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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82)~85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026
동방한문학
85권0호(2020년 1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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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시대의 현토(懸吐)에 대한 인식

저자 : 姜玟求 ( Kang Min-koo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7-54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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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懸吐'는 '懸讀'의 속칭이며 '懸讀'를 '口訣'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없으면 글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口訣과 釋義은 薛聰의 이두에서 기원하며, 鄭夢周와 權近이 경전의 구결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이 『소학』과 사서와 오경의 口訣을 정하게 하였는데 마무리짓지 못하고 세조의 명으로 다시 사서오경의 구결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선조 조에는 경전의 언해 사업으로 발전하여 官本諺解가 만들어진다. 그것과 함께 조선에서 중시된 경전 현토와 언해는 柳崇祖ㆍ李滉ㆍ李珥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柳崇祖[1452~1512]가 경서 언해를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의 칠서언해가 유포 활용되었다. 그리고 퇴계의 『經書釋義』는 諸家의 訓義를 다방면으로 인용하면서 절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 율곡의 사서언해는 경전 언해를 제작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은 柳希春이 율곡을 추천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논어언해』와 『맹자언해』는 임진년에 소실되고, 『대학언해』ㆍ『중용언해』만 남아 있다가 등사본 등을 수집하여 인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 언해에 대한 신뢰와 회의가 병존하였으니, 당색에 따른 정치적 이념이 상당 정도 작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서인은 율곡의 사서언해를 높이 평가하고 퇴계의 『경서석의』를 상대적으로 미진한 것으로 평가절하 하였고, 남인은 퇴계의 『경서석의』를 존숭하고 율곡의 사서언해를 배타하였다.
口訣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될 정도로 한문 공부에서 긴요한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현토 없는 한문책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효종은 중국 사람들이 현토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 정조는 어렸을 때 『춘추』를 課讀하여 불과 20일 만에 완독하였는데, 이때 공부한 책에는 현토가 되어 있었다. 현토는 경학이나 理學 텍스트의 정확한 해독 뿐 아니라 불경이나 문장의 정확한 해독에 대한 담론에서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현토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존재하였다. 成俔[1439∼1504]은 중국 사람들은 말과 문자가 일치하기에 배우기 쉽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독음이 따로 있고 뜻이 따로 있으며 구결까지 있기에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盧守愼[1515~1590]은 사서의 구두에 우리말로 토를 다는 것을 쓰지 못하게 하라고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權得己[1570~1622]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전 공부의 문제점 중 하나로 현토 공부를 거론하며, 한문이 중국에서 전래되었기에 중국이나 조선이나 한문을 읽는 방법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趙翼[1579~1655]은 科擧에서 현토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풍조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李喆輔[1691~1770]는 토를 따라 글을 읽으면 사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현토가 학습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으며, 李裕元[1814~1888]은 經傳에 모두 諺解가 있어 공부하기가 중국보다 갑절이나 힘이 들고, 이 때문에 학업의 성취가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은 한문을 효율적으로 학습하기 위하여 현토를 만들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관본언해가 인행되었으며 유학의 종장들에 의하여 경전의 언해가 만들어졌다. 당색에 따라 퇴계와 율곡의 경전언해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서 자칫 정쟁의 일부로 전이된 점도 있으나, 각각 자신들의 宗師가 만든 언해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경전 등의 현토와 언해가 점차로 정확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Hyunto(懸吐)' is the common name of 'Hyundok(懸讀)', and the reason why 'Hyundok(懸讀)' is also called 'Gugyeol(口訣)' is because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writing without it.
