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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ekje Ha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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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2005-9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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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9)~31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211
백제학보
31권0호(2020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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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마한(馬韓) 개념과 '국(國)'에 대한 기록

저자 : 전진국 ( Jeon Jin-koo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2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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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1차 사료라 할 수 있는 『삼국지』 한전은 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로 인해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기록이 많다. 그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 타자의 인식과 그 인식에서 정의된 대상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 이해가 선행된 뒤에 실체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삼국지』 한전에 서술된 마한의 개념은 삼한 중 첫 번째이며 가장 크다는 점, 선주토착인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한의 범위 안에서도 이주민 집단이 존재하였으므로 그 개념이 실상에 꼭 맞지는 않으며 서로 모순되는 측면도 있다. 마한이라는 명칭 역시 앞의 두 개념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삼한 중 가장 큰 韓, 또는 宗主와 같은 의미에서 '馬'자에 있는 '크다'는 뜻을 새겨 붙여진 명칭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실체라 하면 『삼국지』 한전에 기재된 50여 개의 나라이다. 한전 안에서 가장 앞선 시기의 기사인 준왕 전승은 마한을 구성하는 '國'의 등장 시점으로 삼을 수 있다. 50여 국은 3세기 때의 상황이다. 국명 나열은 북쪽에서 남쪽의 순서로, 또는 교통로의 순서로 정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교류의 결과 채록된 것이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가까이 붙어 있던 몇몇 나라가 그룹을 이루어 기재된 것 정도는 추정해 볼 수 있겠다.


The Han(韓) section of the Samkukji(三國志), the primary source of Samhan(三韓), is a record written by others, not Samhan itself. That is why the record has many superficial and ideological aspects. To overcome such limitations,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perspective of the writer and the concept of the object described by this perspective. After understanding the viewpoints and concepts, the research on Samhan's exact form can be carried out.
The concept of Mahan described in The Han section of the Samkukji has two meanings; the first and largest of Samhan, or indigenous people. However, in Mahan's range, there was a group of migrants, so the concept of 'indigenous people' was not exactly right and there were conflicting aspects as well. The name Mahan, also named by the other, must be understood in connection with the first two concepts. In other words, the name Mahan is presumed to be based on the word 'Ma(馬)' meaning 'big'.
Mahan was the collective name of many states, which were the 50 states listed in the Han section of the Samkukji. According to the the Han section of the Samkukji, the influx of the Old Choson(古朝鮮) inhabitants and culture in the 190 B.C. triggered the emergence of states. The record of 50 states is hard to say that the list of names was arranged in order from north to south, or in the order of traffic routes. However, it can be assumed that states were listed as a result of the exchange, and some of the states closely related were also listed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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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헌 및 고고자료를 통해 본 고대 장송의례 - 백제를 중심으로 -

