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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 Manuscripts

  • : 한국고문서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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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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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57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487
고문서연구
57권0호(2020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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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정원일기』 입시 기사와 대화 내용의 문서화

저자 : 이강욱 ( Lee Kang-wo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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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君臣의 말과 글 및 동정 등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 중 국왕과 신하 사이의 대화 내용은 입시한 注書가 草冊에 기록하였다가 『승정원일기』에 옮겨 적었다. 국왕과 신하 사이의 대화 내용 중 문서로 작성하여 공개할 필요가 있는 사안은 문서로 작성하였는데, 국왕이 지시한 사안인지 또는 신하와 논의하여 결정한 사안인지에 따라 榻前傳敎, 榻前下敎, 榻前定奪, 擧行條件 4가지의 문서로 나뉘었다.
榻前傳敎는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국왕이 불러주는 전교를 승지가 그대로 받아 적어 직접 인용 형식으로 작성한 전교이다. 傳敎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承旨가 입시하지 않았을 때 국왕이 司謁이나 承傳色을 통해 승정원에 문서로 전달하여 승지가 베껴 적는 전교이고, 또 하나는 승지가 입시하였을 때 국왕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작성한 전교이다. 전자를 備忘記라고 하였고, 후자를 탑전전교라고 하였다.
榻前下敎는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국왕이 지시한 사안을 승지가 요약하여 간접 인용 형식으로 작성한 하교이다. 下敎도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승지가 입시하지 않았을 때 국왕이 承傳色이나 司謁을 통해 승정원에 구두나 문서로 전달하여 승지가 받아적은 하교이고, 또 하나는 승지가 입시하였을 때 국왕이 지시한 사안을 승지가 요약하여 작성한 하교이다. 전자를 口傳下敎라고 하였고, 후자를 탑전하교라고 하였다.
榻前定奪은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신하의 건의에 따라 국왕이 결정한 사안을 승지가 요약하여 간접 인용 형식으로 작성한 문서이다. 탑전하교는 국왕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지시한 사안을 문서로 작성한 것이지만, 탑전정탈은 신하의 건의에 따라 국왕이 수용하여 결정한 사안을 문서로 작성한 것으로, 서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동일한 사안이라도 국왕의 지시에 따른 것이면 '「∼」라는 탑전하교'라고 적었고, 국왕이 신하의 건의에 따라 결정한 사안이면 '「∼」라는 탑전정탈'이라고 적었다.
擧行條件은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국왕과 신하가 나눈 대화 내용 중 지방에 알려야 할 사안과 조정관원이 알아야 할 사안 등을 주서가 작성하여 국왕의 재가를 거친 문서이다. 탑전정탈은 승지가 요점만 간접 인용 형식으로 작성하였지만, 거행조건은 군신의 대화 내용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직접 인용 형식으로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었다. 注書가 입시한 자리에서 물러나와 거행조건을 작성할 때에는 해당 사안을 논의했던 당사자에게 簡通을 보내 확인한 뒤 작성하였다. 거행조건은 대체로 朝報에 반포하였지만, 모두 반포한 것은 아니었다.


