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update

Dongbang Korean Classics

  • : 동방한문학회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6-668x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2)~78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947
동방한문학
78권0호(2019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연호 이주환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

저자 : 강민구 ( Kang Min-koo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49 (4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경상남도 거창에서 일제의 침탈에 殉節로 저항하여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連湖 李柱煥[1854∼1919]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것이다.
『연호유고』의 제일 앞에는 宋在晟의 「連湖遺稿序」가 있고 제일 뒤에는 연호의 從姪 李德基의 「連湖遺稿跋」이 있다. 『연호유고』의 내지에는 '連湖實記'로 표기되어 있다. 이 책은 크게 연호의 저작과 연호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타인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후자는 부록으로 처리되어 있다. 연호의 저작은 10수의 시와 7편의 서간, 1편의 자서, 1편의 제문이 있으며, <雜著>에 「師門問答」과 「庚戌記事」가 들어 있다. 그러나 「경술기사」는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연호의 작품이 아니므로 부록에 편입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연호의 현전하는 저작은 모두 20편이다.
宋在晟이 쓴 「연호유고서」는 1948년에 지어졌고 『연호유고』가 1962년에 발간되었으니 준비 및 제작 기간이 무려 14년이 걸린 셈이다. 송재성은 연호의 작품은 문집으로 엮어 후대에까지 남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작품자체만으로도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명절과 烈의 실상이 있어 칭송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한편 「連湖遺稿跋」은 「연호유고서」보다 연호의 저작과 『연호유고』의 편찬 경위에 대한 기술이 다소 상세하다. 이 글에서는 연호가 시문 창작을 적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이 대부분 시의를 저촉하는 내용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불에 태워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습된 것이 겨우 열에 한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연호유고』에는 그의 작품 중 극히 일부가 겨우 수록되었다고 하겠다.
『연호유고』에 수록된 시는 모두 10수로 대단히 적지만 그나마 연호의 문학적 감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스럽다 하겠다. 그는 도학의 연원과 계승을 소재로 삼아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의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였고, 자신의 거처와 환경을 소재로 삼아 그것에 삶의 지향과 의미를 투사하였다. 그리고 애도시에서는 애상의 정서를, 맹세시에는 결연한 의지를, 절명시에는 비장미를 녹여 넣었다. 그의 산문도 10편에 불과하지만 간결하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선명히 표현하였다. 또 유려하면서 수사적인 특성을 겸비하고 있기에 그의 시와 함께 一團의 문학 세계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주환의 문학 작품은 소모적 감정의 유로를 자제하되 소재에 적절한 문학적 정서를 표출함으로써 특유의 문학적 미감을 형성하였다. 또 현학적 전고와 난삽한 표현을 배제하고 선명한 문법과 효과적인 수사법을 구사함으로써 가독력과 說服力을 높였다. 이는 이주환이 속한 당대 기호학맥 사인들의 문학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This paper analyzes the literary world of Yeonho(連湖) Lee ju-hwan(李柱 煥)(1854~1919), who caused a great repercussion at the time by dying in defense of his chastity, resisting the Japanese imperialism in Geochang, Gyeongsangnamdo.
At the forefront of 『Yeonho-yugo(連湖遺稿)』, there is Song Jae-sung's 「Yeonhoyugoseo(連湖遺稿序)」, and at the back, there is 「Yeonhoyugoseobal(連湖遺稿跋)」 which was written by a male cousin's son Lee Deok-gi(李德基). It was written as 'Yeonhosilgi(連湖實記)' inside front cover of 『Yeonho-yugo(連湖遺稿)』. This book was largely composed of other people's writings about the literary works, the life and death of the Yeon-ho(連湖). And the latter was treated as an supplement. There were 10 poems, 7 letters, 1 author's preface, 1 funeral oration, and it contained 「Samun-mundab(師門問答)」 and 「Gyeongsul-gisa(庚戌記事)」 in < Miscellaneous writings(雜著) >. However,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contents of 「Gyeongsul-gisa(庚戌記事)」, it is reasonable to include it as an supplement since it was not a work of Yeon-ho. Therefore, his current works are all 20 pieces.
Song Jae-sung's 「Yeonhoyugoseo(連湖遺稿序)」 was written in 1948 and 『Yeonho-yugo(連湖遺稿)』 was published in 1962, so it took 14 years for preparation and production. Song Jae-sung said that the works of Yeon-ho were valuable enough to be left to next generations by making them into a collection, since, not only was the literary work itself worthy of being able to know his personality, but it was enough to praise it because of the fact of the integrity and the force. On the other hand, the 「Yeonhoyugoseobal(連湖遺稿跋)」 which was written by a male cousin's son Lee Deok-gi(李德基) was somewhat more detail than 「Yeonhoyugoseo(連湖遺稿序)」 about descriptions on the works of Yeon-ho and the compilation of 『Yeonho-yugo(連湖遺稿)』. In this article, Yeon-ho did not write the poetry less, but most of his writings were contrary to the meaning of the age, so the people at that time burned in the fire. And it is said that only about one or two in ten had been settled. In 『Yeonho-yugo(連湖遺稿)』, only a small part of his manuscripts were recorded.
The number of poems in 『Yeonho-yugo(連湖遺稿)』 is very small at 10, but it is very fortunate to be able to understand the literary sensitivity of Yeon-ho. He expressed his pride in the legitimacy of Korea's culture and history by using the origin and succession of moral philosophy as materials, and he projected the orientation and significance of life on his habitation and environment. He melted the emotions of mourning in mourning poetry, a determined willingness in his oath poetry, and a tragic beauty in death poetry. Although his prose is only ten, he expressed simple but clearly what he wanted to convey. In addition, because his prose had a flowing and rhetorical characteristic, it could be said that his prose formed a literary world with his poetry.
Lee ju-hwan's literary works created a unique literary aesthetic by expressing the appropriate literary sentiment in the material while refraining from the flow of consuming emotion. In addition, he avoided pedantic authentic precedents and difficulty expressions, and improved readability and persuasive power by using clear grammar and effective rhetoric. This was a common feature in the literature of Kiho School to which Lee ju-hwan belongs.

