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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ekje Hakbo

  • : 백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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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2005-9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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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9)~30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06
백제학보
30권0호(2019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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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나제동맹(羅濟同盟)'을 다시 검토한다

저자 : 공석구 ( Kong Seok-koo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2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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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은 역사용어가 아니라 20세기에 만들어져 사용된 것으로, 사료적 근거가 불분명한 용어이다. '羅濟同盟'이란 용어사용은 문제가 있다. 필자는 그 근거를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로 동맹이란 용어의 의미를 검토하였다. '盟'은 절차와 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삽혈의식, 맹문작성 등이 뒤따른다. 하지만 5~6세기 양국은 '盟'을 체결한 사실이 없다. 양국 간에 '盟'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근본적으로 '동맹'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 둘째로, '나제동맹' 기간 안에 백제-신라관계를 검토해보면 '同盟'이란 용어를 사용하기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맹이라는 용어는 당시 양국관계를 설명하는데 전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양국은 큰 틀에서 긴밀한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백제, 신라는 동맹과는 다르게 각기 국가의 이익에 따라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셋째로, 백제-신라는 나제동맹기간 중에 각기 관방시설을 설치하여 대립하였다. 대전지역에 축조된 백제산성은 대부분 신라를 대비하기 위해 축조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동맹이라는 관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실상을 말해주고 있다.
5~6세기 백제-신라관계를 '동맹'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하게 되면, 이 시기 양국 간에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다양한 관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5~6세기 백제-신라관계를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필자는 당시 백제-신라관계는 '동맹관계'가 아니라 '백제-신라의 전략적 군사협력' 또는 이를 줄여서 '濟羅軍事協力 關係'라고 주장한다.


This paper examined the term of “the Alliance between Baekje and Silla(Naje dongmaeng 羅濟同盟).” The author concluded that it is not appropriate to understand the relation between Baekje and Silla in the 5th-6th centuries with the notion of 'Naje dongmaeng.' Three reasons are suggested for the basis of the conclusion. First, it examined the term 'Naje dongmaeng' from the fundamental aspect. As a matter of fact, the alliance between Baekje and Silla has never been contracted. Second, considering the Baekje and Silla relation during the period of Naje dongmaeng, it has a problem to use the terminology of the alliance, dongmaeng. Naje dongmaeng does not accord with the relations of two countries at that time. Baekje and Silla maintained the military corporations. However, unlike the alliance, Baekje and Silla pushed ahead their policies according to their benefits.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relation of Baekje and Silla with the term dongmaeng
In conclusion, there is an internal problem to understand the Silla and Baekje relation of the 5th and the 6th centuries with the notion of Naje dongmaeng. Baekje-Silla relationships entwined more complicated and diversely. The terminology dongmaenghinders the more proper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Baekje-Silla relationship and limits the possible interpretation. The Baekje and Silla relationship had the consensus on fighting against the mutual enemy Koguryeo, but in the course of their relationship, they sometimes cooperated each other and at other times conflicted as well. This kind of relation should be understood as the military friendly corporation, or a strategic partnership. The author, thus, suggests that the Baekje-Silla relation should be understood as not the alliance but military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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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법왕(法王)의 동아시아적 변용과 백제(百濟) 법왕(法王)의 성격

저자 : 최연식 ( Choe Yeon-shi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5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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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9대 국왕인 法王은 재위 기간이 짧을 뿐 아니라 행적도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만 알려져 있어서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그의 국왕으로서의 위상과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거의 파악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자료적으로 불분명한 그의 위상과 성격을 고려할 때, 그가 어떻게 '법왕'이라는 위대한 시호를 받게 되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논문에서는 백제 제29대 국왕의 법왕이라는 시호의 성격과 법왕의 역사적 위치 등에 대하여 중국 양 무제 및 일본 쇼오토쿠 태자의 행적과 비교하여 검토하였다. 양 무제는 즉위 후 불교를 후원하고 불교의 정법에 의거하여 통치하는 것에서 나아가 스스로 불교의 교학과 실천을 주도하고 불교 교단의 운영을 관장하는 불교지도자라는 새로운 전륜성왕=법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 모시고 공부하였던 齊 文宣王이 왕자의 신분이면서 불교 교학과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계를 주도한 것에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의 조카인 법왕의 즉위 전 이름 宣은 文宣王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며, 재위 기간이 짧아서 별다른 행적을 남기지 못한 宣이 법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왕자 시절부터 불교에 정통하고 불교계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의 부친의 이름 惠는 문선왕의 형으로서 유교를 주관하였던 文惠太子를 염두에 둔 것이며, 시호 獻王은 유교적 현자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출가자도 아니고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던 쇼오토쿠 태자가 법왕으로 불리고 있는데, 시기적 근접성이나 법왕이라는 호칭의 공통성을 고려할 때 불교 교학과 신앙을 주도했던 그의 행적은 백제의 법왕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쇼오토쿠 태자가 조영한 이카루가의 궁과 사찰 역시 백제의 익산 왕궁리 유적과 비슷한데, 이 익산 왕궁의 조영 주체는 쇼오토쿠 태자의 모델이었던 왕자 시절의 백제 법왕으로 추정된다.


