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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Ha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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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6)~74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990
한국한문학연구
74권0호(2019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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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세기 전반 노장(老莊) 사유의 문학적 수용과 그 의미

저자 : 정용건 ( Chung Yong-g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62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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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세기 전반기 老莊 사유가 문학의 각 층위에서 수용된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 노장은 '異端'이라는 비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여러 문인들에 의해 널리 읽히고 또 활용되어 왔다. 그러한 경향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입각한 유교화 운동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된 16세기 전반기에도 이어졌다. 공적 영역에서는 月課·製述·鄕試와 같은 국가시험에서 노장 관련 문제가 빈번하게 출제되어 조선 후기에 비해 사상적으로 유연한 면모를 보였다. 한편 사적 영역에서는, 노장에서 보이는 隱逸과 自足에 대한 지향이 은거 공간에서 한적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한 문인들에게 문학적 영감을 제공하였으며, 『莊子』와 『列子』에 등장하는 '꿈'의 모티프가 記夢 관습과 서사적 확장에 영향을 주는 등 작품에서의 활용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16세기 전반기에는 신진 사류를 중심으로 한 유가적 교화 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던 이면에, 노장의 사유 역시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과도기적 배경 아래 형성된 '유연한' 사상적 틀 속에서, 노장 사유는 당대 문학창작의 각 국면에 수용·활용되어 엄연한 하나의 문화적 흐름으로서 성리학과 길항·공존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간 조선 중기 이후 특별히 부각된 것으로 여겨졌던 노장 사유의 존재 양상을 시대적 연속성의 맥락에서 바라보도록 함은 물론, 단절적·배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 오던 당시의 문학 지형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This thesis examines the way in which Taoism was accepted on each level of literature in the early 16th century and its meaning.
Despite the criticism of 'heresy(異端)', Taoist books have been widely read and used by many literary people since the early Joseon Dynasty. This tendency was still continued in the early 16th century, when the neo-Confucianism movement was spread in various fields. In the public part, subjects related to Taoism were frequently presented in the national examinations such as wolgwa(月課), jesul(製述), hyangsi(鄕試). Also, in the private part, pursuit towards seclusion and self-sufficiency of Taoism provided a literary inspiration to literary people who wanted to live a leisurely life and the motif of 'dream' in Chuang-tzu(莊子) and Lie-zi(列子) influenced the dream record(記夢) and its narrative expansion.
Thus, in the early 16th century, while the Confucian edification campaign were actively conducted by the Confucian scholars, Taoism also existed in its own way. In other words, Taoism was accepted and utilized in each level of literary creation, and it maintained a relationship of antagonism and coexistence with the neo-Confucianism in this period. This fact makes it possible to understand the existence aspect of Taoism in the view of continuity which has been considered to rise especially in the mid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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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류성룡(柳成龍)이 재현한 아버지의 일생 -『종천영모록(終天永慕錄)』 수록 「선고행년기(先考行年紀)」의 글쓰기 방법 연구-

저자 : 구슬아 ( Koo Seul-ah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3-9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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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은 자신의 아버지 立巖 柳仲郢의 삶을 「先考行年紀」라는 독특한 작품 속에 재현하였다. 「선고행년기」는 류성룡이 형 류운룡과 함께 찬술한 것이다. 류운룡의 주도로 1573년경 「先府君行年紀」의 1차 찬술이 완료되었고, 약 30년 뒤 류성룡은 「선부군행년기」 속 정보의 검증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총체적으로 재구하였다.
「선고행년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류운룡의 작품과 차이가 있다. 첫째, 綱目式 연보의 형식에 품계, 날짜, 성명 등의 새로운 정보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사실성을 강화하였다. 해당 연월에 지은 詩文의 제목이나 내용을 인용하여 作品年譜의 역할을 겸하게끔 하였다.
둘째, 특정 행적 전후의 정치적 정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대화체를 삽입하거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한 데 모아 유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성을 강화하였다. 추상적 평가를 자제하고 묘사의 진실성을 강조하여 명종대의 정치적 혼란상을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이러한 글쓰기 방법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류성룡의 존모의식과 정치적 암흑기를 견고하게 살아낸 가문의 중요 인물로서 류중영의 면모가 입증된다.


