted activities from the local community activities of Kwon Ho-mun. As succeeding the ideals of Toegye who acknowledged seowon and seodang as the most ideal places of accumulating learning, he established Gyeonggwang Seodang(鏡光書堂) and Cheongseongcheongsa(靑城精舍) in Andong. And, as he developed numerous pupils in these establishments, he developed the private clan forces and Toegye scholarstic lines in the region. In addition, Kwon Ho-mun was active in self-regulated community organizations, such as, Yujeongso(留鄕所) and Samaso(司馬所), and he wrote 「Donggam」 that newly defined the procedures for Hyangeumjurye(鄕 飮酒禮). In particular, 「Donggam」 is an important writing since it contains the contemplation of the private clans of the time with respect to how the Confucius edification system that was different from the situation of Jeseon then could be applied in local community and how it would be practiced effe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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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빅 데이터(Big Data)'가 화두로 떠오름에 따라, 전통적 인문학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의 하나로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이 대두되고 있다. 이 글은 디지털 인문학적 측면에서 국문판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 1907년 시평가사를 살펴보았다.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은 고어를 현대어로 정규한 다음, 형태 분석을 통해 고유명사, 일반명사의 빈도에 기반하여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키워드(keyword)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 글은 IPTC(International Press Telecommunications Council, 국제언론통신평의회)의 NewsML-G2 권고안, IPCT Subject Codes를 참고하여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형태주석 코퍼스(morphologically annotated corpus)에서 정치·국제·경제·사회 등 4개 분야의 주제별 키워드를 상위 30개로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글은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 키워드의 공시적 분석, 워드 클라우드 이미지의 시각화를 통해 키워드 가운데 '일본인'에 이어 '군수', '인민', '관리', '내각', '국가' 등 정치 분야 키워드가 높게 나타났음을 알았다. 그중 '일본인'은 반일을 담지하는 『신보』의 관심 대상이었고, '군수', '인민', '관리', '내각', '국가'는 대한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자강·개혁의 대상에 해당하며 동시에 『신보』 논설진, 『신보』 시평가사 독자투고자의 관심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이 글은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키워드를 활용하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모색하였다. 첫째,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키워드는 웹 서비스(Web Services)를 하여 자료의 정보화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키워드는 역사문화 콘텐츠 원형, 기획전시 자료, 의류디자인·제품디자인의 모티프로 활용될 수 있다. 셋째,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키워드는 언어적 자원으로서 사전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 넷째, 국문판 『신보』 1907년 시평가사의 키워드는 교육현장에서 개화기 교수-학습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As The big talking point in recently is Big Data, it has one of those major movements to expend Traditional Humanities, Digital Humanities has come to the fore. This paper is to analyze Korean words for The Comment Gasa of The Korea Daily News(KDN, Daehan Maeil Sinbo; founded in 1904) published in 1907 from the perspective of Digital Humanities. This paper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This paper has substituted modern languages for archaic word, was extracted keywords based on simple appearance frequency of proper noun and common noun throughout morphologically analysis. And then, the keywords are extracted from Morphologically Annotated Corpus, a collection of 142 The Comment Gasas of KDN published in 1907. This paper has analyzed the top 30 keywords for 4 topics and the year 1907. Thus, this paper has explored 'Japanese(日本人)' as the most talked-about and important keyword of 1907. And along the top ranks were keywords such as 'county governor(郡守)', 'the public(人民)', 'the cabinet(內閣)' and 'nation(國家).' 'Japanese(日本人)' had always been intense interest of KDN that it put emphasis on anti- Japan. 'county governor(郡守)', 'the public(人民)', 'the cabinet(內閣)' and 'nation(國家)' were objects of reformations and strenuous efforts as the basis for nationhood, and discussing issues of common interest to editors and readers of KDN.
Meanwhile, this paper has looking for 4 utilizations of keywords; providing Web services,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nts archetype, special exhibitions documents, motives of fashion design, motives of product design, linguistic sources of the compilations of the dictionaries and teaching and learning mate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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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8민주화운동에서 청소년의 참여 -1970년대 후반 광주의 민주화운동과 연계하여-

저자 : 강남진 ( Namjin¸ Ka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2-138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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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한국현대사에서 청소년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1970년대 후반 광주의 민주화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을 들여다보았다. 1970년대 후반 박정희정권의 계속된 탄압으로 민주화운동이 위축된 상황 속에서도 광주의 청소년들은 노동운동과 노동야학에 참여하면서 불합리한 노동 현실을 자각하는 노동자 의식을 배양했고, 독서회와 같은 학생서클을 통해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갔다.
1980년 5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이어졌을 때 광주에서도 5월 14일~16일에 걸쳐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렸고 청소년들과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하지만 5월 18일부터 계엄군의 강경한 진압이 시작되었고 예비 검속으로 인해 대학의 총학생회와 주요 민주화 인사들의 활동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대 후반 성장하고 있던 광주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함께 청소년들이 5·18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5·18민주화운동이 박관현과 같은 주요 지도자들의 부재 속에서도 열흘간 항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은 10대 청소년과 20대의 청년들 때문이었다.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은 20대의 청년들과 함께 항쟁의 주축 세력으로 참여하였다. 10대 청소년의 참여 양상과 희생의 현황은 1970년대 이후 1980년에 이르기까지 광주 민주화운동의 저변 확대를 보여주며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참여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청하고 있다.