Very little was known about King Beop[Dharma King], the 29th King of Baekje Kingdom. His reign was very short - lesser than a year - and only few things were known about him and his reign. Considering the scarcity and little importance of him in the historical records,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why he was given to the posthumous epithet of “King Beop[Dharma King],” the holy title only given to the Buddhist heroes, Buddha and the Dharma King[Chakravartin], the Buddhist sage King.
In this article we examined the historic character of the title of “Dharma King” and the political role of King Beop at the time through the comparisons with the Emperor Wu of Liang and the Prince Shotoku in the 6th Century Japan. Emperor Liang showed himself the Dharma King by leading both the country and the sanga, the community of priests, with Buddhist ideals. He supported the sanga with plentiful materials and reigned the government according to the Buddhist teaching. He also studied Buddhist philosophical theories and precepts to lead the priests to the right way. He seems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King Wenxuan of Southern Qi whom he served before he took the power. King Wenxuan studied Buddhist philosophy and practices with sincere belief and led the Buddhists with deep scholarship.
The original name of Kin Beop was Seon[Ch. Xuan] and it could have been after King Wenxuan. The reason that King Beop was given the title of Dharma King must have been his leading role in the Buddhism. In fact, all the few records about him are related with Buddhism. Considering his short reign, his leadership of the Buddhism must have been performed before his ascendance to the throne. The original name of King Heon, the father of King Beop, was Hye[Ch. Hui] and it could have been after Royal prince Wenhui, the elder brother of King Wenhui who led the confucianism at the time. His posthumous epithet of Heon[Ch. Xuan] means the wise person in Confucianism.
In ancient Japan, the famous Dharma King was Prince Shotoku who was neither a king nor a priest. Considering the proximity of period and the identity of the title of Dharma King, Prince Shotoku's activities as the Buddhist leader are thought to have modelled after those of King Beop's. Interestingly, the palace and the temple of Prince Shotoku at Ikaruga were very similar to those at Iksan in Baekje period in their location and arrangement. It is very possible the King Beop have founded the palace and the temple at Iksan as a prince and leader of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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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제 무왕과 서동설화의 역사성