Ryu Sung-Ryong(柳成龍) rebuilt his father Ryu Jung-young's(柳仲郢) life in a unique work called Chronology of Father's life(先考行年紀). Chronology of Father's life is a work created by Ryu Sung-Ryong in collaboration with his brother Ryu Woon-Ryong(柳雲龍). About 1573, the first creation of the Chronology was completed, and about thirty years later, the father's life was clarified through constant checking and verification of information.
There are two major differences in the Chronology of Father's life from the works of Ryu Woon-Ryong.
First, the facts were reinforced by recording specific information such as the name, date. It cited the title and contents of the literary works written in the corresponding month, and also played a role of the annals of the works.
Second, the narrative was strengthened by describing the political context before and after the event in detail, inserting dialogue, or organizing events occurring at the same time organically. He refrained from the abstract evaluation and emphasized the truthfulness of the description, accusing the political confusion of King Myeongjong(明宗) sharply. Ryu Sung-Ryong's respect for his father is revealed through such writing methods. In addition, the status of Ryu Jung-young, who survived the political turmoil, has ri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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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덕무(李德懋)의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에 나타난 지식의 편집 양상과 그 의미

저자 : 강진선 ( Kang Jin-s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1-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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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형암 이덕무의 『윤회매십전』(1768)을 대상으로, 연암그룹의 초기 지식 정보 취합 방식을 살피고 20대 이덕무의 박물취미가 저술로 결집된 결과로서 작품의 면모와 의의를 새로이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윤회매십전』은 연암그룹의 지식 편집과 정보생성 방식의 제 특징인 집체적 지식 편집 작업·박물취미와 학습 훈련·실용 정보 편집과 부가가치 창출·소품 창작과 문인 유희로서의 면모를 고루 지니면서도, 동시에 동인 내부에서 다른 저술의 창작을 견인할 수 있었던 모범적 지식 편집 사례라는 점에서 단연 특출하다.
그 세부를 살펴보면, 『윤회매십전』은 그 체제면에서 '전' 방식을 택하여 완결된 1개 소책자로서의 제작 지향을 가지고 정렬된 십전의 편목을 구성하였다. 나아가 십전의 체제는 『윤회매십전』에 반영된 다양한 지적 체계의 혼융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 예시로 「오지화」의 밀랍 매화 19식에 반영된 『삼재도회』 인사오권 「화매도」 혹은 주이정의 매보 『나부환질』에 수록된 「사매화가결」과 그 삽도, 「오지화」·「육지조」에 인용된 『개자원화전』의 「청재당화매천설」의 화매론을 들 수 있다.
더불어 『윤회매십전』은 한편으로 납매, 밀랍 매화라는 말 하나에 착안한 결과에서 비롯된 戱作의 성격을 지니면서, 나아가서는 완물상지를 부정하고, 하잘것없는 소재를 가지고도 재치 있는 문학적 발상을 떠올리고 이를 바로 저술 성과로 잇는 문인 집단의 저력 및 그에 대한 자부를 드러낸 작품이다. 특히 「팔지첩」·「구지권」의 장난스러운 戱作은 사실 이 문예 활동의 유희성을 드러내면서, 「구지권」과 같은 매매 문서의 경우에는 그 유희성을 포함하여 『윤회매십전』을 위시한 일련의 작업들이 주는 다양한 효용의 가치마저 보증하는 보증서의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윤회매십전』은 첫째로 이덕무가 젊은 시절의 독서 경험을 두루 반영하여 종합예술작품으로서 편집해 낸 저술 사례로서, 둘째로 초기 연암그룹 내에서 이 같은 지적 활동을 견인한 저작으로서, 마지막으로 특히 박지원과의 교유 초기에 이덕무가 선보인 지식 편집의 모범적 사례로서 의미를 갖는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early way of collecting knowledges in Yeonam group, and to analyze the fusion of various knowledge systems which appeared in Yunhoemaesipjeon(1768) written by Lee, Deok-mu.