KCI등재

2제문(祭文)을 통해 본 이주환의 삶과 죽음의 가치

저자 : 김영주 ( Kim Young-ju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1-7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祭文의 분석을 통해 連湖 李柱煥의 삶과 죽음의 價値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주환이 강상의 고수를 위해 처절한 죽음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이한 출생담에서 예견되는 그의 특별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성장기의 그가 보여준 효와 우애, 스승에 대한 섬김에서 드러나는 투철한 도덕의식도 자리한다. 그의 학문 연원에 뿌리 깊게 자리한 義理精神의 실천적 영향도 간과할 수 없으니 그의 스승인 송병선과 송병순이 모두 자결하여 의리와 강상을 실천한 것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효와 충, 인과 의의 근본적인 상호작용과 일맥적인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속에 그것을 투철히 실천하고자 한 이주환의 실천적 도덕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국권을 상실한 시기에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강론회를 개최하여 '강상'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강론 개최가 점차 불가해졌고, 담론적 이해의 확산 보다는 과감한 실행이 가지는 영향력을 파악하게 되었다. 국가의 존망, 도의 존속, 강상의 유지에 긴요한 존재인 국왕의 사망을 계기로 처절한 자기희생을 통해 강상 수호의 의지를 실천하였다.
이주환의 예견대로 그의 순절은 지역 유림에 엄청난 충격을 끼쳤다. 그러나 그가 염원하던 강상의 중요성에 대한 유림의 자각과 그것을 동력으로 하는 민족운동의 움직임이나 연속적인 자결로 일제에 투쟁하는 강렬한 움직임이 연계되어 나타나지는 않았다. 순절과 강상의 확립에 대한 관련성을 이해하는 인물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유림은 이주환 개인 차원의 의리정신의 실천으로 이해하였다. 또 일부의 유림에서는 그마저도 의례적으로 수용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This paper aims at a study on the value of Lee Ju-whan(李柱煥)'s life and death from a message of condolence.
The reasons why he was able to die in order to adhere to ethics are his curious birth story, the filial piety and fraternity he showed during his growing years, and a strong sense of morality in respect of his teacher. And the practical effects of the moral spirit deeply rooted in his academic motivation can't be overlooked. His teacher, Song Byeong-seon(宋秉璿) and Song Byeong-sun(宋秉珣).
His teacher, Song Byeong-seon(宋秉璿) and Song Byeong-sun(宋秉珣)'s suicide for loyalty and morality was an important factor in his martyrdom. Lee Ju-whan(李柱煥)'s martyrdom shocked Confucian intellectuals in the area. But his death did not lead to a national movement or a strong resistance movement against Japan. There were only a few Confucian scholars who understood the link between martyrdom and loyalty. Most Confucian scholars understood his martyrdom as a practice of moral sanity on a personal level. Some Confucian scholars understood his martyrdom as a moral ritual.

