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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논총 update

  •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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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3회
  • : 1738-6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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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7)~78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715
석당논총
78권0호(2020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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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한국과 일본 무(巫) 물질문화의 유사성에 대한 소고 - 신장대와 오누사 및 금줄과 시메나와를 중심으로 -

저자 : 조정호 ( Joh¸ Jong-h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3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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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문화의 시원은 무(巫)에서 찾을 수 있다. 무(巫)는 불교, 유교, 기독교와 같은 고등종교의 전파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한국에서는 무속으로, 일본에서는 신도(神道)로 남아 있다. 불교와 유교가 한반도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처럼, 무(巫) 문화도 도래인(渡來人)에 의해 한반도에서 일본에 전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나 이를 밝힌 연구는 없다시피 하다. 다만,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의 존재가 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신도에서 신으로 신앙되는 천황의 조상 모계가 백제 인이라는 주장이 있었고,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마쓰리(마츠리, 祭り, まつり)와 한국 굿을 같은 맥락에서 조망한 연구가 있으나, 그 전파나 상호간 영향을 탐색한 연구는 미진하다. 한국의 무(巫)와 일본의 신도(神道)를 각각 고유한 것으로 조망할 뿐 그 관계를 비교한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그 주된 원인은 한국의 무(巫) 의식이나 일본 신도(神道)의 마쓰리가 지역별 시원을 강조해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무(巫)에 대한 일본 기록은 한국 무(巫)에 대한 국내 기록보다 역사가 오래되었고, 한국 무(巫) 문화의 일본 전파에 대한 논증은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하타(秦)씨가 10만 여개의 일본 신사 중3만 2천여 개의 신사에서 신앙되는 이나리 신(稲荷神)의 본산을 창건하여 서기 711년 이래 신직을 맡아 제사를 관장해오는 점에 주목하여, 신라와 고구려 및 신라와 백제의 끊임없는 전란과 신라 지배층간의 갈등을 피해 일본으로 이주한 신라계 하타씨가 일본에 정착하여 벼농사, 양잠, 직조 기술 등을 전파할 때 무(巫)습속도 직간접적으로 일본에 전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무(巫) 의식과 행사에서 두루 사용되는 신장대(神將대)와 오누사(大幣) 및 금줄(禁줄)과 시메나와(注連繩)의 전파를 파악하는 기초적인 탐색을 하였다. 한국의 금줄과 일본의 시메나와를 외적인 모양과 기능 및 벼농사 전래와 도래인(渡來人)의 일본 이주를 중심으로 분석하였고, 한국의 신장대와 일본의 오누사 역시 외적인 모양과 기능 및 마지(麻紙)의 일본 전래와 도래인(渡來人)의 제사주관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오누사와 시메나와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물질문화로 볼 수 있으나 이를 다양한 관점에서 실증하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The origin of Korean and Japanese culture may be found in shamanism (巫). Shamanism has been inherited as superficial Moo-sog (巫俗) in Korea under spreading of high religions like as Buddhism, Confucianism, and so on. However, in Japan, shamanism has been inherited as national religion Shindo (神道, しんとう, しんどう). Just as Buddhism and Confucianism were passed on to Japan from the Korean Peninsula, it may be assumed that Korean shamanism was also passed on to Japan during exchanges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academic world, it was suggested that there has been the existence of 'Hata Clan (秦氏) coming over to Japan,' and that a maternal ancestor of the Japanese emperor worshiped as gods in Shindo was Baekje people. Also there is a study that looked at Matsuri (祭り, まつり) and Korean shamanistic ritual (Kut), which are rituals in the same context. However research on its propagation or mutual influence is insufficient, and there are very few studies comparing Korean shamanism and Shindo. The main reason can be found in the fact that in particular both Korean shamanistic rituals and Matsuris emphasize the originality of each region. In this regard, Japanese records for Japanese shamanism and Shindo are older than domestic records for Korean shamanism. Although it is argued that Japan has been handed down a lot of culture through the geographically adjacent Korean Peninsula, arguments on the spread ofKorean shamanistic culture to Japan are lacking. Therefore, in this paper as a basic search, noticed that Hata Clan (秦氏) founded the origin jinja (Shinto shrine) of the Inari deity (稲荷神), which is believed in about 32,000 jinjaes (神社) out of about 100,000 jinjaes, and has served as chief priest since AD 711. When 'Shilla-related