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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ekje Ha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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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2005-9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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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9)~29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197
백제학보
29권0호(2019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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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저자 : 정동준 ( Jeong Dong-ju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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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하여 먼저 통설에서 문제가 되었던 근초고왕대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사료와 관련연구를 재검토하고, 금강 이남 노령산맥 이북,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순서로 사료와 관련연구를 검토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초고왕 이전 백제의 마한 통합에 대한 사료로서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조와 벽골제 축조 관련 사료, 근초고왕대 백제의 마한 통합에 대한 사료로서 『日本書紀』 神功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3개 사료 모두 근초고왕대에 백제의 마한 통합이 완료되었다는 근거로 부족한 점이 있어서, 1990년대 이전의 통설은 적어도 문헌사료로 입증된 학설이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5세기 이후 금강 이남 지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中國正史 百濟傳, 『日本書紀』 應神紀를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두 종류의 사료 모두 5세기까지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역화를 관철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5세기 이후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동향에 대한 사료로서 여러 사료 『三國史記』·『日本書紀』, 中國正史 百濟傳 등 여러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영산강 유역이 6세기 중반의 어느 시점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무령왕대까지 '복속'에 머물렀던 영산강 및 섬진강 유역의 소국들이 성왕대에 영역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己汶·帶沙 등 섬진강 유역이 늦어도 600년을 전후한 시점에는 백제의 영역으로서 郡으로 편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530년대에 담로제가, 540년대에 5방제가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Mahan, this paper reviewed the literature materials and related studies on the relationship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which was problematic in the prevailing theory, and examined literature materials and related studies on the south of Geum River and north of Noryeong Mountains, Yeo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 The summary is as follows.
This paper reviewed the article of King Onjo of Baekjebongi(百濟本紀) in Samguksaki (三國史記) and literature material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Byeokgolje which were materials on Baekje's annexation of Mahan before the reign of King Geunchogo, and also reviewed the Jinguki(神功紀) of Nihonshoki(日本書紀) which was material on annex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The results of the review showed that all three materials lack of evidence that Baekje's annexation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be convinced that the prevailing theory before the 1990s was a theory proven through literature material.
This paper also reviewed Baekjejeon(百濟傳) of Chinese official history and Oujinki(應神紀) of Nihonshoki which were literature materials on the trends in southern area of Geum River after the 5th century. Both materials showed that Baekje did not carry out the territorialization of the area until the 5th century.
This article examined various literature materials on the trends of You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s after the 5th century, including the Samguksaki, Nihonshoki, Baekjejeon of Chinese official history. Through these materials, it was confirmed that the Yeongsan River basin became a part of Baekje's territory at some point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and that the small states of Yeongsan River and Seomjin River basin, which had remained in the state of 'subjugation' until the reign of King Muryeong, were territorialized during thereign of King Seong. In addition,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at Seomjin River basin, such as Gimun(己汶) and Daesa(帶沙), was incorporated into Gun(郡: county) which was a territory of Baekje no later than 600, and that the Dam-ro system(擔魯制) was implemented in the 530's and the five Bang(方: province) system in 5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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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성씨문화의 이해

저자 : 박윤선 ( Park Youn-su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1-5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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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성씨는 첫째, 부계(父系) 혈통율과 부거(夫居)의 거주율이 원리였던 사회적 관습의 집약적 표현으로 부계친족집단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둘째, 부계 표지이자 신분 표지로 형성되었다. 부계나 모계의 단계(單系) 출계집단의 형성을 위해서는 동성불혼의 외혼의 관습(exogamy)이, 부계중심의 친족집단 형성을 위해서는 부거제적 혼인 방식이 지배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성혼의 가능성이 포착되고, 부거제는 확인되지 않는 한편 처거제적인 혼인사례가 추론되며, 따라서 모계를 배제한 부계 중심의 친족집단이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즉 백제사회는 성씨문화가 구현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백제에서 성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왕족집단의 경우에도 인명표기에서 성씨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백제 인명에서 성씨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할 수 없다. 또한 부자 사이에도 다른 성씨를 사용하는 등 부계 출계 표지나 동일 친족집단의 구성원임을 드러내고 결속하는 것과 같은 성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백제왕들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성씨를 사용하여 중국과 문화적 동질감을 표현함으로써 외교적인 편의를 도모했다고 생각된다. 성씨 사용 목적이 본래의 역할과 다른 것이다.