It is said that Gugyeol(口訣) and Commentary(釋義) in Korea originated from the Idu(吏讀) of Seolchong(薛聰), and Jeong Mong-ju(鄭夢周) and Kwon-Geun(權近) made the Gugyeol of scriptures. In the Joseon Dynasty, King Sejong made the Gugyeol of 『Sohak』, Four Books(四書) and Five Classics(五經) decide, but failed to complete it, and the Gugyeol of Nine Chinese Classics was created again under the command of King Sejo. This was developed into the work of the Eonhae(諺解) business of the scriptures in King Seonjo's reign, and the Gwanbon-Eonhae(官本諺解) was created. Along with this, the Hyunto of scriptures, which was valued in Joseon, was created by Yu Sung-jo(柳崇祖), Lee-Hwang(李滉) and Lee-Yi(李珥). Yu Sung-jo(柳崇祖)[1452~1512] is said to have made the Eonhae of scriptures for the first time, and his Chilseo-Eonhae was spread and utilized. Toegye's 『The Commentary of scriptures(經書釋義) 』 is said to have been made by quoting and compromising the Korean translation of a Chinese character of the various masters in many ways. Yu Hui-chun was commanded by King Seonjo to produce the Eonhae of scriptures, so he recommended Yulgok, and this was how Yulgok's Saseo-Eonhae was made. 『The Analects of Confucius Eonhae』 and 『Mencius Eonhae』 were disappeared in 1592, and only 『Dae-hak Eonhae』 and 『Jung-yong Eonhae』 were left, and were published by collecting duplicate copies. Since confidence and skepticism coexisted in their Eonhae, so it is understood that political ideology based on a partisan coloring worked to a considerable extent. Seo-in praised Yulgok's Saseo-Eonhae, and devalued Toegye's 『The Commentary of scriptures』 as being relatively incomplete, while Nam-in respected Toegye's 『The Commentary of scriptures』 and excluded Yulgok's Saseo-Eonhae.
Gugyeol has become important means of studying Chinese classics, to the point of being likened to 'a finger pointing to the moon'. Therefore, the books of Chinese classics without the Hyunto was considered rather strange. King Hyojong thought it was strange that the Chinese people did not write the Hyunto. Also, when Jeongjo was a child, he read completely 『Chunchu』 in only 20 days, and Hyunto had been written in the book he studied at that time. The Hyunto was used as the correct interpretation of Chinese classics and natural sciences texts as well as a major means of discourse on the correct deciphering of Buddhist scriptures and sentences.
On the other hand, there was a negative view of the Hyunto. Seong-Hyeon(成俔)[1439∼1504] said that Chinese people were easy to learn because the language and letters match, but we were not, so it was difficult to learn because there were a separate reading sound, a separate meaning, and even a Gugyeol. Noh Su-sin(盧守愼)[1515~1590] suggested to King Seonjo not to use Hyunto in Korean on the punctuation of Four Books(四書). As one of the problems of the Korean people's study of scriptures, Kwon Deuk-gi(權得己)[1570~1622] mentioned the study of the Hyunto, and because Chinese classics were introduced from China, he asserted that the method of reading Chinese classics should be the same in China or Joseon. In particular, Jo-Ik(趙翼)[1579~1655] strongly criticized the trend of placing too much emphasis on the Hyunto in state examination. Lee Cheol-bo(李喆輔)[1691~1770] said that reading the text along the Hyunto does not require thinking, so the Hyunto interferes with learning. Lee Yu-won(李裕元)[1814~1888] argued that it is twice as difficult to study as China because there are Eonhae in all of scriptures, and that it was difficult to achieve one's studies.
Joseon Dynasty created the Hyunto to efficiently learn Chinese classics, the Gwanbon-Eonhae was published at the national level, and the Eonhae of scriptures was made by scholars of Confucianism. The assessment of the Eonhae of scriptures of Toegye and Yulgok was carried out according to the partisan coloring, so it has been spread as part of a political struggle, although, it should not be overlooked that the Hyunto and the Eonhae gradually became accurate by each striving to expansively inherit the Eonhae made by their own t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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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후기 과시(科試) 연구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활용

저자 : 金光年 ( Kim Kwang-nye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7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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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科試 자료의 外延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금까지 과시 자료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承政院日記』 소재 과시 관련 자료들을 검토한 것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기존의 다른 과시 관련 기록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다양한 기록들이 산재해 있다. 儒生 應製의 경우 시험 시행 사실과 더불어 합격자 명단과 시상 내역이 거의 누락 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課製의 경우에도 해당 과제의 배경과 더불어 관련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肅宗代의 경우 讀書堂 課製 관련 기록이 상세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親臨試의 경우에도 임금의 행적을 중심으로 시험 절차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소재 과시 자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시 관련 내용에 대한 검토 및 자료의 集積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후 이에 대한 색인어 추출 등의 적절한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타의 과시 관련 자료와의 상호 참조를 통해 자료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함으로써『승정원일기』 소재 과시 자료를 과시 연구에 좀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원활한 과시 연구를 위해서는『승정원일기』를 필두로 다양한 編年體 역사 기록 소재 과시 자료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자료의 집적 및 분류 작업 등이 조속히 추진되어야 한다.


