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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ekje Ha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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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2005-9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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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9)~27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81
백제학보
27권0호(2019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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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흥백제국의 피성 천도 배경과 결과

저자 : 김병남 ( Kim Byung-nam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2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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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백제 부흥운동기에 단행된 피성 천도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부흥백제국의 천도 전 상황, 천도의 배경과 주체, 그리고 천도의 결과 등을 다각도로 살펴봄으로써 백제 부흥운동의 성패에 대해 재음미해 보려는 것이다. 부흥백제국은 662년 12월에 근거지를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일시 옮겼다. 이 피성은 '闢城'·'碧骨' 등과 연관된 곳으로, 백제의 中方인 古沙城(전북 정읍 고부면)의 일부인 김제 지역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제 땅은 661년 4월 이후 주류성 체제에 각 지역 세력들이 호응하면서 이들의 결속에 주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정 정도의 성과를 얻은 부흥백제 주도세력이 권력 다툼에 빠지면서 아직 공고하지 않은 지역 부흥군을 방치하였다. 이로 인해 나·당군과 직접 대치하는 최전선의 부흥세력에게 긴장감 해이와 결속력 와해를 불러와 지라성·윤성·대산책·사정책 및 진현성·내사지성 등 금강 이동 지역의 전략적 근거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성 천도'는 부흥백제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셈법이었다. 나·당군의 공세에 대해 불안감에 휩싸인 부흥백제국 구성원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하고, 더불어 지속되는 전쟁 상태로 인한 식량 수급을 원활하게 유지하는 문제가 함께 작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662년 12월에 복신 주도로 피성 천도가 공식화 되었고, 정국을 장악한 복신의 의도에 따라 단행되었다.
하지만 피성 천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663년 2월 거열·거물·사평 등 남반4주와 동방 덕안성을 공략 당함으로써 부흥백제국에게 총체적 위기만 야기하였고, 피성 천도를 무위로 돌리고 말았다. 따라서 복신 주도의 천도는 실패하였고, 그 후유증은 서서히 권력 기반마저 잠식하였으며, 마침내는 663년 6월 풍왕의 친위정변까지 초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This study is to review the success and failure of Baekje's reconstruction movement for grasping the meaning of the movement of a capital to Pi-fortress at that time. It is to seach for the former situation, the background and main agent, and the result of the movement of a capital.
The reconstructed Baekje temporarily moved the base from Juryu-fortress to Pi-fortress in December, 662. It is assumed that Pi-fortress was in Kimje, a part of Gobu-myun, Jeongeup-si, Jeollabuk-do.
At that time, Baekje concentrated on organic networking with regional powers which responded to Juryu leading forces after April, 661. But as this powers was descending into a power struggle, regional reconstruction army not banded together yet was left alone. So Baekje lost most of strategic bases in eastern part of Gum-river. For this made slack and broken to reconstruction army who confronted Silla-Tang coalition forces.
In this situation, movement of a capital to Pi-fortress was a political strategy for resolving the crisis of the Reconstructed Baekje. It might bring psychological stability to people in the Reconstructed Baekje who was overwhelmed with nervousness for an attack of Silla-Tang coalition forces and solve a problem about food provision. So the issue of movement was formulated and carried out by Boksin who seized political power in December, 662.
But in spite of the movement, Baekje lost 4 southern and 1 eastern provinces in February 663, so it brought crisis to Baekje. An attempt at movement ended in failure, and Boksin's political position was dwindling. Finally it served as a momentum to overthrow Pung king by his bodyguards in June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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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3년 세종지역 불교신앙의 성격

저자 : 길기태 ( Kil Ki-tae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7-5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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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종지역에는 673년이란 특정시점에 다수의 佛碑像이 조성되고 있다. 이 불비상은 이전에는 발견된 바 없는 石碑형식으로,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과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이 그것이다.
