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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총 update

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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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97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826
사총
97권0호(2019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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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한(三韓)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저자 : 이전 ( Lee Je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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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경에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변한·진한 등의 다수 종족들이 한반도와 그 인근에 살고 있었다. 이 중에 삼한이라 불리는 마한·변한·진한의 세 종족은 한반도 중남부에 널리 분포하였다. 3~6세기의 수백년 동안 마한·변한·진한과 다른 이질적인 유이민들이 동화를 거쳐 삼한이라는 비교적 동질적인 종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7세기에 통일신라는 삼한족 혹은 그 영역을 통일하여 출범한 것이었다. 통일신라가 출범한 이후 200여 년이 지난 후에 한반도 주민들은 삼한(마한·변한·진한)과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을 대응관계로 놓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을 공히 통일신라의 선대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0세기경부터 삼한은 어떤 경우에는 마한·변한·진한의 세 종족을 의미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왕국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나라 사람 혹은 영역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고문헌에 나타나는 삼한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한반도 주민들의 문화변동이 진행되면서 한반도 주민들의 삼한 개념도 점진적으로 변화하였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Historical documents and records tell that Ma-han, Byun-han, and Jin-han were three major ethnic groups, distributed since early times widely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probably to the south of the line connecting the mouth of Daedong River and the Bay of Wonsan). Around the third century, the three ethnic groups were collectively called Sam-han due to the similarity of them. During the period from the third century through the seventh century, the three ethnic groups and the other minority(immigrant) peoples had been much assimilated into one ethnicity, so-called Sam-han. Around the tenth century, people began to think that the term Sam-han meant not only the Sam-han ethnic group but also the past three kingdoms(Goguryeo, Baekje, and Shilla) or past three ethnic groups(Ma-han, Byun-han, and Jin-han). The Sam-han concept in ancient writings is very diverse due to the assimilation of the ethnic groups in the Korean Peninsula. The assimilation process of the ethnic groups should be the focus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Sam-han concept in the history of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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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전기 선마의(宣麻儀)의 구성과 의례 검토

저자 : 김보광 ( Kim Bo Kwa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7-7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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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임명문서 중 대관고로 임명받는 관직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의례인 「선마의」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임명문서양식과 건덕전이라는 의례 거행 장소 등을 통해 고려가 당제의 영향 속에서 이 의례를 설정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선마 대상 관인의 집에서 거행되다가 궁중, 특히 건덕전으로 변경되어 거행되었음을 확인하였는데, 고려에서 宰臣의 관제상 위상을 높이면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비한 결과라 하겠다. 특히 선마의가 당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의례의 대우를 받는 재신만을 대상으로 한 의례로 정비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Seonma(宣麻) is an act of proclaiming a document to the bureaucracy to appoint high-ranking official posts. So Seonma-ui(宣麻儀) is a ceremony to proceed to the Seonma. In the early Goryeo dynasty, only high-ranking posts in the Chancellery such as chancellor (門下侍中), is the object of this ritual. In this article, I tried to examine the ritual feature of 'Seonma-ui(宣麻儀)'.
I compared this ritual with the ritual of appointing a senior official in the Tang Dynasty ; I used the procedure and place of ritual as a comparative element.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ritual structure of Koryo was basically similar to that of Tang dynasty. It is also confirmed that the situation of Koryo is reflected, because the office to be ritual is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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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20~30년대 대구·함흥 지역의 전기 공영화 운동

