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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 Manuscri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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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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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56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476
고문서연구
56권0호(2020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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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조선후기 신민(臣民)의 상달문서(上達文書)에 대한 국왕의 판부(判付) 방식

저자 : 이강욱 ( Lee Kang-wo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1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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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法典과 官撰史料에 수록된 臣民의 상달문서 중 국왕이 판부하는 문서로는 啓本, 啓目, 狀啓, 單子, 別單, 上言, 擊錚原情, 呈辭, 上疏, 箚子, 草記, 啓辭, 書啓 등 총 13종이 있었다. 臣民의 상달문서에 대한 국왕의 판부는 상달문서에 啓字印을 찍어 처결하는 판부와 啓字印을 찍지 않고 글로만 답변하는 판부로 크게 나눌 수 있었다. 전자는 啓字判付로, 주로 啓本, 啓目, 狀啓, 單子, 別單, 上言, 擊錚原情에 활용되었고, 후자는 批答判付로, 주로 上疏, 箚子, 草記, 啓辭, 書啓에 활용되었으며, 呈辭의 경우에는 啓字判付와 批答判付가 둘 다 활용되었다.
啓字判付는 신민의 상달문서 말미 여백에 啓字印을 찍는 판부로, 국왕의 처결 내용을 적을 때 서두에 어떤 글자를 적느냐에 따라 奉敎判付, 啓判付, 落點判付로 나뉘었다. 奉敎判付는 좁은 의미의 판부 서두에 '奉敎' 2자를 적는 판부로, 單子와 照律啓目에 활용되었다. 啓判付는 좁은 의미의 판부 서두에 '啓' 자를 적는 판부로, 啓本, 啓目, 狀啓, 單子, 別單, 上言, 擊錚原情, 呈辭 등에 활용되었다. 落點判付는 좁은 의미의 판부 서두에 '落點' 2자를 적는 판부로, 주로 單子에 활용되었다.
批答判付는 신민의 상달문서에 啓字印을 찍지 않고 국왕의 비답을 적어서 내려주는 판부로, 비답을 어디에 적느냐에 따라서 別紙批答과 餘紙批答으로 나뉘었다. 別紙批答은 신하의 상달문서에 대한 국왕의 비답을 상달문서의 말미 여백이 아닌 별도의 종이에 적어서 내려주는 것으로, 上疏, 箚子, 呈辭에 활용되었다. 餘紙批答이란 상달문서의 말미 여백에 啓字印을 찍지 않고 국왕의 비답을 적어서 내려주는 것으로, 草記, 啓辭, 書啓에 활용되었다.
啓字判付를 하는 것이 원칙인 상달문서의 경우에는 반드시 啓字印을 찍기 때문에 啓字判付 대신에 批答判付를 활용할 수 없었다. 다만 呈辭는 啓字判付를 활용하되, 관원의 질병 때문에 휴가를 청하거나 교체해 주기를 청하는 내용으로 올리는 身病呈辭, 鍼灸呈辭, 沐浴呈辭 등에 대해서는 批答判付를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批答判付를 하는 것이 원칙인 상달문서의 경우에는 批答判付 대신에 啓字判付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上疏와 箚子에서 청한 대로 辭職을 허락하거나 해당 관사에 내려주어 回啓할 필요가 있을 때, 草記·啓辭·書啓를 해당 관사에 내려주어 回啓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啓字判付를 하였던 것이다.


Among the documents presented by the people to the king included in the law code and official documents in Joseon dynasty, there were 13 types of them where the king issued his approval, the panbu: gyebon, gyemok, janggye, danja, byeoldan, sangeon, gyeokjaeng wonjeong, jeongsa, sangso, chaja, chogi, gyesa, and seogye. The king's approval on these documents were given largely in two ways: stamping the seal with the letter 'gye' on it or giving an answer with a written letter without placing a seal. The former method was known as gyeja panbu, which was mostly used in gyebon, gyemok, janggye, danja, byeoldan, sangeon, and gyeokjaeng wonjeong, while the latter was known as bidap panbu, which was mostly used in chaja, chogi, gyesa, and seogye. In case of jeongsa, both methods were in use.