Sŭngjŏngwŏnilgi is a chronicle of the records of words, writings, and conducts of the king and the subjects during the Chosŏn period, compiled by Sŭngjŏngwŏn (The Royal Secretariat). As for the dialogues between the king and the subject, the Chusŏ (注書) who attended that meeting used to take notes of them and later transcribed them in the Sŭngjŏngwŏnilgi. The dialogues that need to be documented and made public were produced as documents. Such documents were sorted by four categories depending on different processes of the decision making. Such four categories were as following: T'apchŏnjŏn'gyo (榻前傳敎), T'apchŏnhagyo (榻前下敎), T'apchŏnjŏngt'al (榻前定奪), and Kŏhaengjogŏn (擧行條件).
T'apchŏnjŏn'gyo (榻前傳敎) is the document that recorded the direct order (jŏn'gyo) from the king by Sŭngji (承旨), when the king made the order with his subjects attended. There were two kinds of jŏn'gyo (傳敎). The first jŏn'gyo was the record reproduced by Sŭngji when the one was absent and thereby the king transmit it to Sŭngjŏngwŏn through Saal (司謁) or Sŭngjŏnsaek (承傳色) in the form of a document. The other was the record directly produced by Sŭngji by taking down the king's statements when Sŭngji was present with the king. The former was called Bimanggi (備忘記), and the latter was called T'apchŏnjŏn'gyo.
T'apchŏnhagyo (榻前下敎) is the document of king's order (hagyo) that Sŭngji summarized the king's statement in the form of an indirect quote, when the subjects were present with the king. There were two kinds of hagyo. The first was the record reproduced by Sŭngji when the one was absent and thereby the king transmit it to Sŭngjŏngwŏn through Saal or Sŭngjŏnsaek as a form of a document or verbal notice. The other was the document directly produced by Sŭngji by summarizing the king's instruction when Sŭngji was present with the king. The former was called Kujŏnhagyo (口傳下敎), and the latter was called T'apchŏnhagyo.
T'apchŏnjŏngt'al (榻前定奪) is the document produced when the king made a decision by following his subject's suggestion. The Sŭngji wrote the document by summarizing the king's decision in the form of an indirect quote. On the contrary, T'apchŏnhagyo is the document that directly took down the king's unilateral order. As such, T'apchŏnjŏngt'al differs from T'apchŏnhagyo in that it was a product of the king's acceptance of the subject's suggestion. Therefore, Sŭngji used two different expressions (T'apchŏnjŏngt'al, T'apchŏnhagyo) by distinguishing those two different contexts behind the king's decisions, even when both of the decisions were dealing with the same issue.
Kŏhaengjogŏn (擧行條件) is the document produced when there were issues that regional officials and court officials should be informed of during the discussion between the king and the subjects. It was produced by Chusŏ and went through the process of the king's authorization. While T'apchŏnjŏngt'al was written with an indirect quote of the summary of the king's decisions, Kŏhaengjogŏn differed from T'apchŏnjŏngt'al in that it directly quotes the dialogue between the king and the subjects relatively in detail. Also, when Chusŏ leaves his seat and write the Kŏhaengjogŏn, he asked to confirm the words of those who discussed the issue by sending a letter to them. Kŏhaengjogŏn used to be published and proclaimed in the official gazette (朝報), but not all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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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서 행정으로 본 적상산사고 선원각의 초기 양상

저자 : 조계영 ( Cho Gyeyoung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5-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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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종부시는 선원보첩을 편찬하고 기록하는 업무 못지않게 외사고의 선원각에 봉안하고 관리하는 책임이 중요했다. 선원각에 봉안한 선원보첩을 관리하는 체계는 외사고가 거의 동일하지만, 사고가 세워진 지역의 여건과 건립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지닌다. 실록 봉안과 사각 관리를 담당한 춘추관에는 謄錄이 현전하지 않아 문서 행정을 통해 명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본 논문은 문서 행정을 통해 적상산사고 선원각의 초기 양상에 대해 고찰했다. 적상산사고의 선원각은 1641년에 건립했고, 1639년에 태백산사고 봉안건을 베껴내 정서한 선원보첩을 최초로 봉안했다. 1648년에 발생한 적상산사고 선원각의 변고는 여타의 선원각에는 없었던 사례로 형지안을 통해 변고의 배경과 대처 방안을 살펴보았다.
종부시는 외사고의 선원각으로 향하는 봉안 행차를 준비하기 위해 관련 관서에 다양한 문서를 발송했다. 선원보첩을 장황하고 궤에 담을 때 필요한 물품들은 하위 관서에 甘結을 내려 지시했다. 예조에는 關文을 발송해 봉안 일행이 지나는 각도 감사 이하에게 보낼 의주와 봉안낭청이 사용할 印信을 요청했다. 봉안 행차가 의주대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봉안 일행이 지나는 각 관에 미리 先文을 발송해 준비시켰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적상산사고 선원각의 초기 양상에 주목함으로써 여타의 사고와는 구별되는 적상산사고의 특징을 규명했다. 종부시가 선원각의 건립과 봉안 행차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수행한 문서 행정은 1629년에 건립한 오대산과 태백산사고의 선원각을 규명하는 데에 유효하며, 사각 연구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인력과 물자의 수급을 파악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Jongbusi (Court of the Royal Clan) of the Late Joseon Dynasty was responsible for the compiling and publishing of Seonwonbocheop (genealogical documents of the royal family) as well as the enshrining and managing it in Seonwongak (building for storing Seonwonbocheop). The system for managing the Seonwonbocheop enshrined in the Seonwongak was a cycle including the enshrining of the documents, drying of the enshrined documents, and repairing of the Seonwongak. The basic system for enshrining and managing the Seonwonbocheop was shared by Oisago (archives of historical books located outside the capital) but slightly different, depending on the local conditions and the establishment time of the Oisago.
This paper examined the initial aspects of Seonwongak at Mt. Jeoksang Sago in terms of documentary administration. The Seonwonbocheop prepared in November 1639 by copying the books stored in Mt. Taebaek Sago (one of the abovementioned Oisago) was firstly enshrined into the Seonwongak located at the Mt. Jeoksang Sago in November 1641. When enshrining the prepared the Seonwonbocheop every three years, Jongbusi corrected the errors in the previously enshrined Eochep (simplified genealogical documents of the royal family) and the Seonwonbocheop or supplemented the details.
In preparation of the travel toward the Seonwongak located at the Mt. Jeoksang Sago for the enshrining, Jongbusi sent to the competent local government offices Gamgyeol(甘結), Gwanmun(關文) or Seonmun(先文) to prepare the travel according to the schedule. The accident that happened in 1648 at the Seonwongak located at the Mt. Jeoksang Sago was one that never happened at other Sago. The background and handling of the accident were revealed through the Hyeongjian (investigation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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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세기 서울 순흥안씨(順興安氏) 중인(中人)집안 전래 고문서 고찰 - 의관(醫官) 안재술(安載述)(1752∼?) 가계를 중심으로 -