In order to expand the external appearance of the gwageo data, this paper reviewed the gwageo-related materials contained in Seungjeongwon ilgi, which so far is thought to have not been sufficiently noticed as a gwageo material.
Seungjeongwon ilgi has a variety of records that are difficult to identify in existing gwageo-related records. In the case of yusaengeungje(儒生應製), the list of successful candidates and awards were recorded with little omission, and in the case of gwaje(課製), the background and related details were recorded. In the case of the King Sookjong(肅宗), it is also worth noting that the records related to the Dokseodang are detailed. In the case of Chillimsi(親臨試), the test procedure is described in great detail, focusing on the king's record.
In order to utilize the gwageo data on Seungjeongwon ilgi, the gwageo-related content must first be reviewed and the data aggregated. It shall be subjected to proper processing, such as extraction of indexers. Finally, cross-references with other gwageo-related materials will complement the deficiencies of the data, making the gwageo data recorded in the Seungjeongwon ilgi more efficient use of the gwageo research.
In order to vitalize future gwageo research, detailed investigation of various gwageo data, including Seungjeongwon ilgi, and aggregation and classification of data should be carried out as soon a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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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팔공산진시□(八公山陣詩 )의 도검의상(刀劍意象)에 대한 고찰

저자 : 趙赫相 ( Cho Hyuk-sa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1-101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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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再亂 중 1597년(선조 30) 9월 22일, 의병장 樂義齋 李訥(1569~1599)은 大邱 八公山에서 왜군의 기습으로 전투를 벌이던 중 왼팔에 적탄을 맞았다. 상처의 피가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릴 정도의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참고 전투를 지휘하여 마침내 적을 무찌른 이눌은, 부상의 고통에 신음하며 「在公山陣爲賊丸所中呻吟賦詩」를 지었다. 이눌의 이 시에 뒤이어 수많은 의병장과 義士들이 총 52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 시들이 실린 시축을 八公山陣詩 , 줄여서 公山詩 이라 한다. 이 중 도검의상이 나타나는 작품들이 총 17수가 있고, 李坰의 「書公山詩 後」 뒤에도 李宜潛의 1수가 추가되어 있는데, 조선중기의 도검문학 작품 중 의병장이 부상을 입고 신음하며 도검의상이 드러난 시를 남기고 다른 의병장과 의사들이 이에 호응하여 도검의상이 표현된 시를 지은 사례는 매우 희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공산진시축의 한시에서 나타나는 도검의상들은, 냉병기가 난무하던 정유재란 당시의 전장 상황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의병장의 용맹과 힘 그리고 가열찬 애국심과 忠君의 정신을 아울러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또한 의병장의 부상에 대해 다른 의병장들이 시를 지어 위로하는 문화가 전장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시어 안에 검이 종종 등장한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지녔던 文武兼全의 정신이 刀劍意象詩語에 의해 문학적으로 표출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On September 9th, 1597, during JungYuJaeRan(丁酉再亂), Lee Nool(李訥), who was a Righteous Army leader(義兵將), was wounded on the left arm by the Japanese enemy's bullet in PalGongSan(八公山) of DaeGu(大邱). Despite pain and blood shed from a wound, he led a Righteous Army of PalGongSanCamp to the victory against the japanese invaders. After the end of the battle, Lee Nool wrote 「the poem of painful groan because of gunshot wound in PalGongSanCamp(在公山陣爲賊丸所中呻吟賦詩)」. Following this poem, many righteous army leaders and warriors wrote 52 poems, which were put in a PalGongSanCamp poem-scroll(八公山陣詩 )or GongSan poem-scroll(公山詩 ). 17 poems in this scroll and another 1 poem contained the Sword Imagery(刀劍意象). In the Middle Joseon Dynasty(朝鮮中期), it was very unique example about these poems of sword for the consolation to Righteous Army leader(義兵將)'s pain of a wound. Sword Imageries(刀劍意象) of PalGongSanCamp poem-scroll(八公山陣詩 ) showed the scene of battlefield with cold steels during JungYuJaeRan(丁酉再亂), and also represented the braveheart, power, patriotism, and a sense of loyalty of Righteous Army leaders(義兵將). Poetic diction of Sword Imagery(刀劍意象詩語) of PalGongSanCamp poem-scroll(八公山陣詩 ) hold up a true mirror to the SaDaeBu(士大夫)'s spirit demonstrating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文武兼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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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거정(徐居正) 초기시에 있어서의 공명(功名)의 문제와 시적 대응

저자 : 金昌祜 ( Kim Chang-ho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3-12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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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서거정 초기시에 있어서의 功名의 문제와 詩的 對應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그간 서거정 문학에 관해서는 성종 대의 역할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이전 시기 문학 형성 과정의 특이성이 간과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서거정은 출사 초반 급변의 정국에서 공명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 그러나 한명회, 신숙주 등 절친한 이들이 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핵심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의 초기시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서거정의 초기시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同題 작품 내에서 주제의 충돌이 나타나는가 하면, 같은 시기 작품들 간에 상반된 주제 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정서의 면에서는, 공명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낙담 끝에 귀거래를 다짐하기도 한다. 이 같은 불안정성의 배후에는 공명의식이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명의식이 현실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왜곡되는 지점에서 시인의 첨예한 시적 대응을 확인할 수 있다.
