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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98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834
사총
98권0호(2019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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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계 유형원의 인사제도 개선과 운영방안

저자 : 송양섭 ( Song Yang Seop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2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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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대대적인 관제 개편을 바탕으로 '재능에 따른 직임의 부여'라는 원칙 하에 관료인사 운영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당시 가장 문제로 지목되었던 관원의 빈번한 교체와 대간피혐의 문제를 없애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봉건의 취지를 현실에 맞게 적용한 久任의 원칙이었다. 당상관 이상 가운데 능력과 인품이 인정된 사람은 고제의 취지에 따라 연수제한 없이 직임을 맡기도록 하였고 그 이하와 지방관의 경우는 6년과 9년을 기준으로 근무기간을 정하였다. 아울러 褒貶制 개선방안으로 都目政事를 연 2회에서 연 1회로 줄이고 3望制는 2望制로 단순화하였다. 署經制와 같이 문벌을 따져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는 규정도 없애고 포폄의 등급별 黜陟도 唐制를 원용, 4善27最기준 9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하도록 하였다. 久任으로 인해 우수한 인재가 사장될 것이라는 우려는 特薦制를 통해 보완하였다. 유형원은 지방관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천거를 통해 우수한 인재를 수령에 임명하고 대간 시종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수령의 실적이 없으면 정3품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하였다. 수령은 가족을 동반하여 임지에 나아가 근무하고, 鎭將ㆍ譯官ㆍ敎官 등의 직임도 실직으로 만들어 지역민 가운데 적합한 자를 기용하도록 하였다. 해유법도 폐지해 번거로운 행정절차를 없애도록 하였다.


Yu Hyeongwon suggested plan for improvement on managing bureaucratic personnel under the principle of 'granting position by talent' based on the broad reform of government organization. At his time, the most problematic practices of bureaucracy were frequent replacement of officials and walkout of censors. For the solution, Yu insisted the principle of Gu-im (久任; guaranteeing long term), which applied the ideal of ancient Zhou Dynasty to reality. Among the officials of the third rank or higher, those who were credited for his capability and personality were to be appointed regardless of his term, following the ancient system. The tenure for the officials lower than the third rank and the local officials was set under the standard of 6 years and 9 years each. Moreover, to improve the functionality of Popyeom (褒貶; performance evaluation on bureaucrats), Yu argued the frequency of the council for personnel in the court to be reduced from twice a year to once a year, and the number of candidates to be decreased from three to two. Seogyeongje (署經制; ratification of personnel on reported personal history and career) were to be abolished, for it was creating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in promotion by the lineage of the candidate. For promotion and demotion of ranked officials, Yu referred the system of Tang Dynasty, which evaluated candidates by 9 grades, on the basis of 4 categories of 'good virtue' and 27 categories of 'best performance.' Yu used Teukcheonje (特薦 制; special recommendation system) in order to address the concern that officials with excellent talents will be withered when they were appointed in a certain place for such a long term. Yu Hyeongwon also stated the importance of local administrative officials. In his plans, officials with excellent talents would be appointed to local magistrates by recommendation, and officials ranked as censor or chamberlain in the court would not be promoted to senior third rank unless they have experience at local magistrateship. It was proposed that local magistrates move to his post accompanied by his family, and positions such as captains of garrisons, translators, and educational officers were designed to be regular positions to hire the qualified among the locals. Yu urged to abolish Haeyubup (解由法; reporting for transfer) to diminish complex administrative proced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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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5전쟁 초기 북한 해군의 해안방어 작전 -원산 제588군부대 작전을 중심으로-

저자 : 박희성 ( Park Hui Se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9-6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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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588군부대를 중심으로 6ㆍ25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해군 해안포병연대의 해안방어 작전을 살폈다. 제588군부대는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해안포병연대로 원산에 있는 북한 해군 제2위수사령부 소속이었다. 6ㆍ25전쟁 개시일 4일 전인 50년 6월 21일 제588군부대는 원산 갈마반도에 배치되어 있었고 영흥만과 원산항, 흥남항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중요도가 높은 원산항과 흥남항에 각각 대대를 배치하고, 연대본부와 후방지원부대 역시 원산 일대에 위치하였다.