저자 : 박철민 ( Park Cheol-mi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7-8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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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에 세거한 順興安氏 安載述 집안에 전래되는 고문서를 살펴본 것이다. 안재술은 조선 후기 醫官으로 활동한 中人으로, 順興安氏 西坡公派의 일원이다. 해당 집안은 16세기 후반 서울 부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 무반직을 거쳐 중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중인 사회 진출은 혼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으리라 여겨지며, 그 시기는 17세기 중반 무렵으로 보인다.
전래되는 집안 고문서는 告身, 準戶口 등 10여점이다. 집안 전래 고문서 중 1859년 安麒慶의 典醫監入屬帖과 19세기 四祖單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인의 사조단자는 지금까지 그 실체가 알려진 바 없다. 집안 전래 고문서 중 사조단자는 총 2점으로 하나는 1859년 安麒慶이 典醫監에 입속하기 위하여 작성한 문서로 여겨지며, 또 다른 하나는 1891년 安奭熙가 司譯院에 입속되기 위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안석희의 사조단자는 하단에 '初巡貳結'이라는 문구와 함께 [司譯院印]이 답인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兩廳完薦記』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중인의 관로 진출에 참조할 수 있다.
전의감입속첩은 안기경이 전의감 생도가 되었음을 알리는 帖이다. 현재까지 전의감 입속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1784년 입속첩과 규장각의 1881년 입속첩 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본고에서 소개하는 입속첩은 두 문서와 시기적으로 중간에 위치하며, 연호 옆 傍書에 차이가 있어 입속첩 양식을 살펴볼 때 참조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is about family-inherited old documents in Ahn Jaesul family of Sunheung Ahn clan. Ahn Jaesul is worked as medical officer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He's family lived in Seoul for generations. This family belongs to the Lord Seopa Branch working as a middle clas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family changed its place of residence to the vicinity of Seoul in late 16th century and held military official posts.
The family became active as a middle class family as it produced interpreters. The family-inherited old documents of Ahn Jaesul family include a small quantity of 10 items such as Gosin (告身: certificate of appointment for a government post given by the Court) and Junhogu (準戶口: certified copy of one's family register). Of these, this research emphasis on Jeonuigam Ibsokcheop (典醫監 入屬帖) and Sajodanja(四祖單子). Specially Sajodanja of a middle class person has never been substantiated until now. There are two Sajodanja in total. It appears that one of them was prepared in 1859 for Anh Gigyeong's entry into Jeonuigam.
The other document was prepared in 1891 for Ahn Seokhee's entry into Sayeokwon (government office that was in charge of translating and interpreting foreign languages). The Sajodanja by Ahn Seokhee is stamped with the official seal of Sayeokwon and includes the phrase, 'Chosun-igyeol'(初 巡貳結) at the bottom part. The fact that such elements are identical to the content of Yangcheong-wancheongi (兩廳完薦記) housed in National Library of Korea implies that a Sajodanja is a document that needs to be referred to government post entry of the middle class.
Jeonuigam Ibsokcheop is a document that informs a person has become a member of Jeonuigam (典醫監: the government office that was in charge of supplying medicine used in the palace and in managing medicine granted by the King). To this date, reserchers find out that there are two Ibsokcheop(1784, which is housed in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and one from 1881, which is housed in Kyujanggak). However, in this reserch I found out another Ibsokcheop witten in 1859. As year indicates this Ibsokcheop is witten between the previous two documents(1784 and 1881). These family-inherited documents can be used as a reference when examining the form of Ibsokch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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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세기 후반 통제영 8전선 선단(船團) 실태 - 1894년 『통제영 해유문기(解由文記)』를 중심으로 -

