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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논총 update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Journal of Humanites

  •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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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598-3021
  • : 2671-7921
  • :

수록정보
73권1호(2016) |수록논문 수 : 15
간행물 제목
73권1호(2016년) 수록논문
권호별 수록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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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중 예술의 가치 옹호

저자 : 오종환 ( Chong Hwan Oh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1-4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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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중 예술”(mass art)이라는 말을 쓰면서, 대중 예술이 전통적인 고급 예술과 대비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대중 예술을 고급(high) 예술과 대비되는 저급한 또는 낮은 가치를 갖는(low)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중 예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기에 통속 예술(popular art)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의 암묵적인 생각 속에서 대중 예술은 통속적이라서 낮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기에,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대중 예술은 아예 예술이 아니거나 예술이라도 저급한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대중 매체 시대에 있어 대중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를 펼치는 코헨(Ted Cohen)의 다원적 위계주의(pluralistic hierarchicalism)를 논의할 것이다. 코헨은 고급/저급 예술의 일상적인 구분을 인정하면서도, 친밀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예술은 감상자들의 서로 다른 다양한 요구들을 만족시키기에 그 가치가 있으며, 그러한 가치에는 미적으로 고급/저급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농담의 경우에 단순한 농담과 깊이 있는 농담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 농담의 적절한 감상자에게는 모두 웃긴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그 가치는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생각이 예술작품의 가치에 관해서도 성립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가치에 대한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자신처럼 두 종류의 예술을 모두 즐기는 입장에서는 두 종류의 예술작품들이 각각 단계가 다를 뿐 다른 감상자그룹의 다른 미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다원적 가치를 중시하는 코헨의 이러한 입장은 대중 예술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기에, 대중 예술에 대한 앞으로의 논의에서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When we use the term “mass art,” we use it against the notion of traditional pure art, in the sense that mass art is low art, while pure art is high art. We also use the term “popular art” instead of “low art” to avoid its pejorative sense. Since mass (or popular) art is usually thought to have a lower value, some assert that it is not art at all or, if it is art, it is low art. In this paper I will discuss Ted Cohen's pluralistic hierarchicalism to defend the positive value of mass art. Cohen argues tha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value of high art and that of low art, since each art satisfies the different aesthetic needs of different audiences. According to him, art is important to us because it is a focus for a mutuality that locates a community. Works of art are foci for intimate communities. The totalities of such communities to which one belongs determine what kind of aesthetic sensibility one has. As long as works of art fulfill their roles in forming aesthetic communities, the grades of their values do not really matter. In the case of jokes, it does not really matter whether the joke has slight or deep content, as long as its adequate audience feels that it is funny. We can argue that the same applies to the case of art. Cohen thinks that we must accept the egalitarian position of value, since that is the best way to explain why we sometimes enjoy both high and low art, and why sometimes a work of art can attract both high and low audiences. And this egalitarian position for pluralistic values fits more neatly into the contemporary attention to individualistic aesthetic se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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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노엘 캐롤의 대중예술의 정의에 대한 소고 -존 피셔와 데이비드 노비츠의 비판을 중심으로

저자 : 김정현 ( Jeong Hyun Kim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45-7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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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미국의 분석미학자 노엘 캐롤(Noel Carroll)의 대중예술론에 나타난 대중예술의 정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목표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대중문화에 대한 많은 반대 이론이 개진되었고, 50년대를 지나면서 일군의 학자들은 대중문화도 순수예술처럼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캐롤은 후자의 흐름에 있는 학자로 흔히 대중문화로 부르는 현 문화현상을 보다 정확히 '대중예술'이라고 일컬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의하고자 한다. 그는 그의 정의를 대중예술에 대한 중립적인 정의라고 설명함으로써 대중문화를 저급한 문화현상으로 보려는 이론가들로부터 한 걸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이러한 캐롤의 중립적인 정의에 대해서도 많은 반론들이 쏟아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동안의 철학적 공방으로 이어졌다.


