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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0)~43권0호(2019) |수록논문 수 : 207
학림
43권0호(2019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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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후기 중화의식의 변용과 그 성격 -조선중화의식의 실상에 대하여-

저자 : 양양 ( Yang Ya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5-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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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명청교체 이후 전통적 중화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일본을 비롯된 일부 동아시아 국가들은 점차 전통적 중화의식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자국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오히려 중화 문명을 전유함으로써 스스로 중화의 계승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다. 조선후기의 이러한 사상적 특징은 20세기 초반에 일본 식민학자와 한국 민족주의 학자들에 의해 사대적, 정체적인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심지어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도 지목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국가민족의식의 발전에 따라 한국학계에서는 구래의 식민사관을 바로잡으면서 새로운 역사 인식을 발흥시키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일부 학자들은 조선후기의 중화의식으로부터 후대 민족주의의 뿌리를 찾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며, '조선중화주의'를 둘러싸고 한민족의 주체성이나 진보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한국학계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일부 중국인 학자들 중에서도 조선후기의 문화사상을 논의할 때 한국 민족주의와 연결하여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조선후기의 중화의식은 전통적 동아시아 가치관에 따라 형성된 일종의 가치판단이다. 따라서 단지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에 비추어 그 성격을 논의하는 것은 다소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본문에서는 동아시아 사회의 전통적 가치지향을 바탕으로 조선중화의식의 사상적 근원을 찾아내며, 17세기 명청교체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사상적 변용 양상을 단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에 조선중화의식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더 나아가 한중 학계의 연구 진행 상황과 결합하여 '조선중화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필자의 주장을 전개하고자 한다.


Following the transition from the Ming Dynasty to the Q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and the collapse of the Sinocentric order, many Asian countries (including Japan) gradually drifted from the Sinocentric world-view and began viewing themselves as more self-centered, independent countries. Joseon was alone in continuing its Sino-centric world-views. Japanese colonial historians and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saw this Sino-centrism as the cause of Korea's 'flunkeyism' and 'stagnation,' to the extent that they believed it was the root cause of Korea's failure as a state.
However, as national consciousness evolved in the 1980s, Korean academics started to challenge these old interpretations, bringing about the rise of new historical narratives. Additionally, whilst scholars were beginning to search for the roots of Korean nationalism within Sinocentrism, they also sought to address problems related to Korean national identity and progress within the context of Sinocentrism.
Recently, as a result of the influence of Korean academia, some Chinese scholars who study the Joseon Dynasty have begun to discuss Korean nationalism alongside Korean cultural values. However, the Sino-centrism of the late Joseon Dynasty has been portrayed as originating from traditional East Asian values. This portrayal is not reflective of the nationalistic values of today.
This paper analyzes the ideological origins of Joseon's Sino-centrism within the context of the traditional values of Asian society, and the acculturation of the ideologies of Joseon's intellectuals after the transition from the Ming Dynasty to the Q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Through this process the true nature of Joseon's brand of Sino-centrism will be explained. This paper will also detail the author's opinions on what exactly Joseon's Sinocentrism is, supporting this view with research from both Korean and Chinese 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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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의 팽창과 징병(徵兵) 관구(管區) 변화

저자 : 신효승 ( Shin Hyo Se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3-6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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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무장저항은 대한제국 군인을 비롯하여 민중까지 아우르는 국권회복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에는 독립운동으로 구체화하여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 등 국외까지 운동범위를 넓혔다. 민족의 저항 의지는 일본의 무력에 대항하면서 보다 대상과 범위가 명확해졌고, 활동 역시 구체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심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함께 일본군이 기반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였지만, 지배력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당시 국제 정세와 일본 국내 상황은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에는 불충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육군은 일본 내 주도권 확보를 위해 대한제국을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을 통한 일본육군의 주도권 확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사실상 일본육군이 일본 내에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러일전쟁 이후 조선 주둔 일본육군의 배치와 증설 과정을 통해 살펴보았다.


