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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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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8-128x
  • : 2733-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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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6)~7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050
한국한문학연구
78권0호(2020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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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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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송조천객귀국시장도(送朝天客歸國詩章圖)」는 일본 견명사신(遣明使臣)의 산물이다

저자 : 朴現圭 ( Park Hyun-kyu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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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送朝天客歸國詩章圖」의 조천객과 제작시기에 대해 지난 고찰에 이어 새로운 증거를 가지고 다시 한 번 고찰한 것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의 조천객에 대해 선행학자들은 모두 조선사신으로 보았고, 필자만 외국사신(일본, 유구사신)일 가능성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송조천객귀국시장도」가 명 寧波 문사들이 본국으로 귀국하는 일본 遣明副使 策彦周良을 전송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임이 밝혀졌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의 제작시기는 1540년(가정 19) 8월부터 1541년(가정 20) 2월 사이이다.
책언주량은 영파에서 「송조천객귀국시장도」의 화제자 방사와 만나 시문과 글씨를 주고받았다. 영파 인사들이 책언주량을 송별하기 위해 만들어준 「送朝天客詩並序」 첩자가 있다. 첩자 진적은 책언주량이 주석했던 일본 京都 妙智院에 소장되어 있다. 명姚淶가 쓴 첩자 서문에 의하면 方仕(方梅厓)가 '送朝天客'이라고 적었다고 했다. 1510년(정덕 5)에 명 인사들이 본국으로 귀국하는 일본 견명사절 佐佐木永春(源永春)을 송별하기 위해 만들어준 「送源永春還國詩畫卷」이 있다. 화권 진적은 일본 和田完二가 소장하고 있다. 이 화권 가운데 방사가 쓴 발문과 김홍이 쓴 송별시가 들어가 있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otianke(Jocheon gaek; 朝天客) in 「Song Chaotianke Guiguo shizhangtu; 送朝天客歸國詩章圖」 kept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國立中央博物館) and its creation time again using new information in conjunction with the previous study.
Other researchers in previous studies argued that the Chaotianke (Jocheon gaek; 朝天客) indicated Joseon envoys, and only the author presented a possibility of being foreign envoys (Japanese envoys or Ryukyu envoys). However, it was revealed that 「Song Chaotianke Guiguo shizhangtu」 was created in 1540(the 19th year of Jiajing; 嘉靖) to depict the literary officers of the Ming Dynasty who were seeing off Sakugen shuryo(策彦周良), the Japanese envoys returning to their country.
There is a roll named 「Song chaotianke shi bing xu(送朝天客詩並序)」 that was made by the literary officers of the Ming Dynasty who lived in Ningbo at that time in order to see off Sakugen shuryo(策彦周良). The picture is kept in the Kyoto(京都) Myochiin Temple(妙智院) where Sakugen shuryo(策彦周良) was located. According to the preface of roll written by Yao lai(姚淶), Fang shi(Fang meiya; 方仕, 號梅厓) wrote as 'Song Chaotianke(送朝天客)'.
There exists another roll for seeing off the Japanese envoys entering Ming Dynasty, that was created by Fang shi(Fang meiya; 方仕, 號梅厓) and Jin hong(Jin weishen; 金洪, 字惟深) who was the poet. The 「Song Yuan yongchun huanguo shihuaquan; 送源永春還國詩畫卷」 was created at 1510(the 5th year of zhengde (正德)) by the literary officers of the Ming Dynasty to see off the Sasaki nagaharu(Yuna yongchun; 佐佐木永春, 源永 春), the Japanese envoy. The picture is a collection of Japan Wada Koji(和田完二). In this roll, the preface written by Fang shi(Fang meiya; 方仕, 號梅厓) and a farewell poem created by Jin hong(Jin weishen; 金洪, 字惟深) have been inclu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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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63년 계미통신사가 경험한 시공간의 변화와 생활상