저자 : 김현구 ( Kim Hyun-gu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5-12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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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수군 운영의 중추였던 통제영은 8전선 船團과 예하 부속선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종래에는 제한된 사료 탓에 주로 임란기와 18세기 후반에 초점이 맞춰졌고, 그 구체적인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주로 귀선과 같은 특정 군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본고에서는 19세기 말엽에 작성된 『통제영 해유문기』의 발굴을 통하여 보다 밀착된 통제영 군선의 실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문기는 비록 폐영 직전의 산물이고, 기재상의 미흡함이 있기는 하지만 동종의 해유문서와는 차별성이 뚜렷하였다.
이를 토대로 먼저 18세기 중반 이후의 군선의 보유 실태를 살피고, 나아가 주로 19세기 후반의 타 수영이나 진보의 관련 사료를 활용하여 주로 전선의 諸元을 비교, 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충사 소장의 '통영수군고문서' 등의 재검토를 병행하였다. 조선 수군은 동종의 군선 간에도 표준화된 치수를 산정하기는 어려웠고, 시기나 승선 지휘관에 따른 船格의 차이가 있었다.
끝으로 도해선의 연구 성과와 경기수영의 주요 문건을 동원하여 '칸(間)'의 개념과 함께 귀선을 비롯한 각 전선의 내부 구조를 논의하였다. 일단은 19세기 후반의 통제영 전선의 제원 검토에 주력하였고, 향후 다양한 연구와 논의의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The Control camp(the Tongjeyoung), which was the backbone of the naval forces opera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organized around the 8 Warships fleet and the subordinate ship. In the past, due to limited hisorical data, research on the status of warship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focused was mostly on the Imran(Japanese Invasion of Korea) period and the late 18th century, and the specific facts were not revealed. Also, attention was concentrated mainly on certain military vessels, such as the turtle ship.
This paper sought to find out more closely the status of the military ships in the Tongjeyoung through the excavation of the 'Tongjeyoung Haeyumungi' written in the late 19th century. This writing style was distinct from the same type of Haeyu documents, although it was a product just before the closure of the military camp and was insufficient in the description.
Based on this, first examined the status of military ships after the mid-18th century, and further compared and reviewed the specifications of the warships mainly by utilizing other Naval Camp and Base related historical materials from the latter half 19th century. In this process, the re-examination of the documents in the Hyeonchungsa's possession, 'Tongyoung naval ancient writing paper', etc., was carried out simultaneously. It was difficult for Joseon's naval forces to calculate standardized dimensions between the military vessels of the same species, and there were differences in timing and the commander of the ships.
Finally, we discussed the internal structure of each warship, including the Turtle Ship, with the concept of 'k'an(間), by mobilizing the research results of the Dohaeseon(渡海船) and the main documents of Gyeonggi Suyeong(京畿水營). For now, we focused on reviewing the specifications and internal structure of the Tongjeyoung Warship in the latter half 19th century and want to use it as the basis for various research and discussion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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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광무양안에 기재된 방향, 면적, 등급의 의미 - 토지대장과의 비교연구 -

저자 : 김소라 ( Kim Sora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5-14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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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충청남도 한산군 하북면의 이웃 네 개 里를 대상으로 광무양안과 식민지기 토지대장, 지적도를 대조하여 각 장부에 기재된 개별 필지의 정보를 비교하였다. 분석 결과, 양안에 기재된 양전 방향과 사표는 토지의 실제 위치를 객관적으로 비정하기 위한 정보가 아니라 양전을 수행하는 현장에서 효율적인 양전 경로를 설계하기 위한 참고 기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山林川澤 인근에서 방위축이 조정되는 현상도 발견되었다. 양안의 積尺數와 田品은 지목별 토지생산력 격차를 보완하기 위하여 차등을 두며 재조정된 것으로 드러났다. 면적은 畓-田-垈 순으로 토지의 실면적보다 적게 양안에 기록되었으며, 등급 역시 논과 밭의 생산성 차이를 감안하여 책정되었다. 다만, 네 개 마을이 이웃하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적, 등급 재조정 양상은 里마다 상이하게 나타났다.