After forced dethronement of King Gojong and the disbandment of Chosun's Army in 1907, armed resistance developed into a movement to restore national sovereignty by both the officers and soldiers of Korean Empire and the people in general. After forced annexation of Korea into Japan in 1910, armed resistance was embodied into independence movement and expanded its scope of the movement to the foreign countries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independent army bases abroad. Will of Korean people to resist became clearer in its target and range with the continued conflicts against the Japanese armed forces and their activities developed more specific as well. Japanese colonial rule and a Japanese Army were at the very target of all these resistance and activities.
While Japan made Korean Empire its protectorate after the Russo-Japanese War, its controlling power was limited. Especially, international situation and domestic situation in Japan at the time were insufficient to secure Japanese influence on the Korean Empire. Nonetheless, Japanese Army tried to put Korean Empire under its influence to secure hegemony in Japan. However, the Japanese Army could not secure hegemony through Korean Empire. It was in reality thanks to effect of the First World War that the Japanese Army was able to recover its influence in Japan. This study looks into this process through the deployment and expansion of Japanese Army stationed in Korea after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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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60~70년대 초 괴산가축사양조합의 협동조합운동 연구

저자 : 김소남 ( Kim Sonam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63-111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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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60년대 충북지역에서 메리놀회 사제들이 전개하고 추동한 신협운동과 1968년 1월 괴산지역에서 장제남 신부에 의해 괴산가축사양조합이 설립되는 배경 및 과정, 1960~70년대 초 중앙목장과 고마목장, 백양목장과 매전목장의 축산사업과 특징, 소수가축신협과 매전가축신협, 고마가축신협 등 목장이 소재한 농촌부락에서 소대부를 중심으로 한 가축신협의 설립과 초기 운영내용 등을 살펴보았다.
1968년 1월 장제남 신부는 괴산성당의 주요 평신도들과 함께 소수면 입암리에서 괴산가축사양협동조합을 창립하였으며, 미국의 메리놀외방선교회와 한국가톨릭구제회, 영국의 옥스팜재단(OXFAM) 등으로부터 외원자금을 끌어와 중앙목장과 매전목장 등을 설치하였다. 당시 괴산가축사양조합은 괴산성당의 공소가 있는 농촌부락들에서 마을지도자들의 요청에 기반하여 목장들을 세우고 육성우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목장이 설치된 농촌부락에 가축신협을 세운 후 이들 목장과 신협을 중심으로 괴산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 농촌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토록 추동하였다. 아울러 축산기술의 보급과 육우 사육기술 습득을 위한 학습소의 설치하여 전문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으며, 농민교육원이 설립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68년에 창립된 괴산가축사양조합은 충북육우개발협회와 충북농촌개발회를 거쳐 오늘 눈비산마을로 이어져 오면서 괴산지역을 중심으로 충북지역에서 농촌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 가톨릭농민회운동과 생명공동체운동을 전개해 왔다. 본 연구는 1970~80년대 충북육우개발협회와 충북농촌개발회가 주도한 제반 협동운동의 기원으로써 1960년대 충북지역에서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농촌청년들이 전개한 신협운동과 농촌개발운동의 일단을 살펴보고, 괴산가축사양조합 시기의 목장의 운영을 통한 육우사업과 목장 소재 농촌부락의 가축신협을 통한 축산사업과 협동조합운동을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This article focuse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Livestock Credit Union and its early management. This includes the Credit Union Movement led by Maryknoll priests in Chungcheongbuk-do Province, Goesan Livestock Rearing Co-operative's establishment by Father Clyde F. Davis(Jang Je-nam) in January 1968, livestock business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ongang·Goma·Baekyang·Maejeon ranches from the 1960s to the early 1970s, and Livestock Credit Union's activities including cow loans in rural villages that had ranches.
Father Clyde F. Davis and the Goesan Cathedral's laity established Goesan Livestock Rearing Co-operative in Sosu-myeon Ipam-ni and established the Joongang·Maejeon ranches with foreign aid from America's Maryknoll Foreign Missons Society, Britain's OXFAM and Korea's Catholic Relief Services. At the time, Goesan Livestock Rearing Co-operative developed the calf rearing business upon the request of rural village leaders, whose cows were for common use; they established livestock credit unions in rural villages where ranches were situated, leading poor Goesan farmers to develop rural development movements and co-operative movements; and sought to train technical professionals by establishing Peasant Education Centers for propagation of livestock technology and beef cattle rearing technology, consolidating the foundation for agriculture academies.
Goesan Livestock Rearing Co-operative, established in 1968, was reorganized into the Chungbuk Beef Cattle Society and the Chungbuk Rural Development Society, known these days as Noonbisanmaeul (Snow Rain Mountain Village), which helped to develop rural development movements, co-operative movements and the Korean Catholic Peasant Society Movement around Chungcheongbuk-do Province. This research examines the Credit Union Movement and rural development movements led by Maryknoll priests and young farmers in Chungcheongbuk-do Province in the 1960s as the origins of the co-operative movements led by Chungbuk Beef Cattle Society and Chungbuk Rural Development Society in the 1970s-1980s. This research also examines the livestock business and co-operative movements through the beef cattle business during the period of the Goesan Livestock Rearing Co-ope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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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초(漢初) 출토(出土) 편목(篇目)의 특징과 그 의의

