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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Historical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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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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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권0호(2020년)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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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프리카 악숨 왕조의 기독교 수용과 로마제국-인도양의 무역로의 역할

저자 : 이은선 ( Lee Eun Seon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47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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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에서 4-6세기에 걸쳐 중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던 악숨 왕국은 4세기 중엽에 에자나 국왕이 기독교를 공인하여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에자나 국왕이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프루멘티우스였다. 프루멘티우스의 활동은 루피누스의 『교회사』 10권 9장과 10장에 기록되어 있다. 루피누스는 프루멘티우스가 먼 인도에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먼 인도가 악숨 왕국이라는 아타나시우스가 357년에 썼던 『변증 서』에 의해 확인된다. 그리고 프루멘티우스는 악숨 왕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먼저 그 나라에 들어와 있던 로마 상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찾아냈다. 이 기독교 상인들은 로마제국에서 홍해의 아일라와 베레니케 등의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무역로를 따라 들어왔을 것이다. 이 지역들에서 악숨의 동전과 도자기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상호간에 교류를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에자나 국왕이 기독교를 수용한 후에 동로마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의 삼위일체 신앙을 수용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360년에 그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에 근거해 보면 에자나 국왕은 삼위일체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그가 정통신앙을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회심을 보여주는 증거는 십자가가 새겨진 동전들과 거대한 석주가 사라지는 무덤 양식이다.


The kingdom of Axum, which formed an important political force in East Africa over the 4th and 6th centuries, became a Christian nation in the mid-4th century when King Ezana recognized Christianity. It was Fru mentius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King Ezana's acceptance of Chri stianity. The activities of Frumentius are recorded in Chapters 9 and 10 of Rufinus' Ecclesiastical History. Rufinus records that Frumentius procla imed the gospel to Farther India. It is confirmed by Athanasius Apology to Constanius that Farther India is the Aksum Kingdom. And Frumentius first found Christians among the Roman merchants who had entered the kingdom when he preached the gospel in the Kingdom of Aksum. These Christian merchants may have followed the trade routes developed by the Roman Empire, centered around ports such as Aila and Berenice in the Red Sea. Because coins and ceramics from Aksum were found in these regions, it can be seen that these regions had mutual exchanges.
After King Ezana accepted Christianity, Constantius II, the emperor of East Rome, forced him to accept the Arian trinity faith. However, based on the inscription on his work in 360, King Ezana clearly expressed his belief in the Trinity. We can see from this that he kept up the orthodox faith. Another evidences of his conversion are the tomb style in which a giant stone pillar disappears and the coins carved with a c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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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Status Quaestionis: 요한 크리소스톰 가난 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

저자 : 배정훈 ( Bae Junghun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48-87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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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4세기 동방교부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c.349-407 C.E.)의 부, 가난, 구제에 관한 국내외 주요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요한의 가난 연구(Chrysostomic Poverty Studies)가 현재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밝히고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제시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요한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고대 후기 가난 연구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국내외 학계에서 아직까지 이 주제에 대한 선행연구고찰(literature review)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중요하며 필요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구제에 관한 요한의 입장을 대략적으로 4가지 다른 관점, 신학적, 금욕주의적, 사회-문화적철, 학적 접근에서 분석하여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크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는 기존연구가 부족한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둘. 째 는 상충되는 입장들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셋. 째는 새로운 입장과 관점에서 이전의 연구들을 점검하고 통전적인 담론과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철학적 접근과 구제자 중심(givers-centered approach)의 연구가 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ritically analyze vital korean and inter national studies on wealth, poverty, and almsgiving in John Chrysostom (c.349-407 C.E.), an Eastern church father in the 4th century. This will demonstrate how Chrysostomic Poverty Studies has been accomplished and give several suggestions for further research. John's appealing voice to support the poor has drawn much attention from scholars in the area of late-antique poverty studies. Since, however, there has been no literatu re review formally published by scholars, it is necessary and valuable to systematically review them.
This paper approaches previous positions on John and almsgiving throu gh four different perspectives, that is theological, ascetic, socio-cultural, and philosophical analyses, proposing three points for future studies in general. First, we need to bridge research gaps to which previous scholar have not paid attention. Second, it is necessary to address the question of conflicting debate. Lastly, we need to explore this topic from new pers pectives and methodologies to critically understand previous studies, prov iding holistic and systematic explanation for John on poverty, wealth, and almsgiving. This will be attempted by a new direction of philosophical and givers-centered approaches that has been ign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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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나단 에드워즈의 성향 재해석: 창조의 필연성과 하나님 자유의 양립 가능성