people Hata Clan (秦氏)' was to disseminate rice cultivation and weaving techniques by relocating to Japan to escape 'the constant war between Silla and Goguryeo and between Silla and Baekje' and 'the conflict between the Silla ruling classes', it was possible that the Korean shamanistic folkway was also introduced directly or indirectly to Japan. From this point of view, in this paper, the similarity between geumjul (禁-line) and shimenawa (注連繩) that differentiate holy ground is discussed, and also the one between shinzangdae (神將-stick) and ōnusa (大幣) that are widely used in Korean and Japanese shamanistic events. According to this paper, shinzangdae & ōnusa and geumjul(禁-line) & shimenawa (注連繩) that have widely been used in Korean shamanism and Shindo, had been spread in the period of rice farming and jute (麻) delivery from Korea to Japan by the doraein (渡來人) who crossed over to Japan from Korea. Follow-up studies for this are needed in various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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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주 이민구 유배시 연구

저자 : 허윤진 ( Hur¸ Yoon-ji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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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왕실의 후예이자 사대부 문인이었던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유배시를 대상으로 한다. 동주는 유배문학 특유의 비애와 원망, 자기 연민 등의 정서에 함몰되지 않고 시의 창조적인 지평으로 나아갔다.
우선 동주의 유배시는 명청교체기의 동아시아적 질서에 대한 사대부의 관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동주는 현실 정치의 패권에 좌우되지 않고, 연호나 화폐 등의 상징체계를 통해 명(明)을 계속해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으로 간주하였다. 반면 무력으로 패권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청(淸)을 야만으로 규정하였다.
둘째로, 동주의 유배시에는 절후(節候)를 다룬 작품이 많은데, 동주는 이러한 절후시 계열의 작품을 통해서 외부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신적 타자에 대한 일관된 믿음을 견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적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동주는 동아시아 고전문학사의 걸출한 저자들도 초월하지 못했던 부정적인 정서를 초월하여, 고난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강건하고 고상한 품격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동주는 문화적으로 낙후된 유배지에서 후생(後生)들과 학문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상호적인 발전을 추구하였다. 그는 인재를 지역과 같은 외적조건으로 폄하하는 대신, '학문하는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며 젊은 인재들을 격려하는 진정한 권학(勸學)의 자세를 보였다. 동주 이민구는 이와 같이 유배문학의 투습(套習)을 벗어나 현재에도 울림을 주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성취하였다.


This essay investigates the poems of exile written by Dongju Yi Min-Gu, who was a descendant of the Chosun royal family and Neo-Confucian scholar-official. He was not immersed in the typical emotions such as agony, resentment, and self-pity of literature of exile; instead, he proceeded to a more creative dimension of poetry:
First, Yi's poems of exile suggest a perspective of a scholar-official on the East-Asian politics during the Ming-Qing Transition. Without surrendering to the hegemonic power of real politics, Yi continued regarding Ming as the center of East-Asian civilization. On the contrary, he defined Qing as barbarian since it took hold of hegemony by means of military power.
Second, Yi revealed his incessant faith toward the Divine Other in his poems of exile while dealing with the theme of season and weather. Thus he transcended negative emotions which even great writers of East-Asian classical literature had not overcome. And he, as a man of character and integrity, never gave up his own life in the midst of heartbreaking sufferings.
Third, Yi academically interacted with young scholars in the regions of his exile, where used to fall behind other regions in terms of culture and education, and pursued mutual growth. He did not underestimate the value of a prospective scholar on the basis of his background. Trusting the infinite potential of a scholar-in-being, he rather exhorted them to learn fervently and to never give up.
In sum, Dongju Yi Min-Gu accomplished an everlasting poetry, not confined within stereotypes of literature of ex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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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세기 少論계열 지식인들의 聯句詩를 중심으로 시적 교류 양상과 그 의미를 밝히고자 기획된 것이다. 이에 2장에서는 吳道一·崔錫鼎·趙泰億의 작시 현황을 순차적으로 개관하는 것을 필두로 교류 측면에서 확인되는 연구시의 특징을 논의하였다.