KCI등재

3거창(居昌) 지역 연재학파(淵齋學派)와 연호 이주환

저자 : 정경훈 ( Jung Kyung-hu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1-103 (2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連湖 李柱煥(1854~1919)은 한말 경상남도 거창 지역의 재야 유교 지식인으로 일제의 국권침탈과 高宗의 승하 소식을 듣고 자결을 선택한 인물이다. 연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淵齋 宋秉璿과 心石齋 宋秉珣을 만나 이들의 문하에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계승받았다. 연재와 심석재는 기호지역 대표적 노론집안인 은진 송씨로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이다. 연재 송병선을 종장으로 삼은 연재학파는 연재와 심석재의 자결로 항일의지를 밝히는 강경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연호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현실화 되자 스승의 유지를 따라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바쳐 의리를 지키겠다는 '致命受志'의 면모를 보여준 인물이다.
연호는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의 억압적 침탈과 강점시기에 굴복을 거부하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연호는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며 자결의 방법을 통해 대한민의 의리를 잊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연호가 활동한 경상남도 거창 지역은 연재학파의 주요 거점지역이었다. 연재학파의 문인록인 『溪山淵源錄』에 수록된 1,100명의 거대한 문인 집단은 주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고 황해도, 함경도 등 북쪽 지역에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충청도 지역이 연재학파의 근원지였지만 오히려 경상도 지역에 연재학파 문인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경상도 지역 중 거창은 46명의 문인이 있어 단일 지역으로는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창은 인접한 삼가, 합천 지역 문인과 함께 연재학파의 경상도 중요 거점 지역이었다.
연재가 1901년 9월 거창의 병산서재와 세심대에서 각각 강회를 열었다는 사실로 본다면, 연재학파는 1901년 전후에 이미 상당규모가 거창 지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산연원록』을 통해 연호가 연재에게 1905년 처음 찾아 갔음을 확인하였다. 거창 지역의 문인들이 연재학파에 소속된 시기를 살펴보면, 1865년을 시작으로 1860년대 3명, 1870년대 1명, 1880년대 5명, 1890년대 24명, 1900년대 13명 등으로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전체 80%의 연재문인이 형성되었다. 연호가 1905년에 연재학파에 들어간 시기도 거창 지역에 본격적으로 연재학파가 성립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연호는 연재보다는 심석재와 돈독한 사제의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연호가 연재의 자결 9개월 전에 집지했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경상도 지역은 이 지역 문인들의 규모와 특히 거창 지역의 문인들의 분포를 통해 연재·심석재 사후 연재학파의 새로운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창은 연재와 심석재의 위패 봉안과 『연재집』의 책판을 보관한 <연재선생문집장판각>이 있는 성암사의 존재 등으로 연재학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연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연재학파의 중요 계승자 중에 한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In late Joseon Dynasty, Yeonho Lee Joo-hwan(1854~1919) is out of power confucianist in Geochang area. He chose suicide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when the country collapsed. The reason for suicide was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He was the successor of the important spirit of Yeonjae-school. Yeonjae-school had many disciples nationwide. It is a school created by Song Byung-sun and his brother Song Byung-soon. Lee Joo-hwan inherited the anti-Japanese spirit of Song Byung-soon and Song Byung-sun.
Lee Joo-hwan revitalized the school around his home town, Geochang area. Many of Song Byung-sun many disciples are distributed in the geochang area. It is also the place where literature has been published since Song Byung Sun died.
『Gyesanyeonwonlog』 is a record of Yeonjae-school. There are 1,100 disciples recorded in this book. The disciples in this book are distributed throughout the country and can be seen to be a very large school. Lee Joo-hwan was a member of an important school in the Geochang area of Kyungsangdo. He was able to become an important disciple because he faithfully succeeded the spirit of the teacher. The spirit is a resistance to Japanese imperialism and shows its commitment to suicide. His suicide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school and showed a true Confucian intellectual.

KCI등재

4연호 이주환과 연재학파(淵齋學派)의 의리정신(義理精神)