저자 : 강종원 ( Kang Jong-wo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1-8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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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는 무왕대를 연구하는 핵심적인 자료였지만 <舍利奉安記>의 출현으로 사료적 성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무왕대의 역사적 상황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서동설화에 내재된 역사성, 서동설화의 형성시기와 배경, 창작세력 등을 검토해 보았다.
서동설화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데, 무왕의 출신과 재위 이전의 생활, 신라왕녀인 선화공주와의 혼인과정과 즉위 배경, 미륵사의 창건배경과 창건과정 등이다.
서동설화에서 확인되는 무왕의 출신과 성장기 생활모습은 무왕 즉위 당시의 정국 상황으로 볼 때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무왕이 혼인한 선화공주는 신라왕녀가 아닌 익산지역 재지세력 출신의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미륵사가 일시에 3원식 가람으로 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는 단계적으로 조영되었으며, 의자왕대까지 지속되었다. 조영 주체도 초창은 익산세력, 중창은 사탁왕후를 중심으로 한 사씨세력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설화에서 미륵사 중영의 주체가 사탁왕후였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서동설화에는 신라와의 혼인관계, 미륵사 창건시 진흥왕의 도움 등의 내용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무왕·의자왕대는 신라와 치열한 대립관계가 형성된 시기로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동설화의 형성 시기는 백제멸망 이후로 보아야 하며, 통일신라기인 신문왕 4년(684) 大文의 모반과 그 무리의 반란 이후에서 미륵사에 낙뢰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된 성덕왕 18년(719)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창작세력은 무왕과 인척관계에 있고, 미륵사 초창에 관여했던 익산지역의 재지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서동설화의 형성배경은 미륵사를 매개로 무왕대 익산이 신라진출의 전진기지로서 왕궁이 위치했던 역사적 사실과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지역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없애고 신라와의 친연성을 내세우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The discovery of < Saribongangi > brought a highly controversial discussion about the historical record of Seo-dong folktale though it has been key material for study of Mu. Hence, I examined the historicity of Seo-dong folktale, and the time, background and forces of its creation through comparison with the historical situation in the period of King Mu. Seo-dong folktale is understood by largely dividing into 3parts; origin of King Mu and his life before reign, marriage process with Princess Seonwha from Silla Dynasty, and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building Mireuksa.
The origin of King Mu and his growth period in Seo-dong folktale reflect the historicity when considering the historical situation of his enthronement. By the way, Princess Seonwha whom King Mu married is most likely to be a woman from local gentry, not a princess. Also, Mireuksa was actually built in phases and lasted to the period of King Euja as though the record says it was constructed in a manner of gathering 3 temples together at once. It turned out that the principal agent of the first construction was a power group in Iksan and the second one was built by influential Sa family centered on Queen Satak. But the fact that the second main agent of Mireuksa was Queen Satak is not confirmed. The stories of marriage relationship with Silla Dynasty and of the aid of King Jinheung at the time of construction of Mireuksa can be discovered in Seo-dong folktale, which are not true. There is not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Silla Dynasty as the relationship of intense conflict with it was formed in the periods of King Mu and King Euja.
Therefore, the time of forming Seo-dong folktale is estimated either after the destruction of Baekje Dynasty, or treason of Daemun in the 4thyear of King Sinmun in unified Silla Dynasty, or any time after which and before the 18th year of King Seongdeok(719) when thunderbolt on Mireuksa was recorded. Also, a power group related to the formation of the folktale was the local gentry in Iksan who had marriage relationship with King Mu and involved in the first construction of Mireuksa. As for the background of its formation, there were the historical fact of Iksan in the period of King Mu where the palace was located as an advanced base for Silla Dynasty, and the intention to eliminate negative perception of the treason by Goguryeo wanderers and to have a close relationship with Silla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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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울 석촌동 집단토광묘의 구조와 축조배경