이후 3장에서는 소론계열 지식인들의 연구시에서 확인되는 양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첫 번째로는 모임을 통한 시적 교유와 詩興의 발현 양상을 들 수 있다. 소론계열 지식인들은 음주, 연회의 자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임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흥취를 시로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 양상을 보임을 밝혔다. 두 번째로는 送別 과정에서의 연구시 작시 양태를 통해 감정 교류의 일상화 면모를 확인하였다. 작시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관계를 살폈을 때 이들은 이별의 자리에서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다수의 연구시를 지었는데, 이러한 면모는 소론계열 지식인들이 연구시 창작을 일상화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는 공무수행 과정에서 확인되는 공적·사적 경험의 공유 양상으로, 여기에서는 이들이 연구시를 활용하여 해외체험 당시 다양한 지식인들과 의견을 나누었음을 파악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있듯 17세기 소론계열 지식인들은 비교적 까다로운 시체인 연구시의 작법을 준수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운용해 시적 재능을 드러낸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시적 교류를 통해 연구시 창작을 일상화하고 공적·사적 경험을 공유한 면모를 파악하였는데, 이는 소론계열 지식인들의 시문학적 경향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aspects of poetic interaction and its meaning, centered on the linked verses of Soron intelligentsia in the 17th Century. Accordingly, In Chapter 2, this study was to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the linked verses identified in terms of exchange, with the introduction of O Do-il·Choi Seok-Jeong·Jo Tae-Eok's status of versification.
In Chapter 3,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aspects from the linked verses by Soron intelligentsia. First, this study has found out that there were aspects of expressing the poetic interaction and poetic inspiration through the meeting. It is characteristic that the Soron intelligentsia embodied not only the drinking and banquet tables, but also the personal enjoyment from various gatherings in poetry. Second, this study was to confirm the pattern of emotional exchange during the farewell process through the form of versification for linked verses. Taking a look at the relationships of the intelligentsia who participated in the versification, they created a number of linked verses based on their personal friendship at the farewell ceremony, which means that they made their creation of linked verses routine. Third, this study was to comprehend that they exchanged opinions with various intelligentsia during their overseas experience by utilizing their linked verses with the aspects of sharing their public·private experience in the course of performing official duties.
To conclude, Soron intelligentsia in the 17th Century were found to have demonstrated their poetic talent by operating various themes while complying with the writing methods of linked verses as relatively difficult poetry style. In addition, this study was to comprehend the aspects of everyday creation and shared experiences of linked verses through the poetic interaction. It is considered as it showed one aspect of the poetic features of the Soron intelligent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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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골여자 셜은사졍>에 나타난 '서러움'의 동인과 작품의 시대적 의미

저자 : 최은숙 ( Choi¸ Eun-sook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7-10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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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시골여자 셜은사졍>에 나타난 서러움이라는 감정을 주목하여 그 원인과 경과를 살피고, 서러움이라는 감정과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의미를 고찰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시골여자 셜은사졍>은 한국의 근대전환기 구여성이 직면했던 부당한 이혼요구와 이로 인한 구여성의 서러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동안의 논의는 주로 전통과 개화, 신구의 구도로 작품을 해석하거나 이혼담론과 이에 대한 구여성의 인식을 살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본고는 작품에 나타난 서러움의 감정을 주목하여 작품의 시대적 의미를 재해석하였다. 감정이란 것이 생득적이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산물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여성은 전통적인 가족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인정받아 왔다. 남편의 부재가 원망과 한스러운 상황으로 그려지기는 하였으나 그럴수록 가정 내에서의 역할과 '말없음'의 미덕으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골여자 셜은사졍>에는 이러한 기존의 양상과 다소 차별적인 구여성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특히 서러움이라는 감정 언어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직접 말하고 있다.
