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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 Manuscripts

  • : 한국고문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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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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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55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471
고문서연구
55권0호(2019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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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세기 대간(臺諫) 간통(簡通)의 기능과 양식 - 양주(楊州) 사릉(思陵) 해주정씨가 소장 문서를 중심으로 -

저자 : 유지영 ( Yu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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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簡通'이라는 문서의 실물을 제시하고 문서형식과 그에 관한 문서적 기능을 살펴본 글이다. 대간의 간쟁과 탄핵 활동은 공론에 부합하는 내용이어야 했고, 내부 관원 사이에 의견을 철저히 묻는 것은 그 공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였다. 그리고 簡通은 그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문서적 장치였다.
簡通은 臺諫의 啓辭를 다룬 기존 연구 논문에서, '국왕에게 전달하는 啓辭의 작성을 위해 그 직전의 단계에서 대간 구성간의 의견 합일을 위해 쓰인 문서'로 소개되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실문서 簡通은 楊州 海州鄭氏 宗家 고문서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모두 17세기에 鄭植(1615∼1662)이라는 한 인물이 사간원의 正言과 사헌부의 持平을 지내면서 작성한 것이다. 簡通은 대간이외에도 일반적인 여러 관서에서 사용되었음을 연대기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물로 전해지는 간통이 모두 臺諫이 작성한 것이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대간의 간통에 한정하여 분석해 보았다. 본고에서는 이 실문서 간통을 제시하고 형식을 분석하여 당대의 실제 문서 사용 양상을 확인해 보았다.
첫째로 문서의 외면적 형태와 구성 양식을 살펴보았다. 실물 간통의 외형은 매우 얇은 종이에 세로의 길이가 25㎝ 내외였으며 가로의 길이는 경우에 따라 약 100㎝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가로의 길이가약 30㎝였다. 종이의 두께는 매우 얇았다. 당대 일반적인 작은 편지 크기였고, 두께는 편지의 종이와 거의 같았다. 문서의 양식은 안쪽 본문에 간통의 처음 작성자인 城上所가 간통사유를 기록하고, 이에 따라 간통을 받은 동료관원들의 차례대로 대답을 기록한 후 자신의 이름을 姓을 생략하고 적었다. 접는 방식은 종이를 좁은 폭으로 세로방향으로 말듯이 접었다. 그리고 접은 후에 합봉처의 상단에 '上白'이라고 적고 그 맨 아래에 간통의 발의자가 着名한 후, 차후로 받은 이들이 첫 발의자의 착명 위쪽에 쌓듯이 착명하였다.
둘째로 문서의 내용 분석을 통하여 문서 작성 목적을 살펴보았다. 간통의 내용은 啓辭와 마찬가지로 論覈과 處置, 避嫌을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통상 누구를 어떠어떠한 죄로 論啓하면 어떠할지를 물으면 이에 동료들이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논핵의 경우에는 發啓 이외에도 連啓, 停啓 등의 사안에 대해서도 모두 그 의사를 물었으며, 처치의 경우에는 이렇게 처치하겠다는 내용 외에도 처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계사를 알려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모두 啓辭를 작성하기 위해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다.
啓辭의 初草本은 보통 동료 관원과의 논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내용에 따라 城上所가 초안을 잡고 그것을 簡通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 받은 뒤 長官과 최종안을 잡아 正草本을 완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해주정씨 간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작성된 계사의 정초본은 승정원의 注書가이를 받아 正本으로 작성하여 국왕에게 傳啓하였다.
簡通은 법전에는 나오지 않고 『육전조례』 및 각 관서의 규례집에서 한 두 건만이 등장하여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문서였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관찬사료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문서명이다. 대간이 사용한 간통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작성되었지만 모두 임금에게 傳啓하기 위해 啓辭를 완성하는 이전 단계에서 의견의 합일을 위하여 이에 관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사용한 문서이다. 그리고 계사에 관한 논의과정에서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던 관원이 간통으로 그에 관한 내용을 전해 받지 못하거나 혹은 논의에 참여하지 못한 경우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였고, 자신의 의견이 간통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 동료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였으며, 때로는 이 때문에 관직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간의 계사 작성과정에서 간통을 통한 의견 수렴과정은 필수적이었고, 이를 지키지 않은 경우 대간 내의 분쟁이 일어났고 이 간통의 작성과 수취 여부 및 그 내용에 따라 분쟁이 판결되었다.
문서학적으로 보면, 외형상으로 간통의 기록 참여자가 모두 그 내외면에 이름자를 기록하고 着名을 한 점, 내용상 公事에 관한 안건인 점으로 보아 정식 공문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公行文書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류상 편지의(개인적 의사전달) 기능으로 보기 보다는 通文(공식적인 다수인에 대한 의사전달)의 기능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난다. 공적인 업무에 관한 通知와 의사결정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This is the article to show the real document of 'Gantong' which has not been known in the academia to date and to review its format and the system. In a previous study dealing with Gyesa (啓辭) of Daegan(臺諫), Gantong(簡通) was introduced as the document for consolidation of the opinions among the members of Daegan just before writing Gyesa to be delivered to the king. 