저자 : 임영진 ( Yim Young-ji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9-11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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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한성기에는 적석총을 비롯한 다양한 묘제들이 공존하였는데 각 묘제의 기원과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은 백제 건국 세력의 출자와 건국 과정, 발전 과정을 밝히는데 꼭 필요한 작업이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 약보고서에서 8기의 목관이 공존한다고 하였던 서울 석촌동 대형토광묘를 하나하나 개별토광을 가진 토광묘군으로 보는 신보고서가 발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 토광묘와의 관련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도 나왔다. 그러나 신보고서의 견해는 약보고서에 기술된 석촌동 대형토광묘의 구조를 잘못 이해한 것이며 출토된 토기와 칠기 등을 종합해 보면 2세기 중후엽에 한군현 치하의 고조선계 주민들이 이주하여 축조한 것이라는 약보고서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석촌동 대형토광묘에 대해 부여계일 가능성이 거론되었던 것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남부여 표방 기록 때문일 것이다. 백제가 남부여를 표방한 것은 사비 천도 직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임이 틀림없지만 한성백제 성립 즈음의 석촌동 대형토광묘를 약보고서와 달리 개별 토광묘 8기가 나란히 배열된 것으로 보고 부여 토광묘의 특징과 동일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백제의 남부여 표방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배경은 다른 자료를 통해 찾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약보고서에 기술된 석촌동 대형토광묘는 동일한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동시에 안장된 특별한 토광묘이지만 명칭 자체는 규모가 큰 토광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집단토광묘로 고쳐 부름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성격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Baekje was founded at Hanseong, and transferred the capital to Woongjin at the year of 475. There are several types of tombs like Pit graves, Bungu tombs, Stone mound tombs and so on at Seokchon area in Seoul.
All sorts of Baekje tombs have not same origin. Especially the tombs of Hanseong-period are diverse and the origin of each is different. It means that the members of Hanseong-period are diverse. So the origins of the tombs are very important to reveal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Baekje.
The mass pit grave excavated at Seokchon-dong cemetry had reported that it had 8 wood coffins inside only one big pit. Recently it was pointed out that not only the mass pit grave divided into 8 pit graves each have separated pit but also these pit graves were originated from Puyeo. But this new claim is resulted from misunderstanding of original excavation report published at 1986. Pit graves including the mass pit grave were originated from the area of ancient Choseon around the late second century.
After that Bungu tombs were began to substituted the pit graves at same area. During this process the special big pit was constructed to inter some persons who were killed by the newcomers. The newcomers who built Bungu tombs came along the Han-river from western seashore like Incheon. After that stone mound tombs of Koguryo-type originated from the area of Koguryo began to be built at Seokchon-dong cemetry around the middle of third century.
Baekje was established, at least, during the middle of third century by the annexation of two power groups, one using the Stone mound tombs, the other, Bungu 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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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묘에 사용된 회(灰)의 특성 연구 - 하남 감일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은경 ( Kim Eun-kyung ) , 강태홍 ( Kang Tae-hong ) , 강소영 ( Kang So-yeo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3-14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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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하남 감일동 백제고분군에서 확인된 회(灰)의 광물학적, 화학적 분석을 통해 백제 한성기 매장문화에 사용된 재료의 특성을 검토하였다. 회는 1-③ 지점 1호, 2호, 27호 횡혈식석실묘 내부 벽면의 일부에 1-4㎝ 두께로 발려져있었다. 디지털현미경 상에서 회는 패각과 혼재되어 있었으며 초본류의 줄기 표피로 추정되는 압흔이 다수 확인되었다. X-선 회절분석과 푸리에변환 적외선분광분석 결과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는 방해석이 주요 구성광물로 확인되었으며 패각에서도 방해석이 검출되었다. 열중량/시차주사열량분석 결과 회 시료는 700~800℃에서 방해석의 탈탄산반응에 의한 주요 중량 감소와 흡열 반응이 확인되었고 30~600℃ 구간동안 시료에 포함되어 있던 수분과 유기물의 분해로 추정되는 점진적인 중량감소가 나타났다. 회의 주요 화학 성분은 탄산칼슘에서 기인하는 CaO가 약 50%, L.O.I.가 약 40%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이는 방해석이 주요 구성광물로 확인된 것과 동일한 경향이다. 전계방출형 주사전자현미경을 통해 회와 패각의 표면을 관찰한 결과 회 시료는 다양한 크기의 결정들이 응집해 있는 형태를 보인다. 패각 표면에서는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간 공극과 함께 시료별로 판상이 층층이 쌓인 층상구조부터 장방형, 주상형, 무정형태 등의 방해석 결정들이 관찰되었으며 동일 시료 내에서도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패각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1호 석실묘의패각은 1820-1690 cal BP 또는 1671-1624 cal BP, 2호 석실묘의 패각은 1637-1544 cal BP 또는 1696-1646 cal BP, 27호 석실묘의 패각은 1625-1520 cal BP 또는 1458-1421 cal BP, 1690-1670 cal BP로 산출되었다. 따라서 백제 한성기의 하남 감일동 고분군에 사용된 회는 패각을 소성하여 제작하였으며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초본류의 유기물을 혼합하여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회가 사용된 석실묘의 공반유물이 적어 축조시기를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나 건축 재료로 사용된 회 분석을 통해 유적의 시기를 간접적으로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materials used in the burial culture of Baekje-Hanseong period through the mineralogical and chemical analysis of lime was excavated from the Baekje tumuli in Gamil-dong, Hanam.
Lime was applied 1-4 cm thick on a part of the inner wall of the stone chamber tombs of No.1, and No.2 in 1-③ points. Digital microscopic observations revealed that lime was mixed with shells and indentations presumed to be the stem epidermis of the herbaceous species. Lime analysis through X-ray diffraction analysis and Fourier transform infrared spectroscopy showed that calcite of calcium carbonate was the main constituent mineral and calcite was also detected in the shell. Thermo-gravimetric analysis/Differential scanning calorimetry analysis showed that the major weight loss and endothermic reaction was reduced by decarbonate reaction of calcite at 700~800℃ for all samples. In addition, there is a gradual weight loss at 30~600°C which is thought to be the decomposition of water and organics. The main chemical composition of lime was the same as that of calcite as the main mineral, with the highest concentration of CaO was about 50% and L.O.I. was about 40%. As a result of observing the surface of the lime and shell by Field-emission scanning electron microscopy, the lime sample shows the aggregated with crystals of various sizes. The porous texture and different types of calcite crystals are observed on the shell surface such as multi-layer structure, rectangle structure, prism, and amorphous. The radiocarbon dating (AMS) of the shells from No.1 stone chamber tomb in AD 130-260 or 279-326. The shell of No.2's tomb was calculated in AD 313-406 or 254-304, and the No.27's tomb was found in AD 325-430 or 492-529 or 260-280.
Therefore, the lime used in the Gamil-dong tumuli of Baekje-Hanseong period was produced by calcining shells, and it is considered that the mixture of organic materials was used. In addition, this analysis was difficult to identify the time due to the small amount of artifacts in the tombs. But it is an important data to indirectly identify the time of the ruins through the analysis of lime, a building 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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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청주(淸州) 부모산성(父母山城) 저수조(貯水槽)의 성격(性格)