제588군부대의 작전 범위는 지상군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였다.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진출하고 전선이 계속 남쪽으로 내려감에 따라 제588군부대의 담당구역 역시 강원도 강릉 주문진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일부 부대는 기동부대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유엔 해군이 작전을 시작하고, 북한 후방지역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이 거세짐에 따라 원산 일대가 주요 방어지역이 되었다.
제588군부대는 군기강 유지와 무기 관리 등에서는 일부 미흡함을 보였지만, 6ㆍ25전쟁 직전부터 전쟁 발발 후 8월 초까지 부대에 부여된 작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전황이 바뀌고, 10월 10일 원산탈환 작전에서 크게 패배한다. 그 이후 자세한 부대 행적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유엔 해군과 미 공군이 해상과 공중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제588군부대의 전쟁 초기 해안방어작전을 확인한 것은 전쟁 기간의 전체 작전을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주도적으로 작전을 시행한 유일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군 사료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북한 해군 연구는 최근에서야 시작되었다. 따라서 기초 연구들이 꾸준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Coastal Defensive Operations of the Korean People's Navy Coast Guard during the Early State of the Korean War, focusing on the 588th unit. The 588th unit is a coastal artillery regiment controlled by the North Korean Navy's Wonsan Garrison Headquarters. The 588th unit was deployed on the Galma Peninsula in Wonsan on June 21, 50, four days before the first commencement of the Korean War. And the 588th unit was given the duty to defend Yongheung Bay, Wonsan Port, and Hwangnam Port.
The scope of operations of the 588th unit had changed according to the situation of the North Korean ground forces. As the North Korean army advances to the Nakdong River and the front to the south, the range of defense operations of the 558th unit had expanded to Gangneung Jumunjin. A maneuvering unit was also added. But when the UN Navy and US Air Force began operations, Wonsan became a major defensive area. The 588 unit completed operation mission. However, the situation had changed and was greatly defeated in Battle of Wonsan on October 10.
It's pretty not easy to get historical materials on the North Korean forces and the navy. Study on the North Korean Navy has only recently begun. So I hope the basic studies will continue to come out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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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유시리다라의 책보례(冊寶禮)를 둘러싼 대원제국(大元帝國) 말기의 권력쟁탈

저자 : 윤은숙 ( Yoon Eun Soo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7-9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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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토곤 테무르를 무능한 군주로 평가하는 중요한 분수령은 전쟁터에 나간 톡토를 축출해 버린 일로, 이 때문에 제국이 멸망했다고들 한다. 톡토의 축출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아무리 무능한 군주일지라도 4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간 장수를 축출할 때는 이 사건이 제국의 중대사였음을 의미하므로, 책보례를 둘러싼 권력쟁탈의 전말을 제대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1349년에 톡토의 中書省복귀와 1355년의 비참한 퇴출은 모두 아유시리다라의 차기 계승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톡토의 중서성 복귀는 太平세력을 견제해야할 필요성과 톡토가 아유시리다라에 대한 세간의 불신을 잠재우고 冊封을 주청해 줄 것이라는 토곤 테무르와 기황후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톡토는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아유시리다라의 책봉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심지어 갖은 이유를 들어 1년여 간 책보례까지 지연시켰다. 카마르의 이간질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기황후는 톡토를 아유시리다라 정권 창출의 걸림돌로 인식하게 되었다.
권신 엘 테무르나 바얀에 비견될 정도로 비대해진 권력을 소유한 톡토에 대한 토곤 테무르의 부담감은 책보례 지연이라는 현실을 만나면서 폭발하였고 이 때문에 일거에 톡토 축출이 가능할 수 있었다. 톡토 축출은 토곤 테무르가 皇權을 지키고 이유시리다라의 차기 계승권을 보호하려는 위기의식에서 단행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아유시리다라가 원대 황태자들 중에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을 보유한 계승권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토곤 테무르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Often, an important watershed that evaluated Toghon Temur as an incompetent monarch is the expulsion of Toqto who went out to a battlefield, and people say that the empire fell. It is very questionable if the expulsion of Toqto was a direct cause of the fall. In addition, no matter how incompetent the monarch might be, putting a knife into the back of the commander who went out to the battlefield means that the incident was an important matter to the empire. Thus, it is necessary to investigate the full account of the struggle for authority surrounding Chaekborye(冊寶禮) properly.