Gyeja panbu was an approval method in which the king placed the seal on the blank space at the end of the document. This was again divided into bonggyo panbu, gye panbu, and nakjeom panbu according to what letter was written at the beginning of the king's judgment. In bonggyo panbu, word 'bonggyo' was written at the opening of the king's remark, and it was used in danja and joyul gyemok. In gye panbu, the letter 'gye' was written at the opening of the king's remark, and it was used in gyebon, gyemok, janggye, danja, byeoldan, sangeon, gyeokjaeng wonjeong, and jeongsa. In nakjeom panbu, word 'nakjeom' was written at the opening of the king's remark, and it was mostly used in danja.
Bidap panbu was an approval method in which the king's answer was given in a written letter, bidap, instead of using the s tamp. This was divided into byeolji bidap and yeoji bidap depending on where the bidap was written. In byeolji bidap, a written answer to the minister's document was given in a separate paper, and it was used in such documents as sangso, chaja, and jeongsa. In yeoji bidap, a written answer was given on the blank space at the end of the document, and it was used in such documents as chogi, gyesa, and seogye.
In a document where gyeja panbu was a rule, bidap panbu was not allowed in place of gyeja panbu. In case of jeongsa, however, although gyeja panbu was mostly used, those documents with specific requests asking for a sick leave or replacement including sinbyeong jeongsa, chimgu jeongsa, and mogyok jeongsa were given bidap panbu at times. On the other hand, even in a document where bidap panbu was a rule, gyeja panbu was allowed instead of bidap panbu. For instance, when a permission was issued to a resignation request asked in sangso and chaja or when these documents were sent down to a relevant government office asking for its opinion-chogi, gyesa, and seogye alike-gyeja panbu was also in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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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 의관(醫官) 서계(書啓)에 대한 고찰

저자 : 김병구 ( Kim Byung-gu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8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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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고 중외에 파견된 봉명관이 복명 결과를 보고할 때 작성한 문서이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봉명관 중 의관이 작성한 서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의관 서계의 발급자는 내의원의 관원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이외에도 의술에 조예가 있는 의관 출신이라면 他職에 있더라도 왕명에 의해 환자에 거처에 파견되어 서계를 작성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의관 서계의 발급자를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물로 전하는 의관 서계는 총 7건으로 禮山 漢陽趙氏 가문의 『孝廟御筆帖』 및 『冶谷先生集』에 수록되어 있다. 『冶谷先生集』의 경우 목활자와 목판을 활용하여 원본 문서를 轉寫하였다. 문서를 통해 살펴본 의관 서계의 형식은 특별한 기두어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기재하였으며, 본론은 환자의 증세와 처방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서계의 결사어 또한 '詮次啓達向敎是事'로 『承政院日記』의 기재 방식과 일치하였다. 본론을 모두 작성하면 干支와 月日을 이용하여 작성 일자를 표기하였고, 이후 현직 의관인 경우 '臣+姓名'으로, 현직 의관이 아닐 경우 '本職+臣+姓名'의 방식으로 발급자를 표기하였다. 입계된 서계에 대해 국왕은 간병에 필요한 약물과 어의를 추가로 파견하라는 등의 구체적인 명령과 함께 국왕의 재결을 의미하는 啓字印을 踏印하여 내려주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서계의 실물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 또한 미진한 상황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상황에서 실물로 전하는 의관 서계의 현황을 제시·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자 한다. 추후 조선시대 서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Seogye(書啓) is a document written when an ordered officer(奉命官) who had the King's order in Joseon dynasty and was dispatched to the outside reported his debriefing(復命) results. This paper explored the seogye written by the royal physician(醫官) among the various ordered officers.
The royal physician's seogye issuers were many of the Royal Medical Clinic(內醫院)'s officials, besides, it has characteristic in that if one is from the royal physician with versed in medicine, they were assigned to a patient's residence by a king's order and wrote a seogye. Because of this characteristic,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issuer of the royal physician's seogye in a wider range.