저자 : 박찬호 ( Park Chan-ho ) , 성정용 ( Seong Jeong-yo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1-17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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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일원에서는 그간 원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긴 쟁탈기의 흔적을 반영하는 유적들이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신라가 5세기 후반에 축조한 삼년산성(470)과 양성산성(474)은 청주와 보은지역 일대를 둘러싼 격변기의 양상을 대변하고 있다.
청주 부모산성은 삼년산성 및 양성산성과 더불어 그간 학계에서는 신라의 중원 진출 시기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부모산성 남서쪽의 제1보루와 학천산성이 백제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주장들이 발굴조사 결과 제기되면서, 부모산성 또한 신라와 백제가 탈환과 재탈환을 반복하는 각축장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아졌다.
이와 관련하여 부모산성 정상부에 위치한 저수조에서 6세기대 신라계 유물이 상당량 출토된 점은 산성의 축조 및 운영과정 등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앞의 지적과 달리 이 저수조에서 백제 토기는 동이 2점만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만약 백제가 부모산성을 함락했을 가능성을 전제한다면, 저수조 출토유물의 시기를 고려할 때 신라는 이 성을 빼앗기기 전 저수조를 폐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이 저수조는 원형 평면에 계단식으로 축조된 것으로서, 신라지역에서 확인되는 원형 석축 저수조들과 구조가 유사하다. 본고에서는 이 부모산성 저수조의 구조적 특징과 출토유물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이 저수조가 갖고 있는 사적 의의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In the Cheongju area, ancient ruin reflecting the traces of the long fierce battle from The Proto-Three Kingdom Period to the Unified Silla Period were found everywhere.In particular, the Sam-yeon fortresse and Yang-sung fortresse, built by Silla in the late 5th century, prove that Cheongju and Boeun regions represent the aspects of the turbulent period.
Along with the Sam-yeon Fortress and Yang-sung Fortress, Cheongju Bu-mo Fortress has been recognized by academic circles as a ruins symbolizing Silla's advance into the Jungwon area. However, when the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museum excavated the first bastion and the Hak-cheon Fortress in the southwestern part of the Bu-mo fortress, researchers suggested that they had been built by Baekje, leading to views that Silla and Baekje might have created tension over their Bu-mo fortress.
In this regard, considerable quantities of Silla relics from around the 6th century or so were excavated from the water facilitiy located at the top of the Bu-mo fortress, showing the construction and operation of the fortress. Contrary to the preceding comments, only two pieces of earthen pots from Baekje were identified in this water facility. Considering the possibility that Baekje had taken the castle and the timing of the excavated relics, Silla is highly likely that the water facilitiy had already been disposed of before Baekje took it. What's more, this water facilitywas in the form of a circular staircase, and This type of water facility were mostly found in the Silla region. Therefore, based on the structural features of the water facility and its review of the relics excavated from it, we will briefly take a look at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water fac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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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제 대상파수부토기의 변천과 사용