Toqto's reinstation as Zhongshu Sheng (Central Secretariat) in 1349 and the miserable withdrawal in 1355 were closely related to Ayusiridara's succession for the next term. Toqto's reinstation as Zhongshu Sheng was possible because of the necessity for checking Taiping Power and the belief of Toghon Temur and Qi Empress that Toqto would calm the public distrust of Ayusiridara and petition for installation. However, Toqto took a nonchalant attitude to Ayusiridara's installation even practicing dogmatism and dictatorship habitually and even postponed Chaekborye for about a year, stating all reasons.
As the whole story was revealed with Qamar's mischief-making, Empress Qi considered Toqto an obstacle against the creation of Ayusiridara regime. Toghon Temur's burden for Toqto, who owned overpowering power compared with Influential Vassal El-Temur or Bayan exploded while meeting the reality of the delay of Chaekborye, and accordingly, Toqto could be expelled at a single stroke. In other words, the expulsion of Toqto can be said to be an action taken out of the consciousness of crisis for Toghon Temur to keep the Imperial power and protect the succession of Ayusiridara to the next term. Consequently, Ayusiridara was able to settle himself as a reversioner who held the most powerful political group, of the crown princes of the Yuan Empire on Toghon Temur's 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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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웅진백제 시기 왜국의 대(對)백제 인식

저자 : 이재석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99-1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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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엽 백제와 왜국의 공적 통교가 시작된 이래로 양국의 지배층이 서로에게 기대했던 것은 각각 왜국의 對백제 군사적 지원과 백제의 對왜국 선진 문물-자원의 제공이었다. 왜국의 대외 관계의 기조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구조에 규제되는 것이었으며 웅진백제 시기의 왜국의 대백제 인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 계체, 흠명천황기에 보이는 임나(안라) 일본부의 기사나 영토 할양, 천황에 대한 백제의 신속(臣屬) 태도 등의 기사를 매개로 당시 왜국의 백제 인식을 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 하면 그것은 모두 왜국 야마토 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라는 가공의 설정을 전제로 기술된 내용들이며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5세기 고구려의 위세와 백제의 곤경을 보면서 왜국 내부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경합(경쟁) 의식이 배양되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지만 다시 재흥하는 6세기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일종의 '용병' 제공과 그 대가로서의 선진문물의 교환 관계라는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四世紀中頃百濟と倭國との通交が始まってから、兩國の支配層がそれぞれ相手に對して期待していたのは、倭國の對百濟軍事支援と百濟の對倭國先進文物の提供であった。倭國の對外關係の基調も基本的にはこうした樺組みに規制されるものであり、熊津百濟時期の倭國の對百濟認識というのもそれから外れるものではなかった。『日本書紀』 繼體, 欽明天皇紀にみえる、たとえば任那(安羅)日本府の關連記事や領土割讓記事, 百濟の天皇への臣屬ぶりの記事などを媒介にして當時倭國の對百濟認識を論じるのは妥當ではあるまい。なぜなら、それらの記事はヤマト王權による韓半島南部支配という架空の設定を前提にしていると思われるからである。五世紀における全盛期の高句麗の威勢や百濟の困境を目にして、倭國內部で高句麗や百濟などに向けての競合(競爭)意識が盛り上がってきた可能性は無視できない。