저자 : 신태영 ( Shin Tae-you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5-136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連湖 李柱煥은 우리 역사상 가장 엄혹한 시기를 맞이하여, 殉義로 자신의 의리정신을 실천하였다. 그의 납세 거부와 도를 지키기 위한 순절은 그 자체가 의리정신의 실천이어서 다른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글이 없으면 그의 숭고한 뜻을 드러내기도 본받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본고는 부득이하게 이주환이 속한 연재학파를 통해 그의 의리정신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주환은 스승 송병선을 매우 尊慕했다. 이주환이 스승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義理'였음을 그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주환은 도를 지키고자 고종황제가 붕어한 이후 자귀로 자신의 목을 수차 찍어 자결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처럼 강개한 의기를 지닌 이주환이 왜 의병에 합류하거나 망명을 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에 학파의 성격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기호학맥 내의 여러 학파들은 위정척사에 있어서는 대체로 비슷한 입장이었지만 의리를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경향을 보여주었다. 화서·노사 학파가 의병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擧義掃淸의 자세를 견지한데 비해, 고산·간재 학파는 의병에 매우 소극적으로 임해 나라가 망해도 도는 보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入海守舊를 단행하여 去之守舊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비해 이주환이 속한 연재학파는 의병도 은둔도 아닌 현실 속에서 도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다가 자결하는 自靖遂志(致命遂志)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렇게 학파별로 의리를 행하는 방식이 달랐던 이유를 각 학파의 학설 중에서도 특히 心論의 차이에서 찾아보았다. 간재학파는 기호학파의 기존학설인 性卽理와 心則氣를 더 강화시켜, 심은 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性尊心卑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화서·노사 학파는 心合理氣를 인정하지만 결과적으로 心主理說을 주장하여 마음속의 리의 역할 강조하였다. 연재학파는 심합리기를 인정하면서도 심즉기의 전통적인 학설을 유지하여, 사실상 두 학파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심즉기를 좌표의 왼쪽에 심즉리를 좌표의 오른쪽에 배치했을 때, 심즉기를 강하게 주장할수록 소극적으로 행동했고 심즉리를 강하게 주장할수록 적극적으로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학파별로 의리를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던 이유가, 바로 심론의 차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파의 성격이 그 행동까지 제약했던 것이다.
이주환이 춘추대의에 입각한 존화양이의 강경한 의리정신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의병투쟁이나 해외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많은 변수가 있어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학문적인 면에서 그 이유를 찾자면, 적극적인 행동보다는 강학과 저술로 후학을 양성하여 나라와 도를 유지하고자 한 연재학파의 학설을 깊이 체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t the most difficult time in our history, Lee Ju-hwan(李柱煥) practiced his spirit of righteousness(義理精神) through suicide. This paper intends to understand his spirit of righteousness through Lee Ju-hwan's Yeonjae school(淵齋學派). In this process, I examined the theories of the various schools in the giho school(畿湖學派) and the way of practicing spirit of righteousness.
As a result, the reason why each school had different methods of conducting a spirit of righteousness was because of the differences among the theories of each school. The more he insisted on simjeuggi(心卽氣), the more passive he was. The more you assert simjeugli(心卽理), the more you act.
And even though Lee Ju-hwan had a hard - spirit of righteousness, I wondered why he did not actively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military struggle or exile abroad. It has a lot of variables, so it can not be predicted. However, to find the reason for the academic aspect, he tried to maintain his country and his Tao(道) by education and writing rather than by taking active action. But it would have been because he could not keep the country and the Tao anymore, and he deeply learned the theory of the serial school to fulfill his responsibilities by the death.

KCI등재

5연호 이주환의 삶에 대한 당대의 평가 -만사(輓詞)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박정민 ( Park Jeong-mi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7-168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李株煥(1854∼1919)은 1919년 高宗의 승하에 끝내 비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비운의 憂國之士이다. 그는 淵齋 宋秉璿(1836∼1905) 및 心石齋 宋秉珣(1839∼1912)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평생 處士로 지내며 왜정의 간섭과 강압에 홀로 저항하였다. 그의 자결을 추모하기 위해 총 469명이 566수의 만사를 남겼는데, 이는 『연호유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본인의 저작을 압도할 만큼 많은 만사의 수량은 연호의 죽음이 얼마나 특별하고 파급력이 큰 사건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만사에서 연호는, ①가정과 스승의 가르침을 체득한 成仁의 처사 ②군주와 명운을 함께한 忠義의 열사 ③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持節의 선비 ④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矜持의 표상으로 형상화되었다.
연호 만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달리 수량이 많고 작자의 층위가 다양하다. 둘째, 내용상 개인적 애도보다는 사회적 평가가 극히 우세하다. 셋째, 자연물·韓中 인물 등 기존의 모티프와 娥林·南昌·連湖·連橋·洗心臺·枕流亭 등 연호를 지칭하는 새로운 모티프가 함께 등장한다. 이러한 新·舊 모티프의 교직 양상은 한반도에 '순국'이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해왔으며, 이는 민족의 자긍심을 유지시키는 매개임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다.


Lee Ju-hwan(李株煥, 1854∼1919) was a tragic scholar who committed suicide with a rage of grief for the death of King Gojong in 1919. Learning from Yeonjae Song Byeong-seon(淵齋 宋秉璿, 1836∼1905) and Simseokjae Song Byeong-sun(心石齋 宋秉珣, 1839∼1912), he had devoted himself to studying without entering the government and resisted alone against the interference and pressure in the reign of Japan. To honor his suicide, 469 scholars left 566 funeral odes, which account for more than half of the anthology 『Yeonho Yugo(連湖遺稿)』. The massive quantity of their funeral odes exceeding the author's writings makes us imagine how influential Yeonho's death was in those days.
In the funeral odes, Yeonho is described as ⅰ) a scholar of virtue living in seclusion who had mastered the teachings from teachers and home, ⅱ) a patriotic martyr with loyalty who had thrown in his lot with the king, ⅲ) a scholar with fidelity and constancy who sacrificed himself for his beliefs, and ⅳ) a symbol of pride who had kept the honor of the people.
The features of the funeral odes for Yeonho are as follows. First, the quantity is exceptionally great and there are a broad spectrum of writers. Second, social evaluation is much more superior to personal mourning in terms of those contents. Third, new motifs, such as Arim(娥林), Namchang(南昌), Yeonho(連湖), Yeongyo(連橋), Sesimdae(洗心臺), and Chimryujeong(枕流亭), are used to call Yeonho, along with the existing motifs, such as natural objects or figures in Korea or China. This mixed use of new- and old motifs is presumed to be a literary setting in order to emphasize that patriotism on the Korean Peninsula has always existed beyond time and space and it is a medium which keeps the people's pride.