저자 : 양흥숙 ( Yang Heung-so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9-7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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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회답겸쇄환사 3회, 통신사 9회 파견은 임진왜란으로 최고조에 다른 조-일 양국의 갈등을 다시 '평화'라는 관계로 돌려놓았다. 통신사는 두 나라의 평화와 교류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할의 이면에는 통신사의 다양한 경험과 생활이 있었다. 이 글은 1763년 癸未通信使를 중심으로 통신사의 국가적인 역할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생활에 대해 조망해 보았다. 수개월의 여행 기간, 낯선 음식과 숙소, 집단생활, 자존심을 건 태도, 높은 피로도와 위험한 뱃길 일정, 모국과 가족으로부터의 분리 등은 조선 국왕의 특사인 통신사가 감내해야 하는 생활이었다. 통신사로 임명된 후 큰 변화는 집단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신분, 지위, 직무가 상이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개월에서 1년 가까이 동안 생활을 같이 하게 됨으로써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기간 동안 계절이 바뀌므로, 시간의 변화에 적응도 해야 했다. 통신사는 또한 가족과 떨어진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고, 낯선 외국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다. 긴 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병이 들기도 하고 사망에 이르기도 하였다. 통신사가 남긴 사행록은 대부분 일기 또는 일지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통신사의 일상과 생활이 잘 그려져 있다. 이글은 통신사행의 생활과 그 발견을 통해 통신사가 남긴사행록의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The conflict between Joseon and Japan that had reached a boiling point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Imjin Year(1592) was steered back to 'peace' relations through three times of Hoidapgyeomswaehwansa dispatch and nine times of Tongsinsa dispatch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us, Tongsinsa is well known as a diplomatic delegation that contributed to peace and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Nonetheless, diverse experiences and life conditions were involved behind serving this role. In this paper, the actual life conditions of Tongsinsa that had been veiled by the national role are investigated. As the King's special envoy, Tongsinsa had to endure months of travel period, unfamiliar food and lodging, group life, life attitude that challenged one's pride, intense fatigue, dangerous sailing, separation from the motherland and family, etc. Such life conditions may be viewed as small and insignificant matters compared to the role of Tongsinsa as the King's envoy. The major change in life after being appointed as Tongsinsa was leading a group life. Conflicts, large and small, emerged as people of different statuses, positions, and duties had to lead a collective life for months and sometimes nearly a year. Tongsinsa also had to adapt to seasonal changes since the seasons changed during the long travel. Tongsinsa also had to live away from their family and in a strange foreign land. Failure to adapt to extensive life in a foreign country led to illness and even death. Sahaengnok left by Tongsinsa are mostly composed as diaries or journals, and thus offer detailed descriptions of their daily lif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Sahaengnok lies in the fact that the life of Tongsinsa may be studied with the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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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암 박지원의 열하(熱河) 행보(行步)와 문심(文心)

저자 : 이승수 ( Lee Seung-su ) , 강동우 ( Kang Dong-u ) , 황인건 ( Hwang In-g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1-11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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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太學留館錄」을 텍스트로 삼아, 1780년 8월 9일부터 14일까지 박지원의 동선을 추적하여 재구성하고, 엿새 일기의 구성미를 분석한 것이다. 6일 동안 박지원의 행보는 文廟, 關帝廟, 避暑山莊, 須彌福壽之廟를 오간 것이 전부이다. 가장 많은 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장소는 文廟, 그중에서도 明倫堂과 敎授署 건물이었다. 두 건물은 문묘에서도 교육을 담당하는 太學의 部署였기 때문에, 일기 제목에 文廟가 아닌 '太學'을 넣은 것이다. 엿새간 일기의 구성은 간단하지가 않다. 「태학유관록」의 미감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입체적 구성을 파악해야 한다. 박지원은 「태학유관록」 밖에, 주제의 독립성이 두드러지고 분량도 많아 일기 안에 담을 수 없는 글을 별편으로 두었다. 이들 별편들은 「태학유관록」의 외부이면서 일부가 된다. 이와 달리 「태학유관록」안에는 별도의 표지는 없지만 독립이 가능한 15편의 산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일기의 내부를 입체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태학유관록」은 성격과 기능이 다르면서 서로 연결되는 여러 동의 별채와 내부 별실을 갖춘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태학유관록」은 입체적 건축미를 갖추고 있는데, 이는 근대 이전의 일기(또는 여행기)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징이다. 물론 이는 『열하일기』 전체의 미적 특성이기도 하다. 또 엿새의 일기에는 미감과 주제가 다른 '달 소재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는 엿새 일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예술적 장치이다. 이러한 배치와 구성은 모두 미적 의도의 산물이다.