しかし、再び再興してきた六世紀の百濟と倭國との關係は、上記した樺組みとも繫がる、ある種の'傭兵'の提供とその代價としての先進文物の交換、というものであり、倭國の對百濟認識もそこから探っていくのが妥當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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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계 관인들에게는 < 其先. (祖)~. >나 < A者. B子(孫)也. >와 같은 출자의 기록이 단순하게 훙졸전을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나라시대에서 헤이안 시대에 걸쳐 당시 위정자들의 시각의 변화와 함께 시대상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많은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라시대에는 桓武천황이 추진하던 씨족질서 재편의 움직임 속에 '功臣之家' 로서의 최종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도래계 씨족들은 선조의 연혁을 부각시켰으며, 坂上씨를 제외한 모든 훙졸전에서 비도래계 관인과 대별되는 < 其先. (祖)~. >의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日本後紀』에서도 < 其先. (祖)~. >의 형식은 유지되었으며 '蕃人'이라는 노골적인 번속관념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즉 나라시대에는 도래계로 구분되는 선조의 연혁이 훙졸전을 통해 '功臣之家' 로 최종적인 승인을 받는 전제조건이었다면, 이 시기의 < 其先. (祖)~. >의 형식은 당시 일본적인 화이관의 변화 속에서 비도래계 관인과 대별되는 번속자로서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文德天皇實錄』에서는 대학료 출신자의 증가와 함께 < A者. B子(孫)也. >의 형식을 취한 출자의 표기가 다수를 차지하는 점이 이전 시대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것이다. 아직은 도래계임을 나타내는 < 其先. (祖)~. >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선대로부터 뛰어난 가문의 연혁이 구체적으로 기술된 < (曾)祖~ >의 형식도 확인되었다. 나라시대의 개인의 공적 달성은 文才, 불상주조, 에미시 정토, 정변 진압의 공로 등과 같이 다방향으로 확대되었다면, 헤이안시대로 접어들면서 심화되는 숭문의 풍조와 함께 대학료 출신자, 國司로서의 청렴함과 목민의 임무를 완수하는 양리라는 명확한 기준점이 형성되어 갔다고 생각한다. 훙졸전의 官歷이 당시 천황과 관료간의 상호결합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면, 이 시기부터는 당시의 정치적인 과제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기능적인 관료군으로 그 역할이 변모해갔음을 알아 볼 수 있겠다.
『日本三代實錄』에서는 도래계 관인의 특수성이 드러났던 < 其先. (祖)~. >의 출자형식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으며, < A者. B子(孫)也. >의 표기와 함께 무가의 坂上씨, 문장도의 都씨, 명경도의 菅野씨, 算道의 家原씨와 같이 고유한 가문이 형성된 씨족들로 한정되었다. 이와 같이 도래계 씨족으로서의 대별성은 완화되며 점차 가업의 유무가 졸전에 채록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薨卒傳は日本古代官僚制秩序の中で氏族の地位の確立と密接な關係をもち、時代ごとに特異性が表われ、六國史の性格にまで窺える核心的な內容であると言えるだろう。どころで、渡來系官人には、< 其先. (祖)~. >または< A者. B子(孫)也. >という出自の記事が單純に薨卒傳を構成する形式ではなく、奈良時代から平安時代にかけて渡來系官人に對する當時の權力者の意識の變化や時代像を讀み取れる重層的な意味をもっていた。
まず、奈良時代には桓武天皇の時期に行われた氏族秩序の再編の中で'功臣之家'としての最終的な承認をもらうため、渡來系氏族たちは先祖の沿革を强調し、その結果坂上氏を除くすべての渡來系官人の薨傳には日本の官人と區分される< 其先. (祖)~. >という形式で書かれた。
『日本後紀』の中でも< 其先. (祖)~. >の形式は繼承され、輕蔑の意味をもつ'蕃人'という用語も確認された。卽ち、奈良時代には渡來系に思われる先祖の沿革が'功臣之家'として認められる前提條件であったとすれば、この時期の< 其先. (祖)~. >という形式は、當時の華夷觀の變化とともに日本の官人と大別される'蕃俗者'としての意味を有していたと思う。
『文德天皇實錄』をみると、大學寮出身の增加とともに、< A者. B子(孫) >という形式が多數確認できることが以前と違うところである。また、先代からの優れた家柄の沿革が具體的に書かれた< (曾)祖~ >の形式もみられた。これは、今後< A者. B子(孫)也. >に變われる家柄の意味で、この時期國史に書かれるほど氏族秩序の確立と安定化に影響を及ぶ固有の家業の重要性がしだいに台頭する時期だと言えるだろう。また、良吏が數多く確認できることは、幼少の天皇が卽位し、君恩一奉仕を基本とする官人制秩序が搖らいでいく中、良吏として當時の政治的な課題を效果的に推進する機能的な官僚の役割が求められる時代に變化して行ったと思う。