KCI등재

6연호 이주환의 서간문(書簡文)을 통해 본 그 학적 자세

저자 : 신상필 ( Shin Sang-phil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9-188 (2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연호 이주환의 학문적 토대와 배경을 그의 서간문을 통해 그려진 일상의 모습 속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근대 초기의 전근대적 학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은 성리학이라는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을 근거로 외세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 유림들의 현실에 대한 반응은 신지식을 수용한 지식인들의 애국계몽을 통한 자강의 논리와는 다르기도 같기도 하다. 적어도 자주적인 의식으로 국가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일정한 차이를 지녔다.
이 점에서 유학자들은 倭와 胡로 인식한 대외 세력에 대해 우리 자신의 정당성과 자주권을 천명함과 동시에 그들의 부당함을 적극 밝혀 배척하려는 위정척사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正邪라는 이분법적 논리라는 점에서 중도적 타협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기에 극단의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연호는 그런 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는 유학의 仁義로 대표되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현실 생활에서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자의식의 발현이기도 하였다.
연호는 연재학파와 연계되는 사상적 근거를 스승 심석재로부터 익혔으며, 어려서부터 실천적 윤리를 강조한 『소학』의 학습과 그 직접적인 실행 과정을 통해 삶의 논리로 체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천적 자세는 일찍이 혼란스러운 과거제도의 포기에서 은거와 養親으로 삶의 지향을 결정한 것에서 확인된다. 그에 이어 외세와의 연이은 조약체결과 문호 개방에 따른 대한제국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적 면모를 예의주시하며 저항하고자 하였다. 그에 대한 저항의 과정과 결과가 국가에 대한 세금을 거부하고, 군왕의 부재를 이유로 자결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근대화의 과정에 불거진 많은 실패와 좌절, 희망과 도전을 거쳐 지금에 이를 수 있었고, 그 과정에 연호를 비롯한 다수의 실천적 지식인들의 삶이 존재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In this paper, I tried to find out the academic foundation and background of Lee, Ju-hwan. Lee in the daily life drawn through his epistles. The intellectuals with pre-modern scholarly tendencies in the early modern period were responding to foreign taxation based on their ideological basis of neo-Confucianism. The reaction to the reality of modern Confucianism is also different from the logic of self-enlightenment through patriotic enlightenment of intellectuals who accept new knowledge. At least in an effort to correct the fate of the state with an independent consciousness, but with a certain difference in its method.
In this regard, Confucian scholars assert their own right and autonomy for the foreign powers recognized as Wa and Hu, and at the same time, insist on the logic of the ruling party to propose and reject their injustice. In the sense that it is a dichotomical logic of the righteous wrong, there was no middle compromise, so there were many cases of extreme decisions. Yeonho is one of them. And this was also the manifestation of self-consciousness that clearly recognizes the right and wrong represented by the ethics of Confucianism and at the same time the ethics of human beings to move from reality to practice.
Yeonho has learned from the master stone stone that is linked with the serial school and has embraced the logic of life through the learning and direct execution process of the elementary school which emphasized practical ethics since childhood. These practical attitudes are confirmed by the determination of the life orientation as the retirement and the nurture in the abandonment of the confusing past institution. In the process of the conclusion of the treaty with the foreign countries and the transition to the Korean empire by the opening of the door, the Japanese government sought to resist the detachment of Japanese imperialism. The process and outcome of the resistance against him has been revealed to the world by rejecting taxes on the country and choosing self-determination on the grounds of the absence of the prince. Through this, we must remember that there were many failures, frustrations, hopes and challenges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and that there was a lot of practical intellectuals, including Yeonho, in the process.