The total of the existing royal physician's seogye is seven, and those are included in the Yesan-Hanyang Jo clan's King Hyojong's scrapbook of King's writing 『孝廟御筆帖』 and the Yagok Sonsaeng chip 『冶谷先生集』. In the case of Yagok Snsaeng chip 『冶谷先生集』, the original document was reproduced close to the fact by using the wooden printing-type. The form of the royal physician's seogye that was examined through the existing documents was not written a specific preface, but it was directly written the main body, and the main body was formed with written the patient's symptoms and prescriptions. The concluding remarks of the Seogye were also 'JeonChaGyeDalHyangGyoSiSha(詮次啓達向敎是事)', which was consistent with writing method the Seungjeongwon ilgi(Journal of the Royal Secretariat) 『承政院日記』. When the main body was completely filled out, the date was written using the sexagenary cycle and month, and Day. After that, It was written the issuer in the way of 'Title + Full name(臣+姓名)' in the case of the current royal physician and 'Regular vocations + Title + Full name(本職+臣+姓名)' in the case of not the current royal physician. For the received Seogye, the king gave a specific order such as dispatching additional drugs and royal physicians necessary for nursing along with stamping the GyeJaIn(啓字印), which was meant the king's decision.
The actual items of the Seogye confirmed so far are not only rare, but also related studies are insufficient. This study intends to put meaning in that it presented and analyzed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existing royal physician's seogye, in this situation. It is expected to help to the in-depth understanding of the Seogye in the Joseon Dynasty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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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훈부는 공신의 관부로 정1품아문이며 그 구성원은 공신과 공신자손으로 구성되었다. 공신녹훈 이후 공신자손이 처음 활동을 시작하는 행사는 功臣會盟祭이다. 충훈부는 회맹제에 참석할 新功臣과 舊功臣의 자손을 공신자손세계단자의 수단을 통해 파악하였다.
이후 충훈부는 관리대상인 공신자손을 정기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3년마다 공신자손세계단자를 수단하였다. 충훈부는 식년마다 국왕의 결재를 받은 啓目과 事目을 경외에 반포하였다. 이것이 『충훈부등록』에 등록된 「식년계하사목」이다. 이를 통해 충훈부는 세계단자를 3년마다 수단하였고, 공신자손을 관리, 예우하는 기본 정보를 파악, 수집하였다. 嫡長의 都單子를 통해 공신적장뿐만 아니라 모든 공신자손을 파악할 수 있었다. 支孫의 葉單子는 공신자손을 예우하는 忠義衛 口傳과 賤役 면제에 대한 증빙문서로 사용되었다.
충훈부는 충의위 冒錄을 방지하기 위해서 적장과 지손의 세계단자를 모두 수단하도록 하였다. 이는 두 단자에 기록된 세계를 서로 비교,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미 구전된 공신자손이더라도 해당 자손의 세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세계단자를 올리도록 하였다. 영조대 공신자손이 충의위에 구전되는 代數를 9대로 한정한 이후에도 대수가 지난 공신자손을 천역 면제로 예우하기 위해서 세계단자를 계속 충훈부에 올리도록 하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모든 공신자손은 계속해서 충훈부에 세계단자를 올려야 했다.
곧 충훈부가 공신자손세계단자를 수단하는 이유는 공신자손을 파악·예우하기 위해서이고, 공신자손이 충훈부에 단자를 올리는 이유도 공신자손으로서 지위 유지 및 혜택을 받기 위해서였다. 다만 충훈부가 단자를 계속해서 수단한 것은 공신자손의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여 공신자손만을 예우하고 그 이외에 발생하는 폐단을 줄이기 위함도 컸다.


The Chunghunbu, a high-ranking public office, was the official department of those who were awarded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s.” Its members were composed of meritorious subjects and their descendants. The department identified descendants of meritorious subjects (Gongshinjason, 功臣子孫), based on meritorious subject royal edicts (Gyoseo, 敎書) and certificates of meritorious subjects (Nokgwon, 錄券). The event where they first begin their activities was the meritorious subject covenant (Gongshin Hwaemaengjae, 功臣會盟祭). The Chunghunbu identified the Gongshinjasons as new meritorious subjects (Shingongshin, 新功臣), and the eldest male line of meritorious subjects (Gongshinjeokjang, 功臣嫡長) of old meritorious subjects (Gugongshin, 舊功臣) were made to participate in the covenant through the collection of ancestry lists.