시적 대응은 주로 寓意의 방식이나 想像의 空間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진의를 왜곡하는 이들을 시의 편폭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우회적으로 嘲弄하고 揶揄하는 방법을 택한다. 공명을 위한 상황의 개선이 어렵다고 느낄 때에는 상상의 공간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상상 가능한 功業의 최대치를 표현함으로써 想像的 報償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의의 방식이나 상상적 보상은, 속성상 동전의 양면처럼 공명에 대한 懷疑와 연결되어 있다. 서거정 시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초기시에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자아의 치열한 대응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서거정의 초기시는 정치적 급변 상황에서의 인간 이해에 관한 풍부한 가능성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issue of love of honor (功名) and poetic response in Seo Geo-jeong's early poems. Seo Geo-jeong had a longing for love of honor in the sudden change of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career. However, he had to watch close friends like Han Myeong-hoe(韓明澮) and Shin Suk-ju(申叔舟) emerge as key forces. His early poems are surrounded by this situation.
Seo Geo-jeong's early poems have several characteristics. In terms of subject matter, there may be conflicting subjects within the work of the same title, and the subject consciousness of the works of the same period would be sometimes contradicted. Behind the consciousness of early poems is the consciousness of love of honor. At the point where it is not accepted and distorted in reality, it can be confirmed that it shows a sharp poetic response.
The poetic response is mainly achieved through an allegory method or a space of imagination. He draws those who distort true meanings into the space range of poetry. Then, he takes the method of indirectly mocking and booing (揶揄). When he feels that it is difficult to adjust the situation for love of honor, he uses the space of imagination. Through this, the imaginary reward is pursued by expressing the maximum value of the imaginable maneuvering (功業). However, the way of allegory and the imaginary reward, like the two sides of the same coin, are also linked to a deep skepticism about the fleetingness of love of honor. For a full understanding of Seo Geo-jeong's poetry,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fierce response of the ego to the world in early poems. On the other hand, Seo Geo-jeong's early poems can be said to provide a clue to the exploration of rich possibilities for human understanding in a situation of sudden political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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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기문(記文) 연구

저자 : 尹載煥 ( Yoon Jae-hwa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9-15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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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 최창대는 조선 후기 소론계열 명문가의 후예로, 당대 정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지만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인물이었다. 그는 문장의 창작 원리와 창작의 상황을 구분하여 인식했고, 문장의 본질과 수식의 관계에 주목하여 본질을 중심으로 본질과 수식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장관은 근본적으로 선대까지 소론계열 문인 대부분이 지녔던 문장론과 비슷하지만 창작의 실제적인 면에서는 문장의 가치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창대는 모두 5편의 기문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는 이 중 「如傷軒記」와 「一瓢亭記」 2편을 분석의 대상으로 한다. 이 글들은 공적 건물과 사적 건물의 기문이라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지만, 글의 구성은 모두 記事 또는 記事와 寫境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議論이 감싸는 양괄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상헌기」와 「일표정기」는 구성상의 차이점도 보여준다. 