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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83)~86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1,075
성경과 신학
86권0호(2018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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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헬라어 단어 연구에 대한 주석적 이해: 어휘 의미론에 비추어서

저자 : 심상법 ( Shim Sang Beop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간행물 : 성경과 신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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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문법적 혹은 더 넓게 언어적인 해석에 기초한 설교의 대부분은 단어 연구 혹은 단어 의미에 편중되어 왔다. 그 중에 특히 어원론적인 단어 의미에 집중한 설교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인 어휘의미론(Lexical Semantics)의 무지와 남용으로 말미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미전달 혹은 의사소통(communication)에 있어서 의미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단어(word)이다. 단어 연구 혹은 단어의 의미 이해란 설교자의 본문 해석뿐만 아니라 설교 작성과 전달에 있어서도 매우 요긴한 도구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단어의 의미 고찰은 역사적으로 자주 오용되어 왔기 때문에 본 연구는 어휘의미론에 대한 이해가 주석적으로 어떤 공헌을 하는 지를 헬라어 단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특히 단어의 의미연구에 있어서 네가지 가능한 의미들인 어원적 의미, 사전적 의미, 사회-문화적인 의미 그리고 문맥적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것의 주석적 역할과 과제가 무엇 인지를 제안할 것이다.


Up until now, most traditional sermons based on grammatical and broad linguistic interpretations have been centered on word studies or word definitions. Such sermons focusing on etymology are the results of ignorance and the misuse of lexical semantics. Whether communicating by written text or spoken text, words are the basic units of meaning. There is no doubt that word studies and lexical semantics are necessary tools for sermon preparation and delivery as well as exegesis. But despite it's importance, lexical semantics have often been misused throughout history. This paper aims to explore how proper understanding of lexical semantics can contribute to exegesis. In particular, this study suggests the exegetical role and task of lexical semantics by dealing with four kinds of meanings which a word can have in Greek word study: etymological meaning; lexical meaning; socio-cultural meaning; and the meaning; that comes from the literary 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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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교 세례의 시행, 그 특성과 의미에 대한 이해연구: 첫 4세기!

저자 : 조병하 ( Cho Byoung-ha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간행물 : 성경과 신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9-7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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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례에 대한 이해가 실천목회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결과로 교회 내에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세례의 특성과 의미를 크게 약화시킨다. 본래의 세례의 특성과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세례의 시작과 형성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원시공동체가 예수께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을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게 된 것은 1세기 후반과 2세기 초 시리아지역을 중심으로 처음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마태복음, 12사도의 교훈서) 이것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핀다. 세례는 유대교의 범주 내에서 세례요한이 처음 시행하였다. 예수와 제자들도 행했고, 오순절 이후 생겨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주요하게 행해졌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유산들이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예배의식, 직무자 안수례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지만 세례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 이외에 그 유래를 찾을 수가 없다. 또한 세례 시행은 세례와 악마를 쫓는 의식, 성령의 강림 의식 등이 결부되면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4세기까지 다양성을 띄며 전개 되었다.


Heute wird das Verstandnis fur die Taufe in praktischen Riten vielfaltig entfaltet. Deswegen steht die Kirche vor vielen Probleme des Praktizieren der Taufe. Folglich wird der Charaker und die Bedeutung der Taufe leichter geworden. Dieser Aufsatz handelt sich von der Taufe in altchristlicher Kirche, um die Taufe ursprunglich wiederherzustellen. Fur erste, warum die Junger Jesu Christi(die Apostel) 'im Namen Jesu Christi', und 'auf den Namen Jesu Christi' ect. taufen, obwohl Jesus der Auferstandene ihnen auf den Namen des Vaters und des Sohnes und des Heiligen Geistes zu taufen befahl; trotzdem darauf niemals im Neuen Testamentum. Seit das Ende des ersten Jahrhundert und das Anfang des zweiten Jahrhunderts tauft man 'auf den Namen des Vaters und des Sohnes und des Heiligen Geistes'(Matthausevangelium 28:19; Didache). Um das Chrakter und die Bedeutung der Taufe klar zu machen, untersuche ich bis 4. Jahrhundert. Vom Beginn des 2. Jahrhunderts an wurde das Christentum von den Judentum und Heidentum als “drittes Geschlecht” allmahlich weithin diffenrenziert. Die Taufe ist vom Johannes des Taufer “innerhalb judischen Religionsgeschichte” angefangen. Die Junger Jesu Christi(die Apostel) taufen in der Zeit Jesu, und nach dem Tag des Pfingstfestes(in der Urgemeinde) im Namen Jesu Christi, in judischer christlichen Gemeinde. Aber nach dem judischen Kriege und seit dem Ende des ersten Jahrhunderts tauft man auf den Namen des Vaters und des Sohnes und des Heiligen Geistes (Onomataufe), universal dem Anfang des zweiten Jahrhunderts, in der heidnisch- christlichen Gemei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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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 후 충남과 대전을 중심으로 한 김창근 목사의 정치활동: 1946.2-1947.3