성씨의 가능성이 있는 이름으로서 살펴본 동명이인들에는 왕명이 상당히 많다. 고이, 동성, 기루, 삼근 등 백제왕의 이름들을 후대 왕족들이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이는 성씨 단계에 진입하였고, 동성은 아직 성씨화에 이르지 못한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모계 친족집단명 혹은 백제 고유 단어의 가능성이 있는 기루, 단순히 후대왕들이 재사용한 선조왕의 이름인 초고·구수·개로 등의 이름들은 각각 그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선조왕의 이름을 사용하여 왕손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신분표지적인 역할을 공통적으로 행한다.
그 밖에 부여계 존칭 해는 백제에서 성씨화되었고, 백제 고유의 막고·갑배 등은 성씨가 아니지만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호칭이었다. 백제 인명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을 드러내는 호칭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재사용된다는 점에서 성씨와 비슷해 보였고, 역할은 성씨와 다르지 않았다. 백제사회는 성씨를 수용하여 사회적으로 적용해가고 있었는데, 성씨 본연의 의미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편 성씨가 표현하는 친족집단과 백제의 실제 친족집단과의 괴리에서 기인한 바였고, 다른 한편 백제에서 성씨의 활용 양상과 성씨의 본연의 역할과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Surnames in China were, first, an intensive expression of the social tradition of patrilineal descent and patrilocal residence. The name was shared by the members of the agnate kin. Second, they were both an indication of patrilineality and social status. For a formation of a patrilineal or matrilineal, thus unilineal line of descent, the prevalent marriage tradition must be exogamy and the patrilocal residence. However while possibilities of endogamy are spotted in Baekje, those of patrilocal residence are not.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ascertain agnatic kinship while ruling out matrilineality. It seems safe to assume Baekje wanted the foundation to realize surname culture.
Even the royal family, who were certain to have surnames, didn't routinely use surnames in records. They also used different surnames between father and son, showing surnames failed in serving their purpose to indicate patrilineality and unite the members of kin. It is also hard to assume the existence of surnames in Baekje at all. It is thought that the kings of Baekje would use surnames in exchanges with China to express a cultural homogeneity and promoting a diplomatic expedience. Thus the role surnames played was different to its origin.
Namesakes, who show possibility of names developing into surnames, tend to take after the names of kings. “Goyi”, “Dongsung”, “Giru”, and “Sam-geun” are names of Baekje kings used by late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Out of these, “Goyi” seems to have developed in to a surname while “Dongsung” has failed to reach that level. “Giru” could be an indicator of matrilineal kin or an indigenous Baekje word. “Cho-go”, “Gu-su”, and “Gae-ru” seem to be simply reused names of earlier kings. While every name differs in its function, the namesake of the names of earlier kings display the fact that the owners are royalty, thus serving its function to show social status.
“Hae”, an honorary title of Buyeo, developed into a Baekje surname. “Mak-go”, “Gap-bae” were not surnames but were titles showing social status. Surnames in Baekje weighed more toward showing social status than indicating patrilineality. People's names in general in Baekje would actively adopt terms that indicated social status, thus being homogeneous in nature to said surnames. Early Baekje was introduced to surnames and was socially adapting to the concept. The surnames failed to full realize their function and were partially integrated into society. This is in part due to the disparity between actual kinship and the kinship surnames expressed, and is also due to the disparity between Baekje's intent in using surnames and their original fun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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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0년 백제의 영역과 加耶故地(가야고지)

저자 : 박종욱 ( Park Jong-u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1-9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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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660년 백제 멸망 당시 실제 영역과 관련 기록의 부합 여부를 검토해보고, 멸망기 영역 관련 기록의 작성 배경과 성격을 살펴보기 위한 글이다. 아울러 가야고지를 중심으로 백제의 실제 진출 범위를 파악하고 그간 誤記로 간주되었던 6帶方·6方 관련 기록을 새롭게 검토하여 가야고지 지배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했다.