In terms of that Yunhoemaesipjeon clearly includes the characteristic knowledge editing and information generation process of Yeonam Group, Yunhoemaesipjeon is a remarkable work, and this work is also a good example of knowledge editing that could lead to the creation of other writings within members of Yeonam Group.
One of the most distinctive features of Yunhoemaesipjeon is that this work is composed of the "Jeon(箋)" method. Meaning to make a complete brochure about waxy plum blossoms, Lee arranged ten of jeon, which is individual and organized structure that were appropriate for his purpose.
Furthermore, the ten of jeon helped to facilitate the fusion of various knowledge systems imported from Q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r example, The 19 types of waxy plum blossoms in Yunhoemaesipjeon refered to the Sancai tuhui(三才圖會) or the luo fu huan zhi(羅浮幻質), both of them containing same manual of painting plum tree. As for how to make waxy plum blossoms, he applied the traditional technique of drawing plum trees as shown in Jie zi yuan hua zhuan(The Mustard Seed Garden Manual of Painting, 芥子園畵傳).
It can be read the proudness of Yeonam Group who could recall the witty literary idea with the insignificant material, the waxy plum, and design and instantiate a work like Yunhoemaesipjeon. Therefore, the interesting feature of Yunhoemaesipjeon is not just playful but also very serious. For example, gujigwon(九之券) is a witty article made with reference to a contract of sales in Yunhoemaesipjeon. Not only gujigwon guarantees fun, but also the utility of the information editing work they perform.
In conclusion, Yunhoemaesipjeon is an example of that a young Lee edited as a comprehensive art work reflecting his vast reading experience. It is also a work that triggered similar intellectual activities within Yeonam group, and it is an exemple case of knowledge editing by Lee in the early days of his companionship with Park, Ji-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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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지원 문예론에 나타난 '의(意)'의 의미에 대하여 -법고창신론의 재음미와 관련하여-

저자 : 박희수 ( Pak Hui-su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7-17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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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박지원의 '意' 개념의 의미에 대해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박지원의 법고창신론에 대해 재음미해 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박지원의 '의' 개념과 관련된 중요한 특성은 전범의 형식을 모방하는 일이 작자의 '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며, 따라서 글쓰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의'를 왜곡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는 주관적 정념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으며 외적 대상을 포괄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러면서도 주관적 유심론과 같이 내면에 인식된 상태의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 보는 입장은 선택되지 않는다. 양명학과 관련하여 박지원의 '際' 개념을 해석한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면, '의'는 작자의 뜻을 가리키되 이 뜻은 주관과 객관의 상호 교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객관 없이 미리 존재하는 주체의 정념·사고는 없으며, 또 주체의 정념·사고를 벗어나 존재하는 객관 또한 '의'에 포착된 대상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이러한 '의'를 진실하게 쓰라는 것이 법고창신론에서도 핵심이 된다. 즉 '법고'의 대안으로 제시된 '법고이지변'에서는 전범에 존재하는 '의'를 배워 지금의 작자도 자신의 '의'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입장이 드러나며, '창신'의 대안으로 제시된 '창신이능전'에서는 창신이 빠지기 쉬운 작위성을 거부하고 작가 자신의 진실한 뜻을 구현할 것을 요구하는 입장이 드러난다. 이러한 박지원의 문예론적 입장은 '법고창신 사의론'으로 명명될 수 있으며, 여기서 작가의 인격성은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반응하며 변화하는, 규정을 벗어난 존재로서 이해된다.