작품에 나타난 서러움은 화자인 구여성이 남편과의 관계를 근대적 의미의 사랑을 바탕으로 설정한 데에서 출발한다. 근대적 의미의 사랑이란 상대를 정신적 교류의 대상이자 자신의 불완전한 부분을 완전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상정하고, 그와의 유대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남편의 부재와 이혼통보는 바로 자기 존재의 부정이자 사회적 권리의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난 서러움이라는 감정은 근대적 의미의 사랑, 사회 내의 자기 존재 확인과 인정이라는 당대 사회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골여자 셜은사졍>은 구여성 스스로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정체성을 서러움으로 전면화하고, 사회 전체에 이 문제를 공유하고 공론화하는 텍스트로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시골여자 셜은사졍>의 지속적인 필사와 향유는 미처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구여성들에게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도록 하고, 함께 연대하도록 만든 인정투쟁의 행위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This paper pays attention to the emotion of sorrowfulness explored in the works related to “Countryside Women's Sorrowful Stories” and investigates its cause and effect to study the social meaning of the works.
“Countryside Women's Sorrowful Stories” is a work that conveys the injustice of men demanding a divorce from women and the subsequent resentment experienced by women during early 20th century modernizing Korea.
The discussions in the past have mainly been undertaken either by interpreting the works through the contrast of tradition and enlightenment, the macroscopic antagonism of old and new, or by examining the discourse of divorce and how women from the olden days perceived this.
This paper reinterpreted the work by highlighting the emotion of sorrowfulness in the work. This is because the emotion of sorrowfulness is particularly emphasized in this work, and emotions can be seen as a social product generated by social relations rather than produced innately or naturally.
Through such a perspective, the feeling of sorrowfulness emphasized in this work was examined as the basis for the newly emerging romantic love of the modernizing period. Romantic love presumes the other person as an object of psychological interdependence which completes one's imperfections, and confirms one's existence through a bond with his or her significant other. Therefore, the absence or disappearance of the object of love immediately leads to self-deficiency and destruction of self-value.
The recognition of the loss of the object of love and the damage to self-worth is expressed in the work as “sorrowfulness.” Sorrow is an emotion that arises when one does not have what one is naturally entitled to. Sorrow is the representation of self-recognition and understanding of the situation that the narrator herself is facing. In “Countryside Women's Sorrowful Stories,” due to her husband's announcement of divorce, the narrator is forced to experience the loss of love once again and lose her entitlement as a social being. However, it was fundamentally the society's fault that was imposed on her that had nothing to do with her will. Therefore, the emotion of sorrowfulness is bound to be called upon again.
Such sorrow of “Countryside Women's Sorrowful Stories” was the language in which the narrator expresses her identity. Paradoxically, sorrow holds an important meaning in the sense that it was a language of confirming one's identity as a modern self, and a language usefully mobilized to unite people to protest against frustration. However, the image of sorrowfulness widely employed as the dwelling of one's own misfortune and self-pity can be seen as a limitation as it rather internalizes the marginalized status of women of the olden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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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해방기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 지역분관의 설립과 문화 활동

저자 : 남영희 ( Nam¸ Young-hee ) , 이순욱 ( Lee¸ Soon-wook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9-1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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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를 맞이하면서 미국 정부의 공보 활동은 한층 강화되었다. 남한에서의 공보 활동은 미군정 공보국을 통해 이루어지다가 남조선과 도정부 수립 이후에는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에서 이어가게 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주한미군사령부 군사실에서 작성한 문서를 통해 공보원 지역분관의 설립 과정과 역할을 고찰하였다.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은 미국의 메시지와 미국 정부의 정책을 전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11곳의 지역분관을 설치하였다. 공보원에서는 『세계뉴스』, 『농민주보』 등의 매체 발간, 미국 관련 자료의 번역과 배포, 강연과 전시 등 직접적인 대민 접촉 활동에 주력했다. 따라서 주요 지역 11곳에 설치된 지역 분관은 공보 활동의 주요 거점으로 작용하였다. 다음으로 공보원 지역분관의 문화 활동을 각 지역 신문 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11곳의 지역분관에서 문화예술 지원 활동, 교육 활동, 대중계몽과 교양 증진 활동, 선전 활동, 지역사회 연계 활동과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종합해 볼 때, 해방기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에서는 지역분관을 문화정치의 거점으로 삼아 문화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였음을 밝힐 수 있었다.