먼저 『舊唐書』 및 「大唐平百濟國碑銘」 등 기록상에 남아있는 백제의 지방지배구조는 5方 37郡으로 이해되는데, 『三國史記』 地理志의 백제 군현 기록을 통해 그 범위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5方 37郡의 범위는 소백산맥 서쪽의 신라 熊州·全州·武州 이내 지역, 즉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하였으며, 그것이 곧 기록상에 남겨진 백제 멸망 당시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반면 660년 전후에 소백산맥 너머 가야고지에서 백제 부흥군의 존재가 확인되며, 가야고지 곳곳에서 7세기 이후 백제의 진출 흔적이 나타난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 나제 간 전투 지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지금의 합천과 진주 일대를 기준으로 그 서쪽 지역이 660년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중 거창·함양·산청·하동·남해·진주 지역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영유된 곳으로 추정되며, 합천 일대는 최전방 지대로서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나 어느 정도 유동적인 접경지대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唐書』의 '6帶方'·'6方' 기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기존의 5方 이외에 가야고지를 대상으로 新設된 方의 존재를 상정해보았다. 그 근거로는 새롭게 확보한 영역에 대한 지배체제의 필요성, 대략 6~7개 郡 규모에 달할 정도로 넓은 분포 범위, 對新羅戰 수행에 있어서 方의 군사적 중요성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翰苑』 所引 『括地志』와 『구당서』의 편찬 연대를 검토함으로써, 640년대 이후 가야고지 일대를 편제한 새로운 方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그 당시에 수집된 정보가 『당서』의 6方으로 기록된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렇듯 백제 멸망기 영역과 관련하여 기록과 실제 사이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원인으로 7세기 중엽 對唐外交에서 보이는 신라의 가야고지 영유 의식을 주목하였는데, 가야고지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 주장이 백제 멸망 전후 신라와 당의 협상 과정에 반영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결과 660년 멸망 직후 백제 영유의 가야고지가 신라의 영역으로 귀속되었고, 당은 가야고지를 제외한 백제의 영역 즉 '本백제영역'을 대상으로 5도독부 설치를 구상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구당서』 및 「평제비」 등에 기록된 백제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전쟁의 승자였던 나당 간의 합의에 의한 결과물로 이해되며, 여기에는 가야고지를 본국 땅으로 귀속시키려 했던 신라의 인식과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여겨진다.


This paper is written to examine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real territory of Paekche and records about it at the stage of collapse in 660, and demonstrate the background and characteristics of these records during this period. For this purpose, it will analyze the boundary of Paekche's expansion, mostly centering on the old land of Kaya, Also, the paper will interpret the records about the Six Taebang (六帶方) and Six Pang (六方), which have been considered as the result of miswriting, to reveal Paekche's domination over the land.
According to the records in the historical texts such as Jiu Tangshu (舊唐書, the Old Book of Tang) or “Datangping Baijiguo Beiming (大唐平百濟國碑銘, “A Stele of Great Tang's Pacification of Paekche Kingdom”),” Paekche's structure of local governance consisted of five Pangs (方) and 37 Kun (郡, prefecture). This paper also estimated the boundary of this governance through the records about Paekche's prefectures and counties in Samguk Sagi (三國史記,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s a result, it is confirmed that the boundary of five Pangs and 37 Kuns were likely within the area of Silla's Ungju (熊州, Ung Province), Muju (全州, Mu Province), and Chonju (武州, Mu Province), which are roughly present-day Ch'ungch'ongnam-do and Cholla-do. Arguably, this boundary could be said to be the territory of Paekche before its collapse.
On the other hand, the existence of Paekche's restoration force could be seen everywhere in the old land of Kaya across Sobaek Mountains around 660, as well as the trace of Paekche's expedition after the seventh century. Considering the battlefields between Paekche and Silla recorded in Samguk Sagi, it is possible to assume that the western regions from present-day Hapch'on and Chinju were the territory of Paekche until 660. Among these regions, Paekche's control over Koch'ang, Hamyang, Sanch'ong, Hadong, Namhae and Chinju were relatively stable, while Hapch'on, the frontline against Silla, would be occasionally unstable borderland.
In regard to this argument, by actively interpreting the records about Six Taebang andSix Pang in Tangshu, this paper estimated the existence of the newly established Pang in the old land of Kaya other than the previous five Pangs. The evidences for this suggestion are Paekche's 1) inevitable necessity of the government system for the newly secured land, 2) range distribution as wide as six or seven prefectures, and 3) militaristic importance of Pang in the war against Silla. Also, by analyzing the compilation date of Kuodizhi (括地志), which was quoted in Hanyuan (翰苑), and Jiu Tangshu, it is likely that there was a new Pang established through organizing the old areas of Kaya after 640. Later, the information collected during this period was recorded as Six Pang in Tangshu.
