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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ublic Administration History Review

  • : 한국행정사학회
  • : 사회과학분야  >  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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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9-7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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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2)~43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445
한국행정사학지
43권0호(2018년)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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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감사종류의 변화 과정에 대한 행정사적 고찰: 성과감사를 중심으로

저자 : 윤기웅 ( Yoon Kiwoong ) , 유승현 ( Yoo Seung Hyun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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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관의 제도는 기관 내·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동태적으로 변화한다. 감사원의 감사종류도 법치주의의 확립, 민주화, 개방화 등의 외부환경 변화와 그에 따른 감사원 내부의 감사운영기조 변화로 감사활동의 초점이 합법성감사에서 성과감사로 이동해 왔다. 감사원은 출범 초기부터 넓은 의미의 성과감사를 수행하여 국가발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현대적인 성과감사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도전과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본 논문은 감사원 출범 이후 감사종류의 변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후, 최근 들어 강조되고 있는 성과감사의 성과와 한계를 검토함과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향후 합법성감사와 성과감사를 포함한 공공감사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 문헌검토 결과 비록 성과감사가 도입된 지는 20년 정도만이 흘렀지만 과거에도 이미 시채/사업의 성과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성과감사와 유사한 감사종류가 존재해왔고, 그동안 성과감사는 한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국가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검토결과를 제시하는 본 논문은 상대적으로 연구의 축적이 미흡한 공공감사의 종류 변화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래지향적인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행정사적·정책적 의미가 있다.


Korea regained independence in 1945, and since then has experienced rapid social change. In other words, it has developed economically from one of the least developed countries to one of the advanced countries and it has democratized from the dictatorial state. In response to these environmental changes, the role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BAI) has also changed. This paper examines the process of changes of the audit types indirectly suggesting changes in the role of BAI. It finds that 1) the audit types have been changing according to the demands of the regime and the times; 2) the focus of audits has shifted from legality and regularity to performance; 3) performance audits have already existed in the past with other names (eg, systematic audits, special audits, etc.) and have greatly contributed to national development; 4) performance audits have many limitations due to various reasons (eg, misunderstanding of auditors about performance audits, difficulties in conducting performance audits, etc.) and the BAI needs to overcome these limitations. These findings are useful for understanding of public audit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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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5도 양계의 성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저자 : 최봉수 ( Choi Bongsu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3-5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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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려의 광역적 지방통치제도를 초기부터 정리하여 5도 양계의 성립과정을 설명하고 5도 양계의 운영과 변천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전운사와 금유·조장을 두어 지방의 조세와 공부를 관할했다. 성종 2년에 금유·조장을 폐지하고 12목을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화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성종 14년에는 12목제를 10도와 12절도사로 개편하여 보다 중앙집권적인 지방 군정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10도제는 전운사, 절도사 및 자사가 기능을 분담하는 3원적 지방장관체제로 운영되었다. 또한 목종 8년에는 자사와 관찰사, 단련사 등을 폐지함으로써 절도사와 전운사에게 권한을 집중시켜 지방통치의 능률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현종 3년의 75도 개혁은 지방의 12주 절도사체제를 75주읍의 주현군체제로 전환하는 군사적 목표를지녔다. 절도사의 권력을 안무사와 안찰사에게 분산시켜 75주읍의 군·민정과 수령전최를 분담하도록 하였다. 현종 9년의 개혁은 75도 주현군체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변경지역에 주현군을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군 관리체계를 경기이남 5도와 달리하여 양계라 하였다. 경기이남 5도에는 주·군·현의 주속관계를 명확히 하여 주현군의 관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안무사를 폐지하고 8목을 두어 병민서정을 관리하도록 했다. 현종 9년의 개혁을 통하여 군정적으로 5도 양계의 체제를 갖추고 양광·경상·전라·서해·교주 등 명칭을 정했다. 그러나 민정적으로 전라와 서해도를 제외한 지역은 계수관들의 숫자와 도명이 일치하지 못했고 지역세력의 반발로 인해 5도의 명칭이 전반적으로 활용되지 못했으며 예종 이후에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지방의 세력변동에 따라 변천하게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ain the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5-Do Yanggye and it's changes by analyzing the regional governing system from the early age of Koryeo dynasty. In the early years of Koryeo, the Jeonunsa, the Geumyu and the Jojang were the local administrators for the taxes and tributes. However the king Seongjong had abolished the Geumyu and the Jojang in the 2nd year of the king and established the 12-Moks for the purpose of centralization. The success of his centralization policies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10-Do 12-Jeoldosa system in the 14th year of the king. The 10-Do 12-Jeoldosa was the centralized local military administrative system which governed by three local minister who were the Jeonunsa, the Jasa and the Jeoldosa. This local governing system was similar to that of Song dynasty in China. The three dimension system was reformed in the 8th year of king Mokjong and the powers concentrated to the two local minister - the Jeonunsa and the Jeoldosa. The 75-Do reformation in the 3rd. year of king Hyeonjong was to change the 12 troups army of the Jeoldosa for the 75 town guards in the whole country. The Jeoldosa was abolished in this reform and his authorities were divided into Anchalsa and Anmusa. So the three members of local minsters- the Jeonusnsa, the Anmusa and the Anchalsa were charge the responsibilities of local military and civil adminstration. The reorganization of local institution in the 9th year of the king Hyeonjong was to solve the problems which derived from the 75-Do system. The town guard force were allocated intensively on the border areas so called Yanggye to strengthen the national defence and established the commanding system which was deferent from that of 5-Dos which were the southern areas of the capital Gyeongy.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central and subordinated towns in 5-Dos were also clearly established to effectively manage the town guards under the supervision of three local ministers who were 8-Moks, Anchalsa and Jeonunsa. In this reform, the 7 Anmusas were substituted by 8 Moks and later, in the 20th year of king, the Jeonunsa was also abolished. The 5-Do Yanggye ― Yanggwang, Gyeongsang, Jeolla, Seohae, Gyoju, Donggye and Bukgye were established in the 9th year of Hyeonjong and mainly used for the areas of military administration, inspection and expelling the local officers. Except the Jeolla and Seohae, however, the names of 5-Do which used the two main central towns were different with the numbers of local minsters ― Gyesugwans who charged the responsibility of local civil administration and it made the local powerful families resist to use the names. This was the main reason why the three names of 5-Do did not found in the Koryeosa. These names were appeared in the changed forms after the age of king Yejong and varied according to the changes of the powers of local no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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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가능력과 사회학습