저자 : 조명근 ( Cho Myung Ke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81-11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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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대구와 함흥의 전기 공영화 운동을 추진 주체를 중심으로 검토하는데 있다. 일제시기 주요 도시에서는 민간회사의 전기 독점으로 인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었으며 이는 전기 공영화 운동으로 발전 되었다. 공공성에 기반한 공영화 운동은 1927년 평양 부영화가 성공되면서 각 지역에 파급되었다. 그리하여 1929년에는 부산과 대구, 1931년에는 경성과 함흥 등지에서 공영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운동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협의)회의 태도이다. 지방의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서 이후 진행과정에 큰 차이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구는 전기 요금 인하에만 치중한 채 부협의회가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전기 공영화의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운동도 1929년 7월 한 달에만 집중되어 사실상 전기 공영화라고 부를 수 없는 정도이다. 반면 함흥의 경우 수 차례에 걸친 시민대회에서 조직된 기성회가 부회 선거에 공영 찬성론자 당선을 위해 힘썼고 실제로 부회는 찬성론자들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부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공영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영안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부(협의)회나 부 당국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전기 공영화는 진전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기 지방의회는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사회의 공론화된 의제를 현실화시켜 줄 수 있는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movement for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in Daegu and Hamheung regions in the 1920s-1930s, focusing on the ownership of th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Korean people raised complaints against private companies' monopoly of electric power in major cities, which resulted in a movement for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The movement based on the publicness of electric power spread across different regions in Korea after the success of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in Pyeongyang-bu in 1927. Thereafter, the movement spread to Busan and Daegu in 1929 and to Gyeongseong (Seoul) and Hamheung in 1931.
The most significant factor in the progress of such a movement was the attitude of local councils. The movement evolved quite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attitude of the respective local councils. As the local council of Daegu-bu exhibited a very passive attitude, focusing only on reduction in power rates, Daegu-bu failed to achieve practical progress for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In addition, as the movement was waged only in July 1929,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in Daegu-bu practically turned out to be a failure. On the contrary, in Hamheung, associations organized at multiple civicrallies supported candidates who were contending for the local council elections for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As a result, those candidates held the majority in the local council of Hamheung, thereby leading to the local council's active movement for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and ultimately, the adoption of a bill for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Eventually,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could not progress without the direct involvement of local councils or local authorities of “bu.” In the case of Daegu-bu, local residents' demand for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was not strong enough as compared to that of other local communities, which resulted in a weaker drive for the demand by the local council. In Hamheung, conversion into public management of electric power, which was demanded at civic rallies, was practically pushed by the local council, ultimately resulting in its substantial progress. This indicates that even though local councils at that time played a very limited role, it was the only public institution through which local residents could petition for their own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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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31년 식민지 조선 반중국인 폭동의 학살 현장 검토

저자 : 정병욱 ( Jung Byung Woo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3-15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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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서 1931년 반중국인 폭동 때 학살이 일어났던 인천, 평양과 그 인근, 신의주 및 원산 인근의 현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폭동과 학살의 요인들을 재검토하였다. 인천과 평양 지역에서는 도시에서, 신의주와 원산 지역에서는 도시와 떨어진 작업장(공사장 또는 채소밭)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도시라 해도 도시 외곽에서 학살이 많이 벌어졌다. 중국인 피해자는 광공업 농업 상업 등의 하층 노동자가 많았으며 그 증가에 따라 수요가 발생한 음식업 종사자가 있었다. 학살 관련 조선인 피고인은 전체 폭동의 '유죄확정자'보다 도시 하층의 직업군에 속하는 피고용인 비중이 높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일자리를 찾아 주변 군과 다른 도에서 도시로 모여든 자들이었다. 학살의 현장은 일자리를 찾아 국내외에서 도시 주변으로 모여든 조선노동자와 중국노동자의 갈등이 폭동과 학살의 배경임을 말해준다.
모든 노동시장의 갈등이 폭동과 학살로 비화하는 것은 아니다. 1931년 7월 폭동과 그 전후 충돌의 차이점은 폭력의 정당화 여부였다. 1931년 7월 상황은 이전이나 이후와 달리 계급적 이해를 넘어서 중국에서 박해받는 동포를 위해 복수한다는 도시 하층 조선인 노동자의 폭력 논리가 조선인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승인을 받았다. 폭동에 참여한 수많은 군중은 이러한 승인과 정당성 부여를 상징한다.
또 평양에서 많은 학살이 일어난 이유로 다른 요인들과 함께 중국영사관과 중국거리가 없었던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건의 행위 주체들이 폭동과 학살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으로 정당화나 유언비어를 들 수 있다. 반대로 폭동과 학살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조선총독부의 경찰력, 중국인의 대응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의 대응에는 피신에서 맞서 싸우는 방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구심점은 중국영사관과 중국거리라 할 수 있다. 평양은 당시 도시 중 중국인 인구가 신의주, 경성 다음으로 많았는데도 중국영사관과 중국거리가 없었다.