The real document of Gantong which has not been revealed was discovered in the old documents from the head family of Haeju Jeong in Yangju. This was written by Jungsik(1615-1662) in the 17th century during his periods of Jungeon in Saganwon and Jipyung in Saheonbu.
What Gantong was used in multiple public offices beside Daegan could be found in the historical records published by public offices. However, all the real Gantongs remained were prepared by Daegan, so the scope of this study was limited to Gantongs of Daegan. In this article, the real Gantong was demonstrated to analyze its format and to find out its usage patterns in the times. To do so, first, its appearance and organization structure were reviewed. With respect to the appearance of the real Gantong, the vertical length was about 25cm and the horizontal length was up to 100cm in some cases with very thin papers. Yet, the horizontal length in most cases was about 30cm. The thickness of the paper was very thin. Its size was as close as the general small letter at that times and the thickness was close to that of the letter paper. For the format of the document, the reason of Gantong was recorded in the main text by Sungsangso(城上所) who was the first writer, followed by the answers from the peers who received Gantong by writing their names without family names. The paper was rolled in a vertical direction with narrow width. After that, it was recorded as 'Sangbaek(上白)' on top of the sealed part and the one who proposed Gantong signed at the bottom followed by the signatures of those who received it in the order as to pile up the names over the first proposer. The format of the document was very simple to be delivered and collected quickly without writing the dates.
Second, the purposes of writing documents were reviewed by the content analysis.
Main contents of Gantong were those for Nonhak, Cheochi, and Pihyum like Gyesa. It is like the form of answering the question, 'how about Nongye to someone with some crime.' In case of Nonhak, all the opinions were asked on the matters including Yongye, Junggye, and so on beside Balgye. In case of Cheochi, it was asked to inform of Gyesa since they didn't know how to do Cheochi. All were the contents to ask the opinions to prepare Gyesa.
The first draft of Gyesa was prepared by Sungsangso(城上所) upon the discussion contents with peer officers and the main draft version was finalized with minister upon discussion with many people by Gantong, which was confirmed by Gantong from Haeju Jeong's family. This main draft version of Gyesa was sent to Jooseo in Sungjungwon to be prepared as the official version which was delivered to the king. In this article, it was reviewed how Daegan Gantong was used in the historical records of Joseon dynasty and what kind of related rules were there beside the analysis of real Gantong. Gantong was the name of document appeared in many official historical records such as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Sungjungwon Diaries, and so on although it was difficult to find it in the law books, 'Yookjunjorye,' and regulations of each public office. Gantong used by Daegan was prepared with multiple reasons and it is the document for consolidation of the opinions before completion of Gyesa to be delivered to the king. If those who did not participate in the discussion on Gyesa did not receive Gantong with the discussion details, they did Pihyum with the reason to be neglected. If their opinions were not accepted in Gantong, they did Pihyum with the reason not to be credited from the peers. Sometimes, they were fired from their positions from this. Like this, consolidation process of opinions by Gantong was essential in the process of Daegan's Gyesa preparation. If this was not followed, the disputes were occurred among Daegans and they were closed depending on the preparation of Gantong, its receival, and its details.
In view of diplomatics, Gantong should be considered as the official document since the names of participants in Gantong were recorded externally with their signatures and the contents were related to official matters. With respect to the classification, it showed the function of Tongmoon which was for the official communication with multiple parties rather than the function of letter which was for personal communication, more clearly, because it contained mainly of the information on the public matters and decision 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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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세기 외관(外官)의 함답(緘答) 작성과 그 과정 - 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 사례를 중심으로 -