저자 : 성시영 ( Sung Sea Young ) , 정용덕 ( Jung Yong-duck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61-10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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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는 일제강점 35년의 역사적 틈새를 메우기 위한 학문적 노력에 민족중심 접근법과 국가중심 접근법이 포함된다. 민족중심 접근법은 오랜 역사를 이어온 한민족의 지속성과 생명력을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일제에 의해 비록 국가는 잠시 사라졌지만, 민족은 중단 없이 살아남아 역사를 지킨 점이 강조된다. 국가중심 접근법은 민족의 번영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의의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27년간 지속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통해 35년의 역사 공백을 최소화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이 연구에서 먼저 임시정부의 국가성을 경험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분석 결과 임시정부가 국가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극도의 취약국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민족중심 접근법과 국가중심 접근법의 장점을 살리고 한계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 보았다. 국가형성을 하나의 사회학습 과정으로 인식하여 임시정부의 의의를 통시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접근법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불과 2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임시정부가 국가형성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상호 얽히면서 학습과 창발성이 이루어진, 역동적인 한국사의 부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Academic efforts to fill the 35-years' historical gap, caused by the Japanese coercive occupation, which still remains a scar for Koreans, include a nation-centric and a state-centric approach. The former has the advantage of highlighting the sustainability and vitality of the Korean people, who have long lived as a nation in history. It is emphasized that although the state disappeared for a while, the nation survived without interruption to its history. On the other hand, the latter does not overlook the state that affect greatly the national prosperity and the lives of the people, and tries to minimize the historical gap through recognizing the legitimacy of the 27 yea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PGROK). In this context, we first analyzed the statehood of the PGROK empirically in this article. The analysis shows that the PGROK was an extremely fragile state that did not have proper state capacities. So, we have searched for an alternative approach, that is social learning approach, which might allow us to take advantages, while to overcome limitations, of both the nation-centric and the state-centric approach. By recognizing the state formation as a social learning process, this approach helped effectively us to analyze the significance of the PGROK in Korean history. Indeed, the PGROK of 27 years was an important part of a dynamic Korean history of social learning and emergence, intertwining nearly all the factors that could result from the state formation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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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병자호란중 남한산성내에서의 주요 국정운영자들의 담론분석