Through this interpretation,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at there was a gap between the record and reality about the territory of Paekche at the stage of its collapse. The reason for this gap was Silla's realization of sovereignty over the old land of Kaya, which can be seen in its diplomatic exchanges with the Tang dynasty in the middle of seventh century. After the collapse of Paekche, Silla's insistence on the sovereignty over the land have presumably reflected on the negotiation between Silla and Tang. As a result, the old land of Kaya, once the territory of Paekche, was returned to Silla after Paekche's collapse in 660, while Tang planned to establish five commanderies (都督府) in the other part of Paekche's territory, which, in other word, was the 'original Paekche territory.' Thus, the territory of Paekche illustrated in Jiu Tangshu or “Datangping Baijiguo Beiming” was basically the result of the agreement between the winners of the war, namely Silla and Tang, which was strongly influenced by Silla's realization and objective to reoccupy the old land of K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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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산강 상류 마한세력의 성장과 백제

저자 : 강은주 ( Kang Eun-ju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1-12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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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상류권은 마한세력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대단위의 취락유적, 영산강양식 토기와 장고분 등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요소들로 마한세력의 성장과 백제화 과정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에 본고는 광주와 담양을 중심으로 한 영산강 상류권 마한·백제 생활유구와 분묘유구를 망라하여 유구별 현황을 검토하고 토기 편년을 기준으로 3단계를 설정하여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생활유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2,600여 기가 넘게 확인된 주거지로, 300여 기가 넘게 확인된 유적이 4개소가 있다. 방형건물지는 주로 광주지역에서 5세기 중엽 이후 확인되고 있으며, 지상건물지는 다양한 형태 중에서 정면 2칸×측면 2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토기가마는 광주 행암동 22기를 제외하고는 한 유적에서 1~4기 정도 분포하며, 그외에도 저장용으로 볼 수 있는 수혈뿐 아니라 제철유구, 저수유구, 구 등이 확인된다. 분묘유구로는 분구묘의 형태별 변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장고분이 6기 확인되고 있다.
생활유구와 분묘유구 출토유물 중 시기 편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토기를 기준으로 영산강 상류권 문화상은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Ⅰ단계(3세기~5세기 전엽)는 마한의 공통적 정체성이 공유되면서 독자성의 발판이 형성된다. 경질무문토기에서 이어지는 재지세력의 지속적인 성장은 대단위 방형계 취락의 형성과 제형 분구묘의 조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유입되는 외래적 요소들은 단발적 혹은 간접교류로 추정되며 주변의 확산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Ⅱ단계(5세기 중엽~6세기 전엽)는 대단위 취락이 지속되면서 방형건물지 및 토기가마군이 등장하고 다양한 분구의 형태가 확인된다. 다양한 외래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토기에 있어 영산강양식이 형성되고 성행하는 시기로, 이는 곧 유입되는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조합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산강 상류권은 금강유역권 백제-영산강 상류권-가야-왜의 교류에 있어서 물류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Ⅲ단계(6세기 중엽 이후)는 백제토기의 일원화를 통해 백제 지방지배로 편제됨을 파악할 수 있다.


There are many archaeological elements in the upper region Yeongsan River represented by large-scale settlement, Yeongsan River style pottery, and the Keyhole-shaped mound tombs that provide us the growth of Mahan Power Group as well as their gradual transformation to Baekje. In this paper, the author reviewed the current status of the remains in the upper region Yeongsan River centered in Gwangju and Damyang, including various household relics and other relics unearthed from the tombs dating back to Mahan and Baekje, and traced their evolution by setting three distinctive stages based on the chronological development of the pottery.
What accounts for the largest share of the household relics are over 2,600 confirmed ancient homes, with four sites among them each holding 300 residences. The rectangular building sites dating back to the mid-5th century have mainly been identified in the Gwangju area along with various types of above ground buildings, with the majority of them having the structure of two frontal sections and two lateral sections. One to four pottery kilns were found in inch site, with the notable exception of 22 sites in Haengam-dong, Gwangju. In addition, steel relics, reservoir remains, and spheres as well as pits for storage were identified here as well. Tomb remains can be identified by tracing the changing shape of Bungu Tombs. In particular, confirmed the Keyhole-shaped mound tombs is six.