This study examined teenagers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Gwangju in the late 1970s and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Teenagers in Gwangju area realized irrational labor reality while participating in labor night school. In addition, Through student circles such as reading clubs, he developed a sense of criticism on political and social issues.
Peaceful democratic rally was held in Gwangju from May 14 to 16, and the participation of Gwangju citizens continued. However, since May 18, the strict suppression of the martial law army continued, and due to preliminary inspection, it was not possible to expect the activities of the university's total student council and major democratization personnel during the uprising.
In this situation, teenagers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along with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forces of Gwangju, which was growing in the late 1970s. The participation patterns and sacrifices of teenagers showed the The participation and sacrifice of teenagers showed the expansion of base of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from the 1970s to 1980, and called for a new evaluation of the participation of teenagers to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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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북송(北宋)의 재상(宰相) 류지(劉摯)의 출신(出身) 지역을 통해 본 지명(地名)으로서의 발해(渤海)

저자 : 권용철 ( Kwon Yong-cheo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9-16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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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민에 대한 연구는 국내학계에서 꾸준히 그 성과가 쌓이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발해 멸망 이후에 펼쳐진 복잡한 동아시아 정국 속에서 발해 유민들이 그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혹은 거란, 여진, 고려, 북송 등의 사회에 편입되어 점점 발해인으로서의 색채가 감소하는 모습 모두 주목을 받았다. 국가는 비록 멸망했지만, 여러 민족들이 교차했던 동아시아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발해 유민들의 존재 가치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발해 유민과 관련된 연구에서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신중하게 판단하여 연구가 이루어져야 더욱 정확하면서도 귀중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북송의 문인 劉摯라는 인물을 사례로 제시했다. 劉摯는 왕안석과 사마광이 모두 사망하고 난 이후의 북송 정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상을 보유했던 인물인데, 송대의 기록 일부에서는 그를 '발해인'이라고 서술한 사례가 확인된다. 만약 그가 발해 유민의 후예라면, 이는 북송에서 발해 유민들의 지위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 정도의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渤海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발해라는 國名 이외에 중국의 郡縣 지명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즉, '발해인'은 발해국 사람이라는 뜻을 가질 수도 있지만 발해군 혹은 발해현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료에 등장한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해 유민사의 범주는 발해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발해 유민들이 활동했던 영역 전체의 역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10∼14세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발해 유민이 차지하는 위상은 아주 중요하고, 이러한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발해 유민과 발해현 출신 漢人을 혼동하지 않기 위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것을 통해 본고가 차후 발해 유민사 연구 방향 설정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e study of Balhae people is one of the areas where the achievement is steadily building up in the academy. Although the nation has collapsed, it is all too clear that the value of the Balhae people's existence has historically significant meaning, because they have played a unique role in East Asia in the 10th and 14th centuries. Therefore, I think that more accurate yet valuable follow-up research can be done only when research is done by carefully judging possible pitfalls in studies related to Balhae.
In this article, I presented Northern Song's Chancellor Liuzhi(劉摯) as an example. Liuzhi had a very important status in the late Northern Song, and some records of Song dynasty confirm that he was described as a “Balhae person.” If he was a descendant of Balhae people, this is also a discovery to the extent that we should review the status of the Balhae people in Northern Song. However, Balhae has to be strictly applied because it was used as a name for local prefecture of China in addition to the name of nation Balhae.
The study of Balhae people is not just staying at Balhae history, but is also closely linked to the entire history of the area in which Balhae people were active. Therefore, the status of Balhae people in the history of East Asia in the 10th∼14th centuries is very important, and if this importance is taken into consideration, careful attention is needed not to confuse name of nation Balhae with Chinese name of prefecture Bo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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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20-30년대 금성은행(金城銀行)의 여신 및 투자업무

