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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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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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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101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857
사총
101권0호(2020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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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홍장(李鴻章)-라디젠스키 천진(天津) 회담(1886)의 재고찰 -이홍장(李鴻章)의 의도와 역할을 중심으로-

저자 : 이동욱 ( Lee Dong-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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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86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조선문제를 두고 진행된, 청나라의 전권대표 이홍장과 러시아 대표 라디젠스키 사이의 천진 회담을 검토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이 회담을 거문도 사건 연구의 일부로서, 또는 19세기말 중러 관계 연구의 차원에서 검토한 것과 달리, 이 논문에서는 회담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홍장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의 국내 정치와 대외 관계에서의 의도와 역할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회담과 관련된 중국 측 사료와 러시아 자료의 비교 검토, 그리고 중국 측 사료의 검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중러 비밀협정을 통한 조선의 영토 보전과 현상 유지의 의도, 그리고 중러 협정을 통해서 청 정부 내부의 조선에 대한 강경론을 억제하려는 시도 등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홍장을 청 정부의 대변자로서 파악하면서 양자의 입장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본고에서는 청조의 조선 정책에 대한 이홍장의 입장 변화 및 다양한 정책 건의, 그 의도의 좌절 등을 추적함으로써 당시 청조의 조선 정책 형성과정과 이홍장 개인에 대한 연구의 깊이를 심화하고, 조선에 대한 청 정부의 종주권 강화라는 선입견을 벗어나 청 주도의 조선 중립론 등 이홍장이 제시한 조선 정책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This study examined the Tianjin Conference between Li Hongzhang as a plenipotentiary representative of Qing and Ladygensky as a Russian representative, which was held on the matter of Joseon from August to October, 1886. In particular, the Chinese and the Russian historical materials were compared and analyzed especially focusing on Li Hongzhang who planned and led the conference, and his intentions and roles in the domestic politics and the foreign relations were investigated in priority through the examination of the Chinese historical records. He intended to preserve Joseon territory and maintain the status quo through the Sino-Russian secret agreement, and for this, to suppress the resolute stance toward Joseon in the Qing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while previous studies tended to consider Li Hongzhang as a representative of the Qing government and to understand the positions of the both parties as the same, in this study, the changes of Li Hongzhang's stance of Qing's policy of Joseon, his suggestions of different policies, and the frustration of his intentions, and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Qing government's policy of Joseon and Li Hongzhang as a person were investigated in more depth. And the diverse aspects of Li Hongzhang's policy of Joseon, such as his position on the Joseon neutrality theory led by Qing, were examined free from the prejudice of the consolidation of the Qing government's suzerainty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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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교의 국교화: 중화민국 초기 중국의 공교운동, 1912-1916

저자 : 채준형 ( Chae Jun Hy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1-94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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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운동과 위안스카이 정부에 의한 유교적 상징과 의식의 부활은 오랫동안 시대착오적인 사건으로 위안스카이 정부의 퇴행적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이해되어 왔다. 반만(反滿) 슬로건이 1911년 혁명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화정 성립 직후 중국 사회는 명확하고 잘 정의된 가치를 결여한 지성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유교적 가치는 붕괴되고 민족주의적 가치는 모호한, 여러 대안적인 담론이 경쟁하는 시기였다. 대부분의 중국 엘리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목표 중 하나는 강력한 민족 국가를 구축하고 국부를 늘려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민족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 정부에 기반한 정치적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공교운동은 이러한 중국 엘리트들의 지적 고뇌의 산물이었다. 금문학파의 경전해석 전통을 계승한 공교운동의 지지자들은 유교적 가치를 국가기구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대중이 종교의 힘으로 유교 가치를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민족적-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다. 이는 공교운동의 주창자들이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와 서구 자본주의 사이에 일정한 양립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의 내면화는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바람직한' 중국 시민을 주조해내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교운동에 대한 위안스카이 정부의 태도는 상당히 양가적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종종 반동적이고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부패한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다소 불공평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가 혜안을 가진 뛰어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흐름은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분명히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과 서구와의 관계, 현재와 과거 사이의 연속과 단절, 생존에 필요한 편협한 민족주의와 보편 제국의 기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는 중국 엘리트들에게 커다란 과제로 남겨져 있었다. “서구적” 가치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유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중국 문화와 중국적 가치의 정서적 원천으로 여겨지는 것 뿐이었다. 