After World War II, the era of the Cold War began. The public relations activities of the US government have been further strengthened. Public information activities in South Korea were initially carried out through the USAMGIK's Public Affairs Bureau.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the newly established the Office of Civil Information in USAFIK continued the public affairs. This study examined the aspects of cultural activities promoted by the provincial branches of OCI based on two documents written by the USAFIK historical section and local newspaper articles.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 aspects of cultural activities promoted by the provincial branches were diverse; art support activities, educational activities, public enlightenment and culture promotion activities, propaganda activities, and local community-related activities. In addition, it was found that the cultural politics of the provincial branch offices very organized in the local community, and that cultural activities in the form reflecting the characteristics and needs of each region were promo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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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봉건의 「춘향연가」 연구

저자 : 김양희 ( Kim¸ Yang-hee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5-17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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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춘향연가』의 사랑의 의미를 탐색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크게, 이 논문은 네 가지 테마에 주목하였다. 첫째, 이 텍스트의 근본 주제를 자기 탐색에 두고, '옥'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였다. 둘째, '여자' 기표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셋째,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이도령'의 존재성을 해명하였다. 넷째, 춘향연가에서 사랑이 지닌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였다.
『춘향연가』는 제목으로 사랑이 주요 테마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은 낭만적 사랑이 갖는 자기 탐색의 기능과 고백이라는 말하기 형식에서 비롯된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주요 테마이다. 이 텍스트에서 사랑의 대상인 이도령은 저 멀리 존재하는 사물物의 속성을 지닌다. 이는 춘향을 주체로 완성해줄 '그이'가 지닌 허약한 토대를 보여준다. 더불어 절대적으로 원했던 대상이 사실은 허구였음을 알게 되면서 주체도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랑은 대상도 주체도 없는 '텅 빈 에로스'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환상 속의 타자와 주체 모두 사라진 후에, 세계 역시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춘향을 압도하던 환상 역시 사라지고 주체는 결여된 상태로 옥에 남는다.
이 텍스트는 환상 가로지르기의 방식으로 윤리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적 주체가 환상을 통해 주체의 결여를 보충하거나 서둘러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환상의 형식을 통해 세계의 결여와 균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환상을 가로지른 춘향은 에로스의 부재와 주체의 결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세계의 실재와 마주한다.


This study aims to explore the meaning of love in “Chunhyang's Love Song.” Mainly, this paper noted four themes. First, This paper considered this text to contain the problem of self-exploration. From this point of view, I tried to explore the meaning of prison.
Second, This paper studies the meaning of the sign 'woman'. Third, This paper analyzes the status of “Lee Mong-ryong,” the ambiguous object of love. Fourth, This paper explores the subject of Chunhyangyeonga. The love of Chunhyang is fundamentally impossible.
Lee Do-ryeong, the object of love, has the properties of a far-off object. This shows the weak foundation of “he” who will complete Chunhyang as the subject. Besides, the subject disappears as the object that was wanted was actually fiction. In that sense, this love shows 'empty eros' with no object or subject. Nevertheless, the poem's exciting point is that after both the fantasy batter and the subject are gone, the world also disappears. As a result, the Fantasy that overwhelmed Chunhyang disappears and remains in prison with no subject. This text shows ethical possibilities. This is because the poetic subject does not make up for or hurriedly suture the lack of the subject through Fantasy, but rather shows the world's lack and crack through the form of Fantasy. Across the Fantasy, Chun-hyang accepts Eros' absence and lack of subject as her own and faces the world's reality. To obtain the lack of subject matter and the lack of the world as one's own, to face the world's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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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신라의 이서국(伊西國) 복속과 서방교통로