This study compared information of each piece of land in the Kwnagmu Land Registers and the colonial ones. Four villages in Hansan county, Ch'ungch'ŏng province were mainly analyzed. Through the comparison, this paper can reveal that cardinal directions written in the Kwangmu Registers were not for delivering absolute cardinal points, but for showing where the most efficient surveying routes were. The phenomenon of resetting of the axis of cardinal direction nearby natural terrains was found. Also, I can find that areas and grades in the Kwangmu Registers were readjusted by land categories. It was for achieving equilibrium among different land categories which showed diverse productivities. Usually, areas were reduced and grades were decided in different ways for each of paddy, dry, and residential fields. And the size of readjustment of areas and grades was diverse by vill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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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미암일기(眉巖日記)』를 통해 본 16세기 양반관료의 근무평가와 인사이동

저자 : 조광현 ( Jo Kwang-hy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66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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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16세기 양반관료의 근무평가와 인사이동을 『미암일기』 속에 나타난 유희춘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경관의 근무평가는 평가자 간의 완전한 합의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으며, 六曹의 속아문은 해당 육조 당상관의 마감을 거친 이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외관도 근무평가 시에 동의과정이 있었으나 경관과 달리 의견을 주고받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또한 일기에서 도사는 관찰사와 함께 근무평가의 평가자로서 외관을 평가하는데 참여하였다. 한편 인사이동은 정기적으로 설행되는 都目政과 시기에 구애 없이 궐원이 생기면 충당하는 轉動政이 있었다. 도목정이 대규모 인사이동으로 매년 6월과 12월에 설행되었던 반면 전동정은 설행하기 위한 여러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이루어졌다. 吏批와 兵批의 구성원 간 합의로 후보자가 추천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인사 청탁이 빈번하였다. 이는 그 당시 인사제도에 의해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자 주요 관례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performance appraisal of and personnel changes among 16th century Yangban officials through the case of Yoo Hee-choon that appears in the “Mi-am Diary(眉巖日記)”. 16th century Yangban officials were classified into the gyeonggwan (京官) of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 oegwan (外官) of provincial governments. The performance appraisal of gyeonggwans occurred after a complete discussion process between evaluators, and the performance of the sokamun (yukjo officials) of the yukjo (六曹, six ministries of Joseon) was reported to the king after being approved by the dangsanggwan (state councilors) of the relevant yukjo ministry. While the oegwan also had an approval process for performance appraisal, unlike the gyeonggwans, it involved the simple exchange of opinions. In addition, both the dosa (都事, governor) and the gwanchalsa (觀察使, provincial governor) participated as evaluators in the appraisal of oegwans in the 16th century. With regard to personnel changes, the domokjeong (都目政) occurred regularly, and the jeondongjeong (轉動政) supplemented personnel whenever a vacancy occurred, regardless of timing. The domokjeong was characterized by large-scale personnel change that occurred every June and December, while the jeondongjeong occurred only when several different conditions were satisfied. Solicitations for personnel appointments were common, as nominees were determined by an agreement between the members of the ibi (吏批, an organization that petitioned the king regarding government appointments) and the byeongbi (兵批, an organization that selected military appointments). This was an inevitable result and a major custom created by the human resources system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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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40∼1541년 기근과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의 간행

저자 : 문광균 ( Moon Kwangky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7-19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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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구황절요』는 1541년(중종 36) 간행된 구황지침서이다. 이 문서는 충주목사 안위와 판관 홍윤창의 주도 아래 만들어졌다. 총 27개조로 구성된 이 절목에는 진휼곡 마련 방법, 절식 방법, 유기아 구호방법, 재지사족의 역할, 진휼실무자에 대한 처벌조항에 대한 지침들이 수록되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1540∼1541년 발생한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기근을 극복하고자 진휼청을 설치하여 「진휼청절목」을 각 지방에 내려 보냈다. 안위와 홍윤창은 진휼청이 내려 보낸 「진휼청절목」을 보완하면서도 충주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충주구황절요』를 간행하였다. 이 자료는 충주 뿐 아니라 지방 백성들이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구황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16세기 지방군현의 진휼실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충주구황절요』에서는 구황정책 중 가장 중요한 사안인 진휼곡 마련이 결송작지(決訟作紙), 주고(酒庫) 혁파, 반강제적인 사족의 곡물 대여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중종대 진휼 정책이 수령과 사족의 협조 아래 지방군현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책은 충주목사 안위가 후한 인사평가를 받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양란 이후인 17세기 이후로부터 중앙정부는 사족에 대한 반강제적인 곡물 대여인 권분(勸分)을 금지하는 한편 국가차원의 진휼곡 조성, 수령의 자비곡 의무화, 대규모 진휼곡 설치 등을 통해 진휼재원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주구황절요』는 국가 차원에서 진휼곡을 마련하여 기민을 구제하던 이전 시기 지방군현에서 자발적으로 곡물을 마련하고, 기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방안을 정리한 구황서라고 볼 수 있다.