저자 : 심재권 ( Shim Jae-kwon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1-13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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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조선역사에서 그토록 야만시했던 오랑캐들에게 유린당하고 국왕마저 무릎을 꿇는 삼배구 고두례를 당한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건 중에 하나이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화이론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옹립하는 명분으로도 작용하였다. 인조는 즉위부터 친명배금을 조선의 주요 외교정책으로 삼았으나 이러한 기조는 인조 5년(1627) 후금의 침략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병자호란 이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조선의 기류는 친명배금정책이 주류이었다. 그러나 인조 14년(1636)에 들어서 이러한 배금정책이 더욱 노골화되자 청은 그해 12월 9일 불시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청군은 불과 5일 만에 한양까지 진격하고, 다급해진 인조는 14일에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47일간 항전하다가 결국 1637년(인조15) 1월 30일에 청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 연구는 바로 병자호란기간중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에서의 47일 기간 동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분석하는데 있다. 남한산성에서의 주요 국정운영자들의 쟁점은 무엇이고 그들의 중심키워드는 무엇이며 나아가 인물과 쟁점별로 어떻게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였고, 나아가 당시의 주요인물들의 대화내용 속에서 그들의 국난에 대처하는 자세와 태도, 신념 등을 살펴보았다. 말과 글은 바로자신의 생각과 이념의 표현이다. 조선시대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말과 글은 여러 갈래의 자료와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자료로는 개인적 문집 등도 있을 수 있으나, 이 연구에서는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의 분석기법은 오늘날 텍스트분석에서 주로활용이 되고 있는 데이터 마이닝과 네트워크 분석 기법을 사용하였다.


In the history of Joseon Dynasty, Byungjahoran was one of the shameful historical events that the King had kneeled down to the Manchurian who were so barbaric. The world view of the mainstream ruling class based on Confucianism served as a justification to abolish the Gwanghaegun and to make the king Injo into the thron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own, the king Injo was friendly to the Ming Dynasty but was exclusive to the Manchurian. However, the invasion of the Manchurian in the 5th year of Injo(1627) brought about a change in this foreign policy trend. Especially in the 14th year of the king Injo(1636), the Manchurian invaded Joseon across the Yalu River unexpectedly on December 9 of the year. Qing's army arrived in Hanyang after the five days after crossing the the Amnokgang. On December 14, Injo tried to escape to Ganghwa Island but failed. He escaped to Namhansanseong that evening. In Namhansanseong, he fought for 47 days but eventually surrendered to Qing's army. This study examines what happened during the 47 days in Namhansanseong. The core of the main public opinion politics in Namhansanseong were the escape of Ganghwa Island, the hostage of the royal family, the hostage of the crown prince, the issue of national diplomatic documents, and the surrender of the king. The important views of crossing these issues are two classes of a person who claims to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and an advocate of peac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xamine what their key issues are and what their core keywords are. And to analyze how major policy makers form a network is also very important to understand the situation at the time. Therefore, this study periodically analyzed what happened during 47 days in Namhansanseong by text mining analysis and network analysis. Through this study, we could examine the attitudes and beliefs of the main policy makers at the time of the national crisis. Text mining analysis and network analysis are considered to be worthy of a new research methodology in history research. In this study, however, the individual figures of major state actors were not thoroughly examined. This is worth doing as a research project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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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역대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자치경찰 도입 과정에 관한 비교 연구