In this paper, I discuss the validity of Carroll's definition of mass art. According to Carroll, mass art can be defined with three necessary conditions jointly sufficient one. To discuss the validity of these conditions, I begin by showing critical counterarguments brought by John Fisher and David Novitz, and claim that they are either false or trivial. While doing this, the heart of Carroll's definition will come up to the surface and remove some misunderstandings entangled with his definition. And, eventually, this removal make us realize his real intention for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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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케이팝(K-Pop), Korean과 Pop Music의 기묘한 만남 -K-Pop의 한국 대중음악적 진정성에 대한 탐구

저자 : 이수완 ( Su Wan Lee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77-10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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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국을 의미하는 K와 미국적 대중음악을 의미하는 Pop 간의긴장이 케이팝 이해에 핵심이라고 보고, 케이팝에는 K에 상응할만한 뚜렷한 한국 음악적 정체성이 부재하다고 평가하며 케이팝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시도한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지칭하는 '가요'와 달리 해외에서 명명된 케이팝은 1990년대 이후의 문화산업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서구 음악 장르 특히 댄스음악을 의미한다. 이는 국내 대중음악산업이 위기에 대처하면서 음악산업의 해외진출을 모색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기존의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가요'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태동기에 한국의 지역적 시대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기능하였다. 가요의 주축을 이룬 트로트의 저급하고 통속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순 한국어 뽕끼를 케이팝이 버렸다는 것은 케이팝이 가요에서 선을 긋고 지역적 정체성을 탈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이팝의 가사와 사운드는 특정 지역과 무관한 개인적 정서를 주로 표현하고, 보편적 욕망에 충실하며 솔직한 태도, 소비 중심적인 생활방식을 드러낸다. 서구 대중음악 중 가장 상업적이며 인공적인 팝 음악은 음악적 세계화의 결정체로서 음악적 보편성을 추구하는데, 케이팝 역시 이 특성을 공유한다. 그런데 케이팝은 음악적 통속성을 더 복합적인 방식을 통해 강화시켰는데, 이는 트랜스 미디어 전략을 통해서 가능했다.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춤의 강조, 후크송은 케이팝을 청각예술이 아니라 시청각적 공연예술로 변화시켰고 한국 대중음악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케이팝의 아이돌 혹은 스타시스템은 대중문화 시장의 리스크에 대처하고 경제적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특화 발전하였다. 결과적으로 케이팝의 본질은 글로벌 뮤직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고 '케이'는 허구적 형용사이며 수출을 위한 브랜드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대중음악산업은 초국적 대중음악을 지향하면서 본질주의적 로컬정체성 보다는 문화세계주의 의식을 강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류의 문화적 정체성은 혼종적 다국적 문화가 되었다. 또한 케이팝은, 향유계층이나 민족성관련 진정성이란 가치를 버리고 숭배를 위한 상품이 된 21세기의 대중음악의 현 상태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고있다.


I approached K-Pop with a rather critical look. The tension between K which represents Korea and Pop which means American Popular music is essential in understanding K-Pop. The term “K-Pop” was named abroad and it means Idol-based -Western- dance- music. And the culture industry plays a leading role in its production. “Kayo” which is the Korean word for Korean Popular music had been considered as authentic Korean popular music, historically. However, Kayo is replaced by “K-Pop” which discards Korea's musical identity and historical context. This elimination is due to K-Pop's target of musical globalization. Instead, it took on contents of American popular music and gained musical universality. The proofs of musical universality are individual emotion's expression regardless of local character and dance oriented music by means of trans- media strategy. These traits maximize economic profit. K-Pop aims to become a transnational popular music and in this process 'K' transformed into a brand name for exporting goods. K- Pop became a fictitious concept. K-Pop shows that class, nationality, gender based authenticity is thrown away in 21th century popular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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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조(英祖)의 소설 애호와 그 의의