In this article, I reviewed the factors of riots and massacres by focusing intensively on the sites of Incheon, Pyongyang, Sinuiju, Wonsan and their neighboring areas, where the massacres occurred during the 1931 anti-Chinese riots. In Incheon and Pyongyang, massacres took place in the city. In Sinuiju and Wonsan areas, massacres took place in a workplace away from the city. Even though it was a city, there was a lot of slaughter on the outskirts of the city. The Chinese victims were mostly low-income workers in agriculture, mining, agriculture, and commerce. Some of them were food workers who were in demand as Chinese workers increased. Many of the Korean defendants who were related to the massacres belonged to the occupation group in the lower part of the city. The proportion was higher than that of those who were convicted of the riots. Many of them were those who gathered in the surrounding counties and other cities in search of jobs. The scene of the massacre tells us that the conflict between Chosun workers and Chinese workers gathered around the city at home and abroad to find a job is the background of riots and massacres.
Not all labor market conflicts turn into riots and massacres. The difference between the riots in July 1931 and the conflicts before and after them was the justification of violence. In the July 1931 riots, the lower-class Korean workers were violent in the cause of revenge for the persecuted Koreans in China. These violent causes were widely accepted by the general public beyond the working class. Numerous crowds participating in the riots symbolized such approval and legitimacy.
One of the reasons for the massacres in Pyongyang was the lack of a Chinese consulate and Chinese street. Justification and rumors are encouraged people to engage in riots and massacres. On the contrary, the power of the Chosun Governor-General's police and the counteraction of the Chinese were the factors restraining the riots and massacres. There were many things in the counteraction of the Chinese, from escape to defense. The center of their counteraction was the Chinese consulate and Chinese street in the area. In Pyongyang, however, there were no Chinese consulate and Chinese street, even though the population of China was second only to Sinuiju and Kyong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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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북한 대중들의 전략적 글쓰기와 당국의 대응-자서전·이력서를 중심으로-

저자 : 김재웅 ( Kim Jae Wo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7-19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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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은 공직자 개개인들로부터 자서전과 이력서를 수합하였다. 그들의 가족관계와 활동 경력을 기록한 이 문건들은 국가가 개개인들을 장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자서전·이력서류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당국에 제출된 문건이라는 자료의 성격 상, 자서전과 이력서류는 기록자들의 자기검열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당국으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의식한 기록자들은 가능한 한 부정한 전력을 은폐하려 한 반면, 유리한 경력을 부각하는 식의 글쓰기를 시도하였다. 사실 자서전·이력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함과 아울러 불이익을 피하고자 했던 일반 대중들의 전략적 글쓰기가 적극적으로 시도된 공간이었다. 물론 북한 당국은 일반 대중들의 전략적 글쓰기를 방관하지 않았다. 당국자들은 개개인들을 철저히 해부해 그들의 속임수를 간파해내는 대응 전략으로 맞섰다. 자서전·이력서는 북한 대중들과 당국 간의 갈등이 표면화된 공간이자, 양자가 “글쓰기”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대립한 “치열한 격전장”의 성격을 띠었다.


After the liberation, North Korea collected autobiographies and resumes from the public officials. These documents recording their family relationships and career histories were used as resources which state could control and manage individuals. The autobiographies and the resumes are unique in that they are records of the general public at the time. However due to the nature of the materials that are submitted to the authorities, autobiographies and resumes must pass the self-censorship of the recorders. While recorders who were conscious of disadvantages by the authorities attempted to conceal their unjust careers, emphasized their advantageous careers.
In short autobiography and resume was a space which strategic writing by the general public desiring to pursue his own interests and avoid disadvantages actively attempted. Of course North Korean authorities did not tolerate strategic writing by the general public. The authorities confronted as a strategy to dissect all of individuals and detect their deceptions. Autobiography and resume were a space where conflict between the North Korean public and the authorities surfaced, and a “fierce battleground” where both opposed each other through the medium of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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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고대의 신(新)출토자료와 사마천 연구-『장가산한간』이년율령·사율을 중심으로-