In order to regularly identify and manage the Gonshinjason, the collection of ancestry lists of descendants of meritorious subjects (Gonshinjason Saegaedanja Sudan) occurred every three years. The department distributed the Shiknyeon Gaehasamok (式年啓下事目), which h ad b een a p p roved by the king, outside of the capital. Ancestry lists were collected every three years, and through these, basic information required to manage and grant privileges to these people were identified. The list of names (Dodanja, 都單子) of the eldest male allowed not only the Gongshinjeokjangs but also all Gongshinjasons to be identified. A separate list (Yeopdanja, 葉單子) of descendants of family branches (Jison, 支孫) were used as documents of proof to allow them to be appointed to the meritorious subject army (Chungeuiwi, 忠義衛), which granted privileges to Gongshinjasons and also allowed them to be exempted from lowly tasks.
In addition, to prevent incorrect recording (Morok, 冒錄) for the Chungeuiwi, the Chunghunbu collected ancestry lists from both the eldest male line (Jeokjang, 嫡長) and from the Jison. Ancestry lines recorded in both lists were compared and contrasted. Moreover, even if a Gongshinjason had been appointed, they were made to continue to submit their ancestry lists in order to clearly identify the ancestry of that Gongshinjason. Even after the number of generations for appointment to the Chungeuiwi for Gongshinjason was limited to nine generations during the period of King Yeongjo, the Chungshinjason who had passed that number of generations were made to continue to submit their ancestry list to the Chunghunbu to provide them with the privilege of exemption from lowly tasks. Therefore, it was mandatory for all Gongshinjasons to continue to submit their ancestry lists to the department.
The Chunghunbu continued to collect ancestry lists of Gongshinjason in order to grant privileges to Gongshinjasons, and their descendants submitted lists to the department in order to receive privileges as descendants of meritorious subjects. However, the real motivation for the department to continue to collect lists was to clearly identify the ancestry of descendants of meritorious subjects so that only real descendants would be granted privileges, which would prevent any negative incidents that may occ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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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조대 무신 정호남(丁好南)의 가계와 관직활동 - 영광 영성정씨 고문서를 중심으로 -

저자 : 조미은 ( Jo Mi-e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9-15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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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조대 무반으로 출사하여 외임 수령을 역임한 영광 출신 정호남이라는 인물의 가계와 관직 활동에 대한 사례 연구이다. 정호남이 어떠한 배경에서 무신의 진로를 선택하였고, 무과 급제 이후 정호남의 구체적인 행적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정조대 무신으로 활동한 정호남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반적으로 파악해 보았다.