저자 : 조광현 ( Jo Kwang-huy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5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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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관원이 잘못을 저지르면 推考를 받았으며, 이때 예우 차원에서 緘答이라는 문서를 받기도 하였다. 함답은 서면으로 자신의 상황이나 잘못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는 답변서이다. 추고하고자 하는 관사에서 서면 질의서인 公緘을 보내면 관원은 함답을 작성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규장각에 소장된 함답관련 자료에 주목하여 18세기 울산도호부사의 함답 작성과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18세기 울산도호부사는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함답을 작성하였다. 그 양식은 '작성연도+작성자+기두어+본문+결어+후록+서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울산도호부가 외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서에 수록된 京官緘答式에 따라 함답을 작성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둘째, 18세기 울산도호부사의 사례를 근거로 외관이 함답을 작성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먼저 중앙관사에서 국왕에게 추고를 건의하고 국왕의 允下를 받았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推考傳旨를 작성하고 入啓하여, 재가 받은 추고전지를 다시 추고를 요청한 관사에 보냈다. 해당 관사는 추고전지의 내용을 關에 첨입하여 해당 지역 관찰사에게 보냈다. 관찰사는 전달받은 추고내용에 근거하여 해당 외관에게 함답을 작성해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관찰사는 관에 신속하게 처리하라는 내용을 함께 기입하였다. 관찰사의 관을 받은 외관은 다음날 楷書로 함답을 작성해 監封하고, 첩정 및 서목과 함께 보내서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관찰사는 감봉된 함답을 개봉하여 그 내용을 다시 관에 옮겨 기재하고 추고한 관사에 回移하였다. 관찰사의 관을 받은 추고관사는 관에 기재된 함답에 근거하여 照律하고, 照目에 관찰사의 관을 점련하여 국왕에게 入啓하였다. 이처럼 본 논문은 기존에 규명되지 않은 외관의 함답에 대한 일면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a public official who committed a mistake had to be investigated. A Hamdab (緘答) was a document that such an official was allowed to prepare and submit. The Hamdab was a kind of statement that gave a detailed description of a situation or a mistake. This document also indicated that the public official was treated with respect. After receiving a written questionnaire, a Gongham (公緘) from the competent office, the public official started to prepare his Hamdab. This paper analyzed Hamdab-related materials stored in Gyujanggak (the royal library of the Joseon Dynasty) and identified some characteristics of the Hamdab and the procedure followed by the Ulsan-Dohobusa (蔚山都護府使, a kind of local magistrate) in the 18th century, for writing it. The results of the analysi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18th century Ulsan-Dohobusas wrote a regular form of Hamdab. The document consisted of the year of completion, the author's name, foreword, body, conclusion, postscript and signature.
Second, the cases of the 18th century Ulsan-Dohobusas revealed the following as the procedure for the preparation of the Hamdab of each local official.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recommended an investigation to the King. When the King permitted it, the Seungjeongwon (the royal secretariat) prepared and submitted the Chugo-Jeonji (推考傳旨). Then, after receiving the royal approval for the Chugo-Jeonji, the Seungjeongwon sent it to the government office that asked for the investigation. The office attached the content of the Chugo-Jeonji to the Gwan (關), which was sent to the provincial governor. Based on the content of the Chugo-Jeonji, the governor ordered that the local official should write and submit a Hamdab. When the governor sent the Gwan to the local official, the governor added a notice that the Hamdab should be written as soon as possible. On the day after receiving the Gwan, the local official wrote his Hamdab in correct script style and submitted it to the governor together with the Cheobjeong (牒呈) and the Seomog (書目). The governor copied the content of the Hamdab into the Gwan, which was then sent back to the government office. After receiving the Gwan from the governor, the government office examined the applicable laws on the basis of the Hamdab conveyed in the Gwan and reported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to the King. This paper is significant in that it discloses some aspects of the Hamdab written by local officials, which existing studies have not consid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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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세기 이후 청(淸)의 하표식(賀表式) 반포와 조선(朝鮮) 하표(賀表)의 변화