저자 : 김진우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97-22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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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사마천이 자신의 인생을 『사기』라는 필생의 사업으로 압축해서 귀일시키는데 「太史公自序」의 저술 목적이 있고, 그래서 부친 사마담의 죽음과 遺命을 받들기 이전의 전반부는 사마천이 『사기』저술의 '준비된 자'임을 강조하는 극적인 장치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太史公自序」중 '10살에 古文을 암송하고 20살에 遊歷했다'는 부분에 주목하여 그 학업과 여행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였다. 선행 연구는 부친 사마담의 지원 하에 사적인 현장답사 여행이라는 입장과 공적인 신분을 가진 공무 여행이라는 견해로 구분되지만 대체로 공무 여행으로 보는 편이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20세 젊은 사마천의 여행을 훗날의 『사기』저술에 토양이 되는 준비과정으로 보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이에 본고는 이러한 사마천의 행로가 꼭 『사기』저술로 귀결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張家山漢簡』二年律令·史律조문을 적용했을 때, 사마천은 17세에 태사령의 아들로 學室로 취학해야만 했다. 그리고 3년간의 수업 후 시험에 통과해서 19살에는 문서행정의 실무관료인 史의 임용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살 무렵의 사마천은 신임 史로 신규 발령지에 가서 근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실제 사마천의 여행 경로를 한 무제 당시의 시대상황과 연결해서 숙고해 보면, 사마천은 史라는 하급 실무관료로 무언가의 공적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이후 부친 사마담의 죽음 이전까지 사마천의 이력을 연결해 보면, 적어도 부친 사마담의 죽음 이전까지 사마천은 한 무제 당시 확장하는 제국의 충실한 관료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본고와 같이 중국고대의 新出土資料를 통해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중국고대의 역사상을 좀 더 다채롭게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며, 또한 史實의 굴레에 묶여있는 『사기』에 좀 더 다양하게 독해할 수 있는 활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사기』는 化石化되지 않는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유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本論文認爲司馬遷將自己的人生精簡歸一爲<史記>的畢生事業,有「太史公自序的」著述目的,所以通過强調父親司馬談的死和遵照遺命之前的前半部是司馬遷<史記>著述的'有准備的人'的積極措施來發揮作用。在這樣的脈絡中,關注「太史公自序」中'10歲背诵古文,20歲遊歷'的部分,全新地接近了其學業和旅行。
先行硏究分爲在父親司馬談的支援下私人的現場考察旅行的立場和擁有官方身分的公務旅行的見解,但是大體上作爲公務旅行來看的一方更有說服力。但是卽使這樣,仍然將20歲年輕的司馬遷的旅行看作對于日后的<史記>著述是成爲其土壤的准備過程,此觀点爲前提。
對此本論文認爲這樣的司馬遷的行路不一定歸結爲<史記>著述。适用<張家山漢簡>二年律令·史律條文,司馬遷17歲時作爲太史令的兒子只應去學室上學。幷且3年的學習后通過考試,在19歲時可以獲得文書行政事務官員的史的任用資格。所以情況是,20歲時的司馬遷作爲新任史如果不去新任命地工作的話就不行。
若將實際司馬遷的旅行路線與漢武帝當時的時代狀況聯系起來考慮來看的話,可以看出司馬遷作爲史這種下級事務官員履行了某種官方任務。在此之后直到父親司馬談的死,若聯系司馬遷的履歷來看的話,卽使很少但直到父親司馬談的死,可以理解爲司馬遷以一個漢武帝當時擴張的帝國的忠實官員的典型生活在過日子。
像本論文這樣通過中國古代的新出土資料,試圖對司馬遷和<史記>進行全新解釋是開啓可以將中國古代歷史描绘得更加多彩的可能性,幷且是可以給被史實枷锁束縛着的<史記>賦予一些可以更加多樣地解讀的活力。通過這些我認爲<史記>擁有作爲不會化石化的古典的生命力,可以一直流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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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케르치양식(the Kerch Style)에서 에로스의 역할