저자 : 김성태 ( Kim Sungtae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8-111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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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성향을 재해석하여 완전하신 하나님의 필연적 창조와 자유로운 의지를 논증하려고 한다. 에드워즈는 개혁주의 청교도를 토대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신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대화하며 신학 작업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상현은 21세기의 분화된 현대신학적 필터로 에드워즈를 해석한다. 즉, 실체의 개념을 성향으로 재규정하고, 성향을 존재론으로 확장하고 심지어 하나님에게 적용한다. 즉, 성향적 존재론은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원칙혼동의 오류다. 반면, 에드워즈는 성향을 본래적 속성으로 이해하며, 성향과 의지를 하나의 인과관계론적 체계로 파악한다. 즉, 성향을 내재적 삼위일체(존 재론적 성향)와 경륜적 삼위일체(관계론적 성향)에 각기 구별하여 적용하며, 창조를 관계론적 성향과 연결된 의지적 행위로 규정한다. 이러한 도덕적 필연성은 완전한 하나님의 필연적 창조를 확보한다. 그뿐만 아니라 필연적 창조와 하나님의 자유가 양립 가능한 좌표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함을 지지한다.


This study reinterprets Jonathan Edwards's disposition to show that the necessity of creation and God's Freedom are compatible. Lee defines that Edwards's God is at once both actual and dispositional. This is an interpretation that Edwards would disagree with. Considering his theological foundation, historical background, main counterparts, and borrowed philosophy without modern theological filter, disposition is just an original attribute in God. Edwards understands God's disposition and will in a causal system. He applies “disposition to communicate” to the immanent Trinity and the economic Trinity in other ways. It supports a volitional creation connected to God's relational disposition. This moral necessity presents why perfect God creates the world, and shows how the necessity of creation and the freedom of God are compat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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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광주지역 최초 근대화 교육 기관 설립 연구 (도둠교회 설립 역사와 주간학교 운영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호욱 ( Kim Ho Wook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12-137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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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역에 최초로 주간학교를 운영하여 근대화 교육을 실시한 교회는 1900년에 시작된 도둠교회이다. 도둠교회는 현재 동곡중앙교회로 이름이 변경되어 있다. 광주지역 최초의 교회인 잉계교회는 년1897에 시작되었지만 학교를 운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잉계교회를 출석하면서 출발한 도둠교회는 자체적인 주간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주간학교는 점점 성장하여 1918년에 이르면 학교건물을 신축한다.
도둠교회가 운영한 주간학교는 그 동안 광주지역의 최초 근대화교육의 기관으로 알려져 있는 수피아여학교와 숭일남학교 보다 년5 이상 먼저 시작되었다. 도둠교회가 운영했던 주간학교는 1903년에 시작되었고, 수피아여학교와 숭일남학교는 1908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전남지역에 세운 최초의 근대화 교육기관인 목포의 정명여학교와 영흥남학교가 1903년에 시작되었으니, 도둠교회는 이 두 학교와 유사한 시기에 주간학교를 세워 자립 운영한 것이다.
도둠교회가 시작한 주간학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선교사들의 재정 후원 없이 한국인 교회가 차제 예산으로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광주지역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근대화 교육에 적용한 최초의 사례란 것이다.
본 논문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광주지역 근대화 교육에 최초로 적용한 도둠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그 역사를 연구한 작품이다. 필자는 도둠교회의 설립 역사 연구를 통하여 도둠교회가 한국 근대화에 일익을 감당했던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The first church in Gwangju to offer modernization education by running a day school was Todum Church, which began in 1900. Todum Church is now renamed Donggok Central Church. Enggey Church, the first church in Gwangju, started in 1897 but did not run a school. However, Todum Church, which started with attendance at Enggey Church, ran its own day school. This day school grew and built a new school building in 1918.
The day school run by Todum Church started more than five years earlier than the Speer Girls' School and Soongil men's School in Gwangju, which are known as the first modernization education institutions in Gwangju. The day school run by Todum Church started in 1903, and these two schools started in 1908. The Jeongmyeong Girls' School and Yeongheung Men's School in Mokpo, the first modernized educational institutions established by the Missionaries of PCUS in the Jeonnam region, began in 1903, and Todum Church established a day school at a time similar to these two schools.
The day school started by Todum Church has two characteristics. One is that the Korean church was run on a budget without the financial support of the missionaries. The other is that it was the first case in the Gwangju region to apply the Nebius Plan to modernization education.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history of how Todum Church was established, which first applied the Nebius Plan to modernization education in Gwangju. Through the study on the history of the establishment of Todum Church, I revealed that the Todum Church retains important historical values that have contributed to the moderniz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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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길선주(吉善宙) 목사의 민족애와 현재적 함의 고찰: 그의 '韓民族言約史觀'을 중심으로