KCI등재

7연호 이주환의 생애와 「이주환전(李柱煥傳)」

저자 : 이군선 ( Lee Goon-se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89-214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連湖 李柱煥(1854~1919)은 조선말에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격변의 시기를 겪었으며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자결을 선택한 조선의 義士이다. 이주환은 대한제국이 망하자 일본제국주의에 복종하지 않고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으며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여 왜의 신민이 아닌 영원한 대한의 백성으로 남았다. 본고는 이주환의 생애를 재구하고 「李柱煥傳」을 분석하여 傳에서 이주환을 어떻게 형상화하였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생애에서는 이주환이 본래부터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심석재 송병순을 스승으로 섬기며 의리에 대하여 공부하였고 스승의 순의에 감동하였음과 나라가 망하였는데 새로운 세금을 거두어들이자 이에 저항한 사실과 같은 해에 태어난 고종황제에 대하여 각별하게 생각하였는데 그 황제가 승하하자 자결하는 것으로 그를 모시고자 한 것이 그의 의리관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였다. 「경술기사」와 「순의기사」를 참고하여 「이주환전」을 분석하여 이주환이 세금을 바치지 않은 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자결한 일에 대한 일화를 통해 이주환의 일생을 국가에 대한 '충', 군왕에 대한 '의', 죽음 앞에서의 '열'을 실천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민족에 의한 국가의 멸망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서도 의연히 자신의 길을 걸었던 이주환의 삶은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개인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Yeonho Lee Ju-hwan (1854~1919) was born at the end of Joseon and underwent a catastrophic period when the country was ruined, and he is a Joseon's martyr who chose to commit a suicide when he was told of Gojong's demise. Lee Ju-hwan did not submit to the Japanese Imperialism and did not pay taxes when the Korea Empire collapsed. When he heard of Gojong's demise, he committed a suicide and remained an eternal Empire subject, not a citizen of Imperial Japanese. In this paper, we reconstructed the life of Lee Ju-hwan and analyzed the Lee Ju-hwan story to see how Lee Ju-hwan was expressed in the story and what it means. In life, Lee Ju-hwan was originally a person with an upright character, and he studied the righteousness under Shim Seok-jae and Song Byeong-sun, serving them as teachers. He was impressed by the pure will of the teachers, and the fact that the country was ruined and resisted the new taxes when new taxes were allotted, and that he thought it very particular about Emperor Gojong who was born in the same year. It is confirmed that the fact that he served the emperor by committing a suicide when there was the emperor's demise was from his view of righteousness. “Lee Ju-hwan Story” was analyzed with reference to "Gyeongsul Gisa" and "Sunui Gisa", and through the anecdotes that Lee Ju-hwan did not pay taxes and that he committed a suicide on Emperor Gojong's demise, it is confirmed that he was the person who practiced lifetime loyalty to the nation, the patriot confronted with the death of king, and the righteousness to the king. The life of Lee Ju-hwan, who walked his own way in the unprecedented situation of the destruction of the nation by a different people, reminds us once again of the fact that both a nation and an individual can be happy only if there is a nation.

KCI등재

8사서(四書)의 『시경(詩經)』 인용 양상에 대한 일고찰

저자 : 우지영 ( Woo Jee-you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5-246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유학의 필독서로서 장구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四書를 연구대상으로 하여 『시경』 인용의 유형과 그 특징을 고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선 사서의 『시경』 인용 현황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사서의 『시경』 인용 현황을 '『시경』의 原義를 수용하는 경우'와 '『시경』의 원의를 변용하는 경우'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았다.
『논어』에서는 『시경』을 인용하면서 대다수의 경우 별도의 인용 표시 없이 곧바로 『시경』 구절을 노출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춘추 시대에 『시경』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賦詩言志'의 관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맹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詩曰'이나 '詩云'이라는 말로 『시경』에서 인용하였음을 명시하였고, 또 역시 대부분 문맥이 일치하는 『시경』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맹자가 논리를 개진하는 과정에서 『시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노렸음을 알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시경』 인용에서 주목할 부분은 _시경_에서 한 글자씩 摘取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유형으로, 三綱領 중의 新民과 止於至善을 설명하기 위하여 각각 '新'자와 '止'자가 들어간 『시경』 구절을 인용하는 '斷字取義'의 유형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대학』과 『중용』에서는 모두 한 장에서 연속적으로 『시경』을 인용하여 논지를 전개하고 심화시켜 나가는 특징을 보였으며, 그 출전이 『시경』임을 명확하게 표시함으로써 『시경』의 권위에 의탁하여 논리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This paper is based on the study of the whole Four Books(四書) which has exerted a long-standing influence as a must-read book of Confucianism. After classifying and presenting the formal types in the quotation of the 『Book of Odes(詩經)』, this paper is written for the purpose of examining each typical feature. For this purpose, first of all, after inspecting the current situation of the quotation of the 『Book of Odes』 in the Four Books generally, and it was divided into two cases: accepting the original meaning of the 『Book of Odes』 and transforming the original meaning of the 『Book of Odes』.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current situation of the quotation of the 『Book of Odes』 each Four books, the following points were found:
In the 『Analects of Confucius(論語)』, the majority of the cases directly exposed the 『Book of Odes』 phrases without a separate quotation mark, which allowed us to observe the custom of 'Writing a poem to express one's meaning(賦詩言志)' which delivered one's own thoughts through the 『Book of Odes』 in the Chunqiu(春秋, Spring and Autumn) Period.
In the 『Discourse of Mencius(孟子)』, in most cases, it specified that the phrases were cited from the 『Book of Odes』 with the word 'the poem said(詩曰)' or 'the poem said(詩云)', and also cited the phrases of the 『Book of Odes』 corresponding with the context. Through this, it can be seen that Mencius aimed at effect of strengthening his point of argument by relying on the authority of the 『Book of Odes』 in the process of expressing logic.
The noteworthy part of the quotation in the 『Great Learning(大學)』 was the type of developing a discussion by picking up one letter from the 『Book of Odes』. In order to explain the Sinmin(新民, renewing the people with one's own bright virtue) and Jieojiseon(止於至善, reaching the highest good and maintaining the condition) among the three Principles(綱領), I considered that the type of 'Cutting off a sentence and taking one's meaning(斷章取義)' which quoted the phrases of the 『Book of Odes』 containing 'Sin(新)' and 'Ji(止)'.
In both the 『Great Learning(大學)』 and the 『Doctrine of the Mean(中庸)』, it showed the characteristic of developing and deepening the argument by quoting the 『Book of Odes』 continuously in one chapter. And by clearly indicating that the source was the 『Book of Odes』, then it pursued the strengthening of the logic with depending on the authority of the 『Book of Odes』.