『日本三代實錄』では、渡來系官人の特殊性が現れた< 其先. (祖)~. >の出自の形式が、もうみられないことが大きな特徵だと指摘できる。また、この時期は武家の坂上氏、文章道の都氏、明經道の菅野氏、算道の家原氏など、家柄が明確な渡來系官人に限って卒傳に名を載せた。これとは對照的に百濟王氏の薨卒傳がみられないことは、文人社會が深化していく中で、文人出身者が一人しかいないこと、また諸氏族の家柄の特殊性が明確化してくる社會的變化に對應できなかったことによ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このように渡來系という大別性は緩和され、次第に家業の有無が卒傳に名を載せる重要な基準になっていったと言え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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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세 무슬림 이베리아의 'Convivencia' 연구 -갈등과 공존의 상호보완적 관계 구도를 중심으로-

저자 : 김정하 ( Kim Jung H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71-216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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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무슬림 이베리아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평화적 공존의 중세적 실험이었다는 주장과 문명 간 갈등과 충돌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두 논지 모두 연구자의 문화적 배경, 인종, 종교 등의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마치 중세 이베리아 문화 구성요인들 간 실제관계의 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연구의 핵심은 상호 대조적인 두 주장을 비판적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즉,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두 주장이 관계의 양단(兩端)에 위치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식의 관점을 달리하면 상호보완의 구도를 간주 할 수 있다. 새로운 제안의 이론적 배경은 음양 오행론이다. 이에 따르면, 공존과 갈등의 연구 키워드는 중세 이베리아 역사의 두 이질적인 측면이면서, 상반응합(相反應合)의 원리에 따라 협력과 경쟁의 구도로 작용한다.
새로운 해석을 위해서는 연구의 관점, 즉 연구방법론 상의 역사철학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직선적(또는 기독교적) 역사철학을 대신해 순환론적 역사철학을 채택한다. 역사는 순환의 과정이며, 상보성 구도에 따라 다양한 관계구도를 연출하면서 역사요인들 간의 궁극적인 균형을 지향하는 복수 요인들 간 관계의 유기적인 전체이다.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정복은 로마제국이 주도했던 유럽-지중해 세계의 통일성과 Intercommunication 체제의 붕괴에 따른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로마제국에 의한)통일은 이전 시대의 구도에서 전체를 구성했던 부분들이 새로운 합(合)의 차원으로 변화된 것이며, 상호간 이질적인 복수 요인들이 협력과 경쟁의 작용을 지속적으로 반복한 결과이다. 이후 통일성의 와해도 그 분열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통일성을 향해 나아간다. 서고트의 이베리아 지배는 로마에 의한 지중해-게르만 유럽의 통일이 보다 풍부한 요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통일성을 지향하는 역사의 한 흐름에 해당한다. 변화를 자극하는 주요 동기들은 대개의 경우, 내부에서 발견된다. 지배-피지배 간 일방적인 관계, 교리와 이념 등의 차이에 의한 갈등 등과 같은 비(比)상보성의 불균형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지적은 8세기 초반 이슬람의 이베리아 정복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들로 작용했다. 무슬림의 지배는 딤미제도, 즉 딤미(Dhimmi)에 대한 법적 규정을 고려할 때 로마제국의 공존적 통치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배 세력이 유일신 종교 문화였다는 점에 있어서도 4세기 말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로마제국에 비유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무슬림의 역사적 중재를 지적한 이유는 이것이 이후의 역사적 흐름에서 상보적 교류의 연속성과 공존의 구도를 보장하는 기능이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 유일신 신앙은 한편으로는 대립적 구도로 보이지만, 이들 간 큰 차이는 (차별이 아닌)다양성의 시각에서 볼 때 오히려 관계의 역동성을 자극하는 동기로 작용하였다. 중재의 언급에 따른 또 다른 이유는 무슬림의 등장이 게르만의 유입으로 단절되었던 유럽지역의 농업권과 지중해의 교역활동을 재차 연결하는 결과를 동반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종교,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자의 현실에 의한 영향을 수용한 사례들을, 예를 들면, 모사라베와 유대인들의 폭넓은 사회적, 경제적 활동과 번역으로 상징되는 지적 교류와 그 결과들에서 찾을 수 있다.