특히 첫 번째 단락에서 「여상헌기」는 사냥꾼으로 설정된 가공의 인물과 나눈 대화라는 우언 또는 우화로 시작하고, 「일표정기」는 공자와 안회의 이야기와 일화라는 경전과 선현의 언행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勸戒를 중심으로 하는 공적 건물의 기문 첫 단락에 우언을 배치한 것은 비판의 기준을 명시하여 글 전체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議論을 중심으로 하는 사적 건물의 기문 첫 단락에 선현의 일화를 인용하여 배치한 것은 의론의 강조와 시비의 차단을 위한 의도적인 구성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최창대의 「여상헌기」와 「일표정기」는 建物記이면서도 건물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소홀한 반면 대부분의 내용을 議論으로 구성하였는데, 이런 서술 방법은 최창대 기문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내용과 본질을 중심으로 수식과 외면의 조화를 추구했던 최창대의 문장관에 부합하는 것이면서 그가 작문의 요령과 설득의 방법에 익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Gonryun Choe changdae was a descendant of a prestigious soron faction fami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o was active in the center of the political world of the time, but was a literaryly outstanding figure. He recognized the creation principle of sentences and the situation of creation by distinguishing them, and focu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ssence of sentences and ornamentation, and pursued harmony between essence and ornamentation, focusing on essence. In this regard, his sentence view is fundamentally similar to the sentence theory that most of the soron faction writers had, but in the practical aspect of creation, he has taken a step further to the value of the sentence. Choe changdae left five gimuns, and in this article, two of them were analyzed. These gimuns differ in that they are gimun of public and private buildings, but the composition of the writings consists of a biscuit type composition that is surrounded by argument around the articles or landscape descriptions. However, 「Yeosangheongi」 and 「Ilpyojeonggi」 show the difference in composition. In particular, in the first paragraph, 「Yeosangheongi」 begins with the a fable or allegory of conversation with a fictitious figure set as a hunter, and 「Ilpyojeonggi」 begins with the quote of scriptures and prescient words and deeds of Confucius and Anhoe. The arrangement of a fable in the first paragraph of the public building gimun is to maintain the tension of the entire article by specifying the standard of criticism, and the placement of the ancient sage's quotation in the first paragraph of the private building centered on the argument is thought to be an intentional composition method for the emphasis of the righteous and the blocking of the argument. Choe changdae's 「Yeosangheongi」 and 「Ilpyojeonggi」 are building gimun, but the mention of the building itself is neglected, and most of the contents are composed of arguments. This description is characteristic of Choe changdae gimun. This figure is consistent with the sentence of Choe changdae who pursued harmony between ornamentation and exterior, focusing on contents and essence, and it means that he was familiar with the technique of writing and the method of persu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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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북곽(北郭) 서명보(徐命普)의 『북곽실기(北郭實記)』 연구

저자 : 朴英鎬 ( Park Young-ho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1-18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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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대구출신인 북곽 서명보와 같은 효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찾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24년 동안 부친의 병환을 간호했을 뿐 아니라 부친에게 시탕하면서 병증의 경중과 의약의 종시는 물론 문병한 인사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는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거상하면서 겪었던 일과 조문한 인사 또한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서명보의 생애는 오롯이 부친을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5세에 부친이 풍병을 앓기 시작하자 가산을 포기하고 24년 동안 부친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한 시탕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집안의 모든 생활에서는 부친의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원근의 사람들이 문병을 오면 항상 넉넉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부친이 돌아갔을 때 그의 나이가 58세의 고령이었지만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탈상한 이후에는 매월 초하루에 부모의 산소에 성묘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북곽실기』는 서명보가 「親患問病錄」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한 일기를 후손들이 부록을 추가하여 건곤 두 권으로 편찬한 필사본이다. 『북곽실기』 제1권에는 「侍湯日記」와 「居廬日記」가 수록되어 있으며 제2권에는 「附錄」이 수록되어 있다. 두 일기의 기록을 연수로 합산하면 도합 28년이며, 기록된 일수는 2,371일이고, 방문한 인사는 1,904명이나 된다. 「부록」은 世系, 年譜, 啓狀草, 儒狀, 行狀, 墓碣銘, 焚黃時慶席韻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탕일기」에는 1738년 10월 20일부터 시작하여 1761년 10월 4일까지 24년 동안 복용한 탕약과 문병한 인사들을 기록하였다.