KCI등재

9서명응(徐命膺)의 농업·일용 관련 저술과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의 수용 양상

저자 : 조창록 ( Jo Chang-roc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47-266 (2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18·19세기 조선학술사에 있어서 상당히 독특한 실학적 학풍을 견지하였던 서명응에서 서유구로 이어지는 지식의 전승과 변모 양상을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그 주요 대상은 서명응의 『본사』와 『고사십이집』 그리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이다.
이 연구를 위해 우선 2장에서는 『고사신서』와 『고사십이집』의 주제별 분류와 분량을 비교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고사신서』 「목양문」의 '양잠'이 『본사』에서는 蠶史로 분리된 점, 「일용문」의 음식 분야가 『고사십이집』에서 「오륙」으로 분리되어 따로 독립된 점 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분량상으로는 전체적으로 약 98%가 증가하였는데, 특히 「농포문」과 「목양문」은 약 335%가 증가하였다.
3장에는 『본사』와 『고사십이집』이 『임원경제지』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 주제별 구성과 인용 항목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밝혀진 사실을 정리해 보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위선지」·「섬용지」·「보양지」·「상택지」·「예규지」 등의 분야를 새롭게 추가하였으며, 어업과 주거, 건강과 경제를 임원 생활의 중요 문제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본사』의 蠶史가 『임원경제지』에서 「전공지」로, '가축 기르기'에 대한 내용이 어업과 결합되어 「전어지」로 확대 개편된 점은 임원 경제의 관심 추이를 잘 보여주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또 『임원경제지』에서 인용한 『본사』와 『고사십이집』의 항목들을 보면, 서유구는 『고사십이집』에서 특히 음식과 취미생활 부문을 집중적으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ransmission of knowledge and aspect of change between the two, Seo Myeong-Eung(1716~1786) and his grandson Seo Yu-Gu(1764~1845). The paper focuses mainly on『Bonsa』 and 『Kosa-sibi Jip』 by Seo Myeong-Eung and 『Yim Won Kyung Jae Ji』 by Seo Yu-Gu.
For the study, we compared and considered 『Kosa Sin Seo』and 『Kosa-sibi Jip』in all its aspects in chapter 2. As a result, we could tell that Seo Myeong-Eung had reorganized 『Kosa Sin Seo』into 『Bonsa』 and 『Kosa-sibi Jip』 by doubling its contents.
In chapter 3, we examined how 『Yim Won Kyung Jae Ji』 by Seo Yu-Gu had managed to accept contents of 『Bonsa』 and 『Kosa-sibi Jip』. As a result, we found out that Seo Yu-Gu had cited 『Kosa-sibi Jip』 evidently in his records about cooking and commodities. Meanwhile, records including fishery, construction and commerce were newly contained in 『Yim Won Kyung Jae Ji』, especially the records about fishery fully reflects Seo Yu-Gu's own writing.