계유년인 673년은 신라가 백제의 사비지역에 소부리주를 설치한 이후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이 행사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미타불비상의 명문에는 백제의 관등인 達率이 보인다. 명문에 보이는 지식 및 향도들이 모두 신라의 관등이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백제의 신앙적 영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의 신앙적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었다면, 이는 아미타신앙의 성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아미타신앙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출발한 것으로, 나라의 멸망과 전쟁을 통하여 백제의 유민들이 느꼈을 암울한 현실을 투영한 내세지향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동일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천불비상은 아미타불비상과는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천불비상에는 신라적 요소인 香徒란 용어가 사용될 뿐만 아니라 백제의 관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천불비상의 성격이 현세를 부처의 정토로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신라의 아미타신앙이 현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천불비상의 조성에 신라의 영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동일한 지역에서 백제의 내세지향적 신앙과 신라의 현세적 정토구현의 신앙이 혼융되어 나타나는 것은 통일정국이라는 점과 더불어 이 지역이 가지는 지정학적 특성도 반영한다. 현재의 세종지역은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이며, 당시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따라서 신라가 계유년인 673년에 세종지역의 불비상 조성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이 지역이 가지는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나당전쟁에 대한 포석도 함께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In the present Sejong area, several Buddha statues at a specific time in the year of 673 are being created. The Buddha statues are a type of stone monument that has not been found before, and they are Amitabulbisang(阿彌陀佛碑像) and Cheonbulbisang(千佛碑像).
The Gyeyunyeon(癸酉年) 673 year was the time after Silla built the Soboryju(所夫里州) in the Sabi(泗沘) area of Baekje and it is understood that Silla secured control over the area since then. If so, it could be seen that the influence of Silla on this area was exercised during the period. However, inscription of the Amitabulbisang shows Dalsol(達率), which is a rank of Baekje. It is the only thing that appears in the inscription, whereas Jisik(智識) and Hyangdo(香徒) shown in the inscription are all using the ranks of Silla. This means that Baekje's religious influence still remained.
If Baekjae's religious influence had been sustained, it could be examined through the nature of the Amitabha belief. Amitabha belief began from human instinctive fear of death, and it seems that it contains a future-oriented nature reflecting the dark reality that Baekje people felt through destruction and war of the country.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Cheonbulbisang, which is found in the same area, shows a different nature from the Amitabulbisang. Cheonbulbisang uses the term Hyangdo of a Silla element, but it does not exhibit any rank of Baekje at all. Above all, nature of the Cheonbulbisang, is strongly projecting the will to embody the present age as the Buddha's Pure Land. And, it can be considered that the Shilla's Amitabha belief at that time had a temporal nature. If so, it can be said that Silla's influences were included in composition of the Cheonbulbisang.
The fact that the future-oriented belief of Baekje and the temporal Pure Land realization belief of Silla were mixed and appeared at the same time in the same region reflects geopolitical characteristics of the region as well as the unification state. Because Silla was conducting a war with Tang at the time, the present Sejong area was a key point of military and transportation. Therefore, it is deemed that Silla exercised influence on formation of Buddha statues in Sejong area in Gyeyunyeon 673, considering the geopolitical position of the region and the groundwork of the Silla-Tang War(羅唐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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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唐) 태종(太宗)·고종대(高宗代) 한반도 정책과 백제(百濟)의 위상 -당 태종·고종본기를 중심으로-

저자 : 방향숙 ( Pang Hyang-soo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1-8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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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백제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결행하는 과정에서 백제에 대한 당의 입장과 동향을 알아보았다. 당의 입장을 파악하기 위하여 『삼국사기』나 중국 정사 동이전의 기사 보다는 『舊唐書』나 『新唐書』의 본기의 기록에 관심을 두었다.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장기간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를 하였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종의 즉위 초에는 당의 국내정세가 좋지 않았다. 빈번한 재해와 모반사건 등은 고종이 대외문제에 주력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국내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돌궐이나 서북변경의 문제 또한 진정된 이후에야 당은 한반도 문제에 주력하였다.
한반도 문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제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의 '四方' 중 동방정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당의 동방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단연 고구려였다. 고종은 대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며 '一戎大定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一戎大定樂'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위용을 과시하는 음악이었다. 고구려에 대한 정벌의 의지를 재삼 다짐하였던 것이다.