저자 : 이상덕 ( Lee Sang D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7-25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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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의 도기 양식은 아테네의 주요 곡물 수입원이었던 케르치에서 많이 발견되므로 케르치양식이라고도 한다. 이는 특히 기원전 4세기 예술 양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 시기 예술은 에토스를 중시하는 것에서 파토스를 중시하는 것으로, 산문에서 수사학으로 변화하였으며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양식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 바로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상고기로부터 플라톤적인 사랑, 혹은 욕망을 표현할 때 많이 활용되었고,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점차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기로 변형되었다. 에로스는 화면에 묘사된 개개인의 곁에 묘사되어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된다. 또한 화려함을 추구하던 이 시기의 도기에 장식적인 요소로 역할하게 된다. 흰색의 몸과 금색의 날개로 이들을 표현한 것을 보면 이러한 주장은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The Kerch style vases show the last stage of development in the Athenian vase-painting. The style reflects developments in contemporary art and literature which concentrated in presenting human emotion rather than communal tradition. The love of ethos in the fifth century turned into love of pathos in the fourth, and love of prose into love of rhetoric. The fourth century artists also mastered the use of shading and highlighting. Erotes figures were suitable for the change. They were pretty figures which implied and represented human feelings. Erotes, being positioned in between people, or drawn a connection with a character, not only filled in the space as adornments but also expressed the emotion of the fig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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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프랑스 공화 2년의 마라 숭배-공포정치의 탄생과 민중적 영웅주의-

저자 : 윤선자 ( Yun Sun J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9-30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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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마라 숭배와 공포정치 탄생의 관련성을 통해 의례의 정치적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적 영웅주의의 성격을 탐구하는 것이다. 1793년 7월 13일 마라가 암살되면서 일련의 장례식과 장례행진, 심장 안치식 등이 거행되었다. 슬픔과 분노 속에서 상퀼로트를 중심으로 복수를 위한 공포정치가 요구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신중했다. 공포정치의 요구에 명확한 근거를 제공한 것이 장례식에 전시된 마라의 시신과 상처였다. 그것은 혁명 초부터 도처에 존재했던,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반혁명적 귀족의 음모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명확하고 가시적인 증거였다.
마라의 장례 절차가 끝난 이후, '마라의 정신'을 계승한 정치적 고발이 시민적 덕목으로 고양되고 공포정치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되었다. 결국 1793년 9월 5일 공포정치가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에베르는 '제2의 마라'를 자처하며 정치적 고발의 대상을 넓혀갔다. 하지만 상퀼로트에 정치적, 문화적 이질감을 느낀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를 제거함과 동시에 새롭게 바라 숭배를 내세워 마라 숭배를 무력화시켰다. 마라 숭배가 정치적 고발과 분열을 일으켰다면, 바라 숭배의 목적은 그 분열을 메우고 통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마라를 향한 추모의 열정은 공화 2년 프랑스 전국을 달구었다. 그 과정에서 마라 숭배가 탄생하고 새로운 혁명적 영웅상이 구체화되었다. 마라 숭배에 사용된 수많은 추도문과 거기에 반영된 집단 심성을 통해 민중적 영웅주의의 몇 가지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유혈적 표현주의와 종교적 심성, 카니발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이것은 혁명 엘리트의 고전주의적 영웅주의와 달리 민중의 오래된 전통과 심성을 반영했다. 본 논문을 통해 민중적 영웅주의의 특징과 더불어, 마라 숭배가 실제 공포정치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기어츠의 가설, 즉 “의례는 단지 권력을 반영하고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wo. The one is to examine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ritual through the relation of the cult of Mara and The Terror, the other is to explore the nature of popular heroism. On July 13, 1793, after Mara being assassinated, funeral, funeral march, and translation of a heart of Marat were held. In sadness and anger, the Sans-culottes demanded the terror to revenge for Mara, but Robespierre was cautious. It was Mara's wounded body that was displayed at the funeral that provided clear grounds for the demands of the terror. Marat's wounded body was the clear and visible evidence that there was actually a conspiracy of anti-revolutionary nobility, the conspiracy existing everywhere since the beginning of the revolution but being invisible to the eye.
After the funeral of Mara, the political accusation that inherited the spirit of Mara was elevated as a civic virtue and the terror was demanded in earnest by the Sans-culottes, Eventually, on September 5, 1793, the Terror became institutionalized. Hebert became 'the second Mara' and expanded the target of political accusations. However, Robespier who felt political and cultural heterogeneity in the Sans-culottes, removed Hebert and substituted the cult of Marat with the cult of Bara. If the cult of Mara caused political accusations and divisions, the purpose of the cult of Bara was to fill the divisions and achieved an unity.
The passion of the memorial for Mara spreaded to France in the Year II. In the process, the cult of Mara developed and a new revolutionary hero image was embodied. Through the numerous eulogy used in the cult of Mara and the collective mentality reflected in it, some characteristics of the popular heroism can be grasped. It was characterized by bloodshed expressionism and religious mentality, carnival practices. This reflects the old traditions and mentalities of the people, unlike the classical heroism of the revolutionary elite. In this paper, I discussed the characteristic of the popular heroism, and confirmed Geertz's hypothesis, "rituals are not just reflecting and propagating power but creating and maintaining power" in an analysi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ult of Mara and The Te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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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도덕주의적 진보(left-wing conscience): 결의론과 20세기 진보 지성사