공교운동에서는 중국 사회에서 유교, 또는 유교적 가치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단선적으로 진화하는 “서구적” 모델을 따라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 뿐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The Confucian religion movement and Yuan Shikai's revival of Confucian symbols and rituals had long been regarded as a symbolic event of anachronistic historical retrogression and as a problematic relationship between conservative elites and a corrupt government. Though anti-Manchu sloga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embryonic stage of the revolution of 1911, the early republic was in transition without clear, well-defined values. Confucian values were disintegrating, and nationalistic ones were ambiguous. It was also a time of competing alternative discourses. For most Chinese elites, one of the most crucial national objectives was to establish a strong nation-state and to increase national wealth. They believed that political stability based on strong central government was indispensable to achieve the goals. The Confucian religion movement was one of the products of the intellectual anguish of a group of Chinese elites. The proponents of the Confucian movement who inherited the New Text School's Confucian hermeneutic tradition tried to achieve national objectives not only by applying Confucian doctrines to the state apparatus but also by letting the Chinese mass interiorize Confucian values by the power of religion. Moreover, the Confucian elites saw a certain compatibility between traditional Confucian values and these of Western capitalism. To promote rapid modernization or industrialization which would secure national survival, internalization of Confucian value might work to mold 'good' Chinese citizens. However, Yuan Shikai government's attitude toward the Confucian movement was quite ambivalent. Yuan is often portraited as a reactionary, ambitious, and corrupt politician. This evaluation to his presidency is somewhat unfair. He was by no means a far-sighted statesman, but he unterstood the political tendency of the time. Chinese intellectuals evidently suffered from an identity crisis ; preoccupation with China's relationship to the West, with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and with the question of how to reconcile a parochial nationalism necessary for survival with the memories of universal empire. Having postulated that against the onslaught of “Western” values, Confucianism could have no role to play but that of a symbol of nationalist emotional attachment, it may then dismiss as mere emotional attachment any effort to cope with Confucianism as a living source of intellectual values. Its plausibility depends ultimately on a single fundamental premise: unilinear modernization after the model of the “West,” whose values emerge universally as societies modern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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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중세 시칠리아 '편해(遍害)공존'의 교류유형 연구

저자 : 김정하 ( Kim Jung H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5-13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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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중세 시칠리아의 역사는 문명교류의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편해(遍害) 공존'의 관계구도로 정의된다. 편해는 생물학의 전문용어로서, 본 연구에서는 공존의 여러 관계구도들 중에서 한 쪽의 이익과 다른 한 쪽의 손해가 지속되는 관계를 가리킨다. 한편, 두 존재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는 상리(相利) 공존에 해당한다.
편해의 구도로 점철된 시칠리아 역사의 배경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지중해의 무역과 교역활동에 있어 시칠리아의 지정학적 위치가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리적으로 지중해의 동서를 분리하면서(닫힌 바다) 동시에 이들을 이어주는 열린 바다의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지중해 항해에 필수적인 물과 식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시칠리아에는 원주민들 사이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않았는데, 이 또한 외부세력들과의 관계에서 편해 공존의 교류유형을 형성한 원인에 해당한다.
편해 공존의 유형은 시칠리아의 역사에서 일관된 흐름으로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세부적으로는 로마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다자간 문명교류와 이후의 다양성 기반 문명교류, 게르만의 정복에 의한 지배와 피지배의 문명교류, 이슬람과 노르만-호헨스타우펜 황가의 통치하에서 드러난 접변의 문명교류 그리고 13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배타적 갈등의 중첩형 문명교류가 그것이다.
고·중세 시칠리아 편해 공존의 문명교류를 분석함에 있어 기준은 주체요인들 간 관계 작용의 상호보완성 여부와 중재요인의 개입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 중재는 기존의 역사 현실이 직면한 정치, 이념적인 한계를 변화시키는 원인이면서, 시대의 문명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요인을 의미한다.
시칠리아의 편해 공존을 연구하는 이유는 지중해가 이미 고대부터 오늘날까지도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의 글로벌 사회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분석과 재해석은 다문화 글로벌성의 현대적 함의에 대한 연구에 직결된다.


