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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총 update

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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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96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817
사총
96권0호(2019년 0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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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조선전기 요역(徭役)의 종목 구분과 차정(差定) 방식에 대한 검토

저자 : 소순규 ( So Soon Kyu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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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초기 요역의 종목 구분과 요역 차정 방식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기존 연구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새로운 입론으로 정리하였다. 조선초기 요역에 대해서는 有井智德의 선행 연구를 통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는 요역을 전결을 근거로 부과하는 소경요역과 인정수를 고려하여 부과하는 잡역으로 구분하였으며, 요역의 차정 방식은 조선초 계정법에서 토지와 인구를 모두 고려하는 절충법으로, 다시 절충법에서 전결만을 고려하는 계전법으로 이행해 간다고 보았다. 이후 한국인연구자들의 후속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차정 방식의 변화 추이는 대체적으로 인정된 반면, 요역의 종목 구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필자는 이와 다르게 有井智德의 연구에서 요역의 종목 구분에 대해서는 타당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오히려 요역의 차정 방식에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유정지덕이 잡역이라고 구분한 범주는 호역이란 용어로 대체 가능하며, 그럴 경우 그의 연구에 대한 비판의 논거를 소거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요역이 소경요역과 호역으로 이원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차정 방식 역시 이원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요역 차정에서도 계전법과 절충법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요역 차정 방식에서 주요하게 검토할 문제가 호등제인데, 호등제 역시 사실상 이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후 성종대 도입된 역민식 역시 호등제 규정과의 깊은 관련성에서 만들어진 법제였다.


In this study, previous studies of the categorization and method of division of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this type of labor services was termed 'Yoyuk')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ere reviewed and analyzed, and based on the findings, this study has made an argument. As for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is study primarily focused on the review of a pervious study by Ari Tomonori(有井智德). In his study, Sogyungyoyuk (所耕徭役),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were categorized into Sogyungyoyuk assigned arbitrarily and miscellaneous services (this type of labor services was termed 'Japyuk'(雜役)), assigned in consideration of the no. of People(人丁), and the method of division of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was eclectic at first, considering both no. of population and land areas and then, changed to a relay method in which only arbitration decisions were considered. His study was followed by Korean researchers, and although his claim on such changes in the method of division of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was generally accepted, not the categorization.
On the other hand, the author has found his claim for the categorization reasonable, but not the changes in the method of division. The miscellaneous labor services, categorized by Ari Tomonori(有井智德), could be expressed using a term 'Hoyuk (戶役)' and in this case, it would be possible to remove the ground for an argument for his research. In addition, if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were made in the dualistic fashion: Sogyungyoyuk and Hoyuk, the division of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should have been made in the dualistic fashion as well. Therefore, it would be reasonable to believe that the division of labor services was made through two methods: an eclectic method and a relay method. One of critical topics in the research of division of labor services owned to the nation is Hodeungjae(戶等制) and in fact, it was also operated in the dualistic manner and Yeokminsik(役民式)' introduced in the reign of King Sung-Jong was also closely related with Hodeungjae(戶等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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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조의 천주교 인식 배경과 진산사건의 정치적 함의

저자 : 임혜련 ( Lim Hye R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45-7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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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사건은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윤지충은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례는 성심을 다해 치렀지만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 역시 지내지 않았다. 이는 충ㆍ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던 유교사회 조선에 큰 충격이었고,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임을 당하였던 사건으로 신해박해라고도 한다. 진산사건은 이러한 전례 문제에 대한 충돌과 함께 남인에 대한 정치적 견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충격이기도 하였으나, 이후 조선에서 천주교를 아버지와 임금도 없고, 패륜으로 강상을 어지럽힌 사학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른 박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사건이다. 정조는 사건의 주도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에게는 엄한 형벌로서 처분하였지만, 진산사건 자체는 그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궁극적으로 사친을 추왕하기 위한 행보를 하나하나 완성해 갔으며, 이는 정조의 사무치는 효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조가 진산사건을 비교적 온건하게 처분하였고, 정학을 바로 세운다는 온건한 천주교 인식을 보여준 것은 그의 본심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효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조였기에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운 이 사건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그의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냉정하게 사건을 처리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정치가들이 이 사건으로 남인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채제공이 사건과 관계는 없다고 할지라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과는 관련이 있었다. 그렇지만 채제공은 영조대부터 사도세자를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만큼 정조는 그를 등용하여 측근 신하로서 정조의 정책과 효를 실현하는 결정들을 입안하고 추진하는데 앞장서게 하였다. 정조가 채제공을 정승에 임명함으로써 남인에게까지 탕평을 확대하였다는 정치적 성과를 자랑할 수 있지만, 이는 사도세자의 무함함을 공식화하고, 그에 맞는 존숭을 시행하며, 추왕을 완성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므로 정조는 효의 완성을 위해 진산사건의 파장을 최소화 하려고 하였으며, 천주교 문제에 온건적인 인식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Jinsan Incident refers to Yun Ji-choong and Kwon Sang-yeon's case of burning their mothers' spirit tablets in 1791 (15th Year in King Jeong-jo's Rule). They did not even hold ancestral rites. They were Catholics. This incident was a shock to Joseon dynasty, which was a Confucian society. This incident signifies the clash between Catholic doctrine and Confucian tradition. Catholicism was rejected from Joseon dynasty due to this incident. Jeong Joexecuted Yun Ji-choong and Kwon Sang-yeon, but he tried to minimize the implication of this incident.
King Jeong-jo came to throne as the son of Prince Sado who had been killed by violence. After he ascended the throne, King Jeong-jo carried out actions to make his dead father the king as a way of realizing his filialpiety, 'hyo'. King Jeong-jo dealt with Jinsan Incident moderately. He announced that he would establish the correct education. This showed his moderate recognition of Catholicism. However, King Jeong-jo regarded filial piety(hyo) as the most important aspect than anything else. Thus, he could never earnestly forgive the case of burning their mothers' spirit tablets. However, he dealt with this incident calmly. The reas on why is that politicians used this incident as a way of attacking Nam-in. They tried to get rid of Chae Jae-gong by attacking him who represented Nam-in. Chae Jae-gong made exchanges with people who were involved with this incident. He was close to King Jeong-jo. King Jeong-jo appointed him to the minister. Through him, King Jeong-jo wanted to make Prince Sado, his father's innocence official. The next step was to make Prince Sado reverent and him a king. Therefore, King Jeong-jo minimized the implication of Jinsan Incident to complete his filial piety (hyo) toward Prince Sado. Also, he maintained moderate recognition of Cathol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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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청말 종주권 관념의 변화와 조선 정책의 전환