This study traced and reorganized the path of journey of Bak Ji-won from Aug. 9 to 14, 1780 with 'Taehakyugwannok' as the resource and analyzed the structure of his diary for 6 days. The journey of Bak Ji-won for 6 days was limited only to the visit to Munmyo, Gwanwangmyo, Piseosanjang and Sumiboksujimyo. The place he had the most meaningful time and stayed for the longest time was Munmyo, in particular, Myeongryundang and Gyosuseo buildings. Both buildings were the divisions of the Imperial Academy in charge of education in Munmyo. Thus, Bak Ji-won adopted 'Imperial Academy' instead of 'Munmyo' as the heading of his diary. The configuration of the diaries for 6 days was not simply. For appreciating the aesthetic values of 'Taehakyugwannok', it is required to understand the stereoscopic configuration of his diary. Besides 'Taehakyugwannok', Bak ji-won wrote the contents which couldn't be included in the diaries in the separate volumes because those contents had completely different themes and were too lengthy. The separate volumes are not included in 'Taehakyugwannok' but a part of 'Taehakyugwannok'. Meanwhile, 'Taehakyugwannok' includes 15 proses which could be separated from it while those proses had no separate titles. Those proses played the role that made the contents of the diary look stereoscopic. 'Taehakyugwannok' could be likened to the building with several outhouses and rooms inside connected together while their features and functions were different. 'Taehakyugwannok' has the stereoscopic beauty of architecture which can't be easily observed in the diaries(travel logs) before the modern times. The stereoscopic beauty of architecture is also the overall aesthetic features of Travel Diary of Yeolha. Moreover, the diaries for 6 days include the 'stories themed on the moon' which had different aesthetic senses and themes. It's the artistic device that makes the diaries for 6 days a sequence. Such arrangement and structure are the fruits of aesthetic inten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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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환희(幻戱)의 연행(演行) 양상과 흥미 요소에 관한 연구 -조선후기 연행록 소재(所載) 북경(北京) 환희(幻戱) 기록을 중심으로-

저자 : 안순태 ( An Soon-t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7-14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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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연행록의 幻術 관련 기록을 토대로 淸代 北京에서 幻戱가 연행되던 양상과 환희의 흥미 요소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행록에 수록된 환희, 환술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이루어졌으나 환희가 일반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고, 환희의 어떤 점 때문에 사행원이 환희에 매혹되었던가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였다. 중국에서 연행되던 幻戱 관련 자료는 중국 문헌에 더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幻戱의 구체적인 연행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 실제 환희를 관람한 사행원이 느낀 환희의 흥미 요소가 잘 부각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행록 소재 환희 기록은 환희의 흥미 요소 분석에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淸代 북경에서의 환희는 대개 歲暮와 正初에 행해졌다. 주로 10월 중 發行하는 우리나라 사신단은 환희가 활발히 연행되던 시기에 북경에 도착하여 머물다 돌아왔는데, 우리나라 연행록에 幻戱 기록이 풍성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幻戱는 北京 內城의 사대문 안팎 街路에서 활발히 행해졌는데, 우리나라 사신단은 이동에 제약이 있어 주로 조선 사신의 館所인 玉河館(南館)에서 환희를 관람하였다. 幻戱는 대개 서너 종의 技藝나 幻術로 한 회를 이루고, 대여섯 회가 모여 전체 공연을 이루었다. 따라서 한 차례의 幻戱에서 도합 20종 내외의 技藝나 幻術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幻術師들은 한 회가 끝날 때마다 무대 밖으로 나가 다음 회에 소용되는 장치나 小品을 준비하였다.
幻戱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눈속임을 일삼는 幻術이지만, 조선 사행원이 환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환희의 흥미 요소에 대해 세 가지로 살피고 있다. 첫째, 본격적으로 환술을 공연하기에 앞서 대접 돌리기 등의 技藝를 선보여 행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관객의 신뢰를 구축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技藝는 멀리서도 눈에 띄어 행인들을 불러모으는 데 효과적이었고 부단한 연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재주였기에 공연 초반, 幻戱에 대한 관객들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둘째, 환술사의 연기를 통해 극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을 들 수 있다. 환술사는 공연 도중 과장된 표정 연기, 呪文이나 기합, 노래 등으로 공연을 더욱 극적으로 몰아가 관중을 긴장시키거나 감동시켜 공연의 흥미를 배가했다. 幻戱는 단순히 손재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완결된 공연으로 기획되고 연행되었던 것이다. 셋째, 관객을 공연에 참여시켜 관중의 몰입도를 제고하였다는 점이다. 환술사가 관객을 무대로 불러들여 공연에 참여시킴으로써 관객들은 幻戱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고 공연에 대한 신빙성과 흥미 또한 제고할 수 있었다.