KCI등재

10당주(鐺洲) 박종(朴琮)의 「미호유록(渼湖遊錄)」 연구

저자 : 오상욱 ( Oh Sang-uk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7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67-303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咸鏡道 鏡城 출신의 儒學者 鐺洲 朴琮(1735~1793)은 함경도를 벗어나 澹窩 洪啓禧(1703~1771)와 渼湖 金元行(1702~1772)의 문하에 수학하면서, 楊州 洛口의 江泉亭과 미호의 石室書院을 오고가며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渼湖遊錄」은 경치유람뿐 아니라, 미호 선생을 만나면서 학문의 폭을 넓히는 데 상당한 기여가 있었고, 미호 유람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박종은 벗들과 함께 隱寂寺와 深源寺 등에서 주자서를 읽고 베꼈다.
당주는 1763·1765·1768년 3차례에 걸친 미호 유람을 통해 『大學』과 『中庸』 문답을 시작으로 『禮記』와 『儀禮』 등 喪·祭禮에 관해 주로 물었으며, 미호 유람에 앞서 1754년엔 「燭龍堂日錄」에서 『중용』 공부를 하였고, 1757년엔 미호 선생을 찾아 수학하였다.
1763년에 첫 번째 미호를 유람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고, 1765년에 두 번째 미호를 유람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이후 1767년 여러 벗과 함경도의 은적사에서 독서하며 주자서를 외웠으며 「隱寂寺讀書錄」, 주자서가 담긴책상자를 들고 雪峰山[劍峯山] 深源寺에 들어가 이눌과 주자서를 읽고 여러 벗들과 주자서를 베낀 사실 「深源寺讀書錄」 등을 각각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세 번째 미호 유람에서는 그동안 경전의 의심나는 부분을 해소하며 학문의 발전을 이뤘으며, 주자서를 보급한 정황 등은 한층 더 미호 유람을 빛냈다.
당주는 수려한 龜溪江亭을 보기위해 미호 유람을 결행하였지만, 정작 미호 선생을 뵙고 학문적 가르침을 받는 從遊가 미호 유람의 주목적이었다. 그는 관북의 벽촌에 살면서 스승 삼기가 어려워 碩學의 학문적 가르침을 받기위해 낙구와 미호를 오갔으며, 유람을 통해 산천의 경치를 즐기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학문의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6년에 걸친 세 차례의 미호 유람은 주자서 등의 서적보급을 통해 함경도의 낙후된 학문을 일으키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의의를 갖는다.


Dang Joo Park Jong(1735~1793), a Confucian scholar who was born in Gyungsung, Hamgyung-do, interacted with a variety of scholars studying under Dam Wa Hong Gye Hee(1703~1771) and Mi Ho Kim Won Hang(170 2~1772) out of Hamgyung-do and being between Ganchonjung at Nakgu, Yangchon and Sukshil school at Miho. 'Mihoyoorok' contributed not only to provide with excursion but also to expand his study scope after meeting with the teacher Miho, and he read and copied the books of Zhuxi with his friends at the places like Eujok temple and Shimwon temple returning home since Miho excursion. Dang Joo asked mainly on funeral rites and ancestral rites such as 'Book of Rites' and 'Yili' starting from questions and answers of 'Great Learning' and 'Doctrine of the Mean' by Miho excursion in 1763, 1765, and 1768 for three times. Also, he studied on 'Doctrine of the Mean' at Chokryongdangilok in 1754 prior to Miho excursion and sought Miho teacher in 1757 for his study. He enjoyed the beautiful scenery of Miho traveling there at the first time in 1763, and expanded his study scope upon the second traveling Miho. Since then, he read and memorized the books of Zhuxi with his friends at Eujok temple in Hamgyung-do in 1767, came to Shimwon temple at Sulbong mountain (Mt. Gumbong) carrying the book box including the books of Zhuxi to read them together with Lee Nul, and recorded 'Book review at Shimwon temple' which copied the books of Zhuxi with his friends. At this time, the experiences and knowledge in Miho were influenced significantly, especially highlighting Miho excursion more with the situation to supply the books of Zhuxi. In addition, he achieved the progress of his study resolving the questions on the scriptures at the third travelling Miho. Dang Joo implemented to travel Miho to see the beautiful scenery of Googyegangjung, however, the main objective of the travel was 'enjoying together' to see the teacher Mi Ho and to take the lessons from him. Because he lived in the remote countryside of Gwanbuk which was hard to get lessons from his teacher, he came and went to Nakgoo and Miho to learn the lessons from the master. He enjoyed the scenery of the nature by excursion, and also empathized to progress his study. Therefore, what he tried to achieve from Miho excursions three times for six years were to develop the straggling study in Hamgyung-do and to contribute to supply the studies as well as the books of Zhuxi.

12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중앙대학교(서울) 부산대학교 연세대학교
 99
 91
 65
 62
 58
  • 1 서울대학교 (99건)
  • 2 성균관대학교 (91건)
  • 3 중앙대학교(서울) (65건)
  • 4 부산대학교 (62건)
  • 5 연세대학교 (58건)
  • 6 충남대학교 (58건)
  • 7 한양대학교 (52건)
  • 8 고려대학교 (51건)
  • 9 동국대학교 (50건)
  • 10 경북대학교 (43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