저자 : 양영철 ( Yang Young-chul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3-16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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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경찰은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방자치와 함께 시작하였다. 자치경찰은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실험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제주자치경찰 이외는 아직 전국적으로 도입되지 않고 있다. 자치경찰의 도입은 미군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역대 거의 모든 정부들이 노력을 하였던 정책과제였다. 김대중정부때는 자치경찰은 국정과제로 선정되었고, 이후 오늘날 문재인 정부까지 자치경찰은 국정과제에 늘 상위에 있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논문의 출발점이다. 본 논문은 분석의 단위를 자치경찰의 추진동기, 추진목적, 주도자라는 3개의 변수와 각 변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선정하였고, 이 들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될 때 자치경찰이 성공 또는 실패되는가를 탐색하는 내용이 본 논문의 주 내용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하여 미군정에서부터 문재인정부까지 3개의 변수와 각 변수의 구성요소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분석한 결과 ① 미군정은 추진동기는 외부, 추진목적은 창조적이며, 주도자는 외부집단, 결과는 실패 ② 장면정부는 추진동기 외부, 목적은 치유적, 주도자는 외부집단, 결과는 실패 ③ 노태우정부는 추진동기는 외부, 목적은 치유적, 주도자는 외부집단, 결과는 도입실패 ④김대중 정부는 추진목적은 외부, 목적은 치유적, 주도자는 외부와 내부, 결과는 실패 ⑤ 노무현 정부는 추진동기 외부, 목적은 창조적, 주도자는 외부와 내부가 동반적 관계, 일부 성공, 일부 실패 ⑥ 문재인 정부는 추진동기는 외부, 목적은 창조적, 주도자는 내부가 강하고 외부는 약한 모습, 결과는 미정이나 성공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정책의 성공은 개혁대상에 강한 인센티브가 수반된 추진동기가 외부에서 주어지고, 목표는 창조적이며, 정책주도자는 내부일 때가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Municipal policing started with the local autonomy since it plays an crucial role in protecting the lives and properties of the residents. In spite of this importance, it has not been introduced nationwide with the exception of Jeju's Municipal Police system, which has been experimentally conducted in Korea. The introduction of municipal police began with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d was a policy task that virtually all previous governments attempted to implement. At the time of Kim Dae Jung administration, the autonomous police system was selected as a national priority task, and it is still one of the top priorities in Moon Jae-In administration as well. Despite these ongoing efforts, however, the policies in the field have not yet been successfully implemented. This issue is the very basis of the current paper; in this study, we have selected the three variables of analysis- the motivation, the purpose of the municipal police and leaders, and the elements that constitute each variable- and how these factors are combined to determine whether the introduction of municipal police succeeded or failed. For thorough examination, this paper analyzes the processes of municipal police systems from the US military government to the present Moon Jae-In administration by focusing on the detailed components of each variable. The finding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① In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driving motivation was 'external', the purpose was 'creative', the ruler was 'an external group', and eventually the result was 'failed'; ② In Jang Myun government, the motive was 'external', the purpose was 'restorative', the leader was 'an external group', and the result was 'failed' ③ In Roh Tae - Woo government, the motive was 'externaal', the purpose was 'restorative', the leader was 'an external group', and the result was 'failed in introduction'. ④ In Kim Dae-Jung government, the motive was 'external', the purpose was 'restorative', the leader was 'external/internal', and the result was 'failed' ⑤ In Roh Moo-Hyun government, the motive was 'external', the purpose was 'creative', the leader was 'external/internal', and the result was 'partially succeeded/partially failed' ⑥ In Moon Jae-In government, the motive is 'eternal', the purpose is 'creative', the leader is' strong insider/weak outsider', and the result was 'undecided/considerably hopeful'. The overall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required conditions for the success of Municipal Police system and relevant policies are as follows: the motive 'strong external', the purpose 'creative', and the policy leader 'ins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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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우리나라 재난안전관리 법제의 발전과정과 개선방안