저자 : 이영재 ( Lee Yeong-jae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9-20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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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국(伊西國)은 대체로 신라에 의해 늦게 복속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삼국사기』에 늦은 시기에 병합되었음이 보인다는 데에서 이른 시기에 복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제삼노례왕조의 건무(建武)18년이라는 기년과 『삼국사기』에 다른 주변소국과는 달리 유독 이서국만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고 표현한 점 등에 주목해 본다면 신라가 이서국을 가장 먼저 복속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이서국을 복속한 이후에 재지세력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었는데, 서서히 지배의 강도를 높이게 됨에 따라 재지세력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고 신라의 심장부가 전장(戰場)이 되었다. 반란은 구원군이 도착하여 전세(戰勢)를 뒤집으면서 마무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신라는 가혹한 조처를 단행하여 재지세력을 절멸(絶滅)시켰고, 그것은 이서국이 위치한 청도에 고총고분이 단 1기도 조성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신라는 주변소국에 비해 국력이 다소 열세였고 교통로의 거점이었던 이서국을 복속의 첫 번째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서국을 복속한 지 수십 년이 지나 갑자기 압독국(押督國)이 항복해오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서국을 복속한 신라와 접경(接境)하게 되면서 압박을 느낀 압독국 지배층이 국권을 넘겨주는 대신에 재지기반을 온존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파사이사금은 2개월 간 압독으로 친행(親幸)하였다. 왕의 친행인 만큼 교통로의 안전은 필수적이었고, 신라가 이서국으로 진출하여 개설한 교통로, 즉 이서로(伊西路)의 운용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즉 이서국 복속은 영역확장을 넘어 서방으로의 대외진출을 위한 항구적 안전 확보를 가능케 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고 짐작된다. 이서로의 운용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서로는 신라가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설·운용한 첫 번째 교통로였다고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파사이사금의 친행은 피복속지역에 대한 최초의 사례에 해당한다. 광개토왕 및 진흥왕의 행보와 파사이사금의 친행을 동일시 할 수는 없겠으나 모두 당시 각국의 최전방에 몸소 나아갔다는 데에서 강역 획정과 관련된 순수(巡狩)로 볼 수 있다. 진휼로 표현되었으나 순수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압독국 지배층은 재지기반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결국 수십 년이 지나 반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Iseoguk(伊西國) has been recognized as being late in clothes by Silla. The main reason was that it was not possible to see it as a clothes at an early age because it was merged at a late time in the 『Samguksagi(三國史記)』. However,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year of the 『Samgukyusa(三國遺事)』 or the 『Samguksagi』 as the only toxic Iseoguk as the first subjugation of the Iseogoguk(伊西古國), it can be seen that Silla first conquered the Iseoguk.
Silla acknowledged the autonomy of the local forces to some extent after wearing Iseoguk, but the dissatisfaction of the local forces gradually increased as the intensity of domination increased. In the end, the rebellion broke out and the center of Silla became a battlefield. The rebellion ended with relief forces arriving and changing the atmosphere. Silla, who suppressed the rebellion, completely removed the local forces, which took harsh measures, which led to the result that there was no single large grave in Cheongdo, the old land of Iseoguk.
Silla selected Iseoguk, a transportation route hub that was some what less nationally than neighboring small countries, as the first object of clothes. Decades after the conquest of Iseoguk, suddenly the incident of Apdokguk(押督國) surrendering broke out. The ruling class, which was bordered by Silla and felt pressure, tried to preserve the re-intelligence base instead of handing over sovereignty.
Meanwhile, King Pasa crossed directly to Gyeongsan for two months. The safety of the traffic route was essential as the king's carriage. It was possible because there was the operation of Iseoro(伊西路), a traffic route that Silla entered and opened in Iseoguk. It is therefore speculated that the Iseoguk conquest of Silla was one of the policies that allowed for eternal security for the westward outward advance beyond the expansion of the realm. This is the meaning of Isero's operation. In that respect, it can be understood that Silla was the first traffic route opened and operated to advance westward.
King Pasa's march is the first case of conqueror region. The movement of King Gwanggaeto and King Jinheung and the passage of King Pasa are not the same. However, All of them can be seen as patrols and related constructions on area confirmation because they have advanced to the forefront of each country at the time. Because it was expressed in salvation, but it contained a patrol Apdokguk's the local forces could be said to have been struck by a sense of anxiety that it sometimes lost base. In the end, a rebellion that had passed decades had to occ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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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우왕 9년 법홍산(法弘山) 백련암(白蓮庵)에서 조성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역사·문화적인 성격

저자 : 崔永好 ( Choy¸ Young-h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7-22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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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우왕 9년(1383) 법홍산 백련암에서 조성된 『묘법연화경』 목판의 판본과 정종 1(1399) 중각된 『묘법연화경』 목판의 판본에 표기된 기본정보를 정리한 다음, 이들 불교 기록유산에 담긴 역사·문화적인 실체와 성격을 진단하였다.