저자 : 김수영 ( Soo Young Kim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07-13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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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영조 연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소설 관련 기사를 통해 '소설 애호가'로서의 영조(英祖, 1694~1776)의 일면을 좀 더깊이있게 밝히고, 그 소설사적 의의를 탐구하였다. 이 논문에서 밝힌주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영조는 선행연구에서 밝혀진 것 외에도 『삼국지연의』, 『서유기』, 『동한연의』, 『서한연의』, 『평요전』 등의 소설을 읽었다. 특히 영조는 당시조선에서 '삼대기서'(三大奇書)로 일컬어진 『서유기』·『삼국지연의』·『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그중에서도 『삼국지연의』를 숙람했다. 종합컨대 영조는 『구운몽』과 같은 한국소설을 읽었으며, 연의소설(演義小說), 문언소설(文言小說), 신마소설(神魔小說), 인정소설(人情小說) 등다양한 장르에 속하는 중국소설 또한 두루 읽었다. 영조는 소설의 가치와 효용을 긍정하였다. 소설에 대한 영조의 긍정적 인식은 일찍이 연잉군(延잉君) 시절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국왕으로 재위한 50여 년 동안 영조는 줄곧 소설을 애호하였다. 영조는 몸이 아플 때나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소설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종종 소설의 내용을 정치적 사안과 연결해말했으며, 소설의 내용을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조의 소설 향유는 사적(私的) 차원에 그치지 않고 통치 행위와 관련해 공적 의미망을 획득하였던바, 이 점이 대단히 문제적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영조의 소설 애호는 당대 상층의 소설 향유문화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과 관련해 영조가 읽은 소설들이 사도세자의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에 수록된 소설 목록 및 윤덕희의 '소설경람자'(小說經覽者)에 수록된 소설 목록과 상당 부분 공통되어 주목을 요한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상층의 소설 향유 문제는 주로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대표되는 왕실 밖의 상층 사대부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경향이있다. 하지만 영조의 사례로 볼 때, 이제 국왕을 위시한 왕실의 소설향유 문제를 아울러 고려하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This paper searches King Yeongjo's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Journal of the Royal Secretariat) for novel-related articles to shed light on King Yeongjo (英祖, 1694~1776) as a novel mania and to explore its meaning in the history of Korean novels. The findings of this study are described below. King Yeongjo, in addition to the volumes revealed in previous studies, read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三國志演義), Journey to the West (西遊記), Romance of the Eastern Han (東漢演義), Romance of the Western Han (西漢演義), Pingyaozhuan (平妖傳) etc. In particular, King Yeongjo enjoyed reading Joseon``s three queer books, Journey to the West,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Water Margin (水滸傳), of which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read with particular care. In short, King Yeongjo read Guunmong (九雲夢) and other Korean novels, as well as romances (演義小說), literary novels (文言小說), supernatural novels (神魔小說), renqing novels (人情小說), and other Chinese novels in diverse genres. King Yeongjo acknowledged the value and utility of novels. Such a positive perception about novels seems to have been formed from the Prince Yeoningun (延잉君) period, and during his 50 year reign as a king, King Yeongjo continued to enjoy reading novels. When sick or unable to sleep far into the night, King Yeongjo read novels to calm his mind. Also, he associated the contents of novels with political agenda, and regarded them as reference for running the state. As such, King Yeongjo enjoyed reading novels not only for private tastes, but also for official purposes, making this point important. Based on such facts, King Yeongjo's love for novels presumably had considerable ripple effects on the upper-class culture of the time. In relation to this, it should be noted that the novels read by King Yeongjo have much in common with the novels listed in Prince Sado's (思悼世子) Chinese Novel's Hoemobon (中國小說繪模本) and the novels listed in Yun Deok-hui's (尹德熙) Soseol gyeongnamja (List of novels). Putting together the above, it can be argued that we should pay new attention to the fact that one of the major reasons for the popularity of novels in Joseon in the 18th century was because King Yeongjo, as a novel mania, had a tremendous cultural effect on Joseo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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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각화된 음성적 전통과 언문일치라는 물음 -『만세보』의 부속 국문 표기를 중심으로