This paper aims to clarify the performance aspects and elements of interest of Magic Show in Beijing through the records related to Magic Arts recorded in Yeonhaengnok[燕行錄]. Magic Arts[幻術] was a major attraction for those who participated in Yeonhaeng[燕行] of the latter Joseon Dynasty. Magic Arts was a technique to deceive the audience's eyes using tools and devices, and Magic Show was composed of various Magic Arts.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clarify what made the Magic Show interesting.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Yeonhaengnok of the latter Joseon Dynasty, Magic Shows in Beijing were usually practiced from the end of the year to the beginning of the next year. Most of the envoys departed from Hanyang in October and arrived in Beijing in the end of the year. This is the reason that we can see the abundant records of Magic Shows in Yeonhaengnok. Magic shows were performed usually on the road inside and outside the main gate of Beijing, but Joseon's executives were limited in free movement, so they mainly watched magic shows at Ok'hagwan[玉河館], the Joseon Embassy in Beijing. The magicians were shabby, because they usually wandered across the country to make their living or to work hard, and gathered to perform Magic Show during the cold season. One round of Magic Show consists of five or six Magic Arts, and a total of 20 arts and crafts were presented. Magicians presented three or four types of similar arts and went out of the stage at the end of each round to prepare props to be used in the next.
The most important sight in the Magic Show was Magic Arts. In this paper, three elements of interest in Magic Show were examined. First, it seems that the magicians focused on the attention of the passersby and established the trust of the audience by presenting acrobatics along with magic. Magic Show did not consist of only Magic Arts[幻術], but also acrobatics or animal's acrobatics. In particular, most of Magic Shows started with acrobatics to focus the attention of passersby.
Second, the dramatic atmosphere was created through the acting of magicians. Magicias made the performance more dramatic by making exaggerated expressions, reciting spells, singing songs during the Magic Show, and doubled the audience's interest by tensing or touching the crowd. Magic Show was not only deceiving people with dexterity, but was planned as a complete performance.
Third, the audience participation in the performance. The magician invited the audience to the stage, which made the audience more immersed in the performance. In addition, the audience could have faith in the performance and feel more interesting just by having other audiences participated in unbelievable situation. We can see quite a few Joseon people participating in the performance in Yeonhaengnok. It was a good sight for the locals, as people from other country participated in the show in Beijing. In addition, from a Joseon people's point of view, it was a never-to-bo-forgotten cultural experience in alien country for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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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행록(燕行錄)을 통해 본 선래군관(先來軍官) 제도의 운용 양상