저자 : 장호영 ( Chang Ho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13-14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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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秦秦漢시기의 문헌은 대부분 篇단위로 유통되었다. 戰國時代에 이르러 문헌의 수집은 수집자의 관심사나 필요를 중심으로 수집되었고, 『上博楚簡』 등의 자료에는 이미 유사한 주제의 문헌이 篇단위 이상으로 묶여있었을 가능성이 논의된다. 또한 秦의 통일 직전 편찬된 『呂氏春秋』는 편찬 당시 이미 여러 篇으로 이루어진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의 연장선에서 漢初의 篇目은 보다 큰 문헌의 구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 篇目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으며, 이는 銀雀山漢簡孫子兵法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해당 篇題木牘을 통해 孫子의 대표저작 13편을 다른 저작과 구분하며 당시 독자의 중층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銀雀山漢簡守法守令等十三篇은 체계를 갖춘 다원적 문헌의 편집본으로 당시 유통된 문헌 구성중 하나로 보인다. 다른 예시인 阜陽漢簡의 篇題木牘은 다소 임의적 구성으로 보이나, 역시 다원적 문헌을 엮고 있다. 이러한 예시들은 당시 篇目이 기존 문헌을 엮어 다른 문헌과 구분 짓고, 문헌의 구성정보를 담아 유통시키며, 새로운 문헌 구성을 형성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漢初는 각종 정책을 통해 문헌 유통이 활성화된 시기였다. 篇단위의 先秦전적이 七略의 체제로 정리되기 전 과도기인 漢初, 篇目은 다양한 구성의 생산과 유통을 보여주고 있다. 漢初의 篇目은 비록 미성숙한 단계였지만, 문헌의 유통에 활력과 역동성을 더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During the pre-imperial and early imperial periods, the majority of texts were distributed as separate chapters(篇). Readers in the Warring States period gathered these chapters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or needs. In this manner, the unearthed early Han dynasty's lists of chapters represent larger texts which consist of plural chapters. Through the analysis of the lists, we can understand the readers' recognition of SunZiBingFa(孫子兵法);the composition of ShouFa-ShouLingDengShiSanPian(守法守令等十三篇) with plural sources;the flexible composition of FuYang Han bamboo slips(阜陽漢簡). Through various policies carried out by the Han royal court, the distribution of texts was invigorated. Although the lists were limited, they ultimately made distribution more dyna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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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30년대 상해시정부(上海市政府)의 공영집단주택(公營集團住宅) 관리(管理) -평민주소(平民住所)를 중심으로-