저자 : Matthew Herzog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7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03-33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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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세기 진보 지성사에서 소외된 사회문화적 흐름을 다룬다. 막스 베버(Max Weber), 리차드 헨리 토니 (R.H Tawney), 그리고 리차드 호가트(Richard Hoggart)로 연결되는 이 흐름은 결의론(casuistry)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양심(conscience)과 도덕적 신념을 중시한다. 20세기 도덕주의적 진보 지성은 통상적으로 윤리적 사회주의(ethical socialism)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윤리적 사회주의는 베버, 토니, 호가트를 연결하기에 부족하며,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양심이라는 가치를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도덕주의적 진보(left-wing conscience)”라는 새로운 틀을 통해 이들 지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들은 결의론적 전통에 입각해 여타 진보적 급진주의자들과 달리 양심과 도덕이라는 이념을 정치학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다소 보수적으로 읽힐 수 있는 도덕주의는 이들의 진보적 성향과 만나면서 개혁적인 형태를 띄게 된다. 개혁적 도덕주의를 통해 베버, 토니, 호가트는 인격과 판단력 함양을 주요 가치로 삼았다. 본 논문은 베버가 도덕 중심주의에 기반한 사회학적 논의를 시작했으며, 토니가 이를 이어받아 현실 진보정치와 도덕주의를 연결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호가트는 베버와 토니의 전통을 문화 비평에 적용시켜 20세기 후반에 만연했던 문화상대주의를 비판했다.


This article examines a strand of social and cultural thinking in the twentieth century that has its roots in casuistry, or engaging our conscience in everyday life. Despite their connections, little has been written about the relations between the work of Max Weber, R.H. Tawney, and Richard Hoggart. The article endeavors to address this gap in scholarship by conceptualizing the interrelatedness of their writing under the term “left-wing conscience.” While the dominant moral strand of left-wing politics in the twentieth century went under the label, ethical socialism, the term does not describe the positions of all the thinkers in this tradition nor does it emphasize what connects them. Rather, the concept of “left-wing conscience” foregrounds the casuistic nature of their writing where they inscribed conscience at the center of their politics rather than, as many left-wing radicals of the century were tempted to do, placing politics at the center of their conscience. Moreover, when conscience is modified by left-wing, it highlights the progressive and reformist focus of these writers. It was this progressive conscientiousness that led each of them to value the development of personality and the capacity for judgement and to analyze how these were being eroded throughout the century. What this article brings to light is how Weber initiated a line of sociological writing grounded in moral seriousness. This was picked up by Tawney and amended with an explicit left-wing politics. These strands were, then, synthesized by Hoggart, who brought them into his cultural criticism in order to respond to the issues of relativism in the culture of the latter half of the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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