『Chungjuguhwangjeolyo (Essentials of Famine Relief in Chungju)』 is a guidebook to famine relief published on October in the 36th year of the reign of Jungjong of Joseon (1541). This material was made, led by Chungju Magistrate Ahn, Wi and Hong, Yunchang. How to methods to reserve relief grain, fasting methods, famine relief methods, provincial noble families' roles, and guidelines on penalty clauses of persons in charge of relief were included in these regulations that consist of total 27 sections. The central government then installed Bureau of Relief and sent 「Regulations of Bureau of Relief」 to each region to overcome natural disasters from 1540 to 1541 and the consequent famine. Ahn, Wi and Hong, Yunchang supplemented 「Regulations of Bureau of Relief」 and published 『Chungjuguhwangjeolyo』 to make the people in Chungju immediately escape from starvation. This material is meaningful in that the specific methods to make the people in the local areas as well as Chungju immediately utilize them.
Plans for securing relief grain done in local areas of counties and prefectures during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can be examined in 「Chungjuguhwangjeolyo」. The preparation of famine relief, the most important issue in the famine relief policies, was done by borrowing grain owned by scholar families from them forcibly with actions including legal expenses (決訟作紙) and the abolition of alcohol storages (酒庫). And this policy was recognized as the positive national affairs in those days as evidenced by Chungju Magistrate Ahn, Wi who got a high score in performance rating. However, the central government prohibited Kwonbun (勸分), borrowing grain from scholar families forcibly, and secured finances of relief by preparing relief grain at the national level, making grain prepared by magistrates for themselves mandatory, and the installation of large-scale relief grain since the 17th century after the both wars. Considering this, it is thought that the preparation of relief grain at the local magistrates' level in counties and prefectures was changed to that at the national level after the period pa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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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 17세기 유기아수양법과 민간의 전용(轉用) - 1661년 서원현 소송을 중심으로 -