저자 : 박준영 ( Park Joon Young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7-8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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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세기 이후 청의 하표식 반포에 따라 조선 하표가 변화한 양상을 분석한 것이다. 1705년 청은 조선이 올린 하표의 文辭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표식을 반포하겠다는 자문을 발송하였다. 청은 조선이 보낸 하표를 만주어로 번역할 때 많은 수정을 거쳐야 하였다. 그러나 청은 다른 조공국에 하표식을 반포하지 않았다. 이는 청이 병자호란 이후 적용되었던 '明의 舊例'를 대체하고 조선을 청의 영향권으로 포함시키는 행위였다. 하표식의 반포는 이를 반포하겠다는 내용을 기록한 반포자문을 발송하였다. 1705년 이후 하표식은 황제의 즉위와 함께 반포되었다. 1723년 이후 하표식 반포자문은 근거가 되는 문서를 인용하였으나 1795∼1796년이 되자 조서와 하표식 반포자문이 반포하였다. 19세기가 되면서 하표식 반포자문은 原奏를 점련하거나 별도로 기재하였다. 이는 하표식 반포의 행정 간소화를 의미하였다.
조선은 청의 하표식 반포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로 황제의 하표식은 조선 내부의 논의에 따라 준행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올린 하표에 황제의 朱批에 知道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황태후의 하표식은 전례가 없던데다 방물은 있으나 표는 없다는 이유로 준행을 거부하였다. 청은 나라마다 풍습과 표문의 체제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전례대로 할 것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청은 황태후의 하표식을 지속적으로 반포하였고 조선 또한 동일한 논리로 대응하였다.
조선과 청의 하표는 1705년을 기점으로 그 양식이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조선과 청의 하표는 기두어의 하표의 발급 일자와 하표를 올리는 행위, 1帖 당 行數의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청은 하표의 양식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았다. 이처럼 하표식의 반포와 하표의 변화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양국이 하표식반포와 준행에 대해 협의하였고, 그 결과 조선의 하표가 청의 하표식을 따랐던 것이었다.


This study is to analyze changing the aspect of Hapyo(賀表, Hebiao), according to issue the form of Hapyo of Qing dynasty after 18th Century. Qing sent to Jamun(咨文, Ziwen), because Hapyo which Joseon sent wasn't fit to expression. Qing translated and corrected Hapyo of Joseon to Manchu Language, But Qing didn't issue the form of Hapyo to other tributary states, This means Qing substituted the old system of Ming dynasty which was applie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and covered Joseon to Qing's orbit. Issuing the form of Hapyo was sent with Jamun included how to issue the form of Hapyo. After 1705, the form of Hapyo was issued when the emperor of Qing ascended the throne. After 1723, issuing the form of Hapyo quoted the documents which was based on. When 1795∼1797, Jamun which was included to issue the form of Hapyo and Joseo(詔書, Zhaoshu) sent to Joseon together. At 19th century Jamun which was included to issue the form of Hapyo was attached to Wonju(原奏, Yuanzou), or separately written. This means issuing the form of Hapyo had been simplified procedure of administration.
Joseon showed two responds about issuing the form of Hapyo. First, Joseon followed the form of Hapyo of the emperor, by discussing between king of Joseon and vassals. This can be known the expression of Jubi(朱批, zhupi) in the Hapyo of the emperor or Qing. Second, Joseon refused to follow the form of Hapyo of the empress of Qing, because it was unprecedented, moreover, the empress of Qing was not given Hapyo but present. Qing admit the differences of custom and systems of Pyo(表, Biao) between countries. So Qing approved that Joseon followed the precedent, but Qing issued the form of Hapyo of the empress, and so Joseon reacted same as well.
After 1705, the Hapyo of Joseon and Qing had a similar form. But the Hapyo of Joseon and Qing was different in the existence of sending date of Hapyo, the action of offering Hapyo, and the number of line per one book. Qing didn't regulate the form of Hapyo. The issuing the form of Hapyo and change of Hapyo wasn't that unilateral. Joseon and Qing discussed with the issuing and follow the form of Hapyo, so Hapyo of Joseon followed the form of Hapyo of 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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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01년의 부안현 '결입안'에 대한 기초적 분석