저자 : 유현정 ( Yu Hyun J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145-18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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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근대 상하이에서 붕호구의 팽창 과정과 그 해결책으로 공공 임대주택인 평민주소를 설치, 운영하는 과정에서 상하이시정부, 조계 당국, 상하이시민들의 대응 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상하이가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거 공간이 상품화되었고,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도시 하층민들은 도시 곳곳에서 棚戶區를 이뤄 거주하였다. 도시미관, 치안, 위생 등을 이유로 붕호구는 租界와 華界의 시정 당국 모두에게 단속 대상이었으나, 그 처리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상하이시정부는 붕호민의 이주대책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平民住所'는 상하이시정부가 붕호민의 이주를 위해 건설한 공영 집단 주택이다. 평민주소 건설은 본래 南京國民政府가 民生사업으로서 입안한 사업이었다. 비록 국가 재정문제로 인해 지방 정부에 이관했을지라도, 이 사업은 중앙 정부의 근대 국가 건설기획에 활용되는 것이었다. 당시 평민주소 운영의 내용을 살펴보면, 평민주소 정책은 입주민의 일상을 장악함으로써 국가 건설에 필요한 국민을 만들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향점은 新生活運動으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도시 빈민의 주거 안정을 도모한다는 평민주소의 본래의 취지는 입주민의 일상을 정부가 직접 통제함으로써, 국가 건설에 동원되는 것으로 굴절되고 말았다.


This thesis aimed to examine the actions of the Shanghai municipal government, foreign settlement authorities, and Shanghai citizens in the process of installing and operating the public rental housing 'Pingminzhusuo' as a solution to the expansion of shantytown in modern Shanghai.
When Shanghai was growing into a modern city, the housing space was commercialized. Numerous people of lower classes in the city who could not afford the rent formed shantytowns all over the city. Even though such shantytowns were the subject of control to both foreign settlement and Chinese sections authorities for the reasons like urban view, public order, and hygiene, the handling method was different because the Shanghai municipal government had to establish the migration measures for the residents in shantytowns.
'Pingminzhusuo' is the public group housing constructed by the Shanghai municipal government for the settlement of shantytown residents. Originally, the construction of Pingminzhusuo was the project planned by the Nanjing Nationalist Government as a public welfare project. Even though it was transferred to the local government for the reason of national finance issue, this project was used for the modern national construction plan of the central government. In terms of the operation of Pingminzhusuo of the time, the policies of Pingminzhusuo aimed to create the people necessary for the nation-building by dominating the residents' daily life, which aimed for the New Life Movement. As a result, the original purpose of Pingminzhusuo for promoting the residential stability of the poor in the city was changed to the mobilization to the nation-building when the government directly controlled the residents' dail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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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식민정부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통치를 원칙으로 화인 사회 문화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制定法과 法院을 통해 사회를 통제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과학'과 '문명' 표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홍콩의 토착적 관습들은 점차 침식된다. 그간의 홍콩 中醫學**에2)대한 이해와 연구도 이와 같은 관점을 공유한다. 최초 근대식 병원으로 세워진 중의 전문병원인 東華醫院내에서 전통의 중의학은 서양의학으로 대체되거나 대폭 축소되었고, 중의사는 사망증명서 발급의 권리가 없었으며, 특정 전염병과 助産, 齒科, 眼科라는 주요한 진료 과목을 잃었던 점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소위 '서양의학 패권' 논리만으로는 홍콩의 중의학, 특히 전후 시기의 의료위생제도 바깥에서의 중의학의 지속성과 활발함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인구의 급증과 정치적 불안 등 변화하는 전후 환경에서, 중의사의 진료의 권리, 민간의 중의약 상품유통과 이용의 권리는 법외의 영역으로 폭넓게 보장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출생사망등록(Birth and Deaths Registration Ordinance)에 관한 東華三院 (Tung Wah hospitals)의 특별한 지위에 대한 정부의 검토 과정, 1949년과 1958년 의사등록조례(Medical Registration Ordinance), 그리고 1961년의 약국 독약조례(Pharmacy and Poisons Ordinance) 개정 과정에서 홍콩식민정부가 생산한 내부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전후 홍콩 중의학의 역사상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홍콩식민정부가 근대서양의학의 '의료적'인 기준과 규범으로 중의약 관행을 통제하려는 일방적인 시도는 화인들의 문화에 대한 존중, 주민들의 감정 등 '비의료적'인 요소들에 부딪혀 결코 쉽게 관철되지 못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전후 시기가 되면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의 영향력 있는 화인들 예를 들면 동화의원의 이사회와 행정국 입법국의 화인 非官守의원을 접촉하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정치주체들 곧 영향력 있는 중의약 단체들을 직접적으로 교섭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식민정부는 화인 기층 사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화인사회 통제를 위한 개입과 교섭 과정에서 홍콩식민정부는 화인들의 전통 문화와 관행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불간섭주의(non-interference)를 일관된 원칙으로 재확인하고 약속함으로써 안정적인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고를 통해 전후 홍콩의 중의학은 오랜 중화 전통문화로부터 이어져 왔을 뿐 아니라, 중국대륙에서 생산된 약재의 수입과 소비, 그리고 재수출이라는 측면에서는 근대이래 대륙 중국과 아시아, 세계를 잇는 무역네트워크의 한 축을 담당한 홍콩 근현대 역사 그 자체였음을 조망한다.