대 고구려전을 준비하는 중에 당이 선택한 동맹국이 신라였다. 신라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신라의 요구를 수용하여 백제에 대한 선공이 필요한 입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백제전에서 당은 백제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으로 전쟁을 마감하고 고구려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은 백제에게 항복을 받아낸 직후인 661년 서둘러 고구려 원정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당의 전반적인 대외정책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투항한 국가에 대해서는 기미지배방식을 적용함으로써 당의 지배를 관철하는 것이 당의 대외정책이었다. 백제의 항복은 이미 그 조건을 충족시켰으므로 당이 더 이상 백제를 압박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백제에서 의 부흥운동은 백제지역에 대한 기미지배조차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신라 또한 백제의 부활을 원치 않았으므로 백제에 대한 전투가 재개되었던 것이다. 결국 당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제에 남겨 두었던 기미지배 기구는 철폐하였고, 백제지역에 대한 기미지배는 포기하였다.
당의 기미정책은 기미주 사이의 세력균형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부족 간의 결합을 저지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당이 백제지역과 고구려지역에서 기미지배에 실패했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신라 와 백제와 고구려의 통합국가가 건설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When analy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Silla, Tang, and Baekje, the records of the Samguksagi(三國史記) or the JiuTangshu(舊唐書). XinTangshu (新唐書) provides us with the most information. In this paper, I tried to understand the position and trend of the Tang Dynasty on the war with Baekje. Although we expected a lot of information on the issue, it was difficult to find meaningful information about Baekje. This is a very different case from Goguryeo.
So, I thought about why there were so few records of Baekje. Although Baekje has collected long-term information and prepared for the war against Goguryeo, Baekje has never had such a situation. It was not because Baekje was easy to deal with, but because Baekje was at odds with Silla, and the Tang Dynasty was not planning a war because there were no special problems.
There is no reason to support the Silla kingdom, as Baekje and Silla were countries that paid the same tribute. However, Baekje was in a bad relationship with Silla when the king was preparing to fight Goguryeo. Thus, the attack on Baekje was necessary for the Tang Dynasty to cooperate with Silla. In the war that began this way, the Tang Dynasty sought to end the war by accepting the surrender of Baekje.
The foreign policy of the Tang Dynasty was focused on artificially adjusting the balance of power between the tribes, thus preventing unity among the tribes. It can be said that the Korean Peninsula provided conditions for the construction of a unified kingdom between Silla, Baekje and Goguryeo, as the kingdom failed to control its territory in Baekje and Goguryeo. If indirect control had been successfully maintained in Baekje, as the Tang Dynasty had intended, and if it had been done in Goguryeo, integration by Silla would have been impossible or even delayed. The revival movement of Baekje and Goguryeo people did not bring about the revival of Baekje and Goguryeo, but it is thought that it was the most important move that allowed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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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제(百濟)와 륙조(六朝)의 관계(關係) - 고고자료(考古資料)를 중심으로 -

저자 : 임영진 ( Yim Young-ji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1-10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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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육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연구 분야에 따라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문헌사 분야의 교섭과 고고학 분야의 교류가 그것이다. 문헌자료는 국가 사이의 교섭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문헌사 분야에서는 교섭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고고자료는 문헌자료가 없다면 교섭의 사실과 그 내용을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에 고고학 분야에서는 교류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교류는 다양한 배경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다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백제와 육조의 관계에 대해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交涉, 交易, 模倣, 移住로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그러나 백제 지역에서 확인된 육조 자료에 국한되었고 육조 지역의 백제 자료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못하였다. 육조 지역에서 백제 자료가 잘 확인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보존되기 어려운 유기물품이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강소성 蓮雲港에서 한국계 석실묘가 확인된 사실을 보면 앞으로 육조 지역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백제와 육조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 많다. 특히 이주 문제는 보다 세부적인 기준과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원거주지와 이주 배경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문헌사 분야와의 연계 뿐만 아니라 중국 연구자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Studies on the relations between Baekje and Six Dynasties have revealed a difference of viewpoint between historical studies and archaeological studies. The former focused on the diplomatic negotiation and the latter put emphasis on the cultural exchange. Because historical documents are usually limited to political topics, and most of archaeological materials have not any record.