정호남과 관련된 고문서 자료는 영광군 불갑면에 정착하여 세거하던 영성정씨 훈련공파 집안에 전래된 것이다. 그동안 문신에 비해 무신 관련 고문서 사례가 많지 않았으며 무신에 관한 연구 또한 저조한 상황에서 정호남 관련 고문서의 발굴은 사례 연구 자료로써 유의미하다고 여겨진다. 정호남의 경우, 기존에 관찬사료 등에 이름만 등장하던 정조대 무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역사적으로 존재한 인물이며 정조대 무신으로 활동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고문서 사례가 발굴됨으로써 무신 관련 사례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정호남의 선대는 세종대 공신을 배출한 가문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출사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직계 선조와 친인척들이 함께 의병으로 가담하여 활약한 충절 집안이다. 이를 계기로 일부 후손들은 음직으로 출사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현달한 인물은 없었다. 그러다가 정호남이 영조 말년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정조대 무신으로 활동하면서 외임 수령으로까지 진출하였다. 정호남의 이러한 행적은 집안은 물론 향촌 사회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정호남이 어떤 이유로 무과 진출을 결심하였는지에 대해 참고할 만한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출신 배경과 집안 내력으로 보아 『호남절의록』 등에도 수록될 만큼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은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직계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4∼5대를 거치도록 음사로 출사하거나 은거한 이력뿐 과거에 합격하고 중앙으로 진출하여 활동한 선조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호남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가문의 위세나 경제력이 크게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과를 선택한 이유는 경상도 출신 노상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호남 역시 노상추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정호남은 무과 급제 이후 초사직에 나아가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포폄계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정호남은 상당히 부지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함경도 변장직을 무사히 마치고 出六하였고 이후 453일(약 1년 6개월) 동안 수원 화성을 축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라 외임 수령으로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는 정호남 개인의 역량과 기량은 물론 노상추 사례와 같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한 집안의 이력과 인적 관계망, 그리고 정조의 특혜가 조금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is a case study of the household and office activities of Chung Ho-nam, who served as the leader of the Waeim office in the times of King Jeongjo and was from Yeong Gwang. This study examined how Chung Ho-nam chose the path of mu-shin based on his background, and looked into the specific track of Jeong Ho-nam's career after passing the state's military examination. So, this study grasped the character of Jeong Ho-nam, who worked as a military leader in the times of King Jeongjo.
The ancient documents related to Jeong Ho Nam are the documents were handed to the household of Yeong Seong-jeong, hunryeongongpa family, settled in Bulgapm-myeon, Yeonggwang-gun. In comparison with literary officers, there were no many documents of military officers and studies on military officers were poor, so the discovery of ancient documents regarding Jeong Ho-nam is meaningful as a case study. Jeong Ho-nam was one of military officers whose name appeared in the existing historical documents of servants of the government offices. However, he was a real person who existed in history. The documents about him, discovered, prove the fact that he was a military officer in the times of King Jeongjo and will be of help to case studies of military officers in that time.
Ancestors of Jeong Ho-nam was a family which produced Gongsin officers in the times of King Sejong. They were a family of loyal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voluntary soldier group together with their relatives to protect the kingdom rather than trying to acquire high government offices. Some of their descendants stood as musicians, but none of them became famous in the career. Meanwhile Jeong Ho-nam passed the state's high military office examination at the end of King Yeongjo and he served as a military officer in the times of King Jeongjo and was promoted to become the chief of Woeim. It seems that those activities of Jeong Ho-nam had a significant influence not only on his family but also on the Hyangchon society.
There is no record which tells why Jeong Ho-nam pursued the military office, but the background and history of his family suggest that he had an influential position to be recorded in 'Honam Jileuirok'. However, his immediate ancestors worked as musicians or lived in seclusion four to five generations after Imjin Woeran and none of them passed the state's high military office examination or acquired a high office in the central government. It seems that such a situation didn't allow Jeong Ho-nam a wide range of opportunity to choose.
Considering the situation which gave no high family position and good wealth to him, it seems that the reason why he chose the military office was not very different from that of No Sang-ju from Gyeongsang-do area. Jeong Ho-nam pursued his life similar to that of No Sang-ju. It took 9 years for Jeong Ho-nam to acquire the office of Chosa after passing the state's high military office examination However, as mentioned in the 'Popyeon Gyebon', Jeong Ho-nam seems to be quite diligent. Thus, after successfully completing the office of Byeonjang, Hamgyeong. Afterwards, he was recognized for his work in Suwon Hwaseong for 453 days (about 1 year and 6 months), and was promoted to the office of Jeong Sampum, which seems to be due to his personal ability and skills, as well as the activities of his family in the voluntary military group at the time of Imjin Woeran and due to some favor of King J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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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한제국기 진주지역 『주자어류(朱子語類)』의 간행에 관한 연구

저자 : 김소희 ( Kim So Hee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1-17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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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語錄을 집대성한 『주자어류』는 『주자대전』, 『주자서절요』와 함께 주자의 사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책으로 간주되어 역대로 학문, 정치, 사상 방면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주자어류』는 1476년(성종 9)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국내로 유입되어 1543년, 1575년에 국가 주도 하에 간행되었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책판이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연간, 1776년에 걸쳐 경상감영에서 중간되었으나 1877년(고종 14)에 장판각 화재로 다시금 책판이 전소되었다. 이에 진주지역 내 유림들은 유교 질서를 바로잡고 책판의 복구를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여겨 1904년 봄에 『주자어류』의 재간에 돌입하였다.