저자 : 정재윤 ( Chung Jae-yun ) , 박초롱 ( Park Cho-ro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9-5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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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문헌과 고고자료를 통해 초기 국가단계의 장송의례부터 삼국의 장송의례까지 그 일면을 파악하고, 변화 과정을 검토하였다. 고고자료는 백제권의 도읍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의례 유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정지산유적은 무령왕릉 출토 묘지석을 통해 국가 의례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대개 빈장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살펴진다. 송산리고분군 방단적석유구의 A지구 구덩이는 마한과 백제의 의례적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주목해보았다. D지구 역시 3단 방형 형태를 갖춘 제단시설로 살펴졌다. 이들은 모두 유구의 모습을 통해서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펴진다. 웅진 천도 이전인 공주 수촌리 적석유구에서도 의례 공간으로 활용한 흔적이 보이며, 이는 한성시대 왕릉인 석촌동고분군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三國志』동이전을 통해 초기 국가단계의 장송의례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부여조 '停喪'기록은 이미 3세기 중·후반 단계에 빈장으로 추정되는 장례 풍습이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옥저조에서는 세골장의 풍습이 보이며, 시신을 가매장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면 빈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마한 장송의례는 구슬을 중시하였으나 마구류와 금과 은 등을 부장하는 것은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되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변진조에서도 큰 새의 깃털을 장례용으로 쓰는 등 계세사상과 연관된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초기 우리나라의 각 정치체들은 주변 나라와의 접촉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보편성을 갖게 되었다.
특히 불교와 유교의 영향은 장송의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 사서에서 보이는 백제 장송의례는 공통 적으로 服을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복을 제도로 3년 하였다는 『翰苑』의 기록에서 7세기 대 복상이 일반적 장 송의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日本書紀』 속 신라의 장송의례 모습과 고구려 무용총 벽화 등에서 음악·무 용과 곡 등을 하는 모습이 살펴지는데, 백제에서도 비슷하였다고 추정된다. 이는 중국의 東漢대 상제에 음악 이 쓰여 중국의 유교 영향을 받은 상장례로 볼 수 있다. 더불어 백제에서는 부여 능사 북편 건물지의 빈전시 설을 통해 불교와 결합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삼국의 장송의례는 불교와 유교의 도입으로, 이전 의 전통적인 계세사상에 영향을 주면서 변화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또한 무령왕릉은 묘지석을 통해 왕과 왕비 모두 27개월의 상장 기간을 거쳐 유교식 상장제와 일치함을 살 펴볼 수 있다. 아울러 매지권을 통해 도교의 영향도 미쳤음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무령왕릉의 사례를 통해 당 시에는 관이 안치된 빈전일 가능성이 컸음을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빈전의 운영은 여러 기술적인 문제로 이 후 매장하는 빈을 택하였다. 7세기 초반 내용을 담고 있는 『翰苑』에서 매장하여 빈하였다는 기술은 이를 분명 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백제의 장송의례는 부여와 마한 등 우리 고유의 장송의례와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장례문화가 변화되면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of Baekje through literature and archeological materials. This study figured out the aspects of the early state-level funeral and burial rituals and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of the Three States and reviewed the process of changes.
For archeological materials, this study investigated the representative relics for ancestral rites, centered around the cities in the Baekje area. The Mt. Jeongji-san remains can be seen as a place where the national ancestral rites, which were usually Binjang.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the pit in District A of Bangdanjeokseok (squared altar where stones were piled up) relics in Songsan-ri Ancient Tombs as a material by which the ritual relevance between Mahan and Baekje could be seen. District D was also examined as an altar facility in the three square-shaped columns. Also in the Jeokseok (stones were piled up) relics of Gongju Suchon-ri remains, which was built before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Ungjin, there is a trace that it was used as a space for rituals, which was similar to the Seokchon-dong Ancient Tombs, a royal tomb during the Hanseong period.
In addition, this study examined the aspects of the early state-level funeral and burial rituals through “Dongyi-jeon” in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n particular, in the Buyeo dynasty, funeral customs are identified in the mid-to-late-3rd century, which is assumed to be Binjang. Next, in the Okjeo dynasty, there was a custom of Segol-jang, and the body was temporarily buried.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of Mahan was changed by the influence of the Baekje culture. Also, in the Byeonjin dynasty, there was an association with the thought of the afterlife, e.g. The features of a big bird were used for a funeral.
Since Bok (garment) is commonly mentioned for the Baekje funeral and burial rituals in Chinese history books, it is noted that Boksang was a general Funeral and Burial Ritual in the 7th century. In addition, in the Three States, there were music, dance and wailing in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which can be seen as funeral rites affected by Confucianism. Also, in Baekje, it was combined with Buddhism through the Binjeon facilities in the building site north of Buyeo Neungsa Temple. Like this,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of the Three States were changed with the influence on the traditional thought of the afterlife by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and Confucianism.
Especially, the tombstone of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shows consistency with the Confucian funeral and burial rituals. Also, this study examined the impact of Taoism through Maejigwon (the bill of the sales of the site). In addition,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is very likely to be Binjeon in which the body was enshrined in the coffin. However, it was noted that Bin was chosen later due to several technical issues for Binjeon. Like this, in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of Baekje, the funeral culture was changed and developed as we accepted our own funeral and burial rituals like those of Buyeo and Mahan and Chines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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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삼국시대 영산강유역권 금동 위세품의 역사적 성격