This paper aims to explain the meaning of ŭi(意, mind) in Pak Chi-won's literary theory and to reinterpret his Popkoch'angsillon(法古創新論, theory on 'respecting the old and creating the new'). The result is as follows: plagiarizing classics result in distortion of ŭi, which indicates that keeping ŭi undistorted is the core condition of successful writing. Such ŭi transcends the dimension of subjective emotions and includes object-object, but subjective idealism cannot properly explain such inclusion of object-object in ŭi, for in Pak Chi-won's thought proper standards of perception is never neglected. Following a recent study which suggests to understand Pak Chi-won's concept of che(際, betweenness) as the point of action where subjective mind begins to interact with the outer world in the light of Yangming school of thought, his concept of ŭi should be defined as the mind of an author existing only in such an interaction and in mutual establishment of subjective mind and objective realm. To be faithful to such ŭi also becomes the core task in Popkoch'angsillon. When emulating classics, it is essential that one learns ŭi of classics, which leads the present writer to focus on his own ŭi as the classical writers did. And when creating the new, it is demanded that one avoids contrived novelty and stays true to one's original idea, which is thought to unintentionally concur with the spirit of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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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다산 정약용의 '스폰서' 친족 -조선후기 친족은 부계화 되었는가?-

저자 : 박미해 ( Park Mee-h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3-2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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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정약용의 친족관념과 그의 외가 및 처가와의 친족교류에 주목하였다. 기존의 조선후기 친족의 부계화 논의에서는 대체로 부계친 위주의 同姓 친족의 의미가 강조되어 왔다. 본 연구에서 살펴본 정약용의 사례에서는 부계친 외의 인척과 외척으로부터의 다양한 '스폰서' 관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 자신도 그의 저술들에서 인척과 부계 내의 여성을 등한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청년기에는 인척인 매부와 사돈이 그의 학문적 지원자가 되었으며, 농장을 물려준 장인 덕에 유배 동안에도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강진의 유배지에서 사돈이 된 항촌의 윤씨들로부터 경제적·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귤동의 외가는 경제적·학문적·심정적 '스폰서'가 되어 주었다. 연동의 외가친족들은 정약용과는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웠으나 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지는 못했다. 정약용 사례에서 시사하는 것은, 조선후기 양반 지식인의 친족에 대한 연구들이 부계친뿐 아니라 비부계친과의 친족에도 주목하여 전체 친족의 면모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부계친들이 강조되었던 조선후기에도 비부계친들은 근친으로 인식 되었을 뿐 아니라 스폰서 친족으로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Da San Jeong Yak Yong's kinship relations of mother, wife, and in-laws. In Korean academia, many scholars have stressed that kinship in late Chosun period was more skewed toward a paternal side rather than a maternal side. After the war in 16th century, there was a need of reestablishing the Confucian social order. The Yangban elite tried to recover their social identity by reconstructing tradition and concentrating power through the paternal group with same surname. This concrete bondage among paternal kins formed political allies and served as Yangbans' self-protection tool. In short, the paternal kinship was dominantly emphasized in the late Chosun dynasty.
However, this study suggests that previously common notion of paternal kinship in late Chosun dynasty should be reconsidered. This study found that Jeong Yak Yong received abundant sponsoring throughout his career not only from paternal side but also from diverse kin relations: such as his maternal side and father-in-law's. In this paper, Jeong Yak Yong's maternal side kins were classified into three groups: Hangchon, Gyuldong, and Yeondong. Hangchon relatives supported Jeong economically and emotionally while Gyuldong went further to become academic sponsor. Even though Yeondong relatives were not well-off enough to sponsor economically, they were the largest emotional sponsor of Jeong. Such kinship interaction can also be found in the Koryo era where several layers of kinship existed as an individual's sponsor. The sponsoring from several and diverse kins maximized benefit at the individual and familial level. Even in Confucian society where paternal side was seemingly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interaction between diverse kins cannot be ign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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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공철(南公轍) 연행록(燕行錄) 소재(所載) 환술(幻術) 기록에 대한 연구