저자 : 임지환 ( Yim Chi Hw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2-194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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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금성은행의 여신업무는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금성은행의 여신업무가 그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신업무의 활성화에 성공을 이루었다는 점, 정부와의 여수신업무의 확대를 통해 정부의존적인 은행성장의 전략을 구사했던 점, 그리고 산업계에 금융자금을 침투시켜 지속적인 이윤추구를 시도해갔던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금성은행은 부실기업의 인수 합병, 유망기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대주주로서 지속적인 이윤의 창출, 그리고 은행 산하에 직접 기업을 설립하여 새로운 이윤 창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금성은행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대출방식의 왜곡을 초래하여 산업계 전반이 그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20-30년대 금성은행의 대출업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The Jin Cheng bank could grow its banking business rapidly in 1920-30s. In the growth of banking business, receiving and extending business play a very important. role in revalitalizing the banking business. The main causes that made it possible for a loan business of Jin Cheng bank to be revalitalize can be summarized as follow: first, Jin Cheng bank could effectively absorb a large amount of silver that began to be focused on the Chinese coastal area in 1930s. Jin Cheng bank could expand the loan business by relying on the abundant deposits. Second, Kumsung bank could expand its loan business by loaning a large amount of banking fund to the governmental offices in high interest rate. Everytime Chinese government issued the public bonds for the purpose of resorving the financial deficiency of governmant, Jin Cheng bank took a positive and active attitude to cooperate with the finacaial policy of Chinese government. Third, Jin Cheng bank took the policy to increase the banking profits by penetrating the bankfunds into the industrial world.
In 1930s, Chinese economic recession cause Jin Cheng bank to take the banking policy to penetrate the banking funds into industrial world as a means of making a profit in the extreme economic recess. Jin Cheng bank had invested a large amount of banking fund on the large size entrerprise to meddle in the management of enterprise as a main share holder. Besides, Jin Cheng bank tried to expand its financial influence over the industrial world by controling the management of inslovent enterprise through mergers and acquisitions, or establiinged the enterprise under the supervision of bank in order to make a profit.
Jin Cheng bank could succeed in coming up with the banking growth in economic recession in 1930s by penetrating banking funds into the industrial world, its loan business teended to be parcially done to maximize its profit. In other words, Jin Cheng bank loaned its banking funds, centering on the special enterprises that had deep relation with Jin Cheng bank, such as enterprisees that Jin Cheng bank was registered as main share holder by investing a large amount of banking fund, enterprises mergered by Jin Cheng bank, and enterprises established by Jin Cheng bank. The banking business of Jin Cheng bank had to be criticized in indulging in seeking for private interest of bank without regard of public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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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헤게모니 개념의 포스트식민적 정교화

저자 : 김헌기 ( Kim¸ Hun-k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5-21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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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헤게모니 개념은 역사 속에서 그 함축이 변하거나 소실되었다가 19세기 근대 서구 정치학의 어휘목록에 재등장하였다. 20세기 초에 레닌과 같은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차르 구체제에 대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또는 주도권의 맥락에서 그 개념을 사용하였다. 특히, 동시대의 마르크스주의들 가운데 그람시는 고전 마르크스주의를 상속하고 정치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데올로기의 장소로서의 시민사회에서의 투쟁을 분석하는 가운데, 헤게모니 개념을 창조적으로 다듬었다. 한편, 라나지트 구하는 식민지 인도의 권력관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보편적 한 쌍인 지배/종속을 구성하는 항인 강제와 설득의 역사적인 유기적 구성에 따라 헤게모니의 현존과 부재를 식별하였고, '헤게모니 없는 지배'를 정식화하였다. 그는 또한 한 쌍의 정치적 이디엄을 분석하는데, 그것은 영국에서 기원한 것과 식민지 시대 내내 사라지지 않았던, 전식민 인도에서 연원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구하의 작업은 보편주의를 자임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담론과 서구 근대성의 이식 과정을 식민지의 역사로 재현하는 역사담론의 식민성을 드러내었다. 역사적 재현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와 관련하여, 헤게모니와 이와 밀접한 서발턴과 등의 그람시적 개념들은 더 정교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절대적 경험주의, 즉 역사주의로부터 그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구해내는 것을 통해서만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The concept of hegemony, which was derived from ancient Greek, changed and lost its implications in history and reappeared in the lexicon of Western modern politics in the 19th century. In the early 20th century, such Russian socialists as Lenin and Plekhanov, used the concept in the context of the proletariat's leadership or initiative in the struggle to the tsarist ancient regime. In particular, Gramsci succeeded classical Marxism and analyzed class struggle in civil society as a place of ideology, which is organically connected with political society, refining creatively the concept of hegemony. In writing the history of power relations in colonial India, Ranajit Guha identified hegemony's presence or absence according to the historical organic composition of coercion and persuasion that constitute dominance/subordination, a universal pair, formalizing 'dominance without hegemony.' He also analyzed a pair of political idiom; the one originating in England and the other in the precolonial India of which the latter was never disappeared throughout the colonial era. This work revealed the fabrication of the bourgeois liberal discourse pretending to be universalism and the coloniality of historical discourses that represent the colonial history as a process transplanting Western modernity. Regarding the Marxist question of historical representation, the Gramscian concepts such as hegemony and subaltern, which is intimately connected to the former, would have to be more elaborated. This task would be possible to be progressed only by rescuing his Marxist theory from absolute empiricism, that is histor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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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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