저자 : 정우열 ( Jung Woo Yeoul ) , 정재도 ( Jung Jae Do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65-184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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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 있어서 안전의 문제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과제이다. 본 연구는 재난안전관리에 대한 법과 제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개선방안을 모색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 재난안전관리 법제는 1970년대 민방위기본법에서 출발하여 1980~90년대에는 재해재난과 관련하여 개별 법령들이 정비되었으며, 1990년대 후반부터 크고 작은 재해와 재난이 발생하면서 법률 등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2000년 초반에는 재해 및 재난의 통합적인 법령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자연재해 및 인적재난을「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후 재난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체계의 다원화와 각 법률 간의 연계성 부족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2004년에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이 제정되었다. 2014년 대형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함에 따라 재난안전관리 관련 법제개정이 대폭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재난안전관리 법제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재난 및 안전관련 연계가 강화되어야 한다. 둘째, 재난관련 다양한 매뉴얼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영국의 재난대응 집행계획서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재난관련 법률이 혼재하고 있어서 재난관리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관리가 요망된다. 넷째, 재난상황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재난백서를 주기적으로 발간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프랑스의 사례와 같이 지방자치단체 장의 책임하에 재난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권한을 대폭 강화해 주어야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transition process of laws and systems for disaster safety management and to search for improvement plan based on them. The disaster safety management law of Korea started from the basic law of civil defense in the 1970s, and individual laws and regulations related to disaster were restored in the 1980s and 1990s. Various disasters and disasters occurred frequently since the late 1990s. In the early 2000s, due to the nature of disasters and disasters, the necessity of integrated statutes emerged, and integration into the 'Basic Law on Disaster and Safety Management' was made in relation to natural disasters and human disasters. Since then, disaster and safety management laws have been enacted in March 2004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s of diversification of existing legal systems and disconnection of laws between disasters and safety management. With the frequent occurrence of large-scale accidents in 2014, the revision of the legal system related to disaster safety management has been drastically revised. Nevertheless, it still has many problems in disaster safety management law. To overcome this, first, disaster and safety related links should be strengthened. Second, it is necessary to reflect the UK's disaster response plan in order to prevent confusion in various manuals related to disasters. Third, disaster management is difficult due to the disruption of disaster laws. Fourth, a disaster white paper should be written to record the disaster situation including the damage situation and to keep it. Fifth, the authorities should be strengthened so that disaster management can be carried out by the heads of local governments or the disaster management de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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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제강점기 소방기구의 변천과 역할

저자 : 김상욱 ( Kim Sang-wook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85-21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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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조는 개항이후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들에 의해서 처음 조직되었다. 화재진압을 위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소방조는 한국에서는 화재진압은 물론 일본인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경찰보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소방조규칙'이 발포되면서 소방조는 일제의 식민통치 보조기구로 변화되었다. 소방조 운영비를 府 · 面에서 담당하면서 소방조는 형식적으로 府面 소속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찰서장이 통제하였다. 소방조 구성은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소방조 간부는 일본인이 대부분 차지하였다. 1920년대 도시인구가 밀집되고 화재가 빈발하면서 화재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자동차 펌프가 도입되었다. 자동차펌프는 최신장비였기에 펌프장비를 작동할 수 있는 전문화된 상비소방수가 필요하였다. 소방업무를 통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관서의 필요성에 따라 경성소방서도 1925년에 開署되었다. 경성소방서의 開署를 계기로 소방업무는 상비화로 접어들었다. 1935년 중반에는 소방조 산하에 수방단이 결성되었다. 수방단은 장마 홍수기에는 수난 구조활동을 하였다. 수방단은 여름에 활동하였지만 수방단장을 비롯한 수방단원들은 소방조원들이 겸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국면이 조성되면서 일제는 소방조 · 수방단 · 방호단을 묶어 경방단을 만들었다. 경방단이 만들어지면서 소방조도 경방단 소방부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경방단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기구는 소방부였다.


Fire Fighting Service was first organized in Korea by Japanese people who came to Korea after opening of ports to foreign countries. The fire fighting service assisted the police to secure safety of Japanese people as well as it extinguished fires in Korea. After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ire Fighting Rules'were announced in 1915, the fire fighting service was changed into an assistant organization for Japanese colonial rule. The fire fighting system was actually controlled by a police chief although it belonged to district offices and the operational costs were managed by them. Although most of the members of the fire fighting system were Korean, it was controlled by Japanese executives. As the population was crowded in cities in 1920s and a number of fires broke out, automobile pumps which could control fires effectively were introduced. As the automobile pump was an advanced system, fire fighters with special skills who could operate the pumps were needed. The Gyongseung Fire Fighting Service was open in 1925 as government offices which could control fire fighting service were needed. Fire fighting service became permanent with its opening as an opportunity. In the middle of 1935, the flood control service was organized under the fire fighting service system. The flood control service was engaged in relief work during rain and flood season. The flood control service worked in summer, but the members also served as fire fighters. As the Chinese-Japanese War broke out in 1937 and war situation was made, Japanese government combined fire fighting service, flood control service and defensive forces into Gyongbangdan. Along with it, the fire fighting service was reorganized into Gyongbangdan Fire Fighting Service. However, the Fire Fighting Service was a central organization in Gyongbang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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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중앙총괄기구 개편 경로와 동인 분석: 예산기구를 중심으로