저자 : 송민호 ( Min Ho Song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35-16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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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06년에 창간된 『만세보』가 채택했던 '부속 국문 표기'에 관한 것이다. 당시 천도교의 교주였던 손병희는 신문을 창간하면서 일본의 루비와 유사한 활자를 들여와 한자 옆에 한글로 주석을 달 수있도록 하였다. 이 국한문 병용 표기는 조선 이래로 한국의 어문 환경에 존재하고 있던 국문과 한문의 관계에 대한 양상을 시각화하여 보여주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문을 읽어내는 음성적 전통과 뜻을 새기는 번역적 전통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표기를 통해 한자에 맞는 주석음을 달아주더라도 결국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만세보』에는 주로 서구의 근대적 개념어에 대해서는 주석음을 다는 방식을 사용하였고, 국문독자구락부 같은 란을 통해 행위나 형용을 표현하는 어휘를 중심으로 한자에 한글로 주석음을 다는 방식이 아니라 주석뜻을 대응시키는 언어 표기적 실험을 하였다. 다만, 이러한 언어 표기적 실험은 일본의 훈독체의 영향을 받아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순국문체로 가는 과도기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선에서부터 확립되어 있던 음성적 전통과 언해적 전통이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만세보』의 표기 상의 문제는 이전 시대 『독립신문』의 주역들이 제기했던 한문과 국문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상기하도록 한다. 당시 서재필과 주시경은 각각 한자어를 음차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뜻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 논의의 핵심은 한자어에 대한 음차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 하는 것에 있었다. 서재필과 주시경은 공통적으로 음차된 한자어의 개념이 당시 인민의 언어 생활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를 통해 서구의 근대적 개념에 대한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만세보』가 도입한 부속 국문 표기는 바로 이 시대에 제기되었던 국문 담론과 계몽의 문제를 다시금 환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한문훈독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에서 결국 순국문체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제반의 조건을 상기시켰던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attached Korean transcription style adopted by the newspaper Manse-bo, which was published in 1906. At that time, Son Byong-hi (孫秉熙, 1861-1922), a religious sect leader of Cheondogyo annotated Hangul (Korean alphabet) beside Chinese characters when he founded the newspaper, and brought in a type called ``Ruby`` in Japan. The Korean and Chinese characters used in combination showed through visualization the relationship of Korean and Chinese characters as they co-existed in the language environment of Korea in the Joseon Dynasty. However, in Korea, the vocal tradition that reads Chinese characters and the translation tradition that inscribes the meaning are thoroughly separated. Although each Chinese character had a correct annotation through this orthography, people who did not know Chinese characters could not have any chance to understand their meaning. Therefore, the newspaper Manse-bo at the time mostly used a method that annotated voice on modern concept words borrowed from the west. It also attempted an experiment in language through columns such as Gungmundokjagurakbu (國文讀者俱樂部), in which Chinese characters were matched to Hangul not through annotation voice, but by matching the meaning of annotation focusing on the words expressing action or description. It should be noted that this language marking experiment was part of a transitional process which resulted, in the end, in a complete Korean style, and not a reconstitution that was influenced by the Japanese way of reading Chinese classics. The phonetic and descriptive (or analytic) tradition established from the Joseon period had made an impact. In addition, the way of writing adopted in the newspaper Manse-bo brings to mind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ese characters and Korean letters that was brought up by the driving forces of Dongnipsinmun (『독립신문』) in the previous period. At the time, Seo Jae-pil (徐載弼, 1864-1951) and Ju Si-gyeong (周時經, 1876-1914) had expressed their opinions about the matter of transliterating from Chinese. The major focus of this discussion was how far it would be possible to transliterate from Chinese letters. Seo Jae-pil and Ju Si-gyeong both considered how deeply the concept of transliterated Chinese was imbedded within the everyday language of the people. In conjunction with this, they emphasized the need for enlightenment of modern western ideas. The attached Korean transcription style introduced by Manse-bo contributed to provoking, once again, attention on the discourse on the Korean language and the matter of enlightenment, which had been brought forth in this period. Furthermore, it recalled the conditions that eventually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complete Korean style, since the tradition of reading the meaning of Chinese characters had not exist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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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국 인류기원신화의 "벌레" 화소 재고

저자 : 전금화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65-19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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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창세가」의 '벌레' 화소가 한국인류기원신화에서 의미하는 바를 다양한 민족의 인류기원신화와의 비교를 통해서 해석하고자 했다. '벌레' 화소는 한국, 중국, 게르만, 타이완, 오세아니아 등 여러 민족의 자료에서 모두 확인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창세가」에서처럼 벌레와 창조의 주체가 함께 등장하는 자료는 한, 중, 게르만 세 민족뿐이었다. 이들 자료 모두 거인신이 창세직능을 수행하지만 창조재료인 벌레를 얻는 과정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를 보였다. 미륵을 제외한 다른두 신격은 자신의 신체에서 벌레를 직접 화생창조(化生創造)하므로 거인신의 신체가 곧 벌레의 근원임을 보여주었다. 한국 「창세가」의 경우 벌레가 하늘에서 하강한 것으로 나와 그 최초의 근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 반고신화와의 비교를 통해같은 이름의 창세신격이라 할지라도 후대의 변이로 인해 창세신적 직능에서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미륵', '석가' 등 불교신격의 이름으로부터 미륵 전 단계에 반고와 같은 전지전능한 원시신격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론했다. 이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창세신화와 거인신화 및 '벌레'와 '거인신' 두 요소가 등장하는 다른 민족들의 자료를 더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벌레가 거인신의 신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경험한 자연의 법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체에서 벌레가 생기는 순환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창세가」에서 벌레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관과 상상력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한국만의 독자적인 특징으로 한국의 무의와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적 특징은 무속신화라는 자료의 특성상 무의를 차용하고, 불교, 유교 등 당대의 문화를 수용하여 '벌레'화소의 원형적 이미지 위에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덧입혀진 결과이다.