저자 : 임영진 ( Yim Young-ji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7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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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 영산강유역권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 마한 제소국과 백제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근초고왕 24년(369)에 병합된 이후 간접지배 상태에서 토착적인 옹관묘가 발전하다가 5세기 후엽부터 직접지배로 바뀌면서 백제 석실묘가 보급되었다는 것이 기존 견해인데 이와 다른 시각에서 새로운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견해라 하더라도 직접지배·간접지배·거점지배·공납지배·세력권·영향권·지배적동맹관계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면서 분명한 관계를 알기 어려운 경우들이 적지 않다.
이 글에서는 백제와의 관계를 영역 내부와 외부로 대별하여, 내부는 직접지배와 간접지배 2가지로, 외부는 세력권과 영향권 2가지로 구분하였다. 또한 흔히 금동대관·금동모관·금동식리로 불리던 금동 위세품을 금동관·금동상투관·금동신발로 칭하고 이들이 백제와의 관계에 있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이 자체제작이나 주문제작한 것이고, 금동상투관은 직접지배·간접지배·세력권·영향권을 불문하고 백제에서 그 주인공의 생전에 제공한 것이 대부분이며, 금동신발은 직접지배·간접지배·세력권·영향권을 불문하고 백제에서 그 주인공의 사후에 장송례품으로 제공한 것으로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영산강유역권은 6세기초까지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백제의 영향권에 속하였음을 논하였고 6세기초 止迷·麻連·下枕羅 등의 마한 소국들이 기재되어 있는 중국 『양직공도』가 이를 입증하는 문헌자료임을 확인하였다.


Recently, the relationship between Mahan at Youngsan-river region and Baekje is debated seriously.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 of the incorporation of Mahan as the reign of King Geunchogo is in the middle years of the fourth century.
But many archaeological evidences excavated at the Yeongsan-river region from the latter years of the fifth century to the early years of the sixth century mean that Mahan of not only Yeongsan-river region but also the almost Jeonnam province was not belong to Baekje until the early years of the sixth century. But the relationship between Mahan at Youngsan-river region and Baekje during that period was defined very diversely. For example, direct-reign, indirect-reign, base-reign, tribute-reign, sphere of influence and so on.
In this paper, the author divide the relationship into inside and outside of the territory of Baekje at first, and divide the relationship into direct-reign and indirect-reign of the inside territory of Baekje vs. tribute-reign and sphere of influence of the outside territory of Baekje later. After that, discuss about the archaeo-historical significance of gilt-bronze prestige-goods like crowns, topnots, footwears excavated from the Jeonnam province including Youngsan-river region.
The gilt-bronze prestige-goods like crowns, topnots, footwears excavated at this area reveal that the Jeonnam area including Youngsan-river region was the last territory of Mahan to maintain its independent power from Baekje until the early years of the sixth century. Baekje did not absorb Mahan into its territory at one time but by three stages. Part of the Mahan people in the absorbed area sought refuge in southern Mahan or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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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일본 '조선식산성(朝鮮式山城)'의 축성 기록과 백제산성

저자 : 서정석 ( Seo Jeong-seo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1-10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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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본에는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遺民들에 의해 축조된 산성이 있다. 그것을 '朝鮮式山城'이라 부른다. 이러한 조선식산성은 백제 유민들에 의해 축조된 만큼 백제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아직까지 백제산성과의 관련성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조선식산성'의 축조 기록을 중심으로 백제산성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식산성'의 축조 기록을 보면 맨 먼저 水城을 축조하고, 이어서 長門國城, 大野城, 基肄城을 차례로 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처음에는 수성을 축조하여 博多灣에서 大宰府로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1차 방어망이다. 뒤이어 長門國城을 축조하여 關門海峽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2차 방어망이다. 그 다음에는 對馬島에서 시코쿠(四國)를 거쳐 가와치(河內)에 이르는 곳곳에 산성을 배치하였다. 이것이 3차 방어망이다.
이렇게 당시 서일본에는 물샐 틈 없는 방어망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이는 백제가 구축한 방어체계와 매우 유사하여 백제 유민들의 지휘하에 산성이 축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There is a mountain fortress in the Western Japan which is constructed by drifting people who go over to Japan after the fall of Baekje Dynasty. It is called the Joseon-style mountain fortress. It is similar to the mountain fortress of Baekje Dynasty because it is constructed by the Baekje drifting people. However, there is hardly clear facts related to the mountain fortress of Baekje Dynasty. Accordingly, this study focuses relations of the Baekje Dynasty based on construction records of the Joseon-style mountain fortress.
In terms of construction records of the Joseon-style mountain fortress, Mizuki is first built, and subsequently Nagatozo, Onozo, and Kiizo are constructed in sequence. Thus, street corner that comes from Hakatawan to Dazaifu through constructing Muzuki. This is the first defense. Then, Nagatozo is constructed and it try to control Kanmon straits. This is the second defense. In addition, the mountain fortress is placed around the Tsushima Island to Kawachi. This is the third defense.
Thus, airtight defenses was built in the western Japan. This is very similar to the defense system by constructing Baekje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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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한지역 목탄요의 변천 양상과 요인