두 판본은 기본정보 가운데 광곽·계선·판심 및 행자수, 권수제·권미제·판심제의 구성형태, 서문·본문·저술정보의 구성체계 및 개별 권의 장차 등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서 간행정보의 내용과 저술 주체, 각수명의 유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서문 공란 부분의 계선유무, 권1 제1장의 광곽형태, 권3의 권미제 가운데 三자의 아래 부분 형태, 일부의 서체 등에서도 차이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비교지표를 활용하여 24字本의 『묘법연화경』 목판은 우왕 9년 법홍산 백련암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정종 1년 다시 판각되는 등 2종류로 확인하였다.
우왕 8~9년 법홍산 백련암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 목판은 승려 志祥이 조성불사를 주도하였다. 그는 조성불사 과정에서 고려 종실 및 고위관료 출신과 인적 연계망을 맺고 그들의 지원을 끌어내었다. 이 조성불사에는 『묘법연화경』을 널리 유포하려는 불교적 목적의식과 고려 왕실의 존중·권위의식이 담겨 있으며, 명나라 중심의 대외인식과 함께 고려 왕조의 독자적인 현실의식도 반영되어 있었다.
승려 海隣 등이 백련암 판각의 『묘법연화경』을 태조 7년(1398)~정종 1년 다시 조성하는 중각불사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불사과정에서 고위관료와 외명부의 관료 부인으로부터 일반 백성, 고위 승려와 일반 승려 및 비구니 등 다양한 출신성분의 僧俗과 인적 연계망을 확보하였다. 이 중각불사 역시 『묘법연화경』을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와 함께 부처(불교)의 존엄적 가치·의식이 담겨 있었으며, 조선왕조 개창 이후 고려 왕실의 권위가 반영된 우왕 9년 백련사 조성의 『묘법연화경』 목판을 대체할 수 있는 현실적 목적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ttempt to analyze into the historical & cultural character of the Saddharma-pundari-ka-Sutra-woodblock that the Baenglyeon-temple was created in the 9th year(1383) of the King-Wu's reign. and it was analyzed into character of the Saddharma-pundari-ka-Sutra-woodblock that it was reprinted in the first year of King-Jeongjong's reign. in the process, the existed studies have been critically reviewed, and the original information has been newly organized the surface configuration form & bibliographic information the imprint(刊記) & the engravers(刻手) that these woodblocks-Printing have been existing. these woodblocks are the 24 letters(24字本) in a line.
First, the source information can complement the historical & cultural reality of the reign of the King-Wu's reign and the King-Jeongjong(定宗)'s reign. in addition, these source information can be used as key data to diagnose the identity and differentiation of the two editions. hereby, the Saddharma-pundari-ka-Sutra-woodblock of 24 letters could be classified into two types that it was created in the 9th year of the King-Wu's reign and the first year of the King-Jeongjong's reign.
Among these woodblocks, the Saddharma-pundari-ka-Sutra of the King- Wu's 9th year was led by a Buddhist monk named the Jisang(志祥), was a marked the postface of the Lee-Saek(李穡). the real purpose of this project was to spread the doctrine of the Saddharma-pundari-ka-Sutra widely. This project was reflected the authority of the Goryeo(高麗) royal family.