The cultural aspects of the upper region Yeongsan River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based on the pottery that were classified for their chronological development among the household relics and other relics unearthed from the tombs. In Phase I(3rd to early 5th centuries), the basis of its cultural uniqueness was established while retaining the Mahan's shared identity. The large settlements and trapezoid tombs amid continued growth of local Power Group following the emergence of hard pattern-less pottery demonstrates the growth of inthis region. The extraneous factors introduced during this period were presumed to be due to one-off or indirect exchanges, which did not spread to the surrounding regions. Phase II(mid-5th to early 6th centuries) in which large settlements continued to persist is notable for rectangular buildings and pottery kilns. During this period, the Yeongsan River style pottery was formed and prevailed largely spurred by various foreign factors, suggesting the presence of local factors that selected and combined these incoming elements. The upper region Yeongsan River is believed to have served as a logistical hub in the exchanges between the Geum River Basin, the Baekje-the upper region Yeongsan River, Gaya and Wae. It can be concluded from the consolidation of Baekje pottery that the area has gone under the control of Baekje in Phase III(periods after the mid-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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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제 웅진기 왕궁의 위치와 왕도의 구조에 관한 재검토

저자 : 이현숙 ( Lee Hyun-sook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9-16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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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백제가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백제 王都로서의 역사적 실체가 구체화되어 있는 古都이나, 백제 웅진기 왕도의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 웅진왕도가 지금의 공주시 일원임이 분명하고, 『翰苑』과 같은 문헌에서 백제의 왕도 혹은 왕성을 의미하는 고마성이라는 명칭으로 熊津城을 기록하고 있어, 공산성이 백제의 왕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공주에서 조사된 백제시대 건물지는 주로 공산성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현재 공주시가지에서는 일부 유물층이 확인된 사례가 매우 제한적으로 확인된다. 공산성은 쌍수정 남쪽의 '추정왕궁지'에서 와당과 청동제 향합 등 중요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백제의 중심 의례건축공간으로서 정전과 같은 기능의 건물지군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공북루 남쪽의 왕궁관련유적은 문서행정, 관영공방 등 국가운영의 중요시설이 있는 공적인 건축공간으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편전과 같은 중심건물군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공주 시가지의 평면규모는 남북 3.5㎞, 동서 0.8~1.5㎞ 내외로, 남북으로 긴 분지상의 형상으로, 공주시의 외곽에 자연적인 산지가 돌려져 나성과 같이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시가지의 중앙에 남북으로 '제민천'이 흐르면서 주변의 유역면적이 넓게 형성되어 있어서, 공주시가지 내 실질적인 가용면적은 '풍납토성'과 동일한 규모이다. 따라서 지형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는 웅진왕도의 공간구조는, 몽촌토성과 규모가 거의 같은 왕성인 웅진성으로서의 공산성과, 풍납토성과 가용면적이 거의 유사한 평지의 웅진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웅진기 백제 왕궁은 계획적인 공간구획으로 건물을 축조한 공산성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웅진천도 이후 웅진성 내 왕궁의 확대와 더불어 도성 내 시가지의 형성은 상호 연동하여 발전되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즉 왕성 내 공간이 집중화되고 기능에 따라 건물의 공간이 분화되는 과정은 웅진왕도의 도시형성과 발전과정의 축소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웅진성과 왕도의 竝列的 도시발전 모습은 사비천도와 더불어 계획적인 도성 구조의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Gongju(公州) is an ancient city that is solidified with its historic status as the capital of Baekje when it moved its capital to Woongjin(熊津) in 475. However, there is very little literature or archaeological data available to display the structure of the royal city of Baekje during the Woongjin Era. Obviously, it is clear that the Gongju area today was the capital of the Baekje during the Woongjin Era, and the documents, such as, 『Hanwon』, recorded Woongjin-seong (Woongjin Fotress) with the name of Goma-seong(公山城), indicating the royal city of Baekje or palace of Baekje that there is no doubt that Gongsan-seong was the palace of Baekje(百濟). Notwithstanding such fact, there have been various discussions regarding the location of the royal palace of Baekje during the Woongjin Era. Therefore, for the historical research on the location of the royal palace of Baekje during the Woongjin Era, the outcome of archaeological survey on the Gongsan-seong and downtown of Gongju has been studied and it is resulted in highly likelihood that the royal palace of Baekje during the Woongjin Era existed in the Gongsan-seong.
The Baekje sites surveyed in the Woongjin City to this point have been concentrated mainly in Woongjin-seong(熊津城) also known as Gongsan-seong, while there has been no case of surveying in details if it is a building site of the Baekje era with the exception of cases where the relics of limited scope were confirmed in the Gongju downtown, there is no case of surveying in the building sites during the Baekje Era in details. The plane scale of the downtown as the central part of the Woongjin City is 3.5㎞ south to north and 0.8~1.5㎞ east to west that it has the shape and form of long plateau on the south to north direction. The outskirt of Woongjin is surrounded by natural mountain ridges to form a naseonng(羅城) (external fortress)-like boundary and 'Jemincheon(濟民川)' flows to south to north to form a broad basin area with the downtown center that the actually available area is almost thesame as 'Pungnam-toseong(風納土城)'. In other words, the Woongjin City has the limited scale to be summarized as consisting for Woongjin-seong that is known to have almost same size with Mongchon-toseong(夢村土城) and the Woongjin City of plane that has similar available area with Pungnam-toseong.