저자 : 전경목 ( Chon Kyoung-m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3-11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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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부안현의 우반동에 대대로 거주하던 부안김씨 출신의 김정하는 1779년 말이나 1780년 초에 가사와 전답 등을 모두 팔아버리고 같은 고을 옹정이라는 곳으로 이거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김정하의 아들 김기정은 우반동으로 되돌아오려 하는데 당시 가사와 전답 등을 소유하고 있던 강재태가 반환을 거부한다. 두어 차례 소송을 벌인 후 김기정은 감사에게 우반동의 가사와 전답 등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했는데 김기정과 강재태 사이에 다툼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는 청원을 받아들여 강재태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강재태는 감사가 교체된 후 자신도 역시 신임 감사에게 청원해서 돌려주지 않을 명분을 축적하는 한편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문서를 위조해서 높은 가격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결국 문서를 위조한 사실이 드러나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김기정은 뒷날 이로 말미암아 말썽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해서 부안현으로부터 그 전말을 기록한 입안을 발급받는다.
이 입안은 일찍부터 여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흘려쓴 글씨[草書]로 작성된 이 문서는 正書되는 과정에서 60여 자 이상 잘못 옮겨지는 바람에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필자는 이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오탈자를 바로 잡고 이 입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밝혔다. 아울러 청원과 심리 과정을 순차적으로 고찰하고 그 과정에서 생긴 의문점들을 살펴보았다. 본 논고는 이 입안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에 불과하며 추후 여러 연구를 통해 청원과 심리 과정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 규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Kim Jeong-ha was from the Buan Kim clan which had long lived in Woobandong village, Buan hyeon. At around late 1779 or early 1800, Kim sold all of his house and paddies and dry fields, and moved to a village called Ongjeong in the same Buan hyeon. More than 20 years later, Kim Jeong-ha's son Kim Gi-jeong wanted to return to home village Woobandong. But, Gang Jae-tae who had owned the house and paddies and dry fields of Kim Jeong-ha refused to return those house and farm fields. Thus, Kim Gi-jeong had no choice but to sue Gang to the Buan hyeon office. The legal procedure took a long time, during which mayor of Buan hyeon was changed. Concerned that some trouble might happen in the future, Kim Gi-jeong demanded and got the certificate, namely ipan, recording the details of the case from Buan hyeon. The document has attracted many researchers to do researches in various respects.
But, the document was written in choseo (草書), a very cursive style of writing Chinese characters, and, in the process of writing in normal characters (正書) by later scholars, more than 60 charactered were wrongly written, making it difficult to understand the document. Therefore, this study tried to accurately understand choseo characters of the document, and change them into normal characters. In addition, this study examined the process of how the case was investigated and tried in hyeon office, and what questions were raised. This study is only a rudimentary research on the ipan, and it seems that more researches in the future should analyze various problems which occurred in the process of investigating and trying the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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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봉모당(奉謨堂) 봉안(奉安) 책문(冊文)의 현전본 고찰

저자 : 장을연 ( Jang Eul Yo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1-130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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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謨堂은 1776년 列聖의 御製, 御筆 등 典謨資料를 보관하기 위해 설치된 藏書 시설이다. 이후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장서의 증가와 관리의 편의 등을 이유로 장소의 이동과 건물의 확장, 관리 부서의 변동 등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전모자료를 보관하는 특수 시설로서의 역할을 유지하였다. 봉모당장서는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藏書閣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봉모당 장서가 타 자료와 혼재되면서 온전한 봉모당 장서의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봉모당장서의 원형 복원은 봉모당 자료 연구의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본고는 봉모당 장서의 여러 종 가운데 冊文類를 대상으로 봉모당 서목과 장서각 소장품을 비교하여 봉모당 장서 원형 복원을 시도하였다.