저자 : 金東鍵 ( Kim Dong-ge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7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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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來軍官은 외국에 갔던 사신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함께 출발하여 먼저 한양에 도착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로, 먼저 돌아온다고 하여 '先來'를 붙였다. 보통 正使와 副使의 군관 각 1인과 譯官 1인, 총 3인이 선발되었다. 사신단이 조선으로 출발하는 날 새벽에 함께 출발하여 청나라 정부에서 받은 문서의 사본과 사신의 보고서인 先來狀啓 등을 가지고 왔다. 역관의 경우에는 '先來'를 붙여서 '先來譯官'또는 '先來通事'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연행의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는 先來狀啓와 聞見別單을 비롯하여 勅書와 回咨文 등의 사본을 가지고 갔다. 이는 청나라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 적절한 외교적 대응을 준비하고, 다음 사행을 보내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받아 보아야 했다. 아울러 사신단의 집에 보내는 편지도 그들의 손을 빌려 전달되었다. 편지가 조선에 전달되면 선래군관이 그 답장을 귀환 중인 연행사들에게 전달했는데, 답장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이 여러 연행록에 보인다.
북경에서 한양까지 도착해야 하는 기한은 16~18일 정도로 매우 촉박하였고, 정해진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기에 날씨를 따지지 않고 밤낮없이 말을 몰아야만 했다. 빨리 가다 보니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거나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 세 사람이 함께 출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엄청난 육체적 고난이 가해지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임무를 완수하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었기에 다들 하려고 나섰다.
선래군관은 북경에 체류할 때 특별히 보고할 일로 보내는 別先來와 사신이 귀국할 때 함께 출발하는 原先來로 나뉜다. 또한 수시로 보내는 先來軍牢가 있었으며 연행 노정을 오가면서 장사하는 商人이나 청나라 사람을 고용하여 조선으로 보고할 문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Seon-rae military officer(先來軍官) is a person who undertakes a duty that he has to arrive in Hanyang first before the envoy who went abroad came back to Joseon. For this reason, he was named as 'Seon-rae(先來)'. Usually one(1) Jeong-sa(正使) military officer and one(1) Bu-sa(副使) military officer, respectively and one(1) interpreter (譯官), that is, total 3 persons were selected. At dawn on the day when representatives set off for Joseon, he departs together, too and brings out a copy of the document received from the government of Qing Dynasty and Seon-rae report(先來狀啓), i.e. envoy's report. In case of interpreter, the term 'Seon-rae(先來)' is prefixed and so he was called as 'Seon-rae yeok-kwan (先來譯官)' or 'Seon-rae tong-sa(先來通事).'
They took copies of Royal Letter(勅書) and circular letter(回咨文) including Seon-rae report(先來狀啓) and annexed report(Mun-gyun-byul-dan, 聞見別單) reporting the results of Yeon-haeng to the king. These had to be arrived as earlier as possible to take a close look at the situation of Qing Dynasty and prepare proper diplomatic responses and proceed the work of sending the next messenger. At the same time, the letter that was sent to the envoy's house was delivered in their hands.
The time to take from Peking to Hanyang was 16~18 days, which was too tight and if they could not arrive within a designated date, they were punished and so they had to spur their horse day and night regardless of the weather. As they hurried fast, they fell from the horse and were severely wounded or got sick.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ree persons set off together. It was a laborious task that they were faced with great physical hardship, but if they completed their mission, they were given a great award. So everybody wanted to do the work.
Seon-rae military officer is divided into Byul Seon-rae(別先來), who is sent to deliver a special report during stay in Beijing and Won Seon-rae (原先來), who sets off together when the envoy returns from abroad. Also, Seon-rae military officer(先來軍牢) who is sent frequently, merchants who sell across the Yeon-haeng route or people from Qing Dynasty are employed to send the document to be reported to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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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용병(用兵)의 글쓰기 -한문산문 비평과 작법에서의 병법(兵法) 담론을 중심으로-