The history of ancient and medieval Sicily can be defined as a relation structure of 'Amensalism' with the macroscopic point of view of civilizational exchanges. Amensalism is a biological term that refers to a relationship in which the benefit of one side and the loss of the other persist among the various relations structures of coexistence. Conversely,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benefiting each other is a 'Mutualism' in the Civilizational Exchanges.
The background of Sicilian history, marked by a composition of Amensalism, can be found in the following facts. First, it is because the geopolitical position was of absolute importance in the trade and trade activities of the Mediterranean. Second, it is located at the boundary of the Mediterranean Sea, which separates eastern and western part of Mediterranean(the meaning of 'Closed Sea') and at the same time connects (the meaning of 'Opened Sea'). Third, it was possible to supply enough water and food necessary for sailing in the Mediterranean. In addition, although residents of various origins lived in Sicily, the fact that independent political forces were not formed between them could be pointed out as the reason for the formation of a 'Amensalism Type' of Civilizational Exchanges in relation to external forces.
'Amensalism Type' of Civilizational Exchanges has not been revealed only as a single consistent flow in Sicily's history. In detail, there were multilateral civilization exchanges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Roman Empire and later diversity-based civilizations exchanges, dominant-dominated type of civilization exchanges under the Germanic rule, Interaction Type of Civilization Exchange in the era of Islam and the Norman-Hohenstaufen Family, and 'Overlapping Type' of Civilization Exchange since the mid-13th century.
In analyzing 'Amensalism Type' of Civilizational Exchanges of the ancient and medieval Sicily, the criterion was the complementary of relational interactions and the intervention of mediation factors. In particular, in relation to the latter, mediation factor was set as a factor that changes the politics and ideological limitations faced by the existing historical reality, as well as a factor that changes the civilization paradigm of the times.
The study on the 'Amensalism Type' of Civilizational Exchanges in Sicily is related to that the Mediterranean is a global society of multiracial, multi-cultural and multi-religious, from ancient times to today. And also, the application of a new perspective and efforts to reinterpret this are closely related to the modern implications of multi-cultural glob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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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과 영국의 정치학자 해롤드 라스키의 사상적 경로를 비교분석하고 그것이 20세기 초반 미국과 영국 정치사에서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었는지 탐구한다. 1915년 처음 만난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직전 이념적 차이를 이유로 결별할 때까지, 두 사람의 뒤얽힌 정치적 여로는 하나의 뚜렷한 궤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들의 입장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유지반에서 출발하여 각각의 양극단을 향해 서로 엇갈리며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리프먼은 국가 주도의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이후, 1920년대 다원주의의 전도사로, 뉴딜 초기에는 케인스주의의 화신이 되었다가, 1930년대 후반에 들어 소위 '자유시장'의 신성함을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로 변모해나갔다. 반면 라스키의 경우 개인의 자율성을 국가의 주권보다 우선하는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시작하여, 점차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내세웠던 엘리트 주도의 점진적 개혁의 방향으로 이끌리다가, 1930년대 중반 이후 공산주의 혁명과 무산계급 독재를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리프먼의 자유주의가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요구에서 출발해 국가의 압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동해 나갔다면, 라스키의 사회주의는 반대로 다원주의의 가능성에서 중앙집권의 필연성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두 사람의 이러한 엇갈린 경로를 당대 미국과 영국 진보정치 흐름 속에 위치시키면서, 리프먼과 라스키사이의 개인적이고 사상적인 교류가 두 사람이 자국 정치를 분석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intertwined political journeys of American journalist Walter Lippmann and British political theorist Harold Laski during the interwar period. Situating their interaction within American and British political contexts, this article argues that their divergent ideological paths were shaped by and helped reshape the divergence of Anglo-American progressivism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Since they had met in 1915, Lippmann and Laski maintained close friendship and exchanged ideas on a wide range of issues in their countries' politics. At the heart of this transatlantic conversation was the role of central state in reforming capitalism. Before World War I, their ideas was overlapped closely with each other, reflecting the convergence of liberalism and socialism in Anglo-American politics of that time. Through their interactions as well as engagement with their countries' political developments, their views of state diverged steadily. Lippmann, who began his career as a statist liberal