The study of the history of medieval Muslim Iberia is summarized as the subject of conflict and conflict among the civilizations, and claims that it was a medieval experiment of peaceful coexistence. Both theories are deeply related to the cultural, racial and religious identity of the researcher.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this is an extens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edieval Iberian cultural components.
The key to this study is to critically complement the two contrasting arguments. In other words, in this paper, the two existing arguments are located at both ends of the relationship, and on the surface, they appear to be in opposition. The theoretical background of the new proposal is Yin and Yang and Five Elements. According to this, the research key-words of coexistence and conflict are two heterogeneous aspects of medieval Iberian history and act as a structure of cooperation and competition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phase reaction synergy.
The Iberian conquest of the Visigoths seems to be due to the collapse of the European-Mediterranean unity and intercommunication regime led by the Roman Empire. In this case, the unification (realized by the Roman Empire) is the result of the change of the parts that made up the whole in the structure of the previous era to a new level of unity, and the result of the continual repetition of cooperation and competition between different and heterogeneous factors. Afterwards, even if unity falls, it progresses toward new unity through the process of division. The Western Gothic rule over the Iberian Peninsula is a trend in history that aims for a new unity of Roman-German European unification by Romans. The main motivations for stimulating change are usually found internally. This is an imbalance of non-complementarity, such as a unilateral relationship between dominant-to-dominant control and conflict by differences in doctrines and ideologies. This set of points served as a factor in making Islamic conquest of Islam possible in the early eighth century. Muslim rule is not much different from the coexistent ruling policy of the Roman Empire, given the legal provisions for the Dhimmitude system. Even though the ruling power was the only religious culture, it can be compared to the Roman Empire, which declared Christianity as the state religion at the end of the 4th century.
The reason for pointing out the historical mediation of Muslims in this study is that it is a function of ensuring the continuity of complementary exchanges and the composition of coexistence in later historical flows. The three monotheistic beliefs, on the one hand, appear to be oppositional compositions, but the great difference between them acts as a motive for stimulating the dynamics of relationships, from the perspective of diversity (not discrimination). Another reason for the mention of arbitration is that the rise of Muslims was accompanied by a re-connection between the agricultural rights of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trade, which were cut off by the Germanic influx. And in this process, we maintain examples of our own religious and cultural identities, while embracing the influences of others' realities, for example, intellectual exchange, symbolized by the broad social and economic activities and translations of Mozarabs and the Jews. You can find it in the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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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73~1883년의 베트남 탄광 개발 문제 -근대화와 식민지화의 갈림길에서-

저자 : 정재현 ( Jeoung Jae 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17-25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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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가 주권을 상실하기 전의 마지막 십년 동안 석탄 자원의 개발은 베트남의 근대화 기획에서나 프랑스의 제국주의 기획에서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문제였다. 베트남의 개혁적 지식인들은 그들 나라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석탄 자원의 개발을 제안하였고, 베트남 조정도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여 석탄의 탐사와 채굴을 지시하였다. 그렇지만 근대적인 광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외부의 기술과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백했다. 문제는 서양 열강 중에서 베트남에 그러한 것들을 제공할 의사를 지닌 나라가 베트남에 침략적 의도를 가진 프랑스뿐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 조정은 중국인들에게 탄광을 불하함으로써 중국 자본을 통한 탄광업의 발전과 프랑스 세력의 견제라는 두가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1874년 이후로 베트남의 석탄 자원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프랑스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였다.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의 석탄이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세력 팽창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처음에는 현지에 주둔한 해군 장교들에 의해, 그리고 1881~1882년에는 광산 기사인 푹스와 살라댕에 의해 이루어진 조사 작업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의 석탄 자원에 대해 한층 정확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자원의 독점적인 개발권을 얻어내고자 애썼지만, 베트남 조정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쳤다. 탄광 문제는 프랑스 당국자들로 하여금 베트남을 경제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베트남의 광물 자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집착은 1882년에 프랑스군이 하노이를 점령했을 때 절정에 달했으며, 이듬해에 프랑스 정부가 베트남을 정복하기로 한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요소들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In the last years of independence of the Nguyen dynasty, coal mining was a major issue for both the Vietnamese modernist project and the French imperialist project. The reformist Vietnamese elites proposed to develop coal mining for the modernization of their country, and the Hue Court accepted these proposals, encouraging mineral research and mining of some coal beds. However, it soon became apparent that they needed to seek external supports for technical knowledges and funds for developing a modern mining industry. The problem was that among the Western powers, the Vietnamese found only one who was willing to give such supports: France, whose expansionist intention towards Vietnam became more and more evident. Under these conditions, the Hue Court decided to grant mining rights to the Chinese, with a view to develop coal mining by Chinese capitals and, at the same time, to curb French influence.