저자 : 안순태 ( An Soon-t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7-24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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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공철의 연행록 『日記』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幻術 기록에 대해 소개하고 이 幻術 기록이 여타 연행록의 환술 기록과 변별되는 특징이 무엇인지 살핀 것이다. 남공철은 1807년 冬至使 正使로 燕行한 바 있다. 이때의 기록이 『日記』라는 제목의 연행록으로 전하는데, 본고는 남공철의 이 연행록 가운데 특히 그의 幻術 기록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幻戱는 燕行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꼭 보아야 할 구경거리로 여겨졌고, 대다수의 연행록에도 幻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전한다. 남공철은 正使로서 주도적으로 환술사를 조선 사신의 관소인 玉河館으로 불러들여 幻戱를 공연하게 하고 그것을 관람했다. 그는 幻術이 사람의 눈을 속인다는 점에서 '不經한 일'이라고 하고는 있지만 북경의 기이한 볼거리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고려하면 이는 의례적인 언급일 뿐이다. 남공철은 총 22종의 환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대개는 다른 연행록에서도 관찰되는 종목들이다. 남공철 환술 기록의 서술상 특징은 환술의 연행 장면 묘사에 치중하는 여느 환술 기록과 달리 자신이 관람한 상당수의 환술에 대해 비평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남공철은 도구나 장치를 이용해 숙련된 몸놀림으로 관중의 눈을 속이는 '幻術'과, 동일한 동작을 반복 연습해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技藝'를 구분하고 있다. 대부분의 연행록에서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기이한 볼거리'로 취급하는 것과는 다른 면모다. 또 22종의 幻術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종목에 대해 幻術의 눈속임 방법에 천착하고 있다. 이는 애초부터 그가 幻術의 속임수를 간파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남공철이 환희를 관람하면서 한편으로는 技藝와 幻術을 구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임수의 방법을 집중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은 幻戱와 幻術에 대한 충분한 사전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李德懋, 朴趾源, 朴齊家, 柳得恭이 사행단에 참여하여 北京에 다녀온 직후 남공철은 그들과 활발히 교유하고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幻術을 포함하여 연행 途程의 다양한 구경거리들에 대해 자세하게 들어 幻術에 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또 燕行 전에 본 『三才圖會』 등에 수록된 그림 및 정보들이 그가 실제로 환희를 관람하며 감당할 충격을 크게 완화해주기도 했다. 이에 남공철은 幻戱를 처음 관람하면서도 그 현란함에 현혹되지 않고 幻術의 속임수를 집중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는 환술의 속임수를 파악하지 못하면 사행단으로 하여금 환술을 재연해 보게 하는 등 의문을 해소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볼거리로 여겨지던 幻術은, 연행 경험과 연행 기록이 축적되면서 그것이 속임수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지만 그 속임수의 방법을 알아낸 경우는 흔치 않다. 技藝와 幻術을 구분하고, 幻術의 눈속임 방법을 집중적으로 고찰한 남공철의 幻術 기록은 기이한 볼거리에 대한 남공철의 관심과 함께 환술에 대한 그의 진일보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This paper introduces the record of magic written by Nam Gongcheol南公轍(1760-1840) who had visited Beijing北京 in 1807, and will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cord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records of magic. In 1807, Nam Gongcheol visited Beijing as a Dongjisa冬至使(envoy). This record is reported as a diary entitled "Diary日記." This unknown diary has recently been introduced to academia, and this article focuses specifically on the record of magic in the "Diary."
The magic was considered a must-see for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visiting Beijing group, and most of the travel records still contain a record of magic. As a envoy, Nam Gongcheol led the magicians to the embassy of the Joseon Dynasty in Beijing, and brought them to magic show. He basically says that 'magic' is a 'bad thing' in that it deceives a person's eyes, but it is just a ritual reference. Rather, he had great interest in the wonderful attractions of Beijing including magic. He records 22 magics, most of which are also observed in other people's travel records. The characteristic of Nam Gongcheol's magic record is that he adds criticism to the many magic he has seen. This criticism, however, focuses more on how a magician uses a trick than going beyond a simple feeling.
Nam Gongcheol distinguished between 'craft', which uses the tools and devices to practice the same movements as 'magic', which deceives the eyes of the audience with skilled movements, and provides the things that ordinary people can not easily do. This is not the same as treating most of the rituals as 'oddities' without distinguishing them. The most distinctive feature of Nam Gongcheol's magic record is that he studying the trick for half of 22 magics. It was impossible from the beginning unless he had the attitude of trying to catch the trick of magic.