本論文旨在通過與其他多個民族的人類起源神話進行比較, 闡明「創世歌」中的 '蟲' 話素在韓國人類起源神話中的含義。'蟲' 話素在韓國、中國、日耳曼、台灣、大洋洲等중多民族的資料中都可以得到確認。然而, 像韓國「創世歌」中所記載的 '蟲' 與 '創造神'同時出現的資料只存在於韓、中、日耳曼三個民族之中。這些資料中都是巨人神履行創世的職能, 然而在獲取創造材料-- '蟲' 的過程中體現出壹些差異。除彌勒以外的其他兩位創世神都是從自己的身體裏直接變化出'蟲', 因而可以看出, 巨人神的身體卽爲 '蟲' 的來源。韓國的「創世歌」中, 只表明了 '蟲' 是從天而降的, 因而難以確定其來源。然而將其與中國的盤古神話做壹比較的話, 可以知道卽使是同名的創世神, 經過後世的變遷, 其創世職能也可能산生差異。此外, 通過 '彌勒'、'釋迦' 等帶有佛敎色彩的名字也可以推論出, 在此之前, 有可能曾存在過類似於盤古的全知全能型原始巨人神。爲了支持此論點, 文中還對韓國創世神話和巨人神話, 以及包含 '蟲' 和 '巨人神' 兩種要素的其他民族的資料進行了分析。總而言之, '蟲' 之所以源自巨人神的身體, 是和人類經歷的自然法則有關的, 是屍體中生出저蟲的循環過程在神話中的表現形式。但是, 韓國「創世歌」中 '蟲' 從天而降的內容應該看作是不同的世界觀和想象力的산物。這壹點, 可以看作是有別於其他民族的韓國獨有的特征, 從與韓國的巫儀相關的角度進行解釋。這種韓國獨有的特征是巫俗神話中特征性的巫儀, 融合了佛敎、儒敎等當代文化,'蟲' 話素在原始形態的基礎上增加了當代社會文化因素的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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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태평양전쟁기 일제의 소형용광로건설사업 추진과 귀결

저자 : 배석만 ( Suk Man Bae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97-23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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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태평양전쟁기 일제의 대표적 전시정책 중 하나였던 '소형용광로건설사업'의 전모를 밝히려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1942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계획의 입안과정, 사업의 전개과정, 그리고 그 실적과 한계를 분석하였다. 동 사업을 추진한 목적은 핵심군수물자인 철강의 증산, 그리고 나날이 심각해지는 운송난에 대한 대책이었다. 철광석 산지에 소규모 용광로를 건설하여 선철(銑鐵)을 생산, 증산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일본에 공급하여 철광석 수송의 부담을 경감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사업의 내용은 1943년 연내에 주로 20톤급 소형용광로 181기를 조선, 중국(화북, 화중), 몽고, 대만 등지의 철광석, 석탄 산지에 집중 건설, 완공하여, 50만 톤을 선철을 생산, 일본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건설과 경영 주체는 국책회사 일본제철이 중심이었고, 일본 재벌 및 현지제철소 및 탄광회사 등 제철 관련회사가 맡았다. 사업의 실적은 생산목표 대비 30% 미만으로 저조했다. 그나마 생산된 선철조차도 운송난으로 50% 정도만 일본에 공급되었다. 사업이 저조했던 이유는 용광로 조업상의 기술적 문제, 건설에 필요한 기자재의 공급난, 기술자, 숙련공의 인력 부족 등이 원인이었다. 지역별로는 조선의 경우 무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중국의 경우 담당 기업의 문제와 현지 사정에 의한 잦은 계획 변경이 부진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isclose the full account of the 'Small Blast Furnace Construction Project', which was one of the major wartime policies of the Japanese Empire during the Pacific War period. The study specifically analyzed the planning process, beginning from the second half of 1942, the unfolding of the project, and its results and limitations. The purpose of promoting the said project was to increase the production of the critical war supplies of steel, and to counteract the increasing seriousness of transportation difficulties. While the Japanese aimed at increasing production of pig iron by constructing small scale blast furnaces at iron ore production areas on the one hand, they also conceived of a plan to mitigate the burden of iron ore transportation by supplying it to Japan. The content of the project involved completing the concentrated construction of mainly 181 twenty-ton small blast furnaces at the iron ore and coal production areas in Joseon, China (Northern and Central China), Mongolia, and Taiwan within the year 1943, in order to produce 500 thousand tons of pig iron that was to be supplied to Japan. The main agent of construction and management was the state-run Japan Iron & Steel Co., Ltd., and steel manufacturing companies including Japanese zaibatsu, local steel mills and coal-mining companies were in charge. The results of the project were poor, with below 30% of the intended production goal, and only 50% of the pig iron produced was supplied to Japan. The reasons for the poor results included the technological problems of blast furnace operation, supply difficulties for tools and materials necessary for the construction, and the shortage of personnel including engineers and skilled workers. By region, the failure to resolve the problem of using anthracite as fuel resulted in poor performance in Joseon, while issues with the company in charge and the frequent change in local circumstances factored as the reason for poor performance i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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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식민치하 인도 "종교"대학의 의의와 한계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교와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를 중심으로