This policy provoked a very strong reaction from the French, who were also interested in the exploitation of Vietnamese coal since 1874. For them, it could play an important role in the extension of their powers in Asia. Through the researches first made by the naval officers, then by mining engineers of the mines, Fuchs and Saladin, in 1881-1882, the French acquired more precise information on the coal deposits of Vietnam. Above all, the study of Fuchs demonstrated their exploitability. The French tried then to obtain the rights to exploit Vietnamese coal mines, but they met with firm opposition of the Vietnamese authorities. The question of mines led the French authorities to conclude that the economic domination of Vietnam was only possible under political domination. The French attachment to Vietnam's mineral wealth reached the peak when Rivière occupied Hanoi in 1882 and acted as a decisive factor in the colonial conquest of Tonkin the next year.

KCI등재

82000년대 중반 프랑스의 불법체류자 자녀 교육권을 위한 시민불복종 운동

저자 : 민유기 ( Min You-k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98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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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프랑스에서 엄격한 이민규제와 불법체류자 추방 정책이 적용되던 2000년대 중반 불법체류자 자녀 교육권을 위한 시민불복종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민정책과 불법체류자 합법화 흐름을 개괄적으로 검토하였다. 이후 2002-2007년 시라크 대통령 시기 두 차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사르코지의 광범위한 불법체류자 추방 정책을 고찰했고, 엄격한 이민규제에 대한 주요 일간지 보도의 시각을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2006년 불법체류자 교육권을 위한 시민불복종 운동과 이 운동을 주도한 시민단체 '국경없는 교육망'의 활동을 분석하였다. 불법체류 자녀 교육권을 위한 시민불복종은 국민국가의 시민과 다르게 권리를 지니지 못한 불법체류자들에게 '권리를 가질 권리'를 부분적으로 제공하였다. 이는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와 억압적 공권력에 대한 시민불복종이 기존의 법과 제도가 허용하지 않는 권리의 획득을 가능하게 만든 역사적 사례이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civil disobedience movement for the right to education of undocumented immigrants in the mid-2000s when immigration restrictions and large-scale deportation policies were applied in France. For this purpose, at first the flow of immigration policy and regularization of the undocumented immigrants from the 1970s to the 1990s is reviewed. Then, the strict policy of deportation of undocumented immigrants by N. Sarkozy, who served as the minister of the Interior twice during the 2002-07 presidency of J. Chirac, is examined, And perspectives of the major newspapers coverage of strict immigration policy is analysed. Finally, the civil disobedience movement to protect the right to education for the undocumented immigrant children in 2006 and the activities of the Reseau education sans frontières(RESF), which led the movement, is discussed. The civil disobedience succeeded in at least partially providing 'the right to have rights' to undocumented immigrants who, unlike the citizens, did not hold the rights. This is a historical example of acquiring the rights which until then the existing law and institution did not allow through social consensus of the citizens and the civil disobedience to oppressive public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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