the Saddharma-pundari-ka-Sutra of the King-Jeongjong's the first year was led by a Buddhist monk named Haerin(海隣), was a marked the postface of the Nam-Jae(南在). this project was reflected the Buddhist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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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朝鮮) 중종대(中宗代) 소격서(昭格署) 관련 논의의 상징적 의미

저자 : 허준 ( Hur¸ Joo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1-26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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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代 조선 조정은 상당기간 동안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 처해있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8년여 동안 여러 차례의 모반이 기도되었으며, 대외적인 상황 역시 순탄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 중종과 그의 관료들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정부의 지배 체제를 정상화시켜야 할 책무를 띠고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국가의 국내외적 위상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정국의 안정을 기도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소격서와 같은 비유교적 의례나 제도의 철폐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왕 중종은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추구하는 유교적 군주가 될 것임을 공공연히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비유교적 제도의 혁파나 개정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차이는 중종과 그의 관료들로 하여금 소격서 제례의 의례적 정당성을 두고 오랜 논쟁을 반복하도록 만들었다. 본 논문은 소격서를 둘러싼 당대의 논의들이 국왕의 정치적 위상, 그리고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국왕과 관료군의 상이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King Chungjong's regime suffered from political instability for a considerable time. For eight years, following the king's ascension to the throne, several attempted rebellions occurred, and international circumstances also were hostile to the new regime. In this situation, King Chungjong's regime desperately needed to stabilize the state and restore the government to its perceived proper role.
As a way to stabilize their state, Chosǒn elites have used their knowledge about Confucian thought and practices to redefine their community's identity. To lay the foundation of Chosǒn's Confucianization, they made efforts to abolish non-Confucian state rituals and institutions such as Sogyǒksǒ. However, King Chungjong was not passionate to reform or abolish non-Confucian rituals even though he openly claimed to be a Confucian king and agreed to launch Confucian policies.
Due to the difference, the king and his officials repeated debates on ritual propriety of Sogyǒksǒ. This paper points out that the ritual debates on Sogyǒksǒ ritual proves that King Chungjong and his officials took different sides on the question of the proper extent of royal authority as well as the question of the Chosǒn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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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김해군 장유면 3·1운동과 지역민들의 '만세후'

저자 : 배병욱 ( Bae¸ Byoung-wook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78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3-29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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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군 3·1운동은 총 6개면에서 12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는 시위가 발생한 경상남도의 21개 부·군 중에서 합천군과 동래군 다음으로 활발한 양상을 보인 것이다. 특히 장유면 무계리의 만세시위는 그 핵심으로, 향촌 유지들이 주도하고 지원한 공세적 시위였다. 군내 중심지역인 김해면이 아닌 변두리 장유면에서 이처럼 공세적 시위가 발생한 배경으로는 장유면 농민들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과 지역 내 문화계몽운동 등 진보적 역량도 배제할 수 없지만, 각 마을 유지들의 향촌 장악력, 그리고 임야조사사업 등 신시정에 대한 불만이 가장 유력하게 검토된다.
본고는 빈약한 장유면 시위에 관한 서사를 최대한 복원하기 위해 일제의 당대 기록과 해방 후 한국인들의 기억을 비교하여 지도부들이 거사하기로 정한 시간 이전에 이미 장꾼들에 의해 공세적 시위가 시작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 조순남의 「자식소회가」에 묘사된 시위 직후 지역 사회의 동향을 살펴보면, 지역민들은 의거를 부정하는 보신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한편, 희생자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승태 등 지도부뿐 아니라 동참하고 응원한 지역민에게까지 시선을 확장한 것은 작은 성과라 할 만하다.


During March and April 1919, the anti-Japanese demonstrations were staged 12 times in seven myeons of Kimhae-gun. This was the second most active of the 21 bu·guns(府·郡) in Gyeongsangnam-do, after Hapcheon and Dongrae-gun. In particular, the protest in Mugye-ri, Jangyu-myeon was the core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Kimhae-gun, which was an offensive demonstration led and supported by influential people. What is the background of such an offensive demonstration in Jangyu-myeon, the outskirts of Kimhae-gun? The difficult economic situation of the farmers and the progressive inclination in Jiangyu-myeon should also be considered. However, the biggest cause is thought to be the grip of the influential people in each village.
With the recently unearthed records, this paper restored to the fullest the narrative on the poor Jiangyu-myeon demonstration. It also looked at local people' movements immediately after the demonstraion described in Cho Soon-nam's “JasikSohwega”. In other words, it noted not only the protest leaders, including Kim Seung-tae, but also the local people who joined and cheered. Due to the rapid urbanization, Jangyu-myeon has been transformed into an urban administrative system. I hope this research will serve as an opportunity to recognize the Jangyu-myeon demonstration, which have been the pride of the local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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