Until now, archaeological studies on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Baekje and Six Dynasties have not been conducted to the full extent. Because the background of the cultural exchange are divers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divide that more specific categories.
In this paper, I classified the backgrounds of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Baekje and Six Dynasties into four categories; diplomatic negotiation, commerce, imitation, immigration. However examinations are restricted to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excavated at Baekje sites. Because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excavated at sites of Six Dynasties are not reported.
There remains several subjects on the relations between Baekje and Six Dynasties need to be fully investigated in the future. Especially it is necessary to joint researches with not only historians but also chinese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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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남 감일동 백제고분군 발굴조사 성과

저자 : 강태홍 ( Kang Tae-ho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07-126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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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감일동 고분군은 한성백제 횡혈식석실묘 52기와 수혈식석곽묘 2기가 조사된 대규모의 매장유적이다. 석실묘는 모두 장방형의 우편재연도로 반지하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부장품으로 직구호, 모형토기, 청자계수호 및 호수호, 금제구슬, 은제 가랑비녀, 은제 지환, 쇠뇌 등이 출토되었다.
감일동 고분군은 한성백제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풍납·몽촌토성 지역과 인접하여 입지하고 있는 유일한 대단위 고분군으로 현재 조사된 한성백제시대 중앙귀족의 무덤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욱이 현재까지 조사된 다른 고분군과는 다르게 부장품이 한성백제기 토기만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부뚜막 모형토기세트는 다른 모형토기와는 달리 중국의 漢墓와 고구려, 낙랑 고분, 일본의 횡혈식석실묘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으며, 청자계수호 및 호수호 등의 중국 자기의 출현은 그 당시 중국과의 교류 뿐 아니라 이 묘역이 당대 최고 귀족층의 묘역임을 추정케한다.
한성백제기의 횡혈식석실묘는 웅진사비기의 석실묘와 달리 축조주체의 논란, 석실재사용, 도입시기 등 많은 논의가 필요함에도 그동안 조사 사례가 소략하여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해왔다. 그러나 이번 감일동 고분군 조사로 이 시기의 매장관념을 비롯한 장제와 축조수법 및 한성백제 묘제의 존속시기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주변 사례와의 비교검토를 통해 한성백제 매장프로세스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e Gamil-Dong tumuli, Hanam city, include 52 stone chamber tombs with horizontal entrance and 2 vertical stone lined tombs. All the entrance passages of chamber tombs are located on the right side of the front end. As for the grave goods, flat mouthed jar, miniature pottery, celadon ewers with chicken-head and tiger-head spouts, golden marble, sliver hairpin, silver ring, and crossbow were found.
The site is the only large scale tumuli close to the Pungnaptoseong and Mongchontoseong earthen fortifications, the two centers of Hanseong-Baekje. In this regard, Gamil-Dong can be considered as the cemetery for the social elites. Furthermore, the temporal range of excavated pots is limited to Hanseong-Baekje era. Especially, the miniature pottery of traditional wood-burning stove, or “Bu-tu-mak” found at the site was also witnessed in China, Japan, and Goguryeo of the same period. The presence of celadon ewers with chicken-head and tiger-head spouts provide additional evidence of the intimate interaction between Baekje and China.
The stone chamber tomb of Hanseong-Baekje period requires thorough investigations in terms of various aspects including the identity of the builders, possibility of reusability, etc. However, due to its scarcity, many of these aspects are unknown. The excavation of Gamil-Dong site will provide invaluable insight into the overall information related to tombs of Hanseong-Baekj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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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북동토성의 성벽 축조기법과 축조시기 검토

저자 : 朴重均 ( Park Jung-gyu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7-15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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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북동토성은 江岸의 평지 방형토성으로 성의 입지는 서울 풍납토성과 동일하다. 성의 평면형태와 구조는 漢代 赤壁土城의 小古城과 매우 유사하다.