저자 : 김홍백 ( Kim Hong-bae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3-22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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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文과 武, 文學과 武學의 상호연관성 안에서 문예창작상의 '作法'과 군사전술상의 '兵法'이 어떻게 유비적으로 사고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과 의미를 조망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古文의 비평과 선집, 작법의 문제를 병법의 用兵論과 연계시켜 깊이 사유한 16세기 明末의 문인 茅坤을 비롯해 17∼18세기 조선의 문인 金錫冑와 朴趾源, 兪晩柱 등 중국과 조선의 여러 문인지식인이 남긴 비평 자료와 작품들을 중심으로 '병법으로서의 글쓰기 작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하였다.
먼저 모곤의 당송고문 선집과 문집 등에 수록된 관련 평어와 비평을 고찰함으로서 '작법=병법'의 문제가 '古文'의 층위에서만이 아니라 '科文'의 층위에서도 사고되고 있으며, '六經'에 의거하여 '自得'을 중시하는 그의 고문관 또한 군사상의 병략ㆍ병법에 대한 유비적 비유를 통해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모곤의 '용병으로서의 고문관'은 17∼18세기 조선 문인들의 고문 선집과 창작론에도 연속되는 바, 김석주와 박지원, 유한준, 유만주 등의 비평자료를 중심으로 '군사 용병의 기술'과 '고문 선록/작법의 기술'이 상호 등위적인 관계로 사고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특히 박지원의 「騷壇赤幟引」은 '科場에서 승리하는 作文의 기술'과 '戰場에서 승리하는 用兵의 기술'이 본디 동일한 것임을 특유의 다채롭고 자유자재한 비유를 통해 흥미롭게 형상화하였으며, 이러한 '병법으로서의 작법론'이 연암의 문예창작원리인 '法古創新論'과도 일정하게 연결됨을 조명하였다. 아울러 유만주의 『欽英』과 그의 부친 유한준의 『自著』에 수록된 관련 비평자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들 부자 또한 공히 '군사상의 병법'과 '문학상의 작법'을 긴밀하게 연계시켜 고문 비평과 창작론의 논거로 활용했음을 밝혔다.
이처럼 모곤의 고문 비평부터 김석주의 고문 선집과 박지원, 유만주 등의 과문 창작법에 이르기까지 16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여러 문인들은 '兵法과 作法'에 대한 유비적 사고를 통해 古文 내지 科文으로서의 문장을 어떻게 비평하고 어떻게 선집하며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를 방법론적으로 다양하게 모색해왔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concrete aspects and meanings of how writing methods(作法) and the military tactics(兵法) were considered analogously within the interconnectedness of literature(文學) and military science(武學).
To this end, this paper analyzed specifically the method of writing as a method of strategy, focusing on critical materials and works written by several writers in China and Joseon, such as Mao Kun(茅坤), the late Ming(明) Dynasty in the 16th century, and Kim Seok-ju(金錫冑), Park Chi-won(朴趾源), and Yu Man-ju(兪晩柱), the late Chosŏn dynasty. Among them, Park Ji-won's < Preface to 'The Red Flag of literary world'(騷壇赤幟引) > described interestingly through a colorful and free analogy that the skills of writing to win in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科擧) and the skills of military to win the war are the same. Furthermore, it was emphasized that this 'writing method(作法) as the military tactics(兵法)' is closely connected with Park Ji-won's literary theory, “Pepkochangsin(法古創新)”.
In conclusion, various writers in East Asia since the 16th century have been exploring how to criticize, how to select, and how to create a sentence as an Ancient writing(古文) or Writings for the state examination(科文) through analogical thinking about the military tactics (兵法) and writing methods(作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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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유한준(兪漢雋)과 박지원(朴趾源)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 기록에 대한 재검토-

저자 : 박경남 ( Park Kyeong-na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3-26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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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그동안 朴趾源의 아들인 朴宗采의 『過庭錄』의 기록에 근거해 대립과 원한 관계로 조명되었던 박지원과 兪漢雋의 관계를 재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본고는 두 사람의 문집 및 기타 문헌 자료들과 『과정록』의 기록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엄밀한 텍스트 비평을 거쳐 두 사람의 관계 및 '묘자리 분쟁' 등에 관한 보다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과정록』에는 유한준이 젊었을 적 박지원에게 자신의 문장을 인정받지 못해, 경기도 포천에 이장한 박지원의 조부의 묘를 兪漢寧 등 친족들을 시켜 파헤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유한준의 가족 묘지명과 가족묘 조성 기록과 이를 비교하면, 『과정록』의 서술은 시기와 위치, 그리고 여타의 정황상 실록이기보다는 거짓에 가깝다. 유한준 문장의 擬古的 측면과 經典的 근거 부족을 지적한 「答蒼厓」의 내용도 그 편지가 쓰여진 시기에 유한준이 이미 明代와 조선의 의고파 비판 논리를 숙지하고 있었고, 또한 서로 다른 각자의 문학을 인정하자는 各道其道論을 정립하고 있었기에 박종채의 말처럼 어떤 원한을 품거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兪漢寧의 저지로 인해 좌절된 移葬에의 怨望을 유한준의 일로 각색하여 유한준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과정록』의 기록과는 달리, 박지원·유한준 두 사람의 문집에는 젊은 시절 긴장감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答蒼厓」 9편과 죽기 일 년 전 유한준이 박지원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표한 「朴士能文集序」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본고를 통해 두 사람 사후 객관적 사실과는 다르게 야담의 한 장면처럼 허구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과정록』의 시각과 서술을 벗어나, '묘자리 분쟁' 및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보다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길 희망한다.