저자 : 하태수 ( Ha Taesoo )

발행기관 : 한국행정사학회 간행물 : 한국행정사학지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13-25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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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치권력적 시각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중앙예산기구의 조직편제 개편 과정을 분석하였다. 가장 먼저 부정적 환류(negative feedback) 경로 변화 모형을 적용하여 중앙예산기구 개편궤적을 살펴보았다. (경제 혹은 재정)기획 기능과 예산 기능을 한 기구에 결합시키고, 조세/국고 기능을 다른 기구로 분리하는 형태가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나타났고, 다른 형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 낮은 Gini 계수, 낮은 청년(20대)실업률로 귀결되었다. 각 단계별로 개편 이유를 살펴보면, 1948년 정부수립 시기에는 제3자적 입장 확보 및 예산의 국가 전체적 성격 확보를 위해 기획처 예산국 편제(A형)가 채택되었고, 1955년에는 사사오입 개헌 여파와 재정수지 균형 확보라는 목적 때문에 B형(재무부 예산국)으로의 이탈이 발생하였다. 1963년에는 정부 전체적인 경제정책 조정력 확보를 위해서 A형으로의 복귀가 발생하였다. 1994년에는 이전 군사정권들과의 차별성 확보 및 총재원배분 효율성 제고를 위해 다시 C형(재정경제원 예산실)으로의 이탈이 발생하였다. 1998년에는 외환위기 극복 의도, 공동 여당 간 경계, 거대 야당의 견제 등으로 인해 D형(기획예산위와 재경부 예산청)으로의 이탈이 발생하였다. 1년 3개월 후인 1999년에는 기형화한 예산기구들을 정비하기 위한 의도와 연합정권을 유지하려는 의도 때문에 A형으로의 복귀가 발생하였다. 2008년에는 대통령의 예산기구 장악 의도가 강해 또 다시 C형(기획재정부 예산실)으로의 이탈이 일어났다. 낮은 출산율, 낮은 성장률, 경제 양극화, 청년실업대란 같은 고질적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일조하기 위해서 현재의 중앙예산기구 편제를 진지하게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This paper analyzed the processes of the revamps of the central budgeting apparatuses from the perspective of political power from 1948 onwards. First of all, it examined the path of revamp of the apparatuses applying the negative feedback model. The type of planning function combined with budgeting function within the same apparatus and taxing and treasury functions alloted to the other apparatus appeared longest and most often, and it showed the highest economic growth rate, the lowest Gini coefficient, and lower youth unemployment rate. Looking at the reasons of each stage of the path, the Budgeting Bureau of the Planning Office, Type A, was chosen to secure the third-party and government-wide position of the budget at the first stage since 1948. In 1955, the deviation to the Type B occurred as a result of the Revision of the Constitution in 1954 and for the purpose of securing the fiscal balance. In 1963, the return to the Type A occurred to secure the government-wide coordination authority of economic policies. In 1994, the deviation to Type C occurred to secure the difference from former military regimes and raise the efficiency of resource allocations. In 1998, the deviation to Type D occurred to overcome the foreign exchange crisis, for the checks between the two coalitional ruling parties, and for the checks by the majority oppositional party. In 1999, the return to the Type A happened to line up the deformed budgeting apparatuses and maintain the coalitional regime. In 2008, the deviation to the Type C happened again for the presidential intention to grasp budgeting apparatuses. From now onwards, we need to seriously rethink the current formation of central budgeting apparatuses to help overcome low birth rate, low economic growth rate, economic bi-polarization, and the disaster of youth unemploy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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