In 1776, Bongmodang was installed as a library facility to store royal documents including the literature and calligraphy works of the successive kings of Joseon Dynasty. During the Korean Empire and the Japanese occupation, the building has undergone many changes, including the location changes, the expansion of buildings, and the change of management departments due to the increase of collections and the convenience of management. However, it retained its role as a special facility for storing loyal documents. The Bongmodang collection was transferred to the Jangseogak Archives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in 1981 and has reached today. In the process, the transferred documents were mixed with other materials, so that it became difficult to identify the original form of the Bongmodang collection. The restoration of Bongmodang collection is the most basic work for research of Bongdang documents. Using the investiture books among the various kinds of materials of Bongmodang collection as the subject of this research, this article examined the possibility of restoring the original state of Bongmodang collection by comparing the Bongmodang collection catalog with all the documents stored in Jangseogak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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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시대 소송에서 화해(和解) - 「1583년 의성현(義城縣) 결절입안(決折立案)」을 중심으로 -

저자 : 한상권 ( Sang-kwon Ha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1-16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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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의 自治에 의한 분쟁해결 방법인 和解에는 私法上 和解와 裁判上 和解가 있다. 재판상 화해란 私法상의 권리관계에 관하여 다툼이 있는 당사자가 법원의 면전에서 서로 그 주장을 양보하여 분쟁을 종료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재판상 화해에는 提訴前 화해와 提訴後 화해 즉 訴訟上 화해의 두 가지가 있다. 제소전화해라 함은 일반 민사 분쟁이 소송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訴提起 전에 지방법원 단독판사 앞에서 화해신청을 하여 해결하는 절차를 말하고, 소송상 화해라 함은 소송 係屬 중 당사자 쌍방이 소송물인 권리관계의 주장을 서로 양보하여 소송을 종료시키기로 하는 기일에 있어서의 합의를 가리킨다.
「1583년 義城縣 決折立案」은 조선시대 민사소송 판결문인 決訟立案 가운데 재판상 화해의 양상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고문서자료이다. 이 결송입안에 나타난 조선시대 재판상 화해의 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화해가 송관의 권고결정이 아닌 소송 당사자의 互讓에 의해 이루어졌다. 화해 절차는 소송 당사자의 동의에 의한 화해문기 제출과 화해 내용을 확인하는 송관 앞에서의 구두진술을 거쳐 이루어졌으며 송관은 이를 바탕으로 합의 내용을 확정하는 화해판결을 하였다.
다음 송관의 화해판결로 발생하는 효력은, 소송 절차가 종료되고 소송 係屬도 소멸되는 소송 종료의 효력, 종전의 법률관계를 바탕으로 한 권리의무관계가 소멸하고 새로운 권리의무관계를 발생하는 창설적 효력, 화해판로 향후 더 이상 화해의 효력을 다툴 수 없는 旣判力이었다.


「Uisung-Hyun Gyeol-Song-Ip-Ahn(義城縣決訟立案) in 1583」 which is a civil decision in the Joseon Dynasty and rare archive shows the aspect of judicial compromise(裁判上和解). This document contains the details of the process of the compromise in court(訴訟上和解) in the Joseon Dynasty. The details of the content are as below;
First, the compromise in court was a verbal settlement(口述和解) in front of the judge in the court which requires the submission of written settlement application in advance.
Second, the compromise was based on the principle of adversary system(當事者主義) which means the plaintiff and the defendant make a mutual concession.
Third, a lawsuit and relevant procedures were ended with the decision of compromise.
Fourth, the decision of compromise would extinguish the party's right which was compromised, and would cause the effect that counterparty acquired such right due to the compromise.
Fifth, given Res judicata(旣判力) is applicable to the decision of compromise, the parties cannot argue the validity of the decision once compromise was established. If the party argued the invalidity of the compromise later, it was punishable for an illegal lawsuit. This is aligned with the principle of unlimited Res judicata in the Civil Procedure 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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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훈부는 정1품아문으로 공신과 공신자손으로 구성된 기관이다. 업무 또한 이들에 대한 전반적인 운영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공신자손에 대해서는 공신 녹훈 이후 규정에 따라 그 현황을 파악·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충훈부의 공신적장 구전은 충훈부가 공신자손을 임명·예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충훈부등록』과 각종 고문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공신적장의 구전을 요청하는 '口傳單子'가 충훈부에 접수되면, 충훈부당상은 이를 시행하도록 題辭를 내린다. 두 번째 충훈부가 공신적장 구전을 요청하는 '啓目'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 받는다. 세 번째 국왕의 구전을 받은 충훈부는 공신적장에게 '嫡長忠義衛 口傳差帖'을 발급한다. 네 번째 더불어 공신적장을 忠佐衛 소속 遞兒職에 부록하였다.
공신적장 구전을 전후로 충의청의 면신·허참례가 있었는데 이때 발급된 문서가 '立案'이다. 이는 면신·허참례를 통과하였다는 증명서이다. 면신·허참례는 규정상 충훈부의 공신적장 구전 이후에 시행하도록 하였다.
충훈부 소속 기관인 충의청은 공신자손 그중에서도 공신적장으로 구성되었다. 공신자손의 구전·부록과 같은 각종 임명, 공신자손 내력 확인을 통한 충의위 削案과 復案 등 공신자손 관련 사안에 대해 관여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은 공신적장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는 역할이었다. 조선 후기에 면역을 위해서 공신자손의 지위인 忠義衛에 冒錄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를 바로 잡는 역할을 충의청에서 담당하였다.