This paper is a review of the relationship between Park Ji-won 朴趾源 and Yu Han-jun 兪漢雋, which had been highlighted as confrontation and resentment based on the records of Park Jong-che 朴宗采's Gwajungrok 『過庭錄』. To this end, this article compared the records of the two people's literary works and other literary materials with the records of the Gwajungrok, in doing so, they intended to reach more objective truth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and the 'the dispute over the family burial ground' through strict textual criticism.
Gwajungrok describes Yu Han-jun as having dug up Park Ji-won's grandfather's grave which was moved to Pocheon, by ordering his relatives and cousin of Yu Han-nyung 兪漢寧, as he was not recognized his writing by Park Ji-won when he was young. However, compared with Yu Han-jun's family grave relocation records and tombstone records, Gwajungrok's description is more of a lie than a fact in time, location, and any other circumstances.
Contrary to Gwajungrok's record of unilaterally blaming Yu Han-jun, which is adapted as what Yu Han-jun's caused, not moving his grandfather's tomb by Yu Han-nyung's suspension if fact, in the collection of writings by Park Ji-won and Yu Han-jun, there are left nine short letters of reply to Chang-e 「答蒼厓」 which tension and affection coexist in his youth, and left the preface to Saneng's collection 「朴士能文集序」 which expressed respect and longing for Park Ji-won a year before his death.
Through this paper, I hope to gain access to more objective truths about the 'the dispute over the family burial ground'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away from the view and narrative of Gwajungrok, which is fictionalized like a scene of Yadam, unlike the objective facts after the death of the two.

KCI등재

9서형수(徐瀅修)의 『벽감주(碧紺珠)』에 대한 서지적 연구

저자 : 장종미 ( Zhang Zongme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3-29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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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형수가 편찬한 『벽감주』를 학계에 처음 소개한 것으로, 『벽감주』의 편찬자 문제와 편찬 시기, 『벽감주』 제6책의 서지적 특징, 인용서 등에 대해 살펴본다. 『벽감주』는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학자료실에 소장되어 있으며 제6책만 남아있는 결본이다. '벽감주'라는 서명의 책을 편찬한 인물로 서형수와 서우보 두 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바, 『명고전집』 自註와 『벽감주』 제6책 관련 내용을 비교·대조해 보면 연대본 『벽감주』는 서형수가 엮은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편찬 시기는 서형수 본인의 언급에 의거하면 1793∼1794년 사이로 생각된다. 서지적 특징으로 『벽감주』의 서명 및 표제, 필사 양상, 체재 등을 살펴보았다. 특히 필사 양상을 주석, 수정, 나눔, 강조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였고, 체재에 대해서는 중국과 조선의 유서 편찬 분류법을 바탕으로 분석하였다. 인용서 부분에서는 『벽감주』의 인용서 목록을 정리함으로써 인용 문헌의 특징을 살펴보았고, 재인용 문제도 확인된다.


This paper introduces the newly discovered Pyŏkkamju(碧紺珠) which compiled by Sŏ Hyŏngsu(徐瀅修, 1748∼1824) for the first time in academic field. It examines the issue of the compiler of Pyŏkkamju, the time of compilation, the bibliographic characteristics and the quotation of the 6th Pyŏkkamju.
Pyŏkkamju is currently housed by the Korean Classics/Central Lib of Yonsei University and is the only copy. It is grasped that there are two people who compiled Pyŏkkamju, they were Sŏ Hyŏngsu and Sŏ Upo(徐宇輔, 1795∼1822). But comparing and contrasting the contents of Myŏnggojŏnjip(明臯全集) and 6th Pyŏkkamju, it is highly likely that Sŏ Hyŏngsu compiled Pyŏkkamjuk. And it is estimated that the book's compilation period was between 1793 and 1794.
The bibliographic characteristics were examined by book name and title, writing patterns, and type of Pyŏkkamju. In particular, the aspects of writing were examined in four aspects: annotation, revision, sharing, and emphasis. The type of Pyŏkkamju was analyzed based on the classification method of Chinese and Joseon's Yusŏ(類書). In the quotation section, by organizing the list of quotes of the affiliati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quotes were examined, and the issue of re-citation was also confirmed.