저자 : 박상현 ( Park Sang-hyu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5-13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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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구는 최근 자료가 증가하고 있는 생산유구 가운데 목탄요에 대해 통시적인 관점에서 변천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에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발굴조사 된 목탄요를 집성하였고, 구조적인 측면을 고려해 측구식 탄요와 무측구식 탄요로 구분 지었다. 이들 탄요의 세부 구조 중 발전양상 파악에 적합한 것들을 속성으로 구분한 후 순서배열하였고, 절대연대측정값을 통해 배열된 순서를 검증하였다. 또한 분기를 설정하여 연대를 비정하였다.
결과를 살펴보면, 중심조업연대가 기원후 2세기 중엽에서 5세기 후엽까지 전형적인 측구식 탄요가 성행하다가 5세기 후엽 이후가 되면 측구식 탄요는 소성부의 폭이 좁아지며 측구의 개수가 적어지는 양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형태는 측구식 탄요처럼 세장하지만 측구가 탈락 되어 있는 무측구식 탄요가 7세기 후엽까지 등장하게 된다. 기원후 7세기 초엽부터는 전형적인 무측구식 탄요의 형태가 확인된다.
따라서 전형적인 측구식 탄요에서 변화된 측구식 탄요로 이행되다 마무리되고, 목탄 생산 기술의 변화가 생겨 측구식 탄요 형태의 무측구식 탄요가 조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이 변화된 측구식 탄요와 무측구식 탄요가 공존하는 시기를 목탄요의 과도기 단계로 설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목탄요는 시기에 따라 구조의 큰 변화가 생기는데, 변화의 요인을 철 생산 기술의 발달에 접목시켜 보았다. 또한 제철공정이 발달함에 따라 가성비가 좋은 흑탄을 철 생산의 연료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철 생산 기술이 발달하며 대량생산이 이루어 졌을 것이고, 이에 따라 더 많은 목탄을 생산해야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더 많은 목탄을 생산했다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 유적에서 출토된 목탄요의 체 적을 계산하여 목탄 생산량을 가늠해 보았다. 그 결과, 앞서 설정된 목탄요 분기 1기에서 3기로 갈수록 목탄 생산량이 많아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무측구식 탄요의 경우 벽석을 석재로 보강하여 재사용의 기능을 발전시킨 탄요가 조사되는데 이처럼 목탄요가 발달함에 따라 목탄 생산량이 많아지고, 철 생산에 따른 목탄의 대량 공급도 원활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This unknown section of the process was examined by reviewing the attributes of wood charcoal kilns, categorizing them according to the form, and putting them in seriation according to their attributes and absolute age dating results to review the periods.
Period 1 presented Form I-1 and marked the birth of typical charcoal kilns with a side hole between the middle second century and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AD.
Period 2 presented Forms I-2, II-1, and II-2 and witnessed the coexistence of charcoal kilns with a side hole and those without a side hole between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and the late eighth century.
Period 3 presented Forms II-2 and marked the appearance of typical charcoal kilns without a side hole from the late eighth century to the present.
The factors of wood charcoal kilns that changed according to the periods were incorporated into the development of iron production technologies. A possibility was raised that black charcoal with great cost effectiveness was used as the fuel of iron production according to the development of the iron smelting process.
It seems that more wood charcoal must have been produced to accommodate mass production based on the development of iron production technologies. The bulk of wood charcoal excavated in relics was calculated to estimate the charcoal output and demonstrate that more charcoal was produced. The results show that the wood charcoal output increased from Period 1 to 3 discussed above. It appears that the wood charcoal output increased according to the development of wood charcoal kilns and thus enabled the smooth supply of wood charcoal in large volumes according to iron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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