저자 : 구하원 ( Hawon Ku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233-27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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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시아의 칼리지와 대학교 등 서구식 고등교육기관은 정치·사상사의 주요 인물뿐 아니라 근대화의 근간(根幹)을 이룬 계층이 성장할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특히 1857년 영령 인도정부는 처음으로 인도에 대학교를 설립하면서 제휴제도를 통해 교육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도교육의 여러 폐해를 불러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도인들은 힌두교와 이슬람 두 종교를 설립이념으로 각각 삼았던 바나라스 힌두대학교와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교의 설립을 추구하였다. 두 대학교는 설립 시기와 과정이 유사하며 근대적 시민양성과 종교적 가치관 함양이라는 두 개의 이상을 아우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이 논문에서그 설립 과정과 이념을 비교·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식민권력이 근대지식을 생산하고 배분하는 기관들을 제도적으로 장악한 상황에서 두대학교가 협상과 적용, 도입과 저항의 장(場)으로써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면서, 두 대학교가 결국 언어와 종교로 인하여 이중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Institutions of western higher education in India, including colleges and universities, have provided the South Asian subcontinent with major figures in Indian political and social history, as well as a large class of educated persons who have acted as the main force of modernization. However, since 1857 British rule endeavored to control Indian education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colonial universities and the affiliation system, which remains a problematic issue even in present day India. Following such changes and challenges, two universities were established by Indians with religious education as a substantial part of their identity. Banaras Hindu University and Aligarh Muslim University share several similarities, such as their dates and processes of establishment, as well as their common goals in the education of a modern as well as religious citizen. In this paper I compare the methods in which the two universities brought together a religious identity and the idea of modern education, as well as the driving ideas and manners in which the universities were established. During a period in which colonial rule had fully assumed power over the institutions of producing and distributing modern knowledge, the two universities suggested a modernity differentiated with the West through a process of negotiation, adaptation, acknowledgement and resistance. However, this struggle to produce a modern “Indian” citizen with a religious identity was stymied due to several reasons, including the role of religion as well as language in their curriculum and education.

KCI등재

9도나투스 연극론의 16세기 전반 스페인 연극론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극작품들의 패러텍스트를 중심으로