KCI등재

10삼명(三溟) 강준흠(姜浚欽) 「해동악부(海東樂府)」 연구

저자 : 김종하 ( Kim Jong-ha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7-33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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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三溟 姜浚欽(1768~1833)의 「海東樂府」를 고찰하여 이를 관류하는 작자의 의식과 작품의 특성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강준흠은 樂府詩가 가창의 기능이 사라지고 단순히 읽는 기능만 남게 된 것에 주목하여, 악부시 본연의 음악적 기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우리 역사 중에 모범과 감계가 될 만한 내용을 뽑았으며, 특히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古歌謠를 대상으로 삼았다.
작품의 대부분에 악부시의 전통적인 제목을 붙였다. 음악이 정치와 밀접하여 그 나라와 그 시대의 음악을 통해 당시의 정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때문에 모든 작품에 노래, 춤, 악기를 소재로 채택하였다. 가사가 전하지 않고 곡목만 전하고 있는 가요는 악부로 再構하고자 하였다. 이는 악부시도 노래였고, 우리의 고가요도 노래였다는 공통점을 인식한 것이다.
각 작품마다 역사 사실을 倂記하였다. 허구적 요소를 배제하고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를 原典의 내용 그대로 다루었다. 篇法과 句法을 다각도로 구사하고 다양한 수법을 동원해서 인물들의 충효를 칭송하였다. 이를 통해 교훈적 기능과 음악적 기능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강준흠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악부시를 창작한 것은 평지돌출한 일이 아니다. 강준흠의 「해동악부」는 近畿南人 學統의 계승자인 李瀷의 「해동악부」를 수용하였으며, 근기남인 詩脈의 계승자인 吳光運의 「해동악부」에 영향을 받았다. 남인 사이에서 이어져 온 尙古精神의 전통에서 자양분을 섭취한 결과로 형성된 것이다.


This study aimed to inquire into Haedong Akbu of Sammyeong Kang Jun-heum (1768-1833) and clarify consciousness and features of the work inherent in the oeuvre. Kang paid attention to the disappeared function of singing in Akbu poetry and the remained function as a reading material, he intended to secure the intrinsic musical function of Akbu poetry. With this in mind, this study selected some contents out of our history that can serve as a model and a mirror for not making the same errors, and the scope of study covers old songs from the period of the Three Kingdoms of Korea and Goryeo Dynasty.
Most of pieces have traditional titles of Akbu poetry. This study recognize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identify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time through music of the nation and period considering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music and politics. For this reason, the subject of all works is based on songs, dances and musical instruments. Regarding the songs that are left only as the song titles without lyrics, this study tried to reconstruct them as Akbu. This is because this study recognized the common point of which both Akbu and our old songs were made of songs.
In each work, the historical fact was juxtaposed. Excluding fictional elements, it dealt with the story of real figures as the original version describes. It praised the spirit of loyalty for the country and filial piety of the people by gathering a variety of methods and approaching the diverse techniques of volume making and passage arrangement. Based on this, it aimed to give shape to both moral functions and musical ones.
The fact that Kang Jun-heum was greatly interested in history and created Akbu poetry was not an extremely unusual or unexpected case. His Haedong Akbu accepted Haedong Akbu of Yi Ik, the school tradition of Geun-gi nam-in School. Kang was influenced by Haedong Akbu of Oh Gwang-woon, the successor of poetic tradition of Geun-gi nam-in School. This was formed as a product of having embraced the traditional Sanggo spirit of “esteeming the ancient values” that been inherited among Nam-in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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