attached to Theodore Roosevelt's New Nationalism, became increasingly obsessed with the danger of central state to individual freedom. Conversely, Laski, once a self-proclaimed libertarian socialist upholding political pluralism, gradually moved toward Fabian socialism's state-centered, top-down approach. On the eve of World War Ⅱ, Lippmann embraced the neoliberal notion of free market, as the rise of totalitarianism seemed to confirm his concern about a menacing strong state, while Laski converted to revolutionary Marxism concluding that reforming capitalism within the existing system was a hopeless project. As this article aims to demonstrate, their protean ideologies and eventual divergence illustrates how American liberalism and British socialism developed a set of common principles and why and where this Anglo-American progressivism collap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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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소련의 유대인 탄압에 대한 영국의 정책, 1970-1974

저자 : 원태준 ( Won Tae Jo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7-229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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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꺾고 승리함에 따라 소련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되자, 소련 정부는 자국 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민을 과도하게 통제하는 등유대인들에 대한 탄압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70년 6월에 레닌그라드 공중납치 음모 사건이 발생하자 소련 당국은 주모자 두명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소련 정부의 행동에 크게 분노한 영국 내의 주요 유대계 인사들과 유대계 조직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소련의 유대인 탄압 중지를 위해 에드워드 히스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세계 인권 선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인종 차별 철폐 협약 등의 조약들을 준수하고 유대인들의 인권을 존중하라고 소련 당국을 압박할 것을 주문하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나 히스 정부는 타국에서 발생하는 타국시민의 문제에 대해 영국이 개입할 수 있는 '당사자 적격'을 갖고 있지 않고, 제시된 조약들에 대해 소련이 유엔에서 기권표를 행사하거나 아직 비준을 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이 소련을 제소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소련의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소련을 압박하기를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하지만 히스정부가 소련에 대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꺼려했던 실제 이유는 영국의 외교적 위선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또한 그 당시에 식민지 국가 및 민족에 대한 독립 부여 선언이라는 국제 협약을 위반하고 있었고,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에게 무기를 판매하기로 하였으며, 로디지아의 소수 백인 정권과의 협력을 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북아일랜드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여 자국민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Israel's victory against Egypt and Syria in the Six-Day War of June 1967 unleashed a surge of nationalist sentiment among the Jewish people living in the Soviet Union, leading to Moscow's heavy persecution of its Jewish citizens which included placing heavy restrictions on their emigration to Israel. This in turn brought about the Leningrad Hijack Plot of June 1970, to which the Soviet authorities reacted harshly by initially sentencing the two main defendants to death. Consequently, prominent Jews and Jewish organisations in Britain, as well as renowned politicians and ordinary members of the British public, exerted pressure on the Edward Heath government to do more to alleviate the plight of Soviet Jews. Demands were made on the Heath administration to invoke international agreements such as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the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and the 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Racial Discrimination in order to corner the Soviet government into adhering to these agreements and guaranteeing the rights of its Jewish citizens. The Heath administration refused to do this on the official basis that the British government had no locus standi to interfere, that the Soviets had either abstained when voting in the United Nations had taken place on the aforementioned agreements or had yet to ratify them, and that the British government had no power to compel the Soviet government to complying since Moscow did not recognise the authority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But the Heath government's reluctance to act in reality stemmed from the fact that by taking action Britain would open itself to accusations of blatant hypocrisy by the international community; Britain at the time was in violation of international conventions such as the UN Declaration on the Granting of Independence to Colonial Countries and Peoples, had resumed selling arms to John Vorster's apartheid South Africa, was attempting to seek a deal with Ian Smith's Rhodesia and, most crucially of all, had sent in troops into Northern Ireland to deal with the escalating violence in the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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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 자본주의의 미래 상상하기: 1980년대 이후 국내 자본주의의 성격과 전망에 대한 담론과 논쟁들