저자 : 이동욱 ( Lee Dong-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79-1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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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는 華夷觀에 기반을 둔 청조 중심의 조공책봉 체제와 서구식 국제질서의 원리와 규칙들, 즉 국제법에 기반을 둔 조약체제가 공존하며 다양한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 속에서 형성된 과도기적인 언어적 콘텍스트(linguistic context)가 중국인들의 사고와 행위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중심으로 청조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강화 정책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추적하였다. 본 논문은 먼저 19세기 후반의 국제법 텍스트 번역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서구의 국제질서를 번역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럽식 국제질서 개념이 청조의 종주권 관념에 접합(Articulation)되어 개념의 의미 확장을 일으키는 현상을 확인했다. 이어서 1870년대 후반 일본과 러시아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청조의 일부 관료들이 동서양 국제질서 사이에 형성된 다중적인 가상적 등가관계(multiple hypothetical equivalences)를 기반으로 서구의 종속 또는 식민 체제를 청조와 조선의 기존 관계와 비교, 결국 청조의 조선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서구 국제질서의 수용에 따른 관념의 변화가 청조의 종주권 강화 정책을 추동하는 사상적 자원이 되었던 것이다.


In the Late of 19th century, the Qing-Dynasty-centered tributary system based on the China-centric view(華夷觀) and the treaty system based on the international law coexisted and created diverse interactions in East Asia. In this article, the background of how Qing Dynasty's policy to reinforce its suzerainty on Joseon appeared was examined focusing on the impacts of the transitional linguistic context formed in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times on Chinese thoughts and behaviors. The phenomenon has been verified that the concept of the European international order was articulated to Qing Dynasty's notion of suzerainty and that the meanings of the concepts were expanded in the process of translating and accepting the international order of the West through the investigation in the translation of the texts on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in this study. Moreover, the process was examined how some government officials of Qing Dynasty compared the dependent or colonial system of the West with the existing relation between Qing Dynasty and Joseon and eventually brought about changes in Qing Dynasty's policy of Joseon based on the multiple hypothetical equivalences formed in the international order of the East and the West when the awareness of the crisis regarding the possibility of invasion into Joseon by Japan and Russia grew in the second half of 1870s. The changes in the notion according to the acceptance of the international order of the West became the ideological resource to give an impetus to Qing Dynasty's policy to reinforce suzerai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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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0세기 왕권의 해체와 지방 권력의 성장 -프랑스 아키텐의 사례-