저자 : 채송이 ( Chae Song-lee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1-2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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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토기 중 대상파수부토기는 외반구연호, 자배기, 시루, 동이형토기, 직구호 등이 있다. 대상파수부토기는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고구려 토기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전반적인 변천이나 사용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대상파수부토기를 형식분류하고 단계를 설정한 후 백제에서의 수용·정착 과정, 사용문제에 접근해보았다.
백제의 대상파수부토기는 외반구연호나 자배기를 중심으로 구연부 형태에 따라 6개의 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기종과 형식으로 보아 웅진기, 사비기 Ⅰ∼Ⅲ단계의 변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웅진기에는 외반구연호·옹의 기종과 형식이 보이는데, 이는 경기·호서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로부터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기 Ⅰ단계인 6세기 중엽에는 외반구연호와 자배기의 기종과 형식이 나타나는데 백제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면서 6세기 전반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기 Ⅱ단계인 6세기 후엽∼7세기 전엽 이른시기에는 대상파수부토기의 모든 기종이 등장하며, 고구려 토기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형식도 확인된다. 사비기 Ⅲ단계인 7세기 전엽 늦은시기∼7세기 중엽에는 구연부가 전반적으로 두꺼워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Ⅱ·Ⅲ단계에는 백제 토기의 제작기법이 확인되고 중요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백제 토기로 정착된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의 대상파수부토기는 고구려 토기의 영향으로 웅진·사비기에 수용·정착되면서 기종의 증가뿐 아니라 사비기 토기의 기능 분화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마한∼백제 웅진기 동이의 자비용 기능은 사비기가 되면 동이형토기로, 조리용 기능은 자배기로 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루는 장란형토기와 조합되다가 사비기가 되면 대상파수가 부착된 형태로 변화되면서 철부와 조합된다. 마한∼백제 웅진기의 호나 대옹의 운반 및 저장용의 기능은 사비기에도 일부 이어지지만, 대상파수 달린 외반구연호와 직구호가 추가되어 기능이 분화된다.


Among the Pottery of Baekje's Sabi Period, the Pottery with bridge-shaped handle(帶狀把手附土器), which was influenced by Gogurye Pottery, includes the Jar with open out mouth(外反口緣壺), Bowl with flat-bottomed and bridge-shaped handles(甂), Steamer(甑), Bowl with round-bottomed and bridge-shaped handle(盆·盎), Jar with bridge-shaped handles and a flat mouth(直口壺). A study of the overall transition and use of Pottery.
In Woongjin, the A type of the Jar with open out mouth is shown, and was accepted from Goguryeo, which advanced to Gyeonggi(京畿) and Hoseo(湖西) regions. In the Sabi Ⅰ stage, the B2 type of Jar with open out mouth and Bowl with flat-bottomed and bridge-shaped handles appeared, which were accepted from Goguryeo. In the Sabi Ⅱ stage, the C2 type of Pottery with bridge-shaped handle, which is invisible to Goguryeo Pottery, was seen. In the Sabi Ⅲ stage, the D·E types of Pottery with bridge-shaped handle were seen. Phase Ⅱ and Ⅲ was understood to have been established from Baekje Pottery.
As Pottery was accepted and settled in Baekje, it also affected the functional differentiation of Pottery from Sabi period of Baekje. Bowl with round-bottomed and bridge-shaped handle from Mahan to the Woongjin Period of Baekje was classified into Bowl with round-bottomed and bridge-shaped handle for boiling and Bowl with flat-bottomed and bridge-shaped handles for cooking by the Sabi Period. Steamer combined with Pot(鐵釜). Jars from Mahan to the Woongjin Period of Baekje was still used to carry and store food in the Sabi Period, but with the addition of Jar with open out mouth and Jar with bridge-shaped handles and a flat mouth. Egg-shaped Pottery(長卵形土器) of Mahan to the Woongjin Period of Baekje was replaced with Pot(鐵釜) for boiling and with Jar for burials in the Sabi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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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영·호남 경계지역 가야 정치체의 성격

저자 : 백승옥 ( Beack Seoung-o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01-22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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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 卷17, 繼體紀에 보이는 任那四縣(上哆唎, 下哆唎, 婆陀, 牟婁)과 己汶, 帶沙(2地)는 가야지역에 존재했던 지역명 또는 국명들이다. 이들의 구체적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異見이 있지만, 가야와 백제의 경계지역에 존재했었던 곳이다.
『일본서기』에는 百濟가 倭(日本)의 官家인 임나4현을 줄 것을 청하자 이를 허락하는 내용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사실과 달리, 일본을 중심에 놓고 주변 제국들은 藩國으로 설정하여 내용을 서술하였다. 이를 고대 일본 중심주의 藩國史觀이라 한다. 임나4현과 2지에 관한 내용도 번국사관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다. 왜가 백제에 임나4현과 2지를 주었다는 것의 실상은 백제가 이 지역을 점령하여 장악한 것이다.
任那4縣에서 '縣'은 加羅國의 縣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성격은 독립된 지역 집단이 어떠한 國으로 자립하지는 못한 채, 자치적으로 움직이는 지역조직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를 백제가 차지하는 과정이 『일본서기』 계체기에 실린 것이다.
『일본서기』 계체기 7년(513) 11월조에 보이는 여러 나라들의 모임을 기문, 대사의 귀속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국제회의로 파악했다. 그 개최지는 왜가 아니라 안라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신라는 향후 진행할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욕심으로 인해 백제의 주장을 묵과했다. 그리고 왜는 4현과 2지의 백제 귀속에 찬동했다. 이는 백제의 외교적 노력 때문이었다. 6세기 전반 가야와 백제 경계지역은 이렇게 백제 영역화 되어갔다.