저자 : 장진호 ( Jang Jin-h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1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1-26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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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주류 경제학적 설명의 시도들과 별개로, 1980년대초 서구 학계에서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설명하며 새롭게 부상한 '발전국가론'은 이후 한국과 대만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설명하는 대안적 이론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외에서의 이런 연구 및 이론화와 별개로, 국내에서는 1980년대부터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와 논의들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부과된 특수한 문제와 해결과제들에 대응하며 등장해왔다. 이러한 논의들은 서로 차별화된 입장들로 형성되어 상호간논쟁 과정을 거치며, 각 입장을 더 명료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우선 1980년대에는 신군부 정권의 부상과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이전까지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보다 급진화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이론과 사회변혁 노선에 기반해 당대의 자본주의적 한국 사회성격과 특징들을 인식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담론 진영들이 형성되었고 상호간 논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90년을 전후로 동구 사회주의권과 소련의 붕괴 및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국내에서의 소비자본주의의 진전은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특성들과 전망에 대한 총체적인 사 회과학적 관심 및 분석의 침체와 이전 논쟁의 소멸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또한 이전 시기 '자본주의의 극복'과 관련된 문제설정을 '새로운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이해와 비평'이라는 문제설정으로 옮아가게 하며 1990년대 국내에서 문화연구에 대한 논의와 담론의 폭증을 불러왔다. 하지만 1997년의 외환위기는 'IMF체제' 하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국내경제에 강제하며, 이후 2000년대까지 한국경제의 개혁 및 전환과 관련된 새로운 관심과 논의들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 진단과 해결책을 IMF 등과 공유하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정책당국자들의 입장과, 재벌중심 구조를 마찬가지로 위기의 원인으로 보되 사회불평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부작용들을 문제시하지만 소액주주운동 등과 같은 시장규율과 엄정한 법의 집행과 같은 자유주의 확립을 통해 '개혁자유주의적'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0년대 초중반의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을 발전국가를 약화시켜 위기를 불러온 원인으로 보고 경영권 보장을 원하는 재벌가족과 투자 확대, 고용 증대 및 법인세 증대 등을 필요로 하는 이해당사자들 간의 사회적 대타협과 복지국가 대안을 중시하는 '신개발주의적' 입장 등이 분화되었다. 특히 후자의 두 입장들은 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현황 진단과 미래 대안을 둘러싸고 대립적 의견을 표출한 주요 논쟁 당사자들이 되었다. 국내에서 '자본주의 극복' 대안을 사회운동을 통해 모색한 1980년대의 급진적 담론들에 기반한 논쟁들, 혹은 1990년대와 같이 '소비자본주의' 현상에 대한 문화 연구 경향의 기술에 집착하던 과거의 논의들과 다르게, 200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와 담론들은 현실의 구체적인 정치경제상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보다 '제도적 혹은 정책적으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The rapid growth of the South Korean economy has been examined by many foreign scholars since the 1960s. Apart from researches in mainstream economics, there appeared a 'developmental-state' approach to explaining the East Asian economic miracle since the Second World War as an alternative theoretical paradigm from the early 1980s. But domestically in South Korea, there have been also analytical discourses and debates around such issues as the nature of Korean capitalism, its characteristics and future prospects. Domestically critical discourses and even debates on Korean capitalism have been made and changed in the historically-specific contexts of contemporary South Korean capitalism since the 1980s. During the 1980s, political repressions continued under the new military regime while the Korean economy grew rapidly, which radicalized social and students' activism for democracy. Leftist ideologies such as Marxist-Leninism or North Korean Juche ideology influenced local intellectuals and activists in the field of discourses and debates analyzing Korean capitalism of the time and prospecting for post-capitalist alternatives. But the fall of East European communist regimes and the USSR around the early 1990s as well as the blossoming of consumerist capitalism in South Korea at that time resulted in the sudden disappearance of radical socialscientific discourses and debates of the previous decade. Instead, cultural studies prevailed in academic discourses during the early and mid-1990s under changed socio-historical conditions. In 1997, however, the financial crisis occurred unexpectedly in the country and neoliberal reforms in the economy were strongly implemented domestically under the so-called 'IMF regime.' Around such issues as the causes of the 1997 crisis, the changed nature of Korean capitalism after neoliberal reforms, and its future prospects, there were made several discursive factions and debates among them until the 2000s. Domestic discourses on Korean capitalism have historically been constructed regarding its radical overcoming and social revolution in the 1980s, regarding studies of mass cultural consumption in the 1990s, and regarding its institutional reforms in the 20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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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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