저자 : 안수강 ( Ahn Su-kang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8-176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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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길선주 목사가 남긴 다양한 설교집들과 책자들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민족애와 현재적 함의에 대해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 연구를 위한 주요 자료들로서 『懈惰論』(1904), 『만사성취(萬事成就)』(1916), 『講臺寶鑑』(1926), 『吉善宙牧師說敎集』(1941), 『吉善宙牧師說敎』(1977) 등을 중심으로 살폈다.
길선주의 민족애의 관점에 나타난 의미심장한 개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민족애가 보여주는 여러 특징적 논점들로서 '內燃(신앙)→外延(민족애)'의 상관구도와 확산의 원리, 동족불애죄(同族不愛罪), 민족복음화와 운명공동체 의식, 내세와 순례자의 삶으로서의 현세의 연계성 등에 대해 논증했다.
둘째, 길선주의 설교집을 중심으로 '한민족언약사관'(韓民族言約史觀)을 다루었다. 그는 이 확고한 언약사관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압제자 일제를 물리치시고 한국을 독립시켜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셋째, 길선주의 무죄석방에 관한 사안(法庭卑怯)은 당시 일본의 형법제도, 한국독립에 관한 그의 일관된 신념, 신앙에 기초된 민족애 등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했다.


The goal of this study is to analyze Rev. Seon-Ju Gil's patriotism and its present implications through his various sermons and books. In order to reach this objective, I searched for his sermons and books as the valuable primary sources such as Hetaron(1904), Mansaseongchui(1916), Gangdaebogam(1926), Seon-Ju Gil's Sermons(1941), Seon-Ju Gil's Sermons(1977), and so on.
The significant concepts of Seon-Ju Gil's 'the view of patriotism'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I demonstrated the various distinctive thoughts of Gil's patriotism such as the reciprocal relations of 'internal combustion(faith)' & 'external extension(patriotism)' and the principle of diffusion, the crime of not loving the Korean people, the nation's Christianization reform and fate community consciousness, the link between the heavens and this world as a pilgrim's life, and so forth.
Second, I treated with Gil's 'historical view of covenant for the Korean people' through his sermons. Based on this firm faith, he was so confident that God would defeat the oppressor Japan and make Korea independent.
Third, I analyzed his acquittal(legal cowardice) from three perspectives
such as Japanese criminal justice system, his consistent belief in Korean
independence, his patriotism based on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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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초기 한국 장로교 대구·경북지방 조사의 역할과 활동

저자 : 김병희 ( Kim Byong Hee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77-222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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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대구·경북지방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는 한국인 조사(Helpers)들의 역할과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조사의 다양하고 헌신적인 사역은 대구·경북지방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지역교회사 연구에 있어서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1923년 경북노회에서 발간한 『경북교회사』(1894~1923)를 중심으로 대구·경북지방 조사의 역할과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초기 한국 교회가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였는지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날 침체 속에 있는 대구·경북지방 교회를 회복시키는데 작은 단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초기 대구·경북지방 선교활동에 있어서 조사들의 전도활동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들을 돌보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들의 직분은 교회법적으로 정식 직분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초기 교회의 과도기적 교직이었다.
조사를 세우는 주된 목표는 선교사의 관할 구역 내에 교회들을 돌보는 역할을 담당하기 위함이었다. 조사들은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한 달에 한 번씩 교회를 순행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했다. 그들은 설교뿐만 아니라 학습자를 교육시키고 세우는 일을 담당하였고 교회에 필요한 행정 전반에 대해 처리하고 소속 선교사와 노회에 보고하였다. 특히 사경회를 통한 그들의 교육활동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일차적 목적 외에 계몽운동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으며 지적·영적인 면에 모두 성장을 가져왔다. 이같이 조사는 목사의 모든 사역을 대신했으며, 그들의 활발한 전도활동은 초기 대구·경북지방 교회의 형성과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 또 조사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 내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확장주일학교를 운영하여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항일운동에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하면 투옥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반 민중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에도 가담하였다. 대구·경북지방 교회의 형성과정과 부흥에 있어서 조사들의 전도자로서의 사명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사역을 재조명하면서 전도자로서의 사명감에 투철한 지도자를 양성하고 발굴하는 일들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다.