저자 : 김경숙 ( Kim Kyeongso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93-21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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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17세기 유기아 정책의 방향과 민간 현장에서 유기아 수양의 사례를 검토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의 惠恤 규범이 민간에서 轉用되는 양상을 검토하였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惠恤'의 차원에서 유기아 구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조선 왕조는 『경국대전』 예전 혜휼조에서 관련 규정을 마련하고 국가 주도의 정책을 지향했다. 개인의 수양과 사역은 10세 연한을 둠으로써 고려 이래 민간의 수양을 통한 사역을 제한하고 국가 기관에서 구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정책은 민간에서 유기아 구제를 기피하는 역현상을 불러왔다. 결국 1547년(명종 2) 수교를 통해 유기아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혜휼의 명분하에 연한 제한을 사실상 폐지하고 민간 수양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는 개정된 유기아 수양법에 근거하여 유기아 수양을 통해 노비를 확보하였고, 국가의 혜휼 규범은 민간의 수양이 행해지는 현장에서 노비를 확보하는 통로로 전용되었다. 여기에는 遺棄兒, 願育人, 유기아의 親生父母 또는 本主 등의 관계가 얽혀 유기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과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1661년 서원현 소송은 노비가 유기아를 수양한 데서 비롯된 사건으로, 여기에는 노비, 노비주, 유기아, 본주 등 4자 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소송의 발단은, 1621년에 노 장복룡이 비 논월을 유기아 수양으로 입안받아 양육했는데, 1659년에 양반 정승철이 본주를 주장하며 논월을 추심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 철생이 장복룡을 위하여 代訟人으로 나서서 유기아를 還推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논월 가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원현 소송에서 노 복룡의 상전가는 소송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친송해야 하는 노비의 소송에 같은 상전가 소속의 노 철생이 대송하고, 노비소유권을 다투는 '相訟'에서 소송 논리로 내세운 것은 가족관계를 전제로 하는 '卽同己子'로 서로 어긋나는 점, 유기아 입안을 받은 주체가 복룡의 상전가로 확인되는 등 원육자와 소송자가 일치하지 않는 단서들이 확인된다. 이는 복룡의 상전가가 소송자로 개입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약 100년 후 안산관에서는 '收養父母主 양쪽이 쟁송할 경우에는 양측이 차지하는 것이 부당하므로 從良을 허락한다'는 『속대전』 규정을 소급 적용하여 서원현 결송 내용을 爻周 처리하고 노비들을 從良했다. 이 또한 서원현 소송을 노 복룡의 상전가 소송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노비의 유기아 수양은 노비와 노비주의 긴밀한 관계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노비의 입장에서는 본주 또는 친생부모가 나타나 추심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유기아를 수양하기 위해 상전가의 사회적 위상과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했다. 상전가 입장에서도 소유 노비가 願育人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현실적인 양육 문제를 해결하고 구활 노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양자의 결합은 민간 수양의 현장에서 유기아를 확보하는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case of people's fostering a neglected child based upon the official policy on a deserted child in the 16th- and 17th-century Korea, showing people's appropriation of the official relief work, legal and normative, to their interests.
The Chosŏn dynasty legalized the relief of the deserted child under the age of three in the article of 'hyehyul'(惠恤) literally meaning merciful relief in English, the section of Rites(禮典) at the Grand Rule of Laws(經國大典). The legalization was meant to initiate the royal relief work of mercy. The law allowed people to privately foster the neglected child until the age of ten upward, and then to have the child as a nobi, practically limiting their fostering itself and bringing about the popular unwillingness to foster a deserted child. The bad effect of the legalization brought forth the policy change in 1547 under the reign of king Myŏngjong, which permitted people to have a neglected child as a nobi by fostering him/her. The policy change made it possible for people to secure nobi (奴婢) by fostering neglected children based upon the revised law. This meant that the official norm and law on merciful relief came to be appropriated to people's private interests. Yet, the appropriation was not so easy. It involved the concerned who were a deserted child, people avid for the fosterage, the child's biological parent, and his/her original owner in the case that the child belonged to nobi, and sometimes entailed their competitions for the procurement of a neglected child.
One of exemplary competitions was: the 1661 Sŏwŏn Prefecture case which was filed on the title to the fostered nobi. In 1621, Chang Pok-ryong who belonged to nobi discovered an abandoned child in front of house, naming her Nonwŏl, and then reared her after having an official notarization. In 1659 when more than three decades had passed, yangban Chŏng Sŭng-ch'ŏl recovered Nonwŏl by holding that he was Nowŏl's original owner. In 1661, Chang filed the litigation aginst yangban Chŏng, which was represented by Ch'ŏl-saeng, and then won the case, resulting in Chang's recovery of Nonwŏl.
In appearance, Chang's master could not be found in the legal disputes. The historical materials concerned, however, imply that he was involved in the disputes. Ch'ŏl-saeng who represented the 1661 litigation for Chang was the master's another nobi, which suggests that his representation was made for master. Noteworthy is that the documents the plaintiff submitted to the official in charge of the 1661 litigation included the 1621 petition for the official notarization of Chang's fostering Nonwŏl, which was made by Chang's master. These things suggest that in reality Chang's mas ter was actively involved in the case as a litigant even if apparently he did not appear in the litigation. This shows that nobi fostered a deserted child based upon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nobi and his/her master.
The constant situation that an abandoned child's biological parent or his/her original owner would make efforts to recover the child made it necessary for nobi to secure in advance the social prestiges and potentials his/her master held for nobi's stable fostering of a neglected child. Also master's close relationship with his/her nobi solved the his/her practical problem of nurturing the child and thereby securing nobi, which, ultimately, served the master. The close mutual relationship between master and nobi based upon their common interests constituted one of the major ways of people's securing a deserted child and fostering the child in the 16th- and 17th-centur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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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세기 조선의 민사집행의 실태

저자 : 심희기 ( Sim Hui-gi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9-24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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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결송입안을 읽으면서 가졌던 의문은 과연 '조선의 현실사회에서 송관(訟官)의 결송 내용[題音]대로 집행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필자는 이 논문에서 각종의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류와 의송등서책(議送謄書冊)류를 사료로 활용하여 19세기 조선의 민사집행의 실태의 몇 가지 단면(斷面)을 논증하려고 한다.
먼저 Ⅱ, Ⅲ, Ⅳ, Ⅵ에서 19세기 조선의 채권자ㆍ묘지권자는 채권ㆍ묘지권 만족을 위하여 채무구금(imprisonment for debt) 수단의 사용을 강하게 청원(請願)하지만 송관은 그 수단의 사용을 꺼리고 가급적 채무구금을 최후수단으로만 활용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음을 논증한다. Ⅴ에서는 '패소인이 수령의 뎨김대로 이행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하여 국가의 성문법은 어떤 조치를 마련하고 있었을까'를 살펴본다. Ⅶ에서는 관찰사가 송관에게 채무구금을 지시하는 사례를 실증적으로 드러낸다. Ⅷ에서는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의 기능을 겸하는 19세기 조선의 감옥을 논증하며, Ⅸ에서는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채무구금의 최대 애용자였던 사실을 논증한다. Ⅹ에서는 징벌적 형사사법 시스템과 채무구금의 관계를 논증한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도로 합리화된 법제에서는 채무구금이 불법화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채무구금은 비형사적 처분으로 운영되었다. 서양 중세의 채무자 감옥이 이 범주에 속한다. 조선 중기부터 출현한 구류간(拘留間)이 사옥(私獄)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 구류간의 발상은 서양 중세의 채무자 감옥에 필적하는 존재였다. 19세기 조선의 채무구금은 형사적 프로세스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양 중세의 채무자 감옥과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