Chunghunbu(Merit Awards Administration) was a first rank public office(guanbu, 官府) of gongsin(meritorious subjects). Its members included gongsin and their descendants. It was also responsible for the overall operations. Chunghunbu was responsible for identifying, appointing, honoring, and proving the status of the descendants of meritorious subjects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for honoring(yewoo, 禮遇) the descendants of gongshin after gongsin nokhun(錄勳).
The gongsin jeokjang gujeon of the Chunghunbu identifies, appoints, and honors the descendants of the meritorious subjects. This process can be examined through the “Chunghunbu Records” and various ancient documents(古文書). First, the “gujeondanja(口傳單子)” that requests the oral tradition of the gongsin jeokjang is received by the Chunghunbu, and the Chunghunbu dangsang(堂上) issues a jessa(題辭) to carry out this request. Second, the Chunghunbu sends the gyemok (啓目) that requests the gongsin jeokjang gujeon to the king to receive approval. Third, the Chunghunbu, which received the gujeon of the king, issues the “jeokjang chunguiwi(嫡長忠義衛) gujeon chacheob (口傳差帖)”. Fourth, the gongsinjeokjang is appended(付祿) to the chungjwawi(忠佐衛) cheajik(遞兒職).
The myeonsin(免新) and heochamnye(許參禮) are held before and after the gongsin jeokjang gujeon; the document issued here is the “iban(立案)” This is a certificate of completion of the myeonsin and heochamnye. According to regulations, the myeonsin and heochamnye are performed after the gongsin jeokjang gujeon of the Chunghunbu. Chunguicheong, an affiliated agency of Chunghunbu, also consisted of gongsin jeokjang among the descendants of gongsin. This agency was involved in matters related to the descendants of gongsin, including various appointments, confirming their naeryeok(來歷), sakan(削案), and bokan (復案). Among these responsibilities, its primary duty was to investigate the authenticity of the gongsin jeokja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fraudulent recordings(morok, 冒錄) became more frequent in chunguiwi(忠義衛), the rank of the descendants of gongsin, Chunguicheong served the role of identifying such cases.