저자 : 장금현 ( Jang Geumhyun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간행물 : 성경과 신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5-11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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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온전한 독립을 위해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제하에서 훼절된 신앙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당시 기독교를 대표했던 조선기독교단 남부대회(남부대회)는 독립을 위한 정치참여와, 신앙회복과 교회재건에 역점을 두었다. 이두 가지 결의는 당시 주류 기독교가 지녔던 지향점이었다. 해방정국에서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정치에 참여했던 기독교인 연구는 주로 중앙정치나 주류 교단에 소속된 인물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이 논문은 중앙정치가 아닌 지방정치, 주류교단이 아닌 작은 교단에 속한 지도자에 초점을 두었다. 두 축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에 김창근 목사가 있다. 그는 충남과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폐쇄되었던 성결교회 목사였다. 1946년을 기점으로 우파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2월 독촉국민회가 출범하였다. 김창근 목사는 독촉 국민회 충남도부원장과 대전지부장을 맡으면서, 지방조직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 결실은 이승만의 남선순행 과정에서 열렸던 대전집회에서 빛을 발하였다. 1946년 기준으로 대전인구는 96,207명이었는데, 그 중 3-4만명이 이승만의 대전집회에 참여하였다. 성공적인 이승만의 대전집회는 김창근의 대전지부장으로서의 역할과 그의 조직력을 극대화시킨 결과였다. 그의 노력이 인정되어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입법의원 선거에서 독촉국민회 후보로 나서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7년 3월 그는 성결교회 재건과 임원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입법의원직을 사임하였다. 입법의원으로 있으면서, 그는 당시 가장 중요했던 자주 독립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김창근에게 정치는 기독교와 긴밀한 관계였으며, 국가와 민족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었고,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그럼에도 김창근은 교회와 정치 사이에서 택일해야 했을 때, 교회를 우선하였다. 성결교회 임원으로서 재건에 앞장서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Christians after the Liberation of 1945 focused on two kinds of work. The first is to fulfill political responsibility for a completely independent country. The second is to restore the faith that was destroyed under Japanese colonial period. They took part in politics in a variety of ways after the Liberation of 1945. Nonetheless, the study of Christians who participated in politics was limited to those who belonged to central politicians or mainstream denominations. Therefore, this article focuses on a leader who belonged to a small denomination and made politics in the province. He was Rev. Kim Chang-geun of Daejeon Central Evangelical Holiness Church and made politics in Chungnam and Daejeon. In February 1946 the Right launched National Society for Acceleration of Korean Independence(NSAKI). Kim Chang-geun, as a president of the Daejeon branch of NSAKI, actively participated in building local organizations. At Daejeon rally of Syngman Rhee, He made a lot of fruit with his efforts. By 1946, the population of Daejeon was 96,207. About 30,000-40,000 people attended the rally of Syngman Rhee. In Daejeon, the organizations and cohesions of the Right overwhelmed those of the Left. The successful rally of Syngman Rhee was the result of maximizing his organizational ability. He was then elected as a legislator representing Chungnam. Kim Chang-geun's politics was a shield to keep nation. Nevertheless when he had to choose between church and politics, he gave up the latter. For he was a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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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존 오웬의 구원확신론에 관한 개혁주의적 고찰

저자 : 윤종훈 ( Yoon Jong Hun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간행물 : 성경과 신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11-14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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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은 존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시 영국 청교도들에게 구원의 확신론을 목회론적 관점에서 적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집 가운데 8권을 중심으로 신자의 구원의 확신론을 자세히 제시하였다. 특히 시130편 주해서를 통해 구원확신은 신자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며 더욱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신자의 과제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자의 구원확신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근거한 속죄 사역을 통한 법정적 칭의의 결과이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Covenant)에 근거하며 은혜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그는 신자의 구원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가능케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즉, 성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성자 하나님의 은혜의 교제를 통해, 성부 하나님의 위로와 성결의 교제를 통해서 신자의 구원의 확신이 심어진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성령의 인치심 사건과 구원의 보증자가 되심과 기름부으심 사역을 통해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경험케 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오웬의 구원확신론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신앙적 배경이 되었으며 순교적 신앙을 고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Owen succeeded John Calvin's Reformed Theology tradition and applied the doctrine of Assurance by his English Puritan contemporaries from the view point of pastoral care. Among his collective works, eight were directed towards guiding parishioners on the details of the doctrine of assurance. The text of Psalms 130 was used chiefly to indoctrinate and equip parishioners, and he emphasized the need for parishioners to apply this to their lives. He believed that the Assurance of believers was the result of God's eternal promise of atonement through legal justification, and bases this on the covenant of the Triune God and argues that its genesis is in the covenant of grace. Owen maintains that the believer's assurance is possible through an intimate relationship with the Triune God. Therefore he argued that the seeds of assurance are planted through the love of God the Father, the grace of God the Son, and the counsel and holiness of the Holy Spirit, which all manifest through our relationship with the Triune God. He especially emphasized the sealing of the Holy Spirit, the pledge of salvation, and the anointing to assure believers of their salvation. Historically, Owen's assurance doctrine became the religious background for the Puritan Revolution and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ir adherence to faith and martyr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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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승만의 남선 순행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 조직 확산과 기독교