「시탕일기」는 매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병증에 변화가 있거나 처방한 약제가 있거나 문병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니 일종의 看病日記이자 問病日記라 규정할 수 있다. 「거려일기」는 1761년 12월 13일부터 시작하여 1766년 3월 21일까지 6년 동안 거상한 내용과 조문한 인사들을 기록하였다. 「거려일기」또한 날마다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조석으로 곡한 사실이나 조문한 인사, 탈상한 이후의 성묘한 사실 등을 기록하였으니 居喪日記이자 省墓日記로 규정할 수 있다.


Such dutiful son as Bukkwak(北郭) Seo-Myeongbo(徐命普), who was a native of Daegu in the late Joseon Dynasty, will not be easily obtained even if it is found in the history of the all ages and countries. Not only did he care for his father's illness for 24 years with great devotion, but he also thoroughly recorded the symptoms of a disease and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a medicine, as well as the people who had visited his father, while administering a medicine to his sick father. After his father's death, he built a thatched cottage next to the grave and mourned at the grave of his father for two years. He also recorded all of the things which he had suffered in being in mourning and all the condolers.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Seo-Myeongbo's life was only for his father. At the age of 35, when his father began to suffer from palsy, he gave up his family property, and devoted all his devotion to treating his father's illness for 24 years. In every family life, the focus was on relaxing father's mind and body, and when the people from places both near and far came to visit, he always treated them generously. When his father passed away, he was old age of 58, but he built a thatched cottage next to the grave and lived there by mourning his father for two years. After finishing mourning, he did not forget to visit his parents' graves on the first day of every month.
『BukkwakSilgi(北郭實記)』 was a manuscript compiled by the descendants in two volumes Geon(乾) and Gon(坤) by adding an appendix to the diary titled 「Chinhwanmunbyeonglok(親患問病錄)」 written by Seo-Myeongbo. In the first volume of 『BukkwakSilgi』, it contains 「SitangIlgi(侍湯日記)」 and 「GeolyeoIlgi(居廬日記)」, and in the second volume contains, it contains 「Appendix(附錄)」. The total number of years in the records of two diaries was 28 years, number of days recorded was 2,371 days, and the number of visitors was 1,904. 「Appendix(附錄)」 consists of Genealogy(世系), Chronology of his life(年譜), Gyejangcho(啓狀草), Yujang(儒狀), Haengjang(行狀), Myogalmyeong(墓碣銘), and Bunhwangsi gyeongseokun(焚黃時慶席韻).
In the 「SitangIlgi」, the medicines taken and the people who had visited were recorded, for 24 years from October 20, 1738 until October 4, 1761. Although 「SitangIlgi」 was not recorded every day, it was recorded without exception in the case of changes in the condition, prescription medicine, or people who visited. So, it could be defined as a kind of GanbyeongIlgi(看病日記) and MunbyeongIlgi(問病日記). In the 「GeolyeoIlgi」, the contents of being in mourning and the people who had condoled were recorded, for 6 years from December 13, 1761 to March 21, 1766. 「GeolyeoIlgi」 was also not recorded every day, but it recorded the fact of crying in the morning or evening and condolers and the fact of visiting his parents' graves after finishing mourning. So, it could be defined as a kind of GeosangIlgi(居喪日記) and SeongmyoIlgi(省墓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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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연석(燕石)』 소재 서발류(序跋類) 산문(散文)을 통해 본 유언호(俞彦鎬)의 출처관과 문장론

저자 : 朴基誠 ( Park Gi-seo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7-21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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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止軒 俞彦鎬는 영ㆍ정조의 정계에서 활발한 행력을 남긴 이유로 정치가로서의 연구 접근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문집 『연석』을 살펴보면 문학가로서의 행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문인으로서의 연구 접근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 중 序跋類 散文은 집필 대상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 및 자신의 견해를 잘 담아내고 있는데, 함축성을 지닌 글 속에서 유언호의 정치관ㆍ출처관ㆍ문학관ㆍ문장론 등을 여실히 살필 수 있어 정치가와 문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유언호는 영조와 정조를 보필했다. 하지만, 정계에서 처세하는 모습에는 차이를 보였다. 유언호는 義理를 강조하며 일생을 살아갔다. 영조의 탕평은 측근 중심의 탕평이라고 반대 의사를 표출하며 자주 사직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두 차례의 유배를 다녀왔다.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사제지간을 맺고 있었으며, 의리탕평 운영을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출사하여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좌의정이라는 높은 관직에서 '그칠 줄 알고, 만족할 줄 안다.'라는 말을 실천하며 '處'를 단행한 것은 義理와 부합하지 않는 상황 때문이었다. 