'Imna-4Hyeons(任那 4縣)' -'Sangdari(上哆唎)', 'Hadari(下哆唎)', 'Pata(婆陀)', 'Moru(牟婁)'- and 'Gimun(己汶)', 'Daesa(帶沙)'-these are called '2Districts(2地)'-, which are seen in the 『Nihonshoki(日本書紀)』 Gwon17(卷17) Geitaigi(繼體紀), are the names of the regions or nations that existed in Gaya region. Although there is an argument on their specific locations, they were located on the border between Gaya and Baekje(百濟).
In the 『Nihonshoki』, it is written that when Baekje asked Wae(倭-Japan) to give Imna-4Hyeons - a Miyake(官家) of Wae, Wae allowed to. However, the 『Nihonshoki』 was written, centering Japan and setting its neighboring empires as subject countries against the truth. This is called 'the ancient Japanese centralism'. The contents of Imna-4Hyeons and 2Districts are also distorted parts of the story by the historical view of subject countries. The reality of the reason why Wae gave Baekje Imna-4Hyeons and 2Districts was that Baekje occupied and dominated the areas.
In Imna-4Hyeons, 'Hyeon(縣)' is seen as 'Hyeon' of 'Garaguk(加羅國)'. And its character was seen as something like a self-governing regional organization, unable to stand on as an ancient state(國). What was included in the 『Nihonshoki』is the process of Baekje's taking over this Hyeons.
In this paper, the meeting of various countries, seen in the 7th year of 『Nihonshoki』Geitaigi, was read as an international conference to determine the issue of the attribution of 'Gimun(己汶)' and 'Daesa(帶沙)'. The venue was Anla(安羅), not Wae. Silla(新羅), who attended conference, ignored Baekje's claim because of its desire to advance to Gaya region. And Wae endorsed the attribution of 4Hyeons and 2Districts to Baekje. This was due to the diplomatic efforts of Baekje.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the border regions between Gaya and Baekje had become Baekje's territory.

KCI등재

9새로 찾은 '양평 양근리 적석총'의 현황과 특징

저자 : 정치영 , 윤정현 , 최진석 , 강다혜 , 최재도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7-24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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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한성백제박물관 소속 연구진이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에 위치한 남한강의 하중도 양근섬(일명 양강섬)에서 적석총 한 기를 발견하였다. 이듬해 3월,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적석총으로 확증하고 이를 '양평 양근리 적석총'으로 명명하였다.
적석총은 강안을 따라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분구의 단면형태는 하부가 넓고 상부는 좁은 사다리꼴이다. 모래 위주의 성토 분구 상부와 사면에는 크기 20~60cm의 강돌이 쌓여 있는데, 남쪽 단면을 통해 확인한 적석층의 두께는 100~120cm이다. 분구 하단에는 대형 석재가 배치되어 있고 단차를 보이는 2단의 기저시설도 감지된다. 분구와 적석의 분포 범위를 통해 계측한 규모는 길이 105m, 폭 50m, 높이 5m로 남한에서 확인된 적석총 중 가장 큰 초대형급 적석총이다. 분구 상면 서북편의 소형 자갈 부석면에 경질토기 호, 타날문 호 등 토기편과 철겸이 노출된 유구는 매장주체부 바닥면으로 추정된다.
양평 양근리 적석총은 입지와 특징으로 볼 때 연천 학곡리 적석총을 표지로 하는 '무기단식 적석총'의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양근리 적석총과 더불어 인위적, 자연적 훼멸의 위기에 방치되어 있는 한강유역 적석총들에 대한 보존 방안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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