The reason why Nam Gongcheol was able to distinguish magic from simple crafts and able to reveal the tricks was that he had advance information about magic. He could get these information from Park Jiwon 朴趾源, Yi Deokmu李德懋, Park Jega朴齊家 and Yu Deukgong柳得恭 who already had visited Beijing and had seen magic in advance. Additionaly, the pictures and information provided by the "Samjaedohoe三才圖會" etc, which were presumed to have seen before the real magic show, greatly alleviated the shock that he would have to observe the magic. So, while Nam Gongcheol was watching magic for the first time, he was able to concentrate on the tricks of magic without hitting from glitz.
The magic, which is considered odd and unbelievable, turns out to be a trick by accumulating experience and record, but it is not uncommon to find out how it play a trick on people's eyes. It is significant that Nam Gongcheol's magic record focused on how the magic play a trick on people's eyes, shows his advanced view of magic of Nam Gongc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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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시대 시화집 소재 퇴계 시 비평 연구

저자 : 최금자 ( Choi Geum-ja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9-27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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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1570)이 살던 시대는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파가 초석을 다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들은 우주와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고 부단한 窮理와 修身을 통해 聖人·化民이라는 至治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문학도 역시 道와 별개의 것으로 파악될 수 없었다. 그들은 문학이 도를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載道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文以載道'의 원칙 아래 詩作이 전개되었고 詩作은 道學硏磨의 과정에서 수양의 방편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시가 道를 닦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음에도 다른 도학자들에 비해 퇴계는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우선 퇴계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 범위를 넓혀 시화집에 실린 퇴계 시화를 찾아 정리하고 비평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16세기 초 權應仁(1517~?)의 『松溪漫錄』을 필두로 19세기 중반 작자 미상인 『東國詩話』, 『東詩奇談』등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시화집 작가들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퇴계 시화에 대한 시화집 수록 분량만으로 보면 적지 않지만 실제로 퇴계 시에 대한 평가는 소략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부터는 인용된 퇴계 시화들이 대부분 계속해서 재인용되었고, 또 별도의 평가 없이 재인용되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퇴계의 위상으로 인한 영남 남인들의 한계성 때문에 퇴계 시를 작품성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인물의 위상을 고려해서 의도적으로 수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 짓기에 몰두했던 전문 작가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음이 짐작된다.
주지하듯이 철저히 주자를 계승하려 했던 퇴계의 정신이 그의 詩作에도 자연스럽게 구현되고 있는데 그러한 문학관이 시의 비평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학이 전래된 이후 퇴계에 와서 비로소 주자학에 입각한 문학관이 온전히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과거 두보, 이백, 도연명, 소식 등을 詩作의 전범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성 수양에서 깨달은 경지를 읊은 시에 주목하였다. 퇴계가 자신의 시를 '沽淡'하다고 평가했듯이 비평가들은 주자학 도입 이래 도학적 문학관 곧 주자학적 문학관을 완전히 작품에 구현한 퇴계 시에 경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Toegye lived in the period when the Sarim political faction was consolidating its foundation based on Neo-Confucianism philosophies. They explored the essence of the universe and life, and ceaselessly endeavored to actualize the politics of seeking after sages and enlightening the people. Therefore, literature also was not regarded as being separated from the Truth. They perceived literature as the moral value carrier for actualizing the Truth. Under the principle of 'Writing Conveys Morality,' poetry composition was conducted, and poetry composition was regarded as a means of cultivating oneself in the course of being disciplined in the Learning of Confucianism and Morality. Despite poetry being used as a means of being disciplined in the Truth, Toegye wrote many works, which have been left until today.
To better understand Toegye poems, the Joseon-era collections of poems were explored to review commentaries on his poetry by gathering the story of Toegye poems and Toegye as a poet. As a result, Toegye steadily attracted attention from literary records, such as 『Songgyemangok 松溪漫錄』 by Gwon Eung-in (1517-?) early in the 16th century, 『Dongguksihwa 東國詩話』 with the author unknown in the mid-19th century, and 『Dong sigidam 東詩奇談』.