두 정계에서 처세하는 모습에는 차이를 보였으며, 오로지 義理를 관철했던 모습에서 유언호의 출처관을 '의리의 중시와 則止의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언호는 작문에 있어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전인의 문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조건은 있었다. 바로 작가의 재량에 맞는 새로운 글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옛 문장이나 옛 문인, 그리고 변함없는 옛 경전을 철저히 통달해야 된다는 전제이다. 실학시대 연암그룹과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를 유지하던 유언호는 일찍부터 견지하던 자신의 문장론을 주변 문인들에게 전파했을 가능성이 많으며, 당시 문풍 형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주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There have been many academic approaches towards Chukjiheon Yu Eon-ho as a politician as he left records of an active political career during the political establishments of King Jeongjo and King Yeongjo. However, observations made of 『Yeonseok』, which is a collection of his literary works, clearly show that he also had a career as a person of literature. Prefaces are summaries of book contents. They include diverse opinions such as literary views, views on official posts, and academic views according to different book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Therefore, their literary styles are more connotative and clearly display the viewpoints of writers regarding the relevant content. The preface of 『Yeonseok』 also embodies the political views, views on official posts, literary views, and views on syntax of Yu Eon-ho. Yu Eon-ho assisted both King Jeongjo and King Yeongjo. However, his conduct of life during their political reigns showed some differences. Yu Eon-ho lived his life with an emphasis on proper logic. He often demanded the resignation of Yeongjo, expressing opposition towards the fairness of Yeongjo, claiming that it is fairness that centers on his aides and because of this, he was banished twice. He had a teacher-student relationship with Jeongjo when he was crown prince and as he practiced logical fairness, he actively went into government service and demonstrated his abilities. However, he made the decisive action to 'resign from his post and reside in the countryside', practicing the words of 'knowing enough to stop and knowing enough to be satisfied.' Here, the views on official posts of Yu Eon-ho can be considered to place importance on proper logic and to be the fulfillment of quick wisdom. Yu Eon-ho always made new attempts with his writing. Instead of imitating his predecessors, he tried to write in his own unique and individual ways. However, there were conditions. They had to be modified according to writer discretion based on sentences of the past, literary people of the past, and steadfast scriptures of the past. This exists along the line of Beopgochangsin (creating new modeled after the old) of Yeonam Park Ji-won of the Silhak Era. Yu Eon-ho associated with many people and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he spread his views on syntax to literary people who surrounded him and this can be viewed to have affected the development of literary styles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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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원(芝園) 강세륜(姜世綸)의 『북정록(北征錄)』으로 본 북관(北關)의 인문지리(人文地理)

저자 : 方賢娥 ( Bang Hyun-a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15-24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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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北征錄』 1冊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北征錄』은 芝園 姜世綸(1761~1842)이 61세인 1821년에 함경북도 鍾城지방의 府使로 임명을 받고 39일 동안 2,505리의 경로 중에 경험한 국토의 奇觀과 勝景을 체험하고 쓴 한시집이다. 그는 서울-경기-강원-함경도의 여정과정에서 견문한 정감을『北征錄』에 담았고, 1822년 11월까지 1년여 간 그곳에서의 생활과 풍습들은 뒷부분의 「鍾山雜錄」으로 포착하였다.
姜世綸은 近畿 南人의 대표주자인 菊圃 姜樸(1690∼1742)의 손자로, 鄭宗魯의 門下에서 修學하며 退溪와 眉叟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尙州지역을 중심으로 '秋水社', '竹雨社', '悅雲社'라는 詩社活動을 하며 南人 文壇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지만 지금까지 그의 생애와 문학작품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학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문인이다.
『北征錄』의 시들은 北關을 향해 가면서 목도한 奇觀들과 지역의 역사적 전고와 유래를 확인하면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듯한 山水詩로써 자연의 생생함을 보여준다. 강세륜은 북관민의 삶의 疾苦와 함께 歲時風俗에 주목하는가 하면, 북관민의 강인한 기질을 밝게 포착하여 함경도 지역의 세태와 풍속, 국토의 역사, 변방의 사적과 인물 등 北關의 人文地理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비록 姜世綸이 북관민의 삶을 힘들게 하는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와 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삶을 다양한 모습으로 담아내려는 자세와 시적 시선은 중요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당시에 洪良浩와 같은 소론계 정치인들로 대표되는 작가들의 북관 기행이 주가 되었는데, 19세기 초 남인 문인으로서 北關의 鄕土와 風俗을 노래하였다는 점은 의의가 있다.