As confirmed in the records, the facilities inside the Woongjin-seong, the palace during the Woongjin Era, would be difficult to discuss in exclusion of possibility as a 'royal palace', and the archaeological evidences confirmed to this point would be considered as sufficient to describe above findings. However, based on the location, scale of the building site surveyed in the Woongjin-seong, excavation of the roof-tiles, and so forth, it indicates that there is certain difference in functions and grading system for each respective site.
Accordingly, it is reasonable to consider that the location of the royal palace during the Woongjin Era Baekje was existed inside Woongjin-seong (Gongsan-seong). Furthermore, the functional differentiation and expansion of space of its internal spatial structure of the Baekje Fortress during the Woongjin Era could be understand as the scale-down version of city formation and development process of the Woongjin City. It is reasonable to consider that, after moving to Woongjin, the expansion of the palace in Woongjin-seong and formation of downtown in the city would be considered as mutually interfaced to develop, and the compatible city structure of Woongjin-seong and capital was continued after moving capital to Sabi(泗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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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함양박물관(咸陽博物館) 당금집호(唐金執壺)와 백제미륵사지(百濟彌勒寺址) 금사리호(金舍利壺)의 비교 연구

저자 : 楊瑾 ( Yang Jin ) , 추교순[번역]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69-21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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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唐墓에서 출토된 金執壺는 형태와 문양 그리고 제작기술면에서 백제 彌勒寺址 金舍利壺와 비교할 만한 점이 있다. 그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여 볼 때, 金壺의 세속화와 종교적 기능과 의의는 모두 財富와 權力이라는 문구와 서로 관련이 있다. 박물관과 불교사원의 맥락에서 볼 때 金壺는 唐과 백제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고 또 당과 백제와 서방문화의 연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실크로드에 걸쳐 이루어진 무역과 인적자원, 종교의 네트워크를 통한 金壺의 비교연구 진행은 唐과 백제 관계 및 나아가 백제 遺民의 唐에서 활동에 대해 유익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ere are some obvious similarities between gold ewers in Xianyang Museum collection and findings from the site of Baekje Maitreya Temple, implying the possibilities of shared origins in style, decorative motif and techniques. Due to the contacts between Tang Empire and Baekje Kingdom, especially after the fall of Baekje Kingdom, the author attempts to trace the archaeological discoveries and to explore the remains of Baekje people who stayed in the Tang territories. Although there are no clear and persuasive evidences to reveal the relevance of the Xianyang Museum ewer with Baekje people, more comparable elements could be investigated. From the broader historical context during that period, cultural exchanges between West and East were motivated by people, including Buddhism,which was introduced into China and became the popular belief, as well as one of the important means to secure the ruling of royal families. Buddhism was brought into other countries including Baekje via land or sea road, and flourished there. These two examples of gold vessels suggested a multidimensional networks of cultural communications and inte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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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자료소개 : 부여 능안골고분군 조사 개요 - 2017~2019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

저자 : 이화영 , 심상육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3-232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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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안골고분군(사적 제420호)은 199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67기의 백제 고분이 조사되었고, 시굴 및 분포조사를 통해 사적지정범위 이상으로 고분군이 조영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무덤의 구조는 횡혈식, 횡구식의 석실묘와 횡혈묘, 옹관묘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장품으로는 금제 및 금동제이식, 은제관모장식, 은제요대장식 등이 출토되어 염창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 사비기 귀족의 무덤군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사비기 석실의 축조와 매장에 관련한 새로운 요소들이 확인되었다. 먼저 백제 사비기 다양한 묘제간 축조관계를 층위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묘지 선정부터 봉분 조성에 이르기까지 매장 프로세스뿐만 아니라 장송의례의 일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흔적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자연지형적 요인으로부터 무덤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지반을 강화시키는 전략적 방식을 채택하여 반영한 점, 그동안 조사 사례가 소략하여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비기 석실의 봉토에 대한 단서를 획득하였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새로운 요소들이 주변 사례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사비백제 매장 프로세스를 파악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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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 : 『부여 능산리 1호(東下塚)』 (국립부여박물관)

저자 : 김낙중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29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3-239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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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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