Toegye poetic story volume alone, recorded in such collections, is not small, but commentaries on Toegye poems were scanty and simple. Toegye poetic stories, quoted since the 17th century, mostly continued to be repeated, and without no particular commentaries, many Toegye poems were quoted. One of the reasons for that is deemed to be that although his poems could not be commented on in terms of literary value, given this high profile, they are thought to have been intentionally carried. Meanwhile, Toegye appears to have been clearly distinguished from professional poets.
Toegye succeeded to Zhu Xi as a great Confucian philosopher, and the philosophies were naturally realized in his poetry composition. Such Neo-Confucian view of literature significantly influenced commentaries on poetry in Joseon. This means that Neo-Confucian view of literature began to be fully realized only with Toegye after the philosophy was transferred to Joseon. Thus, Joseon-era critics offered commentaries with their attention to Neo-Confucian values. Toegye poems in his poetic stories did not depend on olden-time poets such as Du Bo, Yi Baek, Do Yeon Myeong, and So Sik as the model of poetry composition. Instead, Toegye frankly expressed his understandings from mind cultivation and discipline as poems. As Toegye commented on his poems as simple and genuine, he might seek the originality of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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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문학에서의 '고양이[猫]' 명칭(名稱)과 별칭(別稱)에 대한 고찰(考察)

저자 : 김경 ( Kim Ky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5-30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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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문학에서 고양이의 명칭과 별칭을 통해 선인들이 고양이를 어떻게 인식하였고, 고양이의 명칭과 별칭이 어떠한 방식으로 문학에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猫와 猫를 비교하여 고양이에 대한 명칭을 살펴보았다. 猫의 本字가 猫이기에 초기문헌에서 고양이는 猫로 기록되었다. 猫에서 부수에 해당하는 豸를 통해 선인들은 현재 고양이와 다른 살쾡이에 가까운 동물로 인식하였다. 게다가 猫라는 한자에 苗가 활용된 것은 고양이가 농작물인 싹을 보호하는 동물이라 여겼기에 그 명칭에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고양이의 별칭은 생김새[相], 타고난 기질이나 본성[性]에 따라 명명하였다. 烏圓, 蒙貴, 高伊는 고양이의 눈과 사냥능력에 주목한 것이다. 즉 고양이를 靈物로 대우하였기에, 敬稱의 의미가 담겨있다. 다만 오원은 경우 문학작품의 제명으로 활용되면서 경칭의 의미는 감쇄하였다. 銜蟬, 啣蝶, 狸奴라는 이 별칭들은 입과 생김새에 주목한 美稱으로 주로 문학작품에서 확인되었던 것들이다. 다만 狸奴는 미칭이면서도 고양이 특유의 야생본능이 발현될 때에는 卑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양이의 야생성은 인간과 공생하면서도 보존하였는데, 인간은 이에 대해 신기함과 두려움, 혹은 미천함 등으로 인식하였기에 고양이의 별칭에는 인간이 고양이에게 느꼈던 감정과 인식의 多面性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고양이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고양이에 대한 인식을 일별 하였으며, 고양이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특정 별칭이 사용되는 경우, 별칭의 유래와 함의를 통해 작품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가능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ancestors perceived cats through cat's names and nicknames in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Classics, and how they were expressed in the literature.
For this purpose, firstly the paper examines cat's names by comparing 猫(Myo) and 猫(Myo). Since the original character of 猫(Myo) is 猫(Myo), a cat was recorded as 猫(Myo) in very early literature. Due to the fact that the radical of 猫(Myo) is 豸(Chi), it was confirmed that the ancestors recognized cats as animals similar to wildcats, different from the current cat. Furthermore, the fact that the 苗(Myo,seedling) were used in 猫(Myo), also proved that the ancestors recognized cats as animals protecting crops and applied such feature in their names.