본격적인 간역 사업에 앞서 官·私에서는 지역 여론을 수합하기 위해 첩정을 발송하고 도내 유림들의 재정적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는 등 인적·물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였다. 이후 대원암에 간행공간을 마련하고, 하재곤과 하세진 부자의 막대한 자금의 출자와 간역의 주선, 영천 이두훈이 소장한 저본의 대여, 이도용·정제용·하겸진 등 당대 저명한 유학자들의 교정 및 70여명에 달하는 개인·5처의 재실·3처의 문중 등 경상우도 개인과 문중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1904년 9월에 간역이 시작되어 1905년 6월에 1차 판각을 마무리했는데, 당시 판각된 책판은 총 2,096판이고, 지출된 금액은 1만 8천냥에 달했다. 이후 다량의 책판을 보관할 장판각인 광명각이 건립되었고, 序跋文과 合金錄의 추가 판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장판각 관리가 소홀해지자 이도묵, 곽종석, 진양하씨 일문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1913년 현 수곡면 사곡리로 장판각을 이건하였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부 소실되기는 했으나 현재까지도 비교적 많은 양의 책판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처럼 대한제국기 진주지역에서 이루어진 『주자어류』의 간행은 을사늑약을 목전에 둔 절체절명의 시기에 유교의 부흥과 구국의 실천을 위한 방안으로서 경상우도 집단 지성이 모여서 이룩해낸 대형급의 출판 프로젝트 사업이었다.


Along with Jujadaejeon and Jujaseo Jeolyo, Jujaeoryu, collection of sayings of Chu Hsi, has been considered as an important book to understand theories of Chu Hsi, and widely used in scholarship, politics, and thought. Jujaeoryu was imported from China in 1476, and published in Joseon in 1543 and 1575 by the Joseon government. But, the printing woodblocks were destroyed by fir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Afterwards, in 1776, it was published again, but the woodblocks were destroyed again when Jangpangak building was destroyed by fire in 1877. Confucian scholars in Jinju, attributing the contemporary social atmosphere where confucian culture was disappearing to the non-existence of Jujaeoryu, felt responsible to restore the printing woodblocks of the book, and started the project in spring 1904.
The local government and some local leaders made efforts to build personnel and physical bases of the project by sending letters to create the public opinion on the project, and ask them to financially support it. Afterwards, the place to publish Jujaeoryu was prepared in Daewonam, and active support for the publishment of the book was promoted by a number of individuals and big families in Geongsangwodo province such as big donation of Ha Jae-gon and Ha Sae-jin (father and son), lending of the copy of the book owned by Lee Du-hun in Yeongcheon city, proofreading of the script by famous scholars including Lee Do-yong, Jeong Jae-yong, and Ha Gyeom-jin, and support of five clans and three big families.
In September 1904, the work launched, and in June 1905, the first manufacturing of printing woodblocks was finished, and the number of using the woodblocks was 2,096, and the amount of expenditure spent was 18,000 nyang. And, Gwangmyeonggak, the building to store the woodblocks, was built, and additional woodblocks for 序跋文 (preface) and 合金錄 (the list of donated money) were manufactured. Afterwards, finding out that Gwangmyeonggak was not managed properly, it was moved in 1913 to the current site, Sagok-ri, Sugok-myeon by the efforts of Lee Do-muk, Gwak Jong-seok, and the clan of Jinyang Ha. While some of woodblocks were burned away during the Korean War, the rest of them have been kept until now.
As described above, the publishment of Jujaeoryu in Jinju region during the Korean Empire era was a big publishing project promoted by the collection of scholars in Geongsangwodo province as a way to realize renaissance of confucianism and recovery of the country in the crucial days facing the signing of Eulsa Tre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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