How was the legal decision of local government enforced in 19th century Joseon?
In this paper, I have presented some points about civil execution in 19th century Joseon using various archives of the local government of 19th century Joseon.
Petitioners strongly requested the imprisonment of debtor. However, the local magistrate and governor were reluctant to use it, preferably as an imprisonment of debtor last resort (chapters II, III, IV, and VI).
In chapter Ⅰ, I described when the loser do not observe the court ruling, what kind of measurements do the written law of Joseon dynasty prepared. In chapterⅤ, I showed several cases that local governor ordered imprisonment of debtor to magistrate. In chapter Ⅷ I showed that in 19th century Joseon, the prison functioned as a debtor's prison. In chapter Ⅸ I showed that the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government was the most frequent users of the imprisonment of the taxpayers when they did not pay the tax on time.
The conclusions of this essay are as follow.
The modern rationalized legislation outlawed the imprisonment of debtor, or even if it was not, it uses the imprisonment of debtor as a non-criminal basis. Western medieval debtor's prisons fall into this category. From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the detention house was described as a company building, and the concept of detention house was comparable to that of the Western medieval debtor's prison. However, the detention of debtors in 19th century Joseon was different from that of Western medieval debtor's prison in that it was incorporated as part of the criminal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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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선후기 면주전(綿紬廛)의 멤버십 관리 - 단자(單子)를 통해 본 입참(入參)의 실태 -

저자 : 조영준 ( Cho Young-j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43-27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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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서울 시전의 조직과 멤버십에 관해서 기존 연구는 '규정' 성격의 자료를 주로 소개하였는데, 이 연구에서는 가와이문고 소장 자료 중에서 면주전의 고문서를 본격적으로 분석하여, 적어도 면주전에 대해서는 실증 분석이 가능함을 보였다. 연구 결과의 일부는 기존 연구와도 정합적이다. 또한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등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고 있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이는 향후에 뒤따르게 될 여러 후속 연구를 위한 지침을 제공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조선후기 면주전에서는 入參을 원하는 이들에게 다섯 가지의 單子를 요구하였다. 入參單子를 비롯하여, 年齒單子, 三保單子, 四祖單子, 望葬單子가 그것이다. 이들 문서는 거의 동시에 작성되어, 멤버십 관리에 활용되었다. 현존하는 연치단자에 따르면, 면주전에서 15세까지는 입참이 허용되지 않았고, 16세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했다. 또한 입참 연령이 주로 16-25세에 집중되었지만, 26-50세의 경우에도 입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입참의 보증은 혈연관계에 의존하였으며, 이는 사조단자의 제출을 통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아버지ㆍ어머니ㆍ본인ㆍ아내의 잿돈을 지급받기 위해 불공평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리인을 지정하는 방법으로 멤버십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단자의 기재 내용과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조직 운영에 있어서 구조적 변화가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서 발생했을 가능성을 포착하였으며, 이 역시 기존 연구의 분석과 연계될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20세기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이들의 분석으로 18-19세기에 걸친 면주전 조직 운영의 실태에 접근할 수 있음도 보일수 있었다. 그리고 입참 이외에 다양한 목적으로 단자가 제출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해당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에 작성된 것으로서 영업 등과 관련한 멤버십 관리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절차였다.


On the organization and membership of Seoul merchant guilds in late Chosŏn Korea, the existing research has mainly dealt “regulations-type” materials. On the contrary, this paper collected, classified, and analyzed “historical manuscripts” of silk merchant guild (myŏnjujŏn) in Kawai collection of Kyoto University. Five different types of applications for admission were required to join the myŏnjujŏn. Those documents were submitted almost simultaneously and checked for membership acquisition. According to the analysis of existing cases, it was not allowed to join the myŏnjujŏn under the age of 15. Also, the actual age of entry was mainly between 16 and 25. The guarantors for joining the guild were needed and they were mostly relatives. It was also required to submit documents regarding family tree information. Although much of the documents are of the 20th century, they also show the former reality of the guild in late Chosŏ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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