The nicknames of cats are named according to their appearances, natural temperaments and natures. 烏圓(O-won), 蒙貴(Mong-gwi), and 高伊(Go-i) were the nicknames focused on cat's eyes and their hunting ability. In other words, since cats were treated as spiritual beings, those nicknames seem to include respectful attitudes towards cats. The nicknames such as 銜蟬(Ham-seon), 啣蝶(Ham-jeop), and 狸奴(Ri-no) are euphemistic terms focusing on muzzles and figures. and those nicknames were mainly appeared in literary works. In the case of 狸奴(Ri-no), even though it was an euphemistic term, when peculiar wild natures of cats were expressed, it was used as a vulgar term. The wild natures of cats were preserved despite their coexistences with human beings, and humans had feelings of creepiness, fearfulness and vulgarness towards cats and reflected those emotions in creating their nicknames.
Through these facts, this paper identifies a relationship between cats and humans and a perception towards cats. It also made it possible to understand literary works better through origins and implications of those nicknames.

KCI등재

9물(水), 혹은 흐르는 세계(物) -고대 중국 제자백가에서 '물'의 담론과 상형적 사유-

저자 : 김시천 ( Kim Si-che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7-3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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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물(水)'은 인간과 자연의 생명의 바탕이자, 학문적 사유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이 논문은 인간의 환경이자 경험적 대상으로서 물이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고자 한다. 특히 고대 중국의 '諸子百家'에 반영된 물에 대한 사색 속에 어떤 동아시아적 사유의 특성이 나타나는지를 시험적으로 논하고 있다.
사라 알란은 고대 중국의 사유에 존재하는 '뿌리 은유들(the root metaphors)'에 주목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사유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개념을 찾는 대신, 물(水)이나 바람(風), 식물과 같은 '뿌리 은유들'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 논문은 이러한 사라 알란의 주장을 확장하여, 漢字의 기원인 象形文字와 그 특성에 주목하여 이른바 '상형적 사유(象形思惟)' 혹은 '이미지-네트워크 사유(the imagesnetwork thinking)'를 제안한다. 이는 인간의 자연물에 대한 경험이 이미지로서 한자에 축약되고, 이러한 이미지들을 서로 결합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한자가 증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가 확장되는 독특한 사유방식을 드러낸다고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네트워크 사유는, 경험과 사유가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미지 결합의 방식으로 한자를 증식하였고, 더 나아가 이미지를 결합하여 사유함으로서 고도의 추상적인 사유까지 표현하는 양식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논리학(logic)'과는 다른 사유방식의 하나를 보여준다.
이 논문은 이러한 '상형적 사유' 혹은 '이미지-네트워크 사유'가 어떤 식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경험을 사유하고 표현하며, 세계관을 구축하는지를 몇 가지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세계, 인간, 정치와 같은 구체적인 영역에서 이미지-네트워크 사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물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다. 이 글은 그런 의미에서 '물의 상상력'을 다루지만, 동아시아적 사유의 근저에 닿아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Water is the foundation of the human beings and nature and one of the academic reasons regardless of every cultural area. This research investigates how water has affected the East Asian thoughts and cultures by means of human environments and empirical objects. Particularly, it aims to experimentally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East Asian way of thinking among the contemplation for the water reflected in the pre-Ch'in philosophers and texts.
Sarah Allan mentioned the 'root metaphors' that has existed in the ancient China and was noted. According to her, instead of metaphysical and transcendental notions, this Chinese thinking relies on the humane and natural phenomena through 'root metaphors' such as water, winds, and plants.
This research agrees with what she mentioned and also, broadens her arguments, which induces the awareness of hieroglyphics and their traits and suggests hieroglyphic and the images-network thinking. This means that Chinese characters symbolized the images of experiences for the nature, combined with one another, and made new meaning. Like these multiplied processes of them, the East Asian thoughts similarly shows the unique ways of thinking.
This images-network thinking interacted with experiences and thinking, reproduced the renewed Chinese characters, and further, established a high level of abstract expressive methods thereby integrating and thinking images. However, these ways of thinking very differ from the logic of ancient Greek.
In this respect, it represents how the hieroglyphic or the images-network thinking influences the reasoning of humane and natural experiences and exemplifies several specific instances. Especially, detailed areas like the world, human being, and politics appear in terms of the images-network thinking and the images of water. Also, it deals with the imagination of water but it intends to reach the basis of the East Asian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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