This paper reviews the government policy on Chinese medicine in postwar Hong Kong by analysing Hong Kong government records regarding Chinese herbalists and Chinese herbal medicine or traditional herbal medicine. These records cover the review on the special position of the Tung Wah hospitals in relation to the Birth and Deaths Registration Ordinance;and amendments of Medical Registration Ordinance and Pharmacy and Poisons Ordinance, from 1948 to 1961. These governmental efforts were in effect to control Chinese medicine and Chinese society under the standards of modern scientific medicine, since many of Western doctors as well as the Medical Department considered Chinese medicine as inferior to Western medicine. However non-medical factors i.e., respect for traditional practice and culture of Chinese medicine were also critical, as Secretariat of Chinese Affairs and Chinese elites insisted. Further more, medical legislations of Hong Kong government had involved various actors of Hong Kong Chinese from former Chinese elites to Chinese Herbalists' Associations and Chinese Medicine Associations who had been emerged as new negotiation partners of the government after the Second World War. Through out negotiations, whether they succeeded or not, Chinese herbalists and Chinese medicine merchants could reconfirm the original policy of non-interference on Chinese medicine which had been the long history of modern Hong Kong, regarding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Chinese medicine, and import and reexport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s from China to Hong Kong an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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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최근 10년간의 고려시기 연구 동향:풍요 속 빈곤

저자 : 김윤정 ( Kim Yun J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3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29-24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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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여 년간의 고려시기에 관한 연구는 사료의 정보화, 학제간 연구 등에 힘입어 연구 주제와 방법의 확장되며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본 글에서는 최근 10여 년간의 연구 동향에서 나타나는 특징 두 가지에 대하여, 그것이 기왕의 연구성과와 어떠한 상관 관계 속에서 파생된 것인지를 살피고 향후 고려시기 연구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대외관계사 분야의 폭발적 성장은 연구 동향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一國적 관점을 탈피하여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한국 중세사회를 조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시기 국제관계, 특히 몽골[원]과의 관계는 연구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축적하였다. 한편, 연구의 양적 질적 성장 가운데에도 거시적 관점에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활발한 논쟁이 퇴조되었다. 해방 이후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새로운 고려시대 역사상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와 연구의 양적 평가가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 역사학의 연구 현실이 반영된 결과는 아닐까 한다.


Over the last decade, the status of research regarding Goryeo history has significantly advanced in both quality and quantity as research topics and methods have developed to include a database system of historical records as well as a new breadth of interdisciplinary research. This paper intends to discuss two major trends that have developed in the research conducted during these past ten years, to examine how those patterns relate to existing research, and to look forward to the future of Goryeo history research.
One emergent pattern in research trends is the explosive growth of research regarding diplomatic history. Turning the study of Korean medieval society from a nationalistic historical focus to a more encompassing East Asian perspective contributed to more perceptive research into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era, particularly regarding Mongol (Yuan) relations. Yet amidst the surging growth of research quantity and quality, the active debates regarding the macroscopic issues of the field have lost momentum. One can attribute these trends to the outcomes of the post-liberation 20th and 21st centuries being saddled with the task of organizing a new understanding of Goryeo history and the pressures of a research system that prioritized quantity of output, resulting in the current landscape of historical scholarship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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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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