정북동토성은 판축토성으로 성벽의 축조기법은 지면을 정지하여 기저부를 조성하고 판축을 위한 구조물을 설치하여 단면 사다리꼴의 중심토루를 축조한 후 중심토루의 내·외측에 내·외피토루를 덧붙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또한 중심토루의 기저부 내·외측에는 기단석열을 시설하지 않았으며, 板木을 고정하는 목주열의 간격은 1.5~2.1m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벽의 축조기법은 중국 고대의 연하도 고성이나 풍납동토성을 비롯한 백제 한성기 판축토성과 상당히 유사하며, 통일신라~고려시대의 판축토성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정북동토성의 성벽 축조기법은 중국 고대도성이나 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기법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된다. 한편, 중국 고대 판축토성에서 판축의 흔적으로 보이는 棍眼, 夯窩흔이 확인되지 않은 점, 그리고 백제 한성기 토성의 성벽축조에서 盛土材로 많이 쓰이는 점토블록과 표토블록이 축조재료로 사용되지 않은 점, 백제 한성기 토성에서 일반적으로 보이고 있는 흙을 다져 시설한 土堤시설이 확인되고 있지 않은 점 등의 차이점도 보이고 있다.
성벽의 축조시점은 입지와 구조, 성벽의 축조기법, 垓子 내부 및 매몰층위에서 확인된 유물과 유구의 양상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가 금강유역에 진출한 시점 보다 이른 시기에 축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Jeongbukdong Earthen Fortress is a square-shaped fortress built on the flatland of River side with the same position as the Pungnap Earthen Fortress in Seoul. Its planar form is very similar to that of Sogoseong fortress in the Jeokbyeok Fortress of Han Dynasty.
Jeongbukdong Earthen Fortress is a Plate Earthen fortress(版築土城). Its walls were constructed by stamping the earth on the ground, building a basis, installing Board for Panchuk, making the central earthwork in a trapezoid form in cross section, and adding earthwork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parts of the central earthwork. There were no rows of stylobate stone in and outside the basis in the central earthwork. Wooden columns were installed at an interval of 1.5~2.1m to fix the Board. This method of building fortress walls is very similar to that of Plate Earthen fortresses in ancient China and that of Plate Earthen fortresses of Baekje during the Hanseong period, and shows differences from that of Plate Earthen fortresses in Unified Silla and Goryeo. It has, at the same time, differences from them in three aspects: it has no trace of Gonan(棍眼) and Hangwa(夯窩), it used no clay and topsoil blocks, and it has no evidence of Toje(土堤).
There is a big possibility that the fortress was built before Unified Silla based on its position, structure, construction method of walls, and the patterns of artifacts and items found in its moat and burial layer. There is also a possibility that it was built before Goguryeo made into the basin of the Geum River in the latter half of the fif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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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공주(公州) 교촌리(校村里) 백제시대(百濟時代) 전실묘(塼室墓)와 석축단시설(石築壇施設)

저자 : 이현숙 ( Lee Hyun-soo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5-18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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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39년 일본인에 의해서 발굴조사된 교촌리 전실묘에 대한 재조사 결과를 기초로, 백제시대 웅진기 전실묘와 석축단시설에 대하여 분석한 것이다. 공주 교촌리 백제시대 전실묘는 1939년 발굴조사 이후 80년 만에 재조사된 것이다. 기존에 전실묘 2기가 보고되었으나, 조사결과 3호로 보고된 1기만 전실묘인 것을 확인하였다. 2호로 보고된 시설은 '교촌봉' 상단의 지상구조물인 석축단시설로 확인되었다. 이 곳은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을 비롯하여 웅진왕도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탁월한 입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국가의례와 같은 중요행위가 가능한 시설이 자리했던 곳으로 판단된다.