The astonishing church growth over a century ago in the Daegu and Gyeongbuk area was largely made possible because of a special group called the Korean Helpers, due to their active involvement in Christian ministry. Despite the sacrificial and devoted ministry of the Korean Helpers in the region of Daegu and Gyeongbuk, which played a crucial role in national Korean church growth, not much historical research has been done regarding this local church group.
Therefore, this study will focus on “Gyeongbuk Church History (1894-1923)” which was published by the Gyeongbuk Presbytery in 1923 to research the Korean Helpers roles and activities to understand how the early Korean Church was managed without having any indigenously ordained Korean pastors. This study also intends to provide a positive contribution to the revival of the present-day church in Daegu and Gyeongbuk, which currently faces the challenge of stagnation. In early Daegu and Gyeongbuk missionary work, the Korean Helpers' evangelism efforts played the main driving force for church growth and revival. They not only served local churches, but they also took care of them where no ordained Korean pastors were available. According to Church Polity, it is hard to identify their position as official, but the Korean Helpers were essential in the transition of early Korean church history. The main purpose of electing Helpers was to serve and take care of churches in a designated missionary's jurisdiction on the behalf of the missionary. They visited local churches around once a month, leading worship and preaching as their missionary had instructed them. They trained believers who were preparing for their baptism, took care of all administrative work, and reported to their missionary and the presbytery they were under. Particularly, through a Bible class, they not only primarily preached the Gospel, but the Helpers also influenced consistently on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This brought about both spiritual and educational growth. As mentioned above, they served and worked as if they were ordained pastors. As a result, their active and devoted evangelism work became the cornerstone of the early Daegu and Gyeongbuk church's establishment and growth.
In addition, the Helpers established schools within the areas they were in charge over, and they operated extended Sunday Schools to fight illiteracy and deploy relevant applications from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They also participated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which was moving across the nation, for which they were jailed. This instituted important momentum for the Korean people to further change their view of Christianity. The Helpers also became a part of the Shrine Worship Rejection Movement to continuously abide by the true faith of Christianity.
The church establishment process and growth in Daegu and Gyeongbuk would not be possible without the Helpers devotion and commitment as evangelists. By reviewing their ministry, may this research once again inspire and cultivate future leaders who would also sacrificially devote themselves to their mission for the Gospel as the evangelistic Korean Helpers d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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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건(event)으로서의 교회: 칼 바르트의 교회론 연구

저자 : 이성호 ( Lee Sungho )

발행기관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간행물 : 역사신학 논총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3-25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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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 비해서 바르트의 교회론은 바르트 연구가들에 의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바르트의 교회론이야말로 바르트의 신학적 특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교회의 본질을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써 바르트는 교회를 성례전적 제도로 이해한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교회를 순전히 인간의 활동이라고 본 자유주의 신학과도 거리를 두었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바르트 신학에서 가장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실행주의(actualism)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활동하는 유기적 실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특히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규정된다. 교회는 성령이 모으시고, 세우시고, 보내실 때 사건으로 존재하게 된다. 교회를 이렇게 규정함으로써 바르트는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를 이해하였고 그 결과 그의 교회론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었다.


Compared to other areas, Barth's ecclesiology was not well evaluated by Barth scholars. Barth's ecclesiology, however, most clearly shows his theological characteristics. By understanding the essence of the church as an “event”, Barth distanced himself not only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which understood it as a sacramental institution, but also from the liberal theology, which viewed it as a purely human activity. Barth's ecclesiology was greatly influenced by actualism, which is one of most distinctive motif in his theology. For Barth, the church is not a fixed reality, but an organic reality that keeps on moving by God's continuing act. Therefore, the church is thoroughly defined by the work of God, especially the Holy Spirit. The church exists as an event when the Holy Spirit gathers, builds up, and sends it. By defining the church in this way, Barth thoroughly understood the church in relation to God, and as a result, his ecclesiology was completely dependent on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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