저자 : 차승현 ( Cha Seung 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5-15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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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은 프랑크 왕국과 매우 상이한 사회ㆍ경제ㆍ문화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정복당한 이후에도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781년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중앙집권주의를 포기하고 아키텐 왕국을 창건하여 주민들의 분리주의 성향을 달래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이 지역을 프랑크 왕국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한편 아키텐을 통치하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루도비쿠스 1세가 수차례에 걸쳐 상속령을 개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이 831년부터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카롤루스 왕가의 내부 갈등은 아키텐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으며 수십 년에 걸친 내전 끝에 카롤루스 대머리왕이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서프랑크 왕이 된 그는 자신의 아들을 아키텐 국왕으로 임명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아키텐 왕국의 모든 권력을 독점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통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아키텐 귀족들이 이 같은 지배 방식에 반기를 들면서 카롤루스 왕권은 9세기 말부터 급격하게 해체되었다.
아키텐의 강력한 귀족들은 왕권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다수의 백령들로 이루어진 '제후령'을 만들었다. 원래 카롤루스 왕가로부터 관직과 토지를 받고 왕을 대신했던 이들은 9세기 후반부터 왕권을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영향력을 확장했으며,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기존의 백령을 여러 개로 분할하고 '부백'을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9세기 말 경건공 기욤은 광대한 아키텐 공국을 수립했으며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충신이었던 일드베르를 최초의 리모주 부백으로 임명하고 해당 지역을 관리토록 했다. 한편 10세기 초부터 푸아티에 백들이 오베르뉴 세력을 리무쟁에서 몰아내고 리모주 부백들을 지배했지만 지리적ㆍ정치적으로 제한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원활한 통치를 위해 오히려 부백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오베르뉴 및 푸아티에 백들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토지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던 리모주 부백들은 결혼을 통해 리무쟁의 강력한 귀족들과 관계를 맺고 가산을 증대시키면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장해나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리무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In the early middle ages, Aquitaine, located in Southern France, had a very distinct social, economic and cultural structure compared to the Frankish Kingdom, not easily assimilated even after being conquered. In the year 781, Karolus Magnus gave up centralism and constructed the Aquitaine kingdom in order to appease the local separatist inclinations as well as have his son rule as king, absorbing the area into the Frankish kingdom. Meanwhile, Louis I the Pious, who succeeded his father as emperor, amended the inheritance order Ordinatio imperii over a number of times, at which point his dissatisfied sons started to rebel from the year 831. Internal conflict within the royal family was most acute in Aquitaine and after decades of civil war, Charles the Bald reigned as the new king. After becoming king of the West Frankish Kingdom, Charles the Bald ordained his son as king of Aquitaine. However, by establishing a centralized authoritarian rule, he seized all authority of the Aquitaine kingdom as his own. Nevertheless, failing to secure a means to actually govern the area as well as due to the Aquitainians revolts against such control, the carolingian kingdom quickly dissolved by the end of the 9th century.
As royal authority weakened, the powerful aristocrats of Aquitaine seized the opportunity to gain support of numerous counties and established 'principalities'. The aristocrats, who used to receive office and land from the royal family to rule in their place, expanded their land from the late 9th century, using royal authority as they please. However, unable to efficiently rule over such vast territory, they divided their counties into several 'viscounties' and placed in each a deputy in charge. William I, duke of Aquitaine, appointed Hildebert, a loyal subject of Charles the Bald, as the first viscount of Limoges. In early 10th century, the counts of Poitiers drove away the Auvergne forces from Limousin and started ruling the viscounts of Limoges. Yet, due to their limited geographical and political influence, they had to rely on the viscounts. The viscounts of Limoges, who received authority and land from the counts of Auvergne and Poitiers, expanded their influence by building relationships with the powerful aristocrats of Limousin through marriage and increase of patrimony and quickly became the most powerful influence within Limou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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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중세 말 프랑스의 화폐 개주와 왕권 이미지 생산(1290-1360)

저자 : 홍용진 ( Hong Yong-j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6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51-19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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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프랑스 왕정이 실시한 화폐 개주를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이미지 생산이라는 정치문화사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 시기 동안 수차례 이루어진 화폐 개주는 분명히 왕정의 재정 확충을 위한 편법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는 당대 사회에 많은 사회ㆍ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러 번 이루어진 화폐 개주는 그만큼 다양한 화폐 이미지들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당시 왕정이 처한 여러 위기들에 대해 왕권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의사소통을 시도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개주 화폐에 새롭게 창출된 이미지는 화폐 주권을 내세우며 화폐 이미지를 독점한 국왕의 선전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긴밀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즉 왕권과 화폐의 통화가치가 불안정할수록 왕권 이미지는 더욱 풍성하게 창출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러한 의사소통은 금화나 은화와 같은 고가의 화폐를 사용하는 사회적 상층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즉 재정과 정치문제에 관련하여 주요한 의견을 피력하던 대귀족이나 대부르주아들만이 이러한 이미지들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정치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화폐 이미지의 효과를 화폐 사용자에게만 국한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당시 프랑스에서 화폐는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화폐는 국가체제의 등장과 함께 전쟁과 재정, 정치적 의사소통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지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recoinage conducted by the French monarchy from the end of the 13th century to the mid-14th century from the perspective of politico-cultural history of image production based on existing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tudies. Recoinage, which was held several times during this period, was clearly implemented as an expedient to the financial expansion of the monarchy, and it caused many socio-economic confusion in the contemporary society. However, the recoinage in several times provided the opportunity to create various monetary images. This was the result of the king's attempt at political communication with the image in relation to various crises of the monarchy. New images produced by recoinage was royal propagandas of the kingship which monopolized monetary images by his monetary sovereignty. But, in that the king was closely in response to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day, it was also a pretext of political justification. The more unstable the currency value and the kingship, the richer the image of the kingship
By the way, these communications were confined to the upper classes of society using high value money, such as gold and silver coins. Only nobles and bourgeoisie, who expressed principal opinions on financial and political issues, were able to see these images directly. Nevertheless, the effect of the monetary image would have exceeded the range of the currency user. In conclusion, in France at this time, money is located at the crossroads of political, economic and cultural areas. More concretely, money becomes a complex point where war, finance, and political communication cross with the emergence of the stat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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