This paper is a study on a book titled Bukjeongrok stored in Gyujanggak. Bukjeongrok is a poetry written by Jiwon Kang Se-Ryun in Chinese characters in 1821 when he was 61 years-old, about unique sights and beautiful scenery of the country that he experienced for 39 days on the way to the place of assignment as supervisor of Jongsung, Hamkyungbukdo province, 1,000km away from Seoul. He put his personal impressions experienced on the journey from Seoul to Hamkyungdo via Gyeonggi and Gangwon, in this book 'Bukjeongrok' and added the life and customs of that place experienced for one year to Nov. 1822 in the book, Jongsanjaprok.
Kang Se-ryun is a grandson of Kukpo Kang Park, a representative writer of Geunki-Namin literary group and studied under Jeong Jong-ro and inherited the ideology of Toegye and Misu. He did poetic activities such as Chusoosa, Jukoosa, Yeolwoonsa around Sangju area and influenced largely to the Namin literary group but remained as an unnoticed writer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s his life and literary works were poorly studied till now.
The poems of Bukjeongrok identify the unique sights seen heading toward Bukkwan and the historic records and origins of the regions and show the vividness of nature through a landscape poem as if looking at a picture. Kang Se-ryun would pay attention to the seasonal customs as well as the suffering of life of Bukkwan people and catch the strong temperament of Bukkwan people brightly and suggest the human geograpy of Bukkwan such as the social conditions and customs of Hamkyungdo region, the history of national land, the historic sites and persons on the border area, in various ways..
Even if Kang Se-ryun failed to solve the chronic social ills and regional problems that made the life of Bukkwan people hard, his attitude and poetic view of point to put their lives in various ways can be evaluated as important accomplishment. At that time, the trip to Bukkwan by writers who represent Soron group such as Hong Ryang-ho was so popular but Kang Se-ryun expressed the local cultures and customs of Bukkwan in poetry as a literary writer of Namin group in the beginning of 19th century, which can be said to be meaning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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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의 전(傳) 연구

저자 : 金鍾旼 ( Kim Jong-mi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51-27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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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淵泉 洪奭周의 古文論이 실제 그의 산문 작품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자 「關北烈女傳」, 「元烈士傳」 그리고 「吉孝子傳」의 내용을 소개하고 문장표현 상의 분석을 행하였다. 관북열녀는 남편의 죽음 후 返葬을 실행한 비범한 인물이었고, 元倬은 深河 전투에서 정의롭게 활약하였으나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吉昌擧는 허황되지 않은 孝와 忠을 실천하였던 인물이었다. 연천은 그가 살던 시대의 풍속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목도한 후 忠·孝·烈이라는 유교의 덕목을 논함으로써 당시 사회적으로 해이해진 正義의 가치를 提高하려고 하였다. 연천의 세 작품을 文章作法의 차원에서 조명한 결과, 동일 구문의 반복과 대구문 사용을 통해 文從辭順의 이론을 구현하고 省文之法을 실천하여 簡潔謹嚴의 미학을 성취한 실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paper describes the contents of 「a story about an woman of high principle from Kwanbuk」, 「a story about Mr.Won, a patriot」, and 「a story about Mr.Gil, an exemplary son」 in order to focus on how Yeoncheon Hong Suk Ju's theories of sentences is realized in his masterpieces. An woman of high principle from Kwanbuk was an extraordinary person who returned to her hometown with a coffin on her head after her husband's death. A patriot named Won Tak fought justly at the Battle of Sarhu, but was not honored by the state. An exemplary son named Gil Chang Geo was a man who practiced filial piety and loyalty. After seeing that the customs of his time were going wrong, Hong Suk Ju tried to raise the value of righteousness that had become socially undermined at the time by discussing the virtue of Loyalty, filial piety and fidelity. He realized the theories of sentences through repetition of the same phrase and use of matched sentences and achieved a concise aesthetic by practicing the way of omit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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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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