KCI등재

8조선 후기 사족 가계(家系)의 계승방식에 관한 연구 - 부안 청호고씨 사례를 중심으로 -

저자 : 고민정 ( Ko Minjung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1-210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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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부안 청호고씨의 사례를 통해서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사족 가계의 계승방식에 대해 고찰하였다. 청호고씨는 전라도 옥구를 중심으로 세거하던 제주고씨 일파가 부안현 하서면 청호리 일대로 이거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벌족으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며, 특히 고희가 호성공신으로 녹훈되면서 여러 특전을 부여받게 되었다.
청호고씨는 적장자로 이어지는 가계계승을 지향하였으나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울 때에는 입후, 이종, 입양의 방식으로 가계를 지속시켰다. 17세기 친생자가 없어서 후사가 단절될 상황에 놓이게 되자 피계승자와 가장 가까운 혈연 관계에 있던 이를 입후하였다. 18세기 적장손이 폐적되고 계후자를 세우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기존의 계승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이종을 행하여 피계승자와 가장 가까운 혈연 관계에 있는 이를 새로운 계승자를 세웠다. 19세기 기존의 적장자가 사망한 후 계승 구도를 둘러싸고 서파와 적파가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자 관의 도움을 받은 적파에 의해서 새로운 계후자의 입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만 이 경우는 서파와의 대립 과정에서 양육의 의미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입양이라 칭했으나 사실상 입후와 동일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입후, 이종, 입양은 구체적인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항렬에 맞는 순차적인계승 관계의 형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청호고씨가 이러한 방식을 선택한 것은 적장계열과 가장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자손을 후사로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의 계승은 항렬을 토대로 친족간의 질서를 준수하였으며, 계승자를 선택할 때에는 적파의 테두리 안에서 혈연적 친소관계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is to observe the phenomenon of long-lasting gentry pedigree after the consciousness of succession was reinforced in the Joseon society and to review its characteristics. Therefore, the aspect of Buan Cheongho Ko family's succession for three centuries from the 17th to 19th century is traced.
Cheongho Ko family started to be formed as Ko Se-ho who resided in Okgu moved to Haseo-myeon, Buan-hyeon with his wife's family in the 16th century. Because Ko Se-ho, who established a family hometown, and his descendents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and entered government service, and especially Ko-hee was entitled a contributor by being in attendance on King Seonjo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family came to consolidate its footing as the distinguished military nobility family.
The succession structure of Cheongho Ko family from the 19th Ko Se-ho to the 29th Ko Jin-ho shows mostly primogeniture succession. However, in case there was no primogeniture, the succession was done by adoption and next eligible child.
This perspective indicates that the succession by adoption and next eligible child pursued the sequential succession relation according to the degree of kindred although the specific methods of practicing family succession were different. In addition, Cheongho Ko family used these methods in order to carry on family line with children who were closest to primogeniture.

KCI등재

919세기 선조(先祖) 증직 청원활동과 면역 - 남원(南原) 박세중(朴世重) 가전고문서(家傳古文書) 중심으로 -

저자 : 김건우 ( Kim Kun Woo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5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1-22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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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원의 朴世重 家傳古文書를 중심으로, 박세중의 후손가에서 선조의 증직 청원을 어떻게 전개하고 그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우선 살펴보았다. 이어 烟戶雜役 등 각종 요역과 부세 부과라는 문제에 직면한 후손가 입장에서 선조 박세중에 대한 증직 청원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박세중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200여 년이 지난 후 박세중 후손가의 사회적 위상의 변동에 따른 상황 속에서 박세중의 증직을 위한 청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현실적으로 연호잡역의 부과와 무관하지 않았다. 선조를 위한 증직 청원활동이 면역이라는 특정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 증직 제도는 조선시대 유교윤리를 확립하기 위해 마련된 법 제도이다. 증직 청원활동을 통해 후손가에서는 사회적 위상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官에서 증직 포양 승인 절차상 공론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기에 후손가 입장에서는 주변士族들과 연계망을 연결하면서 공론 형성에 노력을 경주했다. 즉 후손들의 사회적 위상과 면역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었기에 증직 청원활동은 복잡한 의미를 내포했다.


In the Joseon Dynasty, many families attempted to achieve their goals by strategically capitalizing on the national institutions that were made to establish Confucian ethics. This paper examines old documents that have been passed down in the family of Park Sae-joong(朴世重) in Namwon(南原), Jeollabuk-do(全羅北道) Province, to explore how the descendants of Park Sae-joong petitioned for the posthumous promotion of their ancestor's government position and what methods they used to achieve their goal. The descendants of Park Sae-joong petitioned for the promotion of their deceased ancestor's government position so that they could be exempted from the statute labor imposed on them. In other words, about two hundred years after the death of Park Sae-joong, the social status of his descendants had gradually declined, and it was under this situation that the descendants campaigned for a posthumous promotion of Park Sae-joong's government position. The Confucian order of the Joseon Dynasty was founded upon and maintained by social hierarchy, which was connected to the specific rights of specific classes of people. The correlation between exemption from statute labor and the petition for the promotion of the ancestor's position is a good example of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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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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