교촌리 3호와 같은 백제 웅진기의 전실묘는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 전실묘가 있다. 3기의 전실묘는 축조기법에서 유사성이 있으나 모두 형태가 다르다. 특히 교촌리 3호는 연도부가 확인되지 않아서 가장 이질적인데, 남조 전실묘에서 고식의 전축법으로 알려진 눕혀쌓기를 사용한 것과, 묘광 굴광형식이나 규모, 장축 방향이 송산리 2~5호와 유사하며, 벽면을 비스듬이 들여 쌓기한 축조기법 등에서 백제의 전통적인 횡혈식석실묘 축조기법과 유사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촌리 전실묘는 기존에 백제 횡혈식석실묘의 축조기술에 기반하여 중국의 전실묘 축조기술을 수용한 백제인에 의해 축조된 전실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정적인 구조의 전실로 축조는 6호 전실묘 출토 '梁宣以爲師矣'에서 알 수 있듯이, 梁의 기술 전수에 기초하여 정형의 전실묘를 축조할 수 있었으며, 이후 무령왕릉의 축조를 기점으로 백제 횡혈식석실묘의 평면과 천정구조에 큰 획기를 이루는 변화를 동반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즉 웅진기에 조영된 3기의 전실묘는 교촌리 3호 → 송산리 6호 → 무령왕릉의 순으로 조영 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즉 가장 이른 시기의 구조 속성을 갖춘 교촌리 3호의 축조는 무령왕 이전, 즉 동성왕 대의 활발한 대중국교섭 행위에 기초한 결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론된다.
향후 교촌리 3호 전실묘의 조영주체와 교촌봉정상의 방형 석축 단시설을 통한 국가의례시설의 존재 등을 비롯하여, 백제 웅진기 왕도의 경관고증을 위한 구체적인 연구가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study has analyzed the brick-chamber tombs and stone masonry constructions in the Woongjin period of the Baekje Dynasty based on the re-excavation survey results of the Gyochon-ri brick-chamber tombs found by the Japanese in 1939. The Baekje brick-chamber tombs located at Gyochon-ri, Gongju have recently been resurveyed and reexamined in as many as 80 years following the first excavation survey in 1939. The two brick-chamber tombs were previously identified and reported but the recent resurvey has confirmed the presence of only one brick-chamber tomb, which is tagged as Tomb No.3. The stone facility reported as No.2 turns out to be a stone masonry work built on top of the 'Gyochonbong', which is a superb location that commands a wide range view of the Woongjin Royal Capital as well as the Gongsan-capital and the Songsan-ri tombs. The location is presumed to have served as a venue for important state occasions such as royal ritual.
The brick-chamber tombs in the Woongjin period of the Baekje Dynasty similar to Gyochon-ri Tomb No.3 include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and Songsan-ri Brick-Chamber Tomb No.6. The Brick-Chamber Tomb No.3 has similarities in terms of construction methods but all come in different shapes. In particular, Gyochon-ri Tomb No.3 is the most heterogeneous as its entrance passage is not clearly identified. A number of its distinctive features, including layered piling construction technique, which is known to the early construction method in Nam-jo brick-chamber tomb, type of heliotrope and scale, major axis similar to that of Songsan-ri Tomb No.2 through 5, building technique of having the wall side slightly inward skewed indicate its similarities to the construction technique of the Baekje's traditional stone lined tombs.
Therefore, the Gyochon-ri brick-chamber tomb can be understood as a brick-chamber tomb built by the people of Baekje who adopted the Chinese brick-chamber tomb building technique based on the contemporary construction technique of building Baekje's stone lined tombs. However, as indicated by the '梁宣以爲師矣' excavated in Tomb No.6 brick-chamber tomb, the people of Baekje were able to build the standard brick-chamber tombs based on the building technique transferred from 梁 while introducing innovative changes in the plane and ceiling structures of the Baekje's stone-chamber tombs. That is, the brick-chamber tombs built in the 3rd stage of the Woongjin period were presumably developed in the order of Gyochon-ri Tomb No.3 → Songsan-ri Tomb No.6 →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In addition, the construction of Gyochon-ri Tomb No.3 suggests a high likelihood of being the outcome of active bargains and negotiations with China during the King Dongsung's reign.
The follow-up studies are expected to cover the historical investigation of the landscape in the Woongjin period of the Baekje Dynasty as well as any possible existence of a venue(s) for state ritual based on the knowledge of who built the Gyochon-ri Tomb No.3 brick-chamber tomb and the square-shaped masonry facility on top of the Gyocho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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