저자 : 이은선 ( Lee Eun Seon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간행물 : 성경과 신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41-17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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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46년 4월 16일에 출발하여 6월 9일까지 남선순행을 하였다. 그의 남선순행은 그의 민주의원 의장직의 사임과 미소공위 준비를 위한 반소주의 자인 그의 배제로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이자 목적은 남부지방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에 대항하는 우파세력 조직이 필요했던 미군정의 요청과 독촉국민회의 지방 지부세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였다. 그는 좌파들의 격렬한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놀라운 대중 동원 능력을 보여주었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의 남선순행은 지방의 거점도시들의 독촉국민회 지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주변 군들의 청중들에게 당시의 초미의 관심사인 미소공위의 회담 진행상황, 민족통일을 통한 자주 독립의 달성과 민주주의 공화제 정부 수립, 국론분열을 일으키며 소련에 예속된 공산주의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 등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연설들을 통하여 지방의 좌파세력들 가운데 우파로 넘어오는 경우들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독촉국민회의 지방지부들이 확대 조직되었고 그의 지지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남선순행 과정에 대전, 대구, 부산, 순천, 보성 등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지역교회들과 목사들이 참여하여 그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6월 11일 독촉국민회 총재로 취임하면서 민족통일총본부 설립을 승인 받아 6월 29일에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 대해 좌파뿐만 아니라 한독당과 미군정도 비판하여 세력 확대에는 실패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 구축에는 일단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의 독촉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 조직에는 국민운동을 통해 국가를 수립하려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가하여 그의 적극적인 지지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를 지지하던 기독교 세력은 미국에서 동지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허정, 김양수, 임영신과 흥업구락부의 오하영과 이묘묵, 그리고 한민당에 가담했던 김동원, 윤보선, 월남기독교인인 이윤영과 박현숙, 독촉애국부인회의 박승호와 황신덕 같은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Syngman Rhee started his south itinerary on April 16, 1946 and continued it until June 9, 1946. He was in a difficult situation to act in the central political arena because he resigned the chairman of the Korean People's Representative Democratic Legislature and he is excluded as a counter-insurgent in the US-Soviet Cooperation Committee. So he started it. But the greater reason and aim is the request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hich needed a right-wing organization against the left-wing forces centering on the People's Committee in the south regions and his intention to strengthen the local branch of the NSRRKI. Despite the fierce criticism and opposition of the left, he showed amazing mass mobilization ability in the provinces and extended his powers. His south itinerary was centered around the local branch of the NSRRKI of the major cities. He spoke the progress of the US-Soviet Cooperation Committee, the attainment of independence through national unification, the establishment of a democratic republican government, and a strong criticism of the Communists causing the dissolution of the state and subordinated to the Soviet Union to the people of the adjacent Guns. Through these speeches, not only were there cases of right-winging among the local leftist forces, but the local branches of the NSRRKI were expanded and their support was strengthened. In this process, local churches and pastors participated and supported his activities, as confirmed in Daejeon, Daegu, Busan, Suncheon, and Boseong. He took office as the president of the NSRRKI on June 11,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headquarters of the National Unification Headquarters was approved and he organized it on June 29. Not only the left wing but also Democratic Korean Independence Party and the US military criticized it, so he failed to expand the power, but succeeded in building his strong supportive forces. In addition, a number of Christians who tried to establish the state through the national movement acted as his active supporters in the NSRRKI and the National Unification Headquarters. His supporting Christian Powers were Huh Jung, Kim Yang Sook, Lim Young-shin who were together working in the America, Oh Ha Young, Lee myomug of HeungupClub, north korean refugees, Lee Yoon Young and Park Hyun S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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