저자 : 정동희 ( Dong Hee Chung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271-30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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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테렌티우스 작품에 대한 도나투스의 소논문이 16세기 전반스페인 연극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과 이영향의 수용을 통해 형성된 스페인 연극이론의 문학사적 특징을 다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16세기 중반 이후 문학이론 및 창작의틀을 제공하기 전까지 르네상스 초기 연극 이론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테렌티우스 작품들에 대한 주해자들의 서문과 주석들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미 15세기 중반부터 후안 데 메나, 이니고 로뻬스 데 멘도사와 같은 작가들은 테렌티우스를 최고의 희극작가로 간주하였으며 자신들의 작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서문, 헌사문등과 같은 패러텍스트들을 통해도나투스의 연극론이 자신들에게 미친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전반 스페인 연극작품들에서 보여지는 도나투스의 연극에 대한 개념은 매우 일관적이며 스페인 작가들은 테렌티우스 작품의 주해자들이 제시한 테렌티우스의 극작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도나투스의 연극론은 상연을 위한 극작품의 기술적 차원보다는 수사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에 스페인 극작가들은 작품 창작 과정에서 다양한 수사학적 실험을 위해 다른 문학 장르에서 대중들의 인기를 끌던 다양한 요소들을 자유롭게 도입한다. 이와 같은 역사 심리적 상황으로 인해 16세기 전반 스페인 연극 작품들은 도나투스의 연극 개념의 틀 속에서 매우 특별한 성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El proposito de este estudio consiste en revelar la enorme influencia del opusculo de Donato sobre el genero dramatico en la formacion de la preceptiva dramatica espanola de la primera mitad del siglo XVI y su caracteristica historico-literaria. Antes de la circulacion de la Poetica aristotelica, lo que lidero el desarrollo de la teoria dramatica fue la poetica terenciana, o mejor dicho, los breves escritos teoricos sobre el genero dramatico que son material liminar de las obras terencianas con comento. Desde mediados del siglo XV los autores espanoles como Juan de Mena y el Marques de Santillana mostraron la gran huella de la preceptiva donatiana en los paratextos de sus obras como prologo, preambulo y dedicatoria y consideraron a Terencio como el mejor comediografo. En la primera mitad del siglo XVI el concepto dramatico donatiano mostrado en las obras dramaticas es notablemente uniforme y no se desvia de la preceptiva terenciana sugerida por Donato y los otros comentaristas de las obras terencianas. Dado que la doctrina donatiana ponia enfasis en la retorica mas que las calidades que distinguen el metodo dramatico, los dramaturgos espanoles podian disfrutar de mayor flexibilidad y libertad en su proceso de creacion por lo cual podian introducir los elementos no teatrales prestados de otros generos coetaneos sin limite. Por esta situacion psiquico-historica, las obras dramaticas de la primera mitad del siglo XVI pudieron obtener las caracteristicas peculiares dentro del marco del concepto dramatico donatiano.

KCI등재

10레비나스의 타자윤리와 제3자의 정치철학

저자 : 박예은 ( Ye Eun Park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간행물 : 인문논총 73권 1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307-3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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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철학을 정초한 레비나스는 일반적으로 윤리철학자로 한정되어 연구되며 정치의 지평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진다. 그러나윤리와 정치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레비나스에게는 분명 정치적 기획이 있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정치적 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논문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가 정치적 지평으로 이행해 가는 것을 『전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에서의 제3자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레비나스는 그의 비대칭의 윤리를 보편화하기 위해 제3자의 개념을 사용한다. 하지만 위의 두 저서에서 제3자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3자를 설명하기에 제3자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또한 두 권에서 제3자의 개념이 과연일관성이 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두 권 모두에서 우리는 타자와의 대면의 관계인 윤리에서 제3자와의 관계인 정치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으려는 레비나스의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대칭의 타자윤리가 정치의 영역에서 사유될 때현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몇 가지 의혹들을 제3자의 개념을통해 방어하고자 한다.


Emmanuel Levinas, who began the philosophy of the Other, is often defined solely as an ethical philosopher and less valued in the realm of political philosophy. But ethics and politics should never be separated. Moreover, there was a clear political project in Levinas' thought. How was political thinking possible for Levinas? This paper will examine how his ethics of the Other had moved to the political field through the concept of the third party in Totality and Infinity and Otherwise than Being. Levinas uses the notion of the third party to universalize his ethics of asymmetry. However, there is a difficulty in understanding the third party clearly because the third party is not discussed with due weight and because these two books explicate the third party in different manner. Moreover, it is very doubtable whether the notion of the third party is ever consistently used in the two books. However, we can definitely find his attempt to bridge the gap between ethics, which is face-to-face relationship with the Other, and politics, which is the relationship with the third party. This essay goes beyond this and aims to fend off several suspicions that are related to reality via the notion of the third party